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인권 상영관

예미 / 2020년 12월 / 228쪽 / 15,000원

언택트 인권 상영관

언택트 인권 상영관

최하진, 박인숙 지음

저자 소개

최하진

영화 칼럼니스트. 영화로 풀뿌리문화 확산을 꿈꾸는 문화활동가로, 일반대중을 넘어 청소년들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서울소년원(고봉중고등학교) 아이들과 함께했던 〈영화와 글쓰기〉의 성과는 서울보호관찰소 등에서 주관하는 〈보호관찰 청소년 재범방지를 위한 희망의 인문학〉으로 이어졌다. 자립이 필요한 청소년을 위한 〈희망드림영화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법무부 서울보호관찰소 특별범죄예방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가 부모에게 답하다』, 『중고생이 꼭 봐야 할 영화 20』이 있다.

박인숙

변호사. 청소년, 청년, 외국인을 위한 변호를 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교육지원청의 학교폭력 심의위원,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 법무부 소년보호혁신위원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시교육청 성희롱  성폭력 외부자문위원으로서 자문을 하고 있다. 〈희망드림영화관〉의 변호사로서 청소년을 위해서 뛰고 있다.

책소개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9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인권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영화 칼럼니스트와 청소년 인권변호사가 만나, 사람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가지고 낯선 법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영화 〈로제타〉는 청소년의 복지와 노동문제를, 〈가버나움〉은 난민아동의 인권문제를 다룬다. 이 외에도 따돌림, 체벌, 청소년범죄 등을 다룬 영화를 만나보면서 이와 관련한 법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요약본 본문

PART1 법은 삶을 바꾼다

아이는 무엇으로 사는가: 〈칠드런 액트〉

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저 바다로 흘러드는 강과 같다. -호르헤 만리케

“인간의 마음 안에는 사랑이 있고, 인간은 자신의 내일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내일을 알 수 없듯 만남 또한 예측할 수 없는데요. 우리는 매일 숱한 선택과 결정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지만, 내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를 따져 가며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최승자 시인의 <여자들과 사내들>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벼락처럼 왔다가/정전처럼 끊겨지고/갑작스런 배고픔으로/찾아오는 이별.”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기는 어떤 찰나의 만남,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만남 같은 것들이 있는데요. 영화 <칠드런 액트>는 법정이라는 무대를 빌려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의 아동법이 종교를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미성년자의 생명권에 관하여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를 대한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출신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는데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법과 사람 사이: 존경받는 가정법원 판사인 피오나(엠마 톰슨)는 완벽한 재판을 추구하기에 집에 돌아와도 재판에만 몰두합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인문학 교수인 남편 잭(스탠리 투치)과도 큰 갈등 없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잭은 그녀의 무심함을 탓하며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했던 피오나의 삶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피오나는 집에서나 법정에서나 그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 것뿐인데, 이런 남편의 태도에 분노를 느끼기도 하죠. 그런 와중에 소년 애덤(핀 화이트헤드)의 재판을 맡게 되는데요. 백혈병에 걸린 아이는 3일 안에 수혈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데도 종교적인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만 18세가 되지 않은 미성년자의 경우 아동법에 의해서 치료 결정이 내려집니다. 영화 <칠드런 액트>는 1989년에 제정된 영국의 아동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법정이 미성년자(아동)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적으로 ‘아동의 복리’를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 작품 속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한 애덤은 만 18세가 되려면 3개월이 부족하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에 따라 부모님이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현실에서는 판사가 직접 현장으로 찾아가는 일이 흔치 않다고 하는데요. 판사 피오나가 애덤의 병실을 찾았을 때, 소년은 너무나 감격하고 놀라워합니다.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순교자처럼 환상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맞이하려던 애덤은 피오나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죠. 그것은 죽음에 관한 현실입니다. 만일 치료를 거부하다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살게 된다면, 그것이 주변에 미칠 영향과 삶의 모습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때 애덤은 살짝 흔들립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죽음과 달리 식물인간이 되거나 몸의 어딘가 무너져서 망가진 몸으로 평생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애덤은 피오나 앞에서 기타를 듭니다. 기타를 배운 지 4주가 되었다며 한 곡을 연주하는데요. 아일랜드 민요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유명한 시를 노랫말로 붙인 <버드나무 정원 아래서>입니다. 피오나가 반주에 맞춰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자, 소년의 눈빛이 쨍 하고 빛납니다. 애덤에게 그 순간은 낯선, 너무나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소년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펼쳐질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녀는 나에게 말을 했지요. / 사랑한다는 것은 / 나무에서 잎이 자라나는 것처럼 / 쉬운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 그녀의 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이츠의 시를 노래로 부르는 피오나의 모습과 감격적으로 기타 반주를 하는 애덤의 모습은 나비가 고치를 벗고 나오듯 한 소년이 어른으로 가는 길목처럼 보였습니다. 경이롭고 눈부신 듯 바라보는 순간, 피오나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일어섭니다. 피오나는 판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려 애덤을 찾았지만, 애덤은 그만 판사가 아닌 한 인간 피오나를 보고 말았습니다. 차갑고 무덤덤한, 어찌 보면 건조한 법전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던 피오나이지만 왠지 애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만남을 우연을 가장한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그날, 마치 손님처럼 애덤의 마음속으로 피오나가 들어왔습니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 애덤의 이야기: 애덤은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수혈을 받아 살아난 후, 이제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온통 피오나로 향하고 있습니다. 피오나는 그에게 시와 음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애덤은 종교를 덜어 낸 자리에 피오나를 들여놓고, 시를 쓰고 공연을 하고 연극까지 합니다. 그리고 피오나를 찾아가는데요. 어쩌면 그녀에게 자신의 달라진 삶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새롭고 신선한 삶을 공유하고 싶었을 테지요.

하지만 애덤이 찾아가자 피오나는 판사의 모습으로 그를 맞이합니다. 그날 병실에서의 만남으로 애덤은 완전히 변했지만, 피오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지요. 어쩌면 피오나가 애덤에게 보여 준 호의는 판결에 앞선 보다 적극적인 참견의 수준일 수도 있고, 자신과 남편에게 닥친 복잡한 감정 때문에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을 숙고하려는 자신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오나가 애덤의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른 것은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애덤에게 치명적인 호의가 되어 버립니다.

피오나와 애덤은 영화 속에서 단 네 번 만나게 되는데요. 가장 주목할 것은 첫 번째와 네 번째의 만남이죠. 첫 번째는 병원으로 피오나가 찾아간 것이고, 네 번째 만남도 병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첫 만남에서 피오나의 선의는 소년을 감동시키고, 죽음에서 아이를 구해 냅니다. 그러나 애덤이 출장에까지 쫓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호소할 때 피오나는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습니다. 애덤은 그저 피오나 곁에 있고 싶었을 테지만 피오나는 법정에서 법을 마주하듯 냉정하게 애덤을 밀어냅니다. 낙담한 소년은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삶을 피오나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죠.

피오나는 자신이 피아노 연주를 맡게 된 공연을 앞두고 한 장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무대를 박차고 나가서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거기에 애덤이 누워 있었습니다. 피오나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애덤은 그만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백혈병 환자였던 그는 계속 수혈을 해야만 하고 언젠가는 죽음이 다가올 것이란 걸 알았겠지요.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피오나와 함께하고 싶었을테고요.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완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만 18세가 넘은 어느 날 스스로 삶을 결정합니다. 피오나에게는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말을 남긴 채 말이지요.

처음 애덤을 살린 것은 아동법에 따른 판결이었지만, 애덤의 눈을 감게 한 것도 성년이 되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법이었습니다. 삶의 좌절을 경험한 청년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은 법으로 포장돼 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뜻하지 않게도 피오나였지요. 그렇다면 애초에 피오나가 애덤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설득하려고 했던 그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선택과 결정 - 피오나 이야기: 피오나는 늘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처음 샴쌍둥이의 판결을 할 때도 그녀는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한 아이를 포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녀의 판결에 따라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모든 결정의 결과까지 책임질 수는 없지만, 판사로서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체실 비치에서』, 『속죄』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인데요.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부모와 아이의 사건을 통해 바라보는 아동법이 표피의 주제라면, 그 안에 담긴 내밀한 고민은 한 사람이 내린 결정이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병원에서 자신의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개인의 기본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 의사에 반해서 의사가 강제로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는 형법상 상해죄에 해당합니다. 마침 영화 속의 소년은 자기결정권이 생기는 18세 생일까지 꼭 3개월을 남겨 두고 있었고, 3일 내로 수혈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지요. 피오나는 판결에 앞서 소년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그를 위한 길인지 파악하기 위해 직접 병원을 찾아간 것입니다.

작가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판사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때 법정은 마지못해 ‘사법부의 합리적 부모’ 역할을 맡아야 한다. 가사부의 판결문에는 무수한 개인의 드라마와 복잡한 도덕의 문제가 담겨 있다.”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피오나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피오나에게 그 일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애덤이 치료를 받는 것도 피오나 때문이고, 또한 치료를 거부한 것도 어쩌면 피오나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었으니까요. 애덤은 법적으로 자신의 치료를 결정할 수 있게 된 때에,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으로 세상과 작별합니다. 그렇게 마치 벼락처럼 피오나에게로 다가왔던 소년 애덤은 어느 날 정전처럼 뚝 끊겨 버렸습니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고, 그것이 늘 옳았는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나고 나서 ‘아, 그때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하고 되새겨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다 보면 세월이 덧없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후에야 깨닫게 되는 인연도 있겠지요.

영화 속 법 이야기: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의료행위 거부에 대한 대한민국의 사례를 한번 살펴볼까요? 애덤의 경우와 가장 큰 차이점은 아동의 연령입니다. 아동은 신생아, 3세, 4세로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연령이었는데, 부모의 종교적 신념과 경제적 이유로 아동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료행위를 거부한 사례들입니다.

2010년 서울의 한 병원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술이 필요한 신생아 아동에 대해 수술을 하더라도 수혈은 할 수 없다는 부모를 상대로 ‘진료업무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습니다. 법원은 병원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고 이와 같이 결정했습니다. “의사능력이 없는 자녀에 대한 진료행위가 긴급하고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친권자가 존재하지 아니하거나 친권자가 친권을 남용하여 그러한 진료행위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의료인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자료에 기초하여 의사능력이 없는 자녀의 진료행위에 대한 의사를 추정하여 제한적이고 필수적인 범위에 한하여 필요한 진료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서울동부지법 2010.10. 21., 자, 2010카합 2341 결정]

그러나 신생아 아동의 부모는 무수혈 수술을 받겠다며 다른 병원으로 옮겨,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아동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2020년의 사례입니다. 4세 아동이 뇌병증으로 인한 폐렴으로 기관절개 수술이 필요한데 아동의 아버지가 경제적인 이유로 수술을 거부하였습니다. 병원은 자체 윤리위원회를 열어 ‘친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뒤 아동의 아버지를 상대로 ‘진료업무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가정법원에 재판을 청구해야 한다’는 결정을 하면서 진료업무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은 포기하지 않고 항고했습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아동의 아버지가 병원이 행하는 일체 치료행위를 방해해서는 안 되며 기관절개 수술 전 퇴원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친권자가 합리적 이유 없이 친권을 남용해 거부한다면 그 거부에도 불구하고 생명권 존중 차원에서 필수적인 의료행위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가처분 인용 결정이 내려진 후 아동은 6일 만에 기관절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례의 경우, 결정의 효력이 당사자인 부모와 병원에만 한정된다는 것을 악용하여 부모가 아동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것까지 예상하지 못해 안타깝게도 아동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부모의 진료행위 방해를 금지하는 것뿐 아니라 퇴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여 아동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지요. 이러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의사능력이 없는 아동의 경우 부모의 동의가 없더라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법원의 판결 혹은 결정 후: 영화에서 판사의 결정에 따라 생명을 선택한 애덤은 이후 혼란을 겪습니다. 판사에서 전화하여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자신이 쓴 글을 전하고, 직접 찾아가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하기도 합니다. 판사는 개인과 국가에 관한 사안에 대하여 중립적 위치에서 판결 혹은 결정을 해야 하기에, 업무와 관련된 개인과 접촉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합니다. 판사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것을 꺼리며, 피오나 역시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종교로 인해 생명까지 포기하려 했던 애덤이 그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법원의 결정에 따라 수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상황에 대해, 법원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법원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법원은 애덤의 인생에 깊은 관여를 하여 삶의 뿌리를 흔들어 놓았지만, 법원이 하려던 것은 애덤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기에, 애덤이 치료를 받고 건강해진 다음 법원의 임무는 끝이 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였다가 갓 미성년자를 벗어난 애덤에게 법원의 결정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애덤은 판사를 통하여 다시 삶을 보게 되었고, 판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연결되고 싶어 합니다.

아동을 위한 결정과 판결을 하는 판사는 일반적인 사건을 다루는 판사와 다른 생각과 접근이 필요합니다. 법적으로 의무가 있든 없든, 아동의 특성을 이해하고 아동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에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애덤이 찾아왔을 때 피오나는 애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았어야 합니다. 판사 본인이 할 수 없다면 기관을 연계하여 애덤의 필요를 파악하도록 해야 합니다. 법원의 결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애덤이 판사를 찾아와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할 때 판사가 해야 할 조치는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피오나는 애덤의 방문을 개인적인 일로만 생각하여 두려움을 느끼고 밀어냅니다. 그것은 아동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는 판사가 경계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아동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아동의 이익입니다. 하지만 성인의 입장에서 내리는, 아동의 이익을 위해 결정이 아동의 심리적 충격까지 막아 주지는 못합니다. 특히, 애덤과 같이 18세에 다다르는 데 몇 달이 남지 않은 성인에 가까운 아동의 경우에, 본인의 결정에 대해서 법원이 개입하였을 때에는 그 혼란의 정도를 예상하여 대처해야 합니다.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라는 것은 사안의 결론을 내는 것에서만 고려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결론으로 인해서 일어날 일까지 예상하여 충분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안은 복지와 연계하여 아동이 심리상담, 가족상담 등을 받는 등 법원의 결정으로 인한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PART2 나의 권리를 지켜줘

내 삶의 주인은 나: 〈청원〉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 김훈, <화장> 중에서

누구나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지만, 만일 식물인간 상태에 놓인다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하게 될까요? 1975년 미국에서 카렌 앤 퀸란이라는 여성이 코마 상태에 빠지자 부모는 딸이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소극적 안락사를 청원합니다. 미국 대법원은 부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오늘날 안락사 문제는 우리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2013년, 벨기에에 살며 청각장애를 앓고 있던 쌍둥이 형제가 시각마저 잃게 되자 안락사를 선택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는데요. 생명의 존귀함과 죽을 권리 가운데서 우리는 어느 쪽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청원>입니다.

인간답게 살 권리: 영화 속의 주인공 이튼(리틱 로샨)은 인도 서해안의 휴양지 ‘고아’에 있는 우아한 대저택에 살고 있습니다. 주변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광도, 좋은 집도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는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전신마비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유명한 마술사였습니다. 하지만 14년 전에 마술을 하던 도중 그를 질투한 친구의 계략에 빠져 그만 추락하고 전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얻은 것입니다.

이튼은 더 이상 마술을 할 수는 없지만 라디오 방송으로 청취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때 인도에서 최고로 잘나가던 마술사가 장애를 딛고 밝은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하여 소식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장애는 이튼만의 것이므로 청취자들과는 무관한 일이며, 코끝에 앉은 파리 한 마리도 쫓지 못하는 것은 오롯이 그만의 비애일 뿐이었습니다. 마이크 앞에서 쾌활한 척 긍정적인 척하지만,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용변을 볼 수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이튼은 좌절합니다. 하지만 더욱 가혹한 것은 많은 청취자들이 그가 여전히 밝고 씩씩하게 방송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지요. 다수 대중의 희망과 용기를 위해 이튼이 원하지 않는 방송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의 곁에는 지난 12년간을 한결같이 간호해 준 매력적인 간호사 소피아(아이쉬와라 라이)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녀에게 외려 짐이 되었다는 생각도 했겠지요. 드디어 그는 변호사 친구를 불러 한 가지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삶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는, 안락사 청원이었습니다. 타인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서 더 이상 원치 않는 자신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는 안락사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잭 케보키언은 미국의 의사이자 병리학자입니다. 그는 인턴 시절에 암으로 고통 받는 중년의 여성을 보면서 처음으로 안락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의료계를 떠나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안락사를 연구하여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약 130여 명을 안락사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의사’ 또는 ‘희대의 살인마’라는 악명을 갖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안락사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999년 살인죄로 기소되어 25년형을 받았지만, 더 이상 안락사를 돕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007년에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유 돈 노우 잭(You don't know Jack)>(2010, 미국)입니다.

문제는 이튼이 원한다고 해도 안락사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인도 법원 역시 안락사를 불허합니다. 결국 그는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고 이혼당한 소피아의 도움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되죠. 안타까운 것은 그날이 소피아와 결혼을 하는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소피아와 함께 다시 생에 대한 의욕을 가질 만도 한데,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요? 이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한데 왜 떠나려는 걸까요? 제가 행복한 건 고통이 어제로 끝났기 때문이죠. 이제 행복하게 떠날 겁니다.”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안락사를 뜻하는 ‘euthanasia’는 불치병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을 말하는데, ‘좋은 죽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영어권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여러 국가에서 안락사의 인정 여부를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대부분의 국가에서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인 반면, 소극적 안락사는 일부 국가에서 허용되고 있습니다. 자칫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에 편승할 수도 있어 안락사를 인정하자는 경우에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대상을 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합니다.

벨기에인으로 시청각 장애를 가졌던 쌍둥이 형제의 안락사는 많은 논란을 촉발시켰습니다. 형제는 구두수선공으로 함께 일했는데,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시력까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안락사를 요청했는데요. 벨기에 의사협회는 형제의 청원에 동의하여 안락사를 승인했고, 시행이 되었답니다. 주치의에 따르면 이들은 커피를 한잔 마시고 “다른 세상에서 만나자”며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네요.

영화 <청원> 속의 이튼 역시 소피아와 결혼하는 날, 사랑하는 이들을 초대하여 작별인사를 나누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좀 이기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스스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본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겠지요.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정당성 여부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지요.

영화 <청원>의 법정 장면도 뜨거웠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위해 안락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검사 측 주장과 삶의 질과 행복을 위하여 안락사를 허용해 달라는 변호인이 팽팽하게 대립합니다. 한편으로는 이튼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으로 나뉘어서 서로 대립합니다. 이튼을 비난하는 사람 가운데서는 그동안 행복한 척하더니 그것이 거짓이었냐며 그를 위선자로 몰아가기도 하고, 청취자들을 위해서 그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방송을 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도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튼의 입장을 한번 고려해 보면 그것도 사람들의 이기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4년째 육신의 감옥에 갇혀서 코끝에 앉은 파리 한 마리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그의 삶 앞에서 우리는 ‘용기를 내라’고 자꾸만 강요할 수 있을까요?

결국 그의 자발적인 안락사는 불법인 채로 막을 내렸고, 어쩌면 그가 사랑했던 아내 소피아는 처벌을 받게 되겠지요. 물론 영화니까 조금 과장된 면이 있고, 소피아에게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너무 큰 형벌을 내려 줬다는 비판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튼의 인간적인 삶에 대한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엄하게 살 권리: 미국에서 1980년에 제작된 <엘리펀트 맨>은 조세프 캐리 메릭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피부종양이 생기는 ‘신경섬유종증’이라는 병을 안고 태어난 메릭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태어나 ‘엘리펀트 맨’이라 불리는 유랑극단의 괴물쇼에 출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이라기보다 동물에 가까운, 어쩌면 그보다 더 흉측한 괴물이라는 이름의 눈요기로 전락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인간다운 삶이란 없었습니다. 유두종양 증식, 오른팔 골격 비대증, 두개골 변형 등 다양한 병증으로 인해 참혹한 모습으로 괴물쇼에 동원되었습니다.

어느 날, 런던 병원의 외과의사 프레드릭 트레비시가 서커스단에서 동물처럼 학대받는 그를 연구 대상으로 삼기 위해 집으로 데려옵니다. 트레비시의 아내는 그를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대접해 주었고, 메릭은 비로소 스스로의 자존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였고, 시를 사랑하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스물여덟 살의 어느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바로 누워서 잠이 듭니다. 그날은 그의 장례식이었지요.

영화 <청원> 속의 이튼이나 <엘리펀트 맨>의 메릭, 두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고민하게 합니다. 몸의 감옥에 갇힌 이튼은 자유를 꿈꾸며 스스로 안락사를 청원하고, 엘리펀트 맨으로 참혹한 삶을 살았던 메릭은 죽음이 주어진 때에 자연스럽고 익숙한 듯 그것을 맞이합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도 없고, 법으로 그것을 결정하기도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1997년, 우리나라에서도 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보라매병원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던 의식불명 환자의 가족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여, 의사가 환자 가족의 요청에 따라 퇴원을 시켰는데요. 대법원은 그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선고했습니다. 이후 의사들은 형사처벌을 받게 될까 봐 회복이 불가능한 임종 직전의 환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연명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2009년, 대법원이 ‘세브란스병원 김할머니 사건’ 판결을 통해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허용기준을 제시했고, ‘보라매병원 사건’이 발생한 지 18년 만인 2015년에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환자결정권 제도화가 논의돼 법제화되기에 이릅니다. 물론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본인의 뜻에 따라 ‘연명의료계획서’나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거나 환자 가족의 동의하에 의사 2명이 확인해야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건과 제약이 따르지만,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안락사와 ‘자기결정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 <청원>은 생명의 엄중한 무게감과 숱한 낮과 밤이 쌓여 이루러진 신화와도 같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 그 어떤 선택을 떠나서 그것이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겠지요.

영화 속 법 이야기: 행복추구권과 생명권이 부딪친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 영화에서 이튼은 법원에 자신이 존엄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두 번의 청원이 모두 기각됩니다. 그 이유는 판사라고 하더라도 판결로써 타인의 생명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이 대립하는 경우에 인간의 존엄성을 이유로 생명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 개의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에 ‘이익형량에 의한 방법’ 등으로 해결하게 됩니다. 이익형량에 의한 방법이란, 위와 같이 충돌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과 같은 기본권의 보호이익을 형량하여, 즉 비교함으로써 ‘더 중요한’ 혹은 ‘더 우월한’ 이익을 보장하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 속 사안의 경우에는 이익형량에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생명권이 보호하려는 이익이 더 중요하고 더 우월하다고 보아,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청원을 기각한 것입니다.

안락사 - 연명의료결정법: 대법원은 2009년 5월 21일, 식물인간 상태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생명연장 치료 중단을 인정하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이른 경우를 전제로, 인간답게 죽을 권리와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2016년 2월 3일에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어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연명 의료를 더 이상 받지 않도록 하는 권리가 환자에게 부여되었습니다. 19세 이상의 사람이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하여 연명의료에 대한 본인 의사를 남겨 놓을 수 있고, 말기환자 등이 의료기관의 담당의사에게 요청하여 담당의사가 작성한 연명의료계획서가 있는 경우 연명의료중단 결정을 원하는 환자의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연명의료중단 등의 결정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임종과정에 있어, 즉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튼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튼은 신체를 전혀 움직일 수 없어서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하고, 감옥에서 종신형을 받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렇더라도 사망에 임박하지 않았다면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서 연명의료중단 등의 결정이 내려질 수는 없습니다.

소피아가 이튼을 도운 행위에 대한 우리 형법상의 처벌: 자살이 발생한 경우 자살을 도운 사람, 즉 자살을 방조한 사람이 있다면 형법 제252조 제2항 자살방조죄로 처벌을 받습니다. 만약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서 이튼이 사망하도록 적극적인 행동을 했다면 형법 제252조의 촉탁에 의한 살인죄가 성립하게 됩니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한 사람의 자살을 돕는 행위는 자살방조죄에 해당하나, 죽음을 결의한 자의 요구에 의해서 살해를 하는 경우는 촉탁살인으로, 살해를 하려는 자가 피해자의 동의를 받는 경우에는 승낙살인으로 처벌될 수 있습니다.

영화 <청원>에서 소피아가 이튼의 요청으로 독약을 만들어 주고 이를 이튼 스스로 마심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자살방조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튼이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고 소피아가 직접 살해하는 행위를 했다면 촉탁에 의한 살인으로 처벌되겠지요.

현실 속의 적극적 안락사: 2016년과 2018년에 대한민국 국민 두 명이 스위스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이때의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가 아니라 약물을 투여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위스는 1942년부터 자국민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말기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104세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건강이 악화되어 혼자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워지고 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어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어 2018년 스위스에서 베토벤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존엄사나 안락사 모두 결국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스스로가 자신의 생의 마감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하지만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고 자살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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