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정복한 식물들

돌배나무 / 2020년 8월 / 392쪽 / 15,000원

세계를 정복한 식물들
북코스모스 회원이 되시면 오디오 듣기 이용이 가능합니다.

세계를 정복한 식물들

스티븐 해리스 지음

저자 소개

영국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 식물과학과 교수이자 옥스퍼드대학교 식물표본실의 큐레이터이다. 진화생물학과 보전생물학 분야의 분자 마커 사용과 식물표본의 DNA 자료 사용 문제를 중점 연구하고 있으며, 생물다양성, 야외생물학 등의 연구에도 몸담고 있다. 학술서 외의 저서로 『Grasses』(2014), 『Planting Paradise: Plants in cultivation: 1501~1900』(2011),『The Magnificent Flora Graeca』(2007) 등이 있다.

책소개

이 책은 인류 문명의 행보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식물 50가지를 연대기적 접근을 통해 소개한다. 포도, 빵밀, 튤립과 같은 친근한 식물에서부터 선옹초, 왕포아풀, 애기장대 같은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식물들까지,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이에 얽힌 다양한 문화 역사적 사건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고요하고 무성하게, 우리의 삶을 바꿔 온 식물의 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약본 본문

보리 - 빵, 화폐 그리고 맥주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보리를 재배하고 거래해 왔고, 보리 재배는 서구 문명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틀로 자리잡았다. 밭을 갈고 죽은 듯 보이는 낟알을 뿌리면 이내 새싹이 나고 이삭을 맺는다. 이 과정이 1년 주기로 반복된다. 분명히 초기 농부들은 이런 과정을 신비롭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밭에 낟알을 뿌리면서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고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신에게 감사하는 종교 의식이 발달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종교 의식은 공동의 신앙을 낳고 그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결속시켰으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는 미래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안도감을 심어줬다. 단, 종교의식의 제물로 선택되지 않은 이들에 한해서 말이다.

새로운 사회와 제국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이런 종교 의식의 형태도 발전하고 변했다. 그러나 우리는 뒤늦게 등장한 종교 관계들에서 앞선 시대의 신앙을 찾아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로비갈리아 축제다. 로마력으로 4월 25일에 열리는 이 축제는 곡물의 신을 위한 것이었다. 한 해의 수확을 기념하기 위해 기독교 의식들이 추분과 관련된 이교도 의식들을 대체했지만, 기독교력의 기원절은 로비갈리아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이 기간 동안 교구 경계는 통제되고 사람들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한다. 보리를 의인화한 인물, 존 발리콘에 관한 영국 민요와 설화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물을 수확하는 농사 과정은 한 인간의 탄생, 역경, 죽음 그리고 부활로 묘사된다.

보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bere’와 ‘barley’는 고대 영어 ‘baerlic’에서 파생됐다. 인간의 농경사에 아주 깊이 박힌 이 고대 영어에서 헛간이라는 뜻의 ‘barn’이나 보리 창고라는 의미의 ‘barley place’란 단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보리는 본래 유럽이나 북미 농가에 딸린 아늑한 헛간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작됐다. 농가에서 재배되는 보리 품종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홍해 북부에서 지중해 동부를 따라 시리아 북부로 이어지는 긴 활 모양의 지역이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터키 남동부를 통과하고 남동쪽으로 이라크와 이란의 경계를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보리가 농가에서 재배되었음을 보여주는 첫 증거는 기원전 8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리코 인근의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기원 5세기부터 보리를 주식으로 삼아온 티베트도 보리를 재배했던 주요 지역이다. 보리의 재배종과 고대 야생종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야생종의 경우 낟알이 익으면 땅에 떨어지지만 재배종의 경우 끝까지 꽃대에 달려 있어 수확이 훨씬 용이하다. 그리고 이삭을 맺는 과정 자체가 다르다. 재배종의 보리 이삭에는 각 마디마다 세 개의 낟알꽃이 달리고 이런 세 개의 낟알꽃 더미가 꽃자루의 양쪽에 배열된다. 마디에 달린 세 개의 낟알꽃이 모두 여물면 여섯 줄로 보리 씨알이 열린다. 그러나 야생종은 그중 가운데 낟알꽃만 여물어 보리 씨알이 두 줄로 배열되어 열려 2조맥, 즉 두 줄 보리로 분류된다. 인간이 보리를 재배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보리 품종이 만들어졌다.

흔히 사람들은 식재료로서 밀보다 보리의 질이 낮다고 여긴다. 그러나 보리는 없어서는 안 될 곡물이다. 2012년, 보리는 전 세계적으로 1억 3천만 톤 이상 생산된 세계 4대 곡물 중 하나다. 생산량의 대부분이 주류와 가축 사료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며, 여섯 줄 보리가 두 줄 보리보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당분 함량이 낮아 사료로 만들기에 더 적합하다. 보리는 건조하고 양분이 빈약하고 염도가 맞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란다. 반면 밀은 보리에 비해 이런 환경을 잘 견디지 못한다.

술을 빚는 능력이 인간 문명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술을 취해 휘청이는 것이 아니라 식품을 가공해 보관하는 능력의 관점에서 말이다. 발효는 탄수화물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궁극적으로 유기산으로 바꾼다. 우리가 마시는 술은 간단히 말해 탄소 원자가 두 개인 에탄올이다. 이 에탄올을 만들려면 물, 당분(맥아 보리 혹은 엿기름), 혐기성(공기 중의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환경과 효모균만 있으면 된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에탄올을 만들어 왔다.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견된 적어도 5천 년은 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파편에서 보리 맥주의 흔적이 나왔다. 수많은 수메르 설형문자판에서 양조법과 보리 거래내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이집트 무덤에서 나온 장례용품에는 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양조업자들은 홉이 맥주를 보존하고 풍미를 높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맥주는 홉이 첨가된 에일이다. 게다가 양조업자들은 보리 품종의 차이를 이용했다. 전통적으로 영국과 독일은 두 줄 보리로 에일을 만들었고 미국은 여섯 줄 보리로 라거를 만들었다. 초기 양조업자들도 발효과정을 조절했다. 하지만 효모와 발효의 관계는 1856년 프랑스 화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서 밝혀졌다. 보리를 발효시키면 맥주와 에일을 만들 수 있고 증류시키면 몰트위스키가 된다.

외부인의 눈에는 거의 미신과 다를 바 없는 종교의식과 미스터리로 가득한 문화들은 술을 중심으로 발달해왔다. 술을 둘러싼 문화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깨끗한 식수가 없었기 때문에 맥주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음료였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장티푸스균이나 콜레라균이 득실거리는 물보다 더 안전한 맥주를 소량 연하게 마셨다. 과거 맥주를 많이 마셨던 배경에는 정치적인 요인도 있었다. 1751년 만화가이자 판화 제작자인 윌리엄 호가스는 ‘맥주 거리와 진 골목’이라는 판화를 공개했다. 맥주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고 책임감 있는 근면한 시민들이었지만 진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불행하고 무책임하고 게으른 시민들이었다. 이 판화를 통해 윌리엄 호가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무엇을 언제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영국 에일은 좋고 외국의 진은 나쁘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발효주든 증류주든 술은 양날의 검이었다. 영국 재무성은 주류 판매에 엄청난 액수의 누진세를 부과했지만 주류가 국민의 행동과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해결해야만 했다. 결국 19세기 영국에서 술로 야기된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주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따라 화폐가 생겨났다. 돈은 귀금속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수단이다. 화폐의 등장 이전에는 곡물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1드라크마는 캐롭 꼬투리 18개였고, 캐롭 꼬투리 1개는 밀알 4개였다. 아일랜드의 켈트족에게 밀알 8개는 1핑귄의 값어치를 했다. 영국은 앨프리드 대왕부터 튜더 왕조까지 이어지는 600년 동안 1페니의 가치를 밀알 32개로 규정했다. 밀이 없을 때는 교환 수단으로 보리를 사용했다. 대략적으로 보리알 3개는 밀알 4개와 교환할 수 있었다. 참고로 영국의 신발 사이즈는 보리알의 길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곡물을 무게와 화폐의 기준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곡물 낟알의 크기가 상당히 균일했다는 뜻이다. 과거에 곡물을 실질적으로 무게와 단위의 기준으로 사용했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곡물이 엄격한 측량과 연관될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영국 농부들은 곡물 낟알의 크기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 차이로 발생하는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1세가 집권하던 시기는 영국법에 ‘1페니는 이삭 중간에서 딴 둥글고 건조한 밀알 32개’라고 명시되어 있다.

분명 특별할 것 없는 곡물인 보리는 수천 년 동안 서구 문명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보리는 빵, 맥주와 가축 사료로 서구 문명에 큰 기여를 했고, 사람들이 화학 반응을 이해하고 효모를 재배하는 토대가 되었다. 게다가 저가의 원료를 고가의 상품으로 만드는 데에도 한몫했다.

포도 - 신들의 취중진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매춘이라면, 아마도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은 와인 제조업일 것이다. 와인의 원료인 포도는 6천 년에서 8천 년 전 근동의 유라시아 들포도덩굴에서 나왔다. 포도는 술과 음주의 역사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포도는 구약성서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첫 재배식물이다. 노아가 포도밭을 경작했다는 구절 다음에는 그가 지나칠 정도로 와인을 마시고 만취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포도는 말린 과일로도 인기 있다. 하지만 전 세계 8만 제곱킬로미터의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포도 대부분이 와인의 원료로 사용된다.

덩굴포도나무와 와인은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서양 예술에서 문자 그대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많이 언급된다. 특히, 지중해 주변에 위치한 서양 문화의 예술작품에서 덩굴포도나무와 와인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 바커스를 기리기 위한 의식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진행된다. 여기서 ‘질탕한’을 뜻하는 ‘dionysian’과 ‘진탕 마셔대는’을 뜻하는 ‘bacchanalian’이 유래됐다. 두 단어 모두 광란하게 술을 진탕 마시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포도덩굴과 서구 문화 사이에는 고전적,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포도덩굴은 중세 유럽의 고상한 정원에 없어서는 안 될 식물이었다. 포도덩굴은 식량과 술의 원료일 뿐만 아니라 그늘을 만들어주고 상징이 되는 존재였다. 16세기 정원에서 포도덩굴의 지위는 장 루엘의 『식물지』 목화판 속표지에 그려진 포도덩굴로 덮인 수목이 다양한 동식물을 지배하고 있는 모습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포도는 또 하나의 고고학적 표식인 타타르산(또는 주석산)을 제공한다. 타타르산은 주로 와인 숙성에 사용된 용기에서 발견된다. 포도는 장거리 수송에는 씨앗의 형태로, 단거리 수송에는 꺾꽂이모 형태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포도 재배지역은 지중해 지역을 통해 아시리아, 페니키아, 그리스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교역로를 따라 서서히 확장됐다. 로마인들은 포도 재배의 경계를 유럽 제국의 온대 지방, 심지어 미개한 영국 제도까지 확장했다. 붕괴된 로마 제국을 비롯해 가톨릭교회로 가장한 새로운 로마 제국의 수도승들은 중세 시대 동안 포도 재배를 지속해왔고, 여전히 널리 확산시키고 있다. 교회에서 와인은 육체와 영혼의 건강을 위해 중요하게 여겨지며, 성찬 예식에도 쓰인다.

신세계의 재발견은 교회에 포도 재배에 활용할 수 있는 영적 힘과 기후를 제공했다. 아이슬란드 탐험가 레이프 에릭슨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세기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는 탐험 중에 머루나무를 보고 그 지역을 ‘와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빈랜드로 불렀다. 원주민들은 머루로 와인을 만들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1830년대 아메리카 대륙의 머루가 아주 중요해졌다. 당시 유럽의 포도밭은 필록세라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필록세라는 북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미세한 진딧물로 포도나무 뿌리에 살며 나무의 수액을 빨아먹는다. 포도밭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었던 이 상황에 대처할 최고의 방안은 필록세라에 강한 미국 품종의 뿌리줄기에 유럽 품종을 접붙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보수적인 포도밭 주인들이 이러한 합의에 이르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다.

현재 알려진 포도 품종은 1만 개 이상이다. 대다수는 전문가 컬렉션에서만 발견되고, 피노 누아,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그리고 톰슨 시들러스와 같은 소수 품종만 상업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이 품종들은 서로 긴밀한 관련이 있다. 피노 누아는 기원전 1세기에 나온 품종으로 알려져 있고, 샤르도네는 피노 누아와 구에 블랑의 교배종으로 4세기에 나온 품종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18세기 초에 나온 카베르네 프랑과 소비뇽 블랑의 교배종으로, 한 적포도 품종의 유전자 2개가 변이를 일으키면서 수천 개의 백포도 품종이 나오게 되었다.

포도 재배는 고상한 가내수공업이 아니다. 덩굴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고 해충과 질병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해야 한다. 포도밭에서는 주로 접붙이기와 꺾꽂이와 같은 방식으로 포도나무를 번식시킨다. 포도 품종들은 유전적으로 아주 가까운데, 이것은 포도나무가 진화 속도가 빠른 균질 병원균과 해충 부대의 맹공격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포도 재배자들은 경제적 부담과 환경 파괴 위험에도(그 어느 때보다 더 정교한 무기인) 농약을 사용한다. 재배자들은 포도 품종을 늘리기 위해 값비싸고 고된 연구를 진행하지만 보다 익숙하고 전통적인 품종을 찾는 와인 제조업자와 소비자의 욕망 때문에 좌절하기도 한다.

장미

장미는 상징, 약재, 향수, 산업 원료, 식량 등 다방면으로 사용된다. 이런 용도들과는 별개로, 장미는 수천 년 동안 여러 문화권에서 관상식물로 자리매김했다. 장미는 가장 널리 재배되고 사랑받는 원예식물이다. 장미는 수백만 명에게 기쁨을 주고, 일자리를 준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부를 얻었다. 실제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장미 재배를 시도했다. 식물 육종가들은 유전자를 조작해서 질병에 강한 품종이나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특징을 지닌 장미 품종을 개발했다. 시장의 첫 유전자 변형 식물이 정말로 푸른 장미였다면 21세기 초 유전자 변형 유기체의 역사가 달라졌을까?

18세기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는 공식적으로 장미의 생물 분류상의 속을 고전적인 라틴명 ‘로사’라고 명명했다. 그는 12종의 장미와 추가로 ‘장미와 구분하기가 어렵고 그 정체를 밝히기 힘든 새로운 종들’도 개발했다. 약 70년 뒤, 영국에서 존 린들리는 장미에 쏟아지던 엄청난 식물학적 관심에 대해 논평했다. 19세기 말 프랑스 식물학자 장 미쉘 간도게르는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4천 종 이상의 품종을 개발했다. 벨기에 식물학자 프랑수아 크레핀은 장미에서 나타나는 변형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이종 간의 교배가 그 원인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장미의 유전자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장미의 품종이 이토록 다양할 수 있는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장미 유전자의 비밀은 20세기 초에 풀렸다. 장미는 복잡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재배종과 야생종과의 교배가 언제든지 가능해 원예가들에게 인기 있는 식물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수많은 종에서 발견되는 변형의 패턴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장미는 약 190종이 존재하고, 가시가 돋친 관목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북반구의 온화한 기후의 아열대 지역에 분포한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장미열매는 시럽으로도 만들 수 있고 식품 보조제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장미열매를 으깨 말리면 어린아이 같은 장난에 쓰기 적당한 가려움을 유발하는 가루를 만들 수 있다. 장미열매 시럽의 품질은 매우 들쑥날쑥한데, 비타민C 함량이 장미의 품종, 수확시기, 요리온도 그리고 요리시간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이다.

장미는 수 세기 동안 재배됐고 교배가 쉬우며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험한 지역에서도 자란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장미의 기원이 되는 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현대 장미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약 일곱 종의 장미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육종가들은 아름다운 노란 꽃잎, 냉동성, 사철개화 그리고 달콤한 향기와 같은 바람직한 특성을 결합하여 현대 장미를 개발해냈다.

장미는 정치와도 연관성이 있다. ‘은밀한’을 뜻하는 어구 ‘sub rosa’에는 기밀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로마 시대의 건축물 천장에는 장미가 그려지곤 했다. 장미와 정치의 연관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5세기 후반의 영국에서는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이 왕좌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 몇 세기 이후,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 전쟁은 장미전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요크 가문의 문장은 흰 장미,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붉은 장미였기 때문이다.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가 요크 가문의 왕 리처드 3세를 굴복시키고 튜더 왕조를 세우면서 장미전쟁은 막을 내렸다.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등극한 뒤 요크 가문의 흰 장미와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를 합쳐 튜더 로즈를 만들었다. 튜더 로즈는 붉은 장미의 꽃잎 5장과 흰 장미의 꽃잎 5장을 짜 맞춘 튜더 왕조의 문장으로, 이후 영국의 국화가 되었다. 현대에 붉은 장미는 국제적 사회주의의 상징이었고, 흰 장미는 1940년대 독일에서 반나치 운동의 상징으로 쓰였다. 2003년 조지아에서도 장미혁명이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이 현대 정치와 장미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옥수수 - 세계를 정복한 식물

15세기 후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업적은 유럽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메리카의 재발견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 물자, 인적자원과 아이디어의 쌍방 거래가 성립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두 대륙의 자연 세계에도 영향을 줬음은 물론이고 기독교의 종교적 확신과 고대 그리스ㆍ로마 통치자들의 진실성에 대한 지식인들의 신념을 산산조각 냈으며 식문화를 바꿨다. 사람들이 식물은 신의 선물이라는 독단적인 믿음을 탈피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식물의 기원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박물학자들은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어떻게 발달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고 궁극적으로 19세기 중반에 다윈이 이룬 지적 혁명의 원재료를 제공했다.

주로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에서 자라는 한해살이풀인 옥수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다. 큰돈을 쫓는 사람이나 전사, 신부, 정부 관료들이 최초로 아메리카를 탐험한 부류다. 그들은 카리브 해의 섬들을 여행하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행진했다. 그러면서 그곳 사람들의 일상에 뿌리내린 식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제 멸종된 부족인 타이노족은 그 식물을 ‘mahiz’라 불렀다. 이 단어는 옥수수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maize’의 기원이 되었다. 중앙아메리카의 고대 마야족, 아즈텍족과 톨텍족은 지혜와 지식의 신인 케찰코아틀을 섬기며 정기적으로 신에게 토르티야를 만들어 바쳤다. 아즈텍족은 옥수수의 풍작을 위해 남성신과 여성신인 쇼치필리와 치코메코아틀을 섬겼고 마야족은 윰 카악스라는 농경의 신을 섬겼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아메리카에서 적어도 자신들의 문명만큼 고도화된 문명을 만났다. 모든 고도화된 문명에는 농업 주기에 따라 들쑥날쑥한 생산량을 안정화시켜 식량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아즈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거주지로 꽉 들어차 있었는데, 아즈텍족은 이 거주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위성 지역으로부터 공물을 거둬들이고 고도화된 농업 시스템을 도입했다. 얕은 호수 주변에 흙과 비료를 쌓아 만든 인공섬인 치남파가 그들이 받아들인 농업 시스템 중 하나였다. 옥수수와 콩, 호박을 섞어 만든 치남파의 흙은 수십 년 동안 영양분이 풍부하고 비옥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16세기 초 아즈텍 문명이 무너지면서 파괴됐다.

현대 옥수수 종자에는 보통 식물당 한두 개의 노란색 이삭이 달린다. 하지만 고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재배했던 옥수수 이삭은 흰색부터 노란색과 빨간색을 거쳐 갈색과 검은색을 띠었고, 색깔을 비롯해 크기, 열리는 작물의 개수 등 그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옥수수가 구세계에 처음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의 식물학자 존 제랄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옥수수로 만든 빵은 초라하게 희다. …그것은 비스킷만큼 단단하고 건조하다. …소화가 잘 안 되며 몸에 좋은 영양분도 거의 없고 천천히 장을 타고 내려가 배 속에 쌓인다. …야만적인 원주민들은 이 식물로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좋은 음식이라 생각한다. …실상 사람보다 돼지가 먹을 음식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서서히 옥수수를 식품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620년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간 영국인들이 매사추세츠 일대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이로쿼이족이 그들에게 옥수수를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옥수수는 서서히 서구 문명에 파고들어 유럽을 변화시켰다. 신세계의 옥수수는 제일 먼저 이베리아 반도로 전해지고 그 후 400년에 걸쳐 구세계 전역으로 확산됐다. 현재 전 세계 수백만 헥타르에서 재배되고 있는 옥수수 대부분이 유전자 변형 옥수수다. 옥수수는 전 세계적으로 소비되는 상품이다. 무역상들의 투기로 인해 급등한 옥수수 가격이 전 세계 식품 가격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옥수수는 대부분 동물 사료와, 바이오연료를 생산하는 데 사용된다. 황금빛 옥수수 이삭과 알갱이를 으깨서 구우면 콘플레이크가 만들어지고, 튀기면 팝콘이 되고, 가루로 만들면 폴렌타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정제된 옥수수 전분과 시럽은 거의 모든 가공식품의 첨가물로 사용된다. 이것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식품들이다.

목화 - 전 세계에 옷을 입힌 식물

1860년 미국 남부와 영국은 하나의 식물이 가져온 부로 긴밀하게 묶인 공동체였다. 그 식물은 바로 목화다. 미국 남부 농장의 노예주는 40년간 목화를 재배하고 수확하여 영국 랭커셔에 위치한 면업지대의 노동자들에게 면화를 공급했고, 이렇게 면제품에 대한 전 세계의 탐욕스러운 욕구를 만족시켰다.  미국 남북전쟁 직전 영국의 방적공장 3천 개 이상이 약 65만 명의 사람들을 고용했고 대략 45만 톤의 면화를 취급했다. 이 중 약 80퍼센트의 면화가 미국 남부에서 수입됐고 그 가치가 1억 2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미국은 전 세계 목화 공급량의 10퍼센트를 차지했다. 1860년 이 수치는 전체 공급량의 3분의 2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목화의 세계 생산량은 거의 5배로 증가했다. 반면 1860년 전통적으로 목화의 원산지였던 인도의 비중은 2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목화 열매가 완전히 익으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완전히 익은 꼬투리는 반으로 갈라지는데, 이때 골프공 크기의 섬유질 뭉치가 겉으로 드러난다. 이 보송보송한 솜털뭉치에서 신화 속 동물인 ‘바로메츠’가 나왔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목화를 처음 본 중세 후기와 근현대 사람들은 목화가 양이 열리는 식물이라고 믿었다.

고시피움속에는 대략 50종의 목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여러해살이풀로 열대 지방과 아열대 지방에 주로 서식한다. 구세계와 신세계는 최소 5천 년 동안 목화를 이용하고 재배했다. 100만 년에서 200만 년 전 아메리카에 등장한 목화는 페루종과 고시피움 헤르바케움의 가까운 친척의 교배종이었다. 신세계에 등장한 교배종은 다시 다수의 종으로 갈라졌는데, 이 과정에서 현대 상업용으로 쓰이는 목화도 등장했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고시피움 히르수툼이 재배되었고 고시피움 바르바덴스는 카리브 해에서 재배되었다. 1800년대 이전 구세계에 재배된 고시피움 아르보레움과 고시피움 헤르바케움은 당시 가장 중요한 상업용 품종이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이집트산 목화도 19세기 신세계 재배종을 선별하며 등장하게 되었다.

익명의 19세기 영국 육군 장교는 목화가 ‘인간의 노동력보다 너그러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재배된 식물’이라고 이야기했다. 빅토리아 시대 응접실에서 세상물정 모른 채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런 발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영국령 인도의 실상과 목화 섬유의 생산이 아주 고된 노동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발언은 하지 못할 것이다. 보스턴부터 파리에 즐비한 살롱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미국 남부의 노예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면화를 생산하고 있는지 또는 영국 북부 면업지대의 방적공장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기계화는 저렴한 면직물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산업화 이전의 면직물은 아주 비쌌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루이스 폴과 존 와이엇의 롤러 방적기, 제임스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정방기와 사무엘 크럼프턴의 뮬 방적기 등 연이은 기계장비의 발명이 면직물 생산량을 증가시켰고, 랭커셔는 면업의 중심지가 됐다. 1793년 미국의 엘리 휘트니가 목화 꼬투리에서 섬유소와 씨앗을 빠르게 분리해내는 조면기를 발명하여 특허를 따냈다. 영국의 전경은 산업혁명이 속도를 내면서 빠르게 바뀌었다. 미국 남부도 애팔래치아 산맥의 광활한 서쪽 지역을 목화 재배지로 사용하면서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목화밭 덕분에 미국 남부는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노예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부 연합에 속했던 주들이 독립했다. 이어서 1862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했다. 자유무역주의자, 노예제 폐지론자 그리고 노예제 옹호론자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였고 미국 남부의 지도자들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일종의 도박을 했다. 바로 면화 공급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가 자신들의 취지에 부응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벌인 도박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면화 재고량은 사상 최대였고 섬유산업은 시장 축소로 인해 침체되어 있었다. 방적공장 사장들은 자유무역 제한에 반대했고 연방주의자들의 편을 들었다. 그 결과 영국의 랭커셔는 면화기근으로 유례없는 공황에 빠졌다.

면화기근이 심각해지고 랭커셔의 실업률이 치솟자, 영국은 품질 하락을 감안하더라도 식민지에서 목화를 들여오려는 대안을 세웠다. 하지만 남북 전쟁의 종식으로 미국의 목화 공급이 빠르게 재개됐다. 흑인과 백인을 모두 소작인으로 고용하여 목화를 생산했고 랭커셔의 방적공장은 다시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와 이집트는 목화 공급책을 다양화하려는 영국의 시도와 목화 무역의 부당함 등으로 19세기 말에 이르러 굉장히 고통받게 되었다.

목화는 주로 부드럽고 ‘통기성 있고’ 흡수성 좋은 직물과 실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고급 중성지와 초기 사진필름, 영화필름을 비롯해 DNA를 고정시키는 끈적끈적한 물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나이트로셀룰로스 생산에도 목화가 사용된다. 심지어 목화의 씨앗도 사용할 수 있다. 목화씨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성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는 소의 사료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목화는 인간의 생식활동에 영향을 주는 유독성분인 고시폴을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2013년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 면적의 절반만한 지역에서 대략 3,300만 톤의 목화 섬유가 생산됐다. 중국은 인도와 함께 세계 목화 생산량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목화 생산국이다. 목화 재배는 오늘날에도 경제, 정치, 환경 그리고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목화 시장은 예기치 못한 기후 변화로 생산량이 일정치 않고 유행하는 패션이 매년 바뀌는 탓에 변동성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투기꾼들은 이런 목화를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목적으로 비축해두고 풀지 않는다. 목화를 유전적으로 변형하여 해충을 잘 견디고 제초제에 강한 내성을 지닌 종을 생산하는 것이 환경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독자 생존이 가능한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땅, 물, 비료, 살충제와 제초제가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목화 생산은 개발도상국의 현대판 노동착취와 관련된다. 소비자들이 저렴한 의류를 원하면서 개발도상국에서 저렴한 인건비로 많은 목화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착취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목화가 또 다시 노예제도와 연루된 것이다.

벼 - 수십억 명의 식량창고

벼는 지구상의 그 어떤 식물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아시아인들은 최소 9천 년 이상을 벼에 의존해왔다. 그들의 삶의 형태 또한 벼의 재배환경에 따라 변했다. 벼는 열대지역에서 일본 북부의 온화한 지역, 캄보디아의 저지대에서 히말라야 산맥, 그리고 네팔의 건조한 고지대까지 다양한 아시아 지역에서 재배된다. 벼는 각 지역의 환경에 맞춰 적응하면서 다른 품종으로 진화했다. 그 결과 벼는 엄청나게 다양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아시아 사회에서 주식으로 이용하는 아주 중요한 작물이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양인들이 벼를 먹기 시작한 것은 불과 2세기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벼의 역사는 동서양의 만남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략은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가 자신의 청중들에게 벼를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부상과 함께 쌀 문화가 카스피 해의 남쪽 해안으로 확장되었고, 10세기 무렵에는 아프리카 북서부에 살던 이슬람 종족인 무어인들이 벼를 이베리아 반도에 소개했다. 14세기에 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통해 아메리카로 퍼져나갔다. 벼는 신세계에서 주요한 작물이 되었다. 이제는 구세계의 벼와 신세계의 콩을 함께 곁들이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음식은 상상할 수 없다. 식민 지배를 받던 미국 남부가 벼재배와 노예무역으로 이득을 보기 시작하자, 벼 재배에 익숙한 서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일부 학계는 흑인 노예가 식민 지배 시기의 아메리카 쌀 문화의 핵심이었다고 여긴다.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는 이미 동쪽에서 전해진 벼가 서양인들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벼는 한해살이풀로 두 개의 주요 품종이 있다. 인디카종은 찰기가 없고 쌀알이 길고 따뜻하고 온난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반면 자포니카종은 찰기가 있고 길이가 짤막한 쌀알이 열리며 습한 열대기후에서 잘 자란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가파른 산비탈과 둑 주변 평지에 논을 만들고 물을 대서 벼를 키웠다. 벼 재배의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홍수가 나면 잡초 개체수가 줄어들고 수생 양치식물인 아졸라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기 때문에 논의 수와 면적이 증가했다. 벼를 재배할 때 발생하는 메탄가스는 매년 인간의 활동으로 발생하는 메탄가스량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벼 재배종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어렵다. 벼가 아주 드넓은 지역에서 재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벼 재배를 암시하는 고고학적 흔적이 남아 있는 지역은 거의 없다. 벼의 야생종과 재배종을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 확보된 증거를 근거로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이 벼가 재배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어떤 종에서 갈라져 나왔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쌀알은 식량의 자연 저장고다. 수천 년 동안 쌀은 매년 곡물을 맺으며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했고 인류와 함께 이주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왔다. 과학자와 벼 육종가들은 유전적 잠재성을 저장하기 위하여 쌀알의 이런 특성을 이용해왔다. 아시아 벼에서 목격되는 엄청난 유전 변이가 종자은행에도 보존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대대손손 이어진 이 유전적 복잡성에 의존해 새로운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고 미래 세대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식물을 육종할 때 특정 유전자를 빈번하게 조작한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런 육종 방식을 통해 스스로 먹을 식량을 확보해왔다. 하지만 기후변화, 인구 증가와 서식지 소실로 어려움이 생기자 육종가들은 특정 유전자를 작물에 주입시키거나 구성 품종을 이용해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 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광합성의 효율성을 높여야만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말인 즉, 광합성의 생화학 작용 전부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벼는 영양학적으로 불완전한 식량이다. 예를 들어 씻은 쌀은 비타민A와 B1 그리고 철분이 부족하다. 그 결과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타민 결핍증이 자주 나타난다. 비타민 ADML 결핍은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매년 25~50만 명의 아이들이 비타민 A 결핍증에 걸려 시력을 잃고, 이중 절반은 12개월 내에 사망한다. 하지만 비타민 A 결핍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황금쌀의 개발이다. 황금쌀의 첫 번째 품종은 수선화와 박테리아에서 각각 두 개와 한 개의 새로운 유전자를 벼에 주입시킨 결과로 비타민 A 전구물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황금쌀의 두 번째 품종은 수선화 대신 옥수수의 유전자를 이용했다. 황금쌀도 전 세계적인 비타민 A 결핍증을 없앨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현재 두 가지 품종이 아시아 벼 육종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있다. 반면 과학적 농업이 인구 증가 속도에 맞춰 쌀의 생산량도 늘릴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혹자는 현대 작물 육종을 두고 인류의 전통적인 생물학 지식을 착취하고 생물자원 수탈을 통해 생물학적 유산을 훔쳤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증가하는 인구를 위한 식량공급은 모든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다. 아주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쌀을 주식으로 삼으면서 벼는 생물자원 수탈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 되었다. 다른 볏과 작물의 육종과 관련한 과학적 발전에는 사회 변화가 따를 것이다. 식량 생산을 높이려는 노력은 인구 증가 속도를 늦추고 전반적인 소비량을 줄이는 노력과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어쨌든 지나친 쌀 소비 탓에 갈수록 날씬한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텍스트 상자: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0 댓글
본문 피드백
모든 댓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