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역사 공부

창해 / 2020년 10월 / 352쪽 / 18,000원

리더의 역사 공부

리더의 역사 공부

김영수 지음

저자 소개

지난 31년 동안 사마천(司馬遷)과 《사기 (史記)》, 그리고 중국을 연구하고 22년 동안 중국 현장을 150차례 이상 탐방해온 사마천과 《사기》에 관한 당대 최고의 전문가이다. 저자는 지금도 사마천과 중국의 역사와 그 현장을 지속적으로 답사 하고 미진한 부분을 계속 보완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는 《완역 사기》 시리즈를 비롯하여 《역사의 등 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 : 사마 천, 삶이 역사가 되다》, 《사마천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사기의 경영학》 《사기의 리더십》 《사기를 읽다》 《사마천과의 대화》 《현자들의 평생 공부 법》 《백양柏楊 중국사 1, 2, 3》 등 50여 권이 있다.

책소개

이 책은 저자가 오랜 동안 〈사마천 컬럼〉에 연재한 100여 꼭지 글을 7개 의 주제로 관련 도판 자료와 함께 엮은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의 내용을 토대로 우리 사회 각계각층을 향해 자성을 촉구하는 글을 담고 있다. 각 꼭지 주제마다 쉽게 풀어쓴 《사기》 속의 적절한 예화들은 《사기》 마니아는 물론 《사기》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적 감흥을 불러일으킴은 물론, 이 시대를 이끌고 있는 리더와 앞으로 리더가 될 분들을 위한 훌륭한 역사 공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요약본 본문

1장 역사는 기록(記錄)이 아니라 기억(記憶)이다

사마천의 ‘삼립(三立)’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지준이라는 고매한 인품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인생의 바른 길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으로서 최고의 가치 기준은 덕행을 수립하는 입덕(立德)이요, 그다음은 책을 써서 자기주장을 세우는 입언(立言)이며, 그다음은 공업을 세우는 입공(立功)입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사마천의 ‘삼립(三立)’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셋 중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사회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며 나름대로 업적을 쌓게 되면 입신 내지 입공했다 할 것이며,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자기주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면 입언했다 할 것이다. 사마천은 덕행을 수립하는 입덕을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보았으며 자신은 감히 이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없고, 그저 입언할 수 있다면 뜻한 바를 이룬 것이라며 자신을 낮추었다. 그러나 그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치른 대가를 생각하면 그의 입언은 입덕의 경지를 뛰어넘고도 남는다. 그는 억울하게 반역죄를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에서 시대가 자신에게 지운 역사적 책임, 즉 역사서 저술을 위해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궁형을 자청하고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했다.

그런데 사마천이 말하는 입신(공)이든, 입언이든 그 결과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은 자신과 남을 기만하지 않는 도덕의 수립과 강화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안 되면 입공한 자는 권세와 돈으로 세상을 해치고, 입언한 자는 글과 말로 혹세무민하여 사회를 부도덕하고 부정한 쪽으로 이끌게 된다. 사마천은 입덕은 언감생심이니 입언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기》라는 절대 역사서이다. 하지만 입언도 입공도 입덕으로 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했다. 말하자면 입공과 입언은 선택이지만 입덕은 필수라는 것이다. 그래야 입공도 입언도 세상에 유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언의 과정 내지 그 결과라 할 수 있는 학문적 성과나 연구를 표절하고도 당당한 자들을 보노라면 ‘덕’이 실종된 입신출세가 얼마나 위험한지 절감하게 된다. 입언은 자기주장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을 표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남의 것을 훔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을 파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못할 짓이 없다. “지식 없는 열정은 무모하며, 열정 없는 지식은 무미하다. 과장된 지식은 허망하며, 거짓된 지식은 사악하다. 그리고 분별없는 지식은 위험하다.” 지금 우리 지식사회와 지식인이 총체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병폐가 벌써 골수에까지 사무쳐 도저히 손쓸 수가 없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2장 옳은 길은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2,600년 전 한 사법관의 자결, 그리고 우리 검찰과 사법부의 민낯

약 2,600년 전 춘추시대 진나라에 이리라는 사법관이 있었다. 이리가 누군가의 거짓말을 듣고 무고한 사람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 그 사람을 죽게 했다. 소위 사법 살인을 저지른 셈이다. 나중에 그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이리는 자신을 옥에 가두게 하고 자신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당시 통치자였던 문공이 보고를 받고는 그건 이리의 잘못이 아니라 이리 밑에 있는 실무를 담당한 부하의 잘못이니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이리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담당 부서의 장관으로서 관리에게 직위를 양보하지 않았고, 많은 녹봉을 받으면서 부하들에게 이익을 나누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판결을 잘못 내려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죄를 부하들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문공은 그런 논리라면 너를 사법관으로 기용한 나에게도 죄가 있는 것 아니냐며 이리를 용서했지만, 이리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사법관에게는 법도가 있습니다. 법을 잘못 적용하면 자신이 그 벌을 받아야 하고, 잘못 판단하여 남을 죽이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임금께서는 신이 그러한 판단을 잘 할 거라고 생각하시어 사법관으로 삼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거짓말을 믿고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검 위로 엎어져 자결함으로써 사형을 대신했다. 우리는 촛불혁명으로 전대미문의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을 이끌어냈고, 새 정부를 통해 적폐청산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온갖 심각한 국기문란 행위가 드러났고, 과거 검찰과 사법부의 그릇된 기소와 판결 사건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기 문란과 온갖 비리를 초래한 정당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적반하장으로 국민을 우롱하고 윽박질렀다. 또한 검찰을 포함한 사법부의 실로 말도 안 되는 부정과 비리, 그리고 갖은 추태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을 감시해야 할 언론까지 결탁하여 국민을 속이고 겁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0년 가까이 우리 국민은 ‘부끄러움’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을 우리 손으로 뽑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뒤늦게나마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을 단호히 거부했고, 나아가 2,600년 전의 법관 이리의 자결이 남의 일이 아닌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검찰, 사법부, 언론의 과거 작태들이 또 다시  우리의 이런 소망과 행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절감하게 만든다.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할 판이다. 이제 국민들은 더 이상 부끄러워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런 적폐 세력들의 척결에 단호히 손발 걷어 붙이고 나서야 한다. 우리 다음 세대, 아니 내 딸과 아들을 위해서라도!

리더의 진정(眞情)과 고독(孤獨)

리더의 길은 고독하다. 진심을 몰라주는 대중과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자신을 물고 뜯는 정적들, 돈에 굴복하여 가짜뉴스조차 불사하는 사이비 언론들, 나라와 백성들보다는 자리와 권세에 눈이 먼 측근들로 둘러싸인 리더의 신세는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척의 돛단배와도 같다. 이런 고독감은 리더가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정직할 때 더 커진다. 주위보다 리더의 식견이 뛰어날 때도 그렇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군주 무령왕은 나라 전반에 걸쳐 개혁을 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호복기사 (胡服騎射)’를 단행한다. ‘오랑캐 옷을 입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쏜다’는 뜻의 이 말은 그 후 전면 개혁의 대명사이자 개혁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무령왕의 개혁은 수구 기득권 세력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친다. 개혁의 본질이 ‘이해관계의 재조정’, 다시 말해 이익의 재분배이니만큼 가진 자들은 자기 것을 내놓지 않으려고 사활을 걸고 저항에 나서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무령왕의 숙부조차 저항 세력에 가담했다. 수구 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무령왕은 머뭇거렸다.

그때 조정 대신 비의가 무령왕의 개혁 의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고 나섰다. “신이 듣기에 일을 하려고 할 때 머뭇거리면 성공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에 주저하면 명예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기왕 세상의 습속을 위배하였다는 비난을 감수하려고 결심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의 왈가왈부는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최고의 덕행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적인 것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큰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범부와 모의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기》<조세가>

개혁 의지가 꺾이려는 순간 비의는 무령왕의 용기를 북돋우었고, 무령왕은 확고한 신념과 과감한 결단으로 ‘호복기사’를 밀어붙였다. 아울러 숙부에게 사람을 보내 간곡한 어투로 “숙부께서는 지금 일반적인 풍속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저는 풍속을 조성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득하여 솔선수범하여 ‘호복’을 입고 조정에 들어오게 했다.

리더의 길은 고독하다. 하지만 그 길이 옳은 길이라면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 그것이 리더의 운명이다. 그리고 역사상 옳은 길은 단 한 번도 편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에 작으나마 위안을 받았으면 한다.

3장 백성이 부유해야 나라도 부유해진다

관중(管仲), 부민부국(富民富國)을 말하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해야 영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2,700년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이 언급해온 이 명언은 다름 아닌 ‘관포지교’의 주인공인 관중의 말이다(사마천은 《사기》<화식열전>에서 이 대목을 다시 인용하여 그 의미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우리 속담도 같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의 이면에는 ‘가난한 백성은 국가가 통치할 수 없다’는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백성을 가난하게, 못살게 해 놓고 나라에 봉사하고 충성하길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관중은 나라가 백성들의 의식주와 문화 수준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려야 나라의 정책이 순조롭게 시행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라를 떠받치는 네 기둥, 즉 ‘사유(四維)’가 세워진다고 했다. 바로 예(禮), 의(義), 염(廉), 치(恥)다. ‘예’란 도를 넘지 않는 자세와 태도를 가리킨다. ‘의’란 이치에 맞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염’이란 자신의 잘못된 점을 숨기지 않는 것이고, ‘치’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다. 요컨대 관중은 이 ‘사유’의 기본 전제를 기본적인 물질생활로 본 것이다.

이 ‘사유’가 바로 서면 통치자의 위치가 안정되고, 백성들은 서로를 속이려 하지 않으며, 행동은 반듯해지고,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정치와 정책이 필요하고, 정치와 정책이 순조롭게 시행되려면 민심을 따라야 한다. 관중은 이를 ‘사순(四順)’’이라 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백성은 근심과 고생을 싫어하니, 통치차는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 “백성은 가난과 천함을 싫어하니, 통치자는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줘야 한다.” “백성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니, 통치자는 그들을 안전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백성은 자신이 죽고 후손이 끊기는 것을 싫어하니, 통치자는 그들이 수명을 누리고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관중은 ‘민심에 따르는’ ‘순민심’을 백성을 이롭게 하고 부유하게 하는 ‘이민(利民)’과 ‘부민(富民)’의 전제 조건으로 본 것이다. 관중에게 경제와 정치는 결코 둘이 아니라 백성들의 보다 나의 삶의 질을 위해 상호 보완 역할을 해야 하는 자동차 앞뒤 바퀴와 같은 관계였다. 정치와 경제가 앞뒤 바퀴가 되어 민심에 따르는 정책으로 시동을 걸면 백성이 가속 페달을 밟아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이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속도는 백성들의 부와 비례하는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 ‘부민’이 성취되고, ‘부민’은 궁극적으로 ‘부국’으로 귀착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를 앞세운 ‘부국강병’이란 일방적 이데올로기에 눌려 살아왔다. 하지만 이는 독재적 발상에서 나온 대단히 허황된 구호이자 허위임이 이미 입증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에서는 대기업, 재벌이 잘 되어야 그 이익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낙수효과’ 논리 역시 재벌과 대기업만 배를 불리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가 입증하고, 지금의 현실이 보여주듯 백성이 부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관중보다 150여 년 뒤의 보수주의자 공자가 공평하고 공정한 분배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려 2,700년 전 관중이 지금 우리 시대의 화두인 기초 생활과 기본소득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통치의 차원과 경지

고대 현자들은 리더와 리더의 통치에 질적 단계를 매겼다. 먼저 관중은 《관자》<추언>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왕도의 군주는 백성의 지지에 승부를 걸고, 패도의 군주는 군대의 지지에 승부를 걸며, 쇠퇴하는 군주는 지배계급의 지지에 승부를 걸고, 망해가는 나라의 군주는 여자나 보석에 승부를 건다.”

사마천도 역대 부자들의 기록인 <화식열전>에서 통치자의 질적 단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정치의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고, 가장 못난 정치는 (부를 놓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관중과 사마천 모두 백성들을 믿고 그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배려함으로써 마음을 얻는 리더와 그 통치를 최고의 경지로 꼽았다. 특히, 사마천은 당시 통치자인 무제가 이른바 경제 전문가들을 관료로 기용하여 국가 권력을 동원한 통제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서민 경제가 파탄나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리더와 통치의 질적 단계에 대해 위와 같이 정곡을 찌르는 통찰을 보여줄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을 사마천은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중산 이상의 상인들은 대부분 파산하였고, 백성들은 당장 먹고사는 일에 급급할 뿐 더 이상 재산을 축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정은 소금과 철을 관리하고 민전을 고발하여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점점 더 풍족해졌다.”

4장 권력(權力)은 힘을 나누는 것이다

권력의 본질은 나눌 줄 아는 힘의 균형이다

저울은 무게를 측정하는 기구고, 저울추는 물건의 균형을 잡아 무게를 알아내는 저울의 가장 중요한 부속물이다. 그런데 이 저울추의 이름이 ‘권(權)’이다.  이 ‘權’ 자에 ‘力’ 자를 보탠 단어가 ‘권력(權力)’이다. 따라서 권력은 ‘힘의 균형’이 본래의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만큼 잘못 이해되고 잘못 쓰인 것도 없다. 장악하여 휘두르는 것이 권력이라는 삐뚤어진 인식과 의식의 근원은 역사가 제공했다. 특히, 왕조 체제의 산물인 봉건적 요소가 청산되지 못한 상황에서 권력은 흔히 절대 권력 그 자체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런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권력의 비극’이기도 했다.

‘권력’은 ‘힘의 균형’을 잡는 생동감 넘치는 고도의 행위이며, 이 행위는 ‘권력 행사’다. 권력 행사라는 말은 잘못 써왔고 지금도 오남용되고 있다. 권력 행사를 권력을 휘두른다는 뜻으로만 알았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왔다. 우리는 권력에 대해 부정적 시각과 인식을 갖고 있다. 잘못된 권력 행사만을 경험하고 보아왔기 때문이다.

‘정치는 권력과 관계되고, 권력의 본질은 권력 행사와 관계된다.’ 권력 행사와 권력이란 문제를 제도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법’과 연계시켜 이해하면 문제의 본질과 해결책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여기에 ‘권력의 제한’을 뜻하는 ‘권한’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권력의 속성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권력을 확장 개념이 아닌 수렴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권한’은 권력에 대한 제한이기도 하지만 권력 행사의 한계와 경계를 가리키는 말로, 권력 행사자의 자발적 통제력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권한은 균형의 제한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균형이 갖는 ‘정태성’을 깨뜨리는 힘과 권한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철학의 필요성도 함께 함축하고 있다.

권력과 권력 행사는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적절한 힘의 나눔’이라는 속뜻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눈을 돌려야 때다. 지난 대통령 취임사에서 권력을 나누겠다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왔다. 권력의 본질이 ‘힘을 나누는’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온 대국민 선언으로 듣고 싶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여전히 ‘권력 나눔’이 아닌 구태의연한 ‘권력 다툼’에 몰두하고 있다. 국민의 심판이 이제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 정치 현실을 엄중하게 인식해야 할 시점임에도 말이다.

‘종선여류(從善如流)’할 수 있는 리더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각 조직의 최고 리더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막중하다. 오랜 왕조 체제를 경험하면서 뿌리 깊게 박힌 봉건적 사고방식에다 매사를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퇴행적 잔재가 여전한 우리 사회인지라 최고 리더에게 거는 기대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 색깔도 극명하게 갈라지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증오하기까지 한다. 더 나쁜 것은 소위 지도층이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이런 부정적 요소들을 악용하거나 심지어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마천은 바람직한 통치자의 모범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정확한 의견이나 충고는 마치 물이 흐르듯 듣고 따르며, 남에게 은혜를 베풀 때는 서두르되 결코 피곤해하지 않는다.”(從善如流 施惠不倦 종선여류, 시혜불권) -《사기》<초세기>

이 말은 춘추시대 진나라의 귀족 숙향이 춘추시대 최초의 패주였던 제나라 환공을 칭찬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잠언을 인용한 것 같다(《좌전》소공 13년조와 성공 8년조에 각각 ‘군자왈’로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나라 환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 관중을 재상으로 발탁하여 부국강병을 이룬 뛰어난 리더였다. 이 일로 그는 ‘외거불피구(外擧不避仇)’ 즉 ‘외부에서 남을 기용하되 원수라도 피하지 말라’는 참으로 실행하기 힘든 용인(用人) 원칙을 실천한 인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는 관중의 평생 친구이자 동료였던 포숙의 설득과 충고가 있었다. 환공이 원수조차 기용할 수 있었던 것은 포숙의 충고를 ‘종선 여류’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리더들에게 가장 부족한 소양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 사람인  환공처럼 상대가 지적해 주는 정확하고 옳은 충고와 지적을 마치 물이 흐르듯 경청할 수 있는 리더를 지금 우리 사회는 갈망하고 있다.

5장 언격(言格)이 인격(人格)이다

‘천금매소(千金買笑)’와 수구 언론의 봉화 놀이

기원전 8세기 초 주나라를 다스렸던 유왕은 젊은 후궁 포사의 웃는 모습 보기를 좋아했다. 포사가 평소 잘 웃지 않았기 때문에 유왕은 그녀의 웃음에 더 집착했다. 그런데 포사가 하도 웃질 않자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는 사람에게 천금을 내린다는 포고를 내걸고 아이디어를 공모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저 유명한 ‘천금매소(천금으로 웃음을 산다)’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했다.

이런저런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포사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급기야 어떤 자가 봉화 놀이를 제안했다. 유왕은 봉수와 큰북을 마련하여 적이 쳐들어와 봉화를 올리는 것처럼 한바탕 쇼를 벌였다. 제후들이 놀라서 군대를 이끌고 서둘러 달려왔으나 적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허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포사가 이 모습을 보고는 크게 웃었다. 유왕은 너무 좋아했다. 이후 유왕은 틈만 나면 봉화를 올려 포사를 웃게 했다. 그리고 간신 괵석보를 요직에 앉혀 백성들을 착취하고 급기야 왕후 신씨를 폐하고 태자를 내쳤다. 그러자 왕후의 아버지 신후가 이민족인 견융과 결탁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다급한 유왕이 봉화를 올려 제후의 군대를 불렀으나 여러 차례 속았던 제후들은 오지 않았다. 신후와 견융은 유왕을 여산 아래에서 잡아서 죽이고, 포사는 포로로 잡아갔다. 늑대와 양치기 이야기 중국판이라 할 수 있는 포사와 봉화 놀이는 이렇게 비극으로 끝났다.

역사에서는 유왕이 내친 태자 평왕이 동쪽 낙읍(지금의 낙양)으로 천도한 기원전 770년을 기점으로 그전을 서주, 그 이후를 동주라 부르며 시대를 구분한다. 또한 동주 시대 노나라의 역사책인 《춘추》의 이름을 빌려 춘추시대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유왕의 유치한 봉화 놀이의 결과가 주나라의 역사를 바꾸었고, 중국 역사를 바꾸었던 셈이다.

지난 정권 때 북한과 미국 간에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살벌한 설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도 한동안 분위기는 공갈포의 포연이 자욱했다. 당시 수구 사이비 언론들은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국민들이 너무 태평하다며 야단을 쳤고, 지금도 여전히 전쟁 가능성에 군불을 때며 연신 봉화를 올려 댄다. 국민들은 그런 언론들을 포사를 웃기려고 봉화를 올린 유왕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남자 추기(鄒忌)의 군주 설득

전국시대 제나라의 위왕(기원전 378~기원전 320)은 즉위 후 무려 9년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전국시대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위왕의 직무 유기는 제나라의 안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위왕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추기라는 자가 거문고를 들고 위왕을 찾아왔다. 위왕은 워낙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추기에게 연주를 부탁했다. 하지만 추기는 거문고를 안고 뜯는 흉내만 낼 뿐 연주를 하지 않았다. 위왕은 왜 연주를 시작하지 않느냐며 재촉했다. 추기는 자세를 잡아야 한다며 뜸을 들였다. 답답한 위왕이 또 재촉하자 추기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음악을 좀 알아야 한다면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위왕은 짜증을 냈다. 그제야 추기는 거문고를 내려놓고는 “그런 왕께서는 어째서 제나라라는 거문고를 9년 동안이나 연주하지 않고 뜸만 들이고 계십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위왕은 추기의 의도를 알아챘다. 위왕은 마침내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며 추기를 재상으로 발탁하여 개혁 정치에 시동을 걸었다.

또한 추기는 알아주는 미남자였는데 자주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잘생긴 용모에 스스로 감탄을 했다고 한다. 추기는 아내에게 도성 북쪽의 서공과 비교할 때 누가 더 미남이냐고 물었다. 아내는 “당연히 당신이 더 잘생겼지요”라 대답했다. 첩에게 물어도,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물어도 답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추기가 서공의 실물을 보니 아무리 봐도 자기보다 서공이 더 잘생겼다. 추기는 ‘이들은 왜 내가 더 잘생겼다고 할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얼마 뒤 추기는 위왕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내는 저를 사랑하기에, 첩은 총애를 잃을까 겁이 나서, 손님은 제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기는 왕의 곁에도 이런 부류들이 넘쳐 나니 정작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충언했다. 이에 위왕은 전국에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첫째, 왕 앞에서 대놓고 충고하는 사람에게는 1등상을 준다.

둘째, 글을 올려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에게는 2등상을 준다.

셋째, 사석에서라도 왕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 이야기가 왕의 귀에 들리면 3등상을 준다.

그로부터 1년 뒤, 위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위왕은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충실히 귀를 기울여 잘못을 바로잡았고, 그로써 지적할 잘못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불통의 리더십이란 말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맴돌며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역사는 그 불통의 결말이 언제나 불행했음을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6장 좀 알자, 중국

중국 지도자들과 인문학 소양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모택동

중국 정치 지도자들의 인문학 소양과 그것이 정치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언급이 있었다. 특히, 역사를 중시하는 중국인의 특성에 맞추어 지도자들의 역사와 역사서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넓고 깊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 역사서의 출발이자 진보적 역사관을 대표하는 사마천의 《사기》에 대한 관심은 지도자들의 인문학 소양과 역사관 등을 가늠하는 하나의 지표로 삼을 수도 있다.

정치 지도자들 중 역사와 역사서에 대한 관심으로 말하자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이었던 모택동을 따를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천하가 알아주는 독서광이었던 그는 대장정이라는 고난의 행군 중에도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그의 애독서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이 두 역사서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었다고 하며, 1949년 장개석을 대륙에서 내몰고 북경에 입성했을 때 그의 낡은 가죽 가방에 이 두 역사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모택동은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아동기에 이미 당숙 모종초에서 《사기》를 배웠고, 열 살이 지나면서도 각국의 역사서와 지리를 섭렵했다. 그의 독서 편력은 넓고 깊었는데 역사에 대한 관심과 독서가 단연 으뜸이었다. 공부라는 면에서 보자면, 모택동과 장개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른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역사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아니었을까?

모택동은 사마천을 몹시 존경하여 “사마천은 호남성을 유람했고, 서호에서 배도 탔으며, 곤륜산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는 명산대천을 두루 돌며 자신의 가슴을 더욱 넓혔다”고 했다. 또 ‘인민을 위한 복무’라는 글에서는 사마천과 《사기》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다 다르다.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고 했다.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죽는다면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에 비할 수 있고, 파시스트에 몸을 팔고 인민을 착취하고 인민을 박해하는 사람의 죽음은 새털만도 못하다 할 것이다.”

모택동은 인민을 바른길로 이끌고 계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의식을 철저히 개혁해야 하고, 그 바탕은 독서와 공부라고 확신했다. 그의 독서 습관과 역사에 대한 공부는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장장 70여 년에 걸친 그의 독서 편력과 역사의식은 끝내 공산혁명을 이루어 냈다. 말년의 오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아 있는 것은 혁명가도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을 통해 인민의 힘과 역사의 규칙을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2017년 7월 6일 한중 정상회담이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사드 사태로 경색되었던 양국 관계가 개선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은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장강후량추전랑, 長江後浪推前浪)’이라는 명언을 인용했다. 이 구절이 우리 대통령의 자서전에 인용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여 이를 언급하며 회담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시 주석은 공식 강연은 물론 일상 대화에서도 고전과 한시를 즐겨 인용한다. 독서량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시진핑 주석이 국가 주석으로 확정된 시기는 2010년 무렵이다(2013년 주석 취임). 이때 세계적으로 위대한 역사가이자 중국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위인 사마천의 제사가 국가 제사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주석 취임 이후 시 주석이 사마천과 《사기》를 언급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역대 다른 지도자에 비해 단연 압도적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을 살펴본 결과 시 주석의 고향인 부평과 사마천의 고향인 한성은 같은 섬서성에 있고, 거리는 불과 100여 km였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 사당과 무덤 아래로 광장이 조성되었고, 국가가 나서 무려 750만 평 규모의 사마천과 《사기》를 테마로 하는 ‘국가 문사(文史) 공원’이 조성되었다.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시 주석과 중국 당국의 관심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시 주석은 취임 이후 세 차례 걸쳐 《사기》에 나오는 명언의 하나인 ‘전사지불망, 후사지사야(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 즉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스승이 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있는 일본을 겨냥했다. 과거 역사의 중요성과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라 할 수 있다(이 명구는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세운 남경대도살기념관 중앙 홀에도 걸려 있다).

7장 지식이 해방된 시대

지인논세(知人論世), 과거를 알아야 사람과 세상을 논할 수 있다

《맹자》<만장>편은 전국시대 유가 사상을 대표하는 맹자(기원전 372~기원전 289)와 제사 만장의 대화록이다. <만장> 하편에 맹자가 만장에게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다.

“한 마을의 좋은 인재가 다른 한 마을의 좋은 인재를 벗 삼고, 한 나라의 좋은 인재는 한 나라의 다른 좋은 인재를 벗 삼으며, 천하의 좋은 인재는 천하의 또 다른 좋은 인재를 벗 삼는다. 천하의 좋은 인재를 벗 삼아도 오히려 부족하다면 위로 옛사람을 논의해야 하니, 그 시를 감상하고 책을 읽으면서 그들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그러므로 그 시대를 논하는 것인데,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벗을 사귀는 것이다.”

맹자는 시대를 초월하여 과거의 인물과 그들이 남긴 좋은 글을 벗 삼으라고 권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람을 알고 시대(세상)을 논한다’는 ‘지인논세(知人論世)’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여기서 맹자의 말은 다분히 복고적이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과거에서 찾으라는 지적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중시하는 유가의 이런 복고적 사고방식은 훗날 많은 비판에 직면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마치 중국인의 부정적 특성인 것처럼 오해를 받게 만들었다.

실제로 중국인은 과거를 중시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의 결과이며, 오래된 미래이다. 중국인들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와 지혜를 과거에서 찾는다. 수천 년 시간 속에 축적된 엄청난 경험에 수많은 지혜와 문제 해결 방법들이 깃들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미국이 잘 만드는 영화 장르는 공상 과학, 즉 SF영화다. 반면 중국이 잘 만드는 장르는 무협이 가미된 사극이다. 이 차이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모험 정신과 진취성을 칭찬하고, 중국의 퇴행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미국은 아직 과거로 돌아가 유의미한 대안과 지혜를 제시할 만한 시간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5천 년과 300년의 차이일 뿐이다. 과거에 대한 중국인의 이와 같은 인식은 5천 년 가까운 역사를 통해 축적된 어마어마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된다. 양을 헤아릴 수 없는 서적과 유적, 유물 그리고 중국인의 DNA에 각인된 다양한 경험 인자 등은 그 자체로 빅데이터를 현실에 활용해 가며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 한중 관계가 실질적으로 한 단계 깊어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중국인의 보편적 특성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옆에 있는 14억 시장을 그냥 아무런 노력도 공부도 없이 공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드 문제로 혹독한 갈등을 치르고 난 지금이 어쩌면 제대로 ‘중국을 알고 중국인을 논하기’, ‘지중논인’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한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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