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치유자, 나무의 일생

위대한 치유자, 나무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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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치유자, 나무의 일생
강판권 지음

책소개

이 책은 나무와의 오랜 인연을 통해 상처를 다스리는 법을 깨닫고, 상처를 살아가는 힘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얻은 ‘나무인간’의 깨달음이 담긴 기록이다. 저자는 자연의 치유자, 나무의 삶과 상처와 치유 이야기를 풀어냈다.

요약본 본문


매화나무 – 왜 사냐고 물으면…

나는 살 만큼 살았다. 그럼에도 추운 날씨에 꽃을 피우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고 대견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지만, 눈을 뜨면 보이는 단속사지 동편의 3층 석탑(보물 제72호)과 서편의 3층 석탑(보물 제73호)이 정말 아름다워 삶의 미련을 갖는다.

매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중국 송나라의 시인 임포는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매화를 아내로 삼기까지 했을까? 매화를 향한 사랑과 예찬이 송나라 때 유별났던 것은 사대부들의 도학 정신과 매화의 자태에 담긴 의미가 통했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매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매보》(범성대)가 이 시기에 나온 배경이다. 이어서 명나라 때에는 최고의 영광을 안았다.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에 뽑힌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꽃만 좋아해서 겹꽃 매화를 즐겨 심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다섯 장의 하얀 꽃잎으로, 내가 봐도 신비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몸이 쇠약해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죽은 세 갈래의 원줄기 중 하나에서 나온 새 가지 덕분이다. 생명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내 몸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나를 이곳에 살도록 해준 선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다. 그 선비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땅에서 가장 나이 많은 매화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생명체든 최고령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나와 같은 종족은 평균 수명이 100년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600년 넘게 살아 있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축복에 가깝다. 이 같은 축복은 나를 이곳에 처음 심은 선비와 그의 후손, 그리고 단속사의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쉽게 죽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의 은혜를 입었으니 조금이라도 갚아야 후회를 덜할 것 같아서다.

나는 고려 말과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살아남은 참으로 복이 많은 나무다. 산청 출신의 강회백이라는 선비가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나를 심었다. 나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심었는지 잘 모르지만, 나를 심어놓고 어느 날 바람처럼 떠나버린 것은 정확히 기억한다. 그가 떠나고 나서 나를 돌봐준 이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단속사의 스님들이었다. 스님들은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기 전에 찾아와 내가 잘 있는지 살피고 또 살폈다. 그들의 정성 어린 도움으로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강회백의 손자인 강희안이 지은 조선시대 최초의 원예서인 『양화소록』에서 할아버지가 심은 매화나무를 소개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이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산골에 살고 있는 나를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의 후손들도 내게는 평생의 은인이다. 강회백의 후손들은 1915년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앞에 정당매각을 지었고, 그후 나는 정당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여기에는 연유가 있다. 그들의 선조인 강회백이 고려시대에 국가 행정을 총괄하는 정당무학이라는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삶에 영광만 있었던 건 아니다. 견디기 힘든 시기도 있었다. 특히, 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던 스님들이 떠났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불교 국가인 고려가 망하고 유교 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성리학자들이 단속사를 훼손하고, 급기야 선조가 즉위하고 나서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으로 절이 불태워지면서 신라 경덕왕 때부터 머물렀던 스님들이 자취를 감추고 탑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후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법당을 밝히던 불빛도 꺼져 캄캄한 밤이 연속되었다. 낮은 외롭고 밤은 무서웠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매년 3월 말 즈음 내가 피우는 꽃을 찾는 사람들이다.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매화나무가 피워 올리는 꽃이 마냥 신기하고, 그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 것 같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는 게 행복하다.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보람을 느낀다. 때로 실망하는 이들도 있다. 소문을 듣고 멀리서 달려와 보니 내 몸이 너무 쇠약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겉모습만 보지 말고 내 몸에 깃든 세월의 깊이를 느껴보라고.

내가 살아오는 동안 만난 사람들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성리학자인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이다. 매화나무를 무척이나 사랑한 그는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산천재에 기거하면서 틈이 날 때마다 나를 찾아왔고, 산천재 앞에도 매화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남명매라고 부른다. 이제 500살의 나이인데도 여전히 기품 있는 꽃을 피운다. 또 한 사람은 고려 후기의 문신 원정 하즙이다. 그는 인근의 남사리에 살면서 나를 보러 오곤 했다. 그 역시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후손들이 그의 호를 따서 원정매라 이름 지었다. 나보다 조금 어린 600살로, 현재는 원목은 죽고 후계목이 살고 있다. 산청 사람들은 정당매인 나와 남명매, 그리고 원정매를 일러 ‘산청삼매’라고 부른다. 현재 산청은 대한민국 최고의 매화나무 명소다.

나는 비록 늙었지만 외롭지 않다. 오랜 세월 이웃으로 지내온 매화나무가 있고, 사람들도 끊임없이 산청삼매를 찾아준다. 무엇보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지만,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들은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홀연히 떠난다. 나는 돌아가는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지켜보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산수유 – 1,000년을 살고 보니

불신은 불행으로 이어진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이로울 게 없다. 불신의 특징은 그 뿌리가 아주 깊고 단단하다는 점이다. 불신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 의심을 받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이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내 나이를 1,000살이라고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거의 믿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부류는 나무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내 나이를 1,000살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 속이 상하기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 생명의 존재 가치를 물리적 계산으로만 평가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나무를 연구한다면서 진정 나무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나를 물질적 가치로만 재는 것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나는 그들에게 그리스신화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나무에 얽힌 신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는 증거 아닌가. 인간은 나무에게 무수한 혜택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나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나무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나무를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신화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들에도 전설적인 인물과 나무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며 존중했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도 그와 같은 생각과 자부심이 담겨 있다.

나는 동족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산수유 시목’, 즉, 대한민국의 시조나무로 부르며 큰 자부심을 나타낸다. 내가 중국 산동에서 이곳으로 온 것은 어느 한국인이 나의 고향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의 처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과 결혼을 시켰기 때문이다. 딸을 갑작스레 먼 이국땅으로 시집보내야 했던 엄마는 산수유 씨앗을 딸의 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내 딸아, 그곳에 가면 내가 준 씨앗을 동네 어귀에 심고 정성껏 가꾸어라. 그 나무가 자라 열매가 열리면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씨앗을 받은 딸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시댁의 마을 어귀에 씨앗을 심고 정성껏 키웠다. 고향에 있을 때 딸은 가을이면 엄마와 함께 붉은 열매를 땄다. 부모님은 열매를 소중히 여겼다. 열매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렸던 것이다. 딸은 열매도 좋았지만 꽃도 무척 좋아했다. 해마다 꽃이 피면 동무들과 함께 한 송이를 정해서 꽃을 세고 꽃이 더 많은 사람이 이기는 놀이를 즐겼다. 놀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꽃을 따서 세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통 한 송이에 20~30개씩 달리는 꽃은 집중하지 않으면 정확히 셀 수가 없다. 꽃을 세고 나면 정해진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 모이면 서로 개수를 말하고,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대방의 꽃을 센다. 딸은 이국땅에 살면서 어린 시절의 꽃놀이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리운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시댁과 동네 사람들은 중국 산동에서 가져온 씨앗이 나무로 자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자 아주 신기해했다.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둘씩 산수유를 심기 시작했다. 산수유 열매가 살림살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웃 마을에서도 씨앗을 구해 너도나도 심기 시작했고, 그렇게 불어난 나무가 지금은 11만 7,000여 그루에 달한다. 산수유의 고장으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꽃이 만발한 봄에는 성대한 축제까지 열린다. 이곳 사람들은 나에 대한 고마움과 존중의 마음으로 고장 이름도 내가 태어난 중국 산동과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

내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것은 내가 한 그루가 아닌 5그루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밑동에서 곧장 올라온 5개의 줄기가 마치 팔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모습은 시집온 딸이 씨앗을 하나만 심지 않고 여러 개를 같이 심은 결과다. 딸이 혹여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하면 어쩌나, 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되어 한꺼번에 여러 개를 심었다. 다행히 그중에서 5개가 싹을 틔웠고, 한 구덩이에 있다 보니 서로 살아남으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5그루는 그렇게 생존 경쟁을 펼치다가 다 같이 살아남는 방법을 찾았고, 뿌리는 함께하면서 줄기만 각자 뻗기로 합의했다. 힘을 모으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나는 한 곳에서 오래 살았다.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나무들의 고통을 겪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나이와 함께 찾아오는 몸의 변화는 어쩔 수가 없다. 껍질이 벗겨져 하얗게 변색되고, 밑동도 썩어 들어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상태다. 서글프지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썩은 부위에 물이 찰까 봐 사람들이 외과수술을 해주었지만, 그냥 놔두었으면 좋겠다. 수술이 오히려 나를 더 아프게 한다. 노쇠한 몸을 거칠게 다루고 썩은 부위를 아무렇지 않게 잘라내는 그들이 내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의사처럼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다.
산수유 축제를 즐기려고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유감이다. 상춘객들로 산동 마을 전체가 떠들썩하지만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알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찾아와서도 지나가듯 보기만 할 뿐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꽃이 지고 나서 잎을 만드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나의 부모인 층층나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나의 잎은 층층나무를 닮았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부모의 잎은 어긋나고 나는 마주한다. 나의 형제인 말채나무도 나와 잎이 비슷하고 마주난다. 다른 점은 말채나무의 꽃과 열매는 부모를 닮았지만 나는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1,000년을 살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 여전히 나이를 문제 삼는 이들도 있고, 내가 느끼는 고통에 무지한 이들도 있다. 내가 중국 산동에서 왔다는 사실도, 부모와 형제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나를 정성껏 살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은 즐거움을 선사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 한다.


느티나무 – 온몸을 울려 나라를 구하다

“왜적이 우리의 땅 한반도에 쳐들어왔소. 어서 빨리 이곳으로 모이시오.” 40살의 곽재우는 내 몸에 큰 북을 매달고 온 힘을 다해 두드리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던 그때, 내 나이는 고작 10살에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 나는 세간리 마을 입구에 살고 있었다. 1592년 4월 14일 새벽 5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가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우라항을 출발하여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전쟁의 선봉대였다. 왜적이 부산포에 진입한 지 8일 후인 1592년 4월 22일, 곽재우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내 몸에 북을 달고 정신없이 두드렸다. 나는 곽재우가 내 몸에 북을 매달 때만 해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어린 나는 왜놈이 조선을 침략한 것과 내 삶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지 못했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곽재우 장군의 행동이 얼마나 의로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곽재우의 북소리를 듣고 내 주위에 모인 사람은 노비 10명에 불과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10명의 노비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잠시이긴 했지만 곽재우도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다음날 날이 밝자 북소리를 더욱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치는 북소리가 얼마나 큰지 나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북을 치는 데만 열을 올렸다. 그 모습이 신이라도 들린 것 같았다. 과연 그의 절박한 호소가 북소리에 실려 전해졌는지 전날보다 많은 50여 명의 의병이 달려왔다. 그중에는 양반들도 있었고, 모인 그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생각하는 곽재우의 충성스러운 모습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날이 갈수록 곽재우를 따르는 의병들이 늘어났고, 그들은 일본 군대가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임금 선조와 달리 곽재우와 함께 목숨을 걸고 적들에 맞서 싸웠다.

나는 곽재우가 의병을 이끌고 마을을 떠난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가 떠나고 나는 한동안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였다. 그는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여러 벼슬을 받았지만 번번이 거절하고 고향에서 지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몸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감상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북을 매달았을 때 내가 느꼈을 고통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으리라. 그의 따뜻한 마음이 오롯이 전해졌다. 하지만 감사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분이다. 그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이곳도 왜적에게 짓밟혀 폐허가 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도 불태워져 없어졌을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곳을 찾아와 곽재우의 유산을 돌아보고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내 몸에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도 유명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곽재우가 북을 매단 나무라고 해서 내게 ‘현고수’라는 별칭을 지어주었다. 장군 덕분에 의목(義木)이 된 것이다.

내가 곽재우 장군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그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진주 강씨는 곽재우를 친정에서 낳았다. 그런 연유로 의병운동을 외가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둘러보며 곽재우의 공로를 칭송하는 한편 나에 대한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다. 장군이 거둔 많은 승리 중에서 그들이 최고로 꼽는 것은 1592년 5월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위치한 정암진, 즉 솥바위나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장군이 붉은 옷을 입고 왜적을 물리친 것이다. 그를 ‘홍의장군’으로 부르게 된 계기가 바로 정암진 전투다. 나를 보고 난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어서 정암진으로 향한다. 전투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도 있다. 정암진은 ‘부자바위’로 불리며 인기가 많다. 인근에서 재벌 회장들이 태어나 그런 이름이 생겼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엘지그룹의 구인회, 효성그룹의 조홍제가 그들이다.

나는 200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또한 곽재우 덕분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성치 않은 몸으로 그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수백 년째 허리가 굽은 채로 살고 있다. 어린 나이에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북 때문에 허리디스크를 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도 곽재우를 원망한 적이 없다. 나의 상처는 영광의 상처이고 훈장 같은 상처이며, 상처는 고통스럽지만 영광의 상처는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통에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불처럼 뛰어든 의인과 함께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격려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에 곽재우를 기리고 나를 치하하는 제를 올린다. 내 몸에 새끼줄을 두르고 밑동 주변에 황토를 뿌린 후 말린 명태와 의령군에서 만든 막걸리 등을 놓고 경건하게 절을 올린다. 사람들은 평소에도 나를 정성껏 돌봐준다. 나는 그들의 보살핌에도 고령의 한계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 몸은 절반 이상 썩었고 가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문화재청에서 나를 치료하려고 여러 차례 외과수술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러한 치료에 의지해 목숨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

요즘 나는 매일 간절히 기도를 드린다. 더 이상의 고통 없이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삶을 놓을 수 있게 해달라고. 또 내 곁에 있는 동갑내기 천연기념물 제302호 은행나무의 건강도 기원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나무다. 특히, 아기를 낳은 산모들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아기에게 먹일 젖이 부족한 산모들이 젖을 많이 나게 해달라며 은행나무의 유주를 떼어서 먹었다. 유주는 나무의 노화로 생긴 것이다. 모양이 엄마의 젖을 닮아 섭취하면 젖이 많아진다고 해서 손을 타게 되었다. 지금은 거의 닳아서 흔적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은행나무와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나무들이다. 곽재우기념관 앞에서 나란히 살면서 서로 의지가 되어주었고, 둘 다 천연기념물로 존중까지 받았다. 큰 복을 누린 셈이다. 누군가가 다시 내 몸에 북을 매달고 홍의장군의 은공에 보답하고 싶은 내 마음을 북소리에 담아 전할 수 있게 두드려주면 좋겠다. 둥둥둥…. 그렇게 생을 마치고 나서 대구광역시 달서구 구지면 현풍 곽씨 문중의 공동묘지 가운에 위치한 그의 묘소 옆에 묻히고 싶다.


밤나무 – 함께 살았지만 더불어 살지 못했다

내가 이 집에 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가을의 어느 날, 나는 갑작스레 부모와 이별했다. 그해 불어닥친 태풍이 부모가 한 해 동안 애써 만든 열매를 채 익기도 전에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숙아에다 고아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밤송이 안에서 잠자코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전부였다. 밤송이가 벌어지지 않았으니 누군가에게 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가시 돋힌 존재는 누구나 꺼리는 법이니까. 나는 그렇게 방치된 상태로 가망 없는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밤을 주우러 온 거겠지. 하지만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나 같은 애송이를 가져갈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밤송이들을 닥치는 대로 주워 소쿠리에 담았다. 그때만 해도 그가 나의 주인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밤송이들을 마당에 풀어놓고 쓸 만한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를 보고는 바로 하수구로 던져버렸다. 차갑고 더러운 하수구에 버려진 나는 얼마 안 가 주인의 손에 의해 다시 버려지고 말았다. 하수구의 찌꺼기가 나한테 걸려 물이 잘 빠지지 않자 주인은 나를 집어 담장 쪽으로 내던진 것이다. 두 번이나 버림을 받은 나는 기분이 참담하고 우울했다. 그리고 한동안 희망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는 체념 상태에 빠져 지냈다. 조용한 날이 가고 또 갔다. 그러는 가운데 슬며시 어떤 마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일말의 가능성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고, 싹을 틔우기 위해 내게 남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로 했다. 하늘이 준 기회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다행히 주인도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다. 자그맣고 여린 싹이 껍질을 비집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생명의 기적에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분명 내가 이룬 것이었지만, 나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밤알을 보면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적하게 생겼다. 이렇게 생긴 이유는 단 하나, 싹을 잘 틔우기 위해서다. 위의 뾰족한 부분에서 싹이 제대로 나올 수 있도록 아래의 넓은 부분이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것이다. 그런데 껍질은 싹을 틔우고 나서도 수십 년 동안 뿌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특성을 보고 조상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고, 그 후로 제사상에 빼놓지 않고 올리게 되었다.

주인은 내가 싹을 틔운 지 몇 개월이 지나서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뿌리째 뽑혀 버려지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짐작건대, 주인이 나를 살려둔 것은 나중에 밤알을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3년 정도 자라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주인은 내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반색하며 좋아했다. 나는 해마다 꼬박꼬박 주인이 차린 제사상에 밤알을 제공했고, 주인은 그런 내가 기특하다는 듯 한 식구처럼 대해주게 되었다. 초여름이 되면 마루에 앉아서 내가 피운 꽃을 감상하거나 흥취에 젖어 막걸리를 걸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의 아들이 장가를 들어 분가를 하자 집 안에는 주인 부부만 남았다. 부부는 결혼해서 따로 사는 아들에게 애써서 지은 농작물을 그때그때 부쳐주었고, 가을이면 내가 만든 밤알도 따로 챙겨 아들 내외에게 보냈다. 그런데 주인 부부의 건강이 나날이 나빠졌다. 아마도 살아오는 동안 가난에 찌들어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일 것이다. 아들도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기술학교에 들어가 직장을 잡았지만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부모를 드물게 찾아왔다.

주인 부부는 결국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이 먼저 떠나고 아내가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돈만 있어도 고칠 수 있는 병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가난 때문에 힘겨운 생을 살다가 건강을 해치고 일찍 저세상으로 가버린 주인 부부가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그들이 떠나고 나는 주인 없는 집에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아들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딱 한 번 찾아와 유품을 정리하고 가서는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살던 집에서 어떤 인기척도 느낄 수 없는 현실이 낯설고 불안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아침이었다. 캄캄한 밤은 모두가 자는 시간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만물이 깨어나 움직이며 온갖 소리가 들리는 아침에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집은 공동묘지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찾지도 돌보지도 않는 집은 점차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바람에 물건들은 이리저리 나뒹굴고, 비가 오는 날이면 하수구가 막혀 물이 철철 넘쳐흘렀다. 그것은 내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배수가 잘 되지 않는 곳을 몹시 싫어한다. 뿌리가 썩어 생장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나무를 좀 아는 사람은 습기가 많은 곳에 절대 심지 않는다. 나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줄기는 황록색이 되었고, 피부는 갈수록 부풀어 올랐다. 힘이 없어 단풍철이 되기도 전에 잎들을 떨어뜨려야 했다.

생명은 만남으로 잉태되고, 만남으로 이어진다. 만남은 그래서 생명의 절대 조건이다. 물론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와 주인은 온전한 만남을 갖지 못했기에 하늘이 부여한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나는 원치 않는 곳에 던져져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주인은 나와 더불어 사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해 필요한 위안을 얻지 못했다. 나와 주인은 외로운 존재였지만 서로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없었다. 함께 살았지만 더불어 살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 산다고 해서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살지 않으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아야 상처를 위로할 수 있고 행복을 나눌 수 있다.


소나무 – 희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누구를 희생시켜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 나는 그들의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긴 것은 몇 년 전 눈이 아주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나는 대구 팔공산의 파계사 부도 옆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고, 동료와 선후배들과도 별 갈등 없이 지내던 터였다. 1년 내내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눈이 펑펑 내린 다음 날,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무슨 일일까 의아했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 앞에 나타난 그들은 남자 셋이었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나를 비롯한 소나무들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거리를 재보기도 하면서 제법 빠르게 움직이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뭔가 조사를 하러 왔다가 마치고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어깨와 팔에 와이어와 다른 장비들을 걸치고 있었다. 내 쪽으로 와서는 가지고 온 물건들을 내려놓고 이내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내 몸에 와이어를 단단히 감더니 다른 쪽으로 가져가 나이 많은 소나무에 연결하고는 기계를 꺼내 나를 묶은 와이어를 팽팽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온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에 거의 실신 지경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와 그 소나무가 와이어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들이 왜 그랬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이 많은 소나무가 폭설로 쓰러질 위험에 처하자 나를 지지대로 삼아 그를 구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나는 와이어에 묶인 후로 단 한순간도 편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더욱 암담한 것은 와이어가 끊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나이 많은 소나무가 살아 있는 한 이 같은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몸이 패이고 속은 타들어갈 것이고, 치료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나이 많은 소나무는 나에 의지해 쓰러질 위험에서 벗어났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를 봐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고 싫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의 줄을 붙잡고 살아가는 상대를 마주해야 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괴롭고 힘들었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내 안에 변화가 찾아왔다. 매일같이 나이 많은 소나무와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연민의 정이 생긴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를 원망하기만 했다. 내가 원해서 와이어에 묶인 것이 아닌 것처럼 그가 와이어에 묶인 것도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그의 존재를 탓하기만 했다. 그를 위해 나만 희생당하는 줄 알았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둘 다 원치 않는 상황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에 대한 마음이 달라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게 찾아온 마음의 평화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할 것을 포기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때로는 포기가 답일 수 있다. 거부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은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편이 낫다. 그에 맞서거나 피하려고 발버둥칠수록 고통만 더 심해질 뿐이다. 늪에 빠졌을 때 허우적거리면 더 깊이 빠져드는 것처럼. 칠흑 같은 밤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는 잠시 눈을 감고 멈춰 서서 숨고르기를 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앞이 보이기 시작하고, 길이 나타나고, 전쟁 같았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지금 내가 그 소나무를 대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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