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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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민이언 지음
다반

책소개

동서양 철학을 넘나들며 파헤친 불안에 대한 진실과 아티스트 20명이 그려낸 40점의 작품을 마주하며, 불안은 더 이상 극복해야 할 감정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삶의 불안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요약본 본문

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민이언 지음
다반 / 2018년 4월 / 311쪽 / 16,000원

살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가면사회

[1] 트루먼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세트장이란 사실도, 자신의 삶이 시청자들에게 공개되는 관찰 예능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이미 관찰의 시선에는 익숙해져 있다. 관계 속을 살아가는 삶 자체가 타인의 시선을 전제한 어느 정도의 연출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지 않던가. 영화 〈트루먼 쇼〉 내에서 트루먼의 타인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은 시청자들과 함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트루먼의 관찰자이지만, 그들 역시 시청자들에 의해 관찰을 당하는 입장이다. 시청자 역시 관찰의 시선 안에 놓인 삶을 살아가는 페르소나들이다. TV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트루먼의 삶을 향한 시선은 ‘훔쳐보기’에 앞서 ‘돌아보기’인 셈이며, 장르는 관찰 예능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이다.

이 프로듀서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만든 신의 입장이다. 자신이 딛고 있는 세계가 그저 가상의 세트장에 불과하다는 비밀을 알아버린, 그래서 이 세계를 벗어나 진실을 보고자 하는 트루먼에게, 프로듀서는 마이크로 지시를 내린다. 어차피 세계 밖에도 진실은 없노라고, 그러니 차라리 계속 그 세계에 머물라고…. 트루먼에게 프로듀서의 음성은 하늘 아래로 울려 퍼지는 ‘말씀’이 된다. 그러나 신 역시 시청률이란 ‘절대정신’ 앞에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쇼의 밖에 존재하는 신이 이미 쇼의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아이러니, 신은 세상 밖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참여하고 있는 자본적 존재이다. 그렇듯 모든 것이 쇼이다.

우리가 순수한 ‘나’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관계의 메커니즘 안으로 던져지는 사회적 존재에게, 타인을 매개하지 않는 순수존재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겐 ‘나’로서가 아니라 남들이 ‘나인 줄 아는 모습’으로서 살아가는 시간들이 많다. 즉 ‘나’로서보다는 타인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너’로서 살아가는 시간이 일반적이다.

[2] 애니메이션 〈타이거마스크 2세〉에 등장했던 캐릭터 하나가 기억에 생생하다. 그들이 쓰고 있던 복면에는 눈, 코, 입을 노출시키는 부분이 없었다. 그저 복면크기만 한 물음표 하나가 새겨져 있었을 뿐이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고 나서야 그 이름이 ‘미스터 후’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얼굴을 숨기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면서도 대답인 것 같은 물음표, 동심은 그 알 수 없음의 표식으로부터 더욱더 사악한 기운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린 얼마나 많은 가면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을까? 변검(變?)의 예술은 찰나의 미학에 앞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을 대변하는 영원으로서의 인문은 아닐까? 능력 있는 남편으로서, 의리 있는 친구로서, 노련한 상사로서, 열정적인 부하로서…. 수많은 관계를 욕망하고, 강요받고, 피곤해하며 살아가면서, 때때로 그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만 또한 외로움에는 취약한 사회적 존재. 정작 그 자유의 순간에는 자신을 보아주는 세상의 시선이 없다는 사실이 불안이다.

가면은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는 성질이다. 내가 숨기고 싶은 것들과 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것 사이에 가로놓인, 불안과 위안의 양면성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따르면,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얼굴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텅 빈 공백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자아라는 것은 차라리 벗어던진 가면에 묻어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내가 지닌 속성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적 조건의 속성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연장에 있는 페르소나를 자아의 일부로 인식할 뿐이다.

라캉에 따르면 개인의 무의식마저도 이미 타자의 담론에 오염되어 있는 형국이다. 개인에게서 반복되는 속성은 순수한 ‘나’가 아니라, 타자들에게 비춰지는 ‘너’를 포함한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바라보는 것들이 나를 존재케 하는 것들이다. 프로이트를 빌리자면, 나를 바라보는 것들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렇듯 ‘너’와 ‘나’는 서로를 비추는 빛인 동시에 거울이다. 하여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투명사회’는 곧 ‘거울사회’이고, ‘가면사회’이기도 하다는….

니체 이전의 철학에서는 순수 자아에 대한 객관적 논증으로 ‘타자’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였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결국 모든 페르소나가 분열된 나의 자아이기도 하다. 갑바 있게 살고 싶었으나, 때로 비굴할 수밖에 없고, 때로 비루할 수밖에 없는 세상살이. 최소한 지켜져야 하는 자존감이, 이건 전혀 나답지 않은 삶이라고 되뇌이고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솔직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그 이전부터 나 자신으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마법이 풀린 피오나 공주의 반전과 같은 것이다. 가면을 벗어던지기를 갈망했지만, 정작 벗어낸 가면이 나의 실상이었다는….

[3] 탄생과 더불어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사회의 가치를 매개한 채로 자라난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 개념이다. 때문에 자신의 의식 속에서 순수한 자아와 페르소나를 갈무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반성의 과정을 거듭해도 결국 타인의 시선에 비춰진 ‘너’로서의 ‘나’가 자기정체성을 대신한다. 하여 나답지 않다는 판단은 상대가 하고, 나다운 게 뭔지를 상대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페르소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자아 전체를 병들게 한다는 점이다. 결국 가면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무의식은 엉뚱한 곳에서 ‘증상’으로 터져 나오고야 만다.

가령 밖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인격으로 평가받는 가장이 집에서는 폭군으로 군림하는 경우, 의식의 차원에서는 사람 좋기로 소문난 가장이 왜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는지에 대한 원인은 명쾌하게 밝혀지기 어렵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참고인으로 소환해 그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는 방법론이다. 풍선의 어느 지점을 누르면 다른 어느 부위가 팽창하기 마련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히스테리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억압을 견디지 못한 무의식은 압력의 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분출된다.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으로는 인과와 상관을 따지기가 다소 모호하다.

의식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관성과 함께 흘러가기 때문에 문제점이 잘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 이면에는 정반대되는 성향의 무의식이 존재하기도 한다. 저것은 내가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하지만, 실은 그게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타인을 더욱 가열차게 성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명품을 지니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 가능하지 않을 시, 명품족을 성토하며 ‘고작’ 아울렛 상품이나 사고 있는 자신을 ‘검소’의 미덕으로 끌어안는 경우다.

콤플렉스를 억압할수록 더더욱 ‘증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굳이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행위는, 필히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는 심리를 동반한다. 외향적인 성격을 표방하는 사람일수록, 실상 단절과 소외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그래서 그토록 대외적인 관계에 집착하며 자신의 사회성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 결핍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방법은 그냥 나의 콤플렉스를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에 대한 콤플렉스인지를 스스로 인지하기가 어렵다는 점. 대면할 용기가 없어 무의식에 숨겨둔 채 방치한 것들이 히스테리의 원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을 제거하기는 힘든 법, 그 원인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내야 도려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정신분석 상담의 원리이다. 그 도구들이 무의식의 시그널을 해석하는 프로이트의 매뉴얼들이다.

물론 정신분석이라고 해서 모든 정신의 문제를 완벽하게 진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정신을 매뉴얼화시키는 체계에 부정적인 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결핍의 속성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뇌과학이나 비슷비슷하다. 자신에게 있는 원인을 남에게서 찾지 말라는…. 나보다 잘난 남이 소유한 것들을 도덕의 명분으로 성토하기보단 그냥 부러움의 한마디를 내지르는 게 정신건강에는 이로울 것이다. 아니면 잘난 남보다 내가 더 잘나져야 하는 방법뿐이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서, 남을 폄하하는 방식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행위들 모두가 실상 좌절의 표현인 셈이다.

살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 그대로의 사랑

[1] 서로에게 지쳐 결국 이별을 택한 두 남녀는, 과학의 힘을 빌려, 서로가 사랑했던 시간들까지 아예 기억에서 지워내기로 한다. 서로를 떠나보냈지만 그와 그녀를 따라가지 않은, 상처로 들러붙어 있던 기억들을 차라리 들어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망각과 망각 사이에 여전히 놓여 있었던 인연의 끈은, 다시 한 번 서로를 서로의 앞에 데려다 놓았고, 그와 그녀는 마치 처음인 것만 같은 두 번째 사랑에 끌리게 된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기억에서 지워낸 이별까지도 재연이 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러닝타임 내내 그들을 비추는 태양은 겨울의 햇살이다. 다른 계절만큼이나 환하지만 그다지 따뜻하지는 않은…. 여전히 사랑의 속삭임을 습관적으로 내뱉지만, 더 이상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랑. 내가 여기 있고, 너 역시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조도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아닌…. 영화에 삽입된 알렉산더 포프의 시는, 사랑에 관한 감독의 생각을 대변한다.

처녀의 제비뽑기와 잊혀진 세상에 의해 잊혀져 가는 세상과
흠 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한 빛과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은 얼마나 행복한가

인연을 확신할 수 없는 거리에서 서로에게 끌리던 설렘. 거절이 두려워서, 용기가 나지 않아서,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는 불안한 마음은, 상대를 늘 내 시선 안에 잡아두기도, 인연에 대한 기대로 우연을 가장해 서로의 시선 안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껏 지켜볼 수 있는 사이가 되면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랑은 조금씩 식어가고 그 냉각의 속도만큼으로 사람은 지쳐간다.

사랑의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이유도 단순하다. 더 이상 너를 견디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훗날 뒤늦게 도래하는 깨달음은, ‘너’이길 바랐던 내 이기적인 욕망과 관대한 ‘나’인줄 알았던 합리적 착각 사이에 방치된 무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사랑과 이별은 그 무지의 결과였다. 아울러 찾아오는 각성은, 너와 향했던 사랑이란 것이 실상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과, 내 틀에 맞춰질 수 없어서 덜어내어 버린 너를 사랑하지 못한 나였다는 사실이다.

니체가 내린 사랑의 정의는 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답지 않게 순애보를 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잇대어지는 해석은 니체답게 까칠하다. 사랑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사랑할 때가 아니라 헤어진 후에 비로소 깨닫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별의 또 다른 서사를, 이미 한참을 흘러와 버린 오늘의 우연 속에 깨닫는다. 그와 그녀가 떠나간 것이 아니라, 그와 그녀를 떠나보냈다는…. 네가 없는 지금 여기에서, 네가 있던 언젠가의 여기를 다시 상기하며, 너와 내가 같은 시간을 함께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순간들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를 뒤늦게야 깨닫는, 그것이 사랑이다.

[2]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그저 ‘너’라는 이유밖에 없다. 헤어지는 이유 역시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젠 더 이상 서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좋지 않은 이유가, 처음 좋아하게 되었던 이유만큼이나 명확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무뎌진 마음으로 이별을 말하지만, 그 이별이 아파서 다시금 되돌아보는 사랑 뒤에, 여자는 어떻고 남자는 어떻다며 서로에게서 원인을 찾는 부질없는 노력들이 남아 있다. 재미있는 점은, 아직 더 좋아하는 쪽에서 굳이 이별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은 왜 ‘좋지 않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찾아져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게 때로는 그렇게 쓸데없이 합리적이다.

니체에게도 자신의 일생을 함께하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슬픈 사랑으로 끝이 나고 만다.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던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 니체뿐만이 아니라 당대 많은 지식인들의 흠모를 받았던 루 살로메. 니체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한 사연은, 니체를 좀 공부했다 싶은 사람들에겐 늘 거론되는 스캔들이며, 니체에 발을 걸고 있는 텍스트의 상당수가 이 이야기로 분량을 채운다. 니체는 사랑과 여자에 관한 어록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사랑의 어록들로 섣불리 판단해보건대, 천재라 불리는 사상가도 사랑에는 많이 서툴렀던 것 같다. 너무도 논리적이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랑에 관한 니체의 생각들이지만, 인류 역사상 사랑이 합리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저 이유가 없는 이유로 이끌려가는 맹목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성적 도덕 앞에서도, 자신이 저지른 불륜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로맨스라고 믿고 살아가는 너와 내가 아니던가.

니체의 철학을 대변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 한다면 단연 아모르 파티(Amor fati)이지 않을까?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했어도, 운명적인 사랑은 가능하지 않았던 철학자. 인류의 사랑을 받았어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철학자. 그가 바로 니체이다.

[3] 사랑에 이데올로기의 간섭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겐 상식이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그럴까? 배우자의 조건을 따지는 세대부터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간섭이다. 감정의 사례가 아닌 조건들로 감정의 명제를 검증하려고 드니 오차 범위는 커질 수밖에 없다. 희망사항이 채워지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면서 오차가 없기를 바란다면 오히려 그것이 오류이다. 사랑은 내가 지닌 가치를 투영하는 것이 아닌, 그저 상대에게 맹목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금오신화』에는 「이생규장전」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제목에 그대로 언급되어 있듯, 낭자 최 씨를 사랑하게 된 서생 이 씨는 양반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담벼락을 훔쳐보고, 훔쳐보다 못해 그 답을 넘고야 만다. 고고한 선비에게서 담을 뛰어넘는 남세스러움을 가능케 할 정도로, 사랑은 담론의 경계를 넘어서는 범주의 충동이다. 「이생규장전」이란 제목의 상징성을 들뢰즈의 철학에 빗대자면 ‘탈영토화’이다. 정말로 사랑하는 것들 앞에서는 담을 넘고 경계를 지운다. 남세스러움이라는 것도 담론의 기준일 뿐,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 용기’로 다가설 수 있는 열망이 사랑이기도 하다. 샤르트르가 정의한 사랑은 그가 말한 ‘실존’의 연장선이다. 모든 것이 열려진 가능성 속에서의 절대적 선택, 사랑은 그런 자유를 전제로 한다. 다른 누군가를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에도, 오로지 그 혹은 그녀만을 사랑하는 것. 이승환 씨의 노래를 빌리자면,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살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피로사회

[1] ‘피로사회’의 한 표집으로 살아가던 어떤 이가, 기상의 곤란함을 말끔히 씻어내게 된 어느 날에 관한 고전이 있다. 차라리 침대가 되어 버리고 싶은 아침나절의 무기력을 잊은 이유는, 기상보다 앞서 다가와 있던 황당한 사건 때문이다. 벌레가 되어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의 어느 날 아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가 아직 벌레인 상태로 끝이 난다.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일상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레고르 잠자는, 그 고된 하루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이후엔 가족들의 소외까지 감내해야 했다. 자신도 벌레가 되고 싶어서 벌레가 된 건 아닌데, 가족들은 그에게 벌레가 되어 생활비를 벌어오지 못하는 죄를 따져 묻는다. 외로이 그리고 초라히, 그러나 기꺼이 벌레로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의 죽음 곁에서 삶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함으로 돌아서는 가족의 비정함, 카프카는 그 비정함들을 비추는 따뜻하고도 평화로운 햇살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그 아름다운 크기만큼으로 파고드는 슬픔이었다는 듯….

문학 목록이면서도, 철학 쪽에서도 많이 회자되는 작품들 중 하나가 카프카의 『변신』이다. 문학에서는 ‘초현실’의 장르에 초점을 맞추는 데 비해, 철학이 주목하는 지점은 벌레가 된 욕망이다. 삶에 지쳐 있던 주인공에게 닥친 변신의 사건이 황당할망정,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명분이기도 했다. 물론 주인공이 기꺼이 선택한 것은 아닌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경우이긴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원했던 것이라는 해석. 즉 무의식의 열망으로 풀어놓은 꿈의 현전이 벌레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그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한 삶이 벌레로서의 삶보다 나을 게 뭐가 있을까? 사회와 가족에게 저당 잡힌 시간은, 실상 벌레의 모습으로 문밖을 나서지 못하는 상황과 별 다를 것도 없는 굴레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도덕적 가책이, 그 굴레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타협을 이룬 형상이 벌레이기도 하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토록 추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이 당신들에게 누가 될까 봐. 나는 밖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돈을 벌어올 수도 없다고….

들뢰즈의 ‘되기’ 개념은, 역설적으로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은 상태로의 방향성이다. being 상태에 대한 불만이 becoming의 시간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미 무엇이 ‘되어 있는’ 확정 이전의 단계, 즉 아직 무엇이 ‘될 수 있는’ 과정의 단계를 욕망하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한 현실. 지금의 이 확정적 상황을 무화(無化)시킴으로써, 아직 다른 가능성의 여지가 남아 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 개념 역시,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던 무(無)로서의 존재를 갈망하는, 태어나기 전과 같은 불확정 상태로의 회귀를 열망하는 증상이다. 따라서 무의식이 보내는 시그널의 제대로 된 해독은 죽음이 아니다. 길을 잘못 들어선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라는 메시지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가야 한다. 무의식은 그 지점에서 다시 쓰여질 변화의 스토리텔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자기 시대의 영화가 아니더라도, 누구나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장면. 〈모던 타임즈〉에서 커다란 톱니의 나사를 조이다가 톱니 사이로 말려들어 가는 찰리 채플린이 상징하는 바는, 사회에 의해 관리되는 개인의 시간이다. 개인은 부속품으로서의 톱니처럼, 구조에 의해 지정된 자리에서 사회의 시간에 맞추어 돌고 돈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회가 도래한 이후 사회의 시간은 점점 가속화가 되어 왔다. 그 가속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속화된 시간을 따라붙기 위한 개인의 근면함이 계발되어야 한다. 이것이 산업화가 인간에게 가하는 훈육이다. 사회는 점점 피로해지고, 피로회복제와 에너지드링크가 히트 상품이 되는 시절, 휴식조차도 다시 노동을 하기 위한 피로회복의 시간이다.

한병철 교수가 지적하는 피로사회의 부조리는, 이상적 자아와 현실 자아의 괴리감이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자신의 이상에 부합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계발과 성장의 담론에 몰두한다. 한병철 교수는 자본주의가 권고하는 성실과 성공의 가치를 정신분석의 방법론으로 논박하는 경우이다. 우리의 무의식조차 주체적이지 않으며, 그 사회의 지배담론 아래에 놓여 있다는 전제.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이 전제에 대한 사회학적 해설이라고 보면 된다.

오로지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떤 지위를 점하고 있는지가 관심사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에 못 미치는 현실이 불안이다. 더군다나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먹고사는 문제 자체의 해결이 쉽지만은 않은, 불확실성 자체가 커진 시대. 그 불안은 고스란히 결혼과 출산과 같은 사회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주제는 알랭드 보통과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키워드로 선점하기 이전에, 들뢰즈가 먼저 ‘소진된 인간’이란 키워드로 특유의 사유를 개진한 바 있다.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실상 들뢰즈의 철학을 ‘피로’라는 단어에 집약한 경우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소진’은 아마 ‘피로’를 넘어서는 상태이다.

들뢰즈는 사무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군상들을 예로 든다. 저 자신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행위 자체로 위안을 삼는 삶.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성직자의 신앙과 같은 속성이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무언가를 믿고 있는 자신의 신앙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을 위하여’라는 미래지향적 명분으로 ‘지금 여기’를 소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명분의 완성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없다. 그 미래는 언제나 막연한 ‘저기’에 머무는 상태로, ‘여기’에서의 ‘~을 위하여’라는 확연한 명분을 지탱할 뿐이다.

[3] 양계장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장정일 작가의 단상.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형광등 아래에서 밤인지 낮인지도 모른 채, 닭들은 오늘도 열심히 알만 낳는다. 왜 이러고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서로의 곁에서 알만 낳고 있는 서로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듯, 서로를 설득하며 해명하며 알만 낳는다. 이는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구조의 모순에 빗댈 수 있다. 구조의 이념에 그저 한 부품으로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자각 따위는 필요없다. 그 시간에 알을 낳아야 튀김닭이 되지 않을 판이다. 글로 머문 글러먹은 철학, 행동하지 않는 철학, 마르크스의 입장에선 그 모두가 민중의 삶에 대한 외면이며 현실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닭들에겐 왜 자신이 한 곳에 갇혀 알만 낳고 있어야 하는지가 궁금할 뿐, 알에 관한 순수이성비판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아니다. 자본의 구조 속에서 자라난 이들에게, 자본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지란 말처럼 말 같지 않게 느껴지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구조가 원하는 상품이 되길 욕망한다. 구조의 패러다임 안에서 해결책을 강구하는 이들에게 ‘스펙보다는 열정’을 늘어놓는 이들의 스펙은 왜 그리도 좋단 말인가. 이연복 셰프의 깐풍기가 되지 못할 바엔, KFC 치킨 버거의 패티로 갈아질지언정 구내식당의 반계탕으로 갈라지고 싶지 않은 욕망, 우리에겐 차라리 그것이 열정이다. 적어도 냉동 상태로 오래도록 방치되어 폐기의 수순을 기다리는 운명은 아니었으면 하는 갈망이 앞설 뿐이다. 그러나 늘상 ‘치맥’을 달고 사는 나라에서 하루에도 수십 개의 치킨집이 문을 닫는 아이러니 속에, 남은 선택지는 육수용으로라도 끓어 넘쳐 보는 것이다. 고작 육수가 되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거다.

자본사회의 폐해를 지적한 마르크스의 브랜드가 도리어 이윤을 창출하는 역설, 돈에 연연하지 말라는 느림과 여유의 철학도 베스트셀러로 진열되어야 겨우 겨우 읽힐 판이다. 지적만 해댔지 마땅한 대안이란 걸 내놓은 적이 없는 철학의 한계이기도 하며, 또한 그만큼이나 자본의 구조는 견고하다. 그러나 적어도 반성하며 비판하며 공생을 위한 대책 정도는 고민하는 나라가 있는 반면, 여전히 구조 안에서의 경쟁만을 부추기며 ‘낙수효과’만 늘어놓는 나라가 있다. 그 낙수의 범주가 감당할 수 없는, 보다 넓은 사각(死角)에서 오늘도 닭들은 알을 낳고 치킨집은 문을 닫는다.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메멘토 모리

[1]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미취학 아동 시절의 기억 중 하나는, MBC에서 방영되던 〈은하철도 999〉를 보기 위해, 여느 날보다도 일찍 잠에서 깨어났던 일요일 아침이다. 전통 장로교 집안에서 나고 자란 엄마의 회유로 ‘다닐 수밖에 없었던’ 교회, 그 믿음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왜 창조주께서는 하필 일요일에 쉬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십자가 위에 남긴 채, 나는 주님의 품을 떠나 철이와 함께 안드로메다행 은하철도에 올랐다.

동심의 여정이 끝날 즈음부터, 더 이상 메텔의 여성상을 동경하지 않았다. 왜 은하철도는 우주에서도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것일까? 어차피 허구인 스토리 속에 굳이 물리적 지식을 들먹이는 치기어린 똑똑한 척이 시작됐다. 성인이 되어서는 마쓰모토 레이지가 전하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에 더 관심을 갖는 오타쿠적 탐구심으로 일관했다. 더 나이가 든 지금에는 그저 내 어린 시절에 관한 그리움으로 돌아본다. 가끔씩 인터넷에서 찾아 들어보는 주제가는 전주부분서부터 뭉클하다. 어린 시절엔 미처 몰랐다. 이 노래가 이토록 슬픈 선율이었는지를….

어린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철이가 은하철도에 몸을 실은 이유는, 안드로메다의 프로메슘 행성으로 가서 불사의 기계인간이 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목격한 광경은, 삶이 지겨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기계인간들이었다. 영생의 삶이 지겨워 스스로 기계의 몸을 파괴하던 그들은,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시간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인생이라면, 스쳐 지나가는 순간순간에 의미를 부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한한 시간 앞에서 굳이 달과 날로 쪼개어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무한한 선택의 기회 앞에서 선택되지 못한 것들은 기회비용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끝의 사태를 긍정한다. 개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유한함 속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 불완의 존재로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끝이, 도리어 능동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무한의 동력인 것이다. 그것이 삶의 대척에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죽음의 기능이다. 단 한 번이기에 누구에게나 소중할 수밖에 없는 삶의 시간, 그것은 불완의 불안으로 완성된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생의 시간, 언제고 내가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떠나게 되는 날, 왠지 어린 시절의 나와 함께했던 철이를 다시 만날 것 같다. 삶 저편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있는 플랫폼으로 은하철도의 기적 소리도 다시 들려오리라. 다시 만난 철이에게 말하고 싶다. 아쉬움이 아닌 후회 없음으로 내 삶을 돌아보고 있노라고…. 그 한순간을 위해, 죽음을 향한 본능으로 사력을 다해,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2] “신은 죽었다.” 이 말은 분명 니체가 한 말이다. 그러나 흔히 아는 상식처럼 그를 무신론자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 그가 부정한 신은, 인간의 지평 안에서 인간의 편의대로 존재하는, 인류가 ‘신’이라 이름 붙인 ‘개념’이었을 뿐, 결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이해되어질 수 없는 절대적 존재를 부정하진 않았다.

니체에 의하면, 인류는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신’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불안의 열쇠를 신에게 맡긴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평 안에 창조해낸 죽음 이후의 시간으로, 이 삶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기득권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부조리, 그것을 그저 소명으로 떠안고 살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은, 그 허무와 울분을 죽음 이후의 시간으로 보상받고자 했던 것이다.

니체의 지적은, 그런 필연을 향한 믿음이 어떤 부조리에도 맞서 싸우지 못하고, 그 부조리를 지탱하는 ‘노예의 도덕’을 양산해낸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며, ‘저 너머’에는 분명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신의 견해는 단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체념의 삶. ‘저 너머’에 설정된 이데아를 빌미로, 이 삶을 그저 ‘준비’의 단계로만 간주하며, 삶의 시간을 모조리 죽음을 위해 소비하게끔 하는 허무주의. 이것이 니체가 신에게 사형을 언도한 주된 이유이다. 그로써 신에게 맡겼던 불안의 열쇠를 인류에게 되찾아 준 것이다. 인간의 지평으로는 가능하지도 않을, 신의 존재에 대한 해명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기 존재를 해명하는 삶의 의지이다.

허무주의를 돌파하기 위해 니체가 제안하는 방법론은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끝이 있기에 이 삶이 더욱더 소중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저 너머’에 정말로 영원한 삶이 있는지 어떤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죽음에는 절대로 경험이 성립될 수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는 간증도 그것이 정말 죽음에 관한 경험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사건이다. 하여 죽어본 ‘적’이 없는 누군가들에 의해 말하여지는 그 모두가 한낱 가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확연한 끝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보다 역동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시구절처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 내일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잘 살다 가는 인생을 바란다. 그 ‘잘’은 결국 죽음이라는 끝을 통해서 완성된다. 그렇듯 죽음은 곧 삶이기도 하다. 단 한 번뿐이기에 더욱 소중한 삶, 그 끝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어떻게 소비가 되고 있을까? 인생의 끝자락에, 후회로만 가득한 삶을 남겨두고 떠나려 하는가?

[3] 중국의 길거리 음식 중에 탕후루라는 것이 있다. 나는 이 음식을 볼 때마다,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의 장국영을 간직한 영화 〈패왕별희〉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자신들에게 던져진 운명으로 체념하며, 고된 훈련과 모진 매질에 매일같이 시달리는 경극학교의 고아들. 주인공은 사형(師兄)과 함께 바깥세상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두 아이는 죽기 전에 가장 먹어보고 싶었다던 탕후루를 손에 들고서, 축제 분위기로 한창 무르익은 저잣거리에서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다 우연히 관람한 경극 공연에 감명을 받은 후, 결국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경극학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눈앞엔, 도망간 자신들 때문에 노한 스승에게 매 맞고 있는 다른 사형과 사제들의 벌거벗겨진 엉덩이가 있었다. 주인공은 다른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매를 자청한다. 함께 도망을 쳤던 사형은 살이 터져나가도록 매를 맞는 주인공의 모습을 지켜보다, 몰래 학대의 현장에서 빠져나온다. 잠깐의 일탈 속에서 이상에 깃든 희망을 깨달았지만, 돌아온 일상 앞에 여전히 버티고 있던 모진 현실, 세상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었던 어린 꿈은 훈련장에서 자살을 한다.

다른 집 아이들에겐 별것 아닐 수도 있는 탕후루 하나가 가장 큰 소원이었던 어린아이, 그 어린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스승의 훈련방식. 어느 것 하나 상식적이지 않은,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도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상식적이지 못한 선택은, 꿈을 안고 돌아왔어도 그 대가가 무서워 선택한 죽음이다. 잔인하고 혹독한 매를 견뎌낸 주인공은 결국 최고의 경극배우가 되었건만, 고작 탕후루 하나와 삶을 맞바꾼 것이다.

니체의 철학에 따르면, 죽음의 사용법이 잘못된 경우이다. 그것은 다가오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지, 굳이 먼저 다가설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임무는 죽음이 곁에 다가와 있는지도 모르게, 그저 열심히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러다 마주하게 될 갑작스러움에 화들짝 놀라주는 것, 갖은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려보다가 통하지 않는다 싶을 때 못 이기는 척 따라가 주는 것이다. 너무도 이른 체념과 포기는,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불려온 죽음을 놀라게 하는 짓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따금씩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한다. 자살의 행위는 삶에게는 예의가 아니며, 죽음에게도 배려가 아니다.

어느 해 가을, 가르치던 학생이 아파트에서 투신을 했다. 어린 맘에 다 담을 수 없었던, 너무도 큰 두려움이었나 보다. 기로에 섰던 그 마지막 순간은 또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을지…. 그래도 아등바등하며 어떻게든 한 세상을 살아가는 입장에선 상상도 못 할 크기였을 것이다. 청춘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직 펴보지도 못한 봉오리채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스러져간 슬픔과 서러움은, 하얀 바람이 되어 사라져갔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보았던 〈패왕별희〉의 탕후루 소년을 떠올렸다.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없는 녀석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선 언제나 18살의 고등학생이다. 거기선 잘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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