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올 때마다 주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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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올 때마다 주워 간다
쏭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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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화려하거나 멋진 말들은 이미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억되어 있기에, 이책은 아직 누군가에겐 기억되지 않은 일상의 말들을 통해 계절을 표현하고 삶을 그리며 사람과 인생을 녹아낸다.

요약본 본문

느끼다

진심에는 사소한 힘이 있다

사람의 진심은 말로든, 글로든, 행동으로든, 눈빛으로든 전해지는 길이 분명 있다. 진심에는 사소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끌려간다. 마음은 자석의 양극 같아서.

나의 마음으로는 당신이 향하고 당신의 마음으로는 내가 향하게 되어 있다.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우리

당신의 봄 속에 스며들어 있는 색들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늘 바쁘다.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아침이 밤이 되어 있고, 겨울은 지나 봄이 되어 있다. 우리 삶에 있어 가장 큰 핑계는 ‘바쁨’이다. 바쁘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안부를 묻는 횟수가 줄었고, 따라서 만남의 횟수가 줄었다. 서로를 잊지 않으려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우리가 되었다.

노력을 하며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바쁘다. 바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눈앞에 놓인 상황에 급급해하다 보니 우리의 노력은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자연스러움’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자연스러움은 ‘자연’은 억지로 꾸미지 않아 어색한 데가 없는 그러함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대로의 것이 자연인 것이다. 자연은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다. 자연이 하는 노력이 있다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를 쓴다는 본래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그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다.

봄이 다가옴에 따라 동백꽃이 피고, 목련, 진달래, 개나리가 따라서 피어난다. 우리는 그저 봄날 어느 길가의 저 나무가 벚꽃인지 아카시아꽃인지 여직 헷갈리기만 하는 그들이 ‘피는구나’ 했다가, ‘지는구나’ 하는 게 다인데 말이다. 우리는 봄만이 갖는 모습을 그리고 색을 분명히 보았다. 보았음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유는 바쁘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무 일 없는 듯 때가 되면 그 일을 당연히 해내고 돌아선다. 어떠한 핑계나 바쁨이 없다.

저리도 아름답고 고운 색으로 지금 당신이 지나고 있는 시간은 여기 즈음이라고 늘 우리 주변에서 손짓한다. 그걸 못 보고 지나친 건 바로 우리다. 도리어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자신들을 놓치며 사는 우리를 보며 안타까워했을지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그들이다. 우리 1년을 다시 열심히 살기 위해 바쁠 것이다. 그리고 또 1년 뒤의 그때가 되어 그 일을 해내고 있을 그들을 놓칠지도 모른다. 이름만으로, 생김새만으로 우리 기억에 존재하는 그들일 뿐이다. 정작 그들이 보여주려던 것은 그즈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봄의 따스함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깨어나고 있는 봄의 자연스러움이었을 텐데 말이다.

인생의 네 가지 계획을 ‘사계’라고 부른다. 공교롭게도 ‘사계’의 동음이의어인 이 말의 의미는 이러하다.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일생의 계획은 부지런함에, 가정의 계획은 화목함에.’ 이 말에서도 봄이 말해 주지 않는가.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다. 사계 중 봄은 1년의 시작과도 같은 계절이다. 봄은 당신의 1년을 응원하는 계절인 것이다.

우리 인생의 계획이 현재에 머물러선 안 된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바쁨이어선 안 된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자. 너무 바쁘게 노력하지 말자. 나의 하루는 반복이고, 시간은 순환한다. 지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바쁘게 돌보지 말자. 시간에 관대해지자. 봄을 느끼자. 이 봄을 느끼다 보면, 그들이 내뿜는 분위기를 느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또한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눈을 뜨고 하루라는 전쟁터에 입장한 어느 봄날, 아침의 기운을 받아 부지런히 하루를 보내고, 일 년을 보내고, 그렇게 세월을 쌓여 가다 보면 나의 이룩함이 곧 봄의 자연스러움을 닮아 있을 테니. 조급해하지 말자. 계절의 어느 날, 은연중 나의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한숨 소리가 바로 바쁨에 대한 방증이다. 그럴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안부의 인사를 묻자. 갑작스런 만남을 기약해 보기도 하자.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우리가 되지 말자. 기억으로만 존재하던 봄꽃의 이름들처럼.


내가 일으킨 물결을 넘어서는 것

인생이란 이런 건가 싶어 모든 전의를 잃어버리는 시점이 있다. 어느 날 어두워진 거실 소파에 앉아 이제 막 11시를 가리키기 시작한 시계 바늘과 눈이 마주쳤는데, 문득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행복이야 애당초 나의 관심 밖의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걸까.

늘 표류하는 기분으로 산다.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다. 둥둥 떠다니다 어느 집단에 속해 있었고, 둥둥 떠다니다 시간은 벌써 한 해 마감에 다가섰었고, 둥둥 떠다니다 만남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날들이 있었다. 생각의 끝에 다다를 즈음,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물결을 타고 그렇게 표류 중인 나를 발견하고 만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 내가 나의 시간을, 나의 인생을 주변인들에게 의탁하며 살아온 것이다. 즉, 내가 행복하지 못한 건 스스로를 방관한 바로 ‘나’ 때문이다.

왜 하기 싫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하고 싶다고 우기지 못했을까. 누군가로부터 무엇이 하고 싶느냐 라는 물음을 듣기에는 나이가 한참을 물러서 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네가 원하는 게 무어냐고. 네가 하고 싶은 게 지금 이게 맞느냐고.

일 초, 일 분, 한 시간, 그리고 하루. 다가오는 시간은 늘 도전의 실전이고, 나 자신의 감정과 이성이 머물렀던 시간의 넘김이다. 시간의 페이지는 정해진 시계 눈금을 밀고 지나가는 시계바늘과 동시에 넘어간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시간 위로 우리의 감정과 이성은 늘 잡히지 않고 떠다닌다.

인생이라는 표류하는 시간 위로 떠다니는 나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물음들. 잡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그 물음들에 당당히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매일을 묻는다. 하지만 매일을 헤매고 만다. 타인에 의해 일으켜진 파동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만다. 현재 나의 상황이 목적지가 불분명한 표류 중일지라도 자의에 의한 작은 파동의 행복으로 도달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지는 않을까 매일을 생각한다.

행복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나에 의한, 나로 인한 물결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시간의 페이지 위로 ‘후회’라는 두 음절을 새기지 않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열정을 쏟는 것이 어딘가 있을 행복으로 나아가는 망망대해 위에서 희미하게나마 빛을 내어줄 별 하나가 되어줄 것이다. 후회의 반대말은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행여 후회를 남긴다 해도 그건 타인이 해결해 줄 수 없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다. 내가 일으킨 물결을 나 스스로 넘어서는 것.

어느덧 시계의 짧은 바늘과 긴바늘이 12시를 가리키며 서로를 품는다. 시간의 페이지가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가는 중에도 나는 계속 표류 중이다.

내가 일으킨 물결을 넘어서는 것. 지나간 페이지 위로 한 글자 새겨 넣은 것도. 나의 심장을 펄떡펄떡 뛰게 만드는 한 글자. 그래, 이거구나. 내가 일으킨 물결, 바로 ‘꿈’이다. 나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매일의 나를 직시해야 한다. 나를 놓치지 말자.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가 서로의,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사람의 하루를 듣게 되었다. 그 하루를 다 들여다본 거 같고, 그 사람을 다 알아버린 거 같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에 자주 놓인다. 나이를 불문하고, 성별을 가리지 않으며, 출생지나 학력 그리고 직업까지 나에게는 대화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물론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보다는 슬프고, 아프고,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고민들이 듣는 이야기들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도 덩달아 슬프고, 아프고, 고민이 되어버린다.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있는 일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에 이입이 되어버린다.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있는 일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에 이입이 되어버린다. 내가 소설책에 쉽게 빠지는 것도 어쩜 직업병인지 모른다. 등장인물이 나인지, 내가 등장인물인지 가끔은 드라마보다 더 깊게 빠져들고 만다. 여기에는 활자의 마력이 더해짐이 분명하다.

몇 해 전부터 서점가에는 ‘장르의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통 평대에 올라오거나 베스트셀러 서가에 놓이는 책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주로 정치인이나 대기업 임원급 거물들의, 그리고 내국인보다 외국인의 책이 많았다)이거나,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작가들의 소설책 정도가 다였다.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심리학 및 처세술에 관련된 책들이 대거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인기는 소설이나 다른 장르를 이미 넘어섰고, 붐을 일으키며 해당 장르의 신간도 다양한 접근법으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책 속의 내용은 대부분 이러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과 불안, 그리고 이를 극복한 본인의 경험, 스스로를 도닥이며, 서로를 위로해주자는 이야기들이다. 그 시점을 지나갈 즈음 나 역시 정신과 전문의의 저서나, 심리학자들의 책, 그리고 일반인이지만 본인의 처지를 미루어 볼 때 타인에게 도움이 될 법한, 위로가 될 법한, 극복을 한 법한 이야기를 실은 책을 수 권 보았다. 나는 책들을 보고 난 후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세상은 이상한 사람들 천지다. 책들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책에서 하는 말들에 대해 심하게 동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면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요즘 사람’이라는 말이다. 요즘 사람이라는 말에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지만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나만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상하다는 말이기에.

‘이상하다’는 표현을 했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실상 ‘평범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안다. 서로의 불안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서로의 아픔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서로의 슬픔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말이다.

충분히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서로가 서로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우리는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더 앞서고 우위에 있어야 한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늘 알지만, 늘 잊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다 보면, 기가 막힌 유전자의 속셈을 알 수 있다. 같은 종족 간 경쟁 구도는 불가피한 유전적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유전자가 타고 나기를, 생겨 먹기를 경쟁을 하게끔 만들어졌으니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경쟁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 경쟁의 최종적인 공동의 목표를 바로 ‘행복’이다. 행복은 생존의 기회로 정의된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경쟁해야 한다. 경쟁으로 쟁취될 행복을 위해 고전분투 중인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가 바로 ‘사람’이다.

행복을 위해 우리 안의 유전자는 작동한다. 우리는 생각할 줄 아는 사고를 지닌 종이다. 평생을 몸속의 원래 그렇게 타고난 유전자에 복종하지 않을 ‘방어능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학습’하여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곧 경쟁하기 위해 타고난 유전자를 서로 배려하고 이해할 줄 아는 유전자로의 방향 전환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 속의 ‘교육’을 받는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상대성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게 우리 몸속 유전자가 만들어낸 인간들이 이루어내야 할 궁극적이고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 우리 인간은 이미 타 종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큰 자비와 배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기꺼이 받고 지금의 이 세상을 이룩해 왔으니 말이다.

유전자의 반을 공유하는 부모 자식 간에는 이해 대립은 발생한다. 하물며 혈연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발생하는 대립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불안이 되고,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라보다


나는 네가 올 때마다 주워 간다

계절 너는 올 때마다 나에게 내던져지고
나는 계절 네가 올 때마다 주워간다.

달리는 차의 정면으로 난 차창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은 유치하지만 참 자주 하는 거 같다. 사실 달리 표현이 안 된다. 멈춰 선 자동차 너머의 풍경에 대한 감흥은 덜 하지만, 열심히 달리는 자동차 너머의 풍경에 대한 마음의 울림은 생각보다 크다.

저기압으로 변덕이던 봄이라는 계절이 완전히 여름이라는 계절로 넘어서면서 하늘의 그림도 따라 변하고 있다. 봄이 그려진 캔버스 위로 시간을 덧발라 완성된 6월의 하늘, 여름이다. 유독 우리가 하늘색이라 부르는 그 푸르고 청명한 색감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 때가 아마도 지금부터.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뭉게구름 열차가 눈에 들어오는 그런 하늘. 저 구름은 계절이라는 시간을 나에게 내던져놓고 다시 바람을 타고 떠나버린다. 그리고 또 다른 계절이라는 시간을 실어 또다시 내 눈앞에 잠시 멈춰 설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 계절이라는 시간을 주워 담는다. 아직 구름을 내던져놓고 간 그 시간 속에 무어가 있을지 모른다.

가끔은 하늘의 속내가 궁금하다. 이렇게 예쁘게 있다가도 방심하는 틈을 타 시커먼 먹구름을 내세워 잔뜩 찌푸리기 십상이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예쁜 구름 떼를 몰고 오면, 그 서운했던 마음이 죄다 바람을 타고 저 구름을 뒤로 숨어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없이 다시 예쁘기만 하다. 계절의 색이 강해지기 시작한 시점. 7월의 초입. 그래도 나는 네가 좋다.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

만남이 잘못된 것일까, 헤어짐이 잘못된 것일까. 만남의 끝을 헤어짐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는 이들은 아마도 없겠다. 그런데 만남의 시작은 어떻게 나에게 당도하였던 것일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다른 이들도 아닌 당신과의 만남은 어떤 바람을 타고 왔기에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기대도 못 하고 있던 나의 어깨를 스치고, 나의 손등을 스치고, 그렇게 당신의 손가락이 수줍게 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와 내 손바닥과 당신의 손바닥이 맞닿았고 나의 손을 온전히 당신의 손에 쥐어지는 그 순간부터 만남의 초시계는 1초, 2초, 3초… 소리 없는 무음의 시계가, 그렇게 작동되기 시작했다.

어느 이의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그것은 사실 헤어짐의 이야기였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픔의 이야기였다. 사랑했고, 이별했으며, 그 아픔으로 인해 또 다른 사랑을 위한 만남의 방향 전환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이는 만남이 잘못되었다 하였다. 만남의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 만남을 시작했기에 여태 다른 만남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 두렵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만남의 끝이 헤어짐으로 마침표를 영영 찍고 말았다.

다음의 문장을 써 내려갔어야 할 마음이 새하얀 백지장이 되어버린 그이였다. 새하얀 백지장은 아픔으로 접히고 접혀 다음의 문장을 적어 내려갈 공간이 없다. 겨우 끄적거릴 법한 여백조차 한숨과 쓴웃음으로 물든 그이의 마음이었다. 놓일 자리 없는 마음은 허공을 떠돌았고 나는 그런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다. 심심치 않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오면 만남이 헤어짐으로의 귀결된 이야기를.

누구나 만남, 특히 사랑을 시작할 때 기대한 결말로의 귀결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아픔을 겪는다. 그 아픔은 손이 종이에 베인 자국의 핏빛을 보는 것보다 쓰라리고 아프다. 가슴에 수억 톤의 바위를 얹은 것 마냥 무겁게 아리다. 그 마음은 나에 대한, 나의 안쓰러움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남을 시작할 수 있던 걸지도 모른다. 즉, 무모함이다. 무모함이 관계의 시작을 알렸고, 끝은 예고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만남과 헤어짐의 한 단락이 끝나면 여지없이 허무와 후회를 남긴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였으면 좋았으련만, 만남과 헤어짐의 단락 단락마다 찾아오는 무모함에 조금은 둔해져야 할지도, 조금은 너그러움을 보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남을 탓하고, 헤어짐을 탓하다 보면 새로운 시작이란 찾아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허공을 떠도는 마음을 늘 숨소리에 실어 나르던 그이의 이야기 결론은 아무래도 무모함에 져주지 못한 그이의 모진 마음 탓일 수도 있으니. 당신과 나만의 차원이 깨지고,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작동하고 있던 시계가 고장이 났다면, 나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고장 난 시계를 수리하고 ‘우리’라는 차원을 복원하거나, 다른 만남을 위해 아픔은 오래 쥐고 있지 않는 것.


오늘도 끄적임이 길다

나의 주변에 들떠 있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려 꿈틀대고 있다. 가을이다. 가을을 느낀다는 건 이런 거다. 한 해를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내 볼에 닿은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시원한 듯 차가워진 어딘지 낯선 공기를 느꼈음이다. 밤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잠시 뒤를 돌아 주변 사태를 파악하고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음이다.

가을은 급하지 않다. 지난밤의 열기가 가신 시원한 공기 입자가 나의 등을, 어깨를 토닥인다. 자는 동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팔과 다리를 쓸어내린다.

언제부터 이렇게 기분 좋은 잠을 잤던가 떠올려 보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 년 중 시간이 4분의 3선에 들어섰고, 계절이 일 년 전 그때가 다시 돌아왔음에 밤마다 나의 안부를 묻는다. ‘안녕, 내가 이제 너의 옆에서 함께 여름의 다음 시간을 함께하려 하는데 놀라지는 마. 내가 이렇게 조금 조금씩 너의 곁에 스며들 테니까 천천히 나를 알아봐 줘’ 하고.

캄캄한 밤마다 알지도 못하는 박자로 찌르르 대던 귀뚜라미의 합창이 잠잠해진 어느 날의 아침이 가을이다. 찬 기운에 혹여나 놀라지 않을까 건물 밖에 수 초 머물러야 나에게 살그머니 닿으며 입꼬리를 잡아당기는 가을이다.

10월, 여름 동안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이 가을 아침의 공기 입자와 만난다. 밤의 것과는 다른 찬 기운의 공기 입자가 하루의 고단함을 미리 도닥이기라도 하듯 내 가슴과 등을 쓸어 올린다. 나는 이내 깊은 심호흡을 내뱉고는 ‘그래, 가자’ 하고 미리 짐작할 수 없는 오늘이라는 항해에 대한 의지에 힘을 싣는다.

하아, 가을이라 좋다. 봄은 봄이라 좋고, 여름은 여름이라 좋고, 가을은 가을이라 좋고, 겨울은 겨울이라 좋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움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해의 겨울도 좋았고, 지나온 봄도 좋았고, 여름도 좋았다. 가을이 되었다고 특별히 가을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을이 와서 좋다고 한다. 여름이 가서 좋다고 한다.

진심은 다 좋다. 나는 나라 좋고, 그대는 그대라 좋다. 사실 나와 그대의 존재는 크게 특별하지 않다. 그저 자연스러움이다. 내가 그대와 가까웠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당신은 바로 당신이었기에 좋았다고 말하려는 거다. 속삭임을 주고받을 만큼의 거리에 당신이 있든, 문자나 가끔 아주 가끔 주고받는 정도의 거리에 당신이 있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거다.

가을 아침의 찬 기운을 실은 공기 입자가 분명 당신에게도 말해줬겠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만나고 있는 이 가을은 특별하지 않다고. 낯설지만 시작도 끝도 모르게 그렇게 나와 당신의 시간에 스며들 거라고. 마치 나에게 스며든 당신이고, 당신에게 스며든 나 같을 거라고.


조각 하나인 나를 채워 넣는 것

언제부터 어른이었을까. 어른이 되긴 한 걸까.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성인 혹은 어른이라고 한다. 법적으로 19세 이상, 생물학적으로는 신체 모든 기관의 호르몬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때라 할 수 있다. 법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자기 의사 결정권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는 게 바로 어른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른이 된다는 건 법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그 한계에 근접한다고 정의되는 말이 아니었다.

법적으로도 어른이 되지 않았던 때의 내가 시험에 투덜대고, 장발 금지에 울분을 토할 적마다 어른들께서 말씀하셨다. “교복 입고 가방 들고 다닐 때가 좋을 때다.” 그렇다. 어른들의 말씀은 자고로 잘 새겨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뒤통수 맞는다. 내가 몸소 증명했다.

그 좋은 때는 좋은 때인지도 모르고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어른들이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던 ‘좋은 때를 빼고 남은 때’를 지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은 분명 내 눈앞에 있었고, 들리지 않는 비난은 늘 내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비난에 맞서기 위해 나 자신을 살게끔, 살아내게끔 해야 했다.

결국 어른이란 살아가야 하고 살아내야 하는 주체다. 살아간다는 건 그리고 살아낸다는 건 인생의 온갖 투정과 변덕을 온전히 스스로 품어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나는 후회라는 걸 어지간해선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감보다는 내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책임감이란 말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의 짐 같이 들리기도 한다.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마음이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후회를 하지 말자는 마음이 더욱 크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책임감이 마음의 짐 같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책임감이 만들어 놓은 레드카펫을 밟으며 스포트라이트에 대고 환하게 웃어 보이려 매일을 애썼다. 거기에 자신 있게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걸어가려는 뻔뻔함을 내세워 나 자신을 과대 포장한다. 레드카펫을 밟는 모든 순간이 나의 삶이고, 내가 바로 그 삶의 주인공이라는 의무감으로 하루를 버틴다.

어른이란 진정한 레드카펫의 주인공이 되는 그 시점부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음에도 여전히 가끔은 기특하고 가끔은 안타까운 나다.

매일을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했던 때가 있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사회라는 단두대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와 매일을 싸워야 하는 자아가 어른이라는 걸 깨달을 무렵의 그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덮고 있던 어둠마저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그때. 길 한 켠에 하얗고 밝은 달이 내려앉아 있었다. 성모마리아 상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고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 누군가가 뜻하지 않게 성모마리아 상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매일을 그분 앞에 섰다. 매일을 말하고, 매일을 눈물로 인사를 했다. 어둠 속 길을 헤매일 누군가를 위해 일부러 그곳에 서 있던 그분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분께 무언가를 기대했던 걸까? 기대한 바를 얻고자 매일을 기도했던 걸까? 엉뚱하게도 나는 정작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답을 얻게 된다. 바로 ‘나’ 자신에게서 말이다.

답은 늘 나 자신에게 있다. 식상한 말이긴 하지만 여지없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잘 알지도 못하는 어른이라는 세계에 조각 하나인 나를 채워 넣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세계에 잘 들어맞는 조각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속한 어른이라는 세계는 잘 들어맞지 않는 조각들로 인해 들뜸이 있는 곳은 아닌지. 늘 염려스럽고 의심스럽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현재 속한 어른이라는 세계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나 자신이 쓸모없는 조각 하나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원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함으로서 하나의 세계가 완성될 수 있는 곳이 말이다. 인생의 온갖 투정과 변덕을 온전히 품어주자. 그리고 비로소 어른이 되고야 말자.


분명 그 냄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아침에 눈을 완전히 뜨기 전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 그때, 귓속 고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크게 반갑지 않다. ‘비가 오는구나. 언제 그치려나.’ 하늘의 비구름은 일어나자마자 본 것이나,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본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잿빛이었다. 창문 밖으로 내민 손끝으로 닿는 공기도 오전의 것이나 오후의 것이나 같은 스산함을 머금고 있었다.

언제 비가 그칠까를 혼잣말로 수십 번 물으며 창가로 다가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땅바닥에 고인 물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똑똑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면 비가 많이 내리는구나 했고, ‘또오오오옥’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도가 느리면 조금 덜 오는구나 했다. 그렇게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다 보니, 주차된 차 지붕 위로 튀어 오르는 비도 보였고, 나뭇잎을 철썩철썩 때리는 비도 무심결에 시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비는 하루 종일 왔다.

비가 오는 게 반가울 때가 있다. 가뭄에 목마른 땅을 적실 시기에 내리는 비가 그때이고, 또 있나 싶어 생각해보니 비가 주는 ‘감성’이 필요한 순간에 내리는 비가 그때이다. 비가 내리면 불편함은 상당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주는 비조차 필요한 순간이 있고 만다. 계절의 변화에 있어서 특히 비의 역할이 크다.

봄이 여름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내리는 비는 봄의 공기에 여름의 공기를 입힌다. 여름에는 가을로 갈아타는 순간에 내리는 비는 뜨거웠던 여름의 공기를 약간의 냉기를 머금은 공기로 살포시 누른다. 가을에서 겨울로 향하는 시기에 내리는 비는 ‘가을비’라는 타이틀로 유독 사람들의 감성을 많이 자극하는 비이다.

아마도 가을비가 온 후에 찾아오는 차가운 그 기운이 ‘기댈만한 곳의 존재 여부’를 묻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겨울로의 예고가 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못한 겨울이 될 수도 있기에. 결국 ‘가을비’의 감성은 ‘불안함’이다. 겨울의 예고편. 확정되지 않은 겨울의 모습에 설레어 하기도 했다가 슬프기도 했다가. 그리고 마침내 가을비가 겨울비로 갈아탈 때, 가을비가 예고했던 내 모습이, 내 처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신에게 가을비는 당신의 어떤 모습을 담는 예고편일지. 궁금하겠지만 머지않아 곧 겨울을 알리는 마지막 가을비가 내릴 테니, 너무 실망하지 않는 비의 알림이 되길 바란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왔고, 나는 오랜만에 감기와 재회했다. 나에게 이 비는 썩 반갑지 않은 비였다. 그리워할 게 참 많은 비 냄새였으므로. 분명 그,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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