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

말테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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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직성이 풀리셨던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확실하게 처리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요약본 본문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말테 라우리츠 브릭게: 28세. 몰락한 덴마크 귀족 가문의 후예. 대도시 파리에서 작가의 꿈을 일구며 가난과 고독과 투쟁. 이 수기는 그의 내적 투쟁과 발전의 기록이다.

아버지: 궁정 수렵 관리로서, 분명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녔다.
어머니: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모호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성격. 어머니의 기억을 통해 말테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깨닫는다.

아벨로네: 말테의 이모. 말테가 학생시절에 사랑했던 이상적 여인상

병과 죽음의 도시
사람들은 살겠다고 이 도시로 모여드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죽으러 오는 것 같다.

나는 거리로 나갔다.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만삭이 된 임산부가 벽을 따라 힘겹게 걷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병원, 병원들. 늦여름 거리에서 풍기는 온갖 냄새들 속에 불안이 깃들여 있다. 유모차에 실린 어린아이는 불안으로 가득한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잔다.

도시는 휴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밤새도록 끊임없이 들려오는 전차 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창문을 열어놓고는 도저히 잠들 수 없다. 그러나 때로는 소음보다 더 무서운 정적의 순간도 있다. 도시의 무지막지한 소음 뒤에는 무서운 결말 직전의 숨막힐 듯한 끔찍한 고요가 가라앉아 있다.

파리에 온지 삼 주 째. 나는 이미 나 자신도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변했으니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편지를 쓸 수 없다. 이제부터 혼자서 삶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병원들은 나에게 두려움을 자극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디외 병원에는 지금 559개의 침대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와 똑같은 방식으로 숨을 거둔다.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품을 찍어내듯 병원이 죽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온 삶의 결실로서 고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오늘날 불가능해졌다.

죽음이 고유함을 잃었다면, 그것은 삶이 고유함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예전에는 열매가 씨를 갖고 있듯이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갖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작은 죽음을, 어른은 큰 죽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특유한 침착함과 조용한 품위를 지닐 수 있었다.

나는 궁정 시종이셨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한다. 울스고르의 영지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너무도 느리게 죽어가셨다. 삶을 끈질게 붙잡으려 하셨다. 할아버지가 평생 강하게 사셨던 것처럼,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수종(水腫,살갗에 림프액이나 장액이 괴어 붓는 병)은 엄청난 위력으로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밤낮 고통으로 신음하는 할아버지는 어느 한 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하인들을 시켜 온 집안을 계속 옮겨다니게 했다. 그래서 가족과 하인들, 심지어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겪어야 했다.

할아버지다운 죽음이었다. 할아버지가 평생 다 보여주지 못했던 교만과 의지, 지배력의 여분이 모두 터져 나와서 그 막바지에 폭군처럼 군림했던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뿐이다. 나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밤에도 자지 않고 글을 쓰기로 했다. 보는 법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돌이켜 본다. 스물 여덟 해를 사는 동안 내가 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쓴 거라고는 유치한 글 나부랭이에다 어설픈 희곡뿐이다. 시도 썼다. 그러나 젊어서 쓰는 시는 훌륭한 시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와 사람들, 온갖 물건들을 보아야 한다. 또 보는 것에 그치는 것 아니라, 숱한 경험과 추억들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이 되고 표정이 되고, 내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벌이 꿀을 모으듯 여러 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깊이와 향기가 모였을 때 어느 기적적인 순간에 비로소 한 행의 시구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빈민 아파트 5층 조그만 방에 앉아 있는 나, 말테 라우리츠 브릭게. 몰락한 덴마크 귀족 가문의 후손. 이 세상 그 누구도 여기 있는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내가 이 세계의 현상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상의 표면 아래 있는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이 초라한 방구석에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우스운 일 아닌가!

그러나 나는 생각하고, 또 쓸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이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기에.

과거와 현재
내가 열 두 세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우르네클로스터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 데리고 가셨다. 연금술과 시체 해부에 몰두하는 퇴역 장교인 숙부, 어머니의 먼 친척인 마틸데 브라에 양, 그리고 내 나이 또래의 에릭이 그곳에 묵고 있었다. 나는 누구와도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그저 개를 데리고 숲과 들을 쏘다니면서 소일하며 지냈다. 저녁 일곱 시에는 모든 식구가 모여 식사를 했는데, 어두컴컴한 식당에 앉아 있으면 바깥 세상과 동떨어져 신비한 공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느날 저녁 마틸데 양이 식당에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틸데는 어디 아픈가요?”라고 묻자 외할아버지는 “아니, 크리스티네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구나.” 라고 대답하셨다. 긴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먹을 무렵이었다. 어두운 식당의 한쪽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더니 우리가 앉아 있는 옆을 초연히 지나서 반대편 문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몹시 놀란 기색으로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담담하게, “크리스티네 브라에야. 여기 있을 자격이 있는 애지.” 라고 대답하셨다. 그 대답에 파랗게 질린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놀라 방으로 뛰어 올라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마틸데 양이 찾아와 나를 위로하면서, 아까 본 여자는 오래 전에 둘째 아기를 낳다 죽은 가엾은 크리스티네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와 내가 우르네클로스터에 8~9주일을 머무는 동안 크리스티네의 유령은 그 후로도 세 번 더 나타났다.

오늘 나는 국립도서관에 앉아 더없이 조용하고 예의바른 분위기 속에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가난뱅이인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아직 내 셔츠 깃은 더럽혀지지 않았고 내의도 깨끗하다. 하지만 거리에 나가면 내 실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운명이 내뱉은 타액과 같은 인생의 낙오자들, 걸인들, 행상 노파, 그들은 내가 자기네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간파하고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나는 두렵다.

결국 나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 뜰에는 가난과 병에 찌든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이리저리 거닐었다.

결국 나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 뜰에는 가난과 병에 찌든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들 사이에 끼여 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 담당의사가 나왔기에 곧 내 차례이겠거니 했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빨리 빨리 간결하게 말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증상을 되도록 잘 말하려고 애를 썼지만 의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사는 나에게 다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복도에 나오니 약 냄새, 사람 냄새로 공기는 더 탁했다. 창문을 좀 열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간호사는 창을 여는 건 금지 사항이라고 하였고, 복도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금지된 일이니 꼼짝말고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나는 빈 자리로 가 앉았다. 내 양옆에는 눈이 튀어나오고 잇몸이 썩고 있는 소녀와 시체처럼 꼼짝 않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으니 묘하게도 마치 내가 항상 머물러야 할 그 자리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마음속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였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어제는 열이 내렸다. 국립도서관에 가는 길에 나는 카페 앞을 쓸고 있는 종업원들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발에 무엇이 걸린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좀 의아한 느낌이 들어 사내를 쫓아가 확인해 보았지만 바닥에는 발에 걸릴 만한 장애물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그를 계속 따라갔다. 몇 분 후 그 사내는 갑자기 껑충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외투의 깃을 붙잡고 바르게 접어 젖히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사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내는 짚고 가던 지팡이를 등뒤로 가로질러 쥐고 터져 나오는 그것을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내부에 있던 발작 증상은 그의 몸을 뚫고 폭발하고 말았다. 지팡이는 내동댕이쳐졌고, 사내는 날아가려는 사람처럼 양팔을 쭉 벌렸다. 그리고 그의 몸은 끄덕거리고 구부러지고 뒤로 젖혀지다가 마침내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팡테옹에서 성녀의 그림을 보았다. 성녀의 고즈넉한 모습, 지붕과 문, 멀리 보이는 도시, 달빛 비치는 원경이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동안 나는 변화된 현실과 나 자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돌이켜볼 수 없었다. 그렇다, 인생의 모든 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시인 보들레르처럼, 나 또한 선택도 거부도 하지 않고 현실의 모든 면을 포용해야 할 것이다. 설령 아무리 추한 현실이라 해도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기대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공기 하나하나마다 스며 있는 공포. 어느 곳으로 도망쳐도 그 무서운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위안이 될까? 아니, 빛이 없는 어둠 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안전할지 모른다. 아무 것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아예 어둠과 하나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굳게 잠근 문. 사방을 휘감은 정적. 어렸을 때 그렇게 무서웠던 밤을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는 어머니가 계셨다. 공포에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는 달려와 불을 밝혀주고 “엄마야, 무서워하지 마” 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당신은 당신을 찾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셨습니다. 아이 앞에서 모든 공포를 가로막아 주신 것은 바로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어머니는 섬세하고 연약한 분이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딱딱한 것은 전혀 드시질 못했다. 나중엔 바늘에 대한 불안으로 시달리셨다. 어딘가에 바늘이 떨어져 있어 찔릴까 봐 두려워 하셨다. 하지만 죽은 잉게보르크에 대해 말씀하실 때만큼은 불안을 잊으셨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잉게보르크의 추억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것은 소녀의 장례식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가족들이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우편배달부가 올 시간이었다. 우편물을 받아 갖고 오는 것은 늘 잉게보르크의 일이었지만, 그 애가 오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그 애가 ‘정말’ 나타났다. 개의 눈에 뭐가 보였는지 아이를 마중하러 뛰어간 것이다. 잉게보르크가 올 때 늘 그랬던 것처럼 개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의 주위를 즐겁게 빙글빙글 뛰며 낑낑거리기도 했다. 개의 행동을 보던 모든 사람은 그 순간 잉게보르크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그 애가 정말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개는 공중으로 펄쩍 한번 뛰어오르더니, 땅에 툭 떨어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죽은 것이었다.

잉게보르크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어머니에게 ‘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고 유모는 내 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을 탄 기사를 그리다가 빨간색 색연필이 필요해서 집으려는데 그것이 데구루루 굴러 탁자 밑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나는 억지로 의자에서 내려와야 했다. 어둠침침한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 불빛과 선명한 색상에 익숙해 있던 내 눈은 아무 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손으로 더듬거렸지만 색연필은 잡히지 않았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눈은 차차 어둠에 익숙해져서 내 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움직이는 손이 물 속에서 조용히 헤엄치는 동물처럼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난 무서움에 소스라쳤다. 저 벽에서 내 손보다 더 큼지막한 손 하나가 기어 나오는 것 아닌가! 나는 정신없이 탁자 밑에서 빠져 나와 의자 위로 기어올라갔다. 부들부들 떠는 나를 보고 놀란 유모가 읽던 책을 내던지고 달려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공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무렵에 벌써 인생은 자기 혼자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할 기묘한 경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열병을 앓았다.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왜 소리를 지르는지 이유를 물으셨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느 밤에는 증상이 몹시 심각하여 유모가 하인들을 시켜 황태자가 개최한 무도회에 가신 부모님을 모셔온 적이 있었다. 그 밤 우아한 야회복 차림으로 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오신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조용히 울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맥을 짚어보신 후, 나를 보지도 않으시고 쓸데없이 부르러 보냈다며 중얼거리셨다.

또 이런 기묘한 경험도 했었다. 우리 집 위층에는 사용하지 않는 객실이 있었는데 나는 그 방에 몰래 들어가 장롱들을 하나씩 열고 그 속에 가득한 가지각색 옷들을 하나씩 입어보곤 했다. 거울 앞에서 색다른 내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 열어 본 장롱 안에는 가장무도회의 복장들이 있었다. 나는 그 옷들을 입으면서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면까지 쓰고 거울을 보니 완벽하게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실수로 탁자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탁자 위에 있던 것들이 요란하게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당황한 나는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갑해진 가면을 벗어보려고 했지만 얼굴에 꼭 끼어 도무지 벗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거울을 보니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니라 이상스럽게 헝클어진 복장의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이리저리 부딪히며 방을 뛰쳐나왔다. 엉엉 울면서 사람들에게 가면을 벗겨달라고 애원했으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도 모른 채 내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고 깔깔 웃기만 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 외할머니는 뵌 적이 없지만 친할머니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모든 일에 철저하고 단호했던 할머니는 뭐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구별할 능력이 없었던 어머니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키 크고 까다로운 이 노부인은 어린아이를 싫어했고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의 사교생활도 멀리한 채 울스고르의 시골에서 조용히 보냈다. 뭔가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소망을 몇 겹의 껍질로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신 적이 별로 없었지만 한번 크게 할머니와 부딪힌 적이 있었다. 중요한 손님들과 함께 식사하던 자리였는데, 할머니는 식탁에 잘못해서 엎지른 포도주 얼룩을 심하게 비꼬면서 쉴새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할아버지가 은근히 할머니를 저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포도주가 잔을 채우고 넘쳐 식탁 위로 흘러도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술을 부었다. 이 어이없는 광경에 모든 사람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다행히 어머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어질 수 있었다.

그후 할머니에게는 다른 버릇이 생겼다. 누가 아픈 것을 몹시 싫어하신 것이다. 할머니 앞에서는 약 냄새를 풍겨도 안됐고, 아프다는 말을 꺼내도 안됐다. 그래서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몹시 분개하셨다. 할머니는 시내에서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마치 할머니가 돌아가시길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할아버지의 그 끔찍스런 병이 시작되었다.

공포는 우리의 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 아벨로네 이모가 와서 어머니 대신 집안 일을 돌보게 되었다. 아벨로네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노래를 잘 불렀다. 나는 남자처럼 힘찬 목소리로 부르는 아벨로네의 노래를 듣기 좋아했다. 우리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나누다가 친해졌다. 얼마 후 울스고르를 떠나 소뢰의 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벨로네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편지도 써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연애편지였던 것 같다. 첫 여름방학을 맞아 설레는 가슴으로 집에 돌아갔을 때 정원에서 아벨로네와 마주쳤던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를 쳐다보며 반기던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벨로네는 외할아버지의 구술 작업을 도와주었던 일을 내게 들려주었다. 일종의 회고록 같은 것이었는데 흔히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정치나 군 경력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회고한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었다. 며칠 계속된 작업 중에 할아버지는 벨마레 후작이라는 기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는데, 먼 과거사를 마치 현재인 듯 깊이 몰두하여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할아버지가 아벨로네에게 “그가 보이느냐?”고 물으셨는데, 그 순간 아벨로네는 벨마레 후작의 모습을 정말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분이셨다. 할아버지처럼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가세는 많이 기울어, 울스고르의 영지는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우리는 시내에서 생활해야 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신 후에야 의사들이 찾아왔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늦게 나타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심장을 바늘로 찌르기 위해 왔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직성이 풀리셨던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확실하게 처리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의사들이 아버지의 심장을 바늘로 찔렀을 때 나는 아버지의 심장과 함께 우리 가문의 심장이 깊은 바늘로 뚫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브릭게 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내 마음속에서 울렸다.

아버지 사후에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품에 간직하고 있던 쪽지를 발견했다. 거기엔 크리스티안 4세의 임종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평생 강하고 반듯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도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죽음의 공포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공포는 곳곳에서 불시에 나를 엄습했다. 한번은 나폴리에서 전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는데, 차에 앉아 있던 소녀가 갑자기 죽었다. 어머니는 딸을 살려보겠노라고 악을 쓰며, 헛되이 상비약도 먹여보고 인형 같은 소녀의 몸을 흔들고 얼굴을 내리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그 전에, 이를테면 내가 키우던 개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나는 공포를 느꼈다. 개는 무언가 낯선 것이 다가온 것을 알았는지 나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던지다가 서운해하면서 죽어갔다.

혼자 있을 때 나는 공포를 느꼈다. 밤이면 쓸쓸히 홀로 죽어갈 것을 상상하면서 침대에 앉아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면 나는 필사적으로, ‘죽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지, 난 아직 살아있는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위로를 삼았다. 때로는 혹시나 창밖에는 희망이 있을까 하여 창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똑같이 차가운 밤이 끝없이 막막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 전부터 그러한 공포도 우리에게 속한 우리의 힘이라고 믿게 되었다. 아직 감당할 수 없기에 낯설고 두려울 뿐, 우리 내부의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것을.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여러 이웃이 살고 있다. 그들과 직접 접촉할 기회는 없었지만, 우연히 내 방에 잘못 찾아 온 사람을 통해서 옆방에 사는 니콜라이 쿠스미취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이 앞으로 살 세월을 생각해 보았다. 50년 정도는 족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50년의 세월을 날로 바꾸고 다시 시간으로 바꾸고, 분으로, 초로 환산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엄청난 숫자가 되었다. 그는 ‘시간은 돈’이라는 격언을 생각했다. 자신의 재산을 절약하여 남은 시간을 시간 은행 같은 곳에 맡기면 엄청난 부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은 남지 않았다. 오히려 초로 나누어진 시간은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흐르는 시간 앞에 어지러워진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누워서만 지내게 되었다.

어젯밤에 나는 소년 시절에 읽었던 녹색 책의 이야기 두 가지를 상기했다. 하나는 거짓 왕 그리샤 오트레피오프의 이야기다. 그리샤는 자신이 어릴 때 행방불명이 된 디미트리 왕자일 거라고 확실하게 믿었다. 대비가 그를 궁성으로 불러들였을 때만해도 그는 진실로 대비가 친어머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비가 자식으로 인정하고 민중이 그를 왕으로 추대했을 때 그의 내면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자, 그는 초라한 모방자와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가짜임이 폭로되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모두로부터 외면당하는 마지막 순간 그는 외부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자기 뜻대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자아의 가능성을 되찾게 된다.

또 하나는 화강암처럼 단단하여 변하지 않았던 샤를 대공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완고하고 포악한 그를 두려워했다. 그를 광포하게 만든 것은 그의 몸 속에 흐르는 뜨거운 피였다. 그 피로 인해서 그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자신의 피를 두려워 한 나머지 그는 술도 입에 대지 않았고 여인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공이 죽었을 거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어딘가에 강한 모습으로 살아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수색작업은 나중에야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마침내 얼음 밭에 쓰러져 있는 대공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러나 시신을 보고도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온 몸을 구석구석 살피며 조사해야 했다. 시신을 보자마자 대공을 알아본 것은 다만 어릿광대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서 신문을 파는 눈 먼 남자를 본다. 목소리가 너무 가냘파서 행인들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역시 타인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는 듯, 시계바늘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기 두려웠다. 그와 동류로 인정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직시했을 때, 내가 본 것은 비참함을 넘어선 그의 강인함이었다. 온 세상과 동떨어진 채 꿋꿋하게 서 있는 그의 존재는 오직 신에게 속한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비로소 도시의 버려진 자들로부터 나를 구분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들보다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병을 얻고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들은 겨울이 다가와도 언제나 똑같은 거리의 모퉁이에 서서 추위에 아랑곳없이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여자들은 수백 년간 사랑의 작업을 혼자 맡아왔다. 사랑을 한낱 유희로만 여긴 남자들은 산만함과 무신경으로 사랑을 방해했을 뿐, 밤낮 쉬지 않고 사랑하여 사랑을 깊게 만든 것은 여자들이었다. 사랑으로 여자들은 강해져서 남자들을 능가해버렸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지금, 이제는 남자들이 변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어머니와 레이스 천들을 펼쳐보았던 때가 기억난다. 섬세한 레이스의 아름다움에 우리는 정신없이 매혹되었다. 그것을 짠 이는 물론 여자들이었다. 어머니는 한참 경탄하다가 문득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것을 짜야 한다면 어떨까?…” 그때 어머니는 여자들이 그렇게 정성껏 레이스를 짰던 것처럼 삶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짜 나가야 할 우리의 사명을 뜻하셨던 것이 아닐까?

사랑받는 사람의 삶은 그릇되고 위험하다. 아름답게 장식되었지만 속이 텅 빈 보석함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처럼 사랑받는 사람의 미래에 남는 것은 허망함뿐이다. ‘사랑받음’은 불타 없어지는 것이요, ‘사랑함’은 고갈되지 않는 기름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사랑받음’은 덧없이 사라짐이요, ‘사랑함’은 영속이다.

사포는 사랑으로 앞서간 여인들 중 하나였다. 사포는 두 사람이 사랑으로 결합할 때 그것이 고독의 심화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둘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른 하나는 사랑받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을 멸시했다. 사포는 그녀가 사랑했던 약한 사람들을 그녀의 존재로 불살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그녀 곁을 떠나게 했다.

(아벨로네, 나는 그대의 사랑을 잘 기억합니다. 학창시절 그대와 함께 했던 나날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울스고르의 서재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 기억하나요? 그대는 내게 올바로 독서하는 법도 가르쳐주었지요. 무엇보다도 그대는 내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 자연의 힘처럼 모든 것을 성장시키는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아니,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삼 년쯤 전 베니스에 갔을 때, 어느 사교모임에서 한 소녀가 노래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 그대를 붙잡지 않았기에 나 그대를 굳게 안을 수 있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그대의 조건 없는 사랑을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벨로네는 고귀한 사랑의 능력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신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벨로네는 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신의 사랑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그리스도마저 기피했던 것이 아닐까? 구체적인 사람의 형상을 가진 그리스도가 신에게 이르고자 노력한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어 그들을 사랑 받는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피했던 것일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은 사랑의 방향일 뿐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의 사랑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만이 결국 신에게 이르는 길이므로.

나는 성서에 나오는 탕아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으로 내 기록을 마치려 한다. 이것은 사랑받는 것을 거부한 한 젊은이의 이야기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홀로 들판으로 나가 뛰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때로는 해적 두목이 때로는 해적선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유롭게 나는 새를 꿈꾸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그는 다시 가족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는 아이로 되돌아갔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난과 칭찬의 공유물이 되어야 했다. 마침내 그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고독한 생활 속에서 그는 종종 사랑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의 자유를 위해 마음을 썼다. 그가 원한 것은 대상을 감정으로 태워버리지 않고 온 존재를 구석구석 비춰 줄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얻기 위해 그는 돈과 젊음을 탕진하고 여자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며 절망 속에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존재 그 자체 이외에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신에 대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자각하였고, 자신의 내면을 차츰 확대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년 시절을 다시 한번 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완전히 변했음에도, 집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가족들의 한결같은 사랑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가족들은 이 행동을 다른 뜻으로 해석하여 그를 용서하고 일으켜 감싸주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가족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는 단 한 분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한 분은 아직 그를 사랑하려 하지 않았다.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무슨 소설이 이래? 뚜렷한 줄거리도 없고…” 『말테의 수기』를 접하면 누구라도 이 기묘한 소설 형식에 우선 당황하게 된다. 통일된 시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연속적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소설을 보는 시각으로 이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문학사는 현대소설의 새로운 어법을 보였다며 이 작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래봤자 난감해진 독자에게는 중요하게 들릴 리 없다. 그러면 이 작품은 문학사적 가치로만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기존의 소설에서 기대했던 것을 잠시 접고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기를 쓰는 주인공 말테는 몰락한 덴마크 귀족 가문의 후예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신세다. 지금 그는 낯선 도시 파리에 던져졌다. 조화롭고 조용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 대도시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현장이었다. 파리가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문화도시라고? 그게 다 무슨 말인가! 밀집한 군중, 개성을 잃고 몰락한 삶, 발전의 이면에 버려진 가난한 사람들 – 말테가 접한 현실의 모습은 극도로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기만 하다. 그는 이곳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해야 한다.

과거의 삶과 단절된 그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게다가 돈도 없다. 그러니 자신도 이름 없이 무의미하게 죽게 되지 않을까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 불안을 딛고 살아남아야 한다. 자, 그렇다면 이전 세계가 모두 사라진 낯선 현실 속에 홀로 남은 사람이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우선 그가 해야할 일은 세상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현상들을 하나하나 보고 익히는 것이다. 물론 스물 여덟 살이나 먹은 사람이 단순하게 시각적 인지만을 습득할 리는 없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관찰함으로써 현상에 들어 있는 의미를,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말테가 보는 법을 배운다고 누차 말하는 것의 본뜻이다.

말테가 현대인의 삶의 공간인 대도시에서 목도한 것은 우리가 흔히 ‘인간소외’라고 부르는 부정적 현상들이다. 거기서 야기되는 불안과 공포를 친구라도 있으면 술이라도 한 잔 하며 풀어볼 텐데 그에겐 의논할 사람조차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체험, 죽은 사람들에 대한 추억, 어렸을 때 읽었던 이야기책, 그런 기억의 도움으로 현재의 현상들을 해석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현재 접하는 죽음의 공포, 정체성 혼란의 문제 등은 이미 어린 시절에 체험했던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외부 세계에서 인지한 것을 자신의 내부에 있었던 기억과 만나게 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돌파구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의 제목에 왜 ‘수기’라는 낱말이 붙었는지, 그리고 왜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71편의 단장(斷章)들로 구성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형식적 특징은 곧 이 작품의 주제와 상통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이 어떻게 수미 일관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단편적으로 분해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인상을 그렸다가, 과거를 떠올렸다가, 상상하기도 하고 사색하기도 하고 한 마디로 정신이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말테 한 사람만이 그렇게 혼란스런 상태인가? 어쩌면 말테는 20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산업화와 도시화, 거기서 빚어진 비인간화의 현장 속에서 자연과 유리되고 전통과 단절된 채 삶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지 않은가.

세상을 조망할 수 없고 소통이 단절된 시대. 그것은 곧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대다. 말테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던 외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본질을 짚어 이야기를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당연히 말을 다루는 문학도 말테의 고민이자 릴케 자신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테의 수기』는 그 전체가 ‘이야기하는 법’의 모색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의 문제를 다루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사회적 시각으로 비판하기도 하고, 카프카처럼 음산한 우화를 통해 이를 빗댄 이도 있었다. 그러나 릴케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회 문제나 그 인식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릴케를 비난하는 사람도 무지하게 많다!) 릴케가 주목한 것은 개인의 문제, 즉 “한 인간이 현실을 어떻게 지각하고 극복하는가”하는 문제였다. 예컨대 어린 말테의 ‘손’ 체험이나, 변장을 했다가 자아를 상실하는 체험 등은 타인은 이해할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틀림없이 끔찍스러운 현실이다. 또 도시 빈민들, 환자들의 모습도 모두 말테의 내면에 비쳐져 수용되고 해석된 상이다. 릴케는 이렇게 개인의 고유한 체험을 존중하고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을 보증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언뜻 관련 없어 보이는 단장들이 커다란 흐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에서 시작하여 차츰 사랑의 테마로 옮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주인공의 의식 발전을 말해준다. 대도시의 부정적 인상에서 출발한 말테는 결국 추하고 사악한 모든 현실을 두려움 없이 수용하겠다고 결심함으로써, 적극적인 사랑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테의 수기』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곧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이 사랑은 어떤 대상도 객체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대상을 자유롭게 성숙시키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의 관념으로 상승한다. 실로 감동적인 메시지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에 이 사랑은 구도의 성격마저 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신에게 이르는 방향인 것이다.

『말테의 수기』는 “하지만 그 한 분은 아직 그를 사랑하려 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일단락 되며, 완전한 종결에 도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사랑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수기의 결말은 끝이 아니라 출발을 의미한다.

주인공 말테가 이후에 ‘과연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였을까?’ 하는 문제는 답 없이 열려 있다. 사랑은 방에 틀어박혀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말테는 그 첫 시도로, 옆방의 니콜라이 쿠스미취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주고 이제껏 자신이 보고 깨달았던 삶의 진실들을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이야기 해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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