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최초의 것들

노마드 / 2020년 12월 / 552쪽 / 28,000원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최초의 것들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최초의 것들

강대웅 지음

저자 소개

전북 전주 출생으로 전주고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나와 문예진흥원 심의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등을 지냈다. 지금은 충무아트홀 갤러리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영어잡학사전》 《커피를 마시는 도시》 《그리스 신화 속 7여신이 알려주는 나의 미래》 《제대로 알면 더 재미있는 인문교양 174》 등이 있으며, 편역서로 《배꼽티를 입은 문화》 《반 룬의 세계사 여행》이 있다. 번역서로는 《마르크스 전기 1, 2》(공역) 《마르크스 엥겔스 주택문제와 토지국유화》 《마르크스 엥겔스 문학예술론》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루카치 사상과 생애》 《영화 음악의 이해》 《무대 뒤의 오페라》《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있다.

책소개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 열 번째 책이다. 우리는 무심코 입고 먹고 쉬면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그 모든 것이 어떠한 발전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잘 알지 못한다. 개울가에서 손빨래하던 우리 선조들에게 세탁기의 등장은 그야말로 혁명이었을 것이다. 통조림은 또 어떤가? 전쟁 때문에 탄생한 이 기가 막힌 물건이 오늘날 인류의 식생활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 존재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거기에 다소곳하게 담긴 내용물도 무궁무진하다. 통조림의 무한변신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궁금할 따름이다. 이처럼 기발한 상상과 엉뚱한 실수로 탄생한 그 무엇이 인류의 삶을 바꾸어왔다.

요약본 본문

제1부 衣_ 우리가 몸에 걸치는 것들의 유래와 에피소드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장례식의 검은 옷

하얀색은 청정과 순결을 나타내는 색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 시대의 신부는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노란 베일을 썼다. 사실 신부가 쓰는 베일은 웨딩드레스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리고 베일은 신부가 쓰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복식사들에 따르면 베일은 남자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즉,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에 두고 다른 사내의 눈으로부터 숨겨두기 위해서 고안한 물건이다. 그 긴 역사 속에서 고상함과 아름다움의 상징이거나 비밀리에 정을 통한다든가 상을 당한 것을 뜻했던 베일은 여성의 몸에 걸치는 물건이면서도 여성이 만들지 않은 유일한 의상용품이다.

동양에서는 적어도 4000년 전에 이미 베일을 사용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얌전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결혼한 여자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기 위해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집 밖으로 한 반짝이라도 나갈 때는 반드시 머리와 얼굴의 일부를 가려야 했다. 남자가 만든 이 계율은 더욱 엄격해져서 나중에는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려야만 했다. 기원전 4세기에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결혼식 때 얇고 환희 비치는 베일을 쓰는 것이 유행했다. 당시는 드레스와 베일 모두 노란색이 유행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하얀 웨딩드레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다. 그러나 이 하얀 웨딩드레스는 ‘하얀색은 신부의 순결을 나타낸다’는 노골적인 표현인지라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반면에 목사들은 신부의 순결은 당연한 일이며 새삼스럽게 떠들썩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후 150년 동안 영국의 신문과 잡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와서야 하얀 웨딩드레스가 일반화되었다. 복식사가에 따르면, 그것은 당시 팔리고 있던 정장용 드레스가 거의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1813년 프랑스의 인기 있는 여성지 《주르날 데 담》에 순백의 웨딩드레스 삽화가 커다랗게 실린 이래 하얀색은 웨딩드레스의 색깔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결혼식을 올린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공주, 즉 이방자다. 이후 1965년 당시 최고 톱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에서 엄앵란이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만든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으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장례식은 서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동료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버리지 않고 장례를 치르고 매장했다. 시간이 흘러 고대 로마에서는 장례식 때 횃불을 육체를 떠난 혼을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장례’를 뜻하는 영어 funeral은 ‘횃불’을 뜻하는 라틴어 funus에서 유래한다. 장례식 때 촛불을 켜놓게 된 것도 로마 시대부터다. 그들은 시신 주위에 촛불을 세워 한번 육체를 떠난 영혼이 다시 돌아와 시신을 되살아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로마인은 어둠을 집으로 삼는 영혼은 빛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갖가지 장례 관습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마음에서라기보다 저승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된 것이 많다. 고인을 애도해 입은 검은 옷도 원래는 공포 때문에 생긴 관습이다. 서양에서검은색이 상복의 색깔이 된 것은 친척이건 적이건 또는 타인이건 어쨌든 죽은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원은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사람들은 한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죽은 사람의 혼령이 언제 다시 날아 들어올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인류학 자료에 따르면, 원시 시대의 백인은 장례식 때 영혼을 속이기 위해 온몸을 새까맣게 칠했다고 한다. 반대로 흑인의 대륙 아프리카에서는 같은 이유로 온몸을 새하얗게 칠하는 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은 장례식 때 몸을 까맣게 칠한 것이나, 가족이나 친척이 죽으면 몇 주나 몇 달 동안 검은 상복을 입었던 것은 영혼의 눈을 멀게 하는 방법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얼굴을 숨기는 베일도 물론 이 공포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서는 미망인이 꼬박 1년 동안 검은 옷과 베일로 몸과 얼굴을 감싸 죽은 남편의 영혼을 피해 숨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복이 검은색인 것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얀 피부에 반대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핵폭탄과 비키니 수영복

수영복이 하나의 특별한 의상으로 탄생한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그때까지 수영이나 물놀이는 그다지 인기 있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수영을 할 때는 속옷 차림이나 알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수영이 환영받게 되었고 수영복의 필요성이 생겨났을까? 1800년대 유럽의 의사들은 ‘마음의 우울함’을 고치는 레크리에이션으로 수영이 효과적이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우울함’이라는 말에는 상사병 같은 한때의 감정부터 결핵성 수막염처럼 죽음이 확실한 증세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고치는 것이 광천수, 샘물, 바닷물 등의 ‘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몇 세기에 걸쳐 온몸을 물에 적시는 일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하던 유럽인이 수천 명씩 호수나 냇가나 해변으로 몰려가 물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춰 등장한 수영복은 외출복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예를 들어 여성용 수영복은 플란넬이나 알파카 또는 서지 등으로 몸에 딱 맞는 정도로 만들었는데 다 갖춰 입으면 하이넥 칼라에 팔꿈치까지 오는 소매, 무릎까지 내려가는 스커트 밑으로 블루머, 검은 스타킹, 아마포로 만든 낮은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두꺼운 천으로 만든 수영복은 물에 젖으면 사람의 몸무게만큼 무거워져서 익사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나온 좀 더 가벼운 ‘수영용 수영복’과 비교하면 초기의 수영복은 실로 ‘목욕용 수영복’인 셈이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얼마 전부터 몸에 딱 맞는 원피스식 수영복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서자 수영복은 노출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여성 수영복은 어깨끈이 가늘고 등이 없는 디자인이 되었다가 곧이어 상의와 팬티로 이루어진 투피스 수영복으로 바뀌었다. 그 뒤에 등장한 것이 비키니다. 이 이름 때문에 비키니 패션은 불안정한 시대의 도래와 영원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로 알려진 태평양의 마셜 제도 해역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해 핵실험을 시작했다. 원자폭탄은 그보다 1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그 무렵 파리에서는 루이 레아르라는 디자이너가 지극히 작은 면적의 천을 사용한 대담한 투피스 수영복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수영복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신문은 온통 원자폭탄 실험 기사로 메워져 있었다. 레아르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고, 그 디자인의 위력도 폭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화제의 중심이었던 ‘비키니’를 수영복 이름으로 정했다. 그리고 원자폭탄 투하 실험 나흘 뒤인 7월 5일, 누드 댄서였던 레아르의 톱 모델 미슐린 베르나르디니가 역사상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고 파리의 도로를 행진했다. 1946년은 수영복이 원자폭탄 실험 못지않게 숱한 논쟁과 관심 그리고 비난을 불러일으킨 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食_ 주식과 먹거리, 그에 얽힌 이야기들

세계를 바꾼 다섯 개의 사과

사과에 얽힌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에덴동산의 사과지만, 그것은 분명히 허구다. 물론 성서에는 사과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에는 사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창세기>에는 단지 아담과 이브가 지식과 선악을 알게 하는 금지된 과일(선악과)을 따 먹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라틴어에서 사과와 악을 뜻하는 단어는 비슷해서, 사과는 malus, 악은 malum이다.

한참 뒤에 예술가들이 그 이야기를 작품화하면서 그것이 무슨 과일인가를 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몇몇 사람이 그것을 과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과로 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사과’다. 그리하여 선악과가 사과였다는 얘기는 근거도 없이 퍼져나갔으며, 일부 성서학자들은 석류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독교가 인도로 전파되었을 당시에는 바나나로 둔갑하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 이슬람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파리스의 사과’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격분하여 신들 사이로 던진 황금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자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이 세 여신은 각자 자신이 그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제우스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불길한 신탁 때문에 버려져 양치기의 손에서 자란 파리스에게 판결을 부탁한다. 젊은 파리스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해주겠다는 아프로디테를 사과의 주인으로 선택했고 그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파리스의 사과는 ‘분쟁의 씨앗’으로 자주 인용된다.

세 번째는 ‘빌헬름 텔의 사과’다. 14세기의 스위스 사람들은 폭군 헤르만 게슬러 공작의 학정 밑에서 무척이나 힘들게 살아갔다. 어느 날 게슬러는 광장에 모자를 걸어놓은 긴 장대를 세워놓고,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앞에서 절을 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빌헬름 텔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골칫거리인 빌헬름 텔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게슬러는 그의 어린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단 한 발로 사과를 명중시키라고 명령했고, 빌헬름 텔은 사과를 명중시켰다. 독재자에 의연히 맞선 빌헬름 텔의 이야기는 스위스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약소국의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빌헬름 텔의 사과는 ‘자유의 사과’로 불렸다.

네 번째는 ‘뉴턴의 사과’다. 1665년경 유럽 일대에 흑사병이 만연해 대학이 휴교하자 뉴턴은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어느 날 정원의 나무에서 우연히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와 사과 사이에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즉,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에 착안해 모든 물체 사이에는 만유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만유인력의 발견은 근대 과학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므로 이 사과는 ‘과학의 사과’가 되었다.

다섯 번째 사과는 좁은 차고에서 피어난 혁신의 사과, 바로 애플사의 로고인 ‘베어 먹다 만 사과’다. 이 사과에 대한 일화가 있다. 승승장구하며 자신들의 아성까지 침범한 애플에 심기가 불편했던 IBM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로고를 보고 ‘애플은 썩은 사과’라며 빈정댔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는 “애플은 썩은 부분을 완전히 도려냈기 때문에 이제는 아주 깨끗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소고기가 Beef인 까닭은

소는 뛰어난 노동력 때문에 그 자체가 재산이나 다름없어서, 옛날에는 화폐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소를 화폐 대신 사용하면서 소에서 여러 가지 단어가 파생되었다. chattel(동산)이나 capital(자본)도 바로 소(cattle)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fee(수수료)도 고(古)노르드어 fe(소)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 영어에서 소의 ‘머리와 꼬리’를 이르는 heads and tails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66년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 참회왕이 죽은 뒤 웨섹스 백작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 공 기욤 2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으로 진격해왔다. 영국을 정복한 기욤 2세는 잉글랜드 윌리엄 1세로서 영국의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이 사건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윌리엄 1세는 정복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영국은 백년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300여 년간 프랑스의 식민지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상류층은 프랑스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평민들은 영어를 사용했다.

이런 관습은 당연히 음식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영국의 농부는 소를 길렀지만, 그 고기는 프랑스어를 쓰는 상류층이 먹어치운 까닭에 프랑스어 viande de boeut(소고기)에서 나온 beef로 불렀으며, 송아지(calf) 고기도 프랑스어 veau에서 나온 veal이라 했다. 이는 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양은 sheep 또는 lamb이지만 그 고기는 viande de mouton에서 나온 mutton으로 불렀으며, 돼지는 pig 또는 hog이지만 그 고기는 viande de porc에서 나온 pork로 불렀다.

소시지를 먹는 것은 죄악이다

프랑크 소시지의 기원은 3500년 전 바빌로니아인이 동물의 내장에 향신료로 맛을 낸 고기를 집어넣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 후로 여러 문명이 이 요리에 변화를 주거나 새롭게 만들어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에 이르렀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에서 소시지의 뛰어난 맛을 노래한 것이 문학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다. “이글거리는 모닥불 옆에서 한 사나이가 소시지에 비계와 피를 집어넣고, 이쪽저쪽 뒤집으면서 어떻게든 빨리 구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소시지는 로마제국이 멸망하기에 앞서 쇠퇴했다. 228년에 쓰인 로마의 가장 오래된 요리책에 따르면, 해마다 2월 15일 목양신 루페르쿠스를 모시는 이교도의 축제인 루페르칼리아에서 소시지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이 축제는 성적 통과의례도 겸했기 때문에 소시지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초기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축제를 교회법으로 금지하고 소시지를 먹는 것이 죄악이라고 했다. 4세기 무렵 기독교를 신봉한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소시지 먹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인도 소시지를 몰래 만드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황제가 마침내 금지령을 철회했다.

굵은 소시지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가느다란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로 변한 것은 중세였다. 유럽의 여러 도시국가의 정육점 길드는 각기 지방의 특색을 지닌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모양ㆍ굵기ㆍ맛이 독특한 소시지를 만들어 생산지를 나타내는 이름을 붙였다. 나라의 특색을 나타낸 것은 모양과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지중해의 나라들은 무더운 기후에도 썩지 않는 딱딱한 드라이 소시지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지역에 풍부한 오트밀을 사용해서 최초로 곡물이 들어간 소시지를 만들었다.

굵고 부드러우며 지방이 많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는 1850년대에 태어났다. 1852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정육점 길드는 투명하고 얇은 창자에 향신료로 맛을 낸 고기를 넣어서 훈제한 소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약간 구부러진 모양의 이 소시지 이름은 관습대로 도시 이름을 따서 ‘프랑크푸르트’라 붙였다.

미국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핫도그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이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다. 188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민 온 두 사람이 미국에 소시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핫도그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찰스 펠트만이라는 빵 가게 주인이다. 펠트만은 코니아일랜드의 시골길을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파이를 팔았다. 그런데 코니아일랜드에 있는 레스토랑들이 1890년대 초부터 여러 종류의 따뜻한 요리를 내놓기 시작하자 펠트만이 팔던 파이는 매상이 점차 떨어졌다. 주변에서는 펠트만에게 따뜻한 샌드위치를 팔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으나, 그의 작은 손수레에는 많은 종류의 재료나 조리도구를 실을 여유가 없었다. 생각 끝에 그는 고향에서 먹었던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팔기로 했다. 펠트만은 손수레에 작은 난로를 싣고 다니며 냄비에다 소시지를 삶아 팔면서 그 소시지를 ‘프랑크푸르트 샌드위치’라고 광고했다. 그리고 독일의 전통대로 소시지에 겨자와 발효 시킨 양배추 김치를 얹었다. 이 샌드위치의 성공으로 펠트만은 코니아일랜드에 ‘펠트만의 저먼 가든’을 열었다.

1913년에 펠트만은 폴란드 이민자인 네이선 핸드워커라는 젊은이를 종업원으로 고용했는데, 이 젊은이의 등장으로 핫도그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당시의 코니아일랜드는 호화로운 휴양지이자 오락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먹으면서 해변을 걷곤 했는데 펠트만의 고객 가운데 그 고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에디 캔터와 반주자 지미 듀란트가 있었다.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두 사람은 어느 날 펠트만이 프랑크 소시지의 값을 10센트로 올린 것을 보고 점원인 네이선에게 펠트만의 밑에서 일하지 말고 직접 프랑크 소시지를 싼 값에 팔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1916년에 네이선은 저축해놓은 300달러를 털어서 가게를 얻은 다음 길모퉁이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네이선은 아내 아이다가 생각해낸 방법대로 5센트짜리 프랑크 소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판매 촉진을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강구했다. 코니아 일랜드 근처의 병원 의사들에게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두른 채 자신의 가게에서 프랑크 소시지를 먹는다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의사는 존경받는 존재였으므로 소시지를 먹는 의사들의 모습은 네이선이 만드는 프랑크 소시지가 품질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증명이 되었다.

1906년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유선형의 소시지는 많지 않았고 이름도 프랑크푸르트, 프랑크, 비엔나, 레드핫, 닥스훈트 소시지 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었다. 그중 프랑크 소시지는 이 무렵에 이미 해리 스티븐스의 레스토랑과 뉴욕시의 야구장에서 단골 메뉴로 자리 잡고 있었다. ‘뉴욕 자이언트’의 홈그라운드에서는 해리 스티븐스의 판매원들이 관객들에게 “따끈따끈한 프랑크 소시지를 드세요!” 하고 소리치며 돌아다녔다.

1906년 어느 여름, 스포츠 만화가 태드 도건이 야구장 스탠드에 앉아 있다가 개를 닮은 소시지 모양과 짖어대는 것 같은 판매원의 목소리에 자극을 받고 그것을 만화로 그렸다. 닥스훈트라는 개가 겨자를 바르고 둥그런 샌드위치가 되어 버린 그림이었다. 그림 설명은 “핫도그를 드세요!”였는데 전해지는 얘기로는, 도건이 사무실로 돌아와서 그림을 마무리하면서 닥스훈트의 스펠링을 알 수가 없어서 ‘도그’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 만화는 그해 12월 12일자 『뉴욕 이브닝 저널』에 실렸다. 이 그림을 계기로 핫도그라는 이름은 크게 히트해, 그때까지 불리던 여러 가지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초콜릿의 비밀을 누설하면 사형

문명인들이 처음으로 맛본 초콜릿은 지금처럼 달콤하고 딱딱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쓰디쓴 액체였던 것이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지금과 같이 먹기 좋은 과자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코코아나무 열매에서 채취하는 초콜릿은 마야, 아즈텍, 톨텍 등 세 문명권에서 제사 때 사용하는 액체였다. 코코아는 그들이 원래부터 중시하는 과일이라서 한때 그 열매는 화폐로 쓰이기도 했다. 아즈텍족은 코코아 열매를 단지 속에 넣어 발효시킨 후 가열했다. 그리고 씨를 깨뜨려 그 핵을 부수고 물을 부어 액체로 만들어, 쓴맛을 없애기 위해 바닐라나 다른 향료를 적당히 첨가해 달콤하게 만들었다. 아즈텍족의 언어로 그것을 부르는 말도 직역하면 ‘쓴 물’이었다.

초콜릿은 16세기 초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했다. 유럽인들은 당시 ‘코코아’라고 불리던 그 액체에 적당량의 설탕을 가미했다. 난생처럼 초콜릿 맛을 본 에스파냐 왕족들은 금세 그 맛에 매료되었다.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는 그 새로운 음료를 혼자만 즐기려고 공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누구라도 이 새로운 음료가 생겼다는 비밀을 누설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명이었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덕분에 초콜릿이라는 신비한 음료가 있다는 사실은 100년 동안이나 다른 나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마침내 초콜릿은 거의 100년 만인 1606년 이탈리아에 등장했는데 이탈리아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코코아를 확보하려고 열을 올렸다. 초콜릿이 프랑스로 들어간 것은 1660년의 일이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가 루이 14세와 결혼하면서 예물로 가져간 것이었다. 그 음료를 맛본 프랑스 왕족들도 그 맛에 반해버렸음은 물론이다. 영국은 1657년 한 프랑스인이 런던에 초콜릿 가게를 열면서 초콜릿 열풍에 휩싸였다. 그 가게에서는 초콜릿을 덩어리째 팔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다가 조금씩 녹여 먹곤 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초콜릿은 전 유럽에 퍼졌다.

미국인들은 1765년 영국인들이 서인도 제도에서 코코아 열매를 들여와 매사추세츠에 초콜릿 공장을 세우면서 그 맛을 알기 시작했다. 열강들이 식민지 확보에 혈안이 되었을 당시 아프리카의 기후나 토양이 코코아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안 유럽인은 그곳에 코코아나무를 대량으로 심었다. 그 결과 지금 아프리카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코코아 생산지가 되었다.

19세기 들어서도 초콜릿은 여전히 음료로 통용되고 있었는데, 1828년 네덜란드인 쿤라드 요하네스 판 하우턴이 코코아 열매에서 크림 같은 버터를 추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1847년 영국의 제과업체인 프라인 앤 선즈가 그 버터에 초콜릿 용액을 섞어서 짙은 갈색의 견고한 초콜릿(초코바)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스위스인 다니엘 페터가 초콜릿에 분유를 가미해 최초의 초콜릿 우유를 만들었다. 요즘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초콜릿 제품이 바로 초콜릿 우유다.

홧김에 만든 포테이토칩

감자는 쌀 다음으로 소비가 많은 세계적인 식품이다. 이 감자를 얇게 썰어 소금을 뿌리고 바삭바삭하게 튀겨낸 포테이토칩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낵이다. 포테이토칩은 처음에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 사는 사람이 프렌치프라이(두툼하게 썬 감자튀김으로 주로 햄버거에 곁들어 나온다)를 변형시킨 것으로, 갑작스런 영감에 의한 발명품이 아니라 홧김에 튀어나온 부산물이었다.

프렌치프라이는 1700년대에 유행한 스낵으로 프랑스 대사를 지냈으며 프랑스 아이스크림 마니아인 토머스 제퍼슨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요리법을 배워 미국으로 돌아온 제퍼슨이 버지니아주 몬티셀로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손님들에게 대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차츰 사람들에게 알려짐으로써 본격적인 디너 요리가 되었다.

1853년 여름, 조지 크럼은 뉴욕주의 고급 휴양지인 새러토가스프링스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레스토랑 ‘케리 문스 레이크하우스’의 메뉴에는 조지 크럼이 만드는 평범한 프렌치프라이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식당에 저녁식사를 하러 온 손님이 조지 크럼이 만든 프렌치프라이가 너무 두꺼워서 취향에 맞지 않는다며 주문을 취소했다. 이에 그는 감자를 얇게 잘라서 튀겨내 다시 가져갔지만 이것도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화가 난 그는 손님을 골탕 먹일 요량으로 감자를 아주 얇게 썰어 포크로 찍을 수 없을 만큼 바싹 튀겨 가져갔다. 그런데 종잇장처럼 얇고 연한 갈색으로 튀겨낸 이 감자는 뜻밖에도 그 손님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져 그 손님은 엄지를 내밀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손님들도 앞다투어 포테이토칩을 주문했다. 그 손님은 바로 미국의 철도왕이라 불리는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였다.

얼마 후 포테이토칩은 ‘케리 문스 레이크하우스’의 특별요리인 ‘새러토가 칩’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판매되었고, 나중에는 포장 판매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지역에서만 팔리던 것이 점차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조지 크럼은 포테이토칩 전문 레스토랑까지 열게 되었다. 당시에는 감자 껍질을 벗겨서 얇게 써는 작업을 모두 손으로 했으나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감자 껍질을 벗기는 기계가 발명되어 소량씩 보급되던 포테이토칩이 판매량 제1위의 스낵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포테이토칩은 세상에 선보이고 나서 수십 년 동안 주로 북부의 디너 요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에 세일즈맨 허먼 레이가 자동차에 포테이토칩을 싣고 남부의 식료품점들과 거래하면서, 그가 제공한 포테이토칩이 소금을 뿌린 스낵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허먼 레이의 포테이토칩은 시장에서 최초로 성공한 전국 상표가 되었다.

현재 미국인의 포테이토칩 소비량은 세계 제일인데, 이는 어쩌면 감자를 먹지 않았던 식민지 시대의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은 감자를 먹으면 수명이 줄어든다고 믿어 감자를 주로 돼지 사료로 썼다. 오늘날처럼 기름으로 튀기고 소금을 많이 뿌린 음식이라서 심장병이나 고혈압의 원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감자에 최음제성분이 들어 있어서 그것을 섭취하면 단명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감자에는 최음 작용을 하는 성분은 없지만 유난히 포테이토칩을 즐기는 사람들에 사이에서는 그것을 먹고 난 후의 만족감이 마치 섹스와도 같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덕분에 만들어진 통조림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음식을 원래 상태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자연과 싸워야 했다. 겨울처럼 수확이 불가능할 때나 기근이 들어 음식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야 했지만 영양분과 맛을 유지하면서 음식을 보존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 건너 여행을 가거나 원정 사냥이나 전쟁에 나갈 때처럼 주거지를 떠날 때면 음식 보존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그리하여 채소나 과일 등을 소금물에 절이고 육류를 훈제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그 정도의 기술로도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유럽의 인구가 폭증하고 열강들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음식을 보존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과 계속되는 영토 확장 전쟁으로 신선한 음식을 공급받지 못한 병사들 사이에 괴혈병이 만연하자, 급기야 1795년 프랑스 정부는 1만 2000프랑의 상금을 내걸고 새로운 음식물 보존법과 관련해 묘안을 내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샬롱쉬르마른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던 니콜라 아페르는 그 발표에 솔깃했다. 주방장이자 제과업자이고 증류주 기술자일 정도로 다재다능한 아페르는 그 해결책을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혁명(1789~1799)이 끝나고 몇 년 동안 페스트가 창궐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일 때도, 아페르는 연구에 골몰했고 마침내 1810년 『동식물성 물질 보존 기술』이라는 책을 200부 발간했다.

그의 주장은 죽이나 잼, 과일 같은 음식을 용기에 넣어 밀폐하면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외부 공기를 차단하면 식품이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내용물을 담은 항아리를 끓는 물에 몇 시간 동안 담가보았다. 항아리 입구는 코르크로 막고 틈새도 밀랍으로 봉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꺼내보았더니 맛이 원래 그대로였다. 이에 정부 관계자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고, 1810년 아페르는 정부로부터 1만 2000프랑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받았다. 아페르는 이 상금으로 세계 최초의 유리병 제조회사를 차렸고, 그 회사는 1933년 문을 닫을 때까지 밀폐 유리병을 만들어냈다. 아페르는 음식물 보존법을 알아냈지만 그 과학적 원리는 알지 못했다. 1864년 루이 파스퇴르는 밀폐된 용기에는 미생물이 침입할 수 없기 때문에 식품이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한편 1810년 영국인 상인 피터 듀런드가 식품을 보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을 했으니 주석 캔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주석 캔 특허를 받아 영국 정부와 계약을 맺고 1813년부터 해군에 통조림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주석 캔이 1819년에 도입되었다. 지금은 미국이 가장 큰 생산국이며 시장이지만 도입된 지 40년 동안 미국 시장에서 주석 캔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 수요가 폭등해 1895년부터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캔에 담은 음식은 현대 사회를 바꾸어놓았다고 할 만큼 식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3부 住_ 생활하고 일하는 곳 그리고 문화공간의 변천사

창문이 많으면 세금도 많이 냈다

1696년 12월 31일, 영국 의회는 창문세 신설을 의결했다. 윌리엄 3세는 ‘권리장전’에 따라 의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거둘 수 없었지만, 네덜란드에서 데려온 군대의 유지와 아일랜드의 통치 그리고 식민지 아메리카를 운영하는 데 엄청난 자금이 필요해지자 의회를 설득해 창문세를 신설한 것이다.

창문세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재산세였다. 창문의 재료인 유리가 대량생산이 되지 않아 워낙 비쌌기 때문에 창문 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자 곳곳에서 파장이 일었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창문 수를 줄이거나 아예 없애는 바람에 주택의 외관이 기형적으로 변해버렸다. 세금을 내느니 차라리 어둠을 택한 것이다. 그러자 당국도 강경하게 밀어붙여 창문 간 간격이 일정 기준보다 벌어져 있으면 별도의 창문으로 간주해 세금을 더 매겼다. 일시적으로 창문을 폐쇄했다가 다시 여는 행위가 적발될 경우에도 20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로 인해 런던에서는 햇빛을 못 보고 습한 데서 살아 우울증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어났고, 각종 병균이 창궐해 전염병이 만연했다.

창문세는 원래 1303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왕권 강화 차원에서 고안한 여러 가지 세원 중 하나였다. 그 당시는 아주 잠깐 시행하다가 곧바로 폐지했으나 여러 나라로 파급되었고, 영국에서만 유난히 오래 시행된 아주 황당한 세금 중 하나였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영국의 창문세는 1851년 주택세가 도입될 때까지 150여 년간 시행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루이 16세 때 다시 창문세를 매겼는데, 영국과 다른 점은 창문의 수가 아니라 폭을 기준으로 삼아 부과한 것이다. 부자일수록 창문을 넓게 낸다는 점에 착안했는데, 이때부터 프랑스에서는 폭이 좁고 긴 창문을 낸 건물들이 늘어났다. 프랑스식 건물 하면 흔히 떠올리는 ‘폭 좁은 창문’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세금도 결국 1926년에 폐지되었다.

서민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 시장

원래 시장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한 장소를 뜻하지만, 경제학적인 측면에서는 거래 장소가 특정해 있지 않더라도 주식시장이나 외환시장처럼 거래의 목적물ㆍ판매자ㆍ구매자만 있으면 ‘시장’이라 표현하며, 여기서 매매되는 재화를 ‘상품’이라고 한다. 시장을 뜻하는 영어 market은 라틴어 mercatu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merchant(상인)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 말들은 모두 로마 신화에서 상업의 신인 메르쿠리우스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아고라(광장)에 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역 시장으로는 아고라가, 대외 시장으로는 엠포리움이 존재했으며, 엠포리움에서는 원정군을 위한 보급물자와 전리품도 관리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처럼 광대한 관개 농지가 없는 그리스는 곡물 확보가 중요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신인 클레오메네스가 운영한 곡물시장은 가격 변동을 감안한 최초의 국제시장으로 존재했다. 이와는 별도로 도시 중심부의 스토아에서도 장이 열렸다. 스토아는 원래는 비와 햇빛을 피하기 위한 회랑이었으나, 이곳에 시장이 들어섬으로써 공공 산책로와 상업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고대 로마는 그리스의 아고라를 포럼으로 계승했으며, 엠포리움은 상품보관소로도 이용됐다.

아랍 지역에서는 아랍어로 수크, 페르시아어로 바자르라고 하는 시장이 열렸다. 여기서 유래된 바자는 원래 시장 또는 상점가를 일컫는 말이지만 영미권에서 보통 ‘자선바자회’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처음에는 캐러밴의 도착에 맞춰 장이 열릴 때마다 점포를 설치했지만 이후에 상설 점포가 등장했다.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으로 바그다드가 함락되기 전까지 아바스왕조의 도시에서는 새해 첫날 정기시장이 열렸고, 종교행사 때마다 다양한 시장이 형성되어 상업이 성행했다.

로마제국 이후 중세에는 여러 도시와 성과 수도원에서 시장이 열렸으며, 북유럽에는 비크라고 불리는 교역지가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에 마켓 타운이 건설되면서 지역에 시장이 열렸다. 정기시로는 프랑스의 생드니 수도원이나 영국 케임브리지 근처 스투어브리지 시장 등 국제적인 연시(年市)가 존재했다, 십자군 원정 이후 남북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시장도 활기를 띠었으며, 그중에서도 프랑스으 샹파뉴 시장은 대규모 연시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오래된 전통시장으로는 1014년에 실질적으로 문을 열었다는 영국 런던의 버러 마켓이 있다. 2014년에는 ‘버러 마켓 개장 1000주년 행사’를 열기도 했다. 특히, 이곳은 현지 판매자가 직접 재배하고 기른 신선한 과일과 채소, 수제 초콜릿, 치즈, 유기농 고기, 집에서 구운 빵과 꿀 등 생활에 필요한 먹을거리가 총집합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식재료 시장이다.

13세기 초에 생긴 바르셀로나의 산호세 시장도 오래된 전통시장 중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인 이스탄불의 카파르 차르시(‘덮개가 있는 시장’이라는 뜻. 일반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는 1455~1461년에 건축되었으며, 현재 5000여 개의 점포와 미로 같은 60개의 통로에 출입구가 20여 개 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은 6세기 신라의 경시(京市)다. 하지만 백제(4세기 근초고왕)와 고구려(5세기 장수왕)에도 향시(鄕市)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비단길과 해상무역을 통해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온 물물의 거래가 활발했고, 고려 시대에는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거래할 정도로 대외 무역이 활발했다. 이때부터 고려는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서역에 ‘코리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장사꾼은 가장 낮은 계층으로 천대받았으나 후기에 들어 시장이 활기를 띠어, 이제 시장은 단순히 물건만을 매매하는 곳이 아니라 정보 교환의 장이자 광대들의 놀이가 있는 문화공간 역할까지 했다.

우리나라 근대식 시장은 일본의 경제 침략 정책에 맞서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905년 7월 박승직(두산그룹의 창업자로 1915년 ‘박가분’ 출시) 등 조선 상인들이 토지와 현금을 모아 최초의 상설시장인 광장시장을 열었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으로 남아있다. 이전에 배오개 시장이었다가 1905년 한성부에 시장 개설 허가를 낼 당시에는 동대문시장으로 명칭을 정했으나, 1906년대 이후부터 ‘널리 모아 간직한다’는 뜻을 담아 광장(廣藏)시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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