감정을 읽어주는 어른 동화

감정을 읽어주는 어른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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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읽어주는 어른 동화
김이율 지음
레몬북스

책소개

이 책의 주인공인 하루 씨는 다소 엉뚱하지만 우리가 던지는 삶의 질문 앞에서 간결한 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중함을 섬세한 감성과 간결한 문장으로 그려 나간다.

요약본 본문

감정을 읽어주는 어른 동화
김이율 지음
레몬북스 / 2019년 8월 / 216쪽 / 13,500원

나이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까
한가한 오후, 하루 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피자 박스를 접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힘없이 늘어진 어깨, 검은 뿔테 안경, 그리고 낡아빠진 서류가방을 든 중년의 남자였다. 비 맞은 우산 같은 남자는 하루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하루 씨, 나이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까요?”

하루 씨는 남자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숨통을 옭아매고 있던 남자의 넥타이를 살짝 풀어주었다. 그리고 정중히 말을 건넸다. “자, 밖을 보세요. 저기 신작로에서 오갈 데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은행잎 한 장, 저 은행잎 한 장이 바로 나이의 무게입니다.”
하루 씨의 말을 듣고 남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이의 무게가 고작 은행잎 한 장이라니. 나이의 무게가 저렇게 가볍단 말인가.”

하루 씨는 남자의 손을 잡아끌더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은행잎 한 장을 들더니 남자에게 내밀었다. “자, 받으세요.”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이걸 왜 주나? 나이가 이렇게 가볍다고 알려주기라도 할 셈인가?”
하루 씨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무게라는 것은 단지 가벼움과 무거움의 척도일 뿐이죠. 중요한 건 바로 은행잎의 빛깔이에요. 이 은행잎 한 장이 이렇게 아름다운 진노란 빛깔을 품어낼 수 있었던 건 거센 폭풍우와 매 시간마다 목숨을 조여 오는 갈증을 아무 말 없이 견디어냈기 때문이죠. 나이의 무게는 바로 무거운 은행잎 한 장이랍니다.”

57가지 삶의 폭
한 소녀가 공터에 있는 소나무 밑에서 그늘보다 더 어두운 표정으로 울고 있는 걸 하루 씨가 발견했다. 하루 씨는 스프링클러처럼 햇살을 뿜어내며 소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울고 있니?”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경계하듯 뒷걸음만 칠뿐이었다. 하루 씨는 용기 내어 한 걸음 더 다가가 되물었다. “우는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니? 너의 울음이 곧 나의 눈물이기도 하단다.”
소녀는 하루 씨의 따뜻한 마음을 읽었는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저에겐 희망이 없어요. 이번 중간고사 시험에서 57명 중 57등을 했거든요.” 소녀는 울음 섞인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엄마는 꼴찌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어요.”

하루 씨는 소녀 앞에 손바닥을 펴 보이며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입을 열었다. “삶의 가치는 순서가 아니라 다양성이란다. 손바닥과 손등 사이에는 제각기 크고 작은 손가락이 있잖니! ……넌 행복한 사람이란다. 인생의 밑그림을 칠할 수 있는 물감이 너에겐 무려 57가지 색이나 있지 않니?”

용서할 수 없다면 자신의 믿음을 먼저 의심해라
하루 씨의 오토바이에 열쇠가 없다는 것을 안 열쇠집 주인이 피자집에 찾아왔다. 열쇠집 주인은 오븐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하루 씨에게 은근 슬쩍 말을 건넸다. “여보게, 자네 열쇠 하나 맞추게. 잠시라도 경계하지 않으면 오토바이를 언제 도둑맞을지 모르는 일일세.”
하루 씨는 아무 말 없이 이마의 땀을 훔칠 뿐이었다.
열쇠집 주인은 하루 씨의 마음을 흔들 요량으로 계속 말했다. “자네 오토바이, 아니 자네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 오해는 말게! 열쇠를 팔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니네. 내 말을 잘 들어보게. 타인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그들에게 괜한 마음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

하루 씨는 오븐 안에서 갓 익은 피자를 꺼내 긴 칼로 잘랐다. 엿가락처럼 가늘게 늘어진 치즈가 그의 믿음을 감싸는 것 같았다. 하루 씨는 천사의 음성으로 낮게 말했다. “서로 굳은 믿음이 있다면 절대 훔칠 수 없죠. 설령 오토바이를 누군가에게 도둑맞는다 할지라도 내 믿음 안에서는 분명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믿음에 문제가 있어서 그럴 겁니다.”

부활은 어느 자그마한 선량한 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새천년 해돋이를 위해 마을 뒷동산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모두들 두 손을 모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바람은 모두 똑같았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영혼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또 한 번의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했다. …… 그때였다.

해가 희망으로 붉게 물든 이마를 막 내보일 때 갑자기 ‘펑’ 하는 큰 굉음과 함께 누군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하루 씨였다. 하루 씨의 부활이었다. 개기일식처럼 일순간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이내 어둠은 환한 빛으로 되살아났다. 하루 씨는 소나무 가지 끝에, 그 가느다란 가지 끝에 새의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온몸에 하늘빛을 잉태한 새 한 마리를 바라보며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다.

잠시 후, 감사 기도에 답변이라도 하듯 태양은 서서히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루 씨를 올려다보며 모두 다 가슴속에 품고 있던 소원 하나씩을 이룬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하루 씨의 날갯짓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던, 영혼의 파랑새였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마을 사람들은 깊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뒷동산 벤치에 앉아 있는 하루 씨에게 달려 왔다. 하루 씨는 마을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자신의 신분과 이 마을에 오게 된 자초지종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저는요. 사실은, 사실은…… 저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길 잃은 철새 떼가 애드벌룬에 구멍을 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떨어지게……. 저는 과거의 죄와 상처에 집착하는 미, 미, 미친…….”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하루 씨는 ‘희망’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루 씨는 벤치에 새색시마냥 얌전히 앉아 있는 마가레트 꽃잎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미소를 보였다. 마을 사람들의 미소를 보다 보니 어느새 하루 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전염되었다.

‘헤매지 마라. 네 안에 다 있을지어다.’ 하루 씨는 마음속의 언어를 중얼거렸다. ‘내 안에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를 그들의 가슴 속에 지필 거야.’ 하루 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스며들기로 다짐했다. 하루 씨는 이 마을에서 꽤 오래된 피자가게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피자도 만들고 배달도 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길 위에서 영혼의 물 한 잔을 얻어먹는 고마움
하루 씨는 재래시장을 돌며 양파, 양송이, 피망 그리고 등심불고기를 샀다. 그 짐들을 오토바이 허리춤에 차곡차곡 매달아 가게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모퉁이를 막 돌아가려는 순간, 배낭을 멘 학생 하나가 하루 씨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하루 씨는 공중전화 박스 옆에 잠시 멈춰 서서 학생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학생은 방긋 웃으며 하루 씨에게 말을 걸었다. “하루 아저씨, 여행을 떠나려고 해요. 그런데 걱정이 있어요.”
“걱정? 말해 봐. 내가 그 걱정을 함께 나눠 짊어지면 어떨까?”
“여행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긴 했지만 사실 정하지 못했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를요. 어떤 길로 가야 하죠?” 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루 씨에게 물었다.
“책에게 물어보렴.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 않니?”
“책 속에서 길을 잃어 자칫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시궁창에 빠지면 어떡하죠?” 학생은 장난기 있는 얼굴로 물었다.
“책을 덮으면 그만이지.” 하루 씨는 짧게 응수했다.
“그러나 책을 덮는다는 건 비겁하지 않나요? 여행이란 자신의 한계점을 찾아가는 고생이라고 예전에 하루 아저씨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아저씨, 어떤 길로 가야 하나요?” 학생은 한 걸음 내딛으며 다시 물었다.
“자네는 이미 길을 찾은 것 같네.” 하루 씨는 다시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저씨는 지금 어떤 길을 가는 중이죠?” 학생은 심오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루 씨는 고마움 가득한 표정으로 학생에게 목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길을 가지 않고 잠시 길 위에서 물을 마시고 있지. 목마른 내 영혼을 위해 꽤 괜찮은 동행자가 지금 막, 물 한 잔을 내게 건넸거든. 고마워.”
학생도 빙그레 웃으며 답례했다. “하루 아저씨, 저도 물 한잔 잘 마셨습니다.”

거미는 그가 짜놓은 거미줄에 걸리는 법이 없다
하루 씨는 피자집에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닫힌 창은 이미 창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 길 몰라 방황하던 잠자리 수십 마리가 창가로 날아 들어왔다. 피자집은 금세 부푼 빵처럼 풍요로워졌다. 하루 씨는 잠자리 꼬리를 잡고 가게 이곳저곳을 날아다녔다. 그때 한 사춘기 소녀가 황급히 피자집으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하루 씨에게 물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나요? 말씀해 주세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나요? 한순간이라도 그를 잊은 적이 없어요. 지금 말하는 이 순간조차도 그는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사람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는 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란다.”
“그런데 왜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죠? 사랑은 왜 늘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거죠? 그가 나를 먼저 좋아해주면 안 되나요?”

하루 씨는 검지로 천장 구석을 가리켰다. “저길 보거라. 꽁무니에서 거미줄을 내뿜는 거미가 보이지? 거미는 자기가 짜 놓은 그물에 제 스스로 걸리는 법이 없단다.”
소녀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그럼 지금 내 감정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함정이란 말인가요? 짝사랑은 잘못된 사랑인가요?”
“짝사랑은 일종의 끈끈이란다. 너의 눈물, 너의 상처, 너의 열정이지. 먼 훗날, 바람을 맞고 거미줄의 끈끈한 성질이 약해질 때 다시 거미줄을 뿜어낼 수 있는 거듭남의 원천이지. 그 원천이 바로 오늘의 그리움이야. 이 그리움을 잘 간직하고 잘 키워가렴. 그리고 너한테 바라는 게 하나 있단다. 그건 바로 너의 그리움이 너의 상처보다 더 강했으면 한단다.”

사람보다 숫자가 대우받는 세상
며칠 째 무더위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부채질을 하며 인상을 구겼다. 태양이 있기에 그늘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다들 태양의 출현에 불만을 표시했다. 너무나 태양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루 씨는 태양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하루 씨는 플라타너스 그림자를 따라 은행으로 향했다. “아가씨, 저는 피자 배달부입니다. 주인아저씨 심부름으로 돈을 찾으러 왔습니다.”
여직원은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인출 금액과 비밀번호와 도장을 주세요.”
하루 씨는 인출 명세표 앞에 서서 엄지로 볼펜을 빙빙 돌렸다. 그리고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여직원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아가씨, 주인아저씨 통장 비밀번호를 미처 챙겨오지 못했는데…….”
“절대 안 돼요. 비밀번호를 모르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어요.” 여직원은 딱 잘라 말했다.

사람보다 숫자가 대우받는 세상. 집의 평수, 결혼 혼수비용, 시험 성적, 자동차 배기량……. 하루 씨는 까닭 모를 답답함과 소외감을 안고 구겨진 인출 명세표처럼 초라하게 은행을 나왔다. 밖은 여전히 뜨거웠다.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에서 누군가가 오라고 손짓했다. “하루 씨, 뜨거우니까 이 그늘 안으로 들어오게. 여긴 지낼 만하네.”
“괜찮아요.” 하루 씨는 그냥 밖에 있었다. 우울했던 마음을 말리고 싶었던 거다.

죽음은 삶을 거꾸로 가는 것에 불과하다
페페로니 피자를 피자 통에 싣고 오토바이에 열쇠를 꽂는 순간, 지팡이에 삶을 올려놓은 노인 한 분이 길을 막고 서서 하루 씨에게 물었다. “하루 양반, ‘죽음’이란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며칠 밤을 곰곰이 생각해봐도 결론이 나지 않는구만.”
하루 씨는 손가락 끝으로 저 멀리 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산꼭대기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내일 한번 저 산에 오르세요. 그럼 그 답을 얻을 겁니다. 아 참, 등반하실 때에는 반드시 뒷걸음으로 오르세요. 아셨죠?”
하루 씨의 오토바이는 노인을 뒤로 한 채 커브를 돌아 사라졌다.

다음 날, 노인은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휘두르며 허둥지둥 하루 씨를 찾아왔다. “여보게, 하루 양반. 당신 말대로 저 산을 뒷걸음질로 올라갔었네. 그런데 그곳엔 ‘죽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네. 답은 도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건가? 산중턱인가, 꼭대기인가, 아니면 지구 밖이란 말인가? 괜히 자네 때문에 고생만 했지 뭔가!”
하루 씨는 노인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뒤로 걷기 시작했다.
“자네 지금 왜 그러나?”
“어르신, 죽음은 항상 우리 등 뒤에 있답니다. 등을 앞세우고 정상을 향해 오를 때 분명 어르신께선 산을 내려오는 듯한 착각을 했을 겁니다. …… 죽음은 가슴과 등짝을 들락거리는 연기와 같죠. 죽음은 단지, 삶을 거꾸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답니다.”

의심으로부터 생기는 믿음
하루 씨는 오토바이와 나란히 풀밭에 누워 한참 동안 위를 바라보았다. 매일 앞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웠다. ‘하늘아, 구름아, 새야. 미안해. 너희들은 늘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너희들을 잊고 지냈구나.’ 하루 씨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 한 모퉁이에 자신을 던졌다. 한참 하늘을 날고 있는데 길쭉한 얼굴을 가진 남학생이 하루 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하루 씨 옆에 젓가락처럼 나란히 누웠다. 남학생은 마치 하늘에게 묻듯 하루 씨에게 말했다. “믿음을 증명할 방법은 없을까요?”

하루 씨는 남학생의 질문에 상당히 난처해했다. 사실 하루 씨도 ‘믿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루 씨는 혼잣말처럼 작게 얘기했다. “믿음은 자기 자신만이 증명할 수 있지.”
그러자 남학생은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는 제 믿음이 의심스러울 때가 너무 많아요. 사실 고백하건데 기도할 때마다 저는 단 한 번이라도 믿음에 대해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저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인간이에요.”

하루 씨는 학생의 말을 듣고 괜히 눈물 한 방울이 하늘로 흐를 것만 같았다. 하루 씨의 눈물 안에는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숱한 고뇌들이 환청처럼 고여 있었다. “울지 말게. 하루, 울지 말게. 괴로워하지도 말게. 하루, 진정한 믿음은 의심으로부터 오는 거라네.”

진실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하루 씨의 오토바이 헬멧 안에 쪽지편지를 남기고 갔다. 하루 씨는 헬멧 안에서 쪽지편지를 꺼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무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났다. 하루 씨는 직감으로 이 쪽지를 남긴 주인공이 나무 뒤에 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 씨는 굳이 나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숨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으리라. 낙엽처럼 구겨진 쪽지편지에는 개미처럼 아주 작은 글씨가 혼란스럽게 적혀 있었다. “이 세상에 진실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아저씨는 그 진실을 만나보셨나요?”

하루 씨는 오토바이에 앉아 하늘에 군데군데 떠 있는 구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구름의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간질이기 시작했다. 하루 씨는 벌겋게 달아오른 구름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왜 침묵만 고집하느냐! 나에게 진실을 보여줘라!”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얼굴을 반쯤 내보이며 혼잣말로 말했다. ‘구름에게 무슨 진실이 있다고 하루 아저씨가 왜 저러시지?’
하루 씨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구름에게 소리쳤다. “침묵은 서운함이다. 왜 넌 나에게 보여주지 않니!”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은 하루 씨의 넋두리가 답답했는지 하루 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하루 씨, 당신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군요.”

하루 씨는 기다리고 있던 막차가 온 듯 반갑게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래요. 난 당신의 말대로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난 방금 진실이 가까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진실은 늘 우리 곁에 있죠. 그러나 쉽게 잡히지 않죠. 마치 꼽추의 혹처럼요. 그러나 분명한 진실은 그것을 숨기려는 자는 분명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당신을 진실은 알고 있겠죠.”

시간을 죽이는 시계 수리공
하루 씨는 시계점 앞에 오토바이를 비껴 세워 놓았다. 그리고 피자를 들고 시계점 안으로 들어갔다. 시계 수리공은 반갑게 하루 씨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하루 아저씨. 여기까지 오시는 데 정확히 27분 56초가 걸렸네요. 아니 57초 58초……. 어서 그 피자 박스를 내려놓으세요. 자꾸 시간이 흐르잖아요.”
시계 수리공이 재촉하는 바람에 하루 씨는 서둘러 피자 박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계 수리공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깝네요. 아저씨가 조금만 더 빨리 피자 박스를 내려놓았다면 27분대에 완료할 수 있었는데……. 자, 봐요. 지금 막 28분 5초가 넘었잖아요.” “미안하게 됐네. 좀 더 빨리 오려 했는데 주문이 밀려서 말이야.”
“괜찮아요. 저번에는 32분 17초가 걸렸는데 오늘은 무려 4분 12초나 빨리 온 걸요.”

하루 씨는 시간에 집착하는 시계 수리공의 말을 듣고 문득 탁 트인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자넨 역시 시계 수리공답게 시간 개념이 철저하군 그래. 언젠가는 나도 꼭 25분대를 깰 걸세. 하지만 그 기록이 뭐가 중요한가?”
시계 수리공은 핀셋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저는 늘 시간 앞에 충실하죠.”
“시간은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늘 옆에 있다네.”
“앞에 있든, 옆에 있든. 저는 시간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싶어요.”
“전쟁은 이미 자네의 승리네, 자네는 시간의 지배자이지 않는가. 왜 굳이 전쟁을 도발하려는 거지?”

시계 수리공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때마침 여기저기에서 울려대는 뻐꾸기 소리에 시계 수리공의 말이 묻히고 말았다. 뻐꾸기 소리가 멈추자마자, 하루 씨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시계 수리공에게 내밀며 말했다. “난 자네의 심정을 아네. 자네는 자네가 고친 시계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친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때론 부끄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일탈일세. 자, 내 손목시계를 받게. 그리고 한 30시간 정도만 내 시계를 멈춰 주게. 나도 잠시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다음에 내 시간과 동행하여 찾으러 옴세.”

베개를 함께 베는 게 아니라 각자의 베개를 바꿔 베는 것
은행잎 두 장이 리본처럼 팔짱을 끼고 바람의 등에서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거리에는 군데군데 은행잎이 두엄처럼 모여앉아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가을 거리는 현기증이 나도록 노랬다. 꽈배기처럼 팔짱을 낀 연인 한 쌍이 하루 씨에게 다가오더니 아가씨가 청첩장을 내밀며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하루 아저씨, 저희 이번 주말에 결혼해요. 오셔서 축하해 주실 거죠?”
“그야 물론이지.” 하루 씨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약간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아저씨는 여태 혼자 사시죠? 좀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아저씨는 인기가 많잖아요. …….”
하루 씨는 그저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하루 씨가 아무 말이 없자, 괜히 연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미안했다.

하루 씨는 빙그레 웃으며 연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결혼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데.”
“선물요? 혹시 생각해 놓은 선물이라도 있나요?”
“으음.” 하루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 좋겠다. 베개가 좋겠네.”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저씨. 베게는 긴 걸로 하나만 해주세요. 함께 베면 되니까요.”

하루 씨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하나가 아니라 난 두 개의 베개를 선물하고 싶네. 그 이유도 물론 내가 말해줘야겠지? …… 으음. 부부란 하나의 베개를 조금씩 나눠 베는 게 아니야. 각자의 베개를 서로 바꿔 베는 거지. 살다 보면 서로 다른 점이 많을 거야. 그래서 내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말고 서로의 베개를 바꿔 보는 거야. 그럼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거야. 참, 그리고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도 말해줄게. 난 아직 내 그림자와 맞바꿀 만한 태양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나이보다 더 깊은 무게는 없다
한 작가가 하루 씨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책을 하루 씨에게 건네며 힘없이 말했다. “하루 씨, 왜 내 작품은 무게가 없는 걸까? 책 표지가 하얗고 종이의 무게가 덜 나가서 그런 걸까? 제작을 잘못했나 봐! 책표지를 검은색으로 하고 무게가 좀 나가는 종이를 선택할 걸 그랬어.”
“뭔 소린가! 난 자네 작품을 읽으면서 내 영혼을 베었다네. 자네의 글은 결코 가볍지 않네.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참 무겁게 느껴지는 걸.”

작가는 얇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고맙네, 자네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걸. 하지만 나 또 하나의 걱정이 있네. 앞으로 쓸 작품들은 과연 어디서 그 깊이를 찾아야 할지 의문이네. 난 하루 자네가 부럽네. 자네는 몸이 뚱뚱하지 않지만 왠지 모를 무게감과 깊이가 느껴지거든.”

하루 씨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자, 보게. 내가 얼마나 가벼운가! 하지만 나도 오랫동안은 공중에서 머물 수가 없지. 금방 땅으로 떨어지고 말지. 이것이 나라네. 자네도 가볍게 보일까 걱정 말게. 자네도 뛰어보면 알 걸세. 금세 땅으로 떨어지지. 자네가 무겁기 때문이지. 그리고 작품을 쓸 때 무거워지려고, 깊어지려고 애쓰지 말게. 자네는 이미 충분하네. 자네 작품을 보면 이미 ‘나이’라는 깊이의 무게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네.”

자기 안에는 자기 자신이 늘 존재한다
하루 씨는 피자집 입구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그림자에게 말을 걸었다. “넌 왜 아무 말도 없니? 어떤 날은 긴 그리움으로, 어떤 날은 짧은 기다림으로 그리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존재조차 사라지고 마는 그림자야. 나는 너를 보면 늘 미안하단다. 나에 의해서만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말이야.”

하루 씨는 검은 선을 따라 그림자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구름 때문에 곧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나는 그림자를 보며 그림자가 지금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이내 빡빡머리 그림자 하나가 하루 씨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청년의 손에는 전쟁영화 CD가 쥐어져 있었다. 청년은 하루 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왜 군대가 존재하는 걸까요?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한다면 왜 인류는 군사력에 총력을 기울이느냐 말이에요.”

하루 씨는 청년의 말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길게 하품을 했다.
“말씀해 주세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나요? 아저씨는 호전주의자인가요?”
하루 씨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삶은 어쩌면 전쟁과도 같지. 아니, 크고 작은 전투 속에서 이미 우리는 삶의 포로가 되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순순히 백기를 들 순 없는 일일세. 그 이유는 적군이 있기 때문이지.”
“적군, 적군을 이기기 위해 군대가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청년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하루 씨는 희미해진 그림자를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개미는 진딧물을 안전한 곳까지 운반해주고, 그 대신 진딧물은 영양분이 있는 액체를 분해하여 개미에게 준다네. 어쩌면 전쟁이란 공생을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르는 일이지. 적군은 허상일 뿐이야. 자기 자신보다 더 커다란 적군이 또 어디 있겠나? 자신 안에는 늘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또 다른 자신이 있지. 그 적군을 이겨야 해.”

사랑이란 때론 잊은 척 저 멀리서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
하루 씨는 코끼리 코 같은 주전자를 힘껏 들어 올려 창틀에 서 있는 선인장에게 갖다 댔다. 그리고 선인장에게 말했다. “미안해. 네가 화가 나서 가시를 세우고 있구나. 물을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고. 그동안 너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구나.”
하루 씨는 왠지 선인장에게 미안했다. 이 세상에서 사랑 없이 존재하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인장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 씨는 선인장에게 물을 듬뿍 주었다. 그동안의 사랑을 만회하기 위해. 물이 벽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다. 선인장은 몸을 뒤척거리며 물방울을 털어냈다. 그것을 보면서 하루 씨는 일시적으로 지나친 사랑은 오히려 뿌리까지 썩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때로는 잊은 척 저 멀리서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 또한 사랑이고, 그리고 선인장이 가시를 세우는 것도 자기만의 사랑 표현 방법임을 알았다. 거리, 적당한 거리와 관심, 잊지 않는 관심. 이것들은 하루 씨가 선인장에게서 얻은 깨달음이다. 그가 창문을 열었을 때, 선인장은 가시 끝을 둥글게 만들었다. 하루 씨는 선인장을 쓰다듬어주며 가볍게 뽀뽀를 했다. 참으로 평화로운 오후였다.

마음과 마음을 연결 짓는 따뜻한 마음 한 조각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를 지나 하루 씨는 혼자 사는 꼬마의 집으로 향했다. 하루 씨는 돌담 사이에 핀 제비난초를 발견하곤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이 아니라 바로 자그마한 너, 제비난초였구나.”

꼬마의 집에 도착한 하루 씨는 문을 두드렸다. 문틈 사이로 “누구세요?” 하고 밝고 투명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루 씨는 등 뒤에 피자를 숨긴 채 꼬마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어? 하루 아저씨. 어떻게 여기…….” 꼬마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늘에 계신 엄마가 오전에 내게 전화를 걸어 예약주문을 했단다.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피자를 갖다 주라고 했어.”
하루 씨는 피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저씨도 참……. 고마워요.” 꼬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난 배달을 왔을 뿐이야. 참, 엄마가 돈도 이미 지불했다. 그러니 엄마한테 고마워해야지.”

꼬마는 하루 씨의 유머 섞인 따스함에 뒤질세라 사진 속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 주문전화 하지 마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괜히 하루 아저씨에게 미안하잖아요.” 꼬마가 두 손을 모아 감사기도를 하는 동안, 하루 씨와 돌담 옆에 핀 제비난초도 눈꺼풀을 지그시 닫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을 위해.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것
갓 아기 아빠가 된 젊은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가득 담고 하루 씨를 찾아왔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운가 봐요.” 젊은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하루 씨에게 들이대며 계속 말했다. “보세요. 아내가 진통을 하는 내내, 제 귀 위쪽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놓았지 뭡니까!”
하루 씨는 젊은 남자의 귀밑머리를 잡아 올렸다.
“아! 아파요!”
하루 씨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산모가 오페라를 하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남편의 머리를 잡아 뜯는 이유는 분만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에요. 이젠 한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으니 한 가정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젠 좀 더 열심히 살자. 좀 더 정신 차리자는 절규예요. 일종의 각오죠. 아내의 뜻을 알겠죠?”
젊은 남자는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사라졌다.

세상이 뿌옇게 보이는 이유는 유리창에 낀 먼지 때문이다
하루는 볼이 토실토실한 여학생이 하루 씨를 찾아왔다. 여학생은 하루 씨에게 말했다. “제 맘에 들지 않는 친구가 있어요. 왜 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걸까요?”
“사람이기 때문이지.” 하루 씨가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루 아저씨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럼 나도 사람인걸. 내 팔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람은 고작 한두 명에 불과하지.” 하루 씨는 팔을 벌리며 대답했다.
“언젠가 하루 아저씨는 모두를 사랑한다고 그랬잖아요. 이상해요. 하루 아저씨가 누구를 미워한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고작 한두 명이라니…….” 여학생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하루 씨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이 짧으니까. 대신 눈으로 사랑하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보기 전에 매일 아침 나는 유리창을 닦는단다. 유리창에 먼지가 끼면 세상 모든 것이 먼지로 보이거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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