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코필리아

뮤지코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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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올리버 색스 지음
알마

책소개

책의 제목이기도 한 뮤지코필리아(Musicophilia)는Music(음악)과 Philia(사랑)의 합성어이다. 인간 본성 속에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음악적 성향을 선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뇌와 음악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음악이 인간의 마음에 작동하는 독특한 방식과 오류 가능성을 담아냈다.

요약본 본문

제1부 음악에 홀리다

번개 맞고 갑자기 음악을 사랑하게 된 남자
토니 치코리아는 마흔 두 살의 건장한 남자다. 대학 때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고, 지금은 뉴욕 주 북부의 작은 도시에서 꽤 유명한 정형 외과의로 살고 있다. 어느 가을 오후 치코리아는 호숫가 차일 아래서 열린 가족 모임에 나갔다. 산들바람이 부는 멋진 날씨였지만 저 멀리로 폭풍을 동반한 구름이 보였고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공중전화를 찾아 차일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1994년은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전이다). 뒤이어 일어난 일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하더니 멀리서 번개가 치더군요.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뭔가에 얻어맞았습니다. 전화기랑 한 30센티미터 떨어져 있었나, 전화기에서 새어 나온 빛이 얼굴을 때린 거예요. 그러고는 몸이 뒤로 날아간 게 기억납니다.” 번개를 맞은 지 석 달만에 느긋하고 가족적이며 음악에는 거의 무관심했던 치코리아는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대신 그는 음악에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자신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목숨을 부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음악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종교가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특별히 계율을 지키는 편은 아니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영혼의 환생 같은 ‘이단적인’ 개념도 믿는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점차 자신이 환생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바뀌었고, 반은 은유적으로 표현한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특별한 능력과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여겼다. 음악은 끊임없이 “폭포수처럼 연이어” 음을 쏟아낼 때가 많았으므로 그는 음 사이에 적절한 형식을 부여해야 했다.(그의 말을 듣는 순간 7세기에 활약한 앵글로색슨계 시인 캐드몬이 생각났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염소지기였던 그는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천사의 노래를 듣게 되었고, 그 뒤로 신을 찬미하고 찬송가를 만들고 시를 짓는 것으로 남은 평생을 보냈다.) 치코리아는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계속해 나갔다. 기보법 교재를 구입했고 이어 자신에게 음악 선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연주자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자기 동네에 사는 음악가들과 친교를 나눈다거나 함께 음악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치코리아에게 음악 활동은 오직 자신과 뮤즈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고독한 행위였다. 나는 그에게 번개를 맞은 뒤로 다른 변화는 없었는지, 예컨대 미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거나 독서 취향이 바뀌었거나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되었거나 하는 일은 없는지 물었다. 치코리아는 자신이 근사近死체험을 한 뒤로 “대단히 영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근사 체험과 번개에 관한 책을 거의 모두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고압 전류의 무시무시하고 아름다운 힘에 관한자료와 “테슬라Nikola Tesla(에디슨과 동시대를 살았던 세르비아 태생의 발명가로 특히 전기에너지와 전력 시스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그의 사상은 유사 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도 연결된다-옮긴이)에 관한 모든 문헌”도 뒤졌다. 그는 가끔 사람들 몸 주위로 빛이나 에너지로 이루어진 “오라aura”를 본다고 했다. 번개를 맞기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뇌벌레, 끈질기게 들러붙는 음악, 귀에 쏙 들어오는 선율
가끔은 정상적인 음악 상상이 도를 넘어 병적인 수준에 이를 때가 있다. 음악의 특정 부분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계속 미칠 듯이 울려댄다. 보통 서너 마디 정도의 잘 만들어진 짧은 소절이나 주제가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다 사라지곤 한다.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현상을 볼 때, 문제의 음악이 엉뚱하거나 시시하거나 취향에 맞지 않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음악인데도 그런 현상이 나타날 때, 우리는 음악이 뇌의 특정 부위에 들어와 그것을 교란시키고(틱 증상이나 발작처럼) 강제로 신경을 반복적이고 자동적으로 발화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영화나 텔레비전 쇼의 주제곡이나 광고음악으로 시작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음악은 음악 업계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듣는 사람을 “흐리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귀에 쏙 들어오거나”, “착 들러붙으며” 집게벌레처럼 구멍을 뚫고 듣는 사람의 귀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귀벌레(earworm)’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은 그보다는 ‘뇌벌레brainworm’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1987년 한 뉴스 잡지에서 반은 농담 삼아 뇌벌레를 “인식력을 갖춘 전염성 있는 음악 대리인”이라고 정의했다.) 내 친구 유네스는 제임스 반 휴슨이 작곡한
<러브 앤 매리지 Love and Marriage>에 착 들러붙게 된 사연을 말해준 적이 있다. 그는 한 텔레비전 쇼의 주제곡으로 사용된 프랭크 시나트라의 버전으로 이 곡을 들었는데 한 번만 듣고도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노래의 템포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노래는 그 뒤로 거의 열흘 동안이나 그의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맴돌았다. 끊임없는 반복으로 이 노래는 금세 매력과 활기, 음악성과 의미를 잃었다.

내가 처음으로 뇌벌레를 겪은 지 6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이를 떠올리기만 하면 바로 불러올 수 있다. 많은 뇌벌레가 대단히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마음에 각인되는 데 음이나 선율의 특징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론 의미와 감정도 끼어든다. 나의 뇌벌레는 유대인이 기도를 올릴 때 부르던 노래로 유대인의 역사와 유산, 훈훈한 가족애 같은 것이 함께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 가운데 하나는 유월절 밤에 식사를 마치고 부르던 <해드 가디아Had Gadya>(아람어[Aramaic]로 ‘작은 염소’라는 뜻)였다. 반복하면서 점층 되는 구조로 가족들이 돌아가며 여러 번(히브리어로) 부른다. 절이 이어질수록 추가 부분은 점점 길어지고 애도의 분위기를 강조하는 슬픈 4도 음정(계명으로 하면 ‘도’에서 ‘파’사이의 거리-옮긴이)으로 마감된다. 단조에 여섯 개의 음으로 이
루어진 이 짧은 소절은 노래 전체를 부르는 데 46번(내가 세어봤다!)이나 반복된다. 이 정도면 거의 머리에 박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곡은 유월절 축제가 열리는 여드레 동안 하루에 수십 차례나 내 마음속에서 불쑥 튀어나왔고, 다음해 축제 때까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은 순전히 반복과 단순함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기묘한 4도 음정이 자체 신경 회로를 만들어 활성화를 촉진하기 때문일까? 혹시 노래가 담고 있는 냉혹한 유머나 엄숙한 의전이라는 맥락도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래에 가사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미션 임파서블 Mission Impossible>의 가사 없는 주제곡이나 베토벤 5번 교향곡 역시 가사와 음악이 긴밀하게 연결된 광고음악(가령 알카셀처 진통제 광고에 나오는 “플롭플롭 피즈피즈” 하는 노래나 키켓 초콜릿 광고의 “김미 어 브레이크” 하는 노래)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제2부 놀랍고도 풍부한 음악성의 세계

코 푸는 소리가 ‘사’음으로 들려요: 절대음감
절대음감의 소유자들은 어떤 음을 들어도, 생각하거나 다른 기준을 들어 비교하지 않고도 바로 어떤 음높이인지 알아맞힌다. 실제로 음을 들을 때는 물론 머릿속으로 상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직업 바이올린 연주자 고든 B.는 이명(귀울림 현상) 때문에 괴롭다고 내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귀울림이 “높은 ‘바’음”의 음높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하지만 이명에 시달리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이명이 무슨음높이인지 아는 사람은 1만 명 가운데 한 명 정도에 불과하다. 절대음감의 정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절대음감의 소유자 대부분은 가청 범위 내에서 대략 70개 정도의 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70개의 음 모두가 서로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옥스퍼드 음악 안내서The Oxford Companion to Music』는 어렸을 때 읽은 『아라비안나이트』만큼이나 내가 흥미진지하게 읽었던 책이다. 여기에 보면 음악에 관한 온갖 사연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데, 물론 그 가운데는 절대음감을 다룬 매혹적인 이야기들도 많다. 옥스퍼드의 음악 교수였던 프레더릭 우슬리경은 “평생 뛰어난 절대음감으로 유명했다. 다섯 살 때 이미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아빠가 코를 풀면 ‘사’음의 소리가 나요.’ 그는 천둥소리는 사, 바람소리는 라, 정각을 알리는 시계소리는 나단조라고 말했고, 확인해보면 모두가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처럼 정확하게 음높이를 알아맞히는 능력을 보면 무시무시하다고 여긴다.

마친 맨눈으로 적외선이나 엑스레이를 보는 능력처럼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별난 감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음감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정상적인 일이다. 핀란드의 곤충학자 올라비 소타발타Olavi Sotavalta는 날아다니는 곤충 소리의 전문가로 절대음감을 가진 덕분에 자신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날아다니는 곤충의 날갯짓은 일정한 음높이를 유발시킨다. 소타발타는 음악 기보로 만족하지 못하고 정확한 주파수까지 추정해냈다. 일례로 ‘플러시아 감마’라는 나방이 만들어내는 음높이는 낮은 올림바에 가까운데, 소타발타는 그 소리가 정확하게 초당 46회 진동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그런 능력을 갖추려면 뛰어난 귀는 물론이고, 음계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음높이와 주파수의 상관관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상관관계도 무척 인상적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절대음감이라는 놀라운 현상 자체다. 절대음감의 소유자에게는 모든 음, 모든 조성이 질적으로 차별화된다. 각각이 독특한 ‘풍미’, ‘느낌’ 또는 성격을 가진다. 이들은 음을 종종 색깔에 비교하곤 한다. 가령 파란색을 ‘보며’ 자동적으로 즉각 올림사 음을 ‘듣는’ 식이다.(사실 ‘채도[chroma]’라는 용어는 음악 이론에서도 종종 사용된다.) 절대음감은 어떤 음악이든지 정확한 음높이로 부르고 받아 적을 수 있게 해줌으로 달콤한 축복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문제가 있다. 악기 조율이 대표적인 예다. 모차르트는 일곱 살 때 자신의 바이올린과 친구 샥트너의 바이올린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지난번에 너의 바이올린을 연주한 뒤로 조율을 새로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바이올린보다 8분의 1음 낮을 거야.”(이 에피소드 또한 『옥스퍼드 음악 안내서』에 나와 있다. 여기에는 모차르트의 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은데 일부는 출처가 의심스럽다.)

살아 있는 스테레오: 귀는 왜 두 개일까
1996년부터 노르웨이의 내과 의사인 요르겐 요르겐센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는 감각신경에 있는 청신경종(acoustic neuroma) 제거 수술을 받은 뒤로 오른쪽 청력을 완전히 잃었는데, 음악을 감상하는 능력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했다. “음높이나 음색 같은 특징은 예전과 다름없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손상되어 밋밋하고 이차원적으로 들립니다.” 예전에는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을 들으면 “온몸이 압도되는” 듯한 강렬한 경험을 했다. 그런데 수술을 받고 얼마 뒤 음악회에 가서 말러 7번 교향곡을 들었는데 “절망적일 만큼 밋밋하고 시시하게” 들렸다고 한다. 6개월 정도 지나자 그는 이런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가짜 스테레오(pseudostereon) 효과를 얻었는데 비록 예전 같지는 않아도 상당한 보상이 따릅니다. 음악이 스테레오로 들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광대하고 풍성하게 들립니다. 가령 말러 교향곡 5번 개시부의 장송행진곡에서 트럼펫이 음울한 장례 행렬을 알린 다음 오케스트라 전체가 포르티시모로 울리면 나는 의자 위로 온몸이 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상실에 대한 나의 심리적 적응일지도 모릅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실로 멋진 도구입니다. 제 기능을 하는 왼쪽 귀에서 들려오는 정보를 받으려고 청력 섬유조직이 뇌량을 건너온 것 같아요. 그리고 나의 왼쪽 귀가 일흔 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니얼 레비틴에 따르면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실로 여러 속성 또는 ‘차원’을 지각한다.” 이 가운데에는 음조, 음높이, 음색, 음량, 템포, 리듬, 윤곽(선율이 오르내리는 전체적인 모양)이 포함된다. 실음악증이라고 하면 이런 속성 가운데 일부 또는 전부의 지각이 손상되는 것을 떠올리겠지만 요르겐센은 이런 의미의 실음악증이 아니었다. 멀쩡한 왼쪽 귀의 지각은 정상이었다. 레비틴은 여기서 두 가지 차원을 더 언급한다. 공간 위치는 “소리의 출처가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음악이 연주되는 방이나 홀의 크기와 결합하면…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노래하는 것과 욕실에서 노래하는 것이 구별된다.” 그리고 반향은 “감정을 전달하고 전체적으로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대개 과소평가된다.” 요르겐센이 스테레오로 듣는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연주회에서 그는 바로 이런 특징들, 공간감, 부피, 풍성함,울림을 듣지 못했고 그래서 음악이 “밋밋하고 시시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의 사례는 한쪽 눈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입체적으로 깊이 있게 보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의 경험과 유사하다. 입체감을 잃어버리면 그 여파는 깊이와 거리감을 판단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지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전체적인 시각 세계가 “밋밋하게”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공간적으로, 정서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양안시 기능을 되찾으면 세상이 다시 시각적으로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다가와 기쁨과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양안시가 회복되지 않더라도 서서히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의사 요르겐센이 설명한 것과 유사한 적응으로 마치 양쪽으로 보는 듯한 착시 효과(가짜 스테레오 효과)가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가짜 스테레오’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진짜 스테레오 감각은 우리의 뇌가 두 개의 눈이나 두 개의 귀로 전달되는 입력 자료의 불일치로부터 깊이와 거리(그리고 낭랑함, 공간감, 부피감 같은 특징)를 추론해내기 때문이다.

제3부 기억과 동작, 그리고 음악

말과 노래: 실어증과 음악 치료
새뮤얼 S.는 육십 대 후반에 뇌졸중을 앓고 나서 심한 표현성 실어증을 보였다. 2년 뒤 언어 치료를열심히 받았지만 단 한마디도 되찾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음악 치료사인 콘체타 토메이노가 어느 날 병원 밖에서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올 맨 리버 Ol’ Man River>를 감정을 실어 아주 정확하게 불렀는데 가사는 고작 두세 단어밖에 따라 하지 못했다. 콘체타는 비록 언어 치료로는 새뮤얼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며 포기한 상태였지만 음악치료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주일에 세 차례 30분씩 그를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가 노래할 때 같이 따라하거나 아코디언으로 반주를 해주었다. S씨는 금방 콘체타와 함께 <올 맨 리버>의 가사를 모두 따라했고, 이어 자기가 1940년대에 자라면서 배웠던 발라드와 노래의 가사도 불러냈다. 그러면서 점차 말을 되찾기 시작했다. 치료를 시작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그는 질문을 받으면 짧지만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주말에 집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으면 S씨는 “재미있게 지냈어요” 또는 “애들과 놀았어요” 하고 대답했다. 신경학자들은 보통 ‘언어부위’가 우세반구(보통 좌반구) 전두엽의 전 운동 영역에 있다고 한다. 이곳의 특정한 부위 – 1862년 프랑스의 신경학자 파울 브로카가 처음으로 확인한 부위 – 가 퇴행성 질환이나 뇌졸중 또는 외상으로 손상되면 말하기 능력이 상실되는 ‘표현성’ 실어증이 일어난다. 1873년 카를 베르니케는 왼쪽 측두엽에서 또 다른 언어 부위를 확인했다. 이곳을 다치면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이를 ‘수용성 실어증’이라 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뇌 손상이 음악적 표현이나 이해의 교란, 즉 실음악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일부 환자는 실어증과 실음악증을 모두 겪지만 실음악증없이 실어증만 나타나는 환자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는 언어적 존재로서 무엇을 생각하든 언어로 표현해내며 그것도 대개는 즉각적으로 해낸다. 그러나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은 언어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이 대부분 사라져 심한 좌절과 고립감을 겪는다. 설상가상 그들은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남들한테 바보 취급을 받거나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런데 이제 그런 환자들도 노래를 할 수 있고, 그것도 단순한 곡조만이 아니라 오페라와 찬송가 가사까지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당한 변화의 가능성이 생겼다. 무능하고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상당 부분 완화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래는 명제적인(propositional) 소통 양식은 아니지만 아주 기초적인 존재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살아 있어요. 여기 있잖아요”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고와 감정도 전한다. 따라서 가사를 따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실어증 환자들에게 대단한 위로가 된다. 언어 능력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비록 음악의 도움이 있어야 하지만 언어가 그들 ‘안에’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말 자체도 그저 단어를 적절한 순서로 연결해 놓은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형 변화, 억양, 템포, 리듬 그리고 ‘선율’이 있다. 언어와 음악 모두 기초적인 발성 기제와 조율 기제(영장류에도 존재한다)가 있어야 하고, 이를 이해하려면 복잡하고 분절된 소리와 재빠르게 바뀌는 소리의 흐름을 전담하는 뇌 기제(이것은 인간에게만 있다)가 필요하다. 뇌에서 말과 음악을 처리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가(몇몇은 중복된다) 있다.

음악치료는 문장 구조가 아니라 말의 시동을 거는 능력이 손상된 이른바 역동성 실어증(dynamicaphasia)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다. 역동성 실어증 환자는 말을 극히 드물게 할 뿐, 일단 말을 시작하면 구문적으로 정확한 문장을 말한다. 제이슨 워렌 등은 전두엽이 약간 퇴화되고 역동성 실어증이 심한 한 노인이 음악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전한다. 노인은 피아노를 쳤고, 악보를 읽고 쓸줄 알았으며, 매주 노래 그룹에 참가했다. 또한 낭창도 할 수 있었다. 워렌 등의 말에 따르면 “그는 율법서에서 무작위로 고른 구절을 강한 억양으로(가창이나 일상적인 읽기와 구별되는) 또렷하고 크게 읽어냈다. 많은 실어증 환자들은 노래 가사를 배우는 것 말고도 요일이나 개월처럼 연속되는 정보나 수열을 배워 암기할 수 있다.

박자를 맞춰요: 리듬과 동작
1974년은 내게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해였다. 음악 환청을 두 번이나 겪었고 실음악증 발작도 두 차례 일어났으며, 훗날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었다A Leg to Stand on』에서 설명한 음악 운동사건도 바로 그해에 일어났다. 당시 나는 노르웨이에서 산을 오르다 끔찍한 등반 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의 대퇴사두건(quadriceps tendon)이 찢어지고 주변 신경이 손상되었다.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어 어떻게든 해가 지기 전에 하산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나는 곧 하반신 불수 환자가 휠체어에서 하듯 스스로를 ‘노 저어’ 내려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어렵고 서툴렀지만 비트가 강한 행진곡이나 배의 닻줄을 끌어당기는 노래(<볼가 강의 뱃노래>같은 곡)를 부르며 리듬을 타자 한층 수월해졌다. 몸 전체를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박자에 맞춰 음악에 몸을 맡겼다. 만약 음악과 동작, 청각 신경과 운동 신경의 이런 일치가 없었다면 아마 산을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속 리듬과 음악 덕분에 끔찍하고 조마조마한 고투가 그나마 참을 만했다. 산을 반쯤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구조된 나는 병원으로 옮겨져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깁스를 했다. 이어 영국으로 후송되어 사고가 난지 48시간만에 힘줄을 잇는 수술을 받았다. 마친 신경과 조직이 치유되는 데 시간이 걸렸고, 2주 동안은 다리를 전혀 쓰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감각을 잃고 마비가 되어 내 몸의 일부가 아닌 듯했다.

누군가가 내게 멘델스존의 마단조 바이올린 협주곡 테이프를 주었다. 당시 내 수중에는 그 테이프밖에 없어서 2주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그 음악만 들었다. 그러고 나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협주곡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매우 생생하게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보행 동작의 자연스러운 리듬과 선율이 내게 돌아왔고, 다리의 감각도 돌아와 다시 내 몸의 일부로 느껴졌다. 이렇게 나는 걷는 법을 문득 ‘기억해냈다.’ 하지만 새롭게 터득한 보행의 바탕을 이루는 신경은 여전히 연약해서 조금만 힘을 써도 녹초가 되었다. 그래서 30초 정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 마음속에 생생히 울리던 바이올린 협주곡이 마치 턴테이블의 바늘이 위로 들리듯 갑자기 멈추었다. 그 순간 걸음도 멈추었다. 그러면 한참을 쉬어야 다시 음악과 동작이 함께 돌아왔다. 내가 산에서 내려올 때 불렀던 단순한 뱃노래든, 병원에서 일어났을 때 마음속으로 상상했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든, 내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음악이 가진 리듬 또는 비트였다. 엉덩이뼈가 골절된 내 환자의 경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음악의 리듬이나 비트만으로도 충분할까, 아니면 음악의 선율과 움직임, 추진력도 마찬가지로 중
요한 것일까? 음악은 보행과 춤의 반복 동작을 가능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뭔가를 조직하고, 정교한 연속 동작을 따라하게 하고, 많은 양의 정보를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음악이 갖는 서술의(narrative) 힘 또는 기억의 힘이다. 시력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평범한 사물을 알아보거나 분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내 환자 P.박사가 좋은 예다.(주로 시각에 문제를 일으키는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내가 건넨 장갑이나 꽃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한번은 자신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했다. 그의 상태는 거의 구제불능일 만큼 심각했지만 하루에 해야 할 일을 노래로 만들어주면 그대로 실행할 수 있었다.

제4부 정서와 정체성, 그리고 음악

애도의 노래: 음악과 우울증
로버트 버튼은 『우울증의 분석The Anatony of Melancholy』에서 음악의 힘에 대해 길게 논의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젊은 시절 우울증이나 무쾌감증에 빠질 때마다 음악만이 이를 극복하고 잠시나마 행복의 감정과 살아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고 했다. 밀이 겪어야 했던 우울증은 아버지가 세운 무자비한 교육 방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밀이 세 살 때부터 지적인 연구와 성취를 끝없이 요구했으며 아들의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는커녕 이런 필요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어린 신동은 어른이 되자 음악을 제외한 어떤 것에서도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을 맞았다. 밀은 음악을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 아니어서 단지 쾌활하고 발랄한 선율을 좋아했고 모차르트와 하이든, 로시니를 모두 즐겨 들었다. 음악 레퍼토리가 바닥이 나서 의지할 음악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두려움이었다. 밀처럼 평소에 음악을 계속 필요로 하는 상황은 특정한 음악 작품이 특정한 시점에 누군가를 사로잡는 상황과는 다르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회상록 『보이는 어둠(Darlness Visible』을 보면 그 같은 경험이 나온다. 그가 자살을 시도하려고 할 때,

아내가 잠을 자러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비디오를 봐야 했다. 19세기 말 보스턴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어느 장면에 이르자 주인공들이 음악 학교의 복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담장 너머로 브람스의<알토 랩소디 Alto Rhapsody>의 웅장한 선율을 노래하는 콘트랄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모든 음악에 무감각한 상태였는데, 문득 이 곡조가 비수처럼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더니 이 집에서 있었던 즐거운 일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방안을 뛰어다니던 어린아이들, 축제, 사랑, 일 등의 기억이 마구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몇 차례 한 적이 있다. 특히 사별을 경험할 때였는데, 스타이런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무엇도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을 때 음악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이모 렌을 몹시 좋아했다. 어렸을 때 전쟁으로 런던이 소개蔬開되자 이모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모가 아니었다면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런 이모가 죽고 나서 갑자기 내 삶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놓고 슬퍼하지 못했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면서 일상을 이어갔지만 내 마음은 어떤 즐거움에도 반응하지 못하는 무쾌감증 상태가 되었다. 물론 슬픔에도 마찬가지로 무덤덤했다. 혹시나 음악이 내게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해서 연주회에도 가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연주 전체가 지루했다. 마지막 곡이 연주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지막 곡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곡으로, 역시 내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작곡가 얀 디스마스 젤렌카의 <예레미아의 애가(The Lamentations of Jeremiah)>라는 작품이었다(나중에 바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체코 작곡가라는 말을 들었다). 곡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
이 나왔다. 몇 주 동안 얼어붙었던 내 감정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젤렌카의 <예레미아의 애가>가 마음의 둑을 무너뜨리고 내 안에 막혀 있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준 것이다.

음악과 정체성: 치매와 음악 치료
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의 500명 정도 되는 신경 질환 환자 가운데 절반이 이런저런 종류의 치매를 앓고 있다. 원인으로는 뇌졸중, 대뇌 저산소증, 독성 약물이나 신진대사에 따른 기형, 뇌외상이나 감염, 전측두엽 퇴화, 그리고 가장 흔한 원인으로 알츠하이머병이 있다. 몇 년 전 동료 의사 도나 코엔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많은 환자들을 연구하여 공저로 『자아의 상실The Loss of Self』을 출간했다. 나는 여러 이유로 책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가족들이나 간병인에게는 분명 좋은 자료이지만) 그에 반박할 요량으로 이곳저곳을 오가며 “알츠하이머병과 자아의 보존”이라는 강의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의견이 다르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분명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은 병이 진행됨에 따라(이 과정은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다) 자신이 가졌던 많은 능력을 잃는다. 대표적인 초기 증상으로 기억상실이 있고, 이는 심각한 기억상실증으로 발전될 수 있다. 그런 다음 언어의 손상이 일어나고, 치매가 전두엽에 이르면 판단력이나 통찰력, 계획할 수 있는 힘 같은 더 미묘하고 심층적인 능력이 상실된다. 마침내 알츠하이머 환자는 자신의 상태, 특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인식 내지 마음의 측면을 일부 잃는 것을 가리켜 자아의 상실이라 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자크는 인간의 나이를 일곱 단계로 나누어놓은 것(Seven ages of man)을 살펴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마지막 나이를 본다. 하지만 심각하게 쇠약해지고 망가질 수는 있어도 아무것도 없는 완전 백지 상태인 사람은 없는 법이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제2의 유아기’로 퇴행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의 본질적인 면, 개성과 인격, 자 아는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도 거의 지워지지 않는 일부 기억과 더불어 여전히 살아남는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굳건하고 광대한 신경적 기초가 있어서 개성적인 스타일이 신경계에 깊이 각인되는 것 같다. 따라서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삶이 계속되는 한 결코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다.

존 베일리의 『아이리스Iris』(영문학자 존 베일리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죽은 부인인 작가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을 그리며 쓴 책. 2001년에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아이리스>가 제작되었다-옮긴이) 같은 회상록을 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음악에 반응하는 능력은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시점까지도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치매 환자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치료하는 기능은 운동 장애나 언어장애 환자의 경우와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파킨슨병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음악은 확고한 리듬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굳이 친숙하거나 정서적일 필요는 없다. 실어증 환자에게 들려주는 노래는 가사가 있고 억양이 풍부해야 하며 치료사와의 감정 교류도 필수적이다. 치매 환자의 감정과 인지력, 사고, 기억, 남아있는 ‘자아’를 자극하여 전면에 불러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존재를 살찌우고 넓히는 것, 자유와 안정감, 구조와 초점을 제공하는 것이 치매 음악 치료의 목적이다. 겉보기에는 마음이 없는 듯 멍하니 앉아 가끔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소리나 질러대는 중증 치매 환자들을 보면 과연 이들에게 이런 요구가 가능하기나 한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런 환자에게도 음악 치료는 가능한데 다른 모든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음악을 지각하고 느끼는 힘, 음악의 정서와 기억력은 한동안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맞는 종류의 음악은 그에게 방향키와 정박지 같은 존재이며, 이는 음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내 환자들을 보면서 이런 점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내게 보내오는 편지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한다. 한 남자는 자신의 아내에 관해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아내는 7년 전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지만 본질적인 자아는 기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매일 대여섯 시간 피아노를 치는데, 그것도 아주 잘 연주합니다. 현재 아내의 야심 찬 목표는 슈만의 가단조피아노 협주곡을 외워서 연주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음악을 제외한 다른 면에서는 건망증과 장애가 아주 심하다고 했다.(니체 역시 신경 매독으로 말을 잃고 치매와 부분 마비가 온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피아노를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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