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들녘 / 2021년 4월 / 339쪽 / 15,000원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박영서 지음

저자 소개

1990년생이며 충주의 작은 사찰에서 살고 있습니다. 금강대학교에서 불교학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철학 플랫폼 ‘철학이야기’를 도반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쓴다는 핑계로 골방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완연히 몰입하는 시간만큼 행복해지는 시간이 없습니다. 역사는 저를 행복하게 하는 소중한 우물 중 하나입니다. 물 흐르듯 유려하거나 논리적으로 탄탄한 글을 쓰지는 못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도 잘 못 씁니다. 다만, 제가 울고 웃었던 것만큼 누군가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덕후’의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던 10대와 20대를 뒤로하니, 이제는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하는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어렵다’는 말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시대 안에서 ‘어려워도 행복한 삶’이 어떤 삶인지 한번 살아보겠노라, 오기를 부리는 중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가르침,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책소개

이 책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긴 개인 일기들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들의 삶은 물론, 글을 알지 못해 일기를 쓰지 못했던 평민들의 삶까지 들여다본다. 저자는 일기는 개인이라는 씨실과 시대라는 날실로 직조된 직조물이라면서,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긴 계암일록, 노상추일기, 쇄미록, 남천일록, 지암일기 등을 통해 양반들의 속사정은 물론, 함께 호흡했던 일반 백성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살펴본다.

요약본 본문

나는 네가 과거 시험장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요즘 청년들이 취업에 몹시 민감한 것처럼, 조선 사람들은 과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비록 사실상 양반층의 전유물이었지만, 그 파급효과는 전 세대, 전 계급, 전 지역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시험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양반들은, 이상하게도 온갖 부정행위를 공유하는 ‘암묵적인 룰’을 만듭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관직의 수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양반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죠. 결국, 조선 중기 이후의 과거장은 응시자도, 감독관도, 임금님도 못 말리는 ‘천하제일 커닝대회’가 되고야 맙니다. 그 생생한 고발의 현장, 한번 훔쳐볼까요? 꼿꼿한 영남 선비, 김령(金?, 1577~1641)의 일기,『계암일록』을 펴 보겠습니다.

‘[1614년 10월 29일 -『계암일록』] 시험 감독관 김치원은 이번 시험에서 친목으로 다져진 인맥을 사용하며 온갖 수작을 부렸다. 특히, 시험지에 그가 감독 도장을 찍을 때, 응시자를 불러 얼굴을 확인하면서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꼭 확인했다. 게다가 다른 감독관은 “이 시험지는 딱 3등 정도 하겠군요!”라며 시험 결과가 공표되기도 전에 마치 등수가 정해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이(李)씨네 삼 형제를 모조리 합격시키기 위한 술수였다. 김치원은 이씨네 삼 형제 중 맏형 이립이 글을 시원치 않게 쓰는 것을 알고 아우에게 답안지 대리 작성을 시킨 것도 모자라, 아우 이점의 시험지에는 ‘합격’이라고 써 붙였다. 덕분에 이점은 자신이 합격한 것을 알고 자신 있게 형의 답안지를 대신 써줬다. 물론, 막내 이강의 답안도 형편없었는데 고득점으로 합격했다.’

김령의 일기에선 빵빵한 인맥을 갖춘 이씨네 삼 형제가 대리 응시, 합격자 내정, 시험 결과 선 공개 등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벌인 부정행위가 나옵니다. 세 가지 모두, 지금 우리 시대에서 벌어졌다면 9시 뉴스에 나올 법한 일이겠죠? 놀랍게도 김령의 일기에선 이러한 부정행위가 숱하게 등장합니다. 예의범절과 꼿꼿한 절개를 중시했던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어떻게 된 일일까요.

조선의 과거제는 문과와 무과, 그 밖에 실무적인 직렬에 원칙적으로는 신분에 대한 차별 없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응시할 수 있는 과와 신분이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죠. 특히, 문과의 경우는 ‘양반 남성’으로 제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과거에 합격하기란 바늘구멍을 뚫기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전하! 지방의 잠든 인재를 발탁해주십시오.”라는 상소문이 올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원래 3년에 한 번씩만 열리던 정기 시험을 포함하여, 나라에 축하할 일이 있을 때 파티를 하듯 시험을 열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시험에 대한 관리 감독도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당론 중심의 정치 시스템은 ‘우리 편 만들기’에 열중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부정행위가 판치는데, 그중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은 ‘인맥에 의한 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장은 누가 더 혈연ㆍ지연이 강력한가 다투는 숨 막히는 기 싸움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시간이 흘러 중년의 관찰자가 된 김령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1639년 2월 28일 -『계암일록』] 동네 선비들 사이에 최근 시험 감독관에 대한 이야기가 시끌시끌하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감독관의 연인인 기생 은개에게 청탁하여 합격한 자가 너 댓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시험 문제는 이미 상주의 백일장에서 출제된 문제였고, 청탁한 이들은 그 시험지를 미리 볼 수 있어서 시험을 치기도 전에 작성해둔 답안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열여섯 명은 공무원에게 뇌물을 써서 합격하였단다. 빈 시험지를 끝까지 갖고 있다가, 이미 채점이 완료된 답안지를 베껴서 제출하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뇌물은 베 백 필에서 백오십 필 정도였다는데, 모조리 예천 수령 허한이 날름 먹고선 뒷일을 무마하기 위해 해당 공무원을 잡아 가두었다.’

신분제의 국가였던 조선의 양반 남성이 기생과 말단 공무원에게 청탁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혼란스러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합격해도 꼭 관직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적이 아주 우수한 최상위 합격자만 공무원이 될 수 있었거든요. 이 정도면 의아합니다. 큰 비용을 들이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애걸하면서까지 왜 과거에 합격하려고 했을까요? 그 까닭은 양반 중심의 향촌 사회에서 ‘김 생원님’ ‘박 진사님’으로 불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합격을 통해 명예를 얻고, 명예를 통해 더 귀한 인맥을 넓혀가며, 더 귀한 인맥을 통해 부의 생산이 가능한 것이 조선 사회의 구조였습니다. 명예가 곧 권력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과거에 ‘올인’하게 됩니다. 참고로 문과를 준비하다가 책상을 엎어버리고 무과에 도전하게 된 노상추(1746~1829)의『노상추일기』에는 10여 년 동안의 과거 도전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탕진하게 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1782년 5월 7일 -『노상추일기』] 간신히 시험에 합격했더니, 남아 있는 땅은 고작 집터로 쓸 땅 팔백 평과 영 시원치 않은 논 천육백 평 정도밖에 없었다. 아버지께 가산을 상속받았을 때 오백 냥 정도의 땅을 받았는데, 십 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야금야금 팔아버렸고, 이사하면서 산 땅 또한 과거 때문에 팔아버렸으니 유산으로 받은 나의 오백 냥은 모두 과거에 갖다 바친 꼴이다. 이거 완전, 앞으로 굶어 죽게 생겼다. 그놈의 ‘입신양명’이 뭔지, 내가 미쳤지.’

이번 장에서는 과거 시험장의 천태만상과 개인이 느꼈던 좌절과 성공을 풀어보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부패한 조선의 모습과 개인의 탐욕스러운 행보를 비난하는 근거가 아니라, 무한 경쟁 사회의 승자독식 구조가 수많은 보통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입니다. ‘엄격’하고 ‘공정’한 시험이 보편화한 지금, 과연 그것은 ‘엄격’하고 ‘공정’한 것일까요? 또 그 공정함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일까요? 미래 세대가 더 공정한 사회, 더 안정적인 삶을 누리기를 원하는 우리 시대의 노력이 어디쯤 와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천하에 둘도 없는 탐관오리 놈아!

전해지는 민담(民譚) 속에서 사또는 크게 두 가지 이미지로 나옵니다. 한쪽에선 고집불통에 욕심이 가득한 전형적인 악역으로 그려지고, 다른 한쪽에선 공명정대하고 선량한 정의의 수호자로 그려지죠. 사실, 어떤 사람의 성향이나 행보를 선과 악의 한 단면으로만 색칠할 수는 없겠죠. 같은 사람을 두고 누군가는 탐관오리라 하고, 다른 누군가는 탁월한 관리자라 하는 엇갈린 평가도 나오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 평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백성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백성의 솔직한 이야기를 우리는 쉽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글자를 소유했던 양반들의 기록을 통해서 어깨너머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죠. 다행인 것은, 한 명의 사또를 평가할 때, 양반과 백성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는 점입니다. 양반들은 혹시라도 그들의 폭정이 역사에서 잊히는 일이 없도록 다 적어서 후손들에게 일러바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기를 토대로 ‘양반을 중심으로 한 향촌 사회 vs 중앙에서 파견된 사또’의 숨 막히는 밀고 당기기의 현장으로 떠나봅시다. 참고로 탐관오리의 유형을 구분해보자면, 폭력을 앞세워 압제를 펼치는 ‘조폭형’, 융통성 없는 세금 징수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꼰대형’,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온갖 술수를 발휘하는 ‘꼼수형’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김령은 다음과 같이 민성징(1582~1647)을 탐관오리로 기록해놓았습니다.

‘[1623년 9월 23일 -『계암일록』] 경상도 관찰사 민성징은 그야말로 잔혹한 인간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형장(刑杖)이 펼쳐져 피가 낭자했고, 사람들이 명령을 수행하기 어렵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이기만 했다. 얼마나 심하면, 수령이 마당에 서서 “관찰사님! 인제 그만 멈춰주십시오! 이러다가 정말로 사람들이 죽겠습니다!”라고 애걸복걸할 지경이었다. 성질은 또 어찌나 급한지, 출장이라도 가는 날엔 꼭 새벽 일찍 출발해서 여러 사람을 괴롭혔다. 애당초 특채로 발탁됐으면서, 실력도 없고 재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세우려고 하니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민성징은 광해군과 인조 시대 모두 중용 받은 독특한 인물입니다. 인조 재위 1년 차, 경상도 관찰사라는 무거운 임무를 받고 경상도에 내려옵니다만, 그는 융통성은 전혀 없고 오직 법에 정해진 원칙대로만 평가하는 ‘FM’ 그 이상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모든 고을을 돌면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압슬형(壓膝刑)과 장형(杖刑)을 실시하며 말단 공무원을 괴롭혔죠.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그가 탐관오리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뒤숭숭한 시국을 단속하기 위해 더 엄격한 정치를 펼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1623년 1월 25일 -『계암일록』] 권극해라는 인간은 말은 청산유수인데 행동은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데 오직 풍수지리를 좀 본다는 이유로 민성징에게 총애를 받았다. 민성징은 권극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좋네, 그렇게 하게.”라고 말하면서 금품까지 지원해주었다. 덕분에 권극해는 졸부가 되었다. 민성징 덕분에 권극해가 얻은 물품이 상주에서는 쌀 석 섬과 무명 다섯 필, 예천에서는 쌀 두 섬과 무명 다섯 필, 안동에서는 그것보다 네 배는 얻었고, 다른 잡물은 셀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택이라는 자는 민성징의 집안사람인데, 민성징의 힘을 믿고, 경상도 내에서 노비나 재물을 추적하고 압류하는 사람들에게, 노비나 재산을 강압적으로 탈취해서 보내주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노비 몇 명을 민택에게 뇌물로 주었는데, 이렇게 민택이 얻은 노비만 해도 마흔 명 가까이 되었다.’

폭력을 앞세운 정치를 하면 반드시 끄나풀이 생기게 마련이죠. 입만 열 줄 알고 업무 성과라곤 없었던 권극해라는 인물은 민성징의 총애를 얻은 뒤부터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차갑지만, 내 사람에게는 따뜻한 도시 남자’ 민성징이 각 고을을 다니면서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 그가 따라다니면서 수고비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상당하여 수고비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민망할 지경이에요. 민성징의 자산관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한편 민성징은 위험하고 지저분한 일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시킵니다. 바로 집안사람 민택입니다. 민택이 민성징의 이름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브로커들에게 상당한 커미션을 받는 조건으로, 도망간 노비, 도난당하거나 분쟁이 걸린 재산 문제 등을 처리하는 브로커들과 일종의 ‘도급계약’을 맺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선 실세들이 만들어놓은 지하 경제의 콩고물은 어디로 갔을까요? 누군가에게는 흘러갔을 텐데 말이죠. 한편 김령은 일기에 ‘민성징은 승진하기 위해 김 상궁에게 은을 뇌물로 바쳤다.’라고 썼는데요. 실제로 민성징의 물건을 실은 수레가 암행어사에게 걸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편 백성들에게 부과된 수많은 세금 중 가장 탈이 많았던 것이 방납(防納)입니다. 온갖 종류의 토산품이나 진상품을 바쳐야 하는데, 수량과 품목이 다양한 만큼 탈법적 요소가 개입할 만한 여지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잡히지도 않는 생선을 돈 주고 사서 바치는 불합리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지겹고 답답한 유배 생활을 글쓰기로 극복한 심노승(1762~1837)은 자신의 일기『남천일록』을 통해 지방민들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합니다.

‘[1801년 3월 24일 -『남천일록』] 서울에서는 기장의 바둑돌을 최고로 치는데, 요즘 공무원들이 자꾸 와서 제대로 만들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바둑돌을 만드는 기장 사람들의 손톱이 모두 닳아 없어졌다. 바닷가에서 돌을 채취하여 손으로 하나하나 예쁘게 가는데, 아무리 숙련된 사람이라도 자신의 손까지 갈아버린다. 이렇게 고된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바둑돌이 고작 하루 서른 개에 불과한데, 흑돌과 백돌 각각 이백 개씩이 한 묶음이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무려 천 묶음 이상을 징발해간다. 이러니, 동네 사람 스무 명이 하루도 바둑돌을 갈지 않는 날이 없어 손톱이 다 닳아 문드러진다.’

한편 각양각색의 명목을 붙인 무거운 세금도 문제였지만, 거기에 각종 토목공사 및 프로젝트에 노동력이 강제 동원되는 일도 백성들에겐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한 일부 백성들은 풍요로운 땅을 버리고 척박한 산골로 숨어들게 됩니다. 조선 성리학의 거두, 남명 조식(1501~1572)은 한가로이 관광을 즐기다가, 숨겨진 백성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1558년 4월 22일 -『유두류록』] 두류산의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문턱에 걸려 있다. 이렇게 깊숙한 산골이지만, 오히려 이런 곳까지 관청의 부역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숨었다. 절에 사는 승려조차도 내게 부탁하길, “선생님,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이 고을 목사에게 우리 절의 부역을 조금만 줄여달라는 편지를 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어디서도 하소연할 데 없는 그 심정이 안타까워 편지를 써 줬다. 승려의 형편도 이런데, 산골에 사는 백성들의 형편은 더 엉망일 것이다. 해야 할 나랏일은 많고, 백성들의 부역은 과중하다. 결국 백성들은 고향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염려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백성들 등 뒤에서 한가롭게 관광을 즐길 뿐이다. 우리는 마냥 즐거워할 수 있는가?’

한편 수령의 매니지먼트 스킬이 지역 민심과 충돌하게 되면, 수령에 반대하는 자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때 양반은 나서서 수령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거칠고 험한 말도 오갔습니다. 괄괄한 성품을 지녔던 김휴(1597~1638)의 ‘돌직구’를 김령의 일기에서 살펴볼까요.

‘[1633년 8월 18일 -『계암일록』] 김휴가 예안 현감의 무리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이 몇 잔 돌더니, 김휴가 예안 현감에게 “현감님, 어떻게 정사는 제대로 안 돌보고 동네 양아치들과 활쏘기만 하러 다니십니까? 그 양아치들이 동네에 온갖 패악질을 하고 다니는데, 특히 그 양아치 두목 박용보란 놈이 제일 문제입니다. 그런데 현감님은 그런 인간이랑 친하게 지내시다니, 동네 사람들이 다 흉보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 얘기를 들은 예안 현감은 부끄러움에 볼이 빨개지면서도, 화를 내면서 말했다. “아니, 활쏘기 또한 예로부터 군자(君子)들이 당연히 해왔던 일인데, 왜 말을 그따위로 한단 말입니까!” 김휴는 지지 않고 다시, “아하, 그러니까 현감님께서는 양아치 박용보를 옛날 군자님들처럼 여기신다는 것이군요. 암요, 어련하십니까. 현감님 말씀이 맞지요. 아무렴요.”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양반들은 물론, 함께 있던 노비들까지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김휴의 ‘돌직구’를 들은 현감은 우물쭈물했지만, 관아로 돌아가 엄한 곳 여기저기에 화를 냅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 셈이지요. 아마도 명성이 자자한 김휴를 감히 터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이나 하급 공무원들은 양반처럼 대놓고 항의할 수 없었습니다.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많은 백성은 그저 얼른 시간이 흘러서 수령이 바뀌길 기대하거나, 지역 양반들에게 하소연하여 나서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지역의 양반 커뮤니티가 수령을 이길 수 없을 때는 상소(上疏)라는 수단을 택했습니다. 지역의 양반들이 모여 사안에 대한 토의와 토론을 벌이고, 그로써 결정된 의견을 조정에 직접 올리는 공론화 작업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죠. 상소는 지역의 이름 없는 김씨 양반도 국가의 의사 결정 시스템 속 일원이 될 수 있는, 양반의 실존적ㆍ계급적 근거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소는 무수히 많은 왕의 거절 통보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특히, 가장 위험한 적은 항상 내부에 있고, 사공이 많은 배는 항상 산으로 가는 법이죠. 권상일의 일기를 통해 상소 실패 사례를 보겠습니다.

‘[1721년 3월 9일 -『청대일기』] 임금님께 상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로 향한 선비들이 오늘 문경새재에 머무르면서 상소문을 고쳐 쓴다고 한다. 상소를 올리겠다고 나선 이들이 고작 경상도의 열 개 고을에서 이십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 고을에서는 두 명 빼고는 모두 관아의 보복이 두려워 핑계만 대면서 슬쩍 뒤로 빠졌다. 부끄럽다. 이것은 다 서인(西人) 세력들이 우리 도의 향교와 서원을 뺏어서 상소하러 가는 경비를 지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 수령과 양반 사이에서 벌어진 투쟁의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일부는 선비의 기개를 지켰고, 일부는 선비답지 않은 모습도 있었죠.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양반들은 어디까지나 실정(失政)으로 인해 고통 받는 평민의 고통보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적 신념, 혹은 양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사회적 장치를 지키는 것에 더욱 예민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양반의 이익과 공익이 충돌할 때, 주저 없이 양반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옳다’라고 믿는 의식 또한 굳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정치에서도 반성할 만한 하나의 통찰을 제공합니다. 정치의 기본은 의견을 모으는 데 있습니다. 무늬만 지킨 절차적 정당성이 아닌, 의사 결정 시스템이 도입된 취지에 입각한 정당한 의견수렴이 소통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합니다. 과연, 우리의 정치에선 그러한 덕목이 지켜지고 있을까요?

나의 억울함을 일기로 남기리라

살면서 억울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그 억울함을 해소할까요. 최근에는 SNS나 커뮤니티, 그리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등이 개인적인 억울함을 토로하고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어달라는 호소의 장이 되었죠. 이번 장에서는 양반들의 ‘짠내 나는’ 투옥 및 유배 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어사에게 찍혀버린 수령, 윤이후의『지암일기』부터 시작합니다.

‘[1692년 1월 25일-27일『지암일기』] 암행어사가 왔다. 그런데 소문으로 들으니, 어사가 우리 동네에 들어오자 한 어린아이가 어사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고 도망갔다고 한다. 이 동네 인심이 도대체 왜 이 모양인 걸까. 이게 다 이지송 그자가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에게 혹하여 같이 어울리면서 이러한 곤경에 처해버렸으니, 옛 어른들이 “소인을 멀리하라.”라고 하신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하지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한편으론, “어사가 사또는 벌주지 않을 것이지만, 거리에서 들은 풍문을 바탕으로 부하직원들은 징계한다고 합니다.”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풍문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못된 마음을 먹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결과가 뻔하다. 또 나는 무사할 거라고 하지만, 어사의 속마음을 누가 알까?’ 결국 부하직원들은 끌려가 처벌을 받고 수감됩니다. 그런데 암행어사 이인엽은 사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큰 그림은 조정에서 메가톤급 정쟁으로 번지게 되죠. 윤이후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692년 4월 10일 -『지암일기』] 암행어사가 보고서를 올리기도 전에 전라도 관찰사 이현기가 이인엽이 어사 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일러바쳤다. 거기에 맞서 이인엽 또한 이현기가 지방 수령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인사평가를 수행한 것을 고발했다. 이현기는 다시 상소를 올려 반박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죄다 엉망진창이다. 어느 쪽이 이겨도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어사 이인엽의 최종 목표는 사실 전라도 관찰사 이현기(1647~1714)였습니다. 그가 보고서를 통해 이현기의 뇌물수수 혐의를 고발하기 직전, 지역의 자기 사람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이현기는 선수를 칩니다. “전하! 이인엽은 어사 직을 날로 먹은 자입니다! 그런 그의 말은 다 거짓부렁이니까요.”라는 ‘선빵’을 때리게 되죠. 게다가, 자신의 사직까지 운운하며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합니다. 이렇게 서인(西人) 이인엽과 vs 남인(南人) 간의 데스매치가 벌어지고, 남인이었던 윤이후 또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쟁에 말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때, 윤이후는 자식들에게 이런 시를 남깁니다. “너희들은 사람들과 굳이 아웅다웅하지 말고, 세상에 조금도 정을 두지 말렴.” 당시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는 글이지요?

이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을까요? 이현기의 말을 믿은 숙종은 이인엽을 체포하지만, 양심 있는 관리들의 상소로 이현기 또한 처벌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다시 복직합니다. 뇌물을 줬던 수령들만 다시 등용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인엽이 올린 보고서는 실록과 승정원일기 모두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어떤 세력’에 의해 실록에 포함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 윤이후도 파직되는데요. 기왕 이렇게 된 바, 더러운 정치판에 다시는 끼어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번엔 더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밤, 노비가 윤이후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1693년 9월 19일 -『지암일기』] 19일, 노비 서옥이가 서울에서 밤을 무릅쓰고 들어와 내게 편지를 전했다.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몇 년 전 함평에서 벌어진 대동미(大同米) 유용 사건 때문에 아버지를 서울로 잡아 오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도대체 윤이후의 혐의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1693년 10월 11일 -『지암일기』] 11일, 오늘 조사에서 첫 조서를 쓸 때는 혐의마다 분명히 변론했다. 그런데 조사관이 말하길,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번잡하게 하시면 나중에 꼭 다시 출석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에 다시 와서 고생하시게 될까 봐 걱정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조서를 다음과 같이 다소 간략하게 고쳐 썼다. “기근 때문에 굶주린 백성은 관아에 즐비한데,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는 텅텅 비어서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오래된 쌀을 새로운 쌀로 바꾸는 것을 특별히 허가하는 대신, 땅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각별하게 신경 써서 지급하라.‘는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저는 이 지시가, ’한편으로는 백성을 구하고, 한편으로는 쌀을 바꾸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고, 고을 내의 쌀들을 정리하여 일부는 조정에 올려 보내고, 일부는 백성들에게 풀었습니다. 따라서 제 무단으로 조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규정에 어긋난 점은 인정합니다.”’

윤이후의 혐의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조정의 허가도 없이 멋대로 곡식을 정리하다니, 그거 네가 꿀꺽한 것 아니냐?” 이러한 혐의에 대해 윤이후는 “저는 다만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지침을 근거로 정리한 것뿐입니다. 규정을 어긴 것은 맞지만, 결단코 사적 유용은 없었습니다.”라고 항변하죠. 윤이후 말대로, 곡식을 옮기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진행해야 했습니다. 쌀을 옮기다가 슬쩍 하거나, 다른 쌀로 바꿔서 이윤을 남기는 행위가 발생하기 쉬웠기 때문이죠. 어쨌든, 이렇게 일단 조사는 마무리됩니다. 열심히 반론하기는 했는데, 그 반론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윤이후는 한 달 넘게 서울에 머물며 처분을 기다려야 했죠. 이 답답하고 초조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윤이후가 택한 행보는 ‘글쓰기’였습니다. 감방 동료, 담당자, 문안 온 사람들, 들려오는 조정 소식 등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합니다. 다음은 윤이후가 석방되는 날의 일기입니다.

‘[1693년 10월 25일 등 -『지암일기』] 석방되는 날, 이헌, 정규상, 원상하, 이백, 이정만, 김태정, 이정집, 이형징, 이형, 노사제, 이우인, 이문준, 윤석후 등이 와서 문안했다. 딸은 옥바라지를 위해 괴산에서 올라왔고, 다른 가족들도 며칠씩 머무르며 나를 위로했다. 감방에 함께 갇힌 이는 이영, 이하정, 이병, 민순, 류준, 송광벽, 나, 이만영, 이돈오, 조정세였다. 조사 및 감옥 담당관은 류명헌, 유하개, 정유악, 목임일, 박경승, 노사제, 이존도, 이존도, 정행만, 심정구, 권성중, 이정석,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체포 담당자는 박오룡이다.’ 윤이후는 적당히 혼나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비록 규정은 어겼으나, 백성을 위한 조치였고 사적인 유용도 하지 않은 죄였으니까요. 그러나 그 소식이 들릴 때마다 조정과 팔도가 격한 알레르기 증세를 일으키는 범죄, 역모죄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인생의 위기, 그 느닷없는 불청객의 꽁무니를 보았을 때, 그 불청객을 쫓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해도 억울함과 미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 우리의 실존성은 존재자 간의 연대, 내재된 존재성의 재발견을 통해 바야흐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다소 기막힌 ‘정신 승리’가 삶의 평화를 다시 가져온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그들의 일기에 녹아 있습니다.

이씨 양반은 가오리고, 류씨 양반은 문어라니까

마지막 장은 가장 ‘보통사람들’이 좌충우돌, 우왕좌왕, 헐레벌떡하면서 뛰어다니는 사건 사고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진짜 보통사람’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이 책 전부가 양반이 기록한 일기로 구성되어 있듯, 이번에도 양반의 일기 너머에 아른거리는 보통사람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양반과 삶을 함께했던 노비의 이야기는 보통사람의 흔적을 쫓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먼저 사고뭉치 노비 덕노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오희문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봅니다.

‘[1594년 4월 16일 -『쇄미록』] 덕노가 밭을 매다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잔소리 좀 그만해! 듣기 싫다고. 정말!”이라면서 온갖 욕을 하며 싸우는 꼴을 보았다. 저런 불효막심한 놈을 보았나, 아무리 노비라지만 감히 어머니에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전에도 툭하면 자신의 어머니에게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기에 내가 여러 번 혼냈는데, 기어코 사람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모욕하다니, 금수만도 못한 자식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번엔 크게 매를 쳤다.’

그러자 덕노는 자신의 어머니 대신, 아예 오희문을 곯려주기 위해 작정한 듯한 행보를 보입니다. ‘[1594년 4월 18일 -『쇄미록』] 덕노는 매 맞은 뒤로 “아이고야, 나 죽네. 어르신, 매 맞은 것 때문에 오늘은 도저히 밭 매러 못 나가겠습니다.”라면서 죽어도 못 나간다고 성화를 부렸다. 어쩔 수 없이 어둔이와 그 딸내미 둘이서 밭을 매게 시켰는데, 남자 종이 없으니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일이 끝이 안 보인다.’ 덕노는 알았던 것이죠. 자신이 없으면 결국 손해 보는 사람은 오희문이라는 것을.

한편 덕노가 하는 일마다 시원치 않아서, 오희문은 일을 맡길 때마다 불안했는데요. 어느 날, 오희문은 ‘양봉’을 정산하는 임무를 덕노에게 맡겼고, 이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599년 11월 26일 -『쇄미록』] 덕노가 돌아왔다. 그런데 덕노는 풀 죽은 표정으로 결과를 내게 보고했다. “가지고 간 여섯 두(한 두=약 십팔 리터)의 꿀을 함흥의 사장에게 팔았는데, 그가 꿀을 재니까 다섯 두하고 석 되밖에 안 되었습니다. 꿀을 산 대가로 저희가 아무 무명천이나 가져가도 된다고 하여 무명천을 골랐습니다만, 전쟁 이후로 무명의 시세가 완전히 떨어진데다가, 그나마 있는 천들도 모두 하급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다. 원래 서울에 내다 팔려고 했던 건데, 함흥 쪽의 꿀 시세가 좋다고 해서 추운 날, 노비를 보내 팔게 했다. 게다가, 일 년 동안 생계를 해결해나갈 중요한 밑천이었는데, 그냥 서울에 내다 파는 게 나았다 싶을 만큼 큰 손해를 본 것이다. 하지만 덕노 일행도 이 추위에 눈보라를 뚫고 함흥까지 다녀왔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잘못된 정보를 듣고 결정한 것이다. 누굴 탓하랴. 한숨만 나온다.’

한편 함양 박씨가의 6대가 1834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1950년까지 써 내려간 일기,『저상일월』에는 흔한 19세기 거리의 풍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863년 1월 -『저상일월』] 오늘 거리에서 하나의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하인들이 모여서 동네의 양반들을 풍자하는 얘기였다. “이씨 양반은 가오리고, 류씨 양반은 문어라니까. 김씨 양반은 명태고, 권씨 양반은 포육이며, 또 다른 류씨 양반은 멸치, 다른 이씨는 조기, 또 다른 이씨는 정어, 조씨는 복어야.”’ 양반들의 생김새와 배포를 해산물에 빗대 풍자하는 풍경입니다. 그러나 이 하인들은 양반을 욕했다고 곤장을 맞지도 않았고, 생계를 위협받지도 않았습니다. 노비가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기 시작할 때쯤, 조선의 이야기는 막을 내려갑니다.

노비는 이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의 상징입니다. 다만 그들의 삶은 양반들의 기록에 남아, ‘보통 사람’의 모습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조연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가장 천한 존재인 노비와 가장 고귀한 존재인 양반이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가장 보통의 존재인 평민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제가 준비한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은 여기까지입니다. 사람은 솔직해지기 위해 일기를 쓰지만, 일기에서조차도 완벽히 솔직해질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이나 실수를 감추기도 하고, 때로는 썼다가 지우기도 합니다. 언어의 한계를 숙명처럼 짊어진 인간은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더없이 솔직하지 못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일기가 소중한 까닭은 ‘솔직해지려는 노력’을 담아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의 추한 욕망, 또는 흔들리는 양심을 마주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죠. 완연히 솔직하지 못한 것이 인간성의 한계라면, 되돌아보고 성찰하려는 노력은 인간성이 가진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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