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조각 100

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조각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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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조각 100


차홍규, 김성진 엮음
미래타임즈

책소개

이 책은 서양 예술사를 압축해 놓은, 위대한 조각가의 예술혼으로 생명을 얻은 유럽의 찬란한 문화예술의 현장을 찾아가는 격조 높은 예술 여행이다. 책에는 서양 조각의 빛나는 역사가 시대와 예술장르를 따라 살아 숨 쉰다.

요약본 본문

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조각 100

차홍규, 김성진 엮음
미래타임즈 / 2019년 6월 / 560쪽 / 24,000원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라오콘 군상

<라오콘 군상>은 1506년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포도밭을 일구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다.

트로이의 함락, 노여움, 벌 그리고 죽음……. 라오콘과 두 아들이 독뱀에 감겨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다. <라오콘 군상>으로 불리는 이 조각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라오콘 군상>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트로이의 아폴론 신전의 신관이었던 라오콘성안의 사람들이 그리스군이 철수하고 남긴 거대한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자고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는 이에 더해 목마를 향해 창을 던지고, 그리스인의 귀향길에 풍랑을 일으켜 벌하도록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바쳐 기원을 한다. 하지만 황소를 죽이는 의식을 치르고 있을 때, 돌연 두 마리의 뱀이 출현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에게 독을 뿜어 세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트로이 사람들은 트로이 목마에 대한 라오콘의 저주가 신을 화나게 했다고 생각해 결국 자신들의 의도대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게 된다. 하지만 성 안으로 목마를 들여오는 날 밤, 10년을 지켜오던 트로이는 목마 안에 잠복했던 그리스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라오콘 군상>은 기원전 1세기 때 로디의 아게산드로스와 그의 두 아들 아테노도로스, 폴리도로스가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가들을 배출시킨 로디를 비롯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터키의 에페소는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의 꽃을 피우는 요람지였다.

이 시대의 미술은 극단적인 사실주의로서 특색을 이루고 있는데 죽음에 앞서 절망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는 라오콘의 격노한 듯한 근육과 고통스러운 표정과 인간적인 연민의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오른쪽의 아들 상과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왼쪽의 아들 상이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삼각형 구도는 다소 불균형적이며 뱀이 무는 장면 역시 위협적이지 못해 비장미를 떨어뜨린다. 이른바 고통의 순간과 죽음에 대한 표현 형식이 다소 관념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재 <라오콘 군상>은 로마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르네상스 시기에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티투스 황제 궁터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르네상스 미술가들과 18세기 독일의 문필가인 빙켈만, 괴테 등은 많은 감동을 받아 글로 남기기도 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30대 초반에 <라오콘 군상>의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는데, <라오콘 군상>이 땅 속에서 나올 때 기뻐 놀라며 “이것은 예술의 기적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군상은 서양 미술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원형적 상징이었으며, 예수의 수난이나 순교를 나타내는 기독교 예술에서 묘사되는 고통과는 달리, 이 군상의 고통은 어떤 속죄의 힘이나 보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고통은 일그러진 얼굴 표현으로 나타나며 분투하는 몸체, 특히 모든 부분이 뒤틀리는 라오콘의 몸체와 조화된다.

양식 면에서는 그리스 전통 내에서 그리스 미술의 가장 훌륭한 예 중의 하나로 생각되지만, 이것이 원본인지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전 동상의 복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이 기원전 2세기의 원본이라는 견해는 이제 거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전에 청동으로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원작의 복제품으로 여기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길이는 203cm이다.

아프로디테는 로마 신화에서 비너스 여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성격은 비너스 여신과 많이 다른데, 비너스 여신은 모성애가 강한 성격으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은 인물로 나온다. 반면 아프로디테는 기분에 따라 매우 변덕스러워 인간들은 그녀를 추앙했지만 두려워하기도 했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당시 오스만 터키 제국의 식민 치하에 놓여 있던 밀로스 섬에서 그리스인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집을 수리하려고 땅을 파다가 이 아름다운 석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스만 터키군에 이를 빼앗길까 우려해 집에 숨겼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터키 당국은 강제로 석상을 빼앗아갔다. 며칠 후, 이 비너스 상의 존재는 당시 이 부근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장교 쥘 뒤몽 드위빌에 의해 프랑스 본국에 보고됐으며, 프랑스 정부는 당시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를 통해 해당 석상을 구입하겠단 의사를 밝혔다. 당시 군사 강국인 프랑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전쟁이 날 것을 우려한 터키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비너스 상은 프랑스로 실려 왔고, 루이 18세에게 바쳐져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됐다.

<밀로의 비너스>는 왜 팔이 없을까? 비너스 상은 애초에 출토될 때부터 두 팔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밀로스 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비너스 상을 놓고 현지에서 프랑스와 터키 해군 사이에 격전이 있었으며, 비너스 상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팔이 잘려나가 바다에 빠졌고, 이것을 프랑스 함대가 건져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이 약탈 후에 정식 수입한 작품으로 꾸미기 위해 남은 팔까지 더 잘라내서 아예 팔이 없는 석상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나체의 비너스는 엉덩이 부분에 옷이 걸쳐 있는 상당히 매혹적인 자태의 전신상으로, 양팔과 왼발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비너스의 비례나 구조는 안정적인 자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등을 약간 앞으로 구부린 유연한 자세는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런 경향은 그리스 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여인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장되어 길게 늘어진 신체 구조는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고전적인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너스의 잘려진 오른쪽 손은 몸을 가로질러 왼쪽 무릎 쪽으로 옷의 천을 잡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왼쪽 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이 석상을 승리하는 비너스로 해석하는 일각은 비너스의 왼손에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준 사과를 들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비너스가 악기인 리라를 들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밀로의 비너스>에는 머리의 관과 목걸이, 귀고리, 팔에 두르고 있는 밴드를 조각상에 부착하기 위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얼굴을 보면, 수려하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띈다. 또한 목주름과 약간의 지방질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복근 등이 세밀한 관찰과 해부학에 의거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커다란 눈은 맑고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오똑한 콧날의 코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작고 굳게 다문 입은 단호함을, 갸름한 얼굴은 미적 이상을, 단정한 머릿결은 흐트러짐 없는 성격을 보여준다.

가슴의 모습 또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절한 크기를 지니고 있음에, 이런 모습은 실제 인간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형상이다.

조각사를 통틀어 무수히 많은 비너스 중 가장 장엄한 미와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는 <밀로의 비너스>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비너스를 탄생시킨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의미를 살펴보면, 미술 전반은 물론이고 신전 건축조차도 인간 존중 사상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가 추구한 자유정신과 인간 중심의 정신적 바탕을 나타내는 바, 이 정신이 오늘날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되었으며, 세계 문화의 정립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고딕 시대의 조각

샤르트르 대성당

고딕 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샤르트르 대성당은 프랑스 국민들의 염원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당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실내 장식은 일부러 도입된 최초의 장식으로 이러한 건축 양식은 이후 유럽 종교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뚝 솟은 첨탑과 첨두 아치 등 고딕 양식의 특징이 살아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그때까지 지어졌던 다른 건물에 비해 실내 공간이 넓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다양한 장식과 4,000개가 넘는 사실적인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성당은 네 번째로 건설된 성당이다. 12세기 중반의 서쪽 정면을 그대로 보존하고, 13세기 초에 남북에 새로 큰 문을 냈고, 13세기 중반에 대규모 조상군과 부조를 장식하였다.

프랑스 국민들이 사랑하는 대성당에 화재가 끊이지 않아, 국민들은 성당 재건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성당의 재건축이 시작되자마자 전국에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샤르트르로 몰려들어 공사를 도왔다. 또 영주와 상인들은 건축에 필요한 자재와 식량을 기부하였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다시 탄생한 샤르트르 대성당은 이전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하늘을 향하여 우뚝 선 날렵한 위용을 나타냈다. 2개의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모두 9개의 첨탑이 있는데, 각각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특히 서쪽 정면에 세워진 웅장한 2개의 첨탑은 건설된 시기가 달라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두 탑을 보면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아케이드를 비롯하여 높다란 창에 맞춰 넣은 176개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거대한 장미창은 성당 내부에 있는 꽃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로서, 그 세련된 아름다움 때문에 ‘프랑스의 장미창’으로 불린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많은 성인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서쪽 정면의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남쪽 장미창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북쪽의 장미창은 성모를 주제로 하고 있다. 특히 ‘샤르트르의 청색’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색감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신비한 감흥에 빠져들게 한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건물에 장식된 4,000여 점의 조각은 어느 건축물에서도 볼 수 없는 많은 양이다. 대성당의 대표적 조각은 서쪽 정면에 새겨진 조각과 성당 안 성가대 벽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이다. 서쪽 정면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은 고딕 건축물에 새겨진 조각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왕의 문’으로 불리는 서쪽 정문에는 세 개의 커다란 문을 중심으로 수백 점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13세기 초 성당 재건축 때에 이 왕의 문은 그대로 보존하여 증축할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조각 군상은 이전 건물들에서 볼 수 있었던 조각에 비해서 사실적이며 질서 있고, 반복적인 리듬이 돋보이는 화려한 작품들이다. 반복된 형태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어 조각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문의 위쪽에는 예수가, 오른쪽과 왼쪽에는 복음서 저자를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쪽에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24명의 장로들로 장식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

다비드 상

르네상스 조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는 미켈란젤로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재료의 물질적 속성을 초월하여 그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147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프레세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미켈란젤로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미켈란젤로는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위탁되어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에만 관심을 두고 스케치를 했다. 아버지는 몰락한 가정을 일으키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며 어린 미켈란젤로를 야단치며 매를 댔다. 그러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런 미켈란젤로는 13세가 되던 해 당시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공방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된다. 그곳에서 그는 두각을 나타낸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발견한 스승은 오히려 어린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림 수업에 싫증을 느껴 일 년 만에 마치고 보다 새로운 예술을 원해 조각을 선택한다. 그리고 피렌체의 권력가인 메디치 가문에서 가르치는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예술가의 후원자로 알려진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는 어린 미켈란젤로가 가진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를 주목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프랑스의 밀라노와 피렌체 침공으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와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의 유명한 조각가인 도나텔로가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샀으나, 돌에 갈라진 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반품하였다. 거대한 돌덩어리는 쓸모없이 흉측스런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돌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 돌을 사들였다.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조각한 끝에 유명한 <다비드 상>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미켈란젤로는 지금까지 없었던 독창적인 형태로 <다비드 상>을 만들려고 구상하였다. 그때까지의 <다비드 상>은 발밑에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가 놓여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막 돌을 던지려는 나체의 다비드 상이다.

보통 사람 키의 세 배 가까이 되는 4m 높이의 <다비드 상>은 건강한 신체와 고전적 자세를 지닌 영웅의 면모를 담고 있다. 순간적으로 찡그린 표정 묘사와 손과 발 혈관의 세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서 보이는 정신적 긴장감은 <다비드 상>에 고전적이고도 르네상스적인 생동감이 함께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다비드의 자세에는 다소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 꼭 다문 입은 힘과 분노를 표현하고 있으며, 왼손에 쥔 돌멩이를 거인 골리앗을 향해 막 던질 듯 보인다. 도나텔로나 베로키오의 <다비드 상> 발밑에서 볼 수 있는 골리앗의 머리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는 없는데 이것은 독창적으로 제작하려 했던 미켈란젤로의 의도로 보인다.

다비드와 골리앗의 결투는 구약성서 사무엘기 상 17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다비드 상>은 성경 내용보다 극적인 요소는 적으나, 마치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활로 태양을 쏘는 모습처럼, 모든 힘이 돌을 던지려는 다비드의 팔 끝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다비드 상>의 팔은 힘센 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설치 장소 때문에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미켈란젤로의 희망과 결정에 따라 베키오 궁 앞 테라스에 설치되었다. 후에 <다비드 상>은 프랑스에 대한 피렌체 공화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이 되었다. <다비드 상>은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애국의 상징, 도시의 수호신으로서 시청 앞에 세워지기도 했다. 현재 원작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으며 똑같은 크기로 모각되어 광장에도 세워져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야외 조각으로서, 또는 주변과의 조화를 꾀한 환경 조각으로도 첫발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각을 건축으로 완전히 독립시켜 3차원의 표현을 이룩한 점은 조각사에 지대한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피에타

미켈란젤로는 예술 가운데 조각을 최고의 위치에 두려고 했던 진정한 조각가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의 주제를 ‘인간’으로 규정짓고, 초인간적인 제작 의욕을 바탕으로 생명력 없는 단단한 돌에 살아 숨 쉬는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탁월한 재능에 의해 탄생한 미켈란젤로의 인간 조각들은 후반기에 이르러 내면 의식과 다양한 모습의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 매너리즘과 바로크 미술을 예고하게 된다.

로마 추기경 장 드 빌레르 드 라그롤라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조각 작품을 의뢰하였다. 로마에 안착한 미켈란젤로는 첫 의뢰작인 조각을 만들기 위해 대리석을 구하러 떠났다. 이탈리아 북서쪽에 있는 카르라로에서 쓸 만한 대리석을 구한 미켈란젤로는 새로운 작품인 <피에타>에 몰두하였다. 이 유명한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조각에 미쳐 몸을 씻지도 않고 부츠를 신은 채 그대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항상 가난에 찌든 것처럼 살았고, 먹는 것에도 관심 없이 오직 조각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피에타 조각이 완성되기 전에 작품 의뢰인인 추기경이 사망하자, 대리석 구입비도 받지 못하고 완성된 피에타 조각은 성 베드로 성당 앞에 방치되었다. 피에타 조각상을 본 로마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그리고 이 조각상을 만든 사람이 20살을 넘긴 젊은이란 걸 알았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할 때 성모 마리아 어깨띠에 ‘피렌체 출신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가 이 작품을 만들다.’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다.

만족한 얼굴로 일을 마치고 나온 미켈란젤로는 밤하늘을 보고 피에타 조각상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을 후회하였다. 그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하느님은 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만들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다. 그런데 조각상 하나 만들어 놓고 자랑이나 하듯이 내 이름을 새겨 넣은 나 자신이 부끄럽구나.”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이후로는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23세 때 로마에 체류하면서 제작한 <피에타>는 대단한 찬사를 받으면서 그는 일약 청년 예술가의 별로 부상하게 된다. 유일하게 서명한 작품으로 알려진 <피에타>는 조용한 기독교적 정서와 섬세한 기술이 어우러져 고전적인 정취를 한껏 자아내고 있다. ‘인체의 미가 곧 정신의 표현’이라는 신플라톤주의 이론에 근거하여 제작한 두 인물(예수와 마리아)은 완벽한 해부학적 분석의 바탕 위에 제작되었으며 15세기 미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마리아의 얼굴을 매우 앳되게 표현하였다. 사후 강직이 일어났어야 하는 예수의 몸을 부드럽게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낸 표현이 매우 독창적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당시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예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만든 거대한 조각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한 작품이기도 하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의 조각

페르세포네의 납치

로마 시민들의 휴식처인 보르게세 공원 한쪽에는 보르게세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흰색의 대리석으로 치장한 외관의 이곳은 로마에서 바티칸 다음으로 소장 작품이 많은 미술관이다. 보르게세 공원은 중세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 가운데 하나였던 보르게세 가문의 땅으로 17세기 초 잔 베르니니의 후원자였던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 주도해 조성한 장소다. 보르게세 미술관 건물은 1615년 세워졌는데 주로 보르게세 가문의 별궁으로 사용됐다. 1891년 가문이 파산하자 이들이 보유했던 예술 작품을 국가가 사들인 뒤 1901년 미술관으로 단장해 일반에 공개했다. 보르게세 미술관에서는 베르니니의 <다비드 상>과 그의 걸작인 <페르세포네의 납치> 등의 여러 조각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페르세포네의 납치>는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가 제우스와 데메테르 사이에 태어난 외동딸 페르세포네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납치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하데스는 시칠리아 섬 엔나 들판에서 그녀가 꽃을 꺾는 순간, 강제로 낚아채어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페르세포네의 납치> 조각상은 매우 역동적인 포즈를 나타내며 조각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장점들을 소화하고 있다. 360도 둘레뿐만 아니라 위아래에서 보아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형상에 소름이 돋게 되며, 마치 연극 무대에서 펼쳐지는 리얼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듯하다.

조각임에도 페르세포네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고, 얼굴에 흐르는 눈물에서 납치당하는 순간의 페르세포네의 긴박함과 절박함,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 압권은 페르세포네의 허벅지를 움켜쥔 하데스의 억센 손이다.

마치 살아 있는 인체처럼 근육과 피부의 탄력이 생생하다. 동세(動勢)는 왼쪽에 페르세포네를 들기 위해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고 왼쪽 다리를 구부려 중심을 잡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조각의 안정감을 위해서 페르세포네를 감싼 천과 자연스럽게 이어진 머리 세 개가 달린 개 케르베로스가 버티고 있다.

베르니니의 작품들은 회화로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입체감으로, 사람이 커다란 돌덩이를 깎아 만들었다는 느낌보다는 진짜로 사람이 들어 있고 그 위로 대리석 반죽을 씌운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근대 조각의 시초

로뎅과 조각의 근대성

회화는 르네상스, 바로크 등 사조에 따라 구분되어 발전하였다. 그러나 조각은 회화의 사조와 달리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 19세기 들어 프랑수아 뤼드, 앙투안 루이 바리에, 장 바티스트 카르포 등의 조각의 거장들이 등장했으나, 조각은 여전히 회화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 3인의 출현도 아카데믹한 경향에 저항하는 소수의 움직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각의 고정관념을 근저로부터 깨고 새로운 전도를 개척하여 조각에 대한 인식을 회화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로댕이었다. 로댕의 등장은 조각의 사조가 그가 등장한 이후와 이전으로 나누어진다 해도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로댕은 생활에 쫓겨서 조각 작품의 발표가 늦어졌다. 그가 최초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청동시대>의 발표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심사위원은 그 생생한 청년상을 보고 산 사람을 방불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최선을 다한 로댕의 오랜 기간의 탐구와 관찰로 이루어진 것으로, 조각을 하나의 형상에 따라 제작하는 사람이나, 고정된 미의 관념으로 보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창작 방법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외형을 단순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포착하고 생각한 인간상을 한 사람의 청년의 육체를 통해 생명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로뎅은 시종 기성관념에 충돌했지만 자신의 조각에 대한 철학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는 조각이란 살아 있는 것같이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 속에 산 인간을 놓고 생명의 상호 접촉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빛과 그늘의 역할을 아주 크게 비약케 하여 조각의 면이나 요철을 내적 생동에 결합시키고 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여 초인적인 노력으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였다. 인상은 외치고, 두려워하고, 노호하면서, 공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 모습을 보여 약동의 분방성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창조된 것은 기왕에 걸쳐 있던 건조의 구렁으로부터 끌어내어 점토에 살아 있는 언어를 부여했다. 더욱이 만년에는 <발자크의 상>을 발표하여 더 한층 물의를 일으켰다.

이 조각상은 문호가 잠옷 바람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데, 이 제작은 부분을 떠나 조상을 거대한 덩어리로 조형하여 모든 것을 내부에 포함시켜 외면의 묘사로서는 불가능한 내면적인 웅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조각 분야에 다시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로댕은 전 생애를 통해 조각에는 별도로 존재하는 웅변이 있음을 입증하고,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표현의 방법을 모조리 개선하여, 조각을 근대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생각하는 사람

로댕의 걸작이자 모든 조각에서도 걸작으로 알려진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이 제작한 <지옥의 문> 상단부에 위치한 조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옥의 문>은 중세의 이탈리아의 시인인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조각한 조각으로, 지옥의 적나라한 군상들을 표현하였다. 로댕은 여기에 이들을 재판하는 절대 신인 그리스도의 형상 대신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는 생각에 잠긴 단테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립상들 중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이나 창조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약 70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조각상이지만 후에 200cm에 달하는 크기로 확대되었다. 1888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고 1904년 런던 국제협회에 전시되었으며 1906년에는 대형의 <생각하는 사람>이 파리의 팡테온 앞에 전시되어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의 동세를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벽면에 가득 메운 육중한 인물들의 프레스코를 마치 조각으로 옮긴 듯한 <지옥의 문>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미켈란젤로의 지옥 입구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물과 흡사하다. 그리고 이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조각으로 만들어진 인물상들 중 대표적인 걸작이 되었다.

조각상에서 오른쪽 팔꿈치가 왼쪽 대퇴부 위로 교차하듯 자연스럽지 않은 인체의 비튼 자세와 인체에서 근육을 강조시킨 표현주의적 묘사는 대상의 진지하고 고뇌에 빠진 힘든 심리적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상체가 숙여지고 팔이 교차되는 자세로 인해 조각상 안으로 생겨나는 검은 그림자는 대상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더욱 배가시킨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처럼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하여 어깨와 팔 부분의 비율이 다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구성되었다. 이러한 인체 비율의 부조화는 전체적으로 더욱 육중한 느낌을 갖게 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 상단에 앉아서 처참한 전경을 내려다보며 인간 실존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고뇌하는 사람답지 않게 강건하고 활력 있게 표현되었는데, 이 점은 지적한 면과 육체적인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조화로운 인간을 제시하고자 했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살롱 출품 후 파리의 팡테온에 놓아두었으나, 현재는 로댕미술관의 정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모작품들은 세계 각지에 여러 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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