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

맥스미디어 / 2020년 10월 / 296쪽 / 15,000원

아모르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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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파티

이주향 지음

저자 소개

KBS TV 〈TV 책방〉, EBS 〈철학 에세이〉, KBS 제1라디오 〈이주향의 책마을 산책〉 〈이주향의 문화포커스〉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한국니체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그림 너머 그대에게』 『나를 만나는 시간』 『그리스 신화, 내 마음의 12별』 『이주향의 삼국유사, 이 땅의 기억』 등이 있다. 현재 수원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책소개

철학자인 저자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이 책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 아픈 생(生)을 긍정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삶의 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운명을 사랑하는 삶의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가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발견한 마음의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회상하며 ‘나’로 살았던 그 경험을 이해하며 그 ‘나’를 향해 등을 토닥이며 웃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잘 산 인생이 아닐까”라는 위로와 희망의 그림을 그려낸다.

요약본 본문

1장 청춘을 짓누른 것은 청춘이었으니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가 낯설 거야!

제대로 발현된 열정은 우리를 살맛나게 하지만 제대로 숨 쉬지 못하는 열정은 우리를 시들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와 대면하게 해준 작품이 『초원의 빛』이었다면,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병든 영혼의 춤을 그린 작품은 『폭풍의 언덕』입니다.

그런데 폭풍의 언덕 위 언쇼 가(家)의 여주인은 누구일까요? 캐서린과 힌들리의 어머니가 있었을 텐데 작품에는 그 존재감이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가 불쌍한 고아를 집으로 데려와 키울 만큼 따뜻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어머니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상징이지요? 바로 여성성의 부재입니다. 왜 언쇼 가(家)의 아들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언덕 위의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는지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바로 그를 감싸 안아주는 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성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습니다. 그 허기에 시달리는 영혼이 추게 되는 비극의 춤이 바로 『폭풍의 언덕』의 주제 아닐까요?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은 역시 히스클리프입니다. 부모 없이 떠도는 아이였던 그는 언쇼의 배려로 어느 날부터 바람 부는 언덕에서 살게 되고, 언쇼의 딸 캐서린을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거나 뛰거나 함께 언덕을 누비고, 함께 놀고, 함께 상상하면서 사랑이라 이름 붙일 필요도 없는 사랑을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심심할 때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들이 가서 노는 큰 바위 언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은 평범한 소녀이고 평범하지도 못한 소년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왕자이고 공주입니다. 캐서린이 말합니다. “네가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지? 너의 아버지는 중국의 황제, 너의 어머니는 인도의 여왕, 너는 나쁜 뱃사람에게 납치되어 영국으로 흘러들어온 왕자야. 저기 너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성이 있어!”

멋쩍은 히스클리프가 저건 그냥 바위라고 대답하자 소녀가 진지하게 대꾸합니다. “만약 저곳이 바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절대로 왕자가 될 수 없어!”

캐서린, 참 당차고 현명한 소녀지요? 규율이 되는 도덕도, 매너도, 관심 어린 시선도, 체계적인 교육도 받아본 적 없는 히스클리프와 함께 거친 자연을 누비는 캐서린은 자연에서 배우는 히스클리프에게 은유를 가르쳐준 멋진 문학 선생님입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의 세상이 된 두 사람에게는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이 있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를 따라다니는 집안이나 직업이나 부나 명예에 의해 자아 팽창이 이루어지거나 기가 죽습니다. 그런 껍데기 자아는 속살을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것밖에 없다면 상식과 편견이 사는 것이지 자기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요? 껍데기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소중한 영역이 있고, 거기서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소중한 꿈을 꾸는 사람만이 상식을 넘어 자기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바람 부는 언덕 위의 집에서 외로웠던 히스클리프는 자유로운 캐서린과 함께여서 좋았지만 히스클리프가 좋아진 만큼 모질어진 소년이 있습니다. 바로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입니다. 내 젊은 날 그는 연민조차 생기지 않는 찌질남이었는데, 이젠 이해가 잘 되네요. 엄마 없이 자란 그가 이번에는 굴러들어온 돌에게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빼앗겼으니 생각이 깊어질 새가 없었던 어린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겠습니까.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힌들리는 가장이 됩니다. 가장이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히스클리프를 가족이 아닌 하인으로 격하시킨 일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힘으로 표출한 것이지요.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에게 모욕당하며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이 되었습니다. 그 나이에 받아야 할 교육도, 익혀야 할 매너도 배우지 못한 채 집에서 마구 기르는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도 히스클리프가 그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캐서린 때문입니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은 단순한 연인이 아닙니다. 그에게 캐서린은 살아온 이유이자 살아갈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로부터 존중받아본 적 없는 외로운 그에게 늘 곁을 지키며 좋은 친구가 되어준 명랑한 캐서린이 가을 햇살처럼 스미고 가을바람처럼 감기게 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마음 담을 노력 없이 마음이 담기고 의지를 낼 필요도 없이 지향성이 생기는 거침없는 사랑이 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소녀 시절을 몽땅 함께 보내며 둘만의 세계를 일구어온 캐서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이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만일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가 살아 있다면 나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사라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질 거야.”

그랬던 캐서린이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한 가난한 히스클리프의 사랑을 외면하고 너그럽고 부유한 신사 린튼과 데이트를 시작한 것입니다. 히스클리프의 관점에서는 배신이었겠지요? 히스클리프는 에드거의 조건에 혹해 자기를 부담스러워 한 캐서린의 배신에 이를 악물고 떠납니다. 히스클리프가 사라진 시간, 캐서린은 에드거와 결혼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캐서린은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부자가 되어 돌아오지만, 세상에, 복수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돌아온 히스클리프가 죽어가는 캐서린에게 쏟아놓은 사랑의 말들은 『폭풍의 언덕』의 절정입니다.

“왜 당신은 나를 멀리했소? 왜 당신은 자기 마음을 배반한 거지? 어떤 말도 나에게는 위로가 안 돼! 당신은 이런 꼴을 당해 마땅해. 당신이 당신 마음을 죽인 거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했소.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렸지? 불행도 타락도 신도 악마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었는데……. 내가 살고 싶은 줄 아시오? 나는 건강한 만큼 불행하오!”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한 사랑, 무섭지 않나요? “나는 건강한만큼 불행하오”라는 히스클리프의 진실, 그것은 탈대로 타지 못한 열정의 말이지요? 탈대로 다 타지 못한 열정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변하는데, 변화를 따라 흘러가지도 못하고 넘어가지도 못하는 시간, 그래서 나이가 드는데도 멈추어 있는 시간 말입니다. 캐서린이 죽고 나서 아무리 나이 들어도 성숙하지 못하는 히스클리프의 시간처럼. 그의 시간은 캐서린의 죽음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만나지도 못하고 망각하지도 못하는 사랑의 고통이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집착의 결과라고 해도 어찌할까요? 충분히 애착의 시간을 누리지 못한 집착이 삶을 파괴하는 것은 멈출 수 없으니.

2장 아모르파티,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파티, 그 운명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우연히 박선영 SBS 전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화려하게 포장해주었던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그만둔 이유가 귀를 열게 하네요. “일 이외에는 나를 설명하는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느 순간, 바닥을 긁어가며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이 아니면 용기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사표를 냈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를 알아가고 ‘나’를 찾아가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나는 그녀의 심지를 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바닥을 긁어도 타지 않는 마음의 중심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보장된 화려한 자기를 벗어버리는 일은 용기고, 어리석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용기는 어리석음과 결합합니다. 어쩌면 어리석음은 세상의 문법이 아닌 ‘나’의 문법이고, ‘나’의 문법으로 세상을 배우며 살고자 하는 자의 몸부림일 것입니다. 그 몸부림 없이 ‘나’의 세상은 열리지 않는 것이지요.

<라이언>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거의 실화 그대로가 담긴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가 한 일은 한 청년의 인생을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종종 인생이 그 자체로 영화니까요. 주인공 사루는 마음만 먹는다면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엘리트 청년입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 좋은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모만큼이나 좋은 연인을 만나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좋은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으련만, 그런 삶이 보장될수록 사루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몸부림칩니다. 마음은 그가 어렸을 적에 길을 잃은 인도에 가 있습니다.

사루는 인도 태생입니다. 다섯 살 때 기차역에서 형을 잃어버리고 빈 기차에 올라 2박 3일 동안 어디론가 이동했고 엉뚱한 곳에서 고아가 된 바람에 호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를 입양한 호주 부모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어서 그는 부족한 것 없이 성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잃어버린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움이 그를 미친 듯 떠돌게 했습니다. 그의 방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그는 이런 절규의 말을 던집니다.

“진짜 엄마와 형이 날 찾고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아? 형이 얼마나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까. 그런데 나는 두 발을 뻗고자, 그게 구역질 나!”

‘나’를 알아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사람들, 그 식구들을 찾지 못해 그는 방황하고 마침내는 그를 잘 키워준 호주 엄마에게까지 그 방황을 들키고 맙니다. 그와 만토쉬를 입양한 호주 엄마와의 대화가 찡합니다. “엄마의 불임이 안타까워요. 우리가 백지 상태로 온 것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낳았으면 달랐을 텐데, 우리가 엄마를 괴롭히는 기분이에요.” “나는 불임이 아니었어.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이를 낳는 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차라리 힘든 아이들을 거두어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

참 좋은 엄마지요? 이 엄마, 어떻게 이렇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뒷마당으로 달아났던 열두 살 소녀는 어느 날 지진이 일어나 땅이 자기를 삼켰으면 하는 기도를 하는데, 그때 환상을 봅니다. 들판을 지나가는 갈색 아이들이었습니다. 번개처럼 강한 충격과 함께 행복한 느낌이 밀려왔다고 했습니다. 그 감정이 어려움 속에 있는 그녀를 믿게 하고 어려움 속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녀와 뜻을 함께하는 남편을 만나 그는 인도 아이 둘을 입양했고, 키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도 아이들과 함께 행복했습니다.

그런 엄마와의 인연도 ‘나’의 방황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방황은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내 자리를 찾으려는, 어찌 할 수 없는 몸부림, 어리석은 몸부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를 알아가는 징검다리니까요. 호주 가정에 함께 입양된 만토쉬는 평소에는 착하기 그지없는데, 조그마한 자극에도 화가 폭발하고, 마약을 끊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생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입니다. 사두는 자기를 던져 자기가 나온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만토쉬는 그 물음 앞에서 좌절한 것 같습니다. 그런 물음을 포기하고 주저앉으면서 만토쉬처럼 자해하게 되거나 신경증에 걸리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루는 엄마가 돌을 깨는 일을 했다는 기억을 토대로 마침내 가족을 찾아냅니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이사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늙어간 인도 엄마는 기적처럼 찾아온 아들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번개 맞은 것처럼 놀랐고, 바다처럼 깊은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신기하지요? 찾았다고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발 뻗고 잘 수 있고 거칠 것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것이 말이지요.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자리인가 봅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나서 사루의 당연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분을 찾았다고 엄마의 의미가 바뀌지는 않아요. 사랑해요, 엄마 아빠, 그리고 만토쉬도!”

찾았기 때문에 기존의 관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계를 돌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제 자기 삶을 살 수 있고, 마음을 붙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삶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갈 수 있어야 그 때문에 버려졌던 것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3장 영혼의 지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바주데바, 경청하는 자

그 작가는 창문만 열면 펼쳐지는 정경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산 밑의 정원 같은 넓은 뜰이 마치 집에 딸린 마당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얼른 그 집을 계약했습니다. 그 집에서 조용히 살다 보면 도시에서 받은 상처까지 말끔히 아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사 오자마자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보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했던 그 공간은 그만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동네 아이들이 매일 거기 와서 놀았습니다. 그 집은 조용하지 않았고, 그는 조용히 거할 수도, 작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분 좋게 노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아이는 다섯.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천 원씩 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여기 와서 이렇게 즐겁게 노니, 아저씨가 행복하구나. 과자 사 먹어라!” 그저 노는 것인데 돈까지 생기니 아이들은 이게 무슨 횡재냐며 좋아했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아이들은 그렇게 천 원씩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차츰 노는 것보다 돈 받는 일을 더 좋아했습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한 뒤 작가는 더 이상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아저씨가 잊어버렸을 거라며 창가 바로 밑에 와서 더 크게 놀았지만 그는 내다보지도 않았고, 아이들은 돈 받는 일에 대한 기대로 이미 노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돈을 주지 않자 한 아이가 결단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우리 여기서 놀지 말자, 저 아저씨 이제 돈 안 준다!”

세상에, 돈 천 원에 놀이터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종종 눈앞의 작은 이익을 챙기느라 삶을 잃어버린 우리 같지 않으세요? 꽤 오래 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문득 생각난 것은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다가였습니다. 거기 내가 좋아하는 인물 중에 바주데바가 있습니다. 그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위해 노를 젓는 뱃사공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탑니다.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결혼식에 가기 위해 혹은 순례를 위해 강을 건너는, 대부분의 그들에게 강은 그저 장애물입니다. 목적이 생기면 때론 엄청난 것을 잊어버리지요? 뜰에서 놀면서도 뜰을 보지 못해 돈 천 원에 뜰을 팔기도 하고, 강을 건너면서도 강을 보지 못하고 현재에 있으면서도 현재를 살지 못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이 강이 장애물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강에 귀를 기울여 강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을 강에 살면서 강물을 사랑하게 된 바주데바는 강물의 소리를 듣는 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면서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한 세계를 일컫는 말이지만, 그래도 강은 또 거기 그대로 있습니다.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 존재하는 강물에서 영원과 순간이 둘이 아님을, 헤라클레이토스도, 바주데바도 본 것입니다. 순간에, 현재에 온전히 거하는 일 없이 영원과 순간이 하나라는 시간의 비밀은 열리지 않습니다.

현재에 거하는 자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도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현재에 거하기 때문에 잘 관찰하고 잘 듣습니다. 조급한 사람, 목적이 있는 사람,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경청하는 척할 수는 있어도 경청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느긋하게 현재에 거할 줄 아는 사람만이 경청할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가 본 바주데바는 경청하는 자였습니다. 축복은 바로 진심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에게 삶의 고뇌를 털어놓은 일이지요? 그때 번뇌가 별빛으로 바뀌는 연급술이 일어나니까요. “그보다 더 진지하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싯다르타는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바주데바가 싯다르타의 말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조급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법도 없이, 칭찬의 말이나 비난의 말도 없이 가만히 마음을 열고 듣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절망한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 그에게 싯다르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남의 말을 귀담을 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당신만큼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나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시나요? 무엇보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경청하지 못합니다. 헤세의 싯다르타가 어느 날 찾아든 보물 같은 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싯다르타는 아들이 없는 행복보다 아들과 함께 하는 고통이 좋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부와 게으름에 길든 아들은 아버지에게 저항하며 바르고 온화한 아버지를 떠날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그때 바주데바가 나섭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치를 아는 싯다르타가 사랑으로 아이를 구속해서 날마다 아이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되묻습니다. 아이를 제대로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아이의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지 못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대를 윤회에서, 죄업에서, 탐욕에서, 어리석음에서 지켜주었나요? 그대 아버지의 훈계가, 스승들의 경건함이, 그대의 지식이 그대를 지켜주었나요? 어느 아버지가, 어느 스승이 지켜 서서 그대를 말릴 수 있었나요?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 번을 죽어준다 해도 그것으로 아이가 스스로 겪어야 하는 운명을 한 치나 덜어줄 수 있을까요?”

무서운 진실이지요? 경청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나의 욕심을, 나의 어리석음을 경청해야 하지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듯 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소리를 경청할 수 있습니다.

타고르가 말했습니다. 왕자의 옷을 입고, 목에 보석 줄을 감고 다니는 아이는 도무지 즐겁게 놀 수 없다고. 옷이, 보석이 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나의 짐인지, 무엇이 나를 번잡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지, 성난 강물처럼 흐르는 맹목적 사랑이 어떤 고통으로 오는지, 나는 또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지, 버려야 할 것들을 보물처럼 안고 사는 내 욕심은 어떤 탄식 소리를 내는지, 돈 천 원에 놀이터를 잃어버린 내 치기는 어떤 분노로 올라오는지, 사랑이 지나가고 젊음이 지나간 무서운 적막은 어떤 노래를 만드는지 경청해보지요, 우리!

4장 당신 앞에 놓인 함정

미쓰백은 미쓰백이 싫어요?

미쓰백은 부지런합니다. 세차장에서, 마사지실에서 백상아는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열심히 산다는 말보다는 기를 쓰고 산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기를 쓰고 위악적으로! 어린 소녀의 눈에도 그것이 보입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린 소녀가 “아줌마”라고 하자, 아줌마 아니라며 ‘미쓰백’이라고 부르라 교정해줍니다. 어린 소녀 지은이의 말이 미쓰백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미쓰백은 미쓰백이 싫어요?”

미쓰백에게는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녀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는 듬직한 남자도 있습니다. 그 남자가 건네준 파카를 입은 것으로 봐서 그녀는 그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따위가 무슨 결혼이냐며 그녀를 배려하고 아끼는 남자를 고집스럽게 밀어냅니다. 어린 소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그녀는 자기 삶을 존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사는 것은 소화되지 않는 과거가 장애가 되어 그녀의 현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감정은 과거에 얽매여 있습니다. 툭 하면 그녀를 두들겨 패고 마침내 버린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폐암으로 춥고 외롭게 세상을 떠나 한 달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법적 보호자 자격으로 죽은 엄마의 시신을 보고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여자, 대체 어떤 꼴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거야.”

좋은 작품이라고, 한지민의 연기가 짱이라고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하기에 영화 <미쓰백>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무슨 영화가 이리도 우울한가요. 스크린이 꿈을 파는 것이라면 영화는 완전 실패입니다. 그런데도 여운이 깁니다.

늘 화가 나 있는 미쓰백의 구원은 의외로 자기처럼 버려진 어린 소녀에게서 옵니다. 길거리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소녀, 늘 배를 곯고 있는 소녀,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는 소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소녀가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가족에게 학대당하는 것이 뻔한 그 아이가. 그녀는 자기를 지키듯 아이를 지킵니다. 아니, 버려진 그 아이를 지킴으로써 버려진 자기를 지켜 나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소녀 지은이는 백상아의 상처 입은 내면의 아이입니다. 지은이를 돌보고 지킴으로써 백상아 내면 아이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녀와의 연대감이 생긴 백상아가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식해서 가르쳐줄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줄 것도 없어. 대신 내 옆에 있을게. 지켜줄게.”진실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이도 그 사랑의 말에 공명합니다. “나도 지켜줄게요.”

분명하지요. 둘은 서로를 지킬 것입니다.

학대당하는 아이들은 자기 소리가 없습니다. 저항의 말이나 진실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학대이기 때문입니다. 학대당하며 성장해서 학대하는 어른이 된 사람들도 울지 않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그들의 눈물샘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학대당하는 아이들, 학대 속에서 성장했기에 과거가 소화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영화가 대신 울어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학대받아 와서 학대하는 어른이 된 사람들의 거울이 되어 그들이 하는 학대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등대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겨우 아동 학대에 관심이 생긴 우리 사회의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5장 일상의 기적을 일구는 사람들

휘게, 일에 쫓기지 않기

한 해의 끝이 보일 무렵이면 송년회가 하나둘 시작되지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 떠나보내야 하는 동료들, 다시 시작해야 하는 직장 선후배들, 그 외 이런저런 이유의 모임으로 저녁이 없는 삶을 보내다 보면 더 이상 송년은 조용한 성찰이 아니라 번다한 일이자 잠 도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빴던 날들에 더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태며 한 살을 먹기는 아까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우렐리우스의 이 말을 자꾸 화두처럼 챙기는 모양입니다. “너무 많은 일에 쫓겨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된 까닭에 저녁 모임은 가지 않지만, 점심 모임은 종종 있는 편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지인 몇 명이서 일요일 점심에 모였습니다. 집에서 음식 하나씩 해가지고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 모임입니다. 거기서 잘나가는 남편을 둔 한 친구에게 대학생인 아이들과 성취지향적인 남편이 부딪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친구 남편은 휴일에도 빼곡한 골프 약속으로 인맥을 관리하며 바쁘다는 사실을 성공의 바로미터로 여기는 스타일인데, 아이들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에 바빠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남편과 아이들과 마주치는 시간이 종종 생기면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대부분을 잔소리로 채운답니다. 휴일에도 늦잠 자는 꼴을 보지 못하고, 먹는 일부터 스펙 쌓는 일가지 체크하는 남편을 아이들이 왕따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그런다네요.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집안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그 남편, 사회적으로 잘나가기 때문에 본인은 위기인 줄 모르는 것이지만 삶의 위기가 맞지요?

그랬더니 늘 바쁜 다른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는 너의 남편이 문제인데, 우리 집에서는 내가 그래. 자기들 교육비 송금하느라 밤낮없이 일하는 엄마의 노고는 아랑곳없고 지난 방학 때 나와서는 이런 이야기를 히는 기야. 우리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고, 엄마와 느긋하게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어! 그런데 뒤통수 맞은 느낌인 거 아니? 아마 네 남편도 그럴 거야. 내가 번 돈 거의 전부를 송금하는데 그게 아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허방이리는 게 처음엔 기가 막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무서워지는 거야. 우리 친정에서는 아버지가 일벌레였거든.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일밖에 모르신다는 것뿐이야. 그런데 내가 내 아이들에게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그런 가족이 많지요? 일벌레인 누군가 덕택에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는 너무나 낯선 가족들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떤 어머니, 어떤 아버지십니까? 최근에 아이들과 대화를 해본 적 있으신지요? 대립과 싸움을 통해서도 서로의 마음에 다다를 수 있는 대화를 하고, ‘예, 알았어요’라는 수긍을 표현하면서도 마음을 닫는 대화도 하지 않나요?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당신만 믿는 일방적 잔소리가 아니라 서로에게 공감하며, 아니면 기분 좋게 대립하며 나눈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청춘도 없이, 꽃도 없이, 남의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믿고 열심히만 살아온 일벌레 친구들이 가장 가깝다 믿는 아이들의 불만과 반란을 등불 삼아 자기 생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추구해온 가치가, 내가 믿어온 삶의 양식이 허방인 것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살지 말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리고 그들이 자기 삶을 찾아 떠날 때 우리와는 다른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고 믿어주면서 기분 좋게 떠나보내야 하지. 앞으로는 남편이, 아이들이 가족인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이 가족 같지 않니?”

북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휘게(Hygge)’ 전도사가 된 친구의 말이었습니다. 이제는 잘 대접하고 잘 대접받는 데 중점을 두지 말고 편하게 모일 수 있는 데 중점을 두자며 서로 음식도 해오지 말자고 하네요. 그보다는 그날 무엇이 먹고 싶은지 의기투합하게 되면 함께 만드는 과정부터 즐기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친구끼리, 모이면 행복한 사람들끼리, 감자를 까서 감자전을 부치고, 채소를 씻어서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면서 말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휘게의 한 형태라고 했습니다.

휘게는 편안함, 아늑함, 따뜻함을 뜻하는 덴마크어라면서요? 행복은 크고 화려한 성공에 있지 않고, 한 시간 단위로 약속해놓고 비즈니스처럼 사림을 만나는 바쁜 삶에도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명품을 빼입고 그에 어울리는 유능한 사람들과 비싼 호텔 식사를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에도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작고 소소해 보이지만 마음이 정화되는 경험, 마음이 열리는 경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늑한 경험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공간을 정리하고 청소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마음의 정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압니다. 함께 먹을 밥상이든 혼자 먹을 밥상이든 직접 느긋하게 밥상 차리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를 압니다. 시간에 쫓기며 일에 쫓기느라 마음을 나누며 살 수 없다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늘 바쁘게 살고 있다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빠야 하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 삶에서 뺄 수 있는, 필요하지 않은 일은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나는 일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과 별 필요가 없는 것을 사들이는 것은 심리적으로 같은 맥락입니다. 그때그때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을 다 사서 모으면 내 집은 온갖 잡동사니로 넘쳐 나는 여백 없는 집이 될 것입니다. 사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하면 풍요로워 보이나 실상은 각박한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바쁘다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내용인 가난한 인생이 되어 있을 테니.

휘게는 더 많은 필요를 만드는 데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서 옵니다. 만나는 사람도, 일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단순화하고 단순화하고 단순화하기, 이것이 요즘 저의 화두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화두가 되는 것 같습니다.《서장(書狀)》에서 대혜 스님이 유발 제자인 증시랑에게 주는 편지는 곱씹을 만합니다.

‘있는 것을 비우기 원할망정 없는 것을 채우려 하지 마십시오.’

텍스트 상자: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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