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스틸러에게 묻다

신스틸러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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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스틸러에서 묻다
김시균 지음
북스토리

책소개

주목을 받지는 않지만, 극을 지탱하고 때로는 장면을 리드하며 신스틸러의 역할을 해내는 그들을 우리는 조연배우라고 부른다. 이 책은 한국 최초로 그들을 조명하여, 25명의 삶과 철학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다.

요약본 본문

신스틸러에서 묻다
김시균 지음
북스토리 / 2019년 6월 / 492쪽 / 25,000원

꿈은 가난할 수 없다

카르페디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 * 손종학
마 부장으로 1대 ‘마블리’가 되다: 손종학. 비슷한 연배이면 모를까. ‘2030세대’에게 그의 이름은 조금 낯설다. 얼굴을 본 것 같긴 한데, 쉽게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조연들이 늘상 겪곤 하는 이 ‘의문의 1패’는 중견 배우 손종학에게도 비켜갈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래도 대기만성이라 했다. 착실하게 사는 이에게 영광의 빛줄기는 어느 순간 쏟아지는 법. 손종학에겐 5년 전 이맘때가 그랬다. 2014년 10월 7일 첫 방영을 시작한 tvN 드라마 에 조연 출연했던 것이다. 무턱대고 극단 일을 시작한 지 27년째에 접어든 시기. 우연찮게 나온 이 17부작 시리즈는 손종학이라는 존재를 남녀노소 대중에게 각인시킨 일대 계기가 된다. 희대의 ‘꼰대’, ‘마초’ 상사 마복렬 부장으로 분하면서였다.

손종학 이름 석 자는 몰라도 ‘마 부장’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이 악독한 마초 상사는 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감초 캐릭터였다. 그 흔한 로맨스 코드 하나 없이 직장인들의 애환을 절절히 녹인 에서 그의 존재는 특히 유별났다. 요컨대 오상식 과장(이성민)과 저 멀리 대척점에 선 기피 1순위 상사였던 것. 극 중 마 부장의 ‘암 유발’ 명대사(?) 일부만 복기해보자.

“아니, 대체 애를 몇이나 낳는 거야? 애 둘이라고 하지 않았어? (중략) 애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임신이야!”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성희롱? 그게 왜 성희롱이야. 파인 옷 입고 온 그 여자가 잘못이지. 그래서 내가 뭐 만지기를 했어, 들여다보기를 했어. ‘숙일 때마다 그렇게 가릴 거면 뭐 하러 그런 옷 입고 왔니. 그냥 다 보이게 둬.’ 이 말이 성희롱이야, 어? 성희롱이야? 반어법이잖아.”

“커피 좀 타 오라는 것도 성추행이래요. 시집 못 가는 거 걱정해주는 것도 성추행이래요. 이놈의 기 센 여자들 등쌀에 살 수가 없어!”

★ 굉장히 현실적인 악독 상사였어요. 보는 사람마다 뇌리 깊숙이 각인이 됐죠. 그런데, 직장 생활은 해본 적 없으시다면서요.
회사 생활 경험만 없을 뿐이죠. 극단 자체가 어지간한 직장보다 군기가 세요. 위계가 있고 엄격하고, 과거엔 ‘빠따(야구방망이)’로 맞고, 기합 받고 이런 건 흔한 광경이었어요. 직장 안 다녀봤어도 주변에 회사원들이 좀 많겠어요. 얘기 들어보면 알지. 저도 밥벌이하는 직장인이나 마찬가지예요(웃음).

★ 캐스팅은 어떻게 되신 건지요?
김원석 감독 만난 날이 베트남 합작 드라마 찍는다고 하노이로 출국하기 전날이었어요. 부랴부랴 짐 싸고 있었는데, 제작사 대표가 전화했어요. 가기 전에 미팅 좀 하고 싶다고, 그래서 짐 싸다 말고 밤 열한 시에 경기도 일산으로 갔어요. 거기서 김 감독을 처음 만났죠.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감독이 그러대요. 영화 에서 연기한 변오구에서 ‘마 부장’을 보았다고. 근데 나중에 캐스팅 후 들은 말이지만, 제작진에서 그날 미팅하고 조금 고민했대요. 예상보다 순하게 생겼다면서, 허허.

★ 실제 선생님 모습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는지.
허허, 그건 제가 얘기한다고 믿으실 것 같진 않고. 아니라고 해도 또 안 믿을 것 같고. 마 부장이 최 전무 라인이잖아요. 어찌 보면 조직에 굴종하는 인물인 거죠. 전 어렸을 때부터 저항감이 유독 강했어요. 학교와 학연에 매이는 삶을 절대로 못 견디는 기질이었죠. 자유로운 걸 좋아해요. ‘독고다이’처럼 지낸 세월들인데, 젊은 시절 후배들이 제 눈에서 막 레이저가 뿜어져 나온다고 그랬어요.

자유로운 영혼, 권위에 반항하다: 손종학은 1967년 서울 태생이다. 날 때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걸까. 학창시절 그는 틀 안에 갇힌 삶이 끔찍이도 싫었다. 온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일이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초ㆍ중학교 때엔 선생들의 매질이 끊이질 않았다. 권위에 조금이라도 저항할라치면 체벌이 기다렸다. “폭력에 굴하지 않고 곤조 있는 학생”이었던 그가 학교에 거부감이 든 건 당연했다. 결국 서울 중대부중 2학년 무렵, 그는 학업을 작파한다.

★ 아예 그만두신 건가요?
아, 그건 아니고. 공부를 안 한 거죠, 허허. 영 재미가 없으니까. 고등학교 졸업까지 하고 대학은 동양공전(동양미래대학교) 건축학과에 갔어요. 당시 건설 경기가 좋았던 시절이라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어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역시나 금세 시들해지더라고.

★ 그러다 연극과 인연이 닿은 거군요. 결정적인 계기가 있으시다면.
대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스무 살 때. 라는 2인극을 홀로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연극을 수도 없이 봤죠. 보면 볼수록 ‘뜨거워진다’랄까. 하, 점점 더 교실에 앉아 있는 답답함을 도저히 못 견디겠더군요. 이거 하라 저거 하라 하면 기질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니까.

★ 그러다 이듬해 민예극단에 들어가신 거군요.
맞아요.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 때였으니 1987년 봄이었네요. 그해 어느 신문 지면에 민예극단 워크숍 단원 뽑는다는 작은 기사를 봤어요. 30~40명 정도 뽑는다더군요. 이걸 보면 ‘맨 땅에 헤딩’ 한번 해보자 한 거죠. 연극 해본 적 없고 전공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마치 무엇에 씐 것처럼. 마당극을 주로 하는 극단이었는데 이라는 공연을 올린다대요. 여기서 마당극, 창극은 기본적으로 다 배웠어요. 판소리, 한국무용 같은 연기 외적인 부분도 같이요.

★ 학교생활보다 즐거우셨겠어요.
그럼요. 뭔가 새로 만들어가고 몰랐던 걸 알아가는 재미가 상당했어요. 연기할 때 각각의 캐릭터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이들의 삶을 생각해보고 그러는 게 참 흥미롭더군요. 작품 외적으로도 즐거웠고요. 동료들이랑 땀 흘리고 울고 웃고 그랬던 시간들, 지금 생각해봐도 참 행복했습니다. 일 끝나고 사석에 돌아왔을 땐 술 한 잔 마시며 이야기 나누고……. 그런 ‘사람 냄새’에 중독돼버린 거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손종학에게는 스물한 살이 바로 그런 시기였다. ‘학업’이라는 답답한 ‘알’을 깨고 나와 ‘연극’이라는 새 세계로 진입했다. 장손인 아들이 안정적 직업을 갖길 바란 양친은 저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든 아들을 반길 리 만무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불가피했다.

★ 이후 생활은 어떠셨어요?
그야말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이었죠. 안정된 생활이 아니니까. 고정적인 월급이 보장돼 있는 분들은 미래를 계획할 수가 있잖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계획 자체를 세울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잡념을 오히려 덜어내게 되더군요. 앞날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도리어 해가 되니까. 내일 생각, 잡생각 없이 24시간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충실하자는 식으로 여태껏 살아온 겁니다.

★ 무명 생활이 모종의 견딤의 시간이셨겠어요.
그래도 그리 힘들었다고 여기진 않았습니다. 저는 다행히 집에서 얻어먹고 다녀서 배고픔은 몰랐으니까.

지방에서 혈혈단신 올라와 자취하며 살던 동료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거죠. 이 친구들 얘기 들으면 그저 놀랍고 경이로울 뿐이에요. 다만, 돈을 벌지는 못하니 사람 구실 못 하고 산 건 있어요. 경조사, 부조 이런 거 있으면 낼 돈이 없어, 몸으로 때우기도 하구요. 연극 일에 계속 몰입하면서 주변을 두루두루 챙기고 관심 가져주지 못한 건 지금도 부끄러워요.

아버지 제사상에 올려드린 상패: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은 있다. 손종학에게는 2003년이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여 후, 연극 가 공전의 히트를 친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일곱. 선배 연극인 김당희와 함께한 는 그 시절 황혼 로맨스물로 널리 각광받았다. 홀로 사는 60대 남녀가 만나 사별하기까지를 다룬 이야기로, 극 중 손종학은 주인공 박동만을 열연했다. “그해 ‘연극인 대상’을 안겨준 작품이죠. 난생 처음 연극만 해서도 먹고살 수 있게 됐어요.”

★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이 소식을 들으셨다면 정말 좋아하셨겠어요.
당시 받은 상패를 아버지 제사상에 올려드렸어요.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이걸 직접 보셨으면 뭐라 하셨을지……. 는 이후 이순재 선생님 등 여러 대선배들이 주인공으로 연기하시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 작품에 처음 출연한 건 바로 접니다. 오리지널인 거죠(웃음).

★ 그렇게 연극인 생활을 이어가다 점점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오고 계세요.
이후로도 연극은 계속했죠. 지금까지…… 어림잡아 70여 편 올렸어요. 두 아들 커가고 자연히 돈이 더 들대요. 연극 외에도 섭외만 들어오면 뭐든 해야 되겠고……. 영화와 드라마는 다른 세계였어요.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았으니까요.

★ 집에서는 어떤 아버지이십니까?
허허, 방임형이에요. 바깥에 풀어놓는 거죠. 지들 인생이잖아요.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건데. 이번에 큰아이가 수능을 봤어요. 파일럿 하고 싶다고 항공대 가겠다네요. 알아서 잘하겠죠(웃음).

★ 박찬욱 감독의 에 출연한 이래로 조연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세요. 대부분 기가 센 캐릭터 위주이시죠. ‘사’ 자 들어가는 직업이 많달까요. 대외협력실장, 김 판사. 의 최 형사 등……. 혹시나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안 하세요?
뭐, 생겨먹은 게 그런 건데요, 허허. 아무래도 때는 영화를 처음 해보다 보니 너무 ‘생짜’였고……. 솔직히 그런 걱정은 없어요. 나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기존의 인식을 깰 만한 배역이 나오면 언제든 도전할 테니까. ‘마 부장’처럼 재미있는 캐릭터를 또 만날 수 있는 거고요.

인터뷰가 끝난 건 점심시간 무렵. 그는 자주 가는 곰탕집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고 충무아트센터 건너편에 있는 곰탕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나란히 시켰다.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떠넘기던 와중에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지금 이 길을 후회해본 적 없으신가요?” 그가 허허 웃으며 답했다. “늘 후회하죠. 그러다 또 털고 일어나는 거지.” 땀 흘린 만큼의 보람은 있기에 그래도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이 정도면 “열심히 살았다, 재밌게 살았다, 잘 버텨왔다”면서. 그러더니 덧붙여 말했다. “후배 진선규가 청룡영화상 조연상을 받았을 때 이런 멋진 말을 날리더라고. ‘먼 우주에 있는 멋진 배우를 향해 나아가겠다.’ 나 역시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더 멋진 배우를 향해 나아갈 겁니다(웃음).”

배우로 살기로 했다

고 연봉 직장 때려치우고 연기에 투신 * 허성태
결혼 6개월차 회사원, 오디션 도전하다: 허성태. 부산 출신인 1977년생의 이 배우는 이름만으로는 아직 대중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을 복기하노라면 어느 순간 ‘아하’ 하게 된다. 이를 테면 영화 의 초중반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정출(송강호)에게 ‘쩍’ 소리 나게 뺨 맞던 친일 정보원이 바로 그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허성태의 얼굴을 세상에 알린 대표적 장면이다. 그의 존재감은 에서 더욱 빛났다. 서늘한 눈빛과 함께 청나라군을 지휘하던 용골대. 조선 충신 최명길(이병헌)의 아우라에 밀리지 않던 이 장수 또한 허성태였다. 어디 이뿐일까. 영화 의 초중반부. 장첸에게 이글대는 눈빛으로 맞서다 황천길로 가버리는 조선족 깡패 독사도 그다. 코믹 영화 의 스님 형배, 범죄물 에서 희대의 사기꾼 장두칠도 허성태였다.

2011년 당시 고액 연봉 엘리트 회사원이었던 그는 어느 늦은 밤. 회식 후 귀가해 아내와 도란도란 TV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화면 하단으로 흘러가는 문구 하나가 문득 눈에 띄었다. ‘SBS 기적의 오디션에 도전할 인재를 찾습니다.’ 신인 배우 발굴 취지의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취기가 조금 남아있던 허성태는 순간 도전 욕구가 인다. “여보, 나 저거 한번 해봐도 될까?” 아내는 의외로 쿨했다. “재밌겠네, 한번 해봐요.” 그렇게 된 것이다. 이제 막 과장 진급을 앞두고 있던 결혼 6개월차 회사원 허성태는 난생 처음 배우 오디션에 뛰어들었다. 그때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 충동적이었던 거네요?
우연찮게 해본 거죠. 반 장난삼아. 아니 근데, 거기 계신 심사위원 분들 전부 저더러 소질이 있다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배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지만 재능이 있다고 해주시니……. 그 격려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평생 못 해볼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근데 이 정도로 인생이 바뀌게 될 줄은……(웃음).

오대수로 입증한 가능성: 딴에는 ‘반 장난 삼아’했다고 해도, 그에게 배우라는 꿈이 없었던 건 아니었던 듯싶다. 2011년 6월 24일 첫 방영한 1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멀쑥한 먹빛 정장 차림의, 회사원 티가 역력한 그가 심사위원단(배우 이범수, 김갑수, 이미숙, 이재용, 영화감독 곽경택 등) 앞에 선 채로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제가 왜 이렇게 해야 하냐면, 사실은 제 아내 때문입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 이거 안 하면 내 남편 아니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맨날 남 눈치 보면서, 돈이 어떻고 현실이 어떻고 그런 거 생각하지 마라. 나 직장 있다. 내 5년 만에 벌 것을 당신은 10년 만에 벌면 되잖아. 그렇게 적극 밀어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카메라에 담긴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채였다.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고, 목소리는 거의 울먹거릴 지경. 감정을 미처 추스를 새 없이 준비해온 연기를 꺼내야 했다. 당시 그가 선보인 건 의 그 유명한 후반부 신이었다. 참혹한 진실을 깨달은 21세기 오이디푸스 오대수(최민식)가 제 딸을 볼모로 협박하는 우진(유지태)에게 지난 과오를 속죄하며 애원한다. 귀기가 느껴지는 최고난도 연기가 펼쳐졌다.

“제발, 제발 미도에게만은 이 사실을 알리지 마라……. 걔가 무슨 죄가 있냐……. 다 내가 잘못한 거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 미도만은 그냥 놔둬 좀 어! 흐……, 만약에 니가 미도 귀에 내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하면…… 너 우진이 너 이 지구상 어디서도 니 시체를 발견할 수 없을 거야! 왜? 내가 잘근잘근 씹어 먹을 테니까……. (중략)…… 야……, 우진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이 말 다 취소할게……. 우진아, 나 니가 나보고 니 똥개가 되라면은 내가 똥개가 된다! 왈왈! 꼬리 살랑살랑……. 어때? 우진아, 우진아.”

이 순간 그는 아예 오대수와 혼연일체가 된다. 심사위원마다 절찬을 쏟아냈다. “그거 진짜로 민 거 아니죠?(마지막에 허성태는 가위 대신 때밀이로 제 혀를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무튼 굉장히 잘 봤어요.”(곽경택) “기교가 섞이지 않은 연기 잘 봤습니다.”(이미숙) 허성태를 가장 유심히 본 듯한 배우 이재용은 이같이 말했다. “예민함 같은 게 단순한 개인기 차원을 넘어선 것 같아요. 느낌, 열정 이런 것들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 어떻게 연습한 건가요, 연기해본 적 없었다면서요.
그냥, 영화에서 본 대로 따라 한 거죠. 그저 계속 반복, 또 반복 했어요. 2주 동안 정말이지 미치도록요? 준비해온 걸 모두 마치고 나니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고 계시더군요. 알고 보니 합격이었던 거예요. 멍한 상태이면서도 대단히 감격스러웠죠. 아, 내가 연기 재능이 있긴 한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 첫 순간이었고요(웃음).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6개월간 내내 합숙생활을 했어요. 이범수 선생님이 살신성인으로 열심히 가르쳐주셨고요.

전자회사 판매왕에서 조선소 엘리트 사원까지: 그럼 새 출발을 하기 전,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2000년대 초반. 그는 남부러울 게 없는 엘리트 회사원이었다. 부산대 노어노문학과를 나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그는 이십 대 중반,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마케팅팀에 들어갔다. 첫 직장이었다.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사업 수완이 유독 남달랐다. 러시아 주요 호텔들을 누비며 LCD TV를 대거 팔았고, 금세 ‘판매왕’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후엔 거제도에 있는 조선소로 이직해 기획조정실에서 일했다. “당시 연봉 6,000만 원이 넘었다”고 한다.

★ 그러다 오디션을 계기로 배우의 길로 접어드셨죠. 이후 무명 시절은 어떻게 헤쳐나갔나요?
기회가 있으면 뭐든지 했어요. 단편영화든 독립영화든 참여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지 뛰어갔죠.

아내를 향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
★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로 아무래도 생계에 대한 어려움이 있지 않으셨겠어요. 무명이다 보니 다른 일도 겸해야 했을 듯도 싶고요.
그럼요. 안 힘들 수가 없었죠. 아주 조금 남은 퇴직금으로 원룸 하나 구해서 살았어요. 장기적으로 다른 일을 하긴 어려워 단기 아르바이트로 이것저것 했어요. 장난감 포장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그러다가 아내 혼자 온전히 외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어요. 그럼에도 아내는 ‘돈은 내가 벌면 되니까 당신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며 끝까지 격려해주었고요. 한동안 아내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그런 아내를 생각하면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요.

★ 그러다 천만 영화 에 초단역으로 출연하셨지요.
그렇죠, 화면에 나온 시간은 단 1초예요. 4박 5일 기다리고 연기했는데 15만 원 정도 받았던 것 같아요. 이병헌 선생님(그는 선배 배우를 ‘선생님’이라고 높여 불렀다)께서 연기하신 광해군 처남을 취조하고 인두로 지지고 주리 틀던 단역이었죠(웃음).

★ 얼굴이 제대로 알려진 건 의 친일 정보원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주 실감나게 뺨을 맞으신 뒤로 온라인상에 회자가 좀 되었죠. 어떻게 캐스팅된 캐릭터인가요?
오디션을 본 거죠. 1차를 통과하고 2차 때 김지운 감독님과 함께 연기를 해보는 오디션을 치렀어요. 1시간 30분 정도 디렉션을 받고 연기했죠. 2~3주 후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을 땐 어찌나 기쁘던지……. 말씀하신 뺨 맞은 장면은 제가 설득해서 넣은 장면이었어요. 송강호 선생님께 2박 3일 동안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계속 설득을 했지요. 그걸 선생님이 김지운 감독님께 건의 드렸고 다행히 저의 제안대로 찍게 됐고요. 총 여덟 대 정도를 맞았던 것 같아요. 두 대는 진짜 아팠는데 나머지는 안 아팠어요. 안 아프게 소리 잘 나게 때려주셨거든요(웃음).

★ 이후에도 , , , 등에 이르기까지 쉴 틈 없이 신작들에 출연 중이세요. 그만큼 배우님을 찾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언급한 영화들의 공통점이라면 전부 삭발 상태였다는 것인데…….
전부 비슷한 시기에 찍었거든요. 가장 처음 캐스팅된 작품이 황동혁 감독님의 이었는데요, 이때 삭발을 처음 해봤어요. 그래서 다른 작품은 한동안 못 하겠구나, 하며 아쉬워하던 차였는데, 의외로 전부 삭발 배우가 필요하더군요. 에서 가발을 쓰면 된다고 해서 다행이다 싶었고요. 다시 생각해도 감사할 따름이죠.

★ 배우님을 보면 주변에서 요새 뭐라고 하나요?
아내는 물론이고, 어머니가 특히나 좋아하세요. 아들 자랑할 게 많아졌잖아요. 친척들도 드라마 이나 영화 , , , 에서까지 ‘내가 알고 지내던 성태가 아닌 것 같다’고들 하세요. 이런 반응을 해주시면 정말로 행복하죠. 이 길을 잘 선택했구나. 내가 지금까진 잘해오고 있구나 싶어서요.

허성태는 자기 출연작이 개봉을 하면 아침마다 극장으로 간다고 했다. 본인 연기를 모니터링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서너 번째 찾아갔을 땐 관객의 반응을 유심히 살핀단다. 관객이 놀라거나 호응해주는 모습이 관찰이 돼야 “아, 내 몫은 잘 전했구나” 싶어 안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허성태가 참 다양한 연기 색을 지닌 배우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입증해 보여야겠죠. 늦은 나이에 데뷔했고 이제 막 마흔을 넘겼지만 제 한 몸 부서져라 연기할 각오는 충분히 돼 있습니다(웃음).

★ 배우님만의 궁극적인 목표는 뭔가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어요. 영화 와 혹시 보셨나요? 사랑하는 가족처럼 소중한 존재에게 누군가가 위해를 가했을 때 분출하는 폭발적인 감정 같은 게 있어요. 김래원, 원빈 선배님이 보여준 그 엄청난 연기를 저도 언젠가는 꼭 대중에게 선보여드리고 싶어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상실의 아픔을 딛고 저어가는 삶 * 안미나
화려한 데뷔, 뒤이은 고난: 인생을 산다는 건, 숱한 ‘상실’과의 대면인지 모른다. 특히,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관계의 상실이란 말할 것도 없다. 아프고 슬프기 그지없지만 삶에서 불가피한 사건이기에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 아름답던 호시절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늘 그러하듯 무심히 흘러갈 뿐이므로, 싱그럽고 생기 넘치던 ‘그때’ 역시 상실된다. 청춘이 찬란한 것은 그것이 유한함의 속성을 머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삶이란 ‘상실의 총합’이다.

배우 안미나의 지난날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앞길이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초창기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는 약보단 독이었다. 그는 MBC 드라마 으로 데뷔했다. 당시 최고 시청률(50.5%)을 기록한 이 작품에서 그는 선배 파티셰 김삼순을 동경하는 사투리 소녀를 연기했다. 그러곤 일약 주목받는 신예로 떠오른다. 이듬해에는 영화 데뷔작 속 다방녀를 호연해 ‘신스틸러’로 부상했다. 최곤(박중훈)의 라디오 방송에서 선보인 김선욱의 고백은 지금 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예능에서의 존재감도 도드라졌다. 그때 KBS 에 도전해 2,7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2등을 꿰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순탄한 배우 생활이 잠시 이어졌으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자취를 감춘다. 영화 의 이북녀 송수미로 돌아오기까지 말이다. 안미나에겐 “기나긴 공백기이자 상실의 시기”였다.

★ 오랜 기간 활동이 뜸하셨어요.
제가 삶에서 누리던 것들을 조금씩 상실해간 시기였어요. 그 ‘상실감’에 줄곧 사로잡혀 있었어요. 몇 년간 늘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후에도 SBS 드라마 가 잘되고 그 뒤로도 작품이 꾸준히 들어왔으니까요. 언제부터인가 이 모든 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어요. 저한테 일이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고 저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그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한 거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낙관에 젖어 자만했던 거죠. 그런데, 일련의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고부터 ‘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지금까지도 내 노력만으로 된 게 아니었구나’ 하고 느끼게 됐어요.

★ 그게 언제적 일인가요?
4~5년 전 얘기예요. 작품 4개가 연이어 엎어졌어요.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요. 그간의 ‘믿음’들이 한순간에 무너졌어요. 그 모든 ‘있음’이 상실로, ‘없음’으로 바뀌었죠. 소속된 회사가 부도가 나고, 새로 들어간 회사도 잘 안 되었고요. 그렇게 작품들이 계속 엎어지면서 쭉 쉬게 됐어요. 4년간 백수 생활을 했어요. 벌이가 없으니 돈이 없었죠. 해가 거듭되니 ‘어린 나이’도 점점 없어지고, 밝았던 옛 성격도 없어지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가고……. 그간의 모든 관계들이 사라졌죠.

재난처럼 다가온 상실, 현실에서 도망치다: 상실은 재난처럼 다가왔다. 신인 배우가 감당키엔 초창기 성공과의 낙차가 너무 컸다. 우울과 절망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누적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갔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어차피 인간은 죽고 없어지는데 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실존적 자문이 이어졌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렸고, 그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다 결국 사라지기로 한다. 난생 처음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몇 안 되는 푼돈과 여행가방 하나 싸든 채, 속 선옥처럼. 그때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 가출한 건가요.
현실에서 도망쳤어요. 강남구청 인근에 조그마한 단칸방을 얻었어요. 거기서 2년 넘게 살았어요. 문제는 겨울에 너무 춥다는 거였어요. 이불이란 이불은 바닥에 다 깔고 패딩을 두 겹 세 겹 입고 혼자 벌벌 떨었어요. 제가 자처한 거지만 서러웠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고 우습죠(웃음). 집에 있으면 부모님 걱정하신다고 나온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다 허사인 것 같고…….

★ 연기에 대한 갈망은 없었나요?
‘나는 연기자야’라는 생각은 좀체 벗기 힘들었어요. 고개만 들어도 욕심이 났으니까요. 하지만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사흘 밤낮을 울고 포기한다. 퉁퉁 부운 눈으로 회사에 가서 말한다. “저, 연기 더는 못 하겠어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고,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들어가 이력서부터 올린다. 어렵사리 대학 시절 해본 영어 과외 자리를 구했고, 야간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뛴다.

폐허의 응시, 치유의 시간 그리고 극복: 안미나에겐 이 시기가 ‘0년’이었다. 지나간 일들은 되도록 잊었다. 아니, 잊으려고 발악했다. 그간의 욕심도 모두 내려놨다. 평소 좋아하던 독서에 매진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무너진 내면을 담금질하는 데 독서만 한 것이 없어 보였다.

안미나는 “원래 내겐 아무것도 없었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없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어요. 잃을 게 없었으니까요. 원래도 잃을 게 없었는데 잃을 게 많다고 착각했었다는 걸 깨달았던 거죠.”

아픔은 서서히 극복됐다. 아픔이 극복되니 세상도 얼마간 달라져 있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기회 또한 다시금 찾아왔다. MBC 아침드라마 에 캐스팅된 것이다.

★ 감회가 남달랐겠어요.
한창 아르바이트하던 중에 제안이 왔어요. 너무나 감사했죠.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예전엔 그런 걸 당연하다 여겼거든요. 제안이 오면 이거 ‘아침드라마야?’, ‘나 몇 번째 역할이야?’. ‘나보다 큰 배역 누군데?’ 같은 오만한 질문부터 했을 거예요. 그런데 길지 않은 기간이마나 ‘없음’의 상태에 놓여 있다 보니, 너무 기쁘고 감사하게 다가오는 거예요.

★ 성숙해진 거네요.
과거의 허울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아요. 다시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 과외를 그만두지 않았어요. 왜 그랬냐면, 제가 일을 하니 다시 이 ‘있음’에 익숙해지려는 거예요. 해서 제가 겪은 ‘상실’들을 계속 환기시키려 했어요. 그리고 이후 영화 가 도착했어요.

★ 양우석 감독이 직접 연락하셨다고 들었어요.
소속사가 없어 캐스팅 첫날부터 계속 제게 연락을 주셨어요. 전화가 잘 안 되면 페이스북으로 친구 신청도 해주시고, 여러 루트로 접촉하셨죠(웃음). 오디션 보러 오라고 하시는 말씀인가 보다 짐작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이미 제 이름이 쓰인 시나리오가 있는 거예요. 그날 바로 의상 치수 재고 촬영 준비에 들어갔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의 북한 여공, 기다려준 사람들
★ 에서 월남하는 북한 여공으로 중반부까지 나오셨어요. 북한 1호와 엄철우(정우성), 여민경(원진아)과 같이 내려오게 되죠.
정우성 선배님과 북한 개성공단에서 남한으로 탈출하는 북한여공 송수미 역이었습니다. 현실적이기도 하면서 인간미도 지키고 끝까지 의리도 지키는 여자였죠.

★ 극 중 수미는 남한에서 결국 총에 맞아 죽죠. 출연 분량이 많진 않았는데, 잘려 나간 신이 좀 있을 듯싶어요.
아휴, 많았죠. 준비했던 신 중에 신경 많이 쓴 게 잘려나가 좀 슬펐어요. 직접 대사도 써서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정우성 선배님도 현장에서 지켜보시다 그 신이 슬프다고 우셨는걸요. 총 맞고 죽는 신에서 여민경한테 하는 대사가 더 있었어요……. 나중에 감독님이 미안하시대요(웃음).

★ 기억나는 말씀이 있다면요.
최근에 무대 인사 돌고 회식자리에서 정우성 선배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미나야, 정말 잘 봤고 안미나 하면 연기 잘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어서 선배들이 기대 많이 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많이 안 나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어.’ 너무나 감사하고 큰 응원이었어요. 저를 기억해주고 계셨다는 거니까요.

인생은 숱한 상실을 동반하지만 한편으론 또 기억된다. 때때로 그 기억은 누군가를 살리고, 다시금 일으킨다. 안미나가 인생 2막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자신을 기억해준 누군가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는 말했다. “매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려고요.” 앞으로 그의 연기를 보게 될 날이 더 많아지리란 예감이 그때 문득 들었다. 기분 좋은 예감이었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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