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파이 플레이

비즈니스북스 / 2020년 11월 / 400쪽 / 18,000원

스포티파이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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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파이 플레이

스벤 칼손, 요나스 레이욘휘부드 지음

저자 소개

스벤 칼손: ­ 영국 노팅엄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스쿨에서 석사를 받았다. 이후 세계 3대 방송통신사 중 하나인 AFP와 스웨덴 유력 일간지인〈스벤스카 다그블라뎃〉에서 경제부 기자로 일했으며 스웨덴 국영 라디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스타트업과 새로운 IT 기술에 대한 발 빠른 취재와 탁월한 분석으로 유명세를 얻었으며 현재 스웨덴 최고의 경제지로 선정된〈다겐스 인두스트리〉의 경제부 기자다. 요나스 레이욘휘부드: ­ 미국 애리조나대학교 미디어학과 졸업 후 1998년부터 기자로 활동 중이다.〈스벤스카 다그블라뎃〉의 경제부 기자로 근무하며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 스포티파이 공동 창업자 마르틴 로렌손 등 세계적인 기업가 다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업 비즈니스의 핵심을 꿰뚫는 날카롭고 분석적인 기사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스웨덴의 최대 일간지인〈다겐스 뉘헤테르〉를 거쳐스웨덴의 TV 방송국 TV8, TV4에서 일했다.현재〈다겐스인두스트리〉의 경제부 기자다.

책소개

이 책은 스포티파이의 시작부터 꿈에 그리던 월스트리트 상장까지, 스포티파이가 어떻게 끊임없이 혁신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소개한다.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인 저자들은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스포티파이의 성공 비결로 빅데이터를 통한 큐레이션, 애자일 조직 문화, 소셜 네트워크로의 영역 확장 등 스포티파이만의 비즈니스 모델과 기업 철학을 제시한다.

요약본 본문

시작 ­ 음악을 해방시킨다는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노동자들의 도시 록스베드의 컴퓨터 신동

다니엘 에크는 스톨홀름 외곽의 록스베드에서 성장했다. 에크는 청소년 시절에 지역 밴드 몇 곳에서 활동했는데, 음악에서 뛰어났던 그가 더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컴퓨터였다. 그는 9세부터 코딩을 시작했고, 11세 때 이렇게 말했다. “난 빌 게이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거예요!” 이후 에크는 동네 레크리에이션 센터장인 리키가 컴퓨터를 설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자신이 이런 일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점차 동네에서 가장 어린 IT 개발자가 되어 갔다.

중학생 때부터 프로그래밍으로 돈을 벌다 / 파일 공유 서비스, 냅스터의 충격: 점차 록스베드에서는 홈페이지를 만들 때면 다들 에크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 홈페이지에 누군가 방문할 때마다 숫자가 매겨지는 계산기를 프로그래밍해 놓았는데, 얼마 뒤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그 계산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9년 에크는 록스베드 중학교를 졸업하고, 순드뷔베리의 IT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1학년일 때 냅스터가 세상에 나왔는데, 그는 문득 집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전 세계의 음악을 무료로 다운로드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이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종교와 같은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때 그는 “냅스터는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인터넷 서비스일 거야.”라는 기록을 남겼다.

구글에 이력서를 보낸 16세 에크: 16세가 된 에크는 구글에 이력서를 보냈다. 구글에서는 이력서를 보내주어서 고맙다면서 졸업하고 난 뒤에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구글의 답변에 에크는 자신만의 검색 엔진을 만드는 시도를 했다. 2학년이 된 에크는 거의 전업으로 일했다. 인터넷 컨설팅사이자 포털 사이트인 스프레이의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경매 사이트인 트라데라에서 임시직 기술 담당 이사로서 일하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IT 컨설턴트로 일하며 자신의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닷컴 버블의 붕괴와 아이튠즈의 탄생

다니엘 에크와의 인연의 시작: 에크는 구글과 어깨를 견주는 무언가를 개발하고 싶었으나, 일단 야이야(Jajja)라는 인터넷 기업에 일자리를 구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야이야의 고객은 인터넷 검색 결과에서 자신의 기업이 가장 상위에 보이기를 원했는데, 에크는 이 업무에 그다지 매력을 못 느꼈지만 일 처리는 잘했다. 한편 직장 일과는 별개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록스베드에 있는 어머니의 옛 아파트에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후 에크가 22세가 되었을 때 어느 투자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가상의 아바타에 옷을 입히는 사이트가 있는데 기술 담당 이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에크는 2005년 가을 어느 날 스타돌의 회장인 마티아스 미크셰를 만나게 된다.

비밀스러운 창업 아이디어

창업자들의 첫 만남: 2003년 3월에 IT 거품이 꺼지고 난 뒤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마르틴 로렌손은 펠릭스 항외와 동업으로 트레이드더블로(Tradedoubler)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는 제휴 마케팅을 중점으로 하는 곳으로 반(半)자동 광고를 판매했다. 트레이드더블러의 소프트웨어는 소비자의 행위를 따라가며 광고주는 노출 결과에 따라 광고비를 지불했다. 에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이 지난 2005년이었는데, 에크 역시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에크는 애드버티고(Advertigo)라고 명명한 서비스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몇 명의 프로그래머에게 맡겼는데, 이 시스템은 광고주가 의뢰한 광고에 가장 적합한 온라인 배너 자리를 찾아 주었다. 에크는 이 사업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트레이드더블러 본사를 찾았고, 에크와 로렌손은 이때 처음 만났다. 14세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은 거침없이 대화했고, 더 친해졌다. 이후 에크는 P2P 기술을 활용한 사업 아이디어를 그와 공유했고 로렌손은 이를 현실화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다른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로렌손이 트레이드더블러를 상장시켜 주식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야만 했다.

프로그래머로 재능을 꽃피우다: 마티아스 미크셰와의 면접 인터뷰를 치른 몇 달 뒤, 에크는 스타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그의 훌륭한 작업 덕분에 스타돌의 이용자는 가파르게 증가했고, 몇 달 만에 스타돌은 10~17세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큰 인터넷 쇼핑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기 시작했으며, 미크셰는 갑자기 스톡홀름에서 가장 잘나가는 스타트업 기업인이 되었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성공에도 에크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새로운 사업을 할 궁리를 했다. 뜻을 모은 동료들 가운데는 27세의 사업 발전 담당 이사인 헨릭 토스텐손, 예술 감독 크리스티안 빌손이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에크가 데려가고 싶었던 동료는 비상한 프로그래머인 안드레아스 엔이었다.

본격적인 창업 준비 / 천재 개발자 엔의 합류: 2005년 11월 8일 트레이드더블러의 주식이 스톡홀름에서 거래되기 시작했고, 로렌손은 9,600만 크로나(약 125억 원)어치의 주식을 팔았다. 항외는 지분을 두 배 더 소유했기에 대박이 났다. 얼마 뒤 에크와 로렌손은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기업명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고 ‘스포티파이’라고 지었다. 그 후 항외도 에크와 로렌손의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새 회사의 공동 소유주가 되기로 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에크와 로렌손은 2006년 4월 1일에 스포티파이를 설립했고 두 사람은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이후 에크는 스타돌의 후임자인 엔을 찾아가 스포티파이와 함께하자고 했고, 그렇게 엔은 스포티파이의 첫 번째 기술 담당 이사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기술로 실현시키다

뮤토렌트를 만든 토렌트 기술의 1인자: 스포티파이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첫째는 로렌손의 경험과 대자본, 둘째는 사업에 대한 에크의 통찰력, 셋째는 스웨덴 최고의 개발자들을 모은 엔의 능력이었다. 자신들의 새 출발을 축하하려는 자리에서 에크와 로렌손은 음악 그리고 어쩌면 영상의 유통이 가능한 토렌트에 기반한 법적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고 설명했는데, 당시 스웨덴에서 토렌트 기술의 1인자는 루드비히 스트리게우스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파일 공유 프로그램 중 하나인 뮤토렌트를 직접 만든 25세의 해커였다. 로렌손은 고향 출신 사업가 니클라스 이바손(ATI의 유럽 지사장)에게 부탁하여 스트리게우스를 만나는데 성공했고, 에크와 로렌손은 높은 액수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뮤토렌트를 팔라고 제안했다. 한편 뮤토렌트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 국적의 구애자들이 있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마침내 스트리게우스는 스포티파이를 선택했다.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 스웨덴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2006년 10월 중순에 모든 거래가 완료되었다. 스포티파이는 스트리게우스에게 현금과 주식을 지불했고, 스트리게우스는 스포티파이의 네 번째 소유주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스포티파이로 직장을 옮겼다. 이후 이바손은 ATI를 떠나 스포티파이와 함께했는데, 이후 그는 음반사와의 절망적인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뮤토렌트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스포티파이가 스트리밍 기업을 만들어 나가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버퍼링 없는 플레이어를 향한 도전: 에크가 엔에게 전달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스포티파이의 플레이어는 번개처럼 빨라야 하고. 시장의 다른 서비스들처럼 해킹당해서도 안 되며, 음악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흘러야 한다.’ 플레이어는 토렌트 기술에 기반해야 했다. 사용자가 음악을 들을 때 노래 파일을 조각내어 네트워크로 접속된 컴퓨터들에서 한꺼번에 다운받게 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스포티파이는 파이러트 베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아티스트와 음반사에 광고 수익을 배분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스포티파이 웹 사이트에는 초창기부터 “우리 서비스는 광고 수익으로 운영되므로 사용자 여러분은 어떤 비용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공지가 있었다.

베타 버전이 출시되다: 2007년 3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첫 번째 계정을 등록하라는 창이 뜨자 엔은 스포티파이의 첫 번째 계정을 갖게 되었다. 곧이어 더 많은 계정이 스포티파이에 만들어졌다. 이후 마케팅 담당 이사인 소피아 벤츠가 광고라든지 언론사 홍보를 맡아 진행했다. 스포티파이는 음악 마니아들을 공략하게 설계되었다. 음악을 찾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수 있었고, 아티스트와 앨범을 따로 분리하거나 아티스트와 앨범을 한꺼번에 볼 수도 있었다. 음악은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재생되었고 컴퓨터의 캐시 메모리에 암호화되어 저장되었다. 사용자는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음악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파일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2007년 4월에 드디어 스포티파이의 베타 버전이 출시되었다.

스포티파이, 드디어 투자를 받다

2007년 6월에 에크는 투자사들에게 제품을 보여 주기 위해 에센셜웹 콘퍼런스가 열리는 런던으로 갔다. 콘퍼런스가 종료된 이틀 뒤, 애플은 최초의 아이폰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스포티파이는 아직 베타 버전에 불과했고, 오로지 데스크톱에서만 존재했다. 한편 고향인 스톡홀름에서는 로렌손이 재원을 백방으로 구했다. 패르손(한때 로렌손이 근무했던 셀 벤처스의 사장)도 무진 애를 썼다. 다행히 여름에 네 개의 대형 음반사 가운데 두 개가 북유럽 지역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저작권을 주는 데 동의했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8년 8월 27일, 스포티파이는 룩셈부르크에서 이른바 A라운드로 등록되었다. 노스존은 8천만 크로나(약 105억 원)가 넘는 자금을 투자해서 에크와 로렌손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스포티파이의 소유주가 되었다. 크리앤둠은 네 번째, 바로 그다음은 항외였다. 스포티파이 전체는 5억 4,900만 크로나(약 720억 원)로 평가되었다.

경쟁 ­ 애플과의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되다

모든 음악이 무료인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 애플을 흔들다: 2008년 10월 7일에 마케팅 담당 이사인 벤츠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기자들에게 전달하고 전화를 돌렸다. 스포티파이가 출시되었으며 매달 99크로나(약 1만 3,000원)를 지불하면 프리미엄 계정을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0월 말에 스웨덴 일간지〈다겐스 뉘헤테르〉의 취재에 응하며 로렌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린 시장에서 최고의 뮤직 플레이어가 되고 싶습니다. 2년이나 3년 안에 2천만 명이 이용하게 될 겁니다.” 사실 스포티파이가 이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는 꼬박 4년이 걸렸다. 로렌손은 인터뷰를 하면서 스포티파이가 무료 서비스라서 불같이 성장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스포티파이는 2008년 스웨덴에서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2009년에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모바일 앱으로 언제 어디서든 / 애플 앱 스토어의 승인이 통과된 밤: 스포티파이가 정식으로 출시된 다음 에크는 이제 모바일 앱을 개발할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 프로젝트를 이끌 적임자는 구스타브 쇠데스트룀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는 에크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참고로 스포티파이의 경쟁사가 이미 모바일 스트리밍(노키아는 ‘음악을 갖춘 노키아’, 소니 에릭손은 ‘플레이 나우 아레나’)을 제공 중이었다. 그러나 에크의 경쟁 상대는 그들이 아니었다. 그는 애플과 경쟁하고 싶었다. 아이팟이 기능하는 곳에서 스포티파이의 모바일 앱이 기능하게 하고 싶었다. 마침내 2009년 7월말에 스포티파이는 애플 스토어에 스포티파이 모바일 앱의 승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8월의 어느 날 늦은 저녁, 애플 앱 스토어의 승인이 통과되었다. 이 내용은 8월 27일 세상에 공식화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계속되는 방해 공작

성공하기 위해 에크는 경쟁사들을 따돌려야만 했고, 미국에서 성공해야 했고,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세게 최고가 되어야 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스포티파이는 즉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에크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음반사와 투자자들도, 또한 잡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플은 몇몇 유럽 국가의 애플 스토어에 스포티파이의 앱을 등록해 주었다. 그러나 에크가 미국에서 음악 저작권을 해결하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음악 업계에서 돌자 잡스는 방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왜 여러분의 음악을 무료로 줘 버리려고 하죠?” 잡스는 음반 업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저작권 합의 / 뉴욕에서 오지 않는 계약서: 2010년에 에크는 미국 시장의 음원 저작권 협상 건으로 주기적으로 뉴욕을 찾았다. 그의 목표는 유니버설 뮤직과 소니 뮤직이 함께 서명하게 하는 것과 워너 뮤직도 어떻게든 그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었다. EMI는 이미 합류한 상태였는데, 거대 음반사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더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2011년 1월에 스포티파이가 소니 뮤직과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첫 번째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한편 유니버설 뮤직과의 협상도 끝난 것처럼 보였다. 2010년 말 콘텐츠 관리 담당 이사인 파크스와 그의 팀은 뉴욕에서 음반사 대표단과 함께 계약서를 준비했다. 유니버설 뮤직 회장인 모리스가 그 조건을 승인했다고 했고, 몇 개의 서명만 하면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잡스, 유니버설 뮤직을 압박하다: 유니버설 뮤직의 갑작스런 침묵은 그 뒤에 있는 소위 레이블이라고 불리는 수없이 크고 작은 음반사 그룹들이 사분오열된 사정이 있었다. 그 그룹들은 한데 뭉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잡스는 음반사 대표들에게 자주 연락을 했는데, 그들과의 대화에서 잡스는 스포티파이의 무료 계정이 음반사에 위협이 될 거라고 묘사했다. 상황상 애플이 아이튠즈의 새로운 클라우드 서비스를 세상에 소개할 때까지 잡스는 적어도 스포티파이의 미국 출시를 지연시키기를 원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스포티파이는 2011년 중반에야 미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과는 협력을, 비츠와는 경쟁을

페이스북에 스포티파이를 입히다: 2011년 9월 22일 매년 페이스북이 개최하는 개발자 콘퍼런스인 F8 동안 저커버그는 넷플릭스, 훌루 그리고 스포티파이와 같은 기업과의 협력 현황을 소개했다. 한 시간여의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듣는 것이 이제 얼마나 간단해졌는지를 보여 주었다. 별도로 스포티파이를 열거나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전부가 페이스북에서 한 번의 클릭으로 가능했다. 스포티파이는 미국에서 페이스북 덕분에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렸다. 2011년 3월에서 11월 사이에 스포티파이의 유료 계정 사용자는 100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1년 안에 스포티파이의 가치는 세 배로 뛰었다.

비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2011년 가을, 스톡홀름에 비츠의 공동 창업자며 유니버설 뮤직의 우두머리인 아이오빈이 운영 총괄 사장인 루크 우드와 몇 명의 직원을 대동하여 왔다. 그들은 새롭고 비밀스러운 스트리밍 서비스의 전문가들과 회합하려고 스톡홀름에 왔다. 참고로 비츠는 당시 미국 대중문화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엄청난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헤드폰을 팔고 있었는데, 음악 업계에서 아이오빈의 지위는 계속 성장해 왔다. 아이오빈은 지금이 스포티파이를 도발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장의 틈새를 보았다. 음악 업계에 뿌리를 둔 스트리밍 서비스 가운데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는 것은 없었다. 2010년이기는 해도 MTV와 유사한 집결지를 건설하고 싶었다. 그들의 가이드는 3년 전에 페이스메이커를 선보이려 아이오빈을 만났던 사스였다.

휴먼 큐레이션에 집중하다: 사스는 큰 스크린에 자신의 노트북을 연결해서 자신이 ‘비츠 오디오 네트워크’라고 이름 붙인 서비스를 프레젠테이션했다. 설명은 아이오빈의 취향에 맞추어 준비했다. 그리고 사스는 비츠를 미디어 기업으로 생각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채널, 프로그램, 프로필을 갖추고 ‘휴먼 큐레이션’에 집중해야 한다고도 했다. 휴먼 큐레이션이란 사람이 직접 곡들을 선별하여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것을 뜻했다. 아이오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목표는 스포티파이의 경쟁 상대를 최대한 빨리 시장에 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험 ­ 사상 최대의 위기를 넘기 위한 스포티파이의 끊임없는 실험이 계속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

페이스북과의 협력 덕분에 몇 개월 사이 스포티파이의 사용자는 7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에크는 만족하지 않았다. 폭발적인 성장만이 회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테크 기업들이 음악 스트리밍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애플은 아이튠즈를 클라우드로 옮겼고, 제프 베조스는 아마존 클라우드 플레이어를 개발 중이었다. 구글은 구글 플레이 뮤직을 이용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스포티파이는 기술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경쟁사들의 규모에 긴장했다. 한편 애플의 새로운 CEO 쿡은 스포티파이를 40~50배의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사들이려 했다. 스포티파이 창업자들은 빨리 성장해서 이 같은 위협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그러면 아티스트들도 스포티파이에 우호적이게 될 것이다.

한계를 넘어 규모를 확장하다 / 다니엘 에크의 새로운 목표: 에크는 스포티파이를 최적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로 진출했다. 2011년에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2012년에는 독일에 진출했는데 이때 예외적인 조치를 취했다. 페이스북은 독일에서 스웨덴이나 영국처럼 인기가 높지 않아서 사용자가 페이스북을 통하지 않고도 스포티파이에 가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인 2012년 9월에 페이스북 계정을 거쳐 스포티파이에 접근하도록 했던 페이스북의 조치가 없던 일이 되었다. 같은 해에 스포티파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도 진출했다. 그리고 2012년 중반이 되자 스포티파이는 12개국에서 1,500만 명의 적극적인 사용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애플과 비츠, 라이벌끼리 손잡다

스포티파이 라디오, 판도라를 압도하다: 2011년 9월 제품 담당 이사인 쇠데스트룀이 개발자인 에릭 벤하손을 호출해 말했다. “정말 품질 좋은 라디오 기능이 필요해요. 할 수 있겠죠?” 그리고 3개월 뒤인 2011년 12월에 에크는 스포티파이의 라디오를 세상에 소개했다. 이제 사용자가 곡을 선택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유사한 곡들이 연이어 재생되었다. 에크는 라디오 기능이 판도라와 비슷하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같은 날 판도라의 주식은 주식 시장에서 5퍼센트나 떨어졌다. 그런데 스포티파이의 라디오는 완벽하지 않았다. 얼마 뒤 꽤 까다로운 사용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앱이 대개 예측이 가능한 곡들을 추천하며, 곡 선정 또한 너무 단순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스포티파이의 라디오 출시는 미국의 웹 라디오 세계를 지배하던 판도라에게는 종말의 서곡과도 같았다.

비츠, 스트리밍 사업을 시작하다 / 비츠 뮤직, 세상에 공개되다 / 애플 역사상 최고가로 인수된 비츠: 미국에서 스포티파이가 새로운 실험을 하는 동안에 아이오빈은 음악 업계의 동료들과 함께 전혀 다른 종류의 스트리밍 기업을 세웠다. 바로 ‘비츠 뮤직’이었다. 비츠 뮤직은 제대로 만들어졌으며 앱 또한 괜찮게 작동되었다.〈롤링 스톤〉같은 음악 매체들은 비츠 뮤직은 스포티파이, 판도라 그리고 유튜브와 다르다고 보도했다. 비츠 뮤직은 1주일간의 무료 사용 기간을 제공하면서 사용자들을 유혹했고, 무료 사용 기간이 지나면 1개월에 10달러를 받았다. 스포티파이와 비교할 때 비츠 뮤직에는 완전한 무료 계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후 2014년 5월 28일, 애플은 비츠를 30억 달러 넘는 가격으로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경제 매체들은 비츠 뮤직의 사용자를 10만 명 조금 넘는다고 예측했다. 그런데도 그 기업은 애플 역사상 가장 값비싼 인수 사례가 되었다.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스포티파이

애플이 스트리밍 시장에 다가가는 동안에 스포티파이는 설립 이래로 최대의 위기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위기는 2012년에 시작되었다. 잡스가 아이폰에 대하여 프레젠테이션한 지 5년이 흐른 뒤였는데, 비로소 그때 휴대 전화가 PC를 제쳤다. 노트북은 점점 저렴해졌고, 휴대 전화는 점점 빨라졌다. 스마트폰에서만 기능하는 획기적인 서비스를 내놓는 우버 같은 회사가 등장했다.

모바일 앱을 계속해서 실험하다: 젊은 소비자들은 PC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포기한 것 같다. 그렇다면 스포티파이의 성장은 멈출지도 몰랐다. 휴대 전화용 무료 앱 없이는 말이다. 수개월 동안 스포티파이의 제품 팀과 분석 팀은 모바일 앱의 여러 버전을 시험해 보았다. 목표는 무료 사용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버전을 찾는 것이었다. 테스트 앱 가운데 어떤 버전은 한 달에 몇 시간 동안만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 어떤 버전은 와이파이에서만 작동하게 했다. 무작위로 여러 곡을 재생해 주는 셔플 모드도 이에 포함시켰다. 결과적으로 셔플 모드의 승리였다. 스포티파이에서는 셔플 모드가 절대적으로 최고 인기였다. 새로운 사용자를 충분히 끌어모을 만큼 강력했다. 게다가 셔플 모드를 원하지 않는 사용자는 비용을 지불하고 프리미엄 계정으로 전환하는 경향을 보였다.

음반사와의 회의에서 파크스와 그러스드는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큰소리치며 협상을 이끌었다. 하지만 협상에는 시간이 걸렸고 얼마 못 가 상황이 급박해졌다. 예전처럼 휴가 기간이 되자 사용자들이 사라졌다. 이와 함께 스포티파이 역사상 또 한 번 아주 크게 적극적인 사용자 수가 줄어들었다. 2013년 7월부터 9월 사이에는 스포티파이는 거의 성장을 완전히 멈추다시피 했다.

모바일 앱, 드디어 서비스 개시: 소니 뮤직은 모바일 앱의 무료 사용자에 대해서 청신호를 보냈으며, 워너 뮤직은 마지막까지 버텼다. 워너 뮤직의 동의를 이끌어내려고 스포티파이를 협상가인 파크스와 그러스드는 스포티파이의 더 많은 주식을 상대편에 제공했다. 며칠 뒤 워너 뮤직의 협상 대표단은 저작권 조건에 동의했다. 몇 주 뒤 에크는 뉴욕에서 기자들에게 그 소식을 프레젠테이션했다. 모바일 앱의 무료 사용자는 정기적으로 광고 시청을 할 때 셔플 모드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에크는 스포티파이가 새롭게 라틴아메리카의 14개국과 유럽의 6개국에 진출할 계획임을 밝혔다. 그로부터 2년 이상 스포티파이는 구글과 디저처럼 멕시코의 디지털 음악 시장의 경쟁자 대다수를 물리쳤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보이콧, 라이벌이 된 제이 지

2014년에 스포티파이는 전에 없던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휴대전화 앱이 출시와 함께 즉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도 닥쳤다. 스위프트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에크의 사업 모델에 반발했고, 동시에 강력하고 새로운 경쟁 상대가 여럿 등장했다.

무료 사용자가 안겨준 고민거리: 2014년 상반기에 스포티파이로 1,100만 명의 무료 사용자가 신규로 유입되었다. 거의 50퍼센트에 가까운 증가율이었다. 무료 사용자가 지나치게 많아진 탓에 문제가 불거졌다. 6월에 에크는 비상 제동기를 당겼다. 판매 담당 이사인 레빅과 의논한 다음 확장 담당 이사인 브링예우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전부 중단합시다.” 무료 계정은 사실 공짜가 아니었다. 스포티파이 입장에서는 그랬다. 각 무료 사용자에게 스포티파이는 매달 1달러 정도를 투자하는 셈이었고, 대신 무료 사용자가 광고를 시청하여 수익이 발생한다면 그 투자 비용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광고 플랫폼이 없었기에 수백만 명의 신규 사용자가 앱에 몰려오면 스포티파이는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치러야 했다. 매달 말이다.

에크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쇠데스트룀에게도 휴대 전화에 광고 플랫폼을 만들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 시기에 에크는 전체 사용자 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다. 그보다는 무료 사용자를 유료 사용자로 전환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유료 사용자야말로 스포티파이의 전체 수입 가운데 약 90퍼센트를 지탱하는 중요한 재원이었다. 2014년 9월에 쇠데스트룀의 제품 팀은 휴대 전화에 광고 플랫폼을 완성했다. 덕분에 그해 말부터 광고 수입이 증가하기 시작해 스포티파이의 비용 부담을 덜어 주었다.

최고의 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보이콧: 2014년 10월 27일 스위프트가 앨범〈1989〉를 발표했고, 일주일 동안 스위프트는 120만 장의 앨범을 팔았다. 그런데 그 성공에서 스포티파이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스위프트의 새 앨범이 스포티파이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위프트는 스포티파이에서 자신의 새로운 음악이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앨범이 나오고 나서 1주일 뒤인 11월 3일 월요일이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그날 스위프트는 스포티파이에서 아예 기존의 곡들까지 몽땅 거두어 갔다. 스포티파이의 무료 사용자와 불법으로 파일을 공유하는 것이 같다고 여겼던 것이다.

에크는 회사의 블로그에 영상을 올렸다. 그는 스포티파이가 다른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와는 다르다고 했다. 누군가 곡을 하나 청취할 때마다 ‘불법 복제로부터 유튜브에 사운드클라우드에 이르기까지’ 아티스트와 저작권 소유자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스포티파이는 음반사와 뮤직 퍼블리셔에 금액을 지불했다. 그들이 수입을 아티스트와 작곡가 등에게 어떻게 분배하는지는 스포티파이의 책임이 아니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스포티파이는 저작권료로 20억 달러를 지불했다.

제이 지, 스트리밍 사업에 시동을 걸다 / 아스피로를 인수한 제이 지 / 또 다른 경쟁자, 타이달: 스위프트가 스포티파이를 이탈하자 많은 아티스트가 스트리밍 경제에서 자신의 지위를 재협상하기를 원했다. 예로 제이 지는 스포티파이에 10억 달러로 독점적으로 자신의 곡 전체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스포티파이는 제이 지의 제안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한편 2015년 1월 금요일 아침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테크 기업들의 주가가 60퍼센트나 훌쩍 뛰어올랐다. 그 원인은 전략을 바꾼 래퍼 제이 지였다. 그는 스트리밍 기업에 자신의 곡에 대한 독점적인 저작권을 허락하는 대신에 아예 스트리밍 기업을 사기로 하고 아스피로를 인수했다. 그리고 아스피로는 이름을 타이달로 바꾸었다. 타이달은 이용자에게 매달 10달러를 받았고, 두 배의 비용을 치르면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보다 더 나은 음질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외에 타이달은 영상과 독점적인 콘텐츠를 보유했고, 오프라인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한편 스위프트는 앨범〈1989〉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곡 전체를 타이달에서 들을 수 있게 했다. 타이달이 출시되었다는 소식은 큰 화제가 되었고 팝스타들은 #TIDALforALL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음악 사업계의 전환점’이라는 트윗을 날렸다. 이제 음악 업계의 힘이 스포티파이와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제 에크는 스포티파이를 차별화 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미래 ­ 전 세계 1위를 지키기 위한 스포티파이의 다음 무기는 무엇인가?

빅데이터로 애플 뮤직에 대항하다

2015년 봄, 스포티파이에는 겨울이 정말로 찾아왔다. 경쟁사들이 사방에서 치고 들어온 것이다. 아마존과 구글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확장해 갔다. 타이달의 사용자 수는 아직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유명한 아티스트들과의 강력한 연결 고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지수였다. 가장 큰 위협은 쿡과 아이오빈이었다. 그들은 곧 아이튠즈의 후속 버전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에크는 탁월한 기술로 경쟁사들의 위협을 막아 내고 싶었는데, 이때 스포티파이는 사용자의 기분에 따라 음악을 추천해 주는 서비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 기술을 실현하려면 스포티파이는 사용자가 어디에 위치하며,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멈추어 있는지, 산책을 하는지, 아니면 뛰는 중인지까지도 말이다.

경쟁자들을 막을 새로운 기능: 운동 마니아인 쇠데스트룀은 팀을 꾸려서 ‘스포티파이 러닝’이라는 기능을 만들었다. 그 팀은 얄라휘셋 건물의 방 하나를 특별한 실험실로 꾸몄다. 중앙에서 실험을 위하여 고용된 사람이 이어폰을 끼고 러닝머신에서 뛰면 스포티파이 직원들이 소프트웨어가 사람의 발이 얼마나 빨리 바닥에 닿는지를 제대로 측정하는지 확인했다. 그러고선 스포티파이 앱이 사람이 뛰는 속도와 비슷한 리듬의 곡을 추천하게 했다. 그 제품은 나이키와 공동으로 개발했고, 사용자의 휴대 전화나 태블릿 PC에 장착한 센서로 사용자의 상태를 측정했다. 이러한 기능의 개발은 비츠 뮤직에 대한 스포티파이의 대답이자, 애플이 비츠와 함께 가할 공격을 막을 수비법이었다.

방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탄생한 디스커버 위클리: 스포티파이가 여러 서비스의 출시를 준비하는 동안 뉴욕에서도 색다른 시도가 진행 중이었다. 그것은 이전에 만들어진 스포티파이의 사용자에게 새로운 음악을 추천하는 알고리즘과 관련 있었다. 디스커버 탭과 관련 있던 그 기능은 6개월 전에 인수된 에코 네스트에서 개발되었지만, 사용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자 2014년 하반기에 기능이 축소되었었다. 하지만 2014년 말에 스포티파이의 신중한 개발자 두 명(에드워드 뉴엣과 크라이스 존슨)이 옛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자동화된 알고리즘 플레이리스트는 ‘디스커버 위클리’(Discover Weekly) 또는 스웨덴어로 ‘한 주의 조언’(Veckans Tips)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애플 뮤직과 비츠원의 등장: 2015년 6월 8일, 샌프란시스코의 무대에서 쿡이 ‘애플 뮤직’의 탄생을 알렸다. 쿡은 음악의 역사를 그려 낸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1800년대의 축음기가 라디오로 이어지더니 레코드판, 8트랙 테이프,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아이팟과 아이폰까지 이어졌다. 영상은 2015년과 애플 뮤직의 로고에서 멈추었다. 곧 쿡은 새로운 연사를 소개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환상적인 아티스트와 일해 왔습니다. 애플도 함께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아이오빈을 환영하는 데 동참해 주세요!” 아이오빈은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애플 뮤직은 새로운 라디오 방송 ‘비츠원’을 공개했고, 아티스트와 팬의 소통을 돕는 ‘커넥트’(Connect) 기능도 선보였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커넥트 페이지에 사진, 가사, 동영상 등을 팬들과 공유할 수 있었다. 즉 그 기능은 일종의 소셜 채널이었다.

사람들의 취향을 완벽하게 맞춘 디스커버 위클리: 수개월을 기다린 끝에 뉴엣과 존슨은 디스커버 위클리를 테스트했고, 테스트는 2015년 4월에 완료되었다. 그리고 애플 뮤직이 출시된 지 몇 주 후 디스커버 위클리를 출시했는데, 출시 즉시 스웨덴과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10주 만에 알고리즘은 무려 100만 개의 플레이리스트를 생성했다. 2015년 가을이 되자 스포티파이는 적극적인 사용자 수에서 판도라를 추월했다. 디스커버 위클리의 출시는 스포티파이에게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2016년 여름에 스포티파이는 후속으로 ‘릴리즈 레이더’(Release Rader)를 출시했다. 사용자의 취향에 맞추어 알고리즘이 최근에 발표된 신곡을 매주 금요일마다 모아 주는 플레이리스트였다.

몇 년 뒤에는 ‘랩 캐비어’와 ‘투데이스 톱 히트’ 등의 기능이 발표되었다. 이 두 기능은 사람이 직접 통제했다. 이로써 스포티파이는 세계 디지털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로 변모했다. 수백만 명의 사용자들은 스포티파이가 자신들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스포티파이는 세상의 모든 곡을 발견하게 해줄 뿐 아니라 최고의 곡까지 찾아 주고 있다. 디스커버 위클리가 나온 지 몇 주 안 되었을 때 ‘더 버지’가 기사를 냈는데, 디스커버 위클리의 성공에 마치 에코 네스트의 공이 컸다는 식으로 기사를 썼다. 그 기사는 뉴엣과 존슨을 화나게 만들었다. 에크도 쇠데스트룀도 뉴욕의 개발자들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몇 년 지나서 뉴엣과 존슨은 다른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스포티파이 최고의 기능을 만든 데 대한 아무런 감사의 말도 듣지 못하고 떠나갔다.

스웨덴이 낳은 성공 신화로 우뚝 서다

2016년 4월 스포티파이는 창업 10주년을 맞이했다. 스트리밍은 미국의 음악 산업에서 가장 큰 수익원이 되었다. 1999년 이래로 계속 하락세였던 이 업계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음반사들에게 함께 성장하자고 했던 에크의 약속은 이행되었다. 이제 스포티파이는 3천만 명의 유료 사용자를 보유했는데, 이는 애플 뮤직의 유료 사용자보다 세 배나 많은 숫자였다. 2016년에는 스포티파이의 재경 팀이 뉴욕으로 이주했다. 주식 상장을 고려한 포석이었다.

넷플릭스 출신 맥카시의 활약: 과거에 넷플릭스를 주식 시장에 상장시킨 맥카시가 보기에 스포티파이는 주식 상장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 스포티파이는 약 60개국에서 서비스 중이었으나 내부 회계는 6개국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 저작권 비용을 얼마나 쓰고 있는지 등등 많은 숫자가 불확실했다. 새로운 재무 담당 이사 맥카시는 스포티파이를 완전히 재무장시켜야 한다고 여겼고, 다행히 맥카시는 에크로부터 이 일을 완전히 위임받았다.

뜨거웠던 주식 상장의 순간

음반사와 저작권료 협상을 다시 하다: 스포티파이는 음반사와 저작권 협상을 다시 할 필요가 있었다. 맥카시는 스포티파이가 매출 1크로나당 수익을 약 15퍼센트밖에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전략 및 콘텐츠 담당 이사인 블롬이 저작권 협상에 합류했다. 하지만 2016년 말에 유니버설 뮤직과의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맥카시와 수석 변호사가 블롬이 협상 목표를 이루도록 지원했다. 2017년 4월 마침내 유니버설 뮤직의 회장 그레인지가 합의를 했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 스포티파이는 독립 음원사인 멀린, 소니 뮤직 그리고 워너 뮤직과 비슷한 조건으로 합의를 마쳤다. 음반사들과의 합의에 따라 스포티파이는 매출 1크로나당 약 25퍼센트의 수익을 얻게 되었다.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직상장을 택하다 / 사업 모델을 끊임없이 개발하다: 에크는 스포티파이가 나스닥이 아니라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되길 원했다. 한편 맥카시는 ‘직상장’을 제안했고, 그 아이디어는 에크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직상장이란 기업 공개(IPO)를 하여 자금을 모으거나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지 않고 기존 주식만 직상장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기존 주주들이 수수료 등을 면제받으면서 곧바로 보유한 주식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으며, 금융 회사에 지불하는 수수료도 대폭 줄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일반적인 상장과 달리 주관사가 없어서 주가가 하락할 때 막을 수 없고, 새로운 주식을 발행할 수 없는 등 직상장에 따른 위험 요소도 존재했다.

스포티파이는 주식 시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음악으로 돈을 버는 여러 묘안을 내놓거나 기존의 방식을 다듬었다. 비록 음반사에 비용을 물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한편 에크는 주식 상장을 신청하기 몇 주 전에 퍼즐 조각 하나를 끼워 맞추듯 한 가지 일을 실행했다. 스포티파이 역사상 제일 큰 비용을 들여 기업 인수를 한 것이다. 그 대상은 2012년에 설립된 스웨덴 음악 기업인 사운드트랩이었는데, 그 기업이 내놓은 앱은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음악을 만들고 실시간으로 녹음하는 도구였다.

드디어 주식 상장되다 / 모두가 부자가 되다: 마침내 2018년 4월 3일에 스포티파이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고, 스포티파이의 주가는 초기 공모가인 132달러보다 13퍼센트 오른 149.01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스포티파이의 상장은 업계에서 첫 번째 직상장이었다. 스포티파이 공동 창업자 로렌손은 스포티파이의 주식 12퍼센트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가치는 3천억 크로나(약 40조 원)에 달했다. 패르손의 이익은 그만큼 높지 않았으나, 본인이 파트너로 적을 둔 노스존은 투자금의 130배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몇 달 안에 노스존과 크리앤둠은 스포티파이의 주식 대부분을 팔아치우면서 총 250억 크로나(약 3조 5,000억 원)의 이익을 보았다. 주식 상장으로 에크는 200억 크로나(약 3조 원) 정도를 벌었다. 스포티파이는 창업자들, 초기 투자자인 항외, 천재 프로그래머 스트리게우스, 그리고 헤지펀드 권력자인 시트론까지 모두를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었다. 

두 번째 이닝에 들어선 스포티파이

팟캐스트의 넷플릭스를 꿈꾸다: 주식 상장 이후 스포티파이는 주식 시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여러 새로운 시도를 했다. 2018년 여름에 스포티파이는 작은 음반사와 매니저들에게 저작권료를 선불로 지급했다. 그 대신 음반사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의 저작권을 직접 거래했다. 결과적으로 작은 음반사의 아티스트들은 예전보다 더 높은 비율로 수익을 갖게 되었는데, 대형 음반사의 소속 아티스트들보다 나은 조건이었다. 가을에는 거의 7만 명의 아티스트들이 스포티파이에 자신의 곡을 직접 업로드 했는데, 그 가운데 1만 명 이상이 디스커버 위클리 같은 플레이리스트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스포티파이가 아티스트들에게 다가서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는 주식 시세를 올려 주었다. 대형 음반사는 속을 끓였지만 말이다. 스포티파이는 이제 음악 업계의 한 해 매출 가운데 4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어떤 음반사도 스포티파이와의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스포티파이는 아티스트가 직접 음악을 업로드하는 실험을 그만두었다. 음반사와의 저작권 협상이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던 2019년 여름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 조치를 스포티파이가 음반사에 양보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때쯤 에크는 새로운 노선으로 나서 추가로 몇몇 기업을 더 인수했다. 우선 브루클린에 있는 김릿 미디어를 20억 크로나(약 2700억 원) 정도에 인수했는데, 리플레이 올, 더 넛 그리고 크라임타운 등 우수한 품질의 팟캐스트를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이와 함께 팟캐스트를 배급하는 플랫폼인 앵커를 10억 크로나(약 1,300억 원) 이상의 금액으로 인수했다. 에크가 두 기업의 인수를 마치며 내놓은 논평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팟캐스트 플랫폼입니다.”

더 크게 성장할 미래를 향해: 에크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언젠가 로렌손과 희망했을지 모르는 지점보다도 더 멀리 왔다. 그러나 그는 안주할 수가 없다. 경쟁사 몇몇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들이다. 다시 말해서〈왕좌의 게임〉의 명대사 속에 등장하는 겨울은 지금이다. 에크는 지속적으로 제품을 지켜보고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한다. 젊은 나이와 독특한 과거의 경험은 에크가 스포티파이의 회장 지위에 오랫동안 남아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귀를 크게 열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야만 한다. 에크는 잡스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아이오빈은 수차례 만났다고 전해진다. 여러 면에서 그들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에크는 아이오빈이나 아이오빈이 속한 세상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오랜 시간에 걸쳐 얻었다. 설립된 지 13년이 지난 지금, 스포티파이는 주요 경쟁사인 애플 앱스토어에서 앱을 다운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순이익은 너무 적고 새로 투자할 곳은 끝이 없다. 한마디로 더 성장해야 한다. 에크가 말하기 좋아하는 ‘두 번째 이닝’에 들어섰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텍스트 상자: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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