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길에서 나를 만나다

김상진, 길에서 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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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길에서 나를 만나다
김상진 지음
아마존북스

책소개

86세대인 저자는 대학졸업 후,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에서 다양한 국정경험을 하면서 쉼없이 달려왔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운명과도 같이 아무런 목적 없이 무작정 홀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요약본 본문

평화의 길, 제주 올레


하루, 40대 중반에 홀로 떠나는 자유여행

조급증을 앓은 나: 5월. 40대 중반의 나는 혼자 제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인 제주만 정하고 어떤 계획과 일정도 정하지 않았다. 비행기에 오르자 쌓였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리고 내가 왜 이 길을 떠났는지 생각해 보았다. 인생을 90년으로 보면 이제 절반을 살아온 지점이다. 남은 인생이 살아온 인생보다 갈수록 적어지는 시한부 인생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내 인생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탑승 1시간여 만에 제주에 도착했다.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점심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고민하기로 했다. 관광안내소에서 제주 안내지도를 얻고 눈에 보이는 한 평범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장어해장국을 시켰다. 안내지도를 펴놓고 여행계획을 세웠다. ‘첫날인 오늘은 배를 타고 우도에 가서 한 바퀴 둘러보자. 그리고 내일부턴 올레길 1코스에서 시작해 걷는 데까지 걸어보자’로 정했다. 이것이 나의 제주여행 계획 전부였다. 우도를 가려면 먼저 성산항으로 가야 했다.

투어버스 타고 우도 한 바퀴: 성산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우도 하우목동 선착장에 닿았다. 당초 우도에 들어올 때는 섬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래서 배 승차권도 편도로 구입해서 탑승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배에서 우르르 내리더니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각각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만 옆에 있던 버스에 올라탔다. 엉겁결에 대세에 휩쓸려 따라 탄 것이다. 이 버스는 말하자면 우도일주 투어버스였다. 투어버스를 타고 둘러본 우도는 아련한 추억을 남기진 않았다. 아무튼 왕복 탑승권을 구입하지 못한 나는 성산항으로 나가는 탑승권을 여객선 징수원에게 직접 현금으로 지불하고 배에 올랐다. 다음에 다시 와서 꼭 걸어서 우도일주를 하고 싶었다.


이틀, 올레를 걷다

법정과 함께 시작하다: 눈을 떠보니 새벽 4시 55분이었다. 오늘은 8시 무렵에 아침식사를 하고, 올레지기가 나오는 9시에 출발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출발하려면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다. 법정 스님의 법문집 『일기일회』를 꺼냈다. 올레길 여행을 출발하는 아침, 이번 여행의 종착지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법정 스님이 젊은 승려시절 수행하였던 순천 송광사의 산내암자 불일암이다. 즉 이번 여행의 여정은 서울을 출발해 제주 올레길을 거쳐 순천의 불일암에서 마무리되는 일정이다.

아침 9시가 되었다. 부리나케 1코스 올레안내소에 들렀다. 스탬프를 찍는 패스포트를 사고, 올레 안내지도를 1부 얻었다.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얼마를 걸어가 당도한 곳이 말미오름이다. 말미오름 입구에는 구제역 발생으로 폐쇄조치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다음 코스인 알오름으로 가기 위해 산길로 들어섰다. 이윽고 올레길 첫 오름인 ‘알오름’에 올랐다. 섬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가슴으로 바람을 안아보았다. 한라산에서 성산일출봉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이상을 걷다 보니 마침내 앞서 가는 올레꾼 2명을 만났다.

나에 대한 사색의 시작: 길을 걸으면서 현재의 나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40대 중반에 아내와 딸, 아들이 있는 4인 가족의 가장이다. 나에게 가족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행복감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단위이다. 또 한편으로는 나의 양어깨를 짓눌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한편 나는 청와대, 국가정보원, 중앙인사위원회, 국회 등 남들이 쉽게 가볼 수 없는 여러 기관에서 일을 해 본 매우 운이 좋은 놈이다. 나의 경제적 자산은 서울의 전셋집 하나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궁색하게 살지는 않았다. 남들이 하면서 사는 것은 나도 하면서 살고 있다. 이제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계속 정치판에 있으려면 내 정치를 해야 할 시기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미래를 계획할 시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통해 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성산포 해안도로를 걷고 있었다. 걷다 보니 ‘세계조가비박물관’을 만났고, 성산일출봉이 가까워졌다. 성산일출봉은 올레길 정규코스가 아니다. 입장료를 받는 곳은 올레 정규코스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과감히 입장료를 내고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기암절벽과 성산포 앞바다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올레길 1코스는 성산일출봉 옆의 광치기 해변이 종착지이다. 오늘 시작해서인지 얼마든지 더 걸을 수 있었다. 2코스를 더 걷기로 했다.

올레길 2코스는 평범한 시골길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마을이 있고, 숲이 나타나고, 굽이굽이 올레길이 이어질 뿐이었다. 오후 6시가 넘어서 대수산봉에 이르렀다. 어둑어둑해진데다가 적막한 산에 혼자 오르려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더구나 이 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앞을 향해 걷다가 뒤를 돌아본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사람은 역시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혼인지를 돌아 2코스 종착지인 은평 포구에 오니 날이 어두워졌다. 2코스를 끝낸 스탬프를 찍고 숙소를 찾았다. 2만 5,000원을 들여 일출이 보이는 바닷가에 자리 잡은 괜찮은 민박집에서 묵기로 했다.


사흘, 무리하면 탈이 난다

삶과 죽음의 조합: 올레 3코스는 22㎞나 된다. 8시 30분 출발했다. 3코스를 걷다 보니 올레길을 만든 개척자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올레길의 대부분은 바닷가에서 시작해 산으로 갔다가 다시 종착지인 바닷가로 돌아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바다가 지루해질 만하면 산길로 이어지고, 산이 지루해질 만하면 다시 바다 쪽으로 화살표가 안내를 하고 있었다. 제주도에는 또 다른 절묘한 조합이 있었다. 이른바 삶과 죽음의 조합이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많은 묘지가 밭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묘지가 있던 땅을 후에 개간했는지, 개간을 한 밭에 묘지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기할 정도로 밭 한가운데에 표지가 많았다. 그런데 밭과 묘지가 볼썽사납기보다는 너무나 잘 어우러져 있었다. 돌멩이로 고르게 쌓은 돌담이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성처럼 서 있는 제주 해비치 호텔 옆, 3코스 종착지인 표선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해변으로 뛰어들었다. 넓은 모래 백사장에는 젊은 남녀 몇 명이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사진을 찍어 달란다. 품앗이로 나도 한 장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스탬프를 찍고 벤치에 앉아 쉬면서 발바닥을 보니 물집이 많이 생겼다. 이제는 무릎도 아파왔다. 콘크리트 길로 인해 발과 무릎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 올레길이 오름 오를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시멘트길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해안도로는 아스팔트길이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도민에게 강력히 요구하고 싶어졌다. “제주의 흙을 밟고 걸으며 아름다운 제주를 보고 싶습니다. 콘크리트를 걷어내는 범도민운동을 벌여 주십시오.”

오후 4시가 되었다. 한두 시간 더 걷다가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다시 4코스를 출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4코스를 걷는 올레꾼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올레꾼 대부분은 1코스부터 차례로 걷지를 않고 멋진 구간이라고 알려진 코스부터 먼저 걷는다고 했다. 그러니 아름다운 풍광이 적은 2코스와 4코스에서는 올레꾼들을 쉽게 볼 수 없었다. 세상살이도 이렇게 약삭빨라야 잘 산다고 하는데, 나는 융통성 없이 1코스부터 걷고 있었다.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내가 바보 같아서인가? 종잡을 수 없이 헷갈릴 때가 많다.

그나마 올레길은 이정표가 있어 다행이다. 올레길은 화살표가 이끌고 조랑말이 안내를 한다. 매 구간마다 끝나는 지점이 있다. 개척자가 앞서서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인생길은 다르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까지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을 살고 있는 모두가 스스로 개척자가 되어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개척자의 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약삭빠르게 살기보다는 묵묵히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생이 더 멋져 보이지 않은가? 저녁 7시경 제주 샤인빌리조트를 지날 즈음, 숙소를 수소문했으나 부근에는 민박이 없단다. 별수 없이 거금 6,000원을 주고 택시를 불러 표선읍에 나가 여관방을 잡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온몸에서 오한이 나고 꼼짝할 수 없었다.


나흘, 힘들 때는 쉬어라

몸살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없이 곯아 떨어졌다. 깨어나 보니 아침 8시였다. 다행히 아내가 챙겨준 감기몸살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오한은 없어졌다. 몸을 씻고, 짐을 챙겨 아침밥을 먹으니 10시가 되었다. 버스를 타고 어제 중단했던 4코스 그 자리에 다시 오니 11시다.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한 30분을 절뚝거리며 걸었더니 조금 괜찮아졌다. 그동안 15㎞ 정도의 올레길 한 코스 전체를 걸으면서도 한 번도 쉬지 않았는데, 오늘은 불과 2~3㎞만 걸어도 쉬어야 했다. 어제와 그제의 과욕이 부른 결과였다. 오늘은 4코스의 남은 14㎞만 걷기로 다짐했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4코스 종점인 남원 포구에 도착했다. 근처 식당에 들러 회덮밥을 허겁지겁 먹고 나서 일찍이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닷새, 인생은 내리 사랑인가?

늦게 일어났다. 눈을 떠 보니 9시 30분이었다. 몸은 가벼웠고, 무릎도 괜찮았다. 11시 30분쯤 느지막이 출발하였다. 위미리 부근의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가 너무 예뻐서 양말을 벗고 잠시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한층 여유가 생겼다. 이제야 진짜 올레꾼이 된 것 같았다. 콧노래가 나왔다. 기암절벽이 보이는 아름다운 해안절경에 취해 버려 발걸음을 재촉할 수 없었다. 문득 옆을 보니 초가집 카페 같은 곳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위미 ‘내일학교’라는 대안학교였다.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매일 학원 숙제와 학교 숙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험에 쫓기고 있는 아이들,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분명 현재의 교육방법은 잘못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하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학원을 보내고, 더 공부를 시키려고 안달이고 닦달이다. 그렇다고 여기 내일학교의 아이들처럼 공교육을 포기하고 대안학교를 보낸다는 것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에 있는 딸과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해안가 바위들 사이로 하얗고 노란 부표들이 보였다. 노란 부표 밑에서 검정색 고무 옷을 입은 해녀들이 가끔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해녀 할머니들은 이렇게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삼, 멍게, 소라, 미역 등으로 생계를 꾸리고 자식들을 육지로 유학까지 보냈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젊은 날의 어머니는 늘 논과 밭에서 일을 하셨고, 그렇게 얻은 곡식으로 자식들을 키우셨다. 아들들이 다 성장하고 나니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10년을 투병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석촌호수를 한참 바라보다가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막둥아! 나는 막둥이가 제일 좋더라.” 오후 6시가 되어 5코스 종착지인 쇠소깍에 도착했다.


엿새, 올레와 휴머니즘

쇠소깍에서는 제주 전통 목선인 ‘테우’를 타보기로 했다. ‘테우’는 물에 절인 통나무를 이어 만든 뗏목처럼 생긴 조각배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테우’ 체험이 쉬는 날이란다. 나는 쇠소깍과 이별하고 6코스를 출발했다. 해안가를 얼마나 걸었을까. 제주도 3대 폭포 중 하나인 소정방폭포에 도착했다. 폭포 아래로 내려가 보니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도 신발을 벗고 폭포수에 발을 담갔다. 고개를 돌리면 폭포요, 앞을 보면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다.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같았다. 높은 오름에서 내려다보는 경관하고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구두미 포구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마치 높고 깊은 산의 능선을 타는 듯한 숲길이 길게 쭉 뻗어 있었다.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했다. 지리산의 능선을 제주 해안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산의 능선을 타는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런데 서귀포 시내로 향하는 방향에서 화살표를 잃어버렸다. 그래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걸어가다 보면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6코스의 종착지인 외돌개까지 이어지는 서귀포 앞 바다의 절경에 취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단장된 길이 자연스러움의 멋을 감소시키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었으나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 7코스를 향해 다시 발을 옮겼다. 7코스를 걷다 보니 수많은 나무들 중에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나무가 있었다. 이른바 ‘팔손이’였다. 팔손이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했을 때, 현기 형이 보내주어 나와도 인연이 있는 나무다. 아내에게 곧바로 전화를 했다. 산세베리아를 제외하고 다른 화초와 나무에 물을 주라고 부탁했다.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법환 포구에 도착했다.


이레, 전쟁과 평화

해안을 따라 걷다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절경이 이어졌지만 비가 내리자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등산용 판초우의를 뒤집어썼다. 내리는 비가 얼굴에 부딪쳐 땅만 보고 걸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보니 사방이 온통 현수막으로 덮여 있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강정 포구였다. 강정은 제주도에서 첨예한 민군 및 민민 갈등지역이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졌다.

오후 1시가 되었을 때, 8코스를 향해 출발하였다. 월평 포구에서 점심을 먹고 비가 그치길 기다려도 비는 계속 내렸다. 다시 길을 나섰다. 베릿내오름이다. 올레꾼은 나 혼자뿐이었다. 정상에 올랐으나 비바람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올랐던 길을 돌아서 내려왔다. 거의 내려왔을 즈음, 나무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왼쪽 팔을 다쳤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팔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피와 땀이 범벅되어 얼마를 걸었을까? 하늘이 서서히 개면서 드넓은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중문해수욕장이었다. 아무도 없는 백사장을 홀로 걸었다. 오후 6시가 되어 8코스 종착지인 대평 포구에 도착했다.


여드레, 비와 휴식 / 아흐레, 안개 낀 올레

아침부터 장대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제주도에 호우 경보가 내려졌다. 오늘은 미련 없이 걷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9시경 출발을 했다. 비가 그치자 풀냄새가 상큼했다. 9코스는 바다로 연결되지 않고 산으로만 이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산속을 걷고 있으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유채꽃과 무꽃이 이채롭다. 하지만 안개가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었다. 12시경 10코스를 출발했다. 산방산과 송악산을 끼고 돌아가는 바닷가와 여유로운 해변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해안코스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부터 안개가 완전히 앞을 가렸다. 오후 5시경 10코스 종착지인 모슬포항에 도착하여 여관에 짐을 풀었다.


열흘, 삶과 죽음의 공존

올레 안내서를 보면 11코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이라고 나와 있다. 근대사와 현대사가 같이 녹아있는 길이라고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공군병력을 집결시켰던 야욕의 알뜨르 비행장, 4ㆍ3사건 이후 최대의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던 섯알오름, 천주교 박해를 받았던 정난주 마리아 묘소 등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한편 11코스는 21.5㎞나 되는 장거리 코스였다. 지루한 밭길과 도로를 걷다가 지치기도 했다. 너무 힘들다 싶었는데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숲 못지않은 곶자왈 숲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곶자왈은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유일 비밀의 숲이란다. ‘정말 이런 숲도 있구나’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11코스의 종착지는 폐교를 개조해 만든 무릉 2리의 ‘자연생태문화체험골’인데, 오늘 이곳에서 숙박을 했다.


열하루, 개고생

이번 올레길은 스탬프를 찍는 마지막 코스인 12코스에서 정리하기로 어제저녁에 마음을 먹었다. 따라서 오늘이 이번 올레길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 발걸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지루한 마을길을 걸으면서도 복잡한 생각보다는 그냥 자연을 느끼려고 하였다. 그동안 열흘 가까이 길을 걸으면서 마음속의 많은 짐을 덜어냈다. 기상청 관측소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니 12코스의 묘미가 나타났다. 제주도에 딸린 무인도 중에 가장 큰 섬 차귀도가 한눈에 보였다. 저멀리 용수 포구 너머로는 풍력발전기들이 그림처럼 널려 있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12코스 종착지인 용수 포구에서 패스포트를 점검받고 완주했다는 스티커 한 장을 받아 힘주어 붙였다. 아쉬움과 감격이 교차했다.


열이틀, 아! 한라산

서귀포의 여관에서 숙박을 한 후 태어나 처음으로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30여 분이 지나니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진달래 대피소에 오르자 사람들이 비를 피해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서 배낭을 멘 채로 김밥을 먹었다. 한참 오찬을 즐기고 있을 때, 안내방송이 나왔다. 오후 1시를 기해 한라산에 호우주의보가 내려 백록담에 오르는 입산을 통제하겠단다. 그런데 일부 등산객이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 막 뛰쳐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지체 없이 뛰어나가 앞선 선구자들을 뒤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깊은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백록담에 올랐다. 거친 비바람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빨리 하산하라는 안내방송이 계속 나왔다. 정상에 올랐다는 증명사진 한 장 누르고, 바로 하산했다. 이후 택시를 잡아타고 제주항으로 내달려 목포행 여객선을 탔다.


열사흘, 자신의 등뼈 외에는 아무것에도 기대지 말라

목포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번 여행의 종착지인 순천 송광사에 도착했다. 여관에 배낭을 내려놓고 바로 불일암을 찾아 나섰다. 이슬비가 내리는 일요일 늦은 오후, 상념에 잠기어 암자를 돌아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비가 오는데 암자에 올라 오셨군요. 우산을 드리겠습니다.” 불일암의 스님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불일암 앞뜰을 바라보며 스님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었다. 스님은 법정 스님의 손상좌라고 했다. 나는 법호도 묻지 않았다. 스님도 나에게 어떻게 왔느냐,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등등 세상 사람들이 만났을 때 묻는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스님은 무언가를 찾더니 나에게 법정 스님의 저서 『인연 이야기』라는 책을 선물로 주었다. 나의 인생 전환기에 만난 법정 스님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뒤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게 하였다. 이제 14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서울 집으로 간다. 서울에 도착하면 현실의 문제들이 즐비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유 있고 담대하게 맞이하고 싶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는 중심 잡힌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여신의 선물, 안나푸르나


하루, 다시 법정과 함께 떠나는 네팔행

비행기에 올라 모차르트의 실내악을 귀에 꽂았다. 히말라야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오던 터였다. 친구 문선이와도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고, 아들 병현이와도 5학년이 되면 같이 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친구 성민이와 같이 가게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이번 여행은 아주 쉽게 결정을 하였다. 안나푸르나를 가자는 나의 제안에 성민이는 한순간도 주저 없이 “OK, 좋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여행사에 예약을 하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법정 스님의 책을 꺼냈다. 산문집 『맑고 향기롭게』다. 스님의 책을 읽으니 정말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마침내 7시간의 비행 끝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나빈’, 나이는 38살, 가이드 경력 9년,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안나푸르나 근접도시인 포카라로 이동하기 위해 30여 명이 타는 소형 국내선 항공기를 탔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전경이 매우 이채로웠다. 온통 산악지형에 드문드문 집들이 하나의 점처럼 박혀 있었다. 포카라에 도착한 후 최고급이라는 풀바라 리조트에 여장을 풀었다.


이틀, 비와 거머리: 담푸스~란드렁

5시 30분, 모닝콜에 눈을 떴다. 신기하게도 밤새 내렸던 비는 그쳐 있었다. 창문을 여니 싱그러운 바람이 몰려왔다. 이후 우리의 짐을 날라줄 포터 ‘강가’를 만났다. 나이는 22살, 키와 몸집은 나보다 작았지만 힘은 매우 강해 보이는 친구였다. 포카라에서 담푸스까지는 일본제 지프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담푸스는 지리산과 비교한다면 노고단쯤으로 능선을 타고 트레킹을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나섰다. 등산로 길목에는 소들이 길을 장악하고 있었다. 힌두교에서는 소를 신성시하기 때문에 항상 소들이 사람보다 우선이다. 얼마 걷지 않아 거머리가 가이드 나빈의 발을 빨고 있었다. 조심을 하였지만 성민이는 허리에 거머리가 붙어 피를 흘리고 있었고, 나의 발목에 몇 마리의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2,100m 데우랄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후 걷다가 톨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걷기를 중단하고 생강차를 주문해 마셨다.

오후 4시 30분이 되어, 숙소가 있는 란드렁에 도착했다. 란드렁은 안나푸르나 5대 뷰포인트 중에 하나인 곳이다. 그런데 오늘은 뷰포인트의 가치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심술궂은 안개를 하느님이 치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니 다시 어젯밤처럼 주룩주룩 장대비가 내렸다. 어떻게 사는 삶이 바람직한 삶인지? 오랫동안 혼자 빗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사흘, 신은 어디에 있는가: 란드렁~시누와

돌계단을 내려와 계곡에 도착하니 잘 다듬어진 긴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른바 뉴브릿지, 발걸음을 한 발짝씩 옮길 때마다 다리는 출렁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포터인 강가는 무거운 짐을 머리로 지탱하며 무게중심을 잘도 잡고 건너고 있었다. 가히 예술적이라 할 만했다. 얼마 가지 않아 붉은색 토사가 쌓여 트레킹 길이 없어져버렸다. 난감한 상황에서 가이드 나빈이 선뜻 자기에게 업히라고 했다. 나는 상대적으로 가벼워서 다행이나 성민이는 상당히 낑낑대는 모습이다.

지누단다에서 촘롱으로 넘어가는 길은 완전히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깔딱 고개였다. 뱃속에 남은 공기 찌꺼기 하나 없을 정도로 숨을 할딱거렸다. 산 중턱에서 잠시 휴식을 위해 허리를 펴니 아주머니 한 분이 반겨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 옆에는 다리가 굳어 버려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앉은뱅이) 아들이 앉아 있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들은 나의 손을 덥석 잡더니 친구라도 만난 듯이 반갑다고 악수를 했다. 옆에 있는 성경책을 나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한손에는 성경책을, 다른 한손에는 낡은 라디오를 들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행복한 모습이었다. 예수님이 이토록 위대해 보인 적은 없었다.

촘롱은 안나푸르나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여기도 안나푸르나 4대 뷰포인트 중 한 곳이다. 멀리 보이는 계단식 다랑이논들과 그 사이에 절묘하게 박혀 있는 집들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가이드 나빈은 촘롱을 내려가는 계단은 모두 2,727개라고 했다. 그런데 셀 때마다 숫자가 달라져서 정확히 몇 개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2~3살 정도 보이는 동생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니 서울에 있는 딸과 아들이 생각났다. 지금까지 살면서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나는 서슴지 않고 아들과 딸과 함께 즐겁게 지낼 때라고 말한다. 부모님이 그랬듯이 나도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참고 산다. 자신의 뜻을 굽히고 때로는 비굴하게 살기도 한다.

2,340m에 있는 시누와 롯지에서 여장을 풀었다. 하루 종일 길을 걸어 녹초가 되었다. 무거운 몸을 풀기 위해 샤워를 하려는데 더운물이 나오지 않았다. 덜덜 떨며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정신은 번쩍 들었으나,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빨래도 비누칠을 하여 빠는 것이 아니라 물에 그냥 헹구어서 널었다. 대충대충 빨리빨리 하고 쉬고 싶었다. 저녁을 먹고 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면서 빗소리를 들었다. 빗소리를 듣는 것이 매일 밤의 일과가 되었다. 오늘 빗소리는 왠지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똑같은 물방울도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물을 받아들이는 주체에 따라 소리를 달리 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심정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꽃을 보며 같이 꽃 피우고, 흐르는 물에 마음을 실어 보내고, 풀잎에 스치는 촉감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자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 같았다.


나흘, 신이여 길을 열어주소서: 시누와~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당초 오늘 일정은 데우랄리까지 가서 하루를 마치기로 하였는데, 나의 제안으로 오늘 무리를 하더라도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까지 가고, 내일 새벽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에 오르기로 했다. 아침 6시가 조금 넘자 출발했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우의를 입고 빨리 걸었다. 나는 우리 일행들보다 100m 정도는 앞서서 걸었다. 오늘 일정이 바쁘기도 하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나와의 대화, 산과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발걸음을 빠르게 하였다. 폭포가 떨어지는 길은 물로 넘쳐났다. 그럴 때마다 나빈과 강가가 돌멩이로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오후 2시경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레몬차를 한 잔 마시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놀라운 전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날이 개자 환상적인 돌산과 폭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멀리 마차푸차레 설산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이 이렇게 경이로운지 오늘 처음 알게 됐다. 두 손을 모아 신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뒤를 돌아보니 더욱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안개가 자욱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가능한 빨리 걸음을 재촉하여 MBC에 오르니 더욱 환상적인 전경이 펼쳐졌다. 왼쪽으로는 안나푸르나 남쪽의 설산이, 오른쪽으로는 마차푸차레 설산이 보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러한 감흥도 잠시 20여 분쯤 지났을까, 뒤따라오던 안개가 일순간에 MBC를 덮쳐 버렸다.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신이 나에게 주신 배려였다.

3,700m의 MBC는 몹시 추웠다.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씻을 수도 없어 롯지에서 가스 불을 피워 젖은 옷과 몸을 말려야 했다. 그런데 성민이가 탈이 나고 말았다. 몸이 떨리고 몸살 기운이 있다고 했다. 아내가 싸준 종합감기약을 주고 스테인리스 물병에 따뜻한 물을 담아 침낭에 넣어주었다. 다행히 잠을 곤히 자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닷새, 신에게 무릎을 꿇다: 안나푸르나 뱀부 베이스캠프

새벽 4시에 출발해 ABC에 오르기로 했다. 안개가 걷힌 ABC를 향한 길은 마치 제주도의 어느 오름을 오르는 길 같았다. 나무 하나 없는 고산에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개울가에는 예쁜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드디어 4,130m ABC에 도착했고, 롯지에 들려 레몬차로 몸을 녹였다. 이곳에 들른 여행객들이 남긴 사진과 글들을 보니 절반 가까이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력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부산에서 왔다는 청년과 기념사진을 찍고, 전자우편을 주고받았다. 롯지에서 잠시 누웠다가 점심을 먹고 하산을 하려니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내려가는 길이 아쉬움을 남게 하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였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뱀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엿새, 신이 내린 축복의 길: 뱀부~지누단다

네팔에 온 지 오늘로서 엿새째다. 다시 2,727개 계단이 있는 촘롱에 다다랐다. 촘롱 고개를 넘어 오는 길에, 이틀 전 만났던 다리가 불편한 젊은 친구를 다시 만났다. 낮잠을 자다 깨어나서는 연신 나를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한동안 우리 둘은 손짓과 몸짓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 친구를 두고 내려오는 길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신의 은총이 있길 기원하였다. 오후 2시가 되어 숙소가 있는 지누단다에 도착하였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노천 온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연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그동안의 고통과 피로가 눈 녹듯이 싹 풀렸다. 온천을 마치고 오니 가이드 나빈이 저녁 특식으로 우리식 닭백숙을 요리해 내놓았다. 제법 맛도 있어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포터 강가와는 오늘 밤이 마지막이었다. 부끄러움을 잘 타서 잘 다가오지 않는 강가를 불렀다.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주고, 추가로 팁 50달러를 주었다. 앞으론 여행객의 짐만 나르지 말고 자신의 여행도 떠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롯지에서의 숙식은 오늘로서 끝이다. 내일 오전이면 사실상 이번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막을 내린다. 오늘도 감기약과 소화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레, 문명과의 만남: 지누단다-카트만두

오늘은 안나푸르나 지역을 완전히 내려간 후, 포카라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까지 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산을 내려갈수록 문명세계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저 멀리서는 젊은 여성이 휴대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거의 일주일 동안 단절되었던 문명의 이기들이었다. 문명의 이기들이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벌써부터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 사람들은 편리한 생활을 하지만 자연과는 더욱더 멀어져 간다. 사람들은 더 많은 문명의 혜택을 받고자 서로 경쟁하고 싸운다. 그리고 점점 오만해져 간다.

카트만두는 번잡했다. 우리는 하얏트호텔에 묵었다. 아내와 전화통화를 했다. 내가 없어도 모든 것이 변함없이 잘 있다는 말을 들으니 다행인지,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에 문제가 있는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빈과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었다. 성민이가 자신이 입던 티셔츠를 벗어 나빈에게 주고 추가로 팁을 주었다. 나빈은 성실하고 착한 베테랑 가이드였다. 저녁을 먹고 야시장에 가서 가족을 위한 간단한 선물을 샀다. 이렇게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


여드레, 신과 함께 살다: 카트만두~서울

오늘은 네팔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오전 10시에 가이드 나빈과 만났다. 네팔에서 가장 큰 불탑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티베트 불교의 성지 ‘보드나트’를 찾았다. 사람들이 시계방향으로 쉼 없이 돌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이곳은 티베트에서 망명 온 주민들이 많아 ‘네팔 속의 작은 티베트’로 불리고 있다.

계획된 일정에는 없었으나 힌두교 사원에도 들르기로 하였다. 1인당 입장료로 500루피를 지급하고 파슈파티 사원에 들어섰다. 언젠가 TV 다큐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네팔 힌두교 최고의 성지였다. 신기하게도 강이 사원을 관통해서 흐르고 있었다. 네팔 사람들이 성스러운 강으로 불리는 바그마티 강이었다. 강 주변에서는 시신을 화장하는 화장터가 있고, 화장을 다 끝낸 유족들은 유골의 재를 강에 뿌리고 있었다. 그 강물에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저승의 귀신 분장을 한 사람들은 여행객들이 자신의 사진을 찍으면 돈을 받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 앉은 여행객들은 화장하는 장면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원에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삶과 죽음의 공존이었다.

네팔의 관문인 카트만두 국제공항이다. 지난 8일 동안 같이 했던 가이드 나빈과 작별인사를 했다. 나빈은 고생하면서 돈을 벌어 동생들 대학공부를 시키는 만큼 보람과 행복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하루빨리 어여쁜 신부를 만나 장가도 가서 멋진 가정을 이루길 기도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습관적으로 모차르트의 실내악을 귀에 꽂았다. 피곤이 밀려오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수염을 기르고 공항을 나서면 마중 나온 아내가 얼마나 놀랄까? 그리고 곧바로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수염을 깎게 될 것이리라. 그 후 안나푸르나는 서서히 잊히게 되고, 또 한동안은 자연과 유리되어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나의 안나푸르나여행은 서서히 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나마스테 네팔, 나마스테 안나푸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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