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아트

미디어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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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트 – 예술의 최전선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책소개

오늘날 예술가들은 점점 더 첨단 기술에서 표현 수단을 찾는다. 반면 예술에서 점점 더 많은 영감을 얻고 있는 기술.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서 미디어아티스트들의 작업은 새로운 미학을
구성한다. 예술과 과학의 연금술사, 세계의 미디어아티스트
8명을 통해 예술의 최전선 미디어아트를 알아본다.

요약본 본문

가상현실은 미래를 리허설하는 공간이다

로이 애스콧(Roy Ascort)

영국 배스에서 태어난 로이 애스콧은 순수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1989년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린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현재는 플래니터리칼리지엄의 소장이자 영국 폴리머스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 부학장을 역임했고, 빈 응용미술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미니애폴리스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가르쳤으며,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 예술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텔레마티크 아트의 선구자인 그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엘렉트라 파리, 네덜란드의 V2, 밀라노 트리엔날레, 브라질의 메르코수르 비엔날레, 유럽 미디어 페스티벌에서 전시회를 가져왔다. 그 밖에도 CEC와 유네스코뿐만 아니라 유럽, 호주, 브라질, 캐나다, 중국, 일본, 한국, 미국의 뉴미디어센터와 축제에 대한 자문을 하고 있다.

예술과 아포리아, 가상현실에서의 트랜스액션

저는 오늘 예술과 아포리아, 가변현실(variable reality)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현대에는 가상적인 형태나 문화적인 형태가 많이 생겨나서 우리는 우리의 다중자아들(multiple selves)을 구성하고 항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상과 실재 사이의 이항대립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서구사상의 한 가지 환상은 고립된 정신이 하나의 물질적 신체 속에서 분리된 의식을 구성한다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관념 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주 이야기되는 통섭과 유사한 테크노에틱(기술을 의미하는 ‘techno’와 인식을 의미하는 ‘noesis’를 합성한 신조어) 차원들을 가진 싱크리틱(syncretic, ‘함께’를 의미하는 ‘syn’과 ‘크레타 사람’을 의미하는 ‘cret’를 합성한 형용사)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논문의 표상으로 ‘아포리아 크라타이기(aporia crataegi)’라는 학명의 나비를 선택했습니다. 불확실성이나 모순 또는 연속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뜻하는 ‘아포리아’는 비연속적인 것에서 생겨납니다. (창조적) 정체 상태나 소화불량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지적) 경화증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을 뜻하는 ‘크라타이기’는 치유적 은유입니다. 1900년대에 의문스럽게 사라진 이 나비가 지금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가변현실 속에서 싱크리티즘적인 사고로 다시 출현하고 있습니다. 고치에서 성체로 변태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나비는 변화와 가변성의 표상이자 죽음 이후의 부활, 정신과 영혼의 상태(그리스어에서 나비는 영혼과 동의어), 그리고 아주 미세한 변화에 대한 민감성(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나비 효과)의 표상이기 때문에 나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창조적 탐구에 꼭 필요한 요소가 바로 나비 정신(butterfly mind)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싱크리틱 예술의 근본적인 속성, 다시 말하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민첩하게 시각을 바꾸면서 탐구해야 할 기회와 극복해야 할 장애의 영역을 끊임없이 다시 점검하는 능력입니다.

이제 예술의 테크노에틱 차원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거기에는 의식의 기술에 대한 고려가 포함됩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협상하는 많은 현실들에 대한 이해에 정보를 제공하는 가운데, 예술을 비(非)물질적, 비(非)인과적, 비(非)결정성의 영역에 놓습니다. ‘촉촉한 미디어(moist media)’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리콘이라는 마른(dry) 컴퓨터와 젖은(wet) 식물적 시스템의 결합을 뜻하는데, 저는 그것이 우리 세기의 예술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존재의 모호성이란 이제 우리가 여러 개의 인격을 동시에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디지털 또는 후기생물학적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자아는 생성적이고 창발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컨드 라이프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컨드 라이프에는 다양한 서사들이 있고,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게임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지요. 이렇게 변형적 인격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미디어아트가 추구하는 목표와도 일치합니다.

20세기에는 ‘많은 것으로부터 하나(e pluribus unum)’, 즉 통일된 자아, 통일된 시간, 통일된 공간이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치는 ‘하나로부터 많은 것(ex uno plures)’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많은 자아, 많은 현존, 많은 세계, 많은 의식의 수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우연성의 문화입니다. 우리 자신과 환경은 끝없는 변화 속에 있습니다. 그 변화는 예측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고, 확실하지 않으며, 확정적이지 않지요. 예술은 모험과 우연, 놀이의 전략을 발전시킵니다. 우리는 자신을 업데이트하고, 리모델링하고, 재발명하면서 새로운 관계들, 새로운 현실들, 새로운 시공간의 질서를 탐색합니다. 우리의 문화는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변형하는 개방된 문화입니다. 이제 문화는 더 이상 우리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우리가 문화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셀프 크리에이션(self creation), 즉 스스로 자아를 창조하는 게 예술가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20세기 후반에 디지털 예술은 주로 연결성과 인터랙션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새 천년이 시작되는 지금 미디어아트의 화두는 테크노에틱스와 싱크리티즘입니다. 싱크리티즘은 서로 반목하던 고대 크레타 섬의 부족들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하나가 된 데에서 비롯된 말이지요. 싱크리티즘적인 충동은 친숙하지 않고, 배척을 당하고, 낯선 비선형적인 믿음이나 생각의 구조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차이와 일관성을 동시에 가지려는 것이지요. 싱크리티즘은 역사적으로 같지 않은 것들 속에서 같음을 찾아냄으로써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과 문화적 실천들을 화해시키고, 그것들 사이에 유비관계를 설정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무당굿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가 보기에 거기서는 굿을 이루는 요소인 소리, 색깔과 춤사위의 기능이 한데 어우러져 정신적 재구성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미디어아트 역시 공공장소에서 행해질 때는 이런 식의 심적 구성(psy reconstructuring)을 일으킬 수 있겠지요. 사회에서든, 커뮤니티에서든, 그 어떤 물리적인 장소에서든 정신적 재구성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의식을 설명하려 하고, 예술은 의식의 바다를 항해하려 합니다. 오늘날의 싱크리티즘적인 절차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술들(인터랙티브 기술과 디지털 기술, 반응적 기술과 기계적 기술, 향정신적 기술과 화학적 기술), 새로운 통신의 의식들(모바일, 온라인), 그리고 커뮤니티 형태들(사회적 네트워킹, 세컨드 라이프)을 하나로 버무립니다. 예술가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의식의 본성은 무엇인가?’예술가로서 우리는 의식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그 답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기술과 더불어 공(共)진화하라”

진중권

당신의 텍스트는 신조어들로 넘쳐납니다. ‘텔레노이아’, ‘사이버 셉션’, ‘하이퍼코텍스’ 등등. 그것들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달라진 새로운 세계 체험을 기술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개념에 대해서 각각 간단히 설명해줄 수 있나요?

애스콧

독자들의 공감을 얻은 몇 개만 이야기하지요. 그 중 하나는 사이버셉션입니다. 저는 그 말을 어떤 새로운 능력으로 간주합니다. 그저 지각적 능력들이나 인지적 능력들의 혼합이 아니라……. 확장됐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질적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질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됐다는 뜻입니다. 엑스레이를 통해서든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든,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을 통해서든 말이죠. 저는 여기에 모종의 전체론(holism)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감성과 감각체계 속에 말이죠. 이것은 새로운 정신능력이고, 그 능력에 이름을 붙여야 했기에 그것을 사이버셉션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개념이지요.

진중권 그리고 텔레노이아는요?

애스콧

텔레노이아는 유용하게 쓰였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낱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축복을 일컫는 거예요. 앨빈 토플러는 20세기를 굴뚝문화, 산업사회를 굴뚝사회라 불렀지요. 우리가 지금 막 떠나고 있는 그 문화는 파라노이아(paranoia), 과도한 프라이버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그 누가 나에 대해, 또는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 두려움을 우리는 파라노이아라 부르죠. 그런데 네트워킹의 효과(= 애정)는 제가 ‘텔레노이아’라 부르는 축복을 가져오게 되죠. 제가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개념은 ‘촉촉한 미디어’라는 것입니다.

진중권

당신은 ‘포스트 생물학’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물론 인공신체, 인공정신, 인공생명 등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에 관련하여 당신은 이 세 가지 기술을 다 사용하는 정도까지 통일된 견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곳은 예술 외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애스콧

제가 말하는 ‘포스트 생물학적’이라는 것은 정말로 ‘주어진 것 이후’를 뜻합니다. 계몽주의 또는 지난 세기 이래로 유럽에는 주어진 것에 대한 믿음이 유지되어 왔지요. 우리의 정체성도 주어져 있었고, 신체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주어진 것은 사실상 부분적으로는 지각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하자면 자연이지요. 확실히 우리는 기술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자신을 발전시켜나간다는 의미의 공진화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제 말은 우리가 생물학을 악용하고 있다거나 우리 자신을 기계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과도기입니다. 뭔가 세간의 사유로는 파악하기 힘든 시기지요. 우리가 가상공간에서 하는 모든 것을 언젠가 나노 기술을 가지고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명확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과도기라는 것이지요.

가상현실은 언젠가 우리가 실제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시험해보는 일종의 리허설 공간입니다. 포스트 생물학은 책임과 권능에 관한 생각들의 연계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주어진 것’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가상현실에서 혼합현실로

히로세 미치타카

1954년 일본 가나가와 현에서 태어난 히로세 미치타카는 산업기계공학을 전공했다. 1982년에서 1999년에는 도쿄 대학 공학부의 부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도쿄 대학 정보기술 과학대학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교육부 후원으로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책임자와 IRT의 사이버 인터페이스 그룹 프로젝트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일본 총무성에서 지원하는 멀티미디어 버추얼 래버러토리 프로젝트와 스케일러블 VR 콘텐츠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연구 분야는 시스템 엔지니어링, 가상현실, 휴먼 인터페이스, 인터랙티브 컴퓨터그래픽스, 웨어러블 컴퓨터와 이미지 기반 통합 가상환경, 그리고 이미지 기반 가상세계 제너레이션을 들 수 있다. 『가상현실』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가상현실에 초점을 맞춘 시스템 디자인을 연구 중이다.

가상현실 2.0과 디지털 공공예술

‘가상현실’이라는 용어는 1989년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상현실이란 컴퓨터로 합성되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기술입니다. 이 공간에 들어가 우리는 다양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을 특징짓는 세 개의 중요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째는 현존(presence)으로, 이는 컴퓨터 세계 속으로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인터랙션(interaction)으로, 가상의 대상들과의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다감각 인터페이스로, 이는 그 대상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데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상현실 기술은 이 세 가지 기능을 지원합니다. 가상현실 기술은 그저 현실을 흉내 내는 모의실험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오로지 가상현실 기술로만 체험할 수 있는 세계들이 있어야 합니다. 가상현실로 만들어낸 아인슈타인의 세계 같은 경우, 사용자는 가상환경 속에서 공간의 휘어짐, 광속의 통제와 같은 다양한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제는 혼합현실의 기술입니다. 기본적으로 가상현실 기술은 컴퓨터 상자 속의 기술입니다. 가상현실의 본질은 현실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상의 세계는 현실세계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쯤에 가상현실 기술은 현실세계와 점점 더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이 새로운 버전의 가상현실을 ‘VR 2.0이’라고 부릅니다. 토론토 대학의 폴 밀그램(Paul Milgram)교수가 현실과 가상, 가상과 현실 사이의 연속성을 제안했죠. 그 연속성을 현실 증강 증강가상 가상의 네 부분으로 범주화할 수 있습니다. 먼저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에서 출발하겠습니다. 증강현실이란 가상을 실재 위에 중첩시키는 혼합현실 기술입니다. 가령 와 에서 아바타가 홀로그램으로 현실공간에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현실공간에 연출되는 아바타를 ‘현실세계 아바타(Real World Avata)’라고 부릅니다. 현실세계 디스플레이를 이용하면, 우리는 이 아바타가 더 많은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현실세계 비디오 아바타란 한마디로 이미지로 만든 로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소개할 것은 증강가상(Augmented Virtuality)의 기술입니다. 증강가상은 ‘실재’의 모습을 저장하여 가상으로 옮기는 기술을 말합니다. 현재 저는 ‘도시의 박물관’이라는 기획에 착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기획의 목표는 현실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낡은 풍경을 가상세계에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 박물관은 오직 디지털 기술로만 실현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3D 기술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낡은 사진과 요즘 사진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늘 시점의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디지털 카메라, GPS 콤팩트 메모리, 다양한 센서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매일 일상의 체험을 기록할 수 있지요. 매일 8시간씩 70년 동안 녹화한다 해도, 필요한 용량은 10테라바이트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 큰 용량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파일 서버라면 몇 년 안에 가정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미래와 과거를 ‘지금’으로 만들어줍니다. 컴퓨터가 없으면 우리는 그저 현재만 볼 뿐입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있으면 우리의 시간 감각은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지요.

“아바타, 리얼 아바타, 그리고 로봇”
조동원

(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미디어 문화행동 활동가) 가상현실이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세컨드 라이프라든가 하는 형태로 말이죠. 그럼 당신이 하는 증강현실은 앞으로 어떻게 일상으로 들어올까요?

히로세

증강현실이 의외로 사회에 들어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컨드 라이프라든지 가상현실은 컴퓨터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국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 셈이죠. 그러나 증강현실이나 혼합현실은 언제나 눈에 보입니다. 우리 자신이 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다, 그것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부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니까요. 예를 들어 반응적 환경(responsive environment, 관객의 행동에 반응하여 달라지는 환경)이라는 것을 만든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부분을 치면 전부 정보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현실세계의 체험 안에서 뭔가 가상적인 것이 금방 반응하고 나타나 뒤섞여버리는 거죠. 실생활에서 가상적인 것을 체험하는 장치로서 휴대전화 같은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갖고 있지요. 물리적 세계 안에서 가상적인 것을 체험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지요.

조동원

당신은 로봇이 지닌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인터페이스 기능을 제시합니다. 로봇의 어떤 면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죠?

히로세

가상현실 기술은 컴퓨터 과학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요. 가상현실은 인터페이스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가상현실은 인간이 보고 느끼는 것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인간과 매우 가까운 데 존재합니다. 한마디로 인터페이스인 겁니다. 그리고 혼합현실이라는 것은 진짜 현실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VR이라는 기술이 등장함에 따라 ‘아, 현실이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가상세계에서 알게 되었다는 거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죠? 영상도 훌륭한 것이지만, 예를 들어 서울역이든 어디든 하이비전이 설치되어 있는데도 다들 그 앞을 스쳐지나가죠? 하지만 거기에 로봇을 한 대 갖다놓으면 아마 다들 보게 되겠지요. 물리적 실존이란 아주 강력한 겁니다.

조동원

당신은 로봇공학을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강력한 인터페이스로서 규정합니다. 왜 로봇을 인터페이스로 봐야 합니까?
히로세 예를 들어 가와구치 요이치로 씨의 작품을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로봇으로 본다면 더 무섭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로봇은 강력합니다. 여러 방법이 있는 거죠. 만약 가와구치 씨의 작품이 푹 찌르거나 한다면 아프겠죠? 그걸 완전한 HMD의 영상과 촉각 디스플레이로 실현하는 방법이 있겠고, 역시 실물로 하는 것이 강렬하다고 보는 경우도 있을 테고, 그것은 기술적 선택 중의 하나라고 보는 거죠.

언젠가 컴퓨터게임의 셰익스피어를 갖게 될 것이다

사이먼 페니(Simon Penny)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디지털 문화 운동가이자 인터랙션, 예술, 기술,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는 새로운 센서의 배열, 인터랙티브 로봇 설치물 등을 만들었는데, 이 작업들은 조각이나 비디오아트, 설치와 공연을 포함한 예술의 실제적인 전통과 동물행동학, 신경학, 상황적 인지론, 현상학, 인간-컴퓨터의 상호작용, 유비쿼터스 컴퓨팅, 로봇공학, 비평, 문화와 미디어 연구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 의해 활성화하고 구체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이슈들을 다룬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 , , , , 등이 있다. 1993년 캘리포니아 시그라프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등 전자 미디어아트에 관해 전 세계를 다니며 강연을 했던 그는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 어빈 캠퍼스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험과 추상, 예술과 기계의 논리

저는 미디어아트와 디지털아트의 실천의 기저에 흐르는 문제들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미디어아트의 근본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전념하는 것은 그림 그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공간과 사물 사이의 교섭(engagement)입니다. 제 작품은 지금까지 오브제와의 신체적인 인터랙션을 다루어왔습니다. 작품이 그 본성상 체현된(embodied)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인식은 저로 하여금 정신과 신체는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의 환상적 안전함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막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을 즉각적으로 유물론자로 규정하고, 실시간 컴퓨테이션 기술을 이용해 물질성과 공간성을 개입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문화적 목적을 위해 컴퓨테이션 기술을 개입시키는 데는 두 가지 접근방식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매우 일상적인 것으로 이렇게 묻는 것이지요. “와, 이 모든 환상적인 도구들을 봐. 이것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두 번째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나의 창조적 아이디어고, 이것이 나의 창조적 목표야. 어떤 기술이 내 목적에 가장 적합할까?” 이 물음이 저를 예술적 실천의 전통과 컴퓨테이션 기계의 전통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에 대한 이론적, 역사적 분석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데려갔습니다. 서구에서 컴퓨테이션 기술에 관한 담론은 지적 전통과 철학적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컴퓨테이션 기술이 만약에 상이한 문화적 맥락에서 출현했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만약 한국의 지적, 철학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서 출현했다면 어땠을까? 저는 서구가 아닌 문화 속에서도 서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문화와 기술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컴퓨터가 그저 중립적 수단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안에는 정보, 지식, 또는 재현의 본성에 관한 특정한 관념이 내재되어 있는가?’ 기술이 그저 원래의 사용영역에 머무르는 한, 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기술적 상황에서 이 기술은 끊임없이 사회와 문화를 가로질러 움직이면서, 도구주의적 패러다임(거기에 관련된 가치들)과 별 관계가 없는 다양한 종류의 확립된 실천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개발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은 탄환과 미사일의 궤도를 계산하기 위해, 그리고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의 미분기계(difference engine)는 영국 해군이 세계 전역을 항해하는 데 사용할 시간표를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건 25년 전의 일이야. 그것은 10년 전의 일이야. 그것은 과거의 일일 뿐이다.” 예, 맞습니다. 컴퓨터라는 기계는 매우 복잡하게 구축되어, 그 안에는 어플리케이션, 자동 환경, 시각화 도구 등등 수많은 층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컴퓨터를 분석하는 데 매우 복잡한 대상으로 만들지요. 하지만 그 기계의 깊은 구조, 그것의 구축 및 시스템의 논리 속에 구현된 특질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사용자로 하여금 특정한 관행, 특정한 조작 방식에 순응하게끔 강요하지요.

특히 예술의 맥락 속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컴퓨터 혁명 또는 정보혁명의 한 가지 측면은, 겨우 50년이 될까 말까 한 이 과학기술이, 매우 다양한 직업적 맥락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과학기술이 갑자기 우리 같은 예술가들에게 작업의 도구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전통적 실천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디지털 환경 속에 집어넣을 때 우리가 무엇을 빠뜨리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역사적, 기술적 연구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연구를 요구합니다. 그러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1. 과학기술 속에는 근본적인 철학적 가치들이 물화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들을 어떻게, 어디에 표현되어 있는가? 2. 그 가치들은 과학기술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영역의 각각에 생산적인가, 아니면 파괴적인가? 3. 이 물음들은 영향을 받는 실천(=관행)들의 핵심가치들에 대한 평가를 함축한다. 4. 그 연구의 결과로 진지한 관심사의 영역들이 드러난다면 상황은 구원적일 것이다. 즉 긍정적 상황을 만들기 위해 도구와 실천이 함께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테크놀로지 아트의 기획 전체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5. 반면,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실천들의 핵심가치들을 더 지원해주는 기술들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해야 한다.

“재현에서 수행으로 예술의 전략을 수정해야”

김지훈

(뉴욕 주립대 박사과정) 현재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직면한 심각한 딜레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식에 관한 새로운 생각을 어떻게 사용자의 행동으로 번역하느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니 저는 아주 오랫동안 컴퓨터 과학의 근본적인 전제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수용이라고 느껴왔습니다. 정신과 신체의 분리 말이죠. 이 분리가 인터넷 기술 속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분리로 기입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컴퓨터 과학의 근본적 전제 속에 들어갔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런 종류의 분리가 지각의 심리학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파인아트의 역사에도 반영되었지요. 이는 미술사에서 나온 일종의 기술적 논증입니다. 하지만 미디어아트에서는 이 거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체험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죠. 원근법적인 대상-관찰자의 위치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관조적인 지각 패러다임도 마찬가지지요. 저의 의무는 이론적 자원을 찾아내서 새로운 미학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행동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전제하는 것은, 문화적 실천에 실시간 컴퓨테이션 기술을 사용할 때, 우리가 행동의 디자인을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미학적 실천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김지훈

당신의 대답에서 재미있는 것은, 재현적인 모델과 수행적인 모델을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춤의 신체적 직접성을 조각의 공간적 경험과 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발상은 1970년대의 개념주의 비디오아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가요? 거기서도 예술작품 창조의 전체적인 과정을 묻고, 관람자와 예술가를 탈중심화하고, 예술적 실천들의 공간적 변수들을 실험하지 않았습니까?
페니 개념예술가들은 재료를 예술로부터 제거하기를 열망했지요. 저는 지금도 한 개념예술가가”조각이 가진 모든 것을 내 작품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던 걸 기억합니다. 이는 물질적 예시와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으로, 함축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속합니다. 따라서 저는 한편으로 개념주의 예술을 매우 함축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1960년대 혁명의 다른 측면들, 즉 사회적, 신체적 맥락과 관련된 존재의 폭발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요, 저는 이런 생각들에 영향을 받았고,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다른 미디어아티스트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도시의 에너지를 먹고 사는 생명기계

최우람

1970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ㆍ고등학교 시절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기계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기계생명체를 ‘발견’해 소개하는 작가이다. 그의 기계들은 대체로 벌레나 곤충, 전기담쟁이, 다이오드 민들레처럼 환경에 본능적으로 적응하는 생명체의 형상을 하고 움직인다. 그가 ‘발견’한 생명체들은 디지털화되고 기계화된 현대 문명의 틈 속에서 독특한 외양과 이야기를 지닌 채 한순간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완성도 높은 기계조각 또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이라 불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엔지니어들을 영입해 우람 생명기기 종합연구소라는 조직을 만들어 공동작업의 형태로 작업하고 있다. 1998년 보다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으며,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가제트 공화국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뉴욕과 도쿄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하드웨어에서 감성과 정신으로 가고 싶다”

허대찬

(홍익대 미술대학원 석사과정, 미디어아트 채널 ‘엘리스온’에디터) 당신 작업의 주된 프레임은 기계생명체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작품을 보면 움직임에 집중하는 게 보입니다. 그러한 움직임, 특히 기계 ‘생명체’라는 요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최우람

움직임에서 생명으로 갔다기보다는 생명이라는 게 원래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잖아요. 나무처럼 느리게 움직이든, 미꾸라지처럼 빨리 움직이든. 그런 요소들이 관객이 보기에는 ‘이게 살아서 반응하고 변화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는 거죠. 그리고 생명체가 수행하는 소통이라는 게 있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같은 종족끼리 대화할 뿐, 하이에나 집단과는 대화를 못하고, 하이에나들도 자기들끼리만 대화하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암세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놈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려고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듯이, 저도 기계와 대화할 수 있는 방편을 찾는다고나 할까요?

허대찬

21세기에 들어와 인터랙티브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고, 반응도 폭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모습들도 많이 보입니다. 그저 상호작용의 실험에 그쳐 사라져간 것이지요. 디지털 매체와 기술을 이용한 미술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요?

최우람

그런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과정인 것 같아요. 그것 없이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겠지요. 그런데 과연 인터랙티브 아트의 발흥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만약 그런 시기가 있었다면, 그 실험들 하나하나가 다 중요했다고 봅니다. 사라지는 게 있어야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고, 그것 없이는 다음 실험도 없을 테니까요. 어떻게 보면 그게 순리인 것 같기도 하고, 기술이 가진 한계 같기도 해요. 기술 자체가 워낙 빨리 변하고 있으니까요.

허대찬

이후의 작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한데요. 인공지능을 가진 생명체로 발전하는 방향도 염두에 두고 있는지요?

최우람

물론이죠.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의 30~40%는 동물과 식물을 바라보는 데 들어갑니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어요. 하긴, 자연이니까요. 또 그렇게 완결된 형태일 수가 없어요. 거기서 많은 힌트를 얻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재미있게 만드느냐는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작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지요. 앞으로는 한시적 퍼포먼스로 끝나는 작업을 할 가능성도 열어놓고 싶어요. 그런 행위라든지, 증발해 없어지는 것,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의 감성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허대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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