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게 길을 묻다

숲에게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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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지음
비아북

책소개

생태경영 전문가인 저자가, 쫓고 쫓기며 오늘을 새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수억 년을 이어온 숲 속 생명들의 지혜와 생존 메시지를 들려주고자 쓴 책이다. 숲에 존재하는 왕성한 생명력, 절제, 상생, 순환, 휴식 등 인간 세상에도 적용할 수 있는 생존 패러다임을 통해 나만의 행복한 인생경영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요약본 본문

1막 태어나다 : 선택할 수 없는 삶,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생명_ 모든 생명은 자기답게 살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자연에는 학교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부르지 않아도 계절은 어김없이 매년 순환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생명은 모두 그 계절에 화답합니다. 그런 숲 생명들의 이 신비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언젠가 책을 보다가 일본에서 2,000년 동안이나 땅 속에 묻혀 있던 씨앗이 사람에게 발견되어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의 세월을 씨앗의 상태로 견디고 마침내 자신의 꽃을 피운 이 연꽃을 통해 우리는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그 씨앗 안에 담아두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른 예로, 강에서 나서 강을 떠나 바다로 향한 뒤,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와 산란하고 죽음을 맞는 연어의 삶은 더 극적입니다. 우리는 또한 철새들의 삶에서도 생명의 위대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 없이 대륙을 횡단하여 계절을 나고, 다시 제 살기 좋은 계절이 되면 이 땅으로 돌아오는 수많은 철새들이 보여주는 그 놀라운 방향감각과 귀소본능을 통해 우리는 날갯죽지의 고단함을 뛰어넘는 생명체의 번식과 생존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신은 생명체 모두에게 배우지 않고도 저다운 삶을 이룰 수 있는 씨앗을 주었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학교 공부와 자격증 공부 등을 통해 더 나은 삶에 필요한 기준과 자격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학교나 학원, 혹은 유명하다는 전략 강좌 따위에서는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도구만 얻었을 뿐, 나답게 나를 꽃피우며 사는 데 필요한 가르침은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숲을 거닐며 알게 되었습니다. 초목과 곤충과 새들이 어떻게 봄을 기억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 가는지, 연어는 어떻게 그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며 태어난 자리로 회귀하는지, 또 꽃이 어떻게 2,000년의 암흑을 견디고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인지……. 모두 저마다의 씨앗 안에 이미 담겨져 있는 힘으로 자신의 삶을 열고 이루어 가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나’로서 살고자 하는 이라면 ‘나’라는 씨앗 안에 이미 담겨 있는 놀라운 힘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 모두는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기 마련입니다. 신이 주신 ‘나’나 ‘그대’라는 씨앗이 어찌 도토리의 그것과 다르고, 연어의 그것과 다르고, 철새와 텃새의 그것과 다르겠습니까! 태어나는 모양과 자리와 시간이 다를 뿐, 생명 모두의 씨앗 속에는 자기 완결의 힘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학교와 학원의 교육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그 힘! 바로 생명 본래의 힘 말입니다.

숙명_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생명체는 모두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인간의 삶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잠들 때까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며, 나무는 스스로 선택하여 빛의 방향으로 잎과 가지를 키우고, 동물은 스스로 선택하여 먹이를 찾아 혹은 쉴 곳을 찾아 움직입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선택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 즉 ‘탄생’입니다.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날 수 있고, 자신이 나고 싶은 자리에 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 생명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생명체에 부여된 ‘탄생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바꿀 수 없는 관계들을 포함하여 ‘숙명(宿命)’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느 곳이건 숲은 숙명의 증거들로 지천입니다. 나무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머무는 이 숲에는 아주 특별한 수형을 지닌 소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는 여느 소나무처럼 곧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가지를 좌우로 거의 180도쯤 꺾고, 다시 전방으로 90도쯤 꺾은 채 자라는 모습입니다. 대략 20여 년쯤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제 어미 나무 아래에서 발아하여 처음에는 거의 온종일 햇살을 받을 수가 있었겠지만, 이 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어미 나무의 그림자가 생장에 큰 제약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 나무의 수형이 그토록 특별한 것은 빛을 찾아 이리저리 자신의 줄기를 꺾으며 삶을 계속한 고난과 투쟁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 대부분은 이 나무처럼 양분과 빛을 놓고 어미와 다투며 살아야 하는, 몹쓸 관계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종자를 자기로부터 멀리 내보내기 위해 큰 공을 들입니다. 그러니 어미 밑에서 발아한 이 나무는 무척 가혹한 숙명을 안고 태어난 셈입니다. 식물에게 숙명은 그런 것입니다. 씨앗은 오직 그 주어진 여건에서 발아를 통해 나무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나무처럼 부모의 몸을 빌려 어느 시간대에 태어나 그곳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힘겨운 자리에 태어난 억울함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도 오랫동안 그런 분노를 안고 살았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숲 속의 식물들이 각자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제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숲은 그 생명체들이 숙명을 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내 가슴을 차지했던 억울함을 씻어주었습니다.

2막 성장하다 : 내 모양을 만드는 삶,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꿈_ 나무에게는 빛, 사람에게는 꿈

나를 비롯한 숲 속 생명체들의 삶에 태양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특히 녹색식물은 늘 하늘을 우러르고 태양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햇빛 없이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과 이산화탄소를 섞어 당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빛의 마법이 섞이지 않으면 광합성은 결코 완결될 수 없고, 햇빛이 없다면 씨앗은 발아할 수조차 없습니다. 또한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며 겨울 채비에 나서는 것도, 다시 눈을 깨워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도 실은 대부분이 태양의 조화입니다. 결국 식물은 빛을 얻지 못하면 멸종할 것이고, 인류도 그와 함께 연쇄적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식물에게 빛이 절대자이듯, 인간에게도 빛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절대자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견지하는 빛, 그 빛을 우리는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고 우리를 고난에 맞서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됩니다. 반면 꿈을 상실한 사람은 어둠에 갇힌 사람이고 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며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식물은 매일 빛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공평하게 비추는 햇살을 생명 저마다의 처지와 환경에 맞게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도 그래야 합니다. 사람도 꿈을 좇아 살아야 행복의 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빛을 잃은 모든 생명이 그 순간부터 시들 듯이, 꿈을 잃은 사람도 그 순간부터 시듭니다. 서른 중반을 넘겼을 때, 나도 그렇게 내 삶의 빛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과제가 그 시절 삶의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내리 쬐는 햇살은 가득한데 내 영혼에는 한 가닥의 햇살도 닿지 못했습니다. 몇 년 뒤, 운 좋게도 나는 그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꿈을 모색하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쉽게 변하는 것보다는 잘 변하지 않는 것, 나 하나만을 살찌우는 것보다는 모두를 살찌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색하고 연구하기 시작하고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겪어보니 꿈을 품고 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를 닮은 꿈 하나는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이왕이면 간직하는 꿈이 자립적이고 호혜적인 것이면 더 좋겠습니다. 나무와 들풀의 꿈은 언제나 자립적입니다. 녹색식물은 지구를 순환하는 물 조금과 대기의 약 0.03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산화탄소 조금을 받아들인 후, 빛의 마법을 빌려 스스로 영양물질을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해온 생명체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토해내는 산소로, 또 그들이 생산한 각종 영양분으로 다른 생명들이 숨을 쉬고 밥을 먹습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꿈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들처럼 나답게 독립적으로 살면서도 그 삶이 세상을 더 맑고 아름답게 할 수만 있다면, 사람마다 이루어내는 세상은 얼마나 맑고, 눈부실까…… 생각하곤 합니다.

상처_ 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향기다
이 숲에는 ‘나를 닮은 나무’가 있습니다. 음나무입니다. 세간에서는 이 나무를 엄나무, 즉 엄목(嚴木)이라고 부릅니다. 이 나무의 잔가지에는 억세고 예리한 가시가 잔뜩 달려 있는데, 내가 이 음나무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 가시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20~30대의 나는 가시가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불합리와 불공평에 시비하며 걸핏하면 분노를 터뜨리고 싸움을 걸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상대는 나의 가시에 찔려 상처 입기 일쑤였습니다. 제 몸 가득 가시를 만들며 자라는 나무들에게 가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나무들이 만드는 가시는 대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오래 자란 나무보다 어린 나무일수록 가시는 도드라집니다. 꺾이고 부러지기 쉬운 어린 나무는 줄기를 잃으면 자칫 자신의 앞길 전체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동물의 접근이 무척 두려웠을 테지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가시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강력한 방어 수단인 것입니다.

나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직 세상의 불합리에 맞설 힘은 갖추지 못했는데,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은 많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부딪힐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상처였고, 정의라고 믿은 것을 향해 뻗었던 가지들은 하나둘 부러져 나뒹굴었습니다. 그렇게 좌절하면서 나 또한 뾰족한 가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내게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숲을 이불 삼아 살겠다며 산을 오르내리던 어느 날 가시가 돋아 있는 두릅나무를 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문득 그 나무에 왜 가시가 돋아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방어 수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나무들에게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 가시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물들에게 쉬이 꺾이지 않을 만큼 자신의 줄기를 살찌웠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동안 키워온 가시를 떨어뜨렸고, 가시가 있던 자리는 말끔하게 껍질로 덮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가시를 달고 있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응축된 에너지를 쏟아낸다는 의미이며, 가시를 다는 것이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라면, 가시를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키를 키우고 줄기를 살찌우는 것은 자기 성장의 에너지라는 것을. 평생 가시를 달고 사는 삶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불편하고 힘겹고 측은할 뿐입니다. 시인 정호승 선생은 “풀잎에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면서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들고,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면, 누군가 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모습이며 그다운 향기입니다.

경쟁_ 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만 그 빛이 숲에 사는 식물에게 골고루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공간을 나눈 식물들은 빛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습니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키가 크면 큰 대로 나무들 또한 빛과 양분을 다투며 살아갑니다. 생장의 계절에 숲에 들어가 나무와 들풀을 관찰하다 보면, ‘숲도 온통 경쟁으로 그득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쩌면 경쟁은 생명체에게 내린, 신의 형벌이거나 위대한 계획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이렇듯 경쟁이 하나의 자연법칙이라면, 다시 말해 다투며 사는 것이, 신에게 부여받은 생명체의 명(命)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경쟁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해야 할까요? 나는 이 답을 숲의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경쟁의 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숲의 생명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벌이는 경쟁은 우리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와 풀들에게 경쟁이란 무엇보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한 투쟁입니다. 즉 수많은 이웃의 욕망이 충돌하는 수직의 공간에서 자기의 하늘을 확보할 힘을 갖는 것입니다. 이는 타자의 공간을 빼앗기 위한 경쟁이라기보다는, 비어 있는 공간 속에 나의 존재 기반을 만들어내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을 키우고 변화시키는 경쟁인 것입니다. 이것은 차라리 자신과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울창한 숲 속에서 발아한 어떤 신갈나무는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빛을 받기 위해 제 잎을 거의 오동잎만큼이나 크게 키웠고, 단풍나무는 빛을 얻기 위해 다른 나무의 가지를 피해 허리를 꺾고 줄기를 뒤틀면서 가지를 뻗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재편하고 그에 몰두한 결과입니다.

이렇듯,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자신이 꽃피울 장소와 시간을 찾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보여주는 경쟁의 정수입니다. 그리고 그 경쟁을 통해 생태계는 더 견고하게 연결되고 물질은 막힘없이 흐르며 순환하게 됩니다. 창조주의 위대함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경쟁은 창조주의 뜻과 너무 다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익을 빼앗고 누르는 것으로 승리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배우면서,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경쟁이 아닙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올바른 경쟁의 자세는 숲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며, 타자를 파괴하여 내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숲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3막 나로서 살다 : 나를 실현하는 삶, 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_ 따로 또 같이, 사랑하려면 혼인목과 연리목처럼

프레데릭 베그베데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 『3년: 사랑의 유효기간』에서 이성 간에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을 넘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오늘날 우리 곁에 이별이 늘어났다는 증거는 충분해 보입니다. 이별은 지독한 상실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지혜 앞에 무릎을 꿇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나무들은 어떨까요? 여기 나무들이 나누는 참된 사랑법을 소개합니다. 숲에 사는 나무들은 옮겨 다닐 수가 없는 처지이니 별다른 사건이 없는 한 옆자리에 함께 자라는 나무와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빛이 쏟아지는 하늘도, 양분을 흡수할 땅도, 서로의 가지와 가지가 만나는 수직의 공간도 서로 나눠야 합니다. 하지만 숲에는 그 한계를 놀라운 관계로 승화하여 우리 인간들을 꾸짖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우선 연리목이라고 불리는 나무들이 좋은 예입니다. 연리목은 나무와 나무가 맞닿아 더 이상 비켜 설 곳이 없을 때 서로의 장벽인 껍질을 벗고 세포와 세포를 합쳐 새로운 껍질을 만들어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로 합일한 것을 일컫습니다. 세분하여 가지와 가지가 합일한 나무를 연리지(連理枝), 줄기와 줄기가 합일한 나무를 연리목(連理木)이라고 부르는데, 세포가 합쳐져야 하므로, 서로 같은 종이어야만 합니다. 이들의 사랑은 살을 에는 아픔을 딛고 이룩하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수백 년을 거쳐 이루게 되는 참으로 깊고 위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옆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나의 몸과 마음을 열고 세포의 칸막이까지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연리목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연리목의 사랑이 너무 귀하여 흔하지 않다면, 혼인목의 사랑법은 조금 더 대중적입니다. 혼인목이란 서로 같거나 다른 종류의 나무 두 그루가 한 공간에서 자라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 모양을 만들어갈 때 그 한 쌍의 나무에게 붙여주는 이름입니다. 혼인목의 사랑은 옆의 나무로 향하는 날선 가지를 떨어뜨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360도로 돌아가며 뻗는 나뭇가지 중 그에게로 향한 모든 가지를 하나, 둘 떨어뜨리는 것으로 ‘그에게 그늘을 만들지 않으려는 사랑’입니다. 즉 그들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욕망을 덜어내어 완성되는 사랑인데,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보는 과정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숲에는 옛날에도 지금도 혼인목과 연리목의 사랑이 크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숲에도 그들의 사랑을 닮은 시류가 조금씩 복원되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자식_ 품 안에 둘 것인가? 멀리 떠나보낼 것인가?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애틋해지기 마련입니다. 자식이 조금 더 잘살 수 있게 해 주려고, 부모는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하고,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년이 된 자식의 삶까지도 배려하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지만, 도가 지나칠 경우 부모의 삶이나 자식의 삶이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숲에 사는 생명들은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기 감동적인 한 편의 사례가 있습니다. 지난해에 섬진강변에서 ‘큰오색딱따구리’를 50일간 관찰하고 사진과 기록, 그리고 이야기로 담아 펴낸 김성호 교수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큰오색딱따구리 한 쌍이 짝을 짓고, 알을 낳아 기르고, 새끼를 떠나보내기까지의 아름답고도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옮겨 보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큰오색딱따구리 한 쌍이 부지런히 새끼를 키울 둥지를 만듭니다. 드디어 둥지가 완성되고, 아내가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으면 새의 가슴털이 동그랗게 빠지는데, 혈관이 집중되어 있는 가슴을 드러냄으로써 더 따뜻한 체온으로 알을 품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깃털이 빠진 부분을 포란반(抱卵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자식을 알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한 부모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부부는 교대로 알을 품고, 드디어 깨어난 새끼들에게 쉼 없이 먹이를 물어다 먹입니다.

자식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오색딱따구리 부부는 자식들과의 이별을 준비합니다. 그들의 이별 준비는 애틋하면서도 냉정하고 또한 단호합니다. 부모 새는 우선 먹이를 주는 횟수를 줄이고, 둥지 안에서 주던 먹이를 둥지 바깥으로 유인해서 줍니다. 바깥 세계와 홀로서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부모 새는 새끼들에게 스스로 날아 먹이를 잡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부모가 더 이상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새끼들은 결국 자신의 날개를 펴고 둥지를 떠납니다. 이것으로 새끼는 자신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부모 새는 혹시 남아 있는 새끼가 있는지 둥지 주위를 한참 둘러본 후에야, 자신들도 숲으로 사라집니다. 이 부부 새의 자식 사랑이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어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자식이 스스로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새끼가 홀로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초목들의 자식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들도 모두 자식을 더 멀리 떠나보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단풍나무는 열매에 프로펠러 모양의 날개를 달아 더 멀리 떠나보내려 하고, 소나무는 그 씨앗이 발아래에 떨어질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그리고 실개천 옆 고마리는 물길에 실어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려 합니다. 이렇듯 자연은 자신의 새끼나 씨앗을 발아래 두려 하지 않습니다. 품을 떠나보내지 못한 새끼는 무서운 맹수나 맹금류를 피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위태로울 것이고, 부모의 발아래에서 발아한 씨앗은 결국 부모의 그늘에 살면서 부모와 햇빛을 나누고 양분을 다퉈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스스로 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어찌 참다운 사랑이겠습니까?

휴식_ 결실을 위한 에너지와 창조의 힘
이곳 오두막에서 지내는 나의 하루는 철저히 해의 길이를 따릅니다. 해가 뜨면 하루의 삶이 열리고 해가 지면 하루의 삶이 닫힙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들의 하루와 같습니다. 낮은 노동과 창조의 시간이고, 밤은 휴식의 시간입니다. 나무들의 노동은 인간의 노동만큼 치열합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노동에 철저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창조해갑니다. 해가 뜨면 이곳에서 나의 눈이 저절로 떠지듯, 잎의 세포들도 자동적으로 노동을 향한 기지개를 켭니다. 땅 속 뿌리로부터 시작한 물은 줄기와 가지를 타고 오르기 시작합니다. 잎의 구석구석으로 연결된 잎맥을 타고 물은 마침내 햇살을 맞이합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하루의 노동을 시작하고, 자신의 키를 키우고, 매일매일 자라서 자신의 하늘을 엽니다. 해가 지면 거의 모든 나무들이 노동을 닫고 휴식에 들어갑니다. 팽팽하게 끌어올렸던 물줄기의 행진을 풀어 내리고, 꼿꼿하게 세웠던 잎의 긴장도 편안한 이완으로 빠져듭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나무가 노동과 휴식을 철저히 자연의 흐름에 맞춤으로써, 지구상에서 가장 유구하고 장대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눈에 이것은 철저하게 ‘지금’을 살아가는 지혜를 익힌 자들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미래를 걱정하여 밤을 지새우지도 않고,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불면하지도 않으며, 부질없는 욕망에 휘둘려 밤을 배회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순간에 순간을 더하여 지금에 충실할 뿐입니다. 한편, 선인장처럼 사막을 견디는 다육식물(多肉植物)을 CAM식물군이라고 부릅니다. CAM식물은 이 숲의 식물들이 낮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빛과 물을 버무려 광합성을 하는 것과는 달리, 밤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저장했다가 낮에 빛을 버무려 밥을 만듭니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 낮에 기공을 열면 공기가 너무 뜨거워 도리어 자기 몸의 수분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이 밤낮없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사막이라는 척박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자유가 있어야 마음 놓고 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미래를 위해 편히 잠들 수 없고 노동을 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스스로 사막 위에 놓는 것과 같습니다. 노동과 휴식을 잘 구분하고, 순간순간 그것에 철저해짐으로써 나의 삶을 깨우고 내 주변과 훈훈함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도시에는 욕망이 넘쳐납니다. 많은 이들이 그 과도한 욕망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고단한 CAM식물의 삶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지나친 욕망과 노동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휴식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고, 내 가까운 인연들과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일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에게 휴식이야말로 우리 삶에 새로운 가치와 차원을 더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스스로의 삶에 자율성을 더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4막 돌아가다 : 다시 태어나는 삶,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환_ 천지에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의 별 지구에서 나와 그대가 살고, 또한 다른 생명들이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수많은 생명 부양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살아 있어 빛이 감돌아야 하고, 물이 흘러 생명을 적셔야 하는 것처럼,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존재들이 매일매일 서로 관계를 맺고 작동함으로써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그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리 하나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순환의 원리’를 꼽겠습니다. 천지에 순환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순환의 원리와 질서 속에서만 모든 생명의 삶이 부양되고 존속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생명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물질들 또한 끝없이 순환합니다. 아주 긴 시간을 거쳐 바위는 돌이 되고, 모래가 되고,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자신의 길을 걷다가, 다시 바위로 굳어지고 나뉘기를 반복합니다. 생물들의 똥조차 땅을 거쳐 풀과 나무들, 딱정벌레들, 그리고 우리 농부들에게까지 귀중한 선물로 탈바꿈하며 생명체를 살찌웁니다. 이렇듯 물질의 순환은 지구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입니다. 즉, 지구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 생태계인 셈입니다. 만물의 순환이야말로 지구가 푸른빛을 띤 아름다운 별일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원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우리의 삶도 순환할까요? 사람과 나무와 풀의 죽음을 만날 때마다 나는 신이 삶의 끝자락에 죽음을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죽음은 순환이 아닌 삶의 종식을 위해 마련된 절차일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잘 살라고 마련된 장치입니다. 신이 한 생명에게 두 번의 삶을 주지 않은 까닭은 살아 있는 시간에 충실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는 뜻이겠지요. 초목이 초목답게 열심히 살아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산소를 만들고, 수많은 생명들이 기댈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듯이,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 그것으로 후회가 없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있음’에 부여한 신의 소명입니다. 죽음 또한 그러합니다. 모든 죽음에는 새로운 소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목이 그 시신을 통해 이끼를 키우고 애벌레를 키우고 새를 키우고, 마침내 흙으로 되돌아가서 산 생명의 영양분이 되듯이 우리 사람의 주검도 미련 없는 흙이 되어 이 푸른 별의 생명을 부양해야 합니다. 순환이 멈춘 자리에서 생명도 멈춥니다.

죽음_ 두려워할 일은 죽음이 아니다

내가 이 산중에 오두막을 짓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나는 일흔이 가까운 어르신 한 분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맑고 선한 눈에 은발이 성성한 어르신은 뵐 때마다 항상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오두막 옆에 있는 산비탈 밭을 직접 개간하고 50년 넘게 경작하셨습니다. 어르신은 낡은 경운기를 몰고 이곳까지 올라오시는데, 항상 옆자리에는 아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두 분의 모습이 얼마나 다정한지, 뵐 때마다 연리목의 사랑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혼자 끙끙대며 일을 하고 있을 때면 조용히 옆에 오셔서 도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면, 어느새 나타나 손길을 내밀곤 하셨습니다. 어르신은 늘 평화로운 분이였습니다. 그분은 걸음걸이에서조차 평화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렇게 어르신의 삶을 존경하는 마음이 커져갈 무렵 나는 오두막에 입주했습니다. 마루에 서서 이 숲의 가을빛에 감탄하고 있는데, 어르신이 경운기를 타고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오늘따라 옆자리에는 부인이 없었습니다. 어르신은 처음으로 혼자였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차 한 잔을 권했습니다. 어르신은 나의 오두막이 완성된 것을 축하해주셨습니다. 이날 어르신은 평소와 약간 달랐습니다. 수줍음 많고 과묵하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어르신은 당신의 지난날에 대해 조곤조곤 들려주셨고, 평생 농사를 지으신 당신의 삶에 관한 소회도 들려주셨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농사로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하면 울화가 치밀어서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저 농사짓는 일이 하늘이 내게 주신 천직이려니 생각하고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았어요. 이곳에서 매일매일 저 아름다운 풍경과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고 사는 댁이 참 부럽네요. 나도 저 밭에 집을 짓고 이웃해서 살고 싶을 만큼 부러워요.” 차를 다 마신 뒤, 어르신은 평화로운 걸음으로 밭을 둘러보셨습니다.

다음 날 저녁, 서울에 갈 일이 있어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랫마을에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두막 옆에 밭, 노씨 어르신이 돌아가셨소.” 믿기지 않았습니다. 전날 그토록 건강한 모습으로 이곳을 찾으셔서 기쁘게 환담까지 나눈 분이 돌아가셨다니! 어르신은 나와 헤어진 그날 밤, 잠자리에 드셨다가 영영 일어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의 부인과 자제들이 당신의 무덤을 내 오두막 옆에 쓰고 싶어한다고 했습니다.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나의 공간 옆에 무덤이 들어선다는 것이 찜찜하기도 하고 언짢기도 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어르신과의 인연을 되짚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부끄러워졌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오두막 옆에 묘를 쓰겠다는 가족들에 대해서는 불쾌한 마음을 가졌던 내가 부끄러워서 어디든 숨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얼른 반성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어르신은 지금 살아서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룬 채 내 오두막 옆에 누워 계십니다. 지금도 가끔 어르신이 계신 곳에 들러 잠시 서 있다가 내려오곤 합니다. 그곳에 서면 생전에 그토록 보기 좋았던 당신 모습이 더욱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후 어르신의 자제와 친척들은 객지에 살면서도 자주 어르신의 무덤을 찾아 살뜰하게 보살피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삶으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어르신은 삶의 마지막 날, 자신이 평생 기대어 살았던 땅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묻혔고, 지금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말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살아냈을 뿐입니다.

어르신의 삶과 죽음은 마치 이 숲에서 살다 떠나는 나무의 그것을 닮았습니다. 이 숲의 한쪽에서 긴 시간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고는, 그 자리에 선 채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 그분도 나무와 같이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부양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나무도 그분도 모두 흙의 영양분에 기대어 삶을 이을 수 있었기에 다시 흙이 됨으로써 그 빚을 되갚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자기 자신의 완전한 소멸이거나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죽음은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마땅한 길을 걸어 삶의 끝에 도착한 이에게 삶은 결코 미련으로 남지 않을 것이며, 죽음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내 오두막 옆에 잠든 어르신이 보여준 것처럼 죽음은, 우리가 빚을 졌던 이 별로 고요히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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