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치유 식당

심야 치유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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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치유 식당
하지현 지음
푸른숲

책소개

우리는 정말 뭔가 더 해야만 하는 걸까? 저자는 노력하는 만큼 더 지치고 무기력해지는 일상의 원인을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에서 찾는다. 그는 적극적 태도와 긍정적 마음을 강조하는 수많은 심리서들이 제시하는 해법을 비틀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그 동안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차분히 돌아보도록 한다.

요약본 본문

48일 동안 잠 못 든 남자

당신, 오늘 하루도 너무 열심히 살았다 – 감정 받아들이기

#1 전직 정신과 의사, 하지만 이제는 ‘노사이드’의 주인장입니다
전직 정신과의사였던 철주가 대학가 뒷골목 지하에 문을 연 20평 남짓의 작은 가게 노사이드는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다. 워낙 외진 곳에 있다 보니, 밤이 되면 단골들만 좀비처럼 나타나서 마시고 싶은 술을 마시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다 간다.

“아, 짜증나. 이제 끝났네.” “오랜만이에요, 보라 씨. 어디 갔다가 와요?” “안녕하세요? 과 회식을 했는데 이제야 끝났어요. 맛있는 술 없을까요? 딱 한 잔만 하고 가려고요.” 철주가 요새 출근 도장을 찍으며 단골이 돼가는 보라의 잔에 얼음을 넣고 한 잔을 더 부어주는 순간 손님 한 명이 쭈뼛거리면서 들어왔다. “저, 어디 앉아야 하지요? 혼자 왔는데요.” “편한 대로 앉으세요. 거기 앉아도 되고, 이리 와서 같이 앉으셔도 되고요.” 바에 앉아 있던 영수가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반쯤은 의도적으로 그를 바 쪽으로 유도했다.

“아…… 그럴까요.” 바의 구석 자리로 향한 남자는 서류 가방을 옆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동안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말했다. “저, 좀 독한 술 없나요? 한 잔 마시고 들어가서 잠을 좀 자려고 하는데요.” 남자는 지친, 그러나 예의 바른 톤으로 말했다. 철주가 잔을 꺼내 보모어를 부어주며 말했다. “잠을 자기 어려운가 봐요. 싱글 몰트 위스키예요.”

술잔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남자는 두 손으로 잔을 쥐고 단숨에 들이켰다. 다음 순간 남자는 진저리를 치면서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없이 잔을 철주에게 내밀었다. 철주가 따라주자마자 남자는 다시 한 잔을 마셔버렸다. 옆에 앉아 있는 보라가 물을 한 잔 따라 남자에게 건넸다. “물도 같이 마셔요. 잠을 못 잔 지 얼마나 됐는데 그러세요? 술보다 차라리 수면제를 먹지 그래요.” “수면제도 먹어봤죠. 잠깐뿐이에요. 별의별 짓을 다 해봤지만 소용이 없어요. 내 불면증은 영원히 고치기 어려운 걸 내가 알아요. 오늘로 48일째예요. 오늘도 하루 종일 멍한 상태로 있다가 주문을 잘못해서 크게 손해를 봤어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저, 여기 술 한 잔 더 주실래요?”

철주는 남자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힘드시죠? 제가 잠을 좀 잘 수 있게 도와드릴까요? 술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제가 아는 비방이 하나 있는데.” “그래요? 뭔데요?” “제가 내는 문제를 오늘 밤에 들어가서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답을 찾아내면 잠을 잘 수 있을 거예요. 단, 인터넷을 사용해서 검색해보시면 안 돼요, 알았죠? 문제는 이겁니다. 도시에 A와 B, 두 곳의 중심지를 잇는 두 개의 간선도로가 있었습니다. 통행량이 너무 많아져서 시에서는 두 곳을 이어주는 세 번째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이 세 번째 도로는 기존 도로보다 거리가 더 짧았어요, 그래서 시에서 생각하기로는 세 도로 모두 속도가 빨라질 것이고, 특히 세 번째 도로는 가장 짧으니까 더 빨라질 것으로 예상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로를 개통하고 난 다음에도 전체 통행량은 변함이 없는데 속도가 빨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요? 왜 그런 것일까요? 자, 이게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답을 구하게 되면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전에 이 문제 덕분에 잘 수 있었어요” “그래요? 어째 잠이 더 안 올 거 같은데……. 하여튼 감사합니다. 계산할게요. 얼마죠?”

남자는 조용히 계산을 하고 가방을 들고 나갔다. 보라는 득달같이 철주에게 달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다고 잠이 와요? 잠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잖아요.”
“불면증 치료는 대상자에게 맞춰서 해야 해. 불면증은 뇌의 병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마음의 병이기도 하지. 인지적인 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정신과 교과서에는 안 나오는 얘기야, 지금부터 말하는 건.” 철주가 말한 내용은 이렇다.

오늘 저녁 그의 옷차림을 보면 감색 싱글 수트, 저가 제품은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맞춤복도 아닌. 적당한 가격에 눈에 띄지 않는 정장이었다. 그리고 정장 소매 끝단으로 하얀 셔츠가 나와 있었고 커프스 단추도 달려 있었다. 단정한 머리에 젤을 바른 헤어스타일까지 감안할 때 그는 70퍼센트 확률로 금융계나 컨설트업계 직장인이다. 그리고 차고 있는 시계나 많이 닳은 구두 뒷굽으로 보아 부유한 집안 출신은 아니고 결국 현재의 직업을 갖게 되면서 그런 복장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리에 앉을 때에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더운 날인데도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흐트러지면 자신의 존재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굳게 믿어온 스타일. 한 마디로 지적 능력은 탁월하나 감정을 느끼고 다스리는 데에는 젬병일 가능성이 많은 성격 유형이다. 이런 사람이 불면의 고리에 낚이면 자신의 지적 능력을 120퍼센트 발휘하여 의지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렇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불면의 고리는 깊어져서 더욱더 잠은 오지 않는다.

#2 해가 지기 전에 시작하면 걱정이 밀려든다
민수는 오늘도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이로써 49일째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잠을 못 잔 적이 없었다.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가볍게 선식을 먹고 회사에 도착하면 일곱 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하고 아홉 시 뉴스를 보고 나서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벌써 5년이 넘는다.

민수의 삶은 단조로우면서도 나름대로 바쁜 편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민수는 만족도 불만도 없었다. 두 달 전에 인사이동으로 본부장이 바뀌기 전까지는 최소한 그랬다.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된 본부장은 1년 내에 파격적인 실적을 올려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회사로 들어왔다. 본부장은 민수에게도 이유 불문하고 영업 실적을 30퍼센트 더 올리는 업무계획서에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다. 얼떨결에 사인한 민수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더 많은 실적을 단기간에 낸다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는 그날 저녁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가습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누워서 잠을 자려 해도 잠을 잘 수 없었고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한번 밤을 새고 나자 계속해서 ‘오늘 밤에는 잘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니, 낮에는 일을 해도 멍하고, 급기야 어제는 주식 거래를 하다 실수해서 몇 달 동안 벌었던 돈을 모두 날렸다. 민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들어간 것이 노사이드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술을 마셔서 알딸딸하기는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 본 가게 사장이 낸 이상한 문제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거다’ 하고 답이 떠오르려는 순간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순간 답을 찾지 못한 것보다는 잠을 깼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다시 잠을 자기 어려워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해보았다.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브래스 패러독스였다. 그걸 아는 순간 민수는 다시 잠들 수 없다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민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다시 그 술집에 들러 보기로 했다. 그나마 깜박 잠이 들 뻔했던 것도 술 덕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3 브래스 패러독스, 이성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문제
“어떻게, 잘 잤어요?” 철주는 민수가 들어오자 자기 처방이 맞았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나 민수는 철주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바에 앉으며 말했다.”술 한 잔 주세요. 어제 마신 술보다 더 독한 것은 없나요. 그래도 가깝게까지는 갈 수 있었어요. 덕분에요. 잠이 들락말락하다가 깨어났어요.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답을 찾아봤거든요. 사람들이 모두 가장 짧은 새로 생긴 길로 몰리기 때문에 도리어 전체 속도는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 말이에요.” 철주가 민수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결국 인터넷을 찾아봤군요. 찾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불면증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에 대한 집착과 반추를 막기 위해서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하는 기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특히 완전히 모르는 문제나,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철학이나 종교적 화두, 답이 나올 듯 말 듯한 문제가 불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의 악순환을 끊을 기회를 준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술이 그래도 도움이 되는 것 같네요. 오늘은 더 독한 술을 마셔보려고요.” 철주는 진심으로 민수를 도와주고 싶었다. “오늘 저녁에는 제가 직접 손님 집에 갈게요. 환경적인 요인이 잠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손님이 불면증을 고치고 싶다면 제가 도와드리고 싶은데요.”

#4 트랙에서 벗어난다고 삶이 무너지진 않는다
민수의 집은 철주가 예상했던 대로 단출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과 방. 침실에 들어가자 철주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여러 개의 시계였다. 벽에 큰 시계가 걸려 있고, 침대 맡에는 자명종이 달린 시계, 그리고 건너편 탁자 위에는 라디오에 시계가 달려 있었다. “먼저 시계부터 치웁시다.” “네? 왜요? 시계가 없으면 몇 시인지 알 수 없어요. 늦게 일어나 지각할까 봐요…….”

“하지만 시계가 있으면 잠을 잘 수 없어요. 시계가 있으면 자꾸 몇 시인지 확인하고 싶어져요. 한참 자고 난 것 같은데 5분,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가 많지요? 시계는 불면의 적이에요. 알람은 내가 맞춰서 방 밖에 세워놓을게요. 민수 씨는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해요. 민수 씨 같은 사람들은 성실해서 사고치지 않고 잘 살 사람들이에요. 대신 트랙에서 벗어나는 것도 힘들죠. 민수 씨는 트랙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모두 허물어져 버릴 거라 여길 거예요.”

철주는 민수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하고 그사이에 방 안을 다니면서 물건들을 조금씩 삐딱하게 놓거나 잘 정돈되어 보이는 것들을 흩뜨려놓았다. 민수가 씻고 나와 철주가 만져놓은 것들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제자리로 놓으려고 하자, 철주는 그것도 불면증 치료를 위해서 꼭 필요하니 오늘 하루만 참으라고 설득했다. “자, 지금 시간이 열 시입니다. 그런데 열한 시까지는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돼요. 내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열한 시는커녕 열두 시가 돼도 잠이 오지 않는데. 어제도 겨우 잘 만하다가 두시부터 날밤을 샜다고요.” “그러면 잘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열한 시까지는 절대 자서는 안돼요. 자, 나와요.”

철주는 의자를 마루에 갖다 놓고 민수를 거기에 앉게 했다. “지금부터 여기 앉아서 저랑 같이 텔레비전을 봅시다. 그리고 열한시가 될 때까지는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돼요. 그 시간 전에 졸면 제가 깨울 거예요. 알았죠?” 철주는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텔레비전 볼륨을 낮춘 채 민수를 간간히 쳐다보면서 앉아 있었다. 열 시 반이 되어도 정신이 말똥말똥한 민수는 속으로 ‘열한 시에 잠이 올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철주는 간간이 “열한 시까지는 잠들면 안 됩니다, 절대로!”라고 말할 뿐이었다.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열한 시에 가까워지자. 절대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던 민수의 고개가 땅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열한 시가 되자, 민수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철주는 민수를 부축해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는 알람을 맞춰주고 집을 나왔다.

#5 이해는 그만,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세상
철주는 패러독시컬 인텐션 테크닉(Paradoxical Intention Tech-nique)을 이용했다. 이런 사람의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의 잘못된 믿음을 교정해야 한다. ‘잠을 못 잘 것이다’라는 굳은 믿음의 해결은 ‘넌 잘 수 있어’라는 위로나 암시가 아니라 ‘너는 자면 안 돼’라는 정반대 방향의 명령으로 풀 수 있다. 이 역설적인 방법은 특히 민수처럼 강박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에게 효과적이다.

민수는 강박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강박의 특징은 정서를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고에 골몰하는 것은 억압하고 있는 내재적 무의식적 정서가 의식으로 치고 올라와서 자아를 집어삼킬까 봐 두려워 이성을 적극적인 방어기제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즉, 감성을 막는 최고의 무기는 이성이다. 물과 기름 같다.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껴야 할 상황에도 “미안해요” 한마디면 끝날 일을 수십 분 동안의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미안하다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평소와 다른 감정을 느끼면 자신이 그것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쓴다.

감정을 가두는 것 외에도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한 노력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민수는 매일의 일상을 똑같이 반복한다. ‘루틴’이 중요하다. 그것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고민을 하는 것이 싫다. 강박적인 사람들에게는 ‘루틴’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루틴’ 안에 있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최대한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만들어 지켜나가려 한다. 옷도 같은 옷, 비슷한 색의 옷을 입으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옆에서 보면 참으로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대가를 치른 대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가두려고 노력하는 만큼 강해진, 날것의 공격성을 탑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맹수 한 마리를 마음에 가둬두고 그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수의 경우 세상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일상적 삶의 여유를 포기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잠까지 못 자게 되었으니, 민수의 경우 자기가 만든 덫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민수의 불면을 해결하는 길은 궁극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봉인된 감정을 서서히 풀어서 숨구멍을 트고 그것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진짜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머리로만 아는 것은 소용이 없다. 행동을 통해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몸이 느껴 봉인의 문을 열어야 한다.
다음날 밤 노사이드로 민수가 찾아왔다. “오늘도 독주를 드릴까요?” “아니요, 맥주나 한 잔 주세요. 그런데 도대체 제게 뭘 하신 거예요?” “그건 알 거 없어요.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알게 되면 민수 씨에겐 더 이상 효과가 없을지 몰라요. 내가 첫날 밤에 했던 방법이 실패한 것처럼요. 그건 그렇고, 오늘 굳히기를 했으면 하는데, 저를 한 번만 더 믿어줄 수 있어요?” “뭔데요? 무려 50일 만에 잠을 자게 해주셨는데, 뭐든지 해야죠.”

“윗옷을 벗고 이 티셔츠를 입어봐요. 그리고 음악에 맞춰 한번 놀아봐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 있어요.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느끼면 되는 세상. 민수 씨에게 필요한 건 그거예요.” 이어서 철주는 롤링스톤즈의 〈새티스팩션Satisfaction〉을 틀고 볼륨을 올렸다. “자, 따라해봐요.” 철주가 고개부터 흔들흔들, 서서히 그루브를 탔다. 민수는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까닥까닥하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리듬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굳어진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민수는 그동안 감정이라는 것을 괴물로 여기고 무서워했다. 감정을 마구 날뛰는 로데오 종마로 여긴 민수는 이성에 철저히 의지했다. 마치 로봇처럼 살아온 민수는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일부터 민수의 삶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감정이라는 맹수를 길들여서 자신을 지키는 충견으로 만드는 것이 이제부터 민수가 해야 할 일이다. 쓰러지고, 할퀴어지고, 물릴지도 모른다. 그 아픔을 민수가 견딜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신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공황장애에 걸린 남자

오늘 몇 분이나 멍한 시간을 가져봤습니까? –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

#1 제가 원하는 건 최선이 아니라 베스트예요
사십대 초반의 임원으로 한 사업부 전체를 총괄하고 있는 동우는 어제 있었던 플랜트 수주 입찰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제안 요청서에 맞춰 한 달간 팀원들을 닦달해서 제안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김 팀장이 맡은 설계 초안에서 실수를 발견한 것이다. 이 부분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동우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압박감을 느꼈다. 질 수 없었다. 설계를 변경해서 다시 올릴 테니 일주일의 말미를 달라는 동우의 요청을 다행히 발주업체에서 받아들여 주었다.

동우는 팀원들을 다그쳤다. “자 여러분 오늘부터 다시 철야입니다. 많이 힘든 것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면 지난 한 달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다 여러분들을 위한 노력입니다. 힘들겠지만 한번 해봅시다.” 직원들은 동우의 지시를 듣고 자기 자리로 가면서 툴툴거렸다. 동우가 이 정도 조졌으면 이제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숨 돌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동우를 이 회사로 데리고 온 부사장이 수주 입찰이 걱정이 되어 한 전화였다. 동우는 부사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꺼내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끊고 전화기 화면을 보니 그사이 아내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자꾸 전화야?”

“나도 오죽하면 전화하겠어요? 오늘 정수 파더스 데이라고, 학교에서 행사한다고 했잖아요. 왜 안 와요? 아이가 얼마나 기다리는데.” “맞다, 미안. 지금 바로 갈게.” 한동안 아내와 냉전 중이었던 동우는 이번에 점수를 따려고 행사에 꼭 참석하겠다고 저녁 약속도 다 비워놓았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동우는 외투를 꺼내 들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퇴근 길 도로는 주차장이었다. 동우는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넌 다음에 택시를 잡아타야겠다고 결정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을 내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들의 번호였다. 그러고 나서는 아내의 번호, 이번에는 장인의 번호까지 떴다. 지금 받으면 욕만 먹을 게 뻔했다.

아들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 그런 아들을 보고 나서 동우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아내의 싸늘한 눈빛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회사에서 밤을 새울 직원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마치 백 미터 달리기를 15초에 끊고 난 다음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더니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게 심장마비인가. “아저씨, 잠깐 세워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
길가에 급히 차를 세운 후 바람을 쐬고 심호흡을 해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가라앉지 않고 도리어 숨만 더 거칠어질 뿐이었다. 마침 눈앞에 작은 병원 응급실이 보였다.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한 동우는 들어가자마자 외쳤다. “심장마비인 것 같아요.”

깨어 보니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화들짝 놀란 동우는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봤다. 부재 중 전화가 수십 통이 와 있었다. 마지막 전화가 온 것이 벌써 한 시간 반 전이었다. 정신이 멍한 상태였지만 일단 집에는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집으로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동우는 응급실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는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집에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 안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이의 방을 열어봤다. 아무도 없었다. 안방도 마찬가지였다. 휴대전화에 음성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었다. 아내였다. “이렇게는 더 못 살겠어요. 오늘부터 당분간 성북동 집에 가 있을게요. 아이 학교도 거기서 보낼래요. 아이랑 제 물건은 내일 당신 없을 때 챙기러 갈게요.”

이건 아니었다. 동우는 띵한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어떻게든 해결하려면 일단 가봐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또 다시 숨이 막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심정으로 뛰쳐나왔다. 성북동이 아니라 응급실이 먼저였다.

#2 난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어요. 그것도 죄인가요?
민수는 오늘도 노사이드에 들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몇 달 사이에 민수는 많이 바뀌었다. 머리도 갈색으로 염색하고, 남방에 카키색 면바지, 로퍼 차림이었다. 강박에서 헤어난 후 민수는 많이 자유로워졌다. 오늘은 언제나 바를 차지하고 있는 영수와 보라와 야유회에 대해 의논하려고 온 것이다.
“참, 제 친구가 요즘 공황증상이 있다고 하던데, 고등학교 동창인데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고, 뭐 그러면서 확 왔나 봐요. 병원은 죽어도 안 간다고 하던데. 한번 불러볼게요. 회사가 멀지 않거든요.”

민수가 전화한 사람은 동우였다. 동우는 화사에 있지만 이미 입찰 건에서는 실패를 하고 난 다음이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집에 가도 반기는 사람도 없는지라 민수의 초대에 응했다. “여기가 아주 재미있는 곳이야. 내가 새 생명을 얻은 곳이기도 하지.” “공황증이 꽤 심하다면서? 이분이 용한 전직 정신과 의사셔.” “심한 것까지는 아니고 좀 불편한 거야. 엘리베이터 타는 게 힘드네. 심장이 벌렁거리고 답답해. 그런데 이런 병이 흔한 건가요?” “아주 흔한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희귀병도 아니에요. 김장훈 씨도 공황장애로 유명하죠.”

공황증상은 일종의 고장 난 경보장치 같은 것이다. 도둑이 들어서 목을 겨누고 있거나 자다가 불이 나서 빨리 피신을 해야 할 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우리 몸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때 사용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 알람이 있다. 그런데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문제가 생기면 살짝 건드리기만 했는데도 이 장치가 작동할 수 있다. 마치 죽을 듯한 공포의 순간을 맞은 것 같이. 그럴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그 상황이 너무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그 증상이 있었던 곳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도록 학습된다.

“맞아요. 제가 요즘 엘리베이터를 못 타요. 이상하게 두려워요. 그래서 어떻게 고쳐야 하는 거죠? 난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어요. 그것도 죄인가요? 답답해요. 요새는 잠도 잘 안 와요.” “동우 씨라고 했죠? 지금 행복해요?” “무슨 뜻이죠?” 동우는 그 동안 백 퍼센트 꽉 찬 삶을 살아왔다. 오직 패스트 포워드(fast forward)만 있는 삶. 동우 같은 유형의 사람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바로 비움의 여유다. 철주는 동우가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도 중요한 쉬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다. 뭔가를 채워 넣기에만 익숙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불안해진다. 이미 동우의 삶의 방식은 파산 선고를 받은 상태다. 다만 인정을 하지 않고 있을 뿐.

#3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
동우는 어젯밤 술에 취해 민수의 집에서 자고, 노사이드 멤버들의 야유회에까지 동참하게 되었다. 철주는 동우를 워터파크의 파도 풀로 데리고 갔다. “여기를 왜 데려오신 거예요?” “동우 씨의 공황증상을 해결해 보려고요.” “네?” “자, 일단 따라와 보세요.” 철주는 동우를 데리고 물이 허리 정도까지 차는 곳으로 들어갔다.

“뿌우우 .” 나팔소리와 함께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파도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밀려오는 파도는 철주와 동우가 서 있는 곳에서는 배꼽 위로 살짝 올라와 머물렀다.
“견딜 만하죠?” “네. 뭐 별거 아니네요.” “이 정도 깊이에서는 뭐든지 맞서 싸울 수 있고 극복할 수 있어요. 자, 더 깊이 들어가볼까요?” “뿌우우 .” 큰 파도가 온다는 나팔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환호를 올렸다. 그러나 동우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뒤로 가려고 하는데 철주가 잡고 놔주지 않았다. “이제 파도가 올 겁니다. 무섭지요? 파도랑 맞서 싸우려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게 두세요. 파도의 흐름을 타는 거예요. 그 흐름에 몸을 맡기세요. 자, 나랑 같이 해봐요.”

파도가 저 앞에서 집채처럼 몰려와 두 사람을 덮치는 순간 철주가 힘을 줘 몸을 띄웠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둥실 떠올라서 파도를 탔다. 파도가 올 때에는 공포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철주를 따라 몸을 뒤로 젖히고 파도를 타서 뒤로 밀려가는데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두려움이 기분 좋은 스릴로 전환했다.

“어때요, 좋죠? 우리 한 번 더 해봐요.” 철주가 그를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두세 번 파도를 타고 나니 요령이 생긴 동우는 이제 파도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내려놓는 거예요. 맞서 싸우려 하지 말고 그냥 몸을 맡겨보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맞서 싸우려다 보면 부서져버려요.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완벽에 집착하니까 무리를 하게 되고 현재에 만족을 하지 못해요. 그게 우리 삶의 문제예요. 저도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완벽함이란 결국 내 마음속의 허상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세상이 우리를 뼈 빠지게 일만 하게 만들기 위해 거는 최면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죠.”

공황증상을 야기하는 잘못 연결된 긴장과 불안의 악순환의 시냅스를 내려놓음과 비움의 긍정적 경험의 시냅스로 전환시켜 강화해야만 한다. 가장 빠른 길은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여기 워터파크의 파도 풀에 있던 기억은 암묵기억을 활성화시킬 것이다. 동우는 이제 자신의 감정과 몸의 감각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 경험이 최대한 강렬하게 몸속 깊숙이 뿌리내려 자기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거기에서 삶의 전환은 시작된다.

#4 나는 사는 게 재미있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내가 달라지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워터파크에서 나와 펜션에 도착한 일행은 밤이 되자 바비큐를 하기 시작했다. 말없이 고기를 굽던 동우가 철주가 고기를 집으러 오자 조용히 이렇게 물은 것이다. “옛날로 돌아가는 거요? 변화는 필요하죠. 그런데 왜 옛날로 돌아가려고요?” “옛날로 돌아가면 이제는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바뀔 자신이 생겼습니다. 노력할 거예요.” “또 열심히 하려고 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바뀔 거라는 얘기?” “네.” “그러면 안 된다니까. 그냥 되는 대로 하는 거예요. 꼴리는 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어야 겨우 조금 바뀌어요. 의식적으로 열심히 바꾸려고 노력하면 더 어려워요. 우리는 기억을 안고 살 수밖에 없어요. 동우 씨 아내도,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로 시작하는 건 불가능해요. 오히려 그건 위선이고 연극 아닐까요? 그런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같아요. 그걸 감수할 수 있는 관계가 정말 좋은 관계 같은데…… ”

#5 그냥 서핑을 하듯 나를 맡기자
주말이 지나갔다. 동우는 아직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몸은 왠지 다른 방식으로 세팅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느낌에 집중하려고 한다. 또 공황발작이 올까 봐 무섭다. 그렇지만 그 공포를 의식하는 것 자체는 전보다는 덜 두렵다. 삶에 대한 공포, 불안을 내 삶이라는 커다란 의식의 황하에서 분리해놓고 보려고 한다. 그러고 나니 너무 크고 무섭고 실체에 압도당할 것 같던 공포의 크기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감이 왔다. 광대한 의식의 흐름에서 그냥 흘러가게 두는 것이다.

회사 문을 들어섰다. 닥친 일들은 많다. 오늘만도 회의가 다섯 개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들이 쌓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은 아닌 것 같고 그냥 그렇게 또 하루가 갈 것 같다는, 그래도 될 것 같다는 마음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왠지 그냥 타도 될 듯하다. 15층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고 조금 답답해진다. 5층에서 문이 열렸다. 직원 한 명이 내렸다. 같이 따라 내리고 싶다. 그렇지만 참는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먹먹한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을 무서워하지 않고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일은 오늘도 내일도 몰려올 것이다. 견디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다 채우지 않고 그냥 버티고, 부서질지 모른다는 느낌도 버티다 보면 그냥 지나가고 말 것이다. 파도에 나를 맡겼듯이 일과 부담을 제압하려 하지 말자, 그냥 서핑을 하듯 나를 맡기자,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새 1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멀리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왠지 괜찮은 하루가 시작될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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