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역사

파람북 / 2020년 7월 / 240쪽 / 15,000원

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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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역사

자크 엘리제 르클뤼 지음

책소개

이 책은 산의 기원과 물리적 성격은 물론 돌의 결정과 화석, 숲의 생성, 기후 변화, 산짐승의 움직임을 살피고, 산을 둘러싼 신화와 숭배, 인류와 마주한 현재의 모습까지 깊이 파헤치고 있다. 저자가 바라본 산은 아름다운 그림 속 풍경이나 개발을 위한 자원 또는 국경 같은 경계로서만이 아니라, 인류의 삶에서 산이 어떤 자리와 어떤 ‘의미’를 차지해왔는지 질문한다.

요약본 본문

나의 은신처

슬펐다, 살아가는 일에 지쳐 버렸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계획이 무산되고,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친구라던 이들은 초라한 내 모습을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들떠 싸우는 인간들이 추해 보였다. 가혹한 운명이다. 그래도 어차피 죽을 것이 아니라면, 정신 차리고 다시 기운을 내든 해야지, 마냥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선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지평선 너머 울퉁불퉁한 봉우리들이 치솟은 높은 산으로 향했다.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해가 지면 뚝 떨어진 시골 여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에 질려 버린 상태였지만, 혼자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새들의 울음이 구슬프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시냇물 소리와 깊은 숲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웅성거림도 더 이상 침울하게 들리지 않았다.

큰길과 오솔길을 이리저리 걷다 보니 산의 초입에 들어섰다. 밭고랑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넓은 평야는 바위와 울창한 밤나무가 빼곡한 벼랑 앞에서 끊겼다. 가까운 봉우리들 건너편에는 까마득히 높은 새파란 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 있었다. 드넓은 평야를 층층이 타고 흘러내리는 강은 자갈밭 사이로 굽이치며 거무죽죽한 이끼로 뒤덮인 반지르르한 바위틈으로 콸콸 흘러내렸다. 나는 그 강을 끼고 하염없이 걸었다. 강의 양쪽 기슭 낮은 언덕바지는 산을 제일 밑에서 떠받치는 꽤 가파른 기반이었다. 마치 버팀벽 같았다. 아득한 시절부터 언덕바지 위에서 골짜기를 지키던 육중한 구조물들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문득 골짜기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먼지와 연기와 소음에 파묻힌 대도시로부터 나는 벗어났다. 적과 거짓된 친구들을 남겨둔 채….

기쁜 마음에 온전히 휩싸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발걸음은 가볍고 침침하던 눈도 밝아졌다. 산에서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 공간에 먼지 날리는 대로 따위는 없었다. 이제 나는 평지를 완전히 떠나 미개척지인 산으로 들어왔다! 깊은 골짜기를 따라 목동과 염소 떼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오솔길이 뚫려 있었다. 산허리를 비스듬히 기어오르는 철로와는 아주 먼 거리였다.

나는 혼자 지낼 곳을 찾아 산길을 따라 걸었다. 길이 높아질 때마다 아래쪽 오솔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작게 보였다. 오두막집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푸르스름하고 뿌연 안개에 덮여 발아래 마을은 반쯤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천천히 위로 퍼지면서 숲 주변에서 흩어졌다.

바위들을 끼고 돌며 수많은 골짜기를 넘었다. 돌부리에 발길을 채이면서 요란하게 흐르는 개울을 건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바위와 숲과 풀밭을 품은 산자락에 도착했다. 봉우리에는 안개에 가려진 오두막 한 채가 놓여 있었다. 기슭 아래쪽에서는 양들이 풀을 뜯었다. 오두막은 고운 잔디 위로 리본처럼 펼쳐진 황톳빛 오르막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막다른 길 같았다. 그 너머 더 멀리는 깊은 골짜기인데, 흙과 돌무더기, 폭포와 눈과 얼음이 보일 뿐이었다. 결국 이곳이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대였다. 나는 몇 달 동안 이곳 오두막에서 지냈다. 개 한 마리와 함께 살던 목동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렇게 다시 찾은 자유를 만끽하면서 나는 천천히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일상을 맞이했다. 돌들이 굴러 떨어지는 높은 능선을 따라 돌아다녔고, 전나무 숲을 헤매기도 했다. 어떤 때는 산등성이 높은 곳까지 우뚝 솟은 첨봉에 올라가 멍하니 죽치기도 했다. 깊고 어둑어둑한 계곡에서는 마치 지하의 심연에 처박힌 듯했다. 자연 덕분에 좀처럼 식지 않던 쓰라린 기억도 차츰 누그러졌다. 나쁜 기억을 잊어보려고 길을 방황하는 일도 사라졌고, 나도 모르게 주변에 눈길을 돌려 자세히 들여다보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산에 들어오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바위와 숲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 덕에 나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과거를 잊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새로운 감정이 싹텄다. 산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늘 속에서도 햇빛을 받아들이는 차분하고 늠름한 모습이 좋았다. 푸른빛을 띤 채 빙하를 두르고 있는 그 튼튼한 어깨가 좋았다. 풀밭과 숲과 맨땅이 줄줄이 이어지는 기슭도 좋았다. 멀리 내뻗은 거목의 뿌리처럼, 작은 골짜기마다 개울과 풀밭, 호수와 들판이 힘차게  펼쳐지니 좋았다. 나는 산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바위에 붙은 누렇거나 푸른 이끼와 잔디 한복판에서 반짝이는 작은 돌멩이까지도 사랑스러웠다.

처음에는 내가 도시에서 멀리했던 사람들과 비슷해 보여 그다지 유쾌하지 않게 느껴졌던 목동조차 같이 지내는 동안 차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목동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점차 우정도 싹텄다. 그가 마련한 음식과 보살핌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배우려 했다. 힘든 공부는 아니었다. 내가 자연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안 목동은 자신의 고향 산에서 가축이 풀을 뜯을 수 있는 산기슭을 알려 주었다. 작은 식물의 이름을 가르쳐주고, 보석으로 손질될 암석을 캐내어 보여주었다. 험한 골짜기에서 길을 찾아 낭떠러지와 맞닿아 솟아오른 바위 꼭대기로 데려가 주기도 했다. 목동은 높은 산마루에 올라 골짜기들을 짚어가며 급류가 쏟아지는 물길을 가르쳐 주었다. 오두막으로 돌아와서는 지역의 전설과 역사까지 들려주었다.

나는 선뜻 이해하지 못한 것들, 혹은 목동이 나더러 알 필요도 없다고 했던 것들에 대해 더 묻곤 했다. 목동은 차츰 편안하게 털어놓았다. 목동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별것 아닌 것들을 알게 되면서 웃었다. 눈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두껍고 거칠기만 했던 그의 안색도 밝아졌다. 목동은 이전과 다르게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의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목동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 자신도 달라졌다. 목동에게 자연의 지리적 과학적 이모저모를 설명하려 애쓰다 보니 나 역시 자연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 애쓰는 독학생이 되었다. 결국 자연을 사랑하고, 서로 비슷해진 목동과 공감하면서, 나는 산의 현재의 삶과 과거의 역사를 알아보고 싶었다. 우리는 마치 코끼리에 붙어사는 작은 벌레처럼 산에 붙어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땅에서 솟은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을 공부했다. 계절과 시간과 관점에 따라 무시무시하거나 멋진, 엄청나게 다양한 모습을 빚어내는 대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눈과 빙하와 그것을 둘러싼 날씨의 변화와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동식물을 학습했다. 여러 인류의 역사와 문학에서 산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알고 싶었다. 인류의 진보에 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했다.

이렇게 공부하는 동안, 나는 목동에게 큰 빚을 졌다. 기어 다니는 곤충들과 날갯짓하는 나비와 노래하는 새도 나를 도왔다. 형제처럼 친해진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듣고, 풀밭에서 빈둥대지 않았다면 나는 대지가 얼마나 위대하고 또한 숨 쉬고 있는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 넓은 품에 작은 미물들을 모두 끌어안고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도록 끌어들이는 대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의 기원

어떤 민족의 신화에나 산의 탄생 설화가 남아 있다. 강과 땅, 대양과 동식물 또 인간의 창세 설화들이다. 소박하게도 신과 영웅이 하늘에서 여러 산을 집어던져 우연히 지상에 떨어졌다는 신화가 있다. 아니면 신께서 지상에 산을 세우고 조심스레 다듬어 하늘이라는 둥근 지붕을 떠받드는 기둥으로 삼았다던가……. 이렇게 레바논 산, 헤르몬 산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구 변방에서 신이 건장한 어깨로 아틀라스 산을 들어 올렸다고 한다. 고대 사람들은 산들이 이렇듯 신들에 의해 마음대로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대 전설을 믿던 사람들은 사라졌다. 낭만으로 넘치는 전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전설은 몽상과 한패가 되어 흔적을 지우며 사라져 갔고, 탐구자들은 환상에서 깨어나 더욱 악착스럽게 진리를 추구한다. 다행히 우리 지구는 항상 새롭게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 눈앞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칠거칠한 땅거죽도 차츰 변한다. 지구는 스스로를 매일 파괴하고 재건한다. 줄기차게 산을 깎아내리지만, 다른 산을 쌓아 올린다. 골짜기를 파지만 다시 채우려 한다.

지상을 돌아다니면서 자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언덕과 산은 정말 천천히 이루어진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처럼 갑자기 치솟는 법은 없다. 땅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오르든 고원의 침식으로 천천히 태어나든, 대리석 덩어리가 석상이 되어가는 과정처럼 아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육지와 섬에서 수천 미터 높이의 땅덩어리가 많은 비를 맞으면 비탈은 점점 크고 작은 계곡과 협곡으로 깎인다. 단조롭던 고원 표면은 봉우리, 능선, 피라미드로 나누어진다. 둥글게 파이고, 넓적하고 가파르게 잘리기도 한다. 그렇게 산맥은 차츰 틀을 갖추고 여기저기 드넓은 땅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진다. 평지도 마찬가지다. 한구석에 계속 비를 맞으면 경사면으로 산은 초승달처럼 움푹해진다. 

고원을 산으로 바꿔놓는 것은 지표면의 원인뿐이 아니다. 땅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느린 변화 끝에 거대한 붕괴가 일어난다. 망치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 구조와 형태를 연구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산을 돌아다녔는데, 결국 산맥의 뼈대 대신 거대한 단층 또는 갈라진 틈으로 수백 킬로미터씩 뻗은 해저 기반을 찾아냈다. 단애 속에 수천 미터 두께의 덩어리들이 있었고, 완전히 뒤집힌 형태도 관측됐다. 과거의 땅 표면이 지금은 안쪽 면이 된 경우였다. 그 토대가 계속 가라앉는 바람에 망토처럼 지표면을 에워싼 바위들의 형태가 드러나고 말았다. 제막식 때 장막을 거둬 숨겨진 기념비를 갑자기 드러내듯 토대는 산의 핵심을 화끈하게 폭로한다.

하지만 거친 지표면을 이루는 산과 지구의 역사에서 붕괴 자체는 지층에 주름지는 습곡 현상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오랜 세월 흙과 바위, 사암층, 금속 광맥 등 모든 것이 눌리면서 옷감처럼 주름 잡혀 산과 계곡을 빚어낸다. 대양의 표면처럼 육지의 표면도 물결처럼 출렁인다. 대단히 힘찬 물결이다. 지표면 보다 훨씬 높이 솟은 안데스, 히말라야산맥이 그 결과물들이다. 땅 위에 있는 바위들이 옆으로 밀어붙이는 힘에 따라 그 주변 바탕도 계속 요동친다. 마치 과일 껍질에 주름이 잡히는 것처럼.

땅바닥에서 솟은 봉우리들, 그러니까 해수면 높이보다 차츰 높아져서 대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높이까지 치솟은 봉우리들은 용암과 화산재가 굳은 산들이다. 지구의 수많은 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눈높이에서 이런 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산들과 다르게 화산은 중심에 굴뚝이 뚫려 있다. 굴뚝에서 증기와 불타는 용암재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불이 꺼지면 굴뚝은 막히고, 원추형 화산의 경사면도 비와 식물 때문에 원래의 고른 모습을 잃고 다른 산과 비슷해진다. 물론 지구의 가슴속에서 치솟은 바윗덩어리들은 용암이든 반죽이든 모두가 그저 땅의 긴 크레바스를 뚫고 나왔다. 로마 남쪽의 베수비오스 화산이나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의 재처럼 분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산마루에 쌓인 용암과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간 용암은 지표상에 솟은 해묵고 뿌옇게 빛이 바랜 산들과 초창기에만 달랐을 뿐이다. 옛날에 불타오르던 용암은 차츰 식고 풍화되어 식물성 흙으로 덮인다. 그 속으로 빗물이 스며든다. 빗물은 개울과 강으로도 흘러내린다. 바탕은 또 다른 새로운 지질 운동으로 넘치며,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자갈과 모래와 흙의 지층에 둘러싸인다. 이렇게 용암은 녹아내리는 금속 덩어리처럼 지구라는 거대한 용광로 한복판에서 솟아 나온다.

산맥 대부분이 용암과 같은 식으로 솟아났다고 할 때, 땅속에서 그 모든 복합 성분이 솟아오른 이유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보통은 지표면이 식으면서 벌어진 수축 작용 때문이라고들 이야기한다. 태초에 지구는 뜨겁고 거대한 액체 금속 방울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차가운 우주 공간을 굴러다니면서 차츰 굳었다. 그런데 지표면만 굳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지구 중심도 굳었을까? 아직 알 수 없다. 화산의 용암이 지구 속을 채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저장소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용암은 땅속의 갈라진 틈으로 솟아난다. 마찬가지로 화강암과 반암 또 기타 비슷한 암석들도 갈라진 지표면을 뚫고 나왔을 것이다. 지구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진물처럼 녹은 암석은 지표의 압력으로 차츰 식어 단단히 굳었을 것이다.

숲과 풀밭

녹아내린 빙설은 여름 내내 계곡과 개울에 물을 불린다. 그러면 산과 아래쪽 드넓은 곳까지 푸른 식물로 뒤덮인다. 산의 품 안에는 숲과 풀밭과 이끼 같은 야생식물이 자랄 만큼 수분이 넉넉하다. 게다가 더 많은 평지 식물을 먹여 살릴 만큼이나 풍부하다. 산은 밑에서 올려다보면 그저 푸르지만, 그 속에 엄청나게 다양한 것을 품고 다채로운 대조를 보인다. 높낮이와 바닥의 굴곡과 비탈의 경사, 풍부한 물과 여기저기 쌓인 눈……. 이런 환경에서 식물이 탄생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흰 눈 위로 다시 돋아나는 풀과 잎사귀를 보면 정말 기쁘다. 잔디 줄기는 다시 숨 쉬고 빛을 본다. 처음에는 노르스름하다가 새파란 빛이 보인다. 초원에는 꽃들이 넘쳐난다. 미나리와 풀, 아네모네, 앵초가 다발로 피어난다. 더 멀리 푸른 덤불은 뿌리부터 꽃부리까지 전체가 꽃인 우아한 백수선화 또는 자홍빛 사프란에 덮인다. 개울가에서는 물매화가 세련된 꽃을 피운다. 여기저기 희거나 빨강, 노랑, 파랑의 작은 꽃들이 거대하게 무리 지어 한꺼번에 피어난다. 일찌감치 활짝 펼쳐진 푸른 풀밭에 밀려 백설은 높은 산마루로 쫓겨난다.

나무들도 금세 축제를 벌인다. 산의 맨 아래쪽 기슭에서 겨울눈이 걷히면 몇 주 뒤부터 열매가 또 다른 눈송이처럼 흰 꽃송이에 덮인다. 조금 높은 쪽에서 밤나무, 너도밤나무와 여러 가지 관목이 푸른 잎에 덮인다. 하루가 다르게 산은 벨벳으로 엮어 짠 듯 감탄할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렇게 야금야금 숲과 덤불의 옅은 초록이 산 위로 퍼진다. 마치 골짜기마다 깊은 얼음구덩이를 정복하려고 사다리를 걸치며 진군하는 듯하다. 가장 높은 곳은 뜻밖의 기쁨에 취해 흰 눈 때문에 시커멓게 보이던 바위들이 작고 푸른 풀포기로 울퉁불퉁 치장한다. 즐거운 봄 잔치에는 물도 빠짐없이 동참한다.

비록 꽃과 푸르름은 산 아래쪽보다 못하지만, 높은 쪽의 풀밭은 더 정겹다. 더욱 부드럽고 친근하다. 풀잎은 성가시게 발길에 걸리지 않는다. 무수한 덤불 사이로 피어난 꽃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붉은 별 모양의 끈끈이대나물, 포도송이처럼 탐스럽고 파란 물망초, 금빛 암술이 박힌 성상화 꽃들이 쫙 깔린 알프스 산록의 거대한 풀밭 모두 눈부시다. 거친 암벽 틈새의 메마른 비탈에는 바닐라 향을 풍기는 흑란과 꽃이 절대 시들지 않아 변함없는 영원의 상징인 사자발이 자란다.

숲은 산비탈을 따라 풀밭과 교대로 반복된다. 우연한 반복은 아니다. 비탈에는 큰 나무들이 자란다. 그만큼 땅속 깊숙이 두터운 식물층이 있고 물이 넉넉하다. 숲과 풀밭의 교대 덕에 우리는 멀리에서도 산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최소한 사람이 나무들을 거칠게 벌목해 산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는지 감시할 수 있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모든 나무를 잘라내는 지역에는 나무 밑동조차 남지 않는다. 그래서 겨울에 거침없는 눈사태가 일어난다. 아직 산기슭에 남은 아름다운 숲을 보면 울창하던 숲을 앗아간 난폭한 투기꾼들을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평야 옆 낮은 산기슭에 자리한 밤나무들은 농부가 짐승들에게 먹이려고 거둬놓은 잎과 겨울 저녁에 먹는 열매 덕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아주 다양한 나무 집단이 뒤섞인 열대지방의 숲도 밤나무만큼 다채로운 모습은 아니다. 밤나무 주변 풀밭에서는 잡초덤불이 자라지 못한다. 덕분에 늘어진 밤나무 가지 사이로 늘 시원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다. 푸른 나뭇가지가 둥근 지붕처럼 이어지고, 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흔들리는 잎사귀를 따라 짙은 그림자와 노르스름하고 옅은 광채가 움직인다. 풀밭을 덮은 이끼와 지의류도 덧없는 빛과 그림자에 부드러움을 더한다. 물론 외따로 서 있든, 서너 그루씩 뭉쳐 서 있든 밤나무의 모양 자체는 제각각이다. 거의 모든 나무가 껍질과 가지가 좌우로 비틀린 모양이다. 줄기와 가지가 고르게 뻗은 것이 있는가 하면, 이상하게 혹이 붙고, 꼬이고, 잎이 뭉치고 기이한 사마귀 같은 것이 돋은 것도 있다. 몸통이 거대한 고목은 폭풍우에 큰 가지들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창처럼 뾰족하고 작은 잔가지들이 붙어 있다. 멀쩡한 나뭇가지가 서로 붙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고목은 속살이 썩어간다. 오랜 세월 나무 몸통에 깊은 굴과 홈이 파였다. 몸통은 사라지고 거대한 가지만 위로 뻗어 그 무게를 견디면서 판자처럼 덜렁 붙어 있는 것도 있다.

전나무도 너도밤나무처럼 산기슭에서 높이 자란다. 높은 산으로 떼 지어 오르는 전나무는 점점 더 차가운 환경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싸운다. 껍질은 우툴두툴해지고, 몸통은 비틀리고, 가지의 마디가 늘어나고, 잎은 줄어들지만 질기다. 폭풍한설을 서로에게 의지해 버틴다. 전나무는 혼자 떨어져 있으면 죽는다. 숲으로 뭉쳐야 산다. 그러나 산꼭대기에서 함께 방패막이처럼 서 있던 전나무들이 후퇴하면 곁에 있던 나무들은 폭풍에 흔들리다 쓰러진다. 숲은 군대 같다. 나무들은 병사처럼 줄지어 최전선에 나선다. 한두 그루 전방에 서 있는 튼튼한 전나무만 최후의 승자로 보인다. 이런 전나무는 바위에 뿌리박거나 뭉텅이로 진을 치고, 두꺼운 껍질과 마디를 방패로 두른다. 전나무는 폭풍에도 꼿꼿이 버틴다. 여기저기에서 깃털 장식 같은 나뭇잎을 당당히 나부낀다.

폭풍우를 최전방에서 맞은 전나무 숲보다 더 위쪽에서 또 다른 나무들이 자란다. 하지만 높이 자라지 못하는 수종이다. 바닥을 기고 아슬아슬하게 굴곡을 타고 넘으면서 바람과 추위를 피한다. 높이 못 자라지는 대신 옆으로 퍼진다. 뿌리와 마찬가지로 구불구불한 가지들이 제 가지 위로 타고 올라 희미한 온기를 받는다. 겨울밤에 몸을 덥히려고 서로 몸을 비비는 양 떼 같다. 작은 키로 폭풍을 피하고 웅크린 몸짓으로 추위를 피하는 노간주나무들은 살아남는다. 노간주나무들은 가장 험한 암벽에서 전나무들보다 몇백 미터 더 높은 눈 덮인 봉우리로 기어오른다.

산짐승

숲, 덤불, 잔디, 이끼가 풍부한 산에 동물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풀밭에 소와 염소 떼가 없다면 텅 빈 곳으로 보일 만하다. 산비탈을 오르면서 마주치는 가장 어린놈들은 풀잎 사이로 미끄러지며 훌쩍 오솔길을 가로지르는 곤충들이다. 눈부시고 검은 ‘에레보스(암흑의 신)’ 나비를 비롯해 꽃들 위로 날아다니는 살아 있는 꽃 ‘아폴로 나비’ 등. 곳곳의 돌 틈에서는 뱀과 도마뱀이 허물을 벗는다. 숲은 적막하다. 새들이나 간간이 지저귄다. 산은 평원에 솟은 자연의 요새다. 그 요새 속으로 손님을 불러들인다. 뻔뻔한 도둑질로 먹이를 잡아먹는데 익숙한 짐승들이 높은 망루에서 지평선을 내려다보면서 달려들 먹잇감을 기다린다. 줄곧 은신처를 찾는 도망자를 기다린다.

인간은 특이하게 비열하다. 산짐승 가운데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짐승들에 감탄하며 찬양한다. 그런 짐승들을 왕으로 떠받들면서 수많은 자연사 책을 그 전설과 신화로 채웠다. 우선 지상의 모든 군주가 상징으로 삼았던 독수리 같은 맹금류만 봐도 그렇다. 군주들은 독수리 몸통에 두 개의 머리를 붙여 상징으로 삼았다. 군주들 자신이 주둥이 두 개로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것과 다름없다. 왕은 독수리를 예찬한다. 하지만 목동은 독수리를 미워한다. 독수리는 가축의 적이므로 목동은 독수리와 죽도록 싸운다. 조만간 모든 독수리와 수염수리, 수리 종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많은 산에서 독수리 둥지 하나나 찾아볼까 싶을 정도다. 있다고 해도 털이 다 빠진 늙고 외로운 놈뿐이다. 거동도 못하고 기생충에 감염된 꼴사나운 놈뿐이다.

곰도 양을 잡아먹는다. 조만간 목동은 야생 곰까지 전멸시키고 말 것이다. 곰은 뼈를 씹을 만큼 힘이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왕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왕의 가문에 곰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민중은 곰의 성격을 소중히 여긴다. 곰은 우리에게 신처럼 굴지 않고, 용감하고 솔직하며 착하다! 곰은 가족의 미덕을 보여준다. 곰은 새끼에게 다정하다. 새끼 곰은 명랑하고 촐랑대는 장난꾸러기다. 곰은 가부장 풍습을 보인다. 곰은 굴속이나 좁은 이끼에 덮인 큰 우리 속에 모여 산다. 사실 큰 곰이 목동의 양들을 후려치기는 한다. 하지만 평소에는 점잖다. 곰은 나뭇잎과 야생 열매를 뜯어먹고 벌집의 맛을 무척 좋아한다. 심지어 태평하게 골짜기까지 내려가 포도와 배도 따먹는다.

그런데 늑대는 어떻게 될까? 늑대가 산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누가 아쉬워할까? 비열하고 못된, 피비린내 나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데! 늑대는 희생된 동물의 살을 뜯어 상처에서 나오는 뜨거운 피를 삼킨다. 모든 동물이 늑대를 미워하고, 늑대도 다른 동물들을 미워한다. 늑대는 약하고 상처 입은 짐승만 공격한다. 굶어 죽게 생겨 광분할 때나 자기보다 강한 짐승에 달려든다. 그렇지만 이미 방어할 수 없는 적이 쓰러지기만 하면 사납게 달려든다! 심지어 늑대가 사냥꾼 총에 쓰러져 숨을 헐떡일 때, 다른 늑대들은 그놈을 덮쳐 고기를 뜯는다. 피에 젖은 로마는 상상할 만한 모든 중죄의 기억을 늑대에게 떠넘겼다. 로마는 수많은 도시와 사람을 쓸어버렸다. 풍요로운 대지를 삭막하게 만들었다. 로마는 비열한 폭력과 무수한 파렴치 만행으로 고대의 왕이 되었다. 모든 죄악을 날조하면서 암늑대를 어머니 수호신으로 삼아 군림했다.

민중은 또 다른 법, 여전히 냉엄한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로마가 선택한 상징처럼 그렇게 못된 법은 아니다. 산을 아끼는 사람에게는 역겨운 늑대가 대평원의 짐승이라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고향의 숲이 사라지고 사냥꾼이 늘어나자 늑대는 높은 산의 협곡으로 피해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늑대는 침입자 노릇을 했다. 늑대는 원래 바위산 비탈을 기어오르는 짐승이 아니다. 늑대는 초원에서 단번에 20킬로미터를 줄달음친다. 늑대는 탄력에 넘치는 근육으로 바위들을 뛰어넘어 다니기 좋게 적응했다. 프랑스 산악의 산양이나 영양처럼 진짜 산악동물이 되었다. 늑대는 어떤 벼랑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낭떠러지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사방이 눈으로 둘러싸인 높은 바위와 비탈에는 또 다른 동물들이 붙어산다. 산토끼는 주변 땅 색깔과 비슷해 혼동할 만큼 철마다 곱게 털갈이를 한다. 독수리의 눈을 피하려는 변신이다. 겨울에 비탈이 눈에 덮이면 산토끼 털은 솜털 뭉치처럼 희다. 산토끼는 봄에 덤불과 자갈 사이로 눈밭을 건너다닌다. 그럴 때면 잿빛 얼룩무늬털이 돋는다. 여름에는 뜨겁게 타는 잔디와 돌의 색깔을 띤다. 그다음 갑자기 찾아오는 환절기에 한 번 더 털빛이 달라진다. 그밖에 항상 깨어있고 어디서나 마주치는 작은 설치동물도 활발하다. 들쥐는 눈밭 밑으로 터널과 통로를 뚫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차가운 망토를 걸친 들쥐는 땅속에서 별 것 아닌 먹을거리를 찾는다. 놀라운 재주로 찾아낸다!

대지는 이렇게나 풍요롭다. 또한 수천 미터 더 높은 곳에서도 생존투쟁으로 먹고 먹히는 동물들이 싸운다. 어둠 속에서도 무서운 투쟁은 이어진다. 평원에서 항상 흉측한 광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높은 산의 얼어붙은 땅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종종 먹잇감을 찾는 새는 더욱 높이 날아오르지만, 다른 산기슭으로 멀리 먹잇감을 찾아 날아가는 고달픈 여행을 감당해야 한다. 잠자리와 나비는 따뜻한 햇볕에 취해 미처 밤의 한기를 예상치 못한 채 산꼭대기까지 빛을 향해 높이 날아오른다. 좋아서든 억지로든 고요한 죽음의 땅으로 들어선 곤충 외에도, 그 지역에는 토박이 곤충이 산다. 주위가 온통 눈에 덮여 적막할 뿐이지만, 곤충들은 공기가 차거나 땅이 얼음장 같다고 여기지 않는다. 여기저기 눈밭 사이로 비죽비죽 솟아오른 바위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마찬가지다. 바위에 낀 이끼 한복판에서 곤충들은 양식을 찾아내며 즐겁게 살아간다. 경이로울 뿐이다.

그리고 인간

산에 그렇게 많던 신들은 이제 숭배받지 못하고 있다. 우레와 산사태는 더 이상 천둥 신 유피테르의 호통이 아니다. 산자락을 휘감는 구름도 이제 더는 유노 여신의 옷자락이 아니다. 우리는 마침내 아무 겁도 없이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 신들의 거처와 수호신들의 소굴로……. 수많은 등반가가 그 옛날 무시무시하던 봉우리들을 목적지로 삼는다. 등반가들은 어떤 바위와 빙하에도 인간의 자취를 남기려고 한다. 유럽인들은 이미 많은 고장에서 거의 모든 봉우리를 정복했다. 조만간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사람이 오르지 않은 봉우리는 없어질 것이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졌던 거대한 지리적 발견은 거의 끝났다.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 지구는 샅샅이 밝혀졌다. 새로운 발견과 정복의 영광을 노리기 어렵게 된 모험가들은 아직 인간이 오르지 못한 고봉에 도전하고 있다. 그린란드에서도 아마추어 등반가들이 미지의 봉우리를 찾는다.

매년 좋은 계절에 등반가들은 허영심 때문에 무서운 고봉을 타고 오르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어려운 방법을 찾고 자신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릴 것으로 확신한다. 마치 등반만으로 인류에 유익한 과업을 해냈다는 듯 정상에 올라 얼어붙은 손으로 영광의 순간을 보고하고 샴페인을 터트린다. 정말 정복자처럼 축포를 쏘면서 미친 듯이 깃발을 흔든다. 그들은 두터운 만년설로 덮이지 않은 곳에 돌을 쌓아 조금 더 높인다. 그렇게 세계의 주인이자 왕처럼 으스댄다. 그들은 산을 거대한 계단으로 볼 뿐이다. 자기 발밑에 왕국들이 납작하게 깔렸다고 본다. 양팔을 벌려 산 밑의 왕국들을 끌어안는 시늉을 한다. 영주의 성내에 처음 들어가 본 시골 시인이 왕좌에 한 번 앉아보고 싶다고 부탁하는 꼴과 마찬가지다. 시인은 왕좌에 앉아 갑자기 지배자의 기분에 취해 버린다. 곁으로 날아드는 파리에게는 이렇게 외친다. “아! 이제 내가 왕이야. 너는 찌그려져(납작하게 뭉개버릴 테니)!” 주먹을 휘두르며 불쌍한 곤충을 황금 왕좌에 짓이긴다.

그러나 높은 산 등반은 항상 위험천만하다. 시시각각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진할수록 더욱 강렬한 환희를 맛본다. 완력과 정신으로 강인하게 무장하고 끔찍한 상황을 벗어났다는 희열이다. 번번이 얼어붙은 빙벽에 매달린다.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다. 옛날 사람들은 빙하 둘레를 타고 올랐고, 얼음 조각이 갈라지면 끝도 모를 깊은 구덩이로 빠지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신히 발을 디딜 만큼 튀어나온 부분뿐인 암벽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더구나 빙벽이라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얼음물을 뒤집어쓰면서 기어올랐다. 용감하고 침착해 모든 근육을 이용해 위험을 피할 만큼 단련된 사람들이다.

빙벽을 타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산을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의무를 위해 강하게 싸워야 했던 사람일수록 아찔한 ‘스릴’만이 등정의 즐거움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빙설과 크레바스 등 온갖 장애를 거친 어려운 길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리적 현실을 정신세계와 비교하면서 “자연의 난관을 이겨 냈어”라고 털어놓는다. “봉우리를 밟았다. 사실 고통스러웠지만, 이겨 냈고 의무를 다했어!”라고…….

이는 정말로 위험한 산에 올라 과제를 수행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바위와 화석을 연구하거나 이정표를 설치하고 모국의 지도를 작성하려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감정과 용기일 것이다. 이런 인물들이라면 정상에 서서 환호할 만하다. 여행에서 불운을 맞더라도 순교자로 불릴 만하다. 그들의 이름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한다. 나서서 위인 행세를 하는 어설픈 사람들보다 훨씬 더 고상한 인물들 아닌가!

머지않아 지구 탐사의 영웅시대와 함께 산악 탐사의 영웅시대도 막을 내릴 것이다. 유명한 등반가들의 기억은 전설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장에서 모든 산은 차례차례 정복될 것이다, 보행로도 뚫리고, 차로도 산 밑부터 꼭대기까지 뚫릴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과 한가한 사람들조차 어렵지 않게 산행을 하게 될 것이다. 빙하 틈의 구덩이들은 구경꾼들을 끌어 모을 것이다. 접근할 수 없던 사면에 설치한 케이블카로 아찔한 절벽을 스치며 관광객들은 담배를 피고 수다를 떨면서 오를 것이다.

이렇듯 산에 오르기 쉬도록 자연을 크게 바꾸면서,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산 자체를 거의 제거하기도 한다. 가파른 산길에 차도를 뚫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술자들은 바위산을 뚫고 철도로 골짜기들을 잇는다. 인간은 자연의 장애를 넘어선다. 필요에 맞춰 새 땅을 만든다. 함선이 피신할 큰 항구가 필요하면 바닷가 쪽으로 튀어나온 작은 반도나 구릉을 깎아 바다 밑바닥을 채우고 방조제를 쌓는다. 상상이 미친다면 인간은 거대한 산맥까지도 모두 짓이겨 평야를 채우려 하지 않을까?

이미 시작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광부들은 사금이 물에 씻겨 내려올 때를 기다리지 못해 답답해하면서 산을 통째로 가루로 만들려 했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바위를 갈아 금속을 채취한다. 하지만 힘과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사구(모래언덕)와 자갈 같은 땅에서는 이런 작업이 훨씬 쉽다. 그럴 때 광부들은 커다란 소방용 펌프를 들이대고 모래와 자갈을 계속 퍼낸다. 그렇게 산을 조금씩 무너뜨려 금을 캔다. 프랑스에서도 이와 같은 식으로 피레네산맥 전방의 고원에 고대로부터 쌓인 퇴적층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렇게 퍼낸 흙으로 운하를 따라 랑드 지방의 황야를 메웠다.

물론 이런 공사로 상당한 진보가 이뤄졌다. 이제 좁은 산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상대방 등을 서로 타고 넘어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 장애인과 환자도 지상의 어느 곳이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어떤 자원이든 이용할 수 있다. 인간 생활은 시시각각 확장되고 땅에서 캐낸 보물로 소득이 증가한다. 그러나 인간만사가 그렇듯 진보에는 그만한 남용도 따른다. 저주받을 남용이다.

과거에 삶이 인간 대 인간 혹은 인간 대 야수의 끊임없는 투쟁이었을 때, 소년은 집으로 피비린내 나는 승전보를 갖고 돌아오지 못하면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다. 소년은 감히 백전 용사들의 조언에 말대꾸를 하려면 체력과 용기를 입증해야 한다. 적들과 직접 겨룰 위험이 없던 나라에서도 굶주림과 추위, 악천후를 견디면서 어른 자격을 얻으려면 숲속에 들어가 음식도 옷도 없이 삭풍을 견디고 벌레에 물리며 견뎌야 했다. 태연한 모습으로 꿈쩍 않고 여러 날을 버텨내고 나서 아무 불평 없이 처벌을 받은 뒤에야 푸짐한 식사 자리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조차 제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 먹으러 쉽게 나서지 못했다.

과거의 야만적 시험을 요즘 청소년들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황당해 보이는 고생으로 아이들에게 언제 닥칠지 모를 불행과 안이한 생활방식을 맞서 고상하고 확고한 정신을 심어줄 줄 알았던 방식으로부터 얻을 것은 있다.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도록 일해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행복을 성취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미래의 인류인 아동교육에서 산은 중대한 몫을 한다. 자유로운 자연이 진정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생명의 법칙과 극복할 장애를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창틀로 막힌 답답한 교실에서는 순수하고 용감한 인간을 키울 수 없다. 그런 인간을 키우려면 거세게 흐르는 개울과 산중 호수에서 헤엄치고, 눈밭과 빙하를 걷고, 크고 높은 산을 오르도록 해야 한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매혹과 감동에 넘친 풍경 앞에서 선생님과 함께 환호하는 날에만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위험에 거리낌 없이 대처하고 즐겁게 공부하면서 성격도 밝아질 것이다.

인류의 삶도 그렇지만 당장 내일부터 자연의 면모도 현저히 변할 것이다. 벌써 우리가 대폭 수정해온(개발하고 훼손하면서) 자연계의 형태를 용도에 맞춰 더욱 거칠게 바꿔나갈 것이다. 지식과 물질의 힘이 커지면서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의지도 더욱더 오만해질 것이다.

최근 이른바 개화했다는 문명국의 거의 모든 국민이 해마다 자신에게 축적한 힘을 대부분 서로 죽이고 서로의 영토를 황폐화하는 데 퍼붓고 있다. 그러나 더욱 능란한 자들은 그 힘을 지상에서 생산력 증강에 이용하려고 한다. 지구의 모든 힘을 이용해 우리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거추장스럽다면서 장애가 되는 자연을 제거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지구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트린다.

어느 국가나 자연환경에 새 옷을 입히려 한다. 경작지와 도로, 주거와 갖가지 건축물로서 나무와 풍경을 집단과 전체적 질서로 재구성하고, 인구를 이상을 실현할 척도로 삼는다. 만약 주민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정서를 깨닫는다면 자연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인류 대부분은 지금 보다시피 거칠고 이기적이며 기만적으로 살 것이다. 지구에 서글픈 자취만 계속 남길 것이다. 시인이 절망하는 외침이 정말 사실이 되지 않을까? “도망칠 데가 어디 있어? 자연이 더러워졌는데…….”

다행히 산은 항상 유행에 광분하지 않는 사람에게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광분하는 세계에 거리를 둬야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한 사람들의 정신조차 뒤흔들고 흐려놓는 천박하고 웃기는 여론의 흐름 따위는 멀리하고…….

내가 얼마나 놀랍게 습관을 털어버리고 달라졌는지! 산의 마지막 높은 문턱을 넘어 멀리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를 바라볼 때, 어마어마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마음대로 지평선 끝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자리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주변 자연의 다채로운 매력은 항상 똑같았다. 골짜기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눈도 바위도 보이지 않았다. 단조로운 야산이었다. 걸음은 자유로웠지만 산에 이상하게 붙들린 느낌이 들었다. 한 그루 나무, 소박한 덤불만 지평선을 가렸다. 산길 양쪽은 온통 울타리로 이어졌다.

산에서 멀어지면서 나는 종종 뒤를 돌아보며 작아지는 산의 형태를 주목했다. 경사면들은 차츰 푸르스름하게 한 덩어리로 보였다. 깊고 긴 골짜기들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낮은 봉우리들도 눈에 띄지 않고, 환한 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산마루 옆모습만 뚜렷했다. 그러나 금세 흐린 먼지에 휩싸였다. 산은 구름 위로 솟은 뿌연 배경처럼 보였다. 올라가 보았던 봉우리들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사방으로 끝없이 평야만 펼쳐졌다.

이제, 나는 완전히 산에서 멀어졌고, 시끄러운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 과거의 인상만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한 번 더 산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그림자에 파묻힌 골짜기를 머릿속에 그리며 잠시 평화로운 바위와 풀벌레와 풀잎을 바라보았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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