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트와이스

문예춘추사 / 2021년 1월 / 247쪽 / 13,800원

미스터 트와이스

미스터 트와이스

차민수 지음

문예춘추사 / 2021년 1월 / 247쪽 / 13,800원

저자 소개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세계 3대 포커신이라 불리는 인물이며, 1980~90년대 카지노 분야 수입 세계 1등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최근 출연한 방송으로는 ‘더 지니어스’가 있으며, 드라마〈올인〉의 실제 주인공이자 현 프로기사협회, (주)이사벨스포츠의 회장이다. 미국에서 카지노학 칩 존슨 교수에게 바둑을 가르쳐주고 포커를 배워 세계 최고 믹스게임 플레이어가 되었다. “재산이나 재물은 훔칠 수 있지만, 머릿속에 든 지식과 기술은 아무도 훔칠 수 없다.”는 어머니의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바둑, 바이올린, 포커, 쿵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로 수준의 실력을 쌓았다. 부를 가졌을 때 그것에 심취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차민수는 포커로 연수입이 수백만 달러를 웃돌던 시기에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수입의 대부분을 다른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보수가 적은 명예직을 택해 국내 바둑 부흥과 포커 두뇌 스포츠 발전에 힘쓰고 있다.

책소개

이 책은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포커 플레이어 차민수의 70년 삶을 담담하게 기록한 에세이다. 인생 대부분을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살았던 저자는 인간의 삶은 도전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으로 나눌 수 있으며, 자신은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도전했고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면서, 최선을 다한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역설한다.

요약본 본문

내 이름은 ‘미스터 트와이스’

내 이름은 ‘미스터 트와이스’

하룻강아지 자신감이 하늘을 뚫다: 저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7일간 꼬박 밤을 새운 처절한 포커게임이 비로소 끝나는 순간이었다. 매일 평균 15시간씩 105시간이 넘는 대장정에서 나는 칩 리즈을 쓰러뜨리고 전리품 50만 달러를 얻었다. 칩 리즈와 처음 게임을 한 것은 1986년 여름이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차민수’는 세계랭킹 3위는커녕, 30위도 겨우 할 것 같은 어떤 겜블러에 지나지 않았다. 

칩 리즈와의 첫날 대결은 스튜이 헝거의 가벼운 휘파람으로 시작되었다. “자, 즐겨보자고.” 내가 있는 테이블에는 8명이 둘러앉았다. 우리는 스터드(Stud)와 홀덤(Holdem), 로우볼(Low-Ball)을 번갈아가며 했다. 게임은 잔잔하게 흘러갔고, 시간이 꽤 지나니 테이블에는 세계랭킹 3위 수준의 잭 루이스, 자타공인 챔피언 칩 리즈, 그리고 내가 남았다. 나는 3만 달러 정도를 잃고 있었고, 칩은 5만 달러쯤 따고 있었다. 잭은 본전 비슷했다. 우리 앞에는 카드가 날아다녔다. 게임이 잘 풀리던 칩은 조금 더 이기고 싶은 눈치였다. 마침 승부보기를 좋아하는 우리도 게임을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의 판이 트리플 미만으로 승부가 났다. 3사람이 다 참여해 부딪히는 큰 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숏핸드가 되자 나의 공부가 빛을 발했다. 죽을 판과 싸울 판에 대한 판단이 리듬을 타며 나아갔다. 작은 판들의 연속이었지만 내가 이기는 판이 점점 더 많아졌다. 내 앞에는 칩이 쌓여갔다. 내가 첫날 승기를 잡은 계기는 칩의 블러핑(Bluffing)이었다. 블러핑은 약한 패를 쥐고 있으면서도 상대에게 강한 패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공갈을 치는 것을 말한다. 포커판의 신사라고 불리는 그가 블러핑을 치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공갈에는 공갈이 약이니: 나는 킹 페어를 쥐고 있었다. 칩은 강하게 레이즈를 했고, 나는 고심 끝에 패를 내려놓았다. 칩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말도 되지 않는 떡패를 나에게 보여주고 판돈을 가져갔다. 내가 완벽하게 속은 것이다. ‘이 친구가 날 데리고 놀 작정이구나. 기 싸움에선 끌려 다니지 않으면 된다. 공갈에는 공갈이 약이지.’

“야, 칩. 이거 열 받는데.”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말했다. 칩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의 무조건 반사적인 플레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판이 많아지자 칩이 말했다. “지미, 콜 할 것이라곤 생각 안 했는데.” “에이 난 또, 네가 또 블러핑 친 줄 알았지. 떡패 가지고 장난치는데 콜을 안 하고 배겨? 그러게, 블러핑 패는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칩은 다른 사람에게서 딴 돈에 자기 돈을 5만 달러를 보태 나에게 주고 일어섰다.

다음 날, 어떤 타짜가 구상해도 만들기 쉽지 않을 장면이 벌어졌다. 둘째 날 오후 3시경 바이시클 클럽에 갔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문을 여니 도올 브론슨이 먼저 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도올은 농구선수 출신으로 키가 2미터에 육박한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도올에게 물었다. “칩 리즈가 제일 잘하는 게임이 뭐지?” “그야 홀덤하고 스터드지.” “그래요? 거 참 이상하네. 칩 실력에 대한 소문이 과장된 거 아냐?” “뭔 소리야?” “오늘 새벽까지 붙었는데 세다는 느낌을 못 받았거든.”

도올이 말을 전하길 바라는 일종의 약 올리기 작전이었다. 물론 이런 말에 흔들릴 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았다. 이 말은 오히려 내가 나에게 하는, 오늘 새벽에 이은 승리를 바라는 강한 암시였을 것이다. 4시 조금 지나 칩 리즈가 클럽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도올이 실실 웃으며 그에게 가 약을 올렸다. “지미지미가 그러는데 자네 실력이 과대평가가 된 것 같다는 거야.” 순간 칩의 얼굴이 붉게 변하는가 싶더니 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오늘 다시 한 번 내 운을 시험해보지 뭐.”

승리의 ‘패’는 나에게로: 그때 하미드가 들어왔다. 그는 월드 챔피언까지 먹은 일류다. 셋이서 숏핸드로 제대로 붙었다. 게임을 시작한 지 세 시간도 안 됐을 즈음 큰 판이 벌어졌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엮인 판이었다. 스터드 게임을 할 때였다. 4구째 칩이 9트리플이 되면서 내가 이길 확률은 점차 줄어 나에게 위기가 왔다. ‘저들끼리 알아서 치고받아라.’ 하며 눈치를 살피는데, 5구에서 26분의 1의 확률을 뚫고 나에게 유리한 패가 떨어졌다. 포켓 킹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킹이 떨어지면서 K트리플이 되었다.

갑자기 내가 앞선 것이 확실해졌지만,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체크(Check: 베팅 차례에서 베팅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 가진 패가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상대방이 느끼게 하기 위한 위장 전술로도 쓰인다)로 베팅을 넘겼다. 칩은 숨은 9트리플이었고 하미드는 A페어에 플러시 드로를 하고 있어 저희끼리 치고받았다. 둘 다 좋은 패였다. 그들은 최대치인 3200달러까지 베팅했다.

6구째, 하미드는 플러시를 맞추었고 내 보드에는 내가 기다리던 페어가 떨어졌다. K풀하우스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나의 패에 대해 눈치 채지 못했고 맥시멈 베팅에 들어갔다. 마지막 장을 받았다. 하미드는 어떤 카드를 받아도 나를 이길 수 없었다. 칩이 나를 이기는 카드를 받을 확률은 49분의 1이었다. 앞서 내가 26분의 1의 확률로 역전을 했으니, 칩이 이기는 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행운은 칩을 외면했다. 3만 3900달러짜리 큰 판은 내 차지가 되었다.

세계 1위를 7일간 이기다: 칠일 째 되던 날인가. 칩이 새벽녘에 저지른 실수는 그가 칼날 앞에 서 있음을 알려줬다. 아무리 일류라 해도 게임이 15시간 가까이 계속되면 집중력에 틈이 생긴다. 그날 칩 앞바닥에 8 스페이드가 떨어졌다. 내가 보기에 그건 쓸모없는 패였다. 그런데 그는 태연히 베팅을 하였다. 나는 그 베팅을 강력한 레이즈로 응수했다. 순간 바닥에 깔린 패를 확인한 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8 스페이드를 7 혹은 9 스페이드로 잘못 본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의 운은 지친 듯했다.

어떤 판에서는 칩 앞에 Q 8 하트가 깔렸고, 내 바닥에는 Q 9 스페이드가 깔렸다. 둘 다 플러시를 기대할 수 있었다. 내 손에는 A K 스페이드가 얌전히 숨어 있다. 그런데 칩 손에는? 거기에도 A K 하트가 숨 쉬고 있었다. 마지막 장으로 칩은 J 하트가, 나도 J 스페이드가 나왔다. 우리는 둘 다 바라던 플러시를 만들었다. 할 수 있는 베팅을 이미 다 한 상태였고, 우리는 패를 오픈했다. 나는 A K Q J 9 플러시. 그는 A K Q J 8 플러시. 평생 두 번 나오기도 힘든 경우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게임을 하다 보면 많은 운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게임은 수없이 계속된다. 실력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운이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프로의 게임에서는 자그마한 것에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15시간에 걸친 게임으로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딜러가 다시 카드를 돌리려는 순간,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의 운에 관한 시험, 이제 그만하지. 내 운이 조금 지친 듯해서 말이야. 나는 오늘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야겠어. 당분간 거기 있을 거야.”

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아침이었다. 게임이 끝난 것이다. 내가 세계 1위 칩 리즈를 상대로 돈을 얼마나 많이 땄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를 연거푸 이겼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지미지미 실력이 엄청나네. 칩을 이긴 게 절대 우연일 수가 없지. 7일간 계속 이겼잖아.” “지미지미 성적이 이대로 한 달 이상 가면 나도 그를 ‘미스터 트와이스’라고 부를 거야.”

지미지미, ‘미스터 트와이스’: 미국에서 ‘미스터’는 한국어 의존명사 ‘님’과 비슷하다. 내 이름은 ‘지미 차’였지만 그때까지 LA 카지노계에서 나는 지미지미라고 불렸다. 내가 게임을 할 때 베팅을 너무 세게 해서, 나 혼자 두 명의 몫을 한다며 친구가 내 이름을 두 번 반복해 부른 게 그 별명의 유래다. ‘지미’라는 이름이 두 번 반복된다는 소름끼치게 논리적인 이유로 나는 ‘트와이스’가 되었다. 더 소름 돋는 사실은 나도 그 터무니없는 별명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오우! 미스터 트와이스(Mr. Twice).” “땡큐, 칩.”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다. 칩 리즈,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제1위의 포커 선수. 그가 나를 ‘트와이스님’이라고 불렀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와 달리 칩은 120킬로그램의 거구를 가볍게 흔들며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 두 손을 펴 보인 뒤 클럽을 빠져나갔다. 그의 등에 서린 피곤만큼이나 나도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승부의 시간을 통해 서로의 실력과 수준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칩은 게임 매너나 실력으로 당대 최고의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칩은 체중을 과다하게 빼다가 그 후유증 탓인지 심장마비로 수년 전 사망했다. 칩과의 대결 이후 나의 성적은 승승장구했다. 사람들은 약속대로 나를 미스터 트와이스라고 불렀다.

담대한 여정, 세계 최상급 플레이어가 되기까지

이것저것을 섭렵한 어린 시절

1ㆍ4 후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1951년 피난처인 수원 인근 발안 장터에서 나를 낳았다. 서울 수복 후, 어머니는 나를 안고 영등포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에게는 나보다 일곱 살 많은 큰누나, 그 두 살 아래 형, 또 두 살 아래 작은 누나가 있었다. 어머니는 ‘만약 내가 잘못되면 내 재산은 큰 아이들이 다 가지고 어린 동생은 주지 않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나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운동, 그리고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셨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운동으로는 당수, 쿵푸, 스케이트, 수영, 탁구, 음악으로는 바이올린, 기타, 피아노를 배웠다. 바둑에도 재주가 있어 1974년에 프로에 입문했고, 미술은 뒤늦게 조동화 선생님께 배워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가보니 어머니 말씀이 자꾸 떠올랐다.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지식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재산보다 무궁무진했고, 심지어 그것을 보관하거나 도둑맞을 물리적 장소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면 했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목사가 되어 목회자의 길을 가길 바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머니의 소망은 소망으로만 남았다. 내가 학교 공부에 취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적도 벼락치기로 간신히 유지만 하는 정도였다.

결혼의 기쁨, 그리고 라스베이거스

나는 1972년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그 다음해에는 석진이를, 1975년에는 영은이를 낳았다. 그런데 작은누나의 결혼식 때문에 미국에 다녀온 후로 어머니는 줄곧 나에게도 미국에 가라고 성화였다. 바둑과 친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국을 떠날 이유가 없었지만, 1976년 군복무를 마친 후 결국 어머니 뜻대로 미국에 갔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꾼 계기는 당시 열풍이었던 007이란 첩보영화였다. 내 눈에 그 미국 영화의 주인공인 숀 코네리는 너무나도 멋있었다. ‘나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저렇게 한번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미국행을 택했다. 미국에 가면 운동을 특기삼아 CIA에 들어가려고 그 후 운동도 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미국 생활은 생각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당장 나가서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었다. 네 식구의 호구지책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의 높은 장벽에다 더 높은 언어의 장벽까지 더해지니 007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보자는 나의 새파란 꿈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를 본 이후에 내 꿈은 180도 바뀌었다. 처음 본 라스베이거스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공기는 백열등의 불빛과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불야성 앞에서 나는 황금의 보고인 서비스산업, 그러니까 카지노 업계에 발을 담그기로 결심하게 된다.

5달러에 목숨을 걸다

미국에 온 지 며칠이 안 되어 주유소에 취직했다. 내가 취직한 주유소는 카사블랑카 갱들의 활동 반경에 있어서 밤만 되면 총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는데, 저녁 파트에 일하는 사람들이 일주일도 안 돼 그만둬준 덕에 그 자리는 영어도 잘 못하는 내 차지가 되었다. 어느 날 하루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3명이 기름을 넣으러 왔다. 시동을 꺼달라고 했지만 배터리가 나빠 시동을 한번 끄면 다시 걸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기름값을 안 내고 그대로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역시나 그들은 기름을 넣던 중간에 갑자기 차를 몰고 주유소를 빠져나가려 했다. 나는 문이 열린 채 출발하는 차의 문과 핸들을 움켜잡고 달리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소림 쿵푸에서 배운 ‘루’라는 초식으로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목을 잡아 밖으로 내동댕이쳤고, 그 사람을 못 움직이게 하려고 목을 밟고 있는데, 내 발 아래 있는 사람이 옆에 차고 있던 30센티 정도 되는 대검을 뽑으려고 꾸물댔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이 미국의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집이나 직장에서 무기를 가진 침입자와 싸우다 상대가 죽으면 정당방위라고 했다. 미국법을 실전에 적용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복하며 슬쩍 비켜줬다. “뽑으면 죽는다.” 영어가 서툴러 혼내준다는 말이 영어로 뭔지 몰랐다. 산다, 죽는다는 말만 할 줄 알아서 그렇게 말했다. 그 친구는 잠시 생각하더니 칼을 뽑지 않았다. 그때 차 안에 있던 두 명이 내리려고 했다. “내리면 죽는다.” 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은 순순히 5달러짜리 지폐를 내놓았다. 기름값은 3달러 79센트였다. 1달러 21센트를 거슬러 주었다.

카사블랑카 갱과 친구가 되다: 며칠 후 밤 10시가 다 되었을 무렵, 가게 문을 닫을 준비를 해놓고 앉아 있는데, 한 무리의 갱들이 주유소를 향해 오고 있었다. ‘아, 이 사람들이 바로 유명한 카사블랑카 갱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스카페이스였다. 며칠 전의 악연. 난 오늘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다. 그러자 어머니와 아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우선 가게로 밀고 들어오는 그들을 다시 밀고 밖으로 나갔다. 주유소에서 싸울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가 뚱뚱한 나무 하나를 등지고 섰다. 상대의 수가 너무 많으니 뒤를 보호해야 했다. ‘3분만 버티면 살 수 있겠지.’ 지나가는 차에서 누군가 우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경찰에 연락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왜 왔어?” 나는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러자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지금 우리가 몇 명인 줄 아냐고 물었다. 그들은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니 “너 도대체 뭐냐?”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바로 몸을 날려 내 등 뒤에 있는 나무에 공중 돌려차기를 했다. 그러자 나뭇가지 하나가 뚝 소리를 내며 부러져 축 늘어졌다. “Wow, Are you Bruce Lee?” 그들은 탄성을 내뱉더니 갑자기 내게 ‘이소룡’이냐고 물었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 적도 없는 이소룡은 그렇게 나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한국에서 이민을 왔고 온 지 얼마 안 되어 영어는 잘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백인이면 죽이려고 했는데, 동양인이고 게다가 한국인인 것이 맘에 든다며 그들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고 카사블랑카 갱들과 친구가 되었다.

카사블랑카의 전설이 된 ‘마스터 차’: 그 후 그들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강생이 열 명을 넘길 즈음, 레슨비가 주유소에서 버는 돈을 넘어섰고 생활도 점차 안정되었다. 레슨이 있는 날 밤에는 10시에 주유소 일을 끝내고 카사블랑카에 있는 공원으로 갔고, 늦은 밤인데도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가 운동하는 모습을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나는 카사블랑카에서 마스터 차(Master Cha)라고 불렸고, 어느새 이 동양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심리적 안정을 준 ‘페인트 사업’ / 웨스트세븐 리커스토어 / 리젠시 카지노

이후 오렌지카운티에서 LA로 이사 와 동창생인 영국이와 페인트 회사를 차렸다. 친구 영국이는 기술은 있지만 영어를 잘 못했다. 나는 기술이 없는 대신 그때 즈음 영어는 그럭저럭 통했기 때문에 조건이 잘 맞았다. 한인 타운에 발이 넓으니 그런대로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다. 이후 1980년 한인 타운 리커스토어를 인수하면서 페인트 사업을 끝냈다. 내가 가게를 맡고 나서 매출이 25퍼센트 늘었다.

한편 LA 벨 가든 시에 벨 카지노가 이름을 바꿔 리젠시 카지노로 새로 오픈하면서 나는 하우스플레이어로 그곳에 취직했다. 당시 케니 번디와 샌디에고 존은 타짜였는데, 둘은 리젠시에서 다른 타짜들과 함께 속임수를 써서 돈을 벌었다. 내가 매일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타짜들과 매일 부딪치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스트레스였다. 결국 리젠시는 손님들의 외면으로 머지않아 결국 문을 닫았다.

이혼의 아픔, 두 번의 문전박대

1984년 어느 날, 집에 들어가려는데 열쇠가 맞지 않았다. 아내는 아이들이 열쇠를 잊어버려 바꿨다고 했는데, 별일 아닌 듯 보이지만 이것이 12년 결혼생활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아내는 나에게 바뀐 열쇠를 주지 않았다.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미국에서는 엄마에게 양육의 우선권이 있다. 아이들을 아내가 키우겠다고 하는데, 나는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 재산은 당신이 다 가지라며 호기를 부렸다. 하지만 그때 내 주머니에는 달랑 2달러가 있을 뿐이었다. 이혼 후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갔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내 마음과는 달랐다. 어머니는 운전기사를 시켜 내 가방을 마당에 집어던졌다. 네가 나이가 몇 살인데 나에게 기대려고 왔나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라는 뜻이었다.

불효자의 한

다시 일을 할 생각을 굳힌 후 미국행을 택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수십 년간 일을 도우셨던 배 전무님께 전화를 걸어 미국에 다시 들어간다고 전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친구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수속을 마친 나에게 어머니는 5천 달러쯤 담긴 누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그 돈을 공항 바닥에 집어던졌다. “나와 어머니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났으니 돌아가셔도 내 앞으로는 유산도 남기지 마십시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세상에 불효자식도 이런 불효자식이 없다. 나중에 어머니가 나 때문에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새우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나의 모자람과 불효를 뉘우치고 뒤늦게나마 효도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 내가 성공해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 “나는 네가 큰 인물이 될 것이란 기대만 한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고 말씀해주셨다. 나에게는 어떤 것도 그보다 든든할 수 없었다.

재기를 향해 뛰다

1984년, LA에 있는 엘도라도 카지노에서 포커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 그곳의 총지배인과는 예전에 게임을 같이하던 친구 사이였다. 나는 그에게 최근 내 사정 이야기를 하며 카지노의 프랍(Prop, 카지노가 고용한 플레이어)으로 나를 고용해달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자리가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했고, 2주 뒤 나는 프랍으로 채용되었다.

프랍은 하우스플레이어라고도 불리는데, LA의 최고 강자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브레드 아바지안, 스탠리 골스틴, 핼, 람보, 아이 직, 해리스 등 로우볼의 대가들이었다.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그들과의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그만뒀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런 곳에 취직하게 된 것도 나름의 장단점이 있었다. 단점은 매일 하는 게임에 강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고, 장점은 그들의 여러 가지 기술을 그곳에서 한꺼번에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브레드, 스탠리, 람보, 아이 직은 후에 나와 함께 정상의 반열에 올랐다. 한 달 수입은 2만 달러 정도였다. 1년도 안 돼 자리를 잡아 LA 근교 세리토스라는 곳으로 집을 사서 이사했다. 그다음 해에는 전년도의 두 배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1986년에는 플라톤에 백만 달러짜리 저택을 사서 이사했다. 이후 포커에 대한 자부심, 어찌 보면 자만심을 가질 즈음 텍사스홀덤과 7카드 스터드가 캘리포니아 법을 통과했고, 세계 최고 선수들이 이 게임들을 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에서 물이 좋은 LA로 몰려왔는데, 이때에 만난 사람들이 칩 리즈(세계랭킹 1위), 도올 브론슨(2위), 잭 루이스(3위), 요시 나카노(4위), 자니 첸, 단 즈윈, 스튜이 헝거, 하미드다. 그들을 만나며 나 역시 세계랭킹 200위 정도에는 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들과 겨루어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세계 최상급 플레이어가 되다

당시 세계랭킹 4위인 요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와의 차이를 실감할 때마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 때문에 처음으로 은퇴를 생각하기도 했다. 이들과 매일 게임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얼마 안 가서 거지가 될 게 뻔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었다. 이들을 피해 다니면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망만 다니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포커로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길로 곧장 포커와 서비스 산업에 대한 서적을 사서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늘어나는 수입이 증거였다. 당대 최고 고수들과 매일 게임을 했다. 실전에서 배운 것을 집에서 복습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나를 10위권 안에 드는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해줬다. 드디어 내가 꿈에도 그리던 세계 최상급 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속고 속이는 세상, 카지노 이야기

카지노의 탄생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왕국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귀족들의 사교장이 오늘날 카지노의 시초다. ‘Casino’라는 명칭은 ‘Casa’라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는 미시시피 주에 200여 척의 호화 여객선에 있는 카지노가 성행했다. 대부분의 포커 게임도 이즈음 만들어졌다.

당시 서부에서는 ‘Bar’마다 포커 테이블이 있어 카우보이들이 포커 게임을 하다가 총싸움으로까지 번지곤 했는데, 이는 영화 장면으로도 종종 등장한다. 미국에서는 포커를 도박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마인드 스포츠’로 여긴다. 한편 미국에서는 19세기 말경부터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카지노가 공식 개설, 허용되었다. 그 후 뉴저지 주와 네바다 주 전역에 걸쳐 많은 호텔들이 카지노 영업을 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카지노에서는 여러 이름으로 각종 포커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월드 시리즈 오브 포커라는 대회는 규모가 크기로 유명하다. 6월 말부터 8월까지 거의 매일 새로운 시합이 열리는데, 총 상금의 규모가 작은 것은 40억 정도이며 맨 마지막에 하는 월드 챔피언십의 총 상금은 1,000억이나 되어 하루아침에 수십 명을 백만장자로 만들어주곤 한다.

포커의 스승 ‘칩 존슨’

1977년 나는 오렌지카운티에서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세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 되자 세를 벌기 위해 주말이면 LA에 잇는 카지노로 포커를 하러 다녔다. 그때 나의 포커 수준은 아마추어 6급 정도였다. 때마침 바둑을 좋아하는 칩 존슨 교수가 한국에서 바둑 프로기사가 미국으로 이민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다.

우연히 내가 포커 게임 하는 것을 지켜본 그는 나에게 본인이 시간당 100달러를 받는 포커학 교수임에도 무상으로 포커를 가르쳐줄 테니, 그 대신 나는 자신에게 바둑을 가르쳐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내게 그 정도의 포커 실력으론 밥 먹고 살기가 힘드니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생각한 게임에 공부가 필요하다니 처음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시작된 포커 공부는 신기하기만 했다. 

도박에도 수학적인 계산과 확률에 의한 최상의 정답이 있었다. 그는 정확한 계산에 근거해 펼쳐지는 포커의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상황에 따라 확률을 계산해내는 방법과 플레이하는 과정, 그 결과까지 모든 것에는 법칙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겨우 포커에 눈을 뜬 셈이었다. 한국에서 학생으로서 한 공부는 주로 선생님의 말씀을 주입해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내가 학교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커는 달랐다.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여 그것을 재창조해야 했다. 그 후 나는 포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카지노에서 만난 사람들 - 제2의 스승 단

미국에서 포커 게임을 할 때였다. 당시 가디나에 있는 카지노는 플레이어가 돌아가며 딜러를 했기 때문에 메커닉(Mechanic)이라고 부르는 타짜가 300여 명 정도 있었다. 단 게롯은 나의 친구이자 스승인데, 그는 초일류 타짜였다. 그가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되자, 그는 내가 타짜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그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는지 시범을 보여줬고, 다음날 카지노에서 본 타짜들의 모습은 단이 나에게 이야기했던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암호나 카드를 섞는 모습 무엇 하나 그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었다. 나에게 단이란 친구가 없었다면 아직도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름다워라, 한국 기원과의 즐거운 추억

후지쓰배

후지쓰배는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 첫해에는 미주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이, 1990년에는 프로 선수들까지 참가했다. 그때 나는 바둑을 손에 잡지 않은 지 14년째였다. 아주 오랜만에 하는 프로와의 대국이었다. 예선전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실력 차이가 많이 나서 결국 마이클 레드몬드 8단과 결승전을 치렀고, 내가 이겨 미국 대표가 되었다. 일본에 도착해 전야제를 치르는 날, 내 상대는 일본의 2인자로 꼽히는 젊은 강자 야먀시로 히로시 9단이었다. 나를 뽑은 야먀시로가 대국운이 좋다고 느꼈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이 내 승부욕을 자극했다. 대국 초반에 상대가 기압이 들어간 수를 두었고, 여기서 물러서면 판세가 불리해질 게 뻔했다. 자세히 보니 무리수였다.

내가 그냥 놀라 물러서 주기를 바라고 둔 수였나 보다. 그 수를 맞받아치며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효과가 있었다. 그 후 상황은 나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종반을 향하여 가던 중 상대방이 무리수를 뒀다. 가일수를 해야 하는데 어차피 불리하니 손을 뺀 것이다. ‘왜지? 9단이 이렇게 쉬운 수를 못 볼 리가 없는데, 함정인가?’ 곰곰이 수를 읽고 수가 나는 곳에 치중을 하니 야마시로는 목례를 했다. 그러고선 아무 소리도 없이 싹싹하게 돌을 거뒀다. 그때 나는 이게 혹시 꿈이 아닌가 생각하느라 한참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검토실로 내려오니 일본 기사들은 고개를 숙인 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중국 선수들과 한국 선수단만이 박수로 나를 맞이할 뿐이었다.

다음 날의 상대는 오히라 9단이었다. 나의 흑번으로 시합이 시작되었고, 상대방의 무리수가 일찍부터 나왔다. 그 수를 읽어내며 이득을 본 이후로는 별다른 승부처 없이 무난히 이긴 것 같다. 어쩌다 일본을 대표하는 9단 두 명을 모두 이기고, 나는 8강에 진출한 사상 첫 미국 대표가 되었다. 8강전에서 만난 사람은 내 친구 조훈현 9단이었다. 나의 흑번으로 시작된 바둑은 별 풍파 없이 중반을 향해 갔다. 조 국수가 나의 집 모양에 수를 내러 왔을 때 안으로 자그마하게 살려주고 두터움을 쌓으며 선수를 빼고 반대편에 있는 대마사냥에 나섰다. 백의 대마가 쫓기면서 살기가 바빠지면서 백은 바둑을 그르치게 됐다. 대마를 살려주고 난 후 집계산을 해보니 반면으로 16집을 남기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두어도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평정심을 잃고 잡념이 몰려왔다. 조 국수가 한국의 전관왕인데 내가 이 바둑을 이기면 한국의 언론이 시끄럽지 않을까. 잡념이 드는 순간부터 귀신같이 추격을 당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3.5호를 졌다.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비롯한 일본 기사들이 차민수가 일부러 져주고 있다며 술렁였다. 내가 그 판에서 30회가 넘는 실수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져 준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이야기였다. 프로 세계에서 져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날 내가 진 것은 대국 중 다른 생각으로 나의 집중력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세계 8강 ‘차8강’이 되다

다음 해에도 미국 대표로 다시 선발되어 16강에 진출하게 됐다. 첫날은 대국이 없어 남의 바둑을 구경했다. 조치훈 9단이 유창혁 9단을 이기고 올라오며 내 상대가 되었다. 드디어 일본의 전관왕인 조치훈과 대국을 하게 된 것이다. 백번으로 시작된 나의 수순 착오로 인해 나는 초반부터 치명상을 입었다. 구제불능의 상태였다. 바둑을 둘 맛이 나지 않아 그냥 던져버릴까 하다, 미국 선수가 바둑을 성의 없이 둔다는 소리가 나올까 할 수 없이 끌려가고만 있었다. 어차피 질 거면 최강의 수만 골라서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큰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온 흑돌을 패로 전부 잡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고민 없이 바둑을 둔 나의 시간은 150분이 남아 있었고, 조치훈 9단은 마지막 초읽기에 몰려 있었다. 상대방이 계가할 틈을 투지 않으려고 조 9단이 두기가 무섭게 나도 그냥 따라두었다.

하여튼 바둑은 마무리가 되고 계가를 해보니 내가 4.5를 이겼다. 일본의 전관왕을 이긴 것이다. 그렇게 2년 연속으로 세계 8강에 올랐다. 이때부터 한국 기사들이 나를 차8강이라고 불렀다. 다들 어디서 그렇게 별명 짓는 법을 배워오는 건지 모르겠다. 검토실에 내려오니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NHK, 요미우리, 그 외에도 신문이나 잡지 등 언론매체라면 모두 나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 도착하니 일본의 1인자를 현역이 아닌 무명의 예비역 기사가 이겼다며 더 난리법석이었다.

최선을 다한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

승부는 장사와 같은 것

인생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잘나갈 때가 있으면 어려울 때도 있다는 뜻이다. 이때를 대비하여 우리는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어두기도 한다. 위기가 닥치더라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다. 장사도 마찬가지다. 최선은 장사가 잘될 때 가급적 많은 돈을 벌어놓는 것이다. 블랙잭이나 포커도 이와 같다. 이길 때는 최대한으로 이익을 늘리고 게임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그 날의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요령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게임이 잘될 때는 베팅이 위축되고, 게임이 안 될 때에 열을 받아 승부를 크게 보려고 한다.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지혜를 갖춘 사람은 불리한 상황에서 적은 베팅으로 가급적이면 많은 카드를 뽑아내어 자신이 유리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카드를 많이 뽑아낼수록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쉬워져 딜러보다 플레이어가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 수 있다. 이때가 승부를 할 기회이니, 때를 잡으면 과감히 승부해야 한다.

게임이 안 되고 있을 때에 승부를 하려고 서두르는 것은 장수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과 같다. 베팅을 적게 한다고 자존심이 상할 이유는 없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도, 돈을 잃고 카지노를 걸어 나갈 때의 비참함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새벽이 되면 집집마다 신문을 집어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던져 넣는 장소가 제각각이지만 몇 년이 지나면 마음먹은 곳이 어디든 신문을 던져 넣을 수 있다. 현관이든 개집 앞이든 어느 분야든. 그 분야를 통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최선을 다하라

예전에 실력이 충분한데도 큰 바둑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적이 있었다. 세고 이름난 선수들은 죄다 이기고 무명의 선수에게 발목을 잡혔기 때문이다. 영등포에서 어려서부터 내게 많은 지도를 해주셨던 최 사범님이라는 어른이 계셨는데, 그날 그가 내게 물었다. “차 사범,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에 어떻게 잡는지 아는가?” 나는 벙어리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잡아도 되고 놓쳐도 되는 것이 아니라, 놓치면 굶어야 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쫓아가 잡는 것이야.” 그 말씀을 듣고 방심한 내 모습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크게 성적을 내기 시작해 아마추어 전국대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고 대단한 일이다. 세상에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에 승복할 수 있고, 나아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생활신조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최 사범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공부를 할 때에는 책을 최소한 스무 번은 읽는다. 50번 넘게 읽은 책도 여럿 있다.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러 번을 반복해서 보면 앞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나 새로운 글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나는 기억력 부분은 보통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한다. 이를 보충하고자 하다 보니 남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지난 일을 떠올리다 보면 그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머리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숫자에 대한 감각은 남보다 뛰어나다. 상상력, 추리력, 추진력 분야도 그렇다. 다른 이들이 그렇듯 나도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조합하며 살아왔다. 그러면서 프로 기사도, 프로 포커 플레이어도 되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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