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논어》

에코리브르 / 2020년 10월 / 792쪽 / 39,000원

공자와《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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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논어》

기무라 에이이치 지음

저자 소개

일본의 중국 철학자다.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중국철학사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노자의 새로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토대학 조교수를 거쳐 1949년부터 오사카대학 문학부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1967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를 지냈다. 오테몬가쿠인대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중국 철학의 탐구》, 《노자의 새로운 연구》, 《중국적 실재관의 연구에 대한 학문적 입장의 반성》, 《중국 민중의 사상과 문화》, 《법가 사상의 연구》 등이 있다.

책소개

이 책은 공자라는 인물과《논어》라는 저서를 대조해가며 연구한 연구서다. 저자는 공자라는 인물의 전기와《논어》라는 문헌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두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이 둘을 나란히 놓고 서로 대조해가면서 공자의 생애는 물론 《논어》라는 책의 형성사와《논어》각 편의 형성 과정을 문헌학적으로 고증한다.

요약본 본문

공자의 전기

공자의 가계ㆍ출생ㆍ유소년 시대

완성된 형태의 공자 전기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사기》의 〈공자세가〉다. 사마천은 공자를 매우 존경하여 열전(列傳)에 넣지 않고 특별히 세가(世家) 한 편을 만들었는데, 이 〈공자세가〉에 공자의 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다. 방숙은 백하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을 낳았다. 흘은 안씨(顔氏)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다”라는 한 구절이 겨우 공자의 가계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의 ‘야합’으로 공자가 태어났다는 것 이상은 말하고 있지 않다. 생각건대 자랑할 만한 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공자의 출생과 가정환경을 볼 차례다. 〈사기세가〉에 아주 세련되지 않은 기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흘(紇)은 안씨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니구(尼丘)에서 기도한 뒤 공자를 얻었다. 노양공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구(丘)라고 이름하였다. 자는 중니이고 성은 공씨다. 구가 태어난 후 숙량흘이 세상을 떠나 방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방산은 노나라 동부에 있어서 공자는 아버지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궁금해 했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숨겼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곧 오보의 거리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대개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소를 알려주어 그 후에야 비로소 방산에 합장했다.’

정리하면, 공자의 유소년 시기는 하급 사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고아로 성장했다는 의미에서 온갖 고난을 맛본 박복한 것이었다. 다행히 타고난 건강한 심신과 탁월한 소양으로 고학자습(苦學自習)을 통해 육예를 몸에 익히고, 점차 남 못지않은 성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가 살던 노나라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커다란 전환기였다. 따라서 머잖아 그가 성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이런 환경이 그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공자의 청소년 시기

중국 주대(周代)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 중 사(士)족은 농ㆍ공ㆍ상과 달리 공직에 나갈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공직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설령 말단 사무직이라 해도 역인의 역할을 분담하자면 최소한의 획일적인 교양은 필요했다. 주대에 사족은 취직하는데 필수 과목으로 육예, 즉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를 배워야 했다. 그래서 사족의 자제는 소년 시기에 가숙이나 향당의 학교에서 스승에게 육예를 배웠다. 그러나 공자의 유소년 시기를 고찰한다면, 어머니의 체면이 떳떳하지 못한 데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빈곤으로 도저히 스승이 있는 학교에 갈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머니로서는 공자가 어떻게 하든 육예를 익혀 남 못지않게 사족으로서 일신을 세워주기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을 것이고, 공자도 체력과 사려가 받쳐주는 성실한 노력가여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했을 것이다. 결국 공자는 육예의 학습을 고학자습으로 마쳤을 것이다. 《논어》〈자한〉편은 후년에 공자가 유년 시대를 회상한 말의 단편을 싣고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기를 …… “내 젊었을 적에 가난하고 천했기 때문에 비천한 일에 능함이 많으니, 군자는 능한 것이 많은가? 많지 않다.” 뇌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세상에 등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주를 익혔다’고 하셨다.”’ 이 두 공자의 말 중 전자는 “자신은 소년 시절에 가난하고 천했기에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하급직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자신은 스승 밑에서 배울 기회가 없어 취직 자격도 갖추지 못했기에 닥치는 대로 육예를 자력으로 배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서른 살에 자립하였다(三十而立)’는 공자의 말은 “서른 살에 이르러 이미 자타가 인정하는 독자적인 학자로 성장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공자가 추구한 학문이 사족의 이상인 교양 있는 위정자로서 군자의 학문인 점을 감안하면, 이 말은 한편 공자가 점차 정치가와 교양인으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자세가〉에 30세부터 40대에 걸쳐 나열되어 있는 다수의 사건을 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런 설화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미 공자가 대외적으로 이름난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사기세가〉에 의하면 42세 때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귀국한 것은 물론 정계가 정상화될 즈음 관직에 임명될 것을 고려해서였겠지만, 선군 소후(昭候)를 국외에서 객사하게 만들고 정공을 옹립한 삼가의 세력은 더욱더 강해져 있었다. 게다가 실력자 계평자 사후 대를 이은 계환자(季桓子)가 가신의 대립ㆍ횡포에 크게 고뇌할 정도로 정계는 하극상의 양상이 한층 더 심각해져 공자가 정상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관직에 임용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공자는 각 방면에서 관직을 권유받았고 공자 자신도 어떻게 해서든지 일찍 관직에 나아갔으면 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지만, 50세에 이르도록 결국 때가 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 기간인 7~8년 동안 생활의 문제도 있었으며 연구의 문제도 있어 개인 학교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 기간의 사정에 대해서는〈사기세가〉가 다음과 같이 가록하고 있다.

‘환자가 총애하는 신하 중에 중양회(仲梁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호는 중양회를 내쫓으려고 하였으나 공산불뉴(公山不狃)가 그것을 말렸다. 그해 가을, 중양회가 더욱 교만해지자 양호가 그를 체포했다. 환자가 노하자 양호는 환자마저 가두었는데, 더불어 맹약을 한 후에야 풀어주었다. 양호는 이로 인해서 더욱 계씨를 가볍게 여겼다. 계씨 또한 분수를 모르고 공실보다 지나치게 행동했기 때문에 가신이 국정을 잡은 꼴이 되었다. 이에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가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시ㆍ서ㆍ예ㆍ악을 편찬했다. 제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글을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자의 천하 유세

공자는 50대 후반부터 70세에 가까운 시기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다. 공자의 천하 유세에 대해서는 논할 바가 매우 많으나 그중 한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공자의 유세가 14년간에 걸쳐서 위→포→위→광→송→진→채→섭→진→위로 계속되었다고 보았지만, 그가 각지에서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는 전부 서술하지 않았다. 다만 위나라에 대해서는《논어》20장에 걸쳐 관련 기사가 있으므로 언급할 것 역시 매우 많다. 이것이 한 가지다.

공자가 망명ㆍ유세의 대상으로 어째서 위→진 코스를 택했는지도 한 가지 문제다. 생각건대 제나라로 가지 않은 것은 일찍이 유년에 제나라에서 유학하여 그곳 실정을 알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상 실현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시 천하 정세로 볼 때 북방 여러 나라의 중심인 진(晉)나라와 남방 여러 나라의 중심인 초나라에는 갈 의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다. 단, 초나라와는 진ㆍ채에서 접촉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 정나라에 관한 기사는《논어》4장이 있고 몇몇 설화도 전하지만, 이것도 송ㆍ진 사이에서 다소 접촉한 정도일 것이다. 이런 것들의 실정에 대해서도 아직 아무것도 논하지 않았다. 이것이 또 한 가지다.

셋째로, 공자의 천하 유세를 좇은 제자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논어》의 위나라에 관한 기사를 보면, 자로ㆍ염유ㆍ자공 세 사람은 처음부터 유세의 대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좌전》에 의하면 정공 15년 봄, 주(邾)의 은공이 노나라에 왔을 때, 자공은 친히 그 예를 살펴보았고 애공 7년 증(鄫)의 모임에는 계강자의 청에 의해 교섭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때는 일시적으로 공자의 허락을 받아 유세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유세의 의미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면, 어려움의 연속이었던 14년간의 유세는 공자 자신의 생애로 보나 그것이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으로 보나 또 훗날 전국제자(戰國諸子)의 유세의 근원을 이룬 점으로 보나 대단히 유의미하다. 당시 및 후대에 미친 다각적 영향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고찰하기로 하고, 지금은《논어》〈위정〉편의 다음 두 구에 주목하고 싶다. ‘나는 ……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곧 그 이치를 알고 따를 수 있었고, ……’

공자의 만년과 그 사업

만년의 공자: 《좌전》에 의하면 공자가 천하유력을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온 때는 예공 11년 겨울(기원전 484년, 공자 68~69세)이다. 그리고 공자가 죽은 것은《좌전》에 의하면 애공 16년(기원전 479년, 공자 73~74세) 4월 기축으로, 그 동안이라고 해봐야 만 4년 반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간의 업적은 그의 생애에 걸친 사업의 총결산이자 학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후세를 위해 실마리를 제시하고 계통을 이어준 진실로 위대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그 자신의 사회적 위치는 말하자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정치가로서 생명은 이미 끝났고 불우한 처지에서 만년을 지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판정은 그와 다르다.

그가 생애의 최종 단계에서 이룬 문화 사업과 교육 사업이야말로 세계사에 보기 드문 대성공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이상주의에 입각해 늘 전향적으로 진리 추구와 그 실현을 의도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해 보이는 만년이라 할지라도 결코 무사평정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신변에는 불행한 사건이 잇따라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건을 견뎌내고 나이가 들어 약해진 심신과 싸우면서 의연하게 인류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모조리 불태운 지조가 있다. 그리고 《논어》의 여러 장이 전하는 바처럼, 그 자신이 “일흔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규범에 벗어나지 않았다”(《논어》〈위정〉)고 술회한 것처럼, 진실로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투철한 성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이 시기다.

공자 학교: 공자 시대는 주나라 봉건제도가 붕괴되던 때로, 이윽고 전국시대로 들어가려고 하는 춘추시대 말기였다. 결국 봉건제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새로운 사태가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었다. 주의 봉건제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서민을 위한 학교는 없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사(士) 이상의 신분에 속하는 지배계급의 자제를 유사ㆍ대부ㆍ경ㆍ제후ㆍ천자 등의 적격자로 양성하는 학교는 주나라 봉건제도 하에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춘추 이래의 봉건제도의 붕괴로 당연히 이 학교 제도도 무너졌다. 그런데 공자는 전통적인 삼대의 문화정신을 존중하고 주봉건제도를 합리화하여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가 만년에는 교육에 집중하여 학교를 연 것이므로 당연히 그 학교는 고래로 이어온 학교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합리화한 모습을 취했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가르치는 데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고, 또 “[사람의]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에 의해서 서로 멀어진다”고도 하여, 사람은 누구라도 교육ㆍ학문에 의해 진보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편 “10호쯤 되는 조그마한 읍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어도,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는 자신의 체험에 의한 서술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직 상지와 하우만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여 선천적인 능력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신분의 귀천에 의해 천성을 차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군자이면서 인하지 못한 자는 있어도 소인으로서 인한 자는 아직 없다”는 것도 군자는 교육을 받은 계층이고 소인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공자의 집에는 각계각층의 사람이 출입했고 호향(互鄕)의 동자와 궐당(闕黨)의 동자라도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은 소외시키지 않고 가르침을 주었다. 공자는 “포 한 묶음 이상을 가지고 와 스승 뵙는 예를 차리기만 해도,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교육 목적은 선비답고 부끄럽지 않은 교양 있는 인격자로 군자를 길러내는 것이어서, 농ㆍ공ㆍ상민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이 아니었음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번지가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자, 선생님께서는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하셨다. 채전(菜田)을 가꾸는 것을 배우기를 청하자, “나는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 하셨다. 번지가 나가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소인(小人)이구나! 번수(樊須)여!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실정대로 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올 것이니, 어찌 농사짓는 것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선비를 군자로 양성하는 교육이기 때문에 전통에 따른다면 보통교육으로서 예악사어서수의 육예를 닦고 고등교육으로서 시서예악을 학습하게 된다. 실제로 공자 학교는 고등교육의 도량이었던 만큼 그 전제로서 육예의 교양을 중요시하면서 시서예악의 연구를 필수 과목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필수 과목이 그것만은 아니었다. 〈술이〉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네 가지로써 가르치셨으니, 문ㆍ행ㆍ충ㆍ신(文ㆍ行ㆍ忠ㆍ信)이었다.’

제자 가운데 누군가가 공문의 교과를 이 네 개로 전했던 것이리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하고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훈시한 바의, 교과 일반에 대한 안내다.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하고 ……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라는 말에 행(行), 충(忠), 신(信)이라는 3과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문(文)의 과일 것이다.

공자의 문화 사업과 학교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유가 후학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격변하는 사회ㆍ정치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자백가의 화려한 모양에 압도되어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도 여겨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족계급 일반에 의해 착실하게 지반을 다져가면서 장래 관료제 국가를 위한 관리 적격자 계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300년 뒤 한무제가 중앙집권적 대통일국가를 완성하여 관리가 대거 필요한 시기가 되었을 때 결국 그것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은 유학 말고는 없었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2000년간 중국의 관료 지배는 유학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논어》의 성립

《논어》20편의 구성

현존하는《논어》에는 500에 가까운 장이 20편에 담겨 있다. 주자의《집주(集注)》본에 의해, 전체의 편과 각 편의 장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학이〉제1(16장),〈위정〉제2(24장),〈팔일〉제3(26장),〈이인〉제4(26장),〈공야장〉제5(27장),〈옹야〉제6(28장),〈술이〉제7(37장),〈태백〉제8(21장),〈자한〉제9(30장),〈향당〉제10(1장 17절),〈선진〉제11(25장),〈안연〉제12(24장),〈자로〉제13장(30장),〈헌문〉제14(47장),〈위령공〉제15(41장),〈계씨〉제16(14장),〈양화〉제17(26장),〈미자〉제18(11장),〈자장〉제19(25장),〈요왈〉제20(3장).’ 이 중 몇 편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학이〉편의 성격과 구조:〈학이〉편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의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각종의 잡다한 학문의 일, 효제의 일, 군자의 일, 정치의 일 등을 조금씩 시점을 변경해 서술한 말이 어수선하게 모여 있고 장의 순서도 필연성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이 편을 반복해서 음미하여 읽다 보면 결국 거기에 약간의 특색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을 실마리 삼아 이 편의 성립 사정을 어느 정도 상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하에서 그것을 시도해 보자.

첫째로, 첫 장인 ①(이하 아라비아 숫자는 장 번호를 표시한다)과 마지막 장인   과의 사이에 어떤 종류의 조응이 존재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본문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⑯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①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와 ⑯의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같은 마음자세를 표현한 대응하는 말이고, 그것은 ①에 의하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즉 그것이 군자의 태도라는 것이다.

둘째로,〈학이〉편 가운데 공자 만년의 학교의 학규ㆍ훈시 등으로 봐도 타당한 말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공자가 만년에 교육에 헌신하고자 노나라에서 연 학교는 군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 사립학교였다. 말하자면 군자학의 도량이었다. 그런데 그 학교의 학칙으로 보더라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이〈학이〉편 ⑥이다. ‘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하고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제자”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제자 일반을 말한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⑧이다. 공자 학교의 목표가 군자 양성이고, 따라서 이 학교에서 인간 형성의 이상형이 군자였다면, 군자라는 인간상에 대해 마땅히 무언가 구체적인 지시가 있어야 할 것인데, ⑧의 말이 마침 이에 해당한다. ‘⑧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다. 충신을 주장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 삼으려 하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다운 것은 사람들로부터 경시되지 않도록 중후해야 한다. 고루해지지 않도록 학식을 지녀야 한다, 무슨 일에나 성실해야 한다, 시시한 사람과 교제하지 않아야 한다, 과오를 범하면 즉시 고칠 용기와 겸허함을 지녀야 한다, 이런 것들이다. 이것의 일부 혹은 이것과 유사한 어구는《논어》에 산재해 있는데, 공자의 교훈으로서 문하에 널리 전해진 말임에 틀림없다.

다음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은 ⑤다. ‘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승의 나라를 다스리되 일을 공경하고 믿게 하며 쓰기를 절도 있게 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하여야 한다.”’ 이것은 일견 학교의 학칙이나 훈시와 무관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생각건대 공자 학교의 목표는 군자 양성이었지만, 군자란 학문이나 인격이 민중보다 탁월한 사회의 엘리트로 당연히 위정자로서 국가를 지도해야 할 인물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뜻을 얻은 경우에는 마땅히 정치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정치의 원칙을 제대로 각성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정치는 군자의 본업이다. 그렇다면 군자의 인간상을 제시한 것과 더불어 군자의 본업인 정치의 대상을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당시 실정을 고찰해 보면 공문 학교가 배출한 군자가 다행히 뜻을 얻어 정치에 종사한다면, 제후의 나라, 즉 “천승지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천승의 나라를 다스리다”라는 요지의 이 공자의 말은 결국 공자 학교에서 훈시의 일부였다고 해도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을 공경하고 믿게 하며”는 ⑥의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및 ⑧의 “충신을 주장하며”와 상응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하여야 한다”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을 서술한 것으로 ⑥의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의 정신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이상 예로 든〈학이〉편 ⑤⑥⑧⑩ 등은 어느 것이나 공자 학교의 학칙 혹은 훈시로 적당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미 서술한 ①과 ⑯도 여기에 더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⑥부터 구성되는 공문 학규를 조직해 본다면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아닌지는 당분간은 제쳐두더라도 내용적으로는 결코 부적합하지 않다. 여기서 다시 한 걸음 내디뎌서 고찰해 보면 이 ⑥부터 구성된 학규 혹은 훈시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③ 및 ⑪도 버리기 어렵다. ‘③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 중에 인한 이가 적다.” ⑪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그(자식)의 뜻을 관찰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자식)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니, 3년 동안 아버지의 도(道, 행동)를 고치지 말아야 효라 이를 수 있다.”’

③은 “인(仁)”을 ⑪은 “효(孝)”를 설명하고 있지만, 인과 효는 공문의 가르침에서 당연히 중요한 덕목이어서 위의 예문 ⑥에서도 이것을 다루었다. 그러나 오로지 이것을 설명한 장이 있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다. 다만 인과 효라는 심원한 도덕에 적합하도록 살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이해하기 쉽게 단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말을 공자의 교훈 중에서 꼽는다면, 당연히 ③과 ⑪이 해당되지 않을까?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 중에 인한 이가 적다”는〈양화〉편에도 거듭 나오고 “3년 동안 아버지의 방식을 바꾸지 말아야 효라 이를 수 있다”는〈이인〉편에도 있으므로, 이는 어느 것이든 문하생에게 보급한 공자의 교훈일 것이다.

셋째로,〈학이〉편 16장 중에서 공자의 말이 반에 해당하는 8장을 점하고, 그 8장이 다 공자 학교의 학규 내지 훈시에 어울리는 문장으로서 위에 열거한 장과 일치하는 것에 주목해 보자. 넷째로,〈학이〉편 16장의 각 장 사이에 보이는 연관 관계는 진실로 복잡해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서로 인접하는 2~3장씩이 한 개의 통합된 연관을 이루고, 그 각각의 통합 방식은 그 2~3장 사이에 혹은 대응하거나 내용적으로 유사하다는 공통성을 포함하고 있다. 요컨대 각종의 여러 가지 연관 관계다. 따라서 그 여러 가지 연관 관계가 이 편 중에 서로 엉켜 있다. 그러나 전체 16장에 걸쳐 일관한 무언가의 연관성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고, 단지 ①과 ⑯의 조응이 전체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바를 요약하면 16장으로 이루어지는〈학이〉편의 구성은 ①과 ⑯이 대등하다는 것, 그 중간에 공자의 말인 6개 장이 산재하고, 처음과 끝 장을 합해서 8장의 공자의 말은 공자가 만년에 노나라에서 연 학교의 학칙 또는 훈시에 어울리는 내용의 말인 점, 나머지 8장은 모두 직제자의 언행으로 그것의 앞에 배치된 공자의 말의 각각을 설명하고 보충하는 듯한 내용이라는 점, 그리고 최후로 16장의 각 장 사이에 보이는 연관 관계는 인접하는 2~3장마다 서로 연관하는 한 개의 통합체를 이루고, 각 연관의 머리 장은 모두 공자의 말이다.

〈향당〉편의 성격과 구조:〈향당〉편이《논어》20편 중에서 특색 있는 편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선 다음 두 가지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 다른 여러 편은 공자의 말과 문답이 압도적으로 많고, 공자의 일상의 모습을 묘사한 장은 겨우〈술이〉편과〈자한〉편에 흩어져 보이지만, 이 편은 시종 그런 기사로 가득 차 있고, 공자의 말은 겨우 그것에 관련하여 그 서술 중에 두세 번 보일 뿐이다. ㉡ 주희 이전의 구설에서는 전편을 1장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주자는 문기(文氣)와 내용에 의해 분할하여 18장으로 하고 있다. 요컨대 장의 분할은 분명하지 않다.’ 장 분할 방법에 이론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은 상관하지 않고, 편의상 주자의 분장을 따라 논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18장을 4개의 장군으로 구별해 고찰하는 것이 가능한데, 이제 그것을 ⓐⓑⓒⓓ로 나누어 고찰해 보자.

ⓐ는 ①~⑤의 5장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공자께서 향당에 계실 때는 신실히 하여 말씀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셨다. 공자께서 종묘와 조정에 계실 때는 말씀을 잘하시되, 다만 삼가셨다. ②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씀하실 때는 강직하게 하시며, 상대부와 말씀하실 때는 은은하게 하셨다. 임금이계실 때는 축척하시고 여여(與與)하게 하셨다. ③ 임금이 불러 국빈을 접대하게 하시면 낯빛을 바꾸시며 발걸음을 조심하셨다. 함께 영접하는 동료에게 말을 전하며 읍하실 때 손을 좌우로 하셨는데, 옷의 앞뒤 자락이 가지런하셨다. 빨리 나가실 때는 새가 날개를 편 듯 하셨다. 손님이 물러가면, 반드시 복명하시기를 “손님이 돌아보지 않고 잘 갔습니다” 하셨다.

④ 공문(公門, 궁궐 문)에 들어가실 적에는, 몸을 굽히시어 용납하지 못하는 듯이 하셨다. 서 있을 때는 문 가운데에 서지 않으시고, 다니실 때는 문의 한계를 밟지 않으셨다. [임금이 계시던] 자리를 지나실 적에는 낯빛을 바꾸시고 발걸음을 조심하시며, 말씀을 부족한 듯이 하셨다. 옷자락을 잡고 당에 오르실 적에 몸을 굽히시며, 숨을 죽이시어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하셨다. 나오시어 한 층계를 내려서서는 낯빛을 펴서 화평하게 하시며, 층계를 다 내려와서는 빨리 걸으시되 새가 날개를 편 듯이 하시며, 자기 자리에 돌아와서는 축척하셨다. ⑤ 명규(命圭)를 잡으실 적에는 몸을 굽히시어 [그 무게를]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셨으며, [명규를 잡는 위치는] 위로는 서로 읍할 때의 위치와 같게 하시고 아래로는 물건을 줄때의 위치와 같게 하시며, ~중략~ 사사로이 만나 보실 때는 화평하게 하셨다.’

ⓑ는 ⑥~⑩의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5장은 분장에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⑥은 평상시의 의복 상태, ⑦은 재계 때의 의식주, ⑧은 평상시 음식의 모양, ⑨는 좌석의 일, ⑩은 향인과의 교제에서 음주와 의복의 일이다. 이것은 모두 조정에서 공인으로서의 자세는 아니고, 군자로서 일상생활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장군의 머리 장 ⑥의 문두에 “군자”라는 두 글자를 놓아 그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군자”는 이 경우에 공자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건대《논어》에는 군자의 일을 설명한 장이 많지만, “군자”라는 말에 공자를 포함하여 지시한 것도 드물게 있다.

ⓒ는 ⑪~⑰의 7장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⑪ 사람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안부를 물으실 적에는, 두 번 절하고 보내셨다. 계강자가 약을 보내오자, 공자께서 절하고 받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 약의 성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맛보지 못한다.” ⑫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선생님께서 퇴조하여 “사람이 상했느냐?”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⑬ 임금이 음식을 주시면 반드시 자리를 바루고 먼저 맛보시며, 임금이 날고기를 주시면 반드시 익혀서 조상께 올리시고, 임금이 살아 있는 것을 주시면 반드시 기르셨다. 임금을 모시고 밥을 먹을 적에 임금이 제(祭)하시면, 먼저 밥을 잡수셨다. 병이 있을 때에 임금이 문병 오시면, 머리를 동쪽으로 두시고, 조복을 몸에 걸치고 띠를 그 위에 걸쳐놓으셨다. 임금이 명하여 부르시면 수레에 멍에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서 가셨다.

⑭ 태묘에 들어가서는 일일이 물어보셨다. ⑮ 붕우가 죽어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빈소를 차리라” 하셨다. 붕우의 선물은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제사 지낸 고기가 아니면 절하지 않으셨다. ⑯ 잠잘 때는 죽은 사람처럼 하지 않으시며, 집에 거처하실 때는 모양을 내지 않으셨다. 상복 입은 사람을 보시면 비록 절친한 사이라도 반드시 낯빛을 바꾸셨으며, 면류관을 쓴 사람과 소경을 보시면 비록 사석이라도 반드시 예모를 갖추셨다. 상복 입은 사람을 만나시면 공경하시고 지도(地圖)와 호적(戶籍)을 짊어진 자에게 공경하셨다. 성찬을 받으시면 반드시 낯빛을 바꾸시고 일어나셨다. 빠른 우레와 맹렬한 바람이 일면 반드시 낯빛을 바꾸셨다. ⑰ 수레에 오르실 때는 반드시 바르게 서서 끈을 잡으셨다. 수레 안에서 돌아보지 않으시며, 말씀을 빨리 하지 않으시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으셨다.’

ⓓ는 편말의 1장 ⑱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⑱ 새는 사람의 나쁜 표정을 보면 날아서 빙빙 돌며 관찰한 다음에 내려앉는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산 교량의 암꿩이여, 때에 맞는구나! 때에 맞는구나!” 하셨다. 자로가 그 꿩을 잡아 올리니, 세 번 냄새를 맡고 일어나셨다.’ 생각건대 이 장은 말이 충분하지 못해 그 의미를 정확히 포착하기 어렵다. 주자는 이것에 주를 달아 ‘이 글의 위나 아래에 반드시 빠진 글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참고로 조씨와 유빙군의 설을 열거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빠진 글이 있으니, 억지로 주석을 할 수 없으며, 우선 들은 바를 기록하여 아는 사람을 기다리는 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기초하여 이 편의 구성과 성립을 고찰한다면, 일반적으로 다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는 공자가 공인으로서 조정에 있을 때 모습이지만, 공자가 관리로 일했던 것은 노나라에서 50세, 즉 노나라 정공 8년경에 중도재가 되었을 무렵부터 사공ㆍ대사구를 역임하여 정공 10년의 협곡의 회맹 이후는 하대부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고 13년(55~56세)에 사직하여 노나라를 떠날 때까지의 5~6년간이다. 그 외는 14년에 걸친 외유의 기간에 최초의 해와 최후의 해에 단기간 위나라 관리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의 머리 장 ①에는 향당에서의 공자와 대조하여 종묘ㆍ조정에서의 공자를 묘사하고 있으므로, ⓐ는 노나라에서의 사관 시대의 5~6년간의 모습일 것이다.

다음으로 ⓑ는 가정에서 공자의 의식주에 관련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관직에 나가 고급 관리가 된 이후의 군자의 일상생활 모습이다. 빈곤한 소년 시대의 생활은 당연히 아니고, 50세 이전 관리로 취직하기 전의 모습도 아닐 것이다. 고향을 떠나 외유한 천하유력 시대의 분주한 공자의 모습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는 노나라에서 관리로 재직했던 5~6년간 혹은 노년에 국로로서 노나라에서 보냈던 5년간의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 두 기사는《논어》의 다른 많은 장과 같이 공자를 “자”로 말하지 않고, ⓐ의 머리 장 ①의 문두에 “공자”, ⓑ의 머리 장 ⑥의 문두에 “군자”로 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들의 말하는 방식으로 볼 때 ⓐ와 ⓑ는 직제자로부터 전해진 전송은 아닐 것이다. 생각건대 노나라 향당이나 조정에도 공자의 제자는 아니지만, 공자를 잘 알고 가까이에서 공자를 접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에 틀림없고, 그런 사람들의 전문으로부터 나온 전송을 공문 후학이 정리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들 기록은 어느 것이나 노나라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음으로《논어》에 보이는 직제자가 전한 공자의 모습으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우선〈술이〉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④ 선생님께서 한가로이 계실 적에, 마음은 평화롭고도 즐거운 듯하시고, 얼굴은 환히 피어나셨다. ⑨ 선생님께서는 상을 당한 사람의 곁에서 음식을 드실 때에는 배부르도록 잡수신 적이 없었다. ⑫ 선생님께서 조심하신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 ⑰ 선생님께서는 정음을 사용하셨으니, 《시》와《서》를 읽고 예를 행하실 때 모두 정음을 사용하셨다. ⑳ 선생님께서는 괴이한 일, 힘센 사람의 일, 정도를 어지럽히는 일, 그리고 귀신에 관한 일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㉔ 선생님께서는 네 가지로써 가르치셨으니, 문ㆍ행ㆍ충ㆍ신이었다. ㉖ 선생님께서는 낚시질은 하시되 큰 그물질은 하지 않으시며, 주살질은 하시되 잠자는 새를 쏘아 잡지는 않으셨다. ㉛ 선생님께서는 다른 사람과노래할 때, 그 사람이 잘하면 반드시 다시 한 번 하게 하셨고, 그런 뒤에 화답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고, 공손하면서도 평안하셨다.’

또〈자한〉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선생님께서는 이와 명과 인을 말씀하셨다. ④ 선생님께서는 4가지의 마음이 없으셨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으셨으며. 기필하는 마음이 없으셨으며,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셨으며, 이기심이 없으셨다. ⑨ 선생님께서는 상복 입은 사람과 관복 입은 사람과 소경을 만났을 때는 그들이 비록 젊더라도 일어나시고, 그들 앞을 지나가게 되면 걸음을 빨리 하셨다. ⑯ 선생님께서 시냇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

이것은 어느 것이나〈향당〉편과 서로 참고할 만한 자료이긴 하나,〈향당〉편의 ⓐⓑ와 중복되는 장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향당〉편 ⓒ 중에서 ⑮의 일부는〈자한〉편 ⑨와 거의 일치하고, 단지 “자”가 없을 뿐이다. 또〈향당〉편 ⓒ ⑫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선생님께서 퇴조하여 ‘사람이 상했느냐?’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는〈자한〉편 ⑯ “선생님께서 시냇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와 서술 형식이 유사하다. ⓒ ⑭의 “태묘에 들어가서는 일일이 물어보셨다”는〈팔일〉편 ⑮의 문두의 서술과 일치하고, 단지 “자” 자가 없을 뿐이다. ⓒ의 내용은 모두 임관 이후 공자의 공인으로서의 태도 혹은 군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는 ⓐ 및 ⓑ의 보유로서 편집된 것으로 직제자가 전한 전송도 자료의 일부로 이용하고, “자” 자를 생략하여 ⓐⓑ에 서술의 형식을 맞춘 것일 테다. 따라서 ⓒ 역시 노나라에서의 후학의 보유적인 편집이리라. 그리고 ⓓ ⑧은 이〈향당〉편이 제나라에 전래된 후에 제나라에서 부가된 보유라고 짐작한다.

〈요왈〉편의 성격과 구조:〈요왈〉편은《논어》20편의 최종편으로, 앞의 편들과는 다른 특색이 있다. 첫째, 이 편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장의 수가 가장 적다.〈향당〉편은 전편을 한 장으로 보는 관점도 있지만, 적어도〈향당〉편과 이 편은 장의 수로 보아도 특이한 편이다. 둘째, 3장은 각자 다양한 성어, 성구를 모아 각각 한 개의 교훈으로 완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편의 여러 장과 문체가 다르다. 셋째, 한 편의 구성에 대한 의의다. 《한서》〈예문지〉에 의하면 한 초에 존재한《논어》의 텍스트인 고ㆍ제ㆍ노의 삼론 중《고론》은 21편으로, 두 개의〈자장〉편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볼 때, 한나라 초기에〈요왈〉편의 형태는 텍스트에 따라 다르다.

달리 말하면〈요왈〉편은 아직 정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삼론을 집성한 금본〈요왈〉편 3장을 보면, ①에서는 유교의 정도는 천명을 따르고, 요ㆍ순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그것의 절대적인 올바름이 천명과 전통에 의해 기초를 부여받고 있고, ②는 자장과 공자의 문답 형식으로 군자가 위정자에 어울리기 위한 조건을 상세하게 조직적으로 설명했다. ③은 군자 개인의 생활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따라서 이 한 편은 단순히 유문(遺文)을 주워 모아 우연히 편을 이룬 것은 아니고, 결국 자신을 수양하여 정치를 하는 도라는 유교의 본 뜻을 공자의 말을 중심으로 개설해 보려는 배려에 의한 편집일 것이다. 아울러《논어》의 최종 편으로서 결말 의식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논어》전체의 구조와 그것의 편집 과정에 대해서는 별도로 통합하여 고찰해야겠지만, 적어도 지금의《논어》는 제1편〈학이〉와 제20편〈요왈〉이 군자학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자연스럽게 결말짓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특히〈학이〉편의 머리 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와〈요왈〉편의 끝 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으며, 예를 알지 못하면 남 앞에 나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진실로 탁월한 수미다. 이것은 결국 우연이 아니라, 한나라 시대에 삼론 집성자의 사려가 더해진 배치일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동의하고 나서 이 편을 구성하는 3장에 대해 순차적으로 고찰해 보자.

우선 ①은 누구의 말인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상서》의 말을 서로 이어서 유교가 이상으로 하는 인정(仁政)의 전통을 자취를 더듬어 확인하고 있다. 이것을 고찰의 편의를 위해 ⓐ~ⓖ의 7절로 나누어 기록해 보자. ‘ⓐ 요임금이 말씀하셨다. “아! 너 순이여! 하늘의 역수가 그대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중도를 잡아 지켜라. 사해가 곤궁하면 천록(天祿)이 영원히 끊어지리라.” ⓑ 순임금도 이 말씀으로써 우임금에게 명하셨다. [당임금이] 말씀하셨다. “저 소자 이는 검은 희생을 써서 감히 거룩하신 상제께 아룁니다. 죄가 있는 사람을 제가 감히 용서하지 못하오며, 상제의 신하를 제가 감히 가리우지 못하여, 신하를 간택함은 상제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제 몸에 죄가 있음은 만방 때문이 아니며, 만방에 죄가 있음은 그 책임이 제 몸에 있습니다.”

ⓒ 주나라에 큰 베풂이 있으니, 선인이 이에 부하게 되었다. “비록 지극히 가까운 친척이 있으나 어진 사람만 같지 못하며, 백성들의 과실은 [책임이] 나 한 사람에게 있다.” ⓓ 권(權)과 양(量)을 삼가고, 법도를 살피며, 폐지된 관직을 다시 설치하시니, 사방의 정치가 제대로 거행되었다. ⓔ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주고, 끊어진 세대를 계승해 주고, 숨겨진 사람을 등용하시니, 천하의 민심이 귀의하였다. ⓕ 소중히 여겼던 것은 백성의 식생활과 상례와 제례였다. ⓖ 너그러우면 대중을 얻고, 신의가 있으면 백성들이 신임하고, 민첩하면 공적이 있고, 공정하면 기뻐한다.’

이 ⓐ~ⓖ 7절 중 ⓓⓔⓖ는 지문(地文)이고 ⓓ와 ⓔ는 대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는 이 ①장의 결말로 인정(仁政)을 행하고자 하는 군자가 취해야 할 태도를 서술한 것이지만,〈양화〉편 ⑥의 자장과 공자의 인에 대한 질문과 대답에서 공자의 말과 일부가 일치한다. ‘자장이 공자에게 인을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능히 다섯 가지를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인이 된다.” 자장이 가르쳐주시기를 청하니, 말씀하시기를 “공손함, 너그러움, 믿음, 민첩함, 은혜로움이니, 공손하면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너그러우면 대중을 얻게 되고, 신의가 있으면 남들이 신임하게 되고, 민첩하면 공적이 있게 되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남을 부릴 수 있게 된다” 하셨다.’ 그 외 ⓐⓑⓒⓕ의 4절은 모두《상서》의 말에 의지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②는 자장과 공자의 “종정”에 관한 문답이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많은 기성 격언을 모아 “오미(五美)”와 “사악(四惡)”으로 통합되어 전개된다. ‘자장이 공자께 묻기를 “어떠하여야 정사에 종사할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님께서 “오미를 높이고 사악을 물리치면 이 정사에 종사할 수 있다”고 대답하셨다. 자장이 “무엇을 오미라 합니까?” 하고 묻자, 선생님께서 “군자는 은혜롭되 허비하지 않으며, 수고롭게 하되 원망을 받지 않으며, 하고자 하면서도 탐하지 않으며, 태연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스러우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중략~ 자장이 “무엇을 사악이라 합니까?” 하고 묻자,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미리)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을 학(虐)이라 하고, 미리 경계하지 않고 성공을 책하는 것을 포(暴)라 하고, 명령을 태만히 하고 기일을 각박히 하는 것을 적(賊)이라 하고, 똑같이(猶之) 남에게 주면서도 출납할 때 인색하게 하는 것을 유시라고 한다.”’

③은 짧은 공자의 격언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으며, 예를 알지 못하면 남 앞에 나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중 “예를 알지 못하면 남 앞에 나설 수 없으며”는〈계씨〉편 ⑬에 백어가 진강에게 한 공자의 말로 나타나 있다. 생각건대 이 장도 공자의 격언 세 개를 모은 구성이다.〈계씨〉편의 진강ㆍ백어의 문답은 진강이 백어로부터 들은 특종이었을 테지만, 진강이 자공의 제자이고, 혹 제나라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제나라에 전해진 공자의 말을 이 장에 포함한 것이 된다. 또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의 지인(知人)은〈안연〉편의 ㉒의 번지가 인에 대해 묻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상 서술한 바를 통합해 보면,〈요왈〉편을 구성하는 3장은 제나라에서 유가 후학에 의한 소전 같고, 특히 ① 및 ②는 제나라에서 자장 후학의 구성으로 출현했을 거라고 짐작된다. 또 한나라 초기의《논어》에서《고론》의〈요왈〉편은 ①뿐이었고, ②③은〈종정〉편을 이루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제ㆍ노 2본에서는 제1ㆍ제2의 두 번째 단락에 이미 이 ③장이〈요왈〉편의 내용으로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3장 중에서 ①은《상서》에 의지하여 유학의 근원이 천명과 성왕의 전통에 기초한 것으로 토대를 부여받고, ②에서는 자장이 들었던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형식으로 “종정”의 요령이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그리고 ③에는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가 한데 모아져 알려지고 있다. 요컨대 유학의 본질이 개괄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므로, 일견 이질적인 3장인 것 같지만, 이것을 한 편으로 모은 금본의 구성은 이런 고려를 가미한 편집으로 생각된다.

텍스트 상자: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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