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무사시 – 병법의 구도자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8월 / 354쪽 / 13,800원

미야모토 무사시 – 병법의 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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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 - 병법의 구도자

우오즈미 다카시 지음

책소개

이 책은 새로 발견된 사료를 포함한 무사시의 역사 기록을 검토해가며 그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보는 동시에, 합리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된 그의 사상을『오륜서』를 중심으로 해설한다. 저자는 무사시의 다른 저작인『병도경』,『병법35개조』,『독행도』등과 대조해가면서, 그가 대표작『오륜서』를 통해 후세에 남기려 했던 ‘병법의 도’란 과연 무엇인지, 그 사상의 진수에 접근하고자 한다.

요약본 본문

“미야모토 무사시”의 탄생 - “천하제일” 의 무예가가 되기까지

무사시의 성장과정

무사시의 출생년도: 미야모토 무사시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1584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무사시가 직접 자신의 출생연도를 밝힌 적은 없다. 이에 반해 무사시의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 사다쓰구의 직계 후손에 전해지는 “미야모토 가계도”에서는 “1582년생”, “향년 64세”라고 명기되어 있다. 미야모토가 태어난 해를 확정할 수 있는 당시 자료는 이 이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미야모토 가계도”에 따라 1582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기로 하겠다.

소년 시절의 무사시

할아버지 신멘 무니 / “하늘 아래 다시 없는 병법가”에 대해: 무사시는 『오륜서』에서 “신멘”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이오리의 자료를 보면, 하리마에서 태어난 무사시가 이후 미마사카에 있던 신멘 가문의 대를 이었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임). 이러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무사시 입장에서 양아버지 신멘 무니는 거대한 존재였다고 추정된다. 신멘 무니는 “하늘 아래 다시없는 병법가”라는 명칭을 쇼군에게 직접 하사받았을 정도로 일류 무예가였다는 말도 있다.

무예가로서의 단련: 소년 시절의 무사시에 대해 확실한 것은 『오륜서』에 있는 “13세에 처음으로 승부를 겨루었다. 그 상대인 신토류의 아리마 기헤에라는 병법가를 이겼고, 16세에 다지마국의 아키야마라는 강력한 병법가를 이겼다”라는 것뿐이다. 양아버지 신멘 무니와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무사시가 “짓테(十手, 십수) 집안”의 계승자로 “하늘 아래 다시없는 병법자”로 칭해진 양아버지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단련을 거듭해 13세, 16세라는 나이에 두 번에 걸친 어려운 승부를 이겨내고 무예가로서의 자신감을 심화시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천하 대결 무사수행 과정 - 실전 안에서 태어난 감각

규슈 구로다 가문 측으로 참전: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는 무사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가했다가 패배했다는 대목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무사시가 세키가하라에서 싸웠다는 확실한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 상세한 기록이 없는 가운데, 『무슈 겐신공 전래기』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규슈에서도 전투가 있었으며, 무사시는 아버지 무니와 함께 구로다 조스이 요시타카 휘하에서 싸웠다고 상세히 적혀 있다. 어쨌든 1600년, 19세의 무사시는 세키가하라에서가 아니라 규슈에서 동군 측으로 싸웠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훗날 오사카 여름 전투, 시마바라 전투에도 참가하게 되는데, 이런 전투 체험을 통해 무사시는 검술가로 남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사시의 상락 - 무사수행으로: 무사시는 『오륜서』에서 “스물한 살에 교토로 올라와 천하의 병법자들을 만나 수차례 승부를 겨루었다”고 쓰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이후, 드디어 본격적인 무사수행과 승부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무사시는 어째서 교토로 올라갔을까. 구로다 가문을 섬긴다는 것에 심적 갈등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무사시는 13세부터 두 차례에 걸쳐 어려운 승부에서 이겼고 크고 작은 전쟁이나 기습공격에도 참가하며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양아버지는 구로다 가문에서 자리를 얻었지만, 젊은 무사시는 스스로의 검술로 입신하고자 교토로 올라갔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풍조를 고려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선택지였을 것이다. 무사시는 전국의 여러 다이묘들을 없애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전후 처리가 일단락된 1602년 교토로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시오카 가문과의 승부 - “천하제일”을 칭하다: 『오륜서』는 “스물한 살에 교토로 올라와 천하의 병법자들을 만나 수 차례 승부를 겨루었지만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쓰고 있다. 무사시는 “천하의 병법자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오리의 고쿠라 비문에 의하면 쇼군 아시카가 가문의 검술 사범이었던 명문 요시오카 가문과의 싸움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비문은 요시오카 가문과는 양아버지 무니 때부터 악연이 있었다며 세 번의 승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대결이 이루어진 해는 고쿠라 비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1604년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스물한 살에 교토로 올라와 천하의 병법자들을 만나 수차례 승부를 겨루었다”는 “천하의 병법자들”을 “요시오카 부자 3인”이라고 파악하고, 교토로 올라온 후 즉시 요시오카와 겨뤘다고 친 후, 통설의 출생 연도인 1584년을 기점으로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문에는 요시오카와의 대결 당시 무사시에게 이미 몇 사람인가의 제자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므로 무사시가 상락 후 곧장 요시오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기보다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병도경』을 저술하다 - 엔메이류 확립

“천하제일”이라는 자각과 엔메이류 확립: 무사시는 요시오카 가문과의 대결에서 이긴 후 “병법 천하제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병법 검술 이론을 적어 엔메이류라는 유파를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605년 “미야모토 무사시노카미 후지와라노 기케이”가 발급한 『병도경』이라는 제목의 28개조의 비전서가 있는데, 이는 겐나 시대(1615~1624)에 무사시의 제자였던 다다 요리스케의 집에서 관련 문헌 4권과 함께 전래되어온 서적이다. 『병도경』은 2년 후 2개조가 보강되어 상하 2권으로 나뉜 것으로 보이는데, 상권만 있는 필사본까지 포함해 일곱 가지가 발견되고 있다. 『병도경』의 발문에는 “1604년 초겨울 무렵”, 어느 날 문득 마음을 먹고 “고금에 다시없는 병법”의 “전례 없는 탁월한 비사를 써두고자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서명 앞에는 “엔메이류 천하제일”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병도경』내용 - 실전승부 방식: 『병도경』은 28개조로 이루어졌으며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다치(큰칼)를 들었을 때의 자세 등 기초적인 지침을 쓴 6개조, 엔메이류의 ‘형’을 설명하는 “태도지명 표” 7개조, 다치(큰칼)를 다루는 사람의 지침을 쓴 “승미의 위” 7개조, 실전에 임할 때의 지침을 쓴 “오” 8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발문을 두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병도경』에는 개개의 적에 대한 실전적인 공격 방법이 세밀하게 분석되고 있다.

가장 앞에 나온 “병법의 마음가짐”에 의하면, 적과 대적할 때 목소리가 크고 얼굴이 상기된 채 다치를 꼿꼿하게 들고 서 있는 사람은 실력 없는 하수이므로, 웃어 보인 후 적이 의아하게 생각할 때 단박에 쳐야 한다. 반대로 조용하고 눈매가 가늘며 다치를 허공에 띄우듯 들고 있는 상대는 고수라고 여기고 재빨리 쳐야 한다. 적의 자세만 보고도 적의 실력을 매섭게 간파한 후 그 실력에 따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적의 공격 자세에 따라 발이 나와 있으면 발을 노리고, 손이 나와 있으면 손을 노려야 한다. 적의 자세 중 어디를 어떻게 노려야 할지를 경우에 따라 각각 세 개씩 들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적의 칼을 피하는 방법이나 자신의 빗나간 칼을 다시 들고 ‘상단’으로 다시 겨눔세(공격자세)를 취하는 방법을 적고 있으며, 이는 적과의 거리나 간격에 따라 다르다는 내용을 이치에 맞게 설명하고 있다.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공격을 가해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면서 항상 싸움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도 말한다.

아울러 “수리검”의 사용법도 적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다르다고 적고 있다. 마지막에 나오는 “직통의 위”에서는 적과 마주했을 때 유리한 자세를 취하며 “타이밍을 가늠하고 정신을 집중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별(노리는 급소)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설령 대지는 빗나간다 해도 다치는 절대 빗나가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을 버리고 여기야말로 직통으로 일격을 가할 곳이라고 생각되면 온 힘을 다해 내리쳐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간류 고지로와의 승부: 전국을 돌며 무사수행을 하던 승부의 마지막으로 간주되는 것이 간류의 고지로와의 승부다. 『병도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은 추정도 가능해진다. 무사시는 장검을 쓰는 고지로의 기술을 고려해 그 길이를 능가하는 긴 목검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목검의 길이를 상대방에게 간파당하지 않도록 “다치를 뒤로 비스듬히 겨누거나”, 혹은 ‘상단 자세’라도, 목검을 어깨 위에서 옆으로 눕힌 형태로 겨누어 단번에 빼내려던 게 아닐까. 고지로는 그 목검이 얼마나 긴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먼저 공격했던 것인데, “대(待)의 선(先)”을 노리던 무사시는 고지로의 장검보다 더 긴 목검으로 공격해왔던 게 아닐까. “직통(直通)의 위(位)”에서 말하고 있듯, 무사시는 충분히 타이밍을 가늠해가면서 급소라고 생각되는 곳을 정확하게 “설령 대지는 빗나간다 해도 다치는 절대 빗나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내리쳐”, 결국 긴 목검의 일격으로 승부는 결정 났다.

승부를 벌인 해와 그 의미: 무사시는 1602년 상락해서 무사수행을 시작했는데, 교토에서 에도로 향한 후 여러 지역을 돌다가 다시 규슈의 양아버지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에 고지로와의 승부가 마지막 승부였다고 생각된다. 실전 승부가 29세까지라는 『오륜서』의 기록에 의거하면 고지로와의 승부는 무사시가 29세 되던 해의 일로 “1582년생”이라고 생각하면 1610년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이후 1611년 4월, 막부는 서일본지역의 여러 다이묘들에게 에도의 쇼군가의 법도를 반드시 지킬 것 등 3개 조항의 서약서를 바치도록 했다. 무사시로서는 바야흐로 더 이상 승부할 상대도 없었으며 정면으로 승부가 가능한 시대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무튼 고지로와의 대결 이후 오사카 여름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의 5년간, 무사시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심오한 도리(道理)”를 찾아 - 막번체제 확립기 사회에서

‘오사카 여름 전투’와 그 이후

“병법의 도를 만날 때”까지: 30세가 지난 어느 날, 무사시는 그때까지의 60여 차례의 승부를 되돌아보며 새삼 “(승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병법이 최고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더더욱 심오한 도리”를 얻고자 “아침저녁으로” 연마를 거듭했다고 『오륜서』에는 적혀 있다. 검술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서도 무사로서의 도를 추구하여, 50세 무렵 “드디어 병법의 도를 만났다”, 즉 “병법의 도를 터득했다”라는 것이다. 무사시가 30대에서 50대가 될 당시는 시대적 배경으로 치자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시마바라의 난’으로 이어지던 시절이다. 막번체제가 확립되어가던 이 시기를 무사시는 어떻게 살아냈는지, 그 실상을 명확히 하고 싶다.

오사카 여름 전투 - 후다이 다이묘 휘하에서의 참전: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34살이 된 무사시는 도쿠가와 후다이 다이묘 휘하에서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에서의 무사시 동향에 대해서는, 오와리 번사의 견문록을 정리한 『황구잡록』에 무사시가 “어느 다리 위에서 기다란 목검을 들고 잡병들을 다리의 좌우로 쓰러뜨리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호레키 시대(1751~1764)에 성립된 책인데, 제1권의 ‘오사카 전투 전문’ 중의 하나에 나온다. 미즈노 휘하에 있었다는 사실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신뢰할 수 있는 전승이라고 생각된다.

다이묘들의 “외교”: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를 멸망시킨 막부는 전란의 시대를 종식시키자마자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을 내린다. 번주가 거주하는 본성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성들은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이것은 여러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영내에 존속하고 있던 중세 이후의 유력 가신의 성이 파괴된 결과 오히려 각지에 있던 다이묘의 권력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이어 “무가제법도”를 공포하고 다이묘를 법적으로 규제하며 막부의 절대적 우위를 확정해간다. 따라서 막부에 대해 적대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에,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막부와의 관계에 상당히 배려해야 했다. 다이묘 입장에서 막부 고위직이나 다른 다이묘들, 하타모토와의 교제는 이른바 “외교”라고 할 수 있었으며, 문무의 도를 익히고 신뢰를 얻는 동시에 정보를 획득하는 중요 업무이기도 했다.

예술과 예능의 중요성: 이런 “외교”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당시의 다이묘들은 문무(文武)의 도(道)에 조예를 가져 스스로 여러 예술과 예능을 익히거나 해당 방면의 유능한 인재들을 주위에 포진시키고자 했다. 탁월한 무술을 지닌 무예가는 그런 풍조 속에서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병법의 도를 만나다” - 시마바라의 난 전후

50대의 무사시: 무사시는 30세 이후 후다이 다이묘의 ‘귀한 손님’으로 예우되며 자유롭게 지냈다.『오륜서』에 의하면 무사시는 “더더욱 심오한 도리”를 얻고자 노력해 병법의 도와 모든 예술 분야의 도를 심화시켜가다가 50살 무렵 “드디어 도를 만났다”, 즉 “이치를 터득했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 하나의 계기로 무사시가 50세에 해당하는 1631년, 양자 이오리가 오가사와라번의 “집정직”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오리는 출사한 지 5년이 지난 신참으로 20세의 젊은이였다. 이런 이례적 출세는 번주를 가까이에서 섬기며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벼락출세의 배경에는 아카시 성곽도시 구획정비 이후 공적이 쌓였고, 동시에 그 검술이 번의 자부심이 된 양아버지 무사시에 대한 높은 평가도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가사와라번의 고쿠라 이봉 / 나고야, 에도에서의 무사시: 새로운 영지를 다스리기 시작하며 분주해진 이오리를 후원하기 위해 무사시 본인도 함께 1632년 고쿠라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 직책에 있던 이오리를 통해 군지휘관인 장수에 가까운 역할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무사시의 시야도 상당히 넓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무사시는 1632년부터 한동안 고쿠라에 머물렀지만 잠시 뒤에 나고야나 에도 등으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지역에도 전승이 남이 있기 때문이다.

시마바라의 난 - 장수로서의 대우 / 이오리와 무사시의 출전: 1638년 2월 무사시는 이오리와 함께 시마바라의 난에 출전했다. 이오리는 당시 26세였으며 고쿠라 오가사와라번의 사무라이다이쇼(주로 대장군 아래서 일군을 지휘하는 자)이자 소군부교(군사 행정 간부직)를 겸하고 있었다. 무사시는 전투에 처음으로 출전한 번조 나가쓰구의 곁에서 19명을 이끌고 호위하면서 고쿠라 병력과 연계하도록 움직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잇키 병력이 농성 중이던 하라의 고성을 포위한 지 3개월 남짓, 성 안의 식량이 바닥이 났을 것을 가늠해 막부군은 총공격 날짜를 2월 28일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전날 나베시마 병력이 먼저 치고 들어가면서 공격에 나서자 나머지 번의 병력들도 서로 앞을 다퉈 성 안으로 돌입해 혼란은 극에 달했다. 당시 구로다 병력이나 호소카와 병력 등에 의해 세 방면에서 성의 방어선이 공격을 받았고, 결국 다음 날 성은 완전히 제압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지쿠젠 번주 구로다 다다유키가 오가사와라의 진영으로 찾아와 이오리를 불러 그 활약상에 대해 칭찬했다고 한다.

시마바라의 난의 영향: 시마바라의 난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이오리는 오가사와라번에서의 지위가 한층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번이나 막부 고위직에게도 그 존재가 인지되었다. 때문에 무사시는 이오리를 통해 번의 조직이나 그 정치의 실제 모습을 내부에서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마바라의 난에 출전했을 때는 전투에서의 무장의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경험들이 쌓였기 때문에 훗날 『오륜서』에서 “병법의 도”를 단순히 일대일로 행하는 검술로서만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새롭게 발견된『병법서부』 - 50대의 검술 이론: 1638년 11월, 무사시가 14개조의 이론서를 문하생들에게 전수했다는 사실이 최근 판명되었다. 이 비망록은 머리말에서 “문득 생각난 것만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라고 하고 있으며 발(跋)에서 “병법 수련의 도는 이와 같음”이라고 나와 있다. 정식 서명은 없지만 발문에 나와 있는 표현을 통해 이하의 내용에서 『병법서부』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병법서부』의 내용: 첫 부분에 나오는 5개조는 기본적 지침을 보여준다. “몸가짐”, “다치 쥐는 법”, “발 디디기”는 다소 표현이 변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병도경』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마음가짐”이나 “눈초리”의 내용은 상당히 변했다. 『병도경』의 “마음가짐”은 적의 실력에 따라 싸우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병법서부』에서는 행주좌와(行住坐臥), 항상 병법에 마음을 쏟으며 일상에서부터 끊임없이 지지 않도록 분별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만사가 귀착하는 바를 응시하라고 말한다. “눈초리”에서는 『병도경』이 “안개에 싸여 희미하게 보이는 저 멀리 섬에 있는 바위나 나무를 보는 것처럼”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병법서부』에서는 “견(見)의 눈을 약하게 보고 관(觀)의 눈을 강하게 봐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나중에 나올 『오륜서』에 가까운 표현이다. 『병법서부』의 제6조는 “다치 자세 다섯 가지”로 다섯 가지 ‘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병법의 올곧은 도”를 전하고자 - 후세에 남긴 것

니토이치류(二刀一流)의 전개 - 구마모토 호소카와번에서

구마모토 호소카와번으로 /『병법35개조』를 바치다: 1640년 8월, 무사시는 히고 구마모토에 있는 호소카와번의 ‘귀한 손님’으로 예우되게 되었다. 이미 59세라는 나이가 된 무사시는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 지역으로 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년간 구마모토에서 지냈으며 무사시에 대한 공적 기록이 나오는 것은 이 시기부터다. 1641년 무사시는 『병법35개조』를 번주 호소카와 다다토키에게 바쳤다. 『병법35개조』는 4년 전 이미 야규 무네노리로부터『병법가전서』를 수여받았던 다다토키에게 바쳐지는 것인 만큼, 자신의 검술 이론을 다시금 되돌아보며 그 도리를 명확히 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아 완성시켰을 것이다. 작성 방식은 각각 하나씩 써내려간 36개조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쭉 나열하고 있다. 36개조임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같은 35개조”라는 표현이 보이는 이유는 마지막 “만리일공”의 1개조에서 그 내용이 서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년의 경지 - 수묵화와 『오방지태도도(五方之太刀道)』

다다토시의 죽음과 세대교체: 병상에 누워 있던 다다토시가 『병법35개조』를 실제로 읽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을 바친 다음 달인 3월이 되자 다다토시의 상태는 악화되어 3월 17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세였다. 같은 해 5월 막부로부터 구마모토번의 상속을 인정받은 다다토시의 장남 미쓰나오는 부친에 이어 무사시를 각별히 우대했기 때문에 무사시는 계속 이 땅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음 해인 1642년 6월 미쓰나오가 구마모토로 귀국한 후부터 번의 정치무대에서 급속한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다다토시 시대 말기에 와카도시요리의 직책에 올라 정무를 관장하고 있던 나가오카 요리유키나 사와무라 도모요시 등이 드디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 모두 무사시를 존경하고 후원하고 있었다. 무사시는 병법을 지도할 뿐만 아니라 요리유키의 저택에서 행해지는 렌가 모임에도 때때로 초대되었고, 도모요시의 연회에도 참석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무사시의 수묵화: 만년의 무사시는 젊은 번주나 가로들의 각별한 대우를 받으며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한적하게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무사시가 도달했던 경지를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것이 그 시절의 수묵화 작품이다. 무사시의 그림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몇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만년인 구마모토 시절에 그려진 작품들이다.

무사시 자필의 한문 -『오방지태도도(五方之太刀道)』: 무사시는 그림도 그렸으나, 물론 중심은 어디까지나 “병법의 도”였다.『오륜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643년 10월 10일인데, 무사시는 그 이전부터 필생의 과업으로 병법서를 쓰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무사시가 직접 쓴 글”이라고 전해지는 한문 1권이 남아 있다. 원문은 본문으로부터 한 행을 비운 후 말미에 “오방지태도도”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이하에서 이 글을 『오방지태도도』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오방지태도도』의 내용: 『오방지태도도』의 원문은 한 곳만 단락이 나뉘고 나머지는 모든 문장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다섯 가지 단락으로 나뉜다. 첫 번째 단락은 병법이 “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법은 “도”이기 때문에 적을 만나 겨루는 검술 이론은 “삼군지장”(대군[大軍]에 의한 전쟁의 장)에도 적용이 가능하며, 승패는 실제로 싸워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이전의 노력에 의해 이미 결정되기 때문에 “병법의 도리”는 반드시 이를 따라야 하며 결코 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은 세상의 병법의 양상을 비판하고 있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수십 개가 넘는 유파가 있지만 강한 것만 믿고 난폭해지거나 부드러움을 지키려다 너무 선이 가늘어지는 경우도 있었다며, “도”는 보편적인 올바른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오로지 단 하나라고 강조한다.

세 번째 단락은 “도”에 밀착된 자신의 유파의 이론을 전개한다. 자신은 내면 깊숙이 성찰하고 예민한 심성으로 오랜 세월 수련을 거듭해 비로소 이 “도”에 통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네 번째 단락은『사기』에 있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논한다. 우선 병법의 도의 “유지무지(有智無智)의 상(相)”을 보여주기 위해, 실전경험이 없이 병법이론에만 밝아 대군(大軍)을 이끌면서도 진나라에 패해 나라를 멸망시킨 조괄과,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이 있던 유후 장량을 예로 들고 있다. 이어 항우가 소년시절 검을 배웠으나 이를 이루지 못해 그 아버지에게 질책 당했을 때 “검은 한 사람을 대적할 뿐이기에 굳이 배울 필요가 없으며,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라고 말했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이것을 좁은 소견이라고 부정한다. 검의 도에 통달해 병법을 돌이켜보면 만인의 진영을 상대로 한 승부도,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것도 똑같은 이치라는 것은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백세(百世)에 통하는 “올곧은 도” / 『오륜서』의 서문이었을까: 다섯 번째 단락에서는 도를 가르치는 방식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이 말하는 도야말로 백세에 통하는 “올곧은 도”임을 강한 어조로 말한다. 한편 『오방지태도도』의 내용은 네 번째 단락을 빼면 『오륜서』의 의식과 내용적으로 직결된다.

『오륜서』성립 - “천도(天道)와 관세음보살을 거울삼아”

새로운 책을 저술하다: 무사시는 구마모토 성곽도시에 있던 저택을 나와 교외의 이화토산의 레이간도라는 동굴에 틀어박혀 1643년 10월 10일『오륜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오륜서』는 그 첫머리에서 “이 책을 쓰면서도 불교와 유교 등 그 어떤 가르침에도 의존하지 않고, 병법에 관한 고사도 굳이 인용하지 않으며”, 그저 “천도(天道)와 관세음보살을 거울삼아” 쓴다고 선언하고 있다.

『독행도』와 무사시의 종언

병상에서: 이와토산에 틀어박혀 『오륜서』를 쓰기 시작한 지 약 1년 후 무사시는 병마에 휩싸인다. 무사시는 이 시기에도 요리유키의 장남으로 당시 7세였던 나오유키에게 검술 지도를 했고 크고 작은 두 자루의 수련용 목도를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645년 봄, 병은 더더욱 깊어졌다. 『니텐기』에는 “단 하루라도 산거(山居)”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무사시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5월 12일 무사시는 소지하고 있던 여러 물건들을 지인이나 제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독행도』: 1645년 5월 12일 “스스로 맹세하는 글을 적다”라고『무공전』은 쓰고 있는데, 이것은 글머리에 “독행도(獨行道)”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글로 무사시 자필본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독행도”라는 단어는 무사시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 사람의 도를 거스르지 않는다 / 하나,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 하나, 어떤 것에도 의지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 하나, 내 한 몸을 가볍게 여기고 세상을 중히 여긴다 / 하나, 평생 동안 욕심을 갖지 않는다 / 하나, 내가 한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 하나, 타인의 선악에 대해 시샘하지 않는다 / 하나, 어떠한 이별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 하나, 자타 누구에게도 불만을 말하거나 한탄하지 않는다 / 하나, 연정을 품지 않는다 / 하나, 어떤 일에도 좋고 싫음을 말하지 않는다 / 하나, 거처할 집에 대해 욕심 부리지 않는다 / 하나, 몸에 좋은 음식을 탐하지 않는다 / 하나, 대대로 전할 골동품을 소유하지 않는다 / 하나, 흉한 징조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 하나, 무기 이외의 다른 도구에 마음을 허비하지 않는다 / 하나, 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하나, 훗날을 대비해 재물을 모으지 않는다 / 하나, 부처님을 받들되 의존하지 않는다 / 하나, 목숨은 버릴지언정 명예는 잃지 않는다 / 하나, 항상 병법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사시의 마지막 순간: 『무슈 겐신공 전래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1645년 을유 5월 19일, 평일과 마찬가지로 정념(正念)하며 숨을 거두다”라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오륜서』의 사상

『오륜서』는 “땅ㆍ물ㆍ불ㆍ바람ㆍ공(비어있음)”의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땅의 장’에서 무사시는 각각의 의미와 전체의 구성에 대해 미리 정리해서 쓰고 있다. 기존에 써왔던 검술서의 틀을 뛰어넘어 무사의 삶과 존재방식을 포함한 병법론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5권 모두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확실히 보여줄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땅ㆍ물ㆍ불ㆍ바람ㆍ공(비어있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오륜”인데, 『오륜서』에서는 이와는 다른 의미로 5권의 내용에 걸맞게 무사시의 독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땅의 장”은 “올곧은 도”의 기반을 다지는 권이다. 모름지기 병법이란 비단 검술만이 아니라 무사가 따라야 할 모든 규범들과 관련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물의 장”은 넣는 그릇에 따라 한 방울이 되기도 하고 큰 바다가 되기도 하는 물의 이미지에 의거한다. 동시에 병법의 도의 핵심이자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는 내용으로 “검술의 전반적인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불의 장”은 작은 불이라도 순식간에 크게 번지며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에 의한다. 한 사람과의 승부처럼 보이는 검술 이론이 만인에 의한 대규모 전쟁 장면에도 그대로 통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람의 장”은 “각 유파들의 모습”이다. 세상에 있는 다른 유파의 잘못된 점에 대해 쓴다. “공(비어있음)의 장”은 궁극적으로는 “도리를 터득해도 그 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진정한 도에 이르는 것을 공(비어있음)의 장에 적어 둔다”라고 마무리 짓고 있다. 『오륜서』는 이상의 5권으로 이루어졌으며 검술 이론을 중심으로 무사의 존재방식 전체에 걸친 “병법의 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오륜서』의 마지막은 한문체의 발(跋)을 모방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로 마무리된다. “공(空)은 유선무악(有善無惡) / 지(智)는 유(有)다. / 리(利)는 유(有)다. / 도(道)는 유(有)다. / 심(心)은 공(空)이다.” 진정한 “공”에는 선은 있으되 악은 없다. “지”나 “리”, 그리고 “도”는 확실히 포착할 수 있는 “존재함”의 것, “유”다. 그런 것들을 땅ㆍ물ㆍ불ㆍ바람의 네 장에서 논해왔다. 그러나 “지”, “리”, “도”를 이끌고 있는 “심”은 “존재하지 않음”의 것, 즉 “공”이다. “공”을 마음속으로 수련해야만 땅ㆍ물ㆍ불ㆍ바람의 네 장의 “지”, “리”, “도”가 진정한 것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런 “지”, “리”, “도”를 확실히 수행해가다 보면 마음이 진정한 “공”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오륜서』는 위에 있는 문구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공”이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병법의 도에 입각해서 말할 뿐이다. 이런 부분에서 무사시의 철저함이 느껴진다. “공”을 말함으로써 읽는 사람에게 넓고 무한한 것을 보여주며 각자가 끊임없이 도를 연마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무사시가 『오륜서』의 붓을 내려놓았던 것은 죽기 일주일 전이었다. 무사시는 평생에 걸쳐 도달할 수 있었던 병법의 올곧은 도를 후세에까지 남기고자 죽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했다.

종장 “도”의 사상 안에서 - “항상 병법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무사시는 사회가 전국시대부터 근세로 대전환을 이룬 격동기에 무사로서의 독립정신을 끝까지 관철했다. 전통이나 권위에 기대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개인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무사시는 평생 동안 검의 도를 추구했지만 오로지 검술만 단련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병법으로 수행했고 여러 예술에 심취하며 스스로의 세계를 넓혀나갔다. “병법의 이(利)를 모든 예술 분야에 적용하자 만사에 있어 더 이상 스승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무사시가 남긴 탁월한 수묵화는 그야말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무사시는 일본의 “도”의 추구 방식이나 그를 통해 펼쳐지는 모습을 현실에서 살면서 직접 보여주고 있다. 『오륜서』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도를 잘 닦는 것은 긴요한 일이다”라며 개개인이 각자의 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권해주고 있다.

죽기 일주일 전 『오륜서』의 붓을 내려놓은 후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며 썼다고 전해지는 무사시의 마지막 글인『독행도』에는 앞서 본 것처럼 “내가 한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처님을 받들되 의존하지 않는다” 등 21개조가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하나하나 열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마치 마지막의 한 마디 “항상 병법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를 향해 놓여 있다고 여겨진다. 무사시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가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60여 년의 세월을 “항상 병법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살다가, 우리들에게 거대한 어떤 것을 남기고 떠났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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