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원칙

미래의창 / 2021년 5월 / 256쪽 / 14,000원

세종의 원칙

세종의 원칙

박영규 지음

저자 소개

노자와 장자, 주역 그리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인문학자다. 서울대학교 사회교육학과와 동대학원 정치학과를나왔으며, 중앙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학교 총장, 한서대 대우교수, 중부대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에 〈주역으로 읽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리더십과 인간관계〉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서울시 교육청과 백상경제연구원(서울경제신문 산하)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인문학을 부탁해》,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관계의 비결》, 《퇴근길 인문학 수업》(공저), 《나의 리틀 포레스트》, 《실리콘밸리로 간 노자》등이 있다.

책소개

세종이 이룬 많은 업적은 실로 경이롭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원칙’이다. 국가 대사를 결정할 때는 충분한 토론을 통해 조정의 중론을 모으는 ‘숙의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인재를 등용할 때는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능력우선주의’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국가의 영토가 걸린 문제에서는 촌척도 양보하지 않았으며, 외교에 있어서는 강대국에 예를 갖춰 머리를 숙이되 철저하게 그에 상응하는 실리를 챙겼다. 역사를 거울로 삼아 위대한 시대를 연 세종은 그 자신이 면면한 거울이 되어왔다. 살아가면서 길을 잃었다면 그 거울에 물어보자. “이럴 때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요약본 본문

1장 태종의 유산

태종의 유산, 마침내 성군을 낳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의 스물일곱 임금들 가운데 ‘성군’으로 불릴 만한 임금은 몇 안 된다. 그 가운데서도 한 임금만 꼽으라고 하면 단연 세종임금일 것이다. 세종이 조선 500년 역사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는 것은 물론 그의 탁월한 업적 때문이겠지만, 그에 앞서 아버지 태종이 왕권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져놓은 것을 빼놓을 수 없다. 태종이 세자를 충녕으로 교체하자마자 전격적으로 선위를 단행한 것만 봐도 왕권 안정을 위한 태종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간도 왕권 강화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비난을 무릅쓰고 권신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감행했다. 그 덕분에 세종은 소모적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리더십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그처럼 위대한 업적들이 무더기로 이루어낼 수 있었다.

세종의 업적 가운데서도 한글을 창제한 일은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체계라는 한글은 한국인만이 아니라 전체 인류의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숱한 인재들을 배출하고 학문을 크게 진흥시켰다. 또한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비롯해서 천문관측기구 혼천의와 간의, 물시계, 자격루, 해시계 앙부일구 등을 발명했다. 군사적으로는 4군6진을 개척함으로써 조선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악과 향악을 정비해서 중국에 의존하고 있던 음악을 자주적인 음악으로 바꿨으며, 《향약집성방》과 《농사직설》을 편찬함으로써 우리 실정에 맞는 의학과 농법을 구축했다. 그밖에도 청사에 길이 빛날 무수한 업적을 남겼으며, 늘 백성과 고락을 함께하고자 하는 여민의 덕을 몸소 실천했으니, 그가 성군이 아니라면 누구를 성군이라 하겠는가.

세종이 남긴 숱한 업적은 오늘날의 우리 삶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한류로 상징되는 문화강국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또 시대를 앞선 무수한 과학발명품의 장인정신에 녹아 있는 기술 DNA 덕분에 우리는 IT 강국이 될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휩쓸고, 봉준호 감독이 한국 영화를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도 우리의 문화체계를 자주적으로 정립한 세종 치세의 성과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세종이 국가 경영에서 보여준 원칙과 리더십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의 과학 발명품은 이제 박물관의 유물로 남아 있지만 그런 혁신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세종이 보여준 원칙과 리더십은 우리 정신의 위대한 유산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우리를 자극하고 채찍질하며, 더 나은 미래로 이끈다.

2장 공부의 원칙

근본부터 충실하게 다지다

세종은 사고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학문을 철학과 역사로 여겼다. 조선에서 철학이라면 경학, 곧 성리학이었다. 세종은 유교의 기본이자 핵심 교재인 4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와 5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에 통달했다. 당대의 석학으로 이름 높은 변계량, 이내와 같은 대학자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종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올랐다. 세종은 이처럼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지만 오히려 성리학 공부에만 치우치는 당대 선비들의 학문 풍토에 불만을 제기했다. 구체적인 현실과 동떨어진 공부는 관념에 치우쳐서 공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성리학과 함께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경연에서도 무엇보다 역사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경연의 첫 교재로 《대학연의》를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학》은 순전히 성리학을 궁구하는 철학서지만, 송의 유학자 진덕수가 편찬한 《대학연의》는 거기에 역사 사실을 풍부하게 곁들여 역사에 비중을 둔 역사철학서다. 그러나  조신들은 역사 공부에 부정적이었다. 오로지 성리학만이 정통학문일 뿐 역사는 그저 곁가지에 지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자 임금은 통렬히 반박했다.

또한 임금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경연 교재로 삼으려 하자 조신들은 권수가 너무 많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절충안으로 《자치통감강목》을 교재로 삼았다. 294권으로 된 《자치통감》을 59권으로 압축한 요약본이다. 공부를 하면서 미진함을 느낀 임금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해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통감훈의》를 편찬하도록 했다. 임금은 이 통감 주석서의 모든 구절을 몸소 손볼 정도로 역사의 무게를 중하게 여겼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군주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 네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아랫사람들이 기꺼이 따르게 하는 힘을 갖출 것, 둘째는 정확하게 일을 맡기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것, 셋째는 인재에게 일을 맡겼으면 간섭하지 말 것, 넷째는 군주의 권위를 내려놓고 한없이 겸손할 것. 세종은 《자치통감》, 《통감강목》 등의 역사서를 수십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군주로서의 리더십과 용인술 그리고 원칙과 자세를 배웠다.

1422년,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지 4년 만에 서거하자 친정에 나선 임금은 본격적으로 역사 공부에 돌입했다. 세종 7년(1425) 11월 29일, 임금은 대제학 변계량에게 명해 경연에서 역사 강독을 맡을 인재를 뽑아 올리게 했다. 이때 선발된 인물이 집현전 학자 정인지와 설순, 인동(구미) 현감으로 있던 김빈 등 세 명이었다. 지방관 김빈에게 집현전 수찬을 제수해 조정에 나오도록 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품계도 종6품에서 정6품으로 승차했거니와 오지의 하급 지방관과 임금이 애지중지하는 집현전 학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그러자 집현전 학자들 사이에는 역사 공부 바람이 불었다. 집현전 출신의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세종이 역사서인 《좌전》과 《초사》를 백 번도 더 읽었다고 했다. 임금이 역사 공부에 힘을 쏟고 역사에 해박한 사람을 우대하니 자연스럽게 조신들 사이에서도 역사 공부 열풍이 분 것이다.

임금은 성리학과 역사 외에도 문학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특히 당나라 문인인 두보와 한유, 유종원의 작품에는 우국충정의 기개가 넘쳤기에 임금은 학문적 깊이에 더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려면 문학 공부에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수학과 천제물리학, 지리학, 역학, 의학, 군사학, 음악 등의 다양한 전문 분야에 두루 뛰어났다. 유교를 기본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임금이었지만 도교, 불교, 풍수지리학과 같은 비주류 사상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주자소(조선의 출판 담당 기구)에 명해 《장자》를 인쇄하여 배포하는가 하면, 풍수지리를 이단으로 몰아 천시하던 조신들에게 학문 차원으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기도 했다.

3장 소통의 원칙

최초의 전국여론조사,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다

조세제도 개혁 과정에서 보여준 경청의 리더십은 소통의 달인 세종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결정판이었다. 당시의 조세 징수 제도는 관리가 매년 임의로 행하는 ‘풍흉 판정’에 따르는 손실답험법으로, 손실의 정도를 10등분하여 전해에 비해 수확량이 1할 감소할 때마다 조도 1할씩 감면해주되 수확량이 8할 이상 감소하면 조를 전액 면제해주는 방식이다. 백성으로서는 원칙상 그리 불리한 제도가 아니지만 문제는 중간에서 관리와 아전이 온갖 농간을 부려 백성을 이중삼중으로 착취하는데도 마땅한 견제장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관리의 자의적 판단을 배제하고 토질과 기상에 근거하여 조를 결정하는 ‘공법’으로 변경함으로써 아전의 농간, 조사관에 대한 뇌물공여 등의 부작용을 없애고 백성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했다. 공법은 손실의 답험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정해진 세율에 따라 세금을 걷는 제도다.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없애고 조세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장점이 있지만 지리나 기상 특성에 따라 수확량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산간오지의 농민에게는 불리한 점도 있었다.

아무튼 기득권을 쥔 자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된 개정안에 신하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팽팽하게 갈리자 임금은 특단의 대책은 내놓는다. 중앙과 지방 정부의 전ㆍ현직 관리들, 그리고 마을  대표자들의 의견을 전수조사하기로 결정한다. 민생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상 최초로 전국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의 결정에 따라 담당 부처인 호조에서는 대대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는데 그 대상이 무려 17만여 명에 이르는 유례없는 대규모였다. 전화도 없고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17만여 명을 대면 조사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전ㆍ현직 관리들과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실명을 기재하고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이유까지 적는 방식이어서 방대한 인력이 필요한 대역사였다. 하지만 세종의 관리들은 불과 몇 달 만에 그 일을 해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불과 몇 달 만에 해냈다니, 뭐 대충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1430년 8월 10일자 《세종실록》 기사를 보면 조선 관리들의 놀라운 업무수행능력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괜히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이 아니다. 실록에는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가 어지간한 책 한 권 분량으로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조사 결과 찬성한 사람(9만 8,657명)이 반대한 사람(7만 4,149명)보다 더 많았지만 세종은 이를 근거로 조세개혁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지역적으로 보면 토지가 비옥해 수확량이 많은 경기도와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는 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토지가 척박한 강원도, 충청도, 평안도, 황해도, 함길도 등에서는 반대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래서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임금은 황희 등에게 제도개혁에 따른 부작용과 문제점을 좀 더 깊이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그런 후에 제도개혁을 담당하는 상정소를 설치해 세목과 세율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등의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해본 후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해 나간다. 조세개혁 논의를 시작한 지 무려 17년 만에 숱한 논의와 보완을 거쳐 결론을 낸 것이다. 세종의 이런 무한 인내의 경청 리더십 덕분에 공법은 조선의 공식 조세제도로 자리를 잡아 민생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4장 인재 등용의 원칙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사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에게는 엄격한 윤리 기준이 적용된다. 국민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공직자가 도덕적 흠결 때문에 세간의 지탄을 받게 되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다 보면 능력을 충분하게 발휘하지 못한다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보는 거시적 시각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세종 치세에도 공직자에게 어느 정도 수위의 도덕적 잣대를 적용해야 할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장리(뇌물을 받은 관리)의 후손에게 연좌제를 적용해서 공직 임용을 제한해야 하는지를 놓고 도승지 안승선은 제한하는 편이 좋겠다고 한 반면에 김종서ㆍ황희ㆍ맹사성 등은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임금은 다수의 의견을 좇아 행했지만 이후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청렴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조신들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세종도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사소한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봐야 한다는 쪽이었다. 물론 일률적으로 그런 기준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핵심 인재라면 임금은 능력에 방점을 찍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조말생이 대표적인 경우다. 조말생은 태종 때 치른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했다. 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특히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파저강의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조말생의 공직생활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세종 8년(1426)이었다. 사헌부에서는 조말생이 대언(승지)으로 근무할 당시 노비 24명을 뇌물로 받았다며 그를 탄핵했다. 세종은 공직자들 사이에서 뇌물이 공공연하게 횡행하는 것은 큰 문제라며 조말생의 직첩을 회수하고 충청도로 유배를 보낸다. 하지만 세종은 조말생을 곧 복귀시킨다. 파저강의 여진족이 국경을 넘는 일이 잦아지면서 국가 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세종은 조말생을 복귀시켜 여진족 토벌 임무를 맡긴다. 도덕적 흠결보다는 능력에 더 큰 방점을 찍은 인사 조치였다. 실제로 조말생은 임금의 기대에 부응하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세종 치세에서 가장 오래 정승을 지낸 황희에게도 크고 작은 허물이 있었다. 황희는 지혜로운 재상이자 청백리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에게도 이런 저런 흠결이 있었다. 황희는 사위 서달의 살인사건의 진범을 조작해 파직당하기도 했으며,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승려 설우로부터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대사헌’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반역 혐의로 처결된 박포의 아내와 간통했으며, 매관매직으로 뇌물을 챙기기도 했다.

황희는 자신에 대한 이런 나쁜 소문들이 떠돌자 임금에게 사직을 청했다. 임금은 시중의 뜬소문일 뿐이라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황희는 한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요즘의 국무총리에게 그런 정도의 허물이 있다면 당장 사퇴해야 했겠지만 당시는 양반사회라서 도덕적 기준이나 여러 가지 조건이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다. 더구나 세종은 조말생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웬만한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보았다.

실록에 기록된 대로 조정에서 풀기 어려운 숙제가 생길 때마다 황희는 귀신처럼 답을 찾았고, 정사와 형벌을 논할 때에도 황희는 저울처럼 정확하게 해법을 제시했다. 임금은 이런 황희에게 국사를 거의 맡기다시피 했다. 그래서 황희의 사직서를 극구 반려했다. 임금이 이때 황희의 도덕적 허물을 능력보다 더 크게 봤더라면 그 유명한 ‘황희 정승’은 없었을 것이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후 황희에 대한 도덕적 시비는 일체 없다. 황희는 임금의 배려를 깊이 새겨 책잡힐 언행을 삼갔으며,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공직자로서 본분을 다했다.

5장 국가 경영의 원칙

파격적인 제도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다

세종은 사회적 약자를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재물처럼 사고파는 천한 신분의 노비도 한 하늘 아래 사는 백성으로 여겼으며, 그들을 위해 획기적인 출산휴가 제도를 도입했다. 요즘의 눈으로 봐도 매우 혁신적인 제도다. 먼저 여성 노비를 위한 산후 출산휴가를 7일에서 100일로 연장했다. 그리고 산전 출산휴가 제도를 추가로 도입했는데 임신한 노비의 경우 출산 1개월 전부터 모든 의무를 면제하도록 했다.

7일이던 출산 휴가를 100일로 연장한 것도 획기적인데 임금은 그에 더해 산기에 임박한 여성 노비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중 아이를 낳는 사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출산 전 1개월부터 여성 노비들의 모든 의무를 면제하도록 했다. 이보다 더 획기적인 조치는 출산 여성 노비의 남편에 대한 휴가 제도다.

당시에는 여성 노비가 출산을 해도 남편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었다. 아내가 출산휴가 중이라도 남편은 꼬박꼬박 군역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집을 비워야 했으니, 산후 몸조리를 해야 하는 여성 노비는 남편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세종 16년(1433) 4월, 이런 실정을 안타깝게 여기던 임금은 남편에게도 30일 간의 출산휴가를 주도록 조치했다. 왕조 시대에 이런 파격적인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세종의 국정철학과 원칙은 시대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사회체제상 조선의 군왕은 백성의 임금이기 전에 양반사대부의 대표자여서 반상의 신분제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철폐할 수는 없었다. 세종은 그런 한계 내에서 최대한 재량을 발휘하여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것이다. 형벌 제도 시행에서도 세종은 최대한 약자를 배려했다. 세종 19년(1437) 1월, 임금은 옥에 갇힌 죄수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개선을 지시했다.

정치범이 아닌 경우 옥에 갇히는 사람은 대개가 일반 백성이었다. 이들은 옥에서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얼어 죽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더러는 형리들의 가혹한 매질과 고문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임금은 투옥 중 죽음에 이른 죄수가 있으면 경중을 막론하고 위에 보고하도록 했다. 임금의 지시는 두루뭉술하지 않고 구체적이었다. 옥사한 죄인의 경우 옥에 갇힐 당시의 죄명과 병에 걸린 날짜, 병의 증세, 매질한 횟수, 죽은 날짜와 시간을 자세하게 공문서로 꾸며 형조를 거쳐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형식의 보고서를 하나의 매뉴얼로 만들어 철저하게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세종 2년(1420) 11월, 임금은 가벼운 죄를 짓고 옥에 갇힌 사람이 매질로 죽음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경범죄는 일체의 구타를 금지시키고, 일반 백성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지방 관리의 죄는 엄히 다스리도록 했다. 하지만 임금을 비방한 일반 백성의 죄는 불문에 부치도록 했다. 권력을 쥔 자들에게는 법을 엄중하게 적용했지만 일반 백성의 죄는 용서하고 아량을 베푼 것이다.

한편 세종은 의녀제도를 도입해서 남자 의사들에게 진찰을 꺼리는 여성을 각별하게 보살피기도 했다. 의녀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태종 6년(1406) 3월이었다. 지제생원사로 있던 허도가 제생원에 의녀제도를 도입하도록 건의했다. 태종은 허도의 제안에 따라 의녀제도를 도입했으며, 주관 부서를 제생원으로 지정했다. 세종 5년(1423), 한양에서만 제한적으로 시행되던 의녀제도를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허도가 건의하자 임금은 그대로 수용했다.

세종 시대에 베푼 양로연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세종의 원칙에서 볼 때 특기할 만하다. 임금은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해야 사회풍속이 바로 선다며 9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특별 관직과 봉작을 수여했다. 실직은 아니지만 명예직으로라도 벼슬을 내려 노인을 공경하는 풍속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천인에게는 90세를 넘기면 남녀 불문하고 무조건 쌀 두 석을 내렸으며, 100세를 넘기면 남녀 모두 천인 신분을 면하도록 했다. 태어날 때는 천인으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양인의 신분으로 죽도록 한 것이다. 여든 살 이상의 노인들을 위해서는 양로연을 베풀어 위로했다. 임금이 베푼 이 양로연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노인들이 참석했다. 양반이든 양인이든 천인이든 한 자리에 모여 임금이 내린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세종이 베푼 양로연은 이벤트성 행사가 아니라 노인을 공경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참석한 노인들은 다 진실로 감읍했다.

세종은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과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라는 생각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그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종은 노비나 여성, 죄수, 노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으로 배려하는 정책을 폈다. 하늘은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임금도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백성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 세종의 원칙이었다.

6장 훈민정음 창제의 원칙

반대론은 논박으로 응대하되 다만 무례를 처벌하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임금은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전격 발표했다.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 발칵 뒤집혔다. 멀쩡하게 잘 쓰고 있는 한자를 놔두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다니, 사대부들로서는 충격적이고도 괴이한 사건이었다. 양반사대부 계급의 대표인 임금이 계급의 이익을 지켜주기는커녕 해괴한 문자를 만들어 계급을 망하게 하려 하다니,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이때부터 조정의 여론은 둘로 갈린다.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같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은 임금이 창제한 훈민정음에 비교적 우호적 태도를 보인 반면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정창손 등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최만리 등은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최만리 등은 여섯 가지 근거를 들어 반대 이유를 밝힌다. 첫째는 훈민정음의 창제가 중국에 대한 사대의 관행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만일 중국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하면 큰 외교적 마찰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훈민정음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 조선이 스스로 오랑캐의 나라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예로부터 써내려오는 이두가 있는데 굳이 또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훈민정음을 이두와 함께 사용하면 조정이 이두를 쓰는 사람과 훈민정음을 쓰는 사람으로 나뉘어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는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말과 글을 일치시켜 소송에서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한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판결이 불공정한 것은 말과 글의 불일치 때문이 아니라 제도를 집행하는 관리들의 소양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섯째는 조정의 여론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국가적으로 볼 때도 시급한 과제가 아니므로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한창 성리학 공부에 열중해야 할 세자로 하여금 새로운 문자를 배우게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임금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이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논박한다.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문제는 언어학에 대한 이들의 이해 부족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킨다. 곁가지 문제보다는 보편타당한 학문적 이론을 내세워 이들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제압하겠다는 의도였다.

임금이 소를 보고, 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실록》 1444. 2. 20.

최만리 등이 이두를 관습적으로 사용해온 사실을 근거로 들면서 훈민정음에 반대하자 임금은 이두도 엄연히 남의 나라 글을 차용한 것인데 그 이두는 옳다 하고 임금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논박한 것이다. 특히, 임금이 하고자 하는 일을 그런 잣대로 반대하는 것은 군주에 대한 예에 어긋난다고 이들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임금은 최만리 등이 세자까지 끌어들여 훈민정음에 반대한 사실을 가리키면서 세자는 임금을 대신하는 자리이므로 엄연한 국정 과제인 문자 창제의 일에 참여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이들을 질책한다.

세종은 김문과 정창손 등의 언행불일치를 문제 삼아 상소를 올린 신하들의 집단행동에 쐐기를 박았다. 김문은 예전에는 훈민정음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 적이 있었고, 정창손은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는 별 다른 말이 없다가 그 후에는 태도를 바꿨다.

세종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향해서도 귀를 열었다. 자신을 소인이라고 지칭하면서 임금에게 대드는 고약해에게 언로는 터줬지만 군신관계에서의 지나친 무례는 엄중히 그 책임을 물었다. 임금은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린 신하들 가운데 주동자인 최만리를 비롯한 다른 신하들은 당일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다음날 바로 풀어주었다. 하지만 말을 바꾸어 임금을 능멸하려 한 자들만큼은 엄중히 책임을 물어 정창손은 파직하고, 김문은 의금부에서 국문하도록 했다.

7장 인간으로서의 원칙

정치에 희생된 가족의 비극을 부부 사랑으로 이겨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는 영의정을 지낸 심온의 딸이다. 열네 살이던 태종 8년(1408)에 두 살 아래인 충녕과 혼인하고, 충녕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심씨는 임금의 정비로 부부 금슬까지 좋았지만 그 생애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상왕 태종은 금상의 장인 심온을 영의정에 올리고 중국 사신으로 보내는 등 금상의 즉위 초기까지만 해도 예를 갖춰 대우했다. 하지만 심온이 사신으로 출발할 때 그를 전송하기 위해 도성거리를 메운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자 또 하나의 외척세력이 발호할 조짐으로 보고 그를 제거한다.

뚜렷한 증좌도 없고 명분도 약했지만 심온이 중국에서 귀국하는 길로 곧장 잡아들여 반역 음모의 수괴로 몰아 사사해 버린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지만 엄연히 정치 공작이었고,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행동이었다. 상왕은 심온을 사사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심씨의 친척들을 대거 죽이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노비를 만들어버렸다.

장인이 역적의 수괴로 몰려 죽고 장모가 노비로 떨어지는 등 처가가 쑥대밭이 되는 상황에서도 임금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임금에 오르긴 했지만 군왕의 권력은 여전히 상왕에게 있었다. 아버지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임금은 항의나 애원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했다. 자신의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시간을 견디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왕비가 폐출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조신들이 역적의 딸을 왕비 자리에 둘 수 없다며 폐비를 거듭 주청했지만 상왕은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했는데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냐”며 왕비만큼은 금상의 곁에 두었다. 아들 금상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외척 발호의 낌새를 풍긴 심온을 사사함으로써 정치적 환경을 깨끗하게 정리할 목적을 이룬 터에 더 이상의 분란으로 금상의 심기를 흔들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왕비 자리는 보전시켰지만 임금으로서 아내에 대한 마음의 빚이 컸다. 친정이 풍비박산 나는 중에 아내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잘 알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임금은 아내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임금은 아내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기라도 하듯 재위 기간 내내 살뜰하게 아내를 챙겼다. 왕가의 관례상 후궁을 여러 명 들이기는 했지만 임금의 마음에는 늘 왕후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흔한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았을 만큼 금슬이 좋았다.

조선 왕실에서 이들만큼 금슬 좋은 부부는 드물었다. 둘 사이에 열 명의 자식을 본 사실만으로도 그 금슬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왕후의 후덕한 심덕도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남편도 임금인지라 여러 후궁들을 들였지만 투기하기는커녕 싫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 임금은 물론이고 시아버지 상왕도 왕후가 덕으로 가화를 이뤘다고 칭송했다. 어쩌면 상왕이 심온 일가를 처형하면서도 굳이 며느리 심씨만은 감싸 보호한 것은 일찍이 그 후덕함을 알아본 때문인지도 모른다.

임금이 내자시 여종이던 신빈 김씨를 사랑해서 귀인에 봉했을 때도 왕후는 투기하는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세종 16년(1434)에 낳은 막내아들 영웅대군의 양육을 김씨에게 맡길 정도로 그녀를 존중하고 신뢰했다. 이런 국모를 신하들도 후하게 평가했다. 세종 28년(1446), 왕후가 52세로 세상을 뜨자 정인지는 최고의 헌사로 국모를 추모했다.

왕후를 여의고 나서 임금은 당뇨와 안질이 부쩍 악화되어 정사를 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느라 기력을 소진한 것이 지병을 악화시켰지만 평생의 반려였던 왕후의 빈자리가 너무 커 마음의 상처가 깊어진 탓이기도 했다. 왕후를 여의기 2년 전인 세종 26년(1444)에는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을 잃고, 이듬해에는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을 잃었는데, 거기에 아내의 죽음까지 겹치자 임금은 급격히 무너졌다. 재위 말년에 임금이 조신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궐내에 불당을 건립하고 불교에 마음을 의탁한 것도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왕후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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