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어떻게 과학을 이용했는가

사과나무 / 2021년 1월 / 368쪽 / 18,500원

전쟁은 어떻게 과학을 이용했는가

전쟁은 어떻게 과학을 이용했는가

김유항, 황진명 지음

저자 소개

김유항

서울대 공과대학 화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하대 교수, 부총장을 역임했다. 현 아시아 30개국 과학기술한림원 연합회 회장, 동 한림원 종신회원으로 있다.

황진명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이화여자 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공대 교수로 인하대학교에 임용되어 36년간 재직한 뒤 신소재 공학부 교수를 끝으로 퇴직했다.

책소개

인류의 역사는 투쟁과 전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전쟁의 승패는 기술의 우월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책은 고대의 전쟁에서부터 현대의 사이버전까지 과학이 어떻게 전쟁에 이용되어왔고, 또 전쟁을 치르는 동안 과학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는가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요약본 본문

제1장 과학이 바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페니실린 - 플로리와 페니실린 정제

항생제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작은 상처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최초로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1939년 옥스퍼드 대학의 플로리 팀이 페니실린 정제에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항생제 시대가 열려 치료의학의 큰 발전을 가져온다.

플레밍은 미생물의 일종인 푸른곰팡이에서 만들어지는 페니실린이 박테리아를 죽이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헌다. 그러나 이후 실험에서 플레밍은 곰팡이의 분비물이 박테리아들에 대항하여 활동하지만, 페니실린의 성분을 알 수 없고 불안정하며 또한 항균 활동이 단명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1935년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중단한다. 그러나 1929년 영국 학술지에 실린 그의 실험병리학 논문은 1938년 플로리와 함께 일하던 생화학자 에른스트 체인의 관심을 끌었다.

호주의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 영국 생화학자 에른스트 체인과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과의 동료들은 페니실린이 박테리아와 싸우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결론 내리고, 1939년 페니실린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연구를 지속하기 힘들었다. 한편 1940년, 플로리의 연구팀에 생화학자 노만 조지 히틀리가 합류하여 페니실린 시료의 활성도를 측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내고, 배양액에서 페니실린을 효율적으로 정제하는 역추출 방법을 개발한다.

플로리 팀은 1940년 5월 치명적인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쥐에 페니실린을 주사했다. 감염된 쥐들 중 페니실린을 주사한 쥐는 모두 회복되었으나 주사하지 않은 쥐는 전부 죽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실험 결과를 얻자 플로리는 효율적인 감염치료는 영국의 전쟁수행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따라서 대량생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플로리는 임상실험을 한 만한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이 준비되자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에 들어간다. 1941년 2월 장미 가시에 찔려 입 근처에 상처를 입게 된 43세의 경찰관이 최초로 옥스퍼드-페니실린의 수혜자가 되었다. 서정적 시인의 대명사,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사망했다고 하던가? 바로 이 경찰관도 눈, 얼굴, 그리고 폐에 엄청난 농양이 생겨 목숨을 위협하는 패혈증에 걸렸다. 그에게 페니실린을 정기적으로 나흘 동안 주사하자 상당한 호전을 보였으나 완치되기 전 페니실린이 다 떨어져 2주일 후 경찰관은 죽고 말았다. 그래도 임상실험에서 다른 환자들로부터는 좀 더 좋은 결과를 얻자, 플로리는 페니실린이 보여준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치료에 충분할 정도의 양을 공급하려면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페니실린의 대량생산: 플로리는 영국에서는 모든 화학 공장이 전쟁물자 생산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페니실린의 대규모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1941년 여름, 페니실린을 미국의 제약회사에서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 그들은 가장 유명한 균류학자이며 페니실륨 곰팡이의 권위자인 농업국의 로버트 톰을 소개받고 되고,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에 위치한 북부지역연구실(NRRL)의 발효과와 연결되었다. NRRL은 나중에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혁신에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프로젝트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 정부는 페니실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전의 전쟁에서 군인들은 상처 자체보다 상처 부위의 감염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에 미국 정보는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페니실린 생산을 우선순위로 정했다.

그러나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은 너무도 어렵고 벅찬 과제였다. 1942년, 첫 번째로 연쇄상 구균에 의한 패혈증에 감염된 환자를 머크에서 만든 US-페니실린으로 치료하였는데, 전체 공급량의 1/2을 이 환자만을 위해서 써야했다. 1942년 6월에 미국이 보유한 총 페니실린은 단지 10명의 환자를 치료하기에 충분한 정도에 불과한 양이었다. 1943년 7월 전시생산국은 유럽에서 싸우는 연합군용으로 페니실린 대량생산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많은 화학회사와 제약회사들이 여기에 참여한다.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머크, 화이자, 스큅 등 제약회사의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기술적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던 중 페니실린을 진공상태에서 냉동건조 하는 것이 가장 안정되고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3월 1일 화이자가 페니실린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최초의 상업 플랜트를 열었다. 전시생산국으로부터 제약회사들에게 주어진 목표는 예정된 유럽 상륙작전 개시일에 맞춰 적절한 페니실린 보급량을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한편, 군대와 민간 부분에서는 임상실험을 통해 페니실린이 연쇄상구균, 포도상구균, 임질균 감염을 포함한 광범위한 감염병 치료에 매우 효과적임을 밝혀냈다. 미군은 외과수술이나 상처 감염의 치료나 매독 치료에 페니실린의 효과를 인정했고, 1944년까지의 영국과 미국 군인의 1차 치료에 페니실린이 사용되었다. 다행스럽게도 1944년 초부터 페니실린 생산량이 극적으로 증가해 점차 이 기적의 약을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생산되었다. 생산기술도 1만 갤런 탱크에서 80~90%의 수득률을 낼 정도로 규모와 정밀도에서 혁신적으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동안 페니실린은 폐렴, 패혈증에 의한 사망이나, 부상에 따른 사지 절단을 현격하게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연합군 병사의 12~15%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과학기술적인 요인으로 원자탄, 레이더, 합성고무, 그리고 페니실린의 개발을 손꼽는다. 페니실린은 매독, 임질, 결핵, 괴저, 폐렴, 디프테리아, 성홍열과 같은 무서운 질병을 정복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생명을 구하는 약이 되었으며, 1942년 처음 사용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최소 2억 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플레밍, 플로리와 체인 세 사람은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제2장 우연과 필연의 과학

로마제국을 세운 엔지니어링의 역할 - 토목공학, 재료공학 및 공병기술

로마는 BC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점점 번창해 BC 3세기에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합병했다. 전형적인 로마 기술로 묘사되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에트루리아 문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다리뿐만 아니라 로마의 전형적인 석조 아치와 하수도가 그 사례이다. 또한 에트루리아는  그리스어를 기원으로 하는 에트루리아 알파벳을 로마에 전달함으로써 그리스 문화를 소개했다. 한편 BC 146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로마 공화국에 정복된 후, 그리스의 문명(기술, 전투, 종교, 철학, 문학, 예술, 의술, 수학 및 건축 등)이 로마가 거대 제국을 설립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로마의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BC 27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을 세운 지 대략 150년이 지난 AD 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면 로마제국의 판도가 절정에 이른다. 로마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최대로 영토를 넓혀 제국의 면적이 500만㎢에 달했다.

로마의 역사는 로물로스가 BC 753년 건국하여 AD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천 년 이상(동로마까지 고려하면 2000년 이상) 지속되면서 오늘날 문명의 정치체제, 법률제도, 군사체제, 언어, 예술, 문학, 건축, 과학과 기술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로마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아이디어나 발명, 기술 등을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재창조하여 눈부신 결과를 만들어냈으며, 특히 토목공학과 군사공학에서 천재적이라고 할 만한 상당히 발달된 엔지니어링 업적을 남겼다.

로마 군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전투력을 갖춘 군대로 널리 평가되고 있으며,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군사전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군은 공병학과 전투공학을 핵심 전략적 역량으로 가장 먼저 격상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샌드허스트 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로마군의 전술, 훈련, 규율, 조직, 혁신을 배울 정도로 막강한 로마군은 또한 환상적인 건설자였으며, 야전에 요새를 세우고 전장 환경에서 거의 전례가 없는 통제력을 발휘했다. 특히 도시계획, 로만시멘트와 콘크리트, 아치, 콜로세움, 바닥 중앙난방, 수로, 하수도, 공중화장실, 공중목욕탕, 도로, 쿠리어 서비스, 군의학, 공성무기, 로마군 무기 및 전술 등은 거대한 로마제국 형성에 기여한 혁신적인 기술들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로마는 이미 BC 312년에 로마에서 카푸아(지금 이태리 남동부의 브린디시)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돌로 포장된 도로를 건설하여 장장 2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부가 사용되고 있다. 수로와 함께 고대 토목기술의 최대 유산으로 꼽히는 8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간선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로마가 군사, 행정, 교역, 문화교류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는 역할을 했다. 당대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로마의 토목공학과 건축, 무기 등을 살펴보자.

격자형 도시계획: 격자형 도시계획은 로마제국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리스에서 빌려온 것을 로마제국의 필요에 따라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로마인들의 도시계획은 중심화라고 해서 똑같은 면적으로 땅을 나누는 토지 측량 방법을 적용했다. 기본 개념은 주어진 땅을 블록으로 균등하게 나누고, 모든 도로를 남북 방향으로 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두 간선 도로인 카르도와 데쿠마누스는 격자 한가운데에서 90도 각도로 교차한다. 오늘날 역사적인 격자 계획도시의 가장 좋은 예로는 이탈리아 파두아와 피렌체, 카탈로니아 바르셀로나가 있다.

도로와 간선도로: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로망은 수도교와 함께 고도 로마 토목기술의 최대 유산으로 꼽힌다. BC 312년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케쿠스에 의해 시작된 아피아 도로는 로마에서부터 162마일 떨어진 이탈리아 남동부의 브린디시를 연결하는 세계 최초의 포장도로이며 가장 잘 정비된 로마 도로로 유명하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뛰어난 교통망인 로마 가도는 영국에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까지, 다뉴브 강에서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까지 뻗어 있다.

로마인들은 모두 5만 마일(8만 킬로미터)의 단단히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주로 군사적 이유로 건설했으며 가능한 한 직선도로를 만들었는데, 군대와 관공서, 특별 출입증 소지자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차로 영국과 유럽의 도로를 주행할 때, 만일 직선도로가 1마일 이상 나오면 “이 길은 반드시 로마 도로일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로마의 최전성기에는 로마로부터 29개의 주요 군용 고속도로가 연결되었으며, 로마 제국 후기엔 113개 주 357개의 주요 도시가 서로 연결되었다. 총 40만 킬로미터 이상의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8만 킬로미터가 넘는 도로가 돌로 포장되어 있다. 도로 이외에도 기원전 고대 로마가 세운 건축물이나 사회공공시설인 판테온, 하수도, 수로, 목욕탕 등은 그 스케일도 대단하지만 2000년의 세월을 견디는 재료와 기술의 혁신이 실로 경이롭다.

공성 무기와 거북대형: 로마인들은 수 세기 동안 전쟁터에서 그들에게 우위를 점하게 하고 광대한 영토를 정복할 수 있도록 한 가공할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공성전에서 방어 및 공격적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발리스타와 오나거 같은 포병 무기는 로마의 무기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무기로 고대판 미사일이라 할 수 있다.

▲발리스타(그리스어 ballistra: 석궁) - 직사각형 목제 틀에 동물의 힘줄, 말총, 내장 등으로 만든 시위를 걸고 그 장력을 이용해 돌, 탄알, 화살, 창 등을 날리도록 만든 장치이다. 로마 기술자들은 다수의 금속 부품을 추가하여 디자인을 개선함으로써 더 가볍고 조립하기 쉬운 발리스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힘을 약 25% 증가시킴으로써 정확성을 향상시켰다. 큰 것은 22kg 무게의 돌을 270~370m까지 날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으며 작은 것은 캐터펄트(catapult), 큰 것은 발리스타라 했다.

▲오나거(Onager) - 오나거는 고대 로마에서 사용한 투석 공성무기의 일종이다. 발사할 때 반동하는 모습이 꼭 당나귀가 뒷발을 차는 동작과 닮았다 하여 오나거(Onager: ‘당나귀’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돌, 창, 화살 등을 투척했고, 황소의 힘줄이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밧줄로 투척에 필요한 탄성을 얻었다.

▲ 거북대형(귀갑대형, testudo) - 로마 군대는 가장 군기가 잘 잡힌 병사들과 뛰어난 지휘 체제와 전술로 유명한데, 전쟁에서 거북대형은 로마 군단이 흔히 사용하는 방패벽의 일종으로, 주로 포위공격 동안 사용된 진형이다. 전방과 측면의 병사들은 방패를 서로 맞물리게 끼우고 뒷줄의 병사들은 머리 위에 방패를 얹어 병사들 머리 위에 거북이 껍질 같은 보호판을 형성했다. 거북대형은 매우 강하고 빽빽이 밀집된 진형으로 머리 위 보호판 위로 병사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폭동진압 경찰들이 로마군의 귀갑대형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제3장 핵과 전쟁

치열한 원자폭탄 제조 경쟁 - 미국과 독일의 경쟁

닐스 보어와 존 아치볼트 휠러는 1939년 2월 7일, 콜롬비아 대학에서 열린 미국 물리학회에서 모든 우라늄이 핵분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즉, 우라늄의 세 동위원소 중 핵분열이 실제로 가능한 것은 우라늄의 0.7%밖에 안 되는 U-235뿐이라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세 개의 동위원소 혼합물로 존재하는 우라늄의 99.3%는 U-238로 무척 안정되어 있으며 또 다른 동위원소 U-234는 자연에서 단지 0.006%라는 극히 미량으로 존재한다. 보어는 오직 순수한 U-235로부터만 연쇄반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느린 중성자로 때릴 것을 제안했고 엔리코 페르미는 흑연이 감속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보통 방출되는 중성자는 초당 1만 마일로 무척 빠른데 이렇게 빠른중성자는 쉽게 U-238에 의해 포획되어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빠른중성자를 감속재인 흑연이나 중수와 충돌시키면 에너지를 잃게 되고 속도가 초당 1마일 정도를 넘지 않게 감속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분열에 대한 연구가 미국에 오다: 1939년 9월 1일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데, 덴마크의 닐스 보어는 그전에 이미 핵분열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때만 해도 과학의 중심지는 유럽으로, 특히 독일은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등 쟁쟁한 과학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론물리의 메카였다.

반면 러더퍼드, 채드윅, 톰슨 등이 있는 영국은 실험물리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는 1926~1927년 코펜하겐에서 보어의 보조연구원이자 강사로 일했는데 이때 양자역학의 기반이 되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했다. 또한 보른의 도움으로 행렬역학을 도입하여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로 1932년 31살의 나이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과학자들이 나치 독일을 피하여 미국으로 이민가고 그때부터 개인의 천재성에 의존하는 연구가 아니라 여러 과학자들이 함께 연구하는 공동연구가 빛을 발하게 된다. 특히 E. O. 로렌스는 미국의 버클리 방사선 연구실에서 독창성을 발휘하여 1930년에 입자가속기 사이클로트론을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반 데 그라프가 1931년에 정전 발전기를 만드는 등 핵물리와 고에너지 물리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만들어내는 첨단 연구로 앞장서 갔다.

한편 1939년 9월 독일에서는 원자폭탄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하는 그룹을 만들었는데 하이젠베르크, 보테(Walther Boethe), 가이거(Hans Geiger), 한(Otto Hahn), 하르텍(Paul Harteck) 등으로 구성되었다. 만일 히틀러의 과학자들이 원자에너지 원리에 입각한 폭탄을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헝가리 출신 실험 물리학자 질라드(Leo Szilard)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관한 최근 소식에 자극을 받아 아인슈타인과 함께 “우라늄의 핵 연쇄반응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나오고 대형 폭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해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전달했다. 결국 질라드-아인슈타인 편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 참여한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편지를 받은 루즈벨트는 즉시 그 위험성을 깨닫고 브릭스(Lyman J.Briggs)를 위원장으로 하는 우라늄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는 “만일 반응이 폭발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 파괴력은 지금까지 알려진 폭탄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저한 연구를 하도록 재정적 지원을 하기를 건의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해 11월 위원회는 감속재로 쓰일 흑연과 50톤의 우라늄 산화물을 확보할 것을 건의하고, 1940년 2월 질라드와 페르미가 콜롬비아 대학에서 방사성 동위원소 분리 연구를 수행하도록 연구비 6,000달러를 지원했다. 국가적으로 일관성 있는 계획에 의해 지원을 받는 연구가 시작된 것은 2년 후였는데, 1939년 말 미국 전체에 금속 우라늄이 단 1온스밖에 없었다.

핵폭탄 제조를 위한 우라늄-235와 감속재 확보를 위한 경쟁: 독일은 오토 한과 마이트너가 핵분열을 발견한 몇 달 후인 1939년 4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핵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해낼 수 있도록 독일의 핵에너지 프로젝트(우라늄 클럽)를 시작한다. 우라늄 클럽에는 하이젠베르크, 발터 보테, 클라우스 클루시우스, 오토 한, 파울 하르텍 등이 참여했고 책임자는 하이젠베르크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몇 달 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독일 방위군으로 징집되는 바람에 종료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독일의 핵에너지 프로젝트는 다시 시작되어 원자로, 우라늄과 중수 생산, 그리고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세 프로젝트로 확장된다. 그러나 핵분열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할 거라고 평가되자 전쟁을 수행하느라고 핵무기 개발에 들어가는 엄청난 자금 지원을 할 수 없었던 독일 육군 병기국은 1942년 1월에 이 프로그램을 제국연구위원회로 넘기고, 이는 다시 9개의 주요 연구소들이 나누어 맡게 된다. 연구소의 소장들은 전쟁 동안 좀 더 시급한 요구를 맞추는데 급급하여 응용핵분열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독일의 물리학자 발터 보테는 1939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과학회의에 참가했다가 젊은 여인과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했다. 독일로 돌아온 후에도 젊은 연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중성자 감속재로서 흑연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평소의 그답지 않게 수학적 오류를 범해 흑연은 아무리 순수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효과적인 감속재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리하여 당시 미국이 감속재로 흑연을 선택한 것과 달리 독일은 감속재로 중수를 쓰기로 하고 노르웨이 페르모르크에 있는 중수 공장에 중수의 생산을 늘릴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것은  보테의 계산이 근거가 된 것이다. 그의 계산상 오류는 1년 반이나 지나 다른 독일 과학자 칼 비르츠에 의해 밝혀졌다. 만일 보테가 계산상 착오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을까?

동위원소들의 혼합물로 존재하는 자연 우라늄으로부터 핵분열을 일으키는 U-235를 처음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물리학자 알프레드 니어다. 그는 1940년 자신이 만든 질량분석기를 이용해 미량의 U-235를 분리해낸다. 그는 이 미량을 페르미에게 보내고 페르미와 그의 동료들은 이것과 제네럴 일렉트릭에서 얻은 극미량을 가지고 1940년 3월 싸이클로트론을 이용해 느린 중성자로 때렸다. 그 결과 보어와 휠러의 예측을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40년 1월 독일에서는 베를린에서 정부가 주관하는 중수 관련 회의가 열렸다. 함부르크 대학의 파울 하르텍과 한스 수에스는 중수가 원자로의 효과적인 감속재로 연쇄반응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 관리들은 1톤의 중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전기가 무려 10만 톤의 석탄을 태워야 한다는 사실에 중수 생산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었다.

한편 1940년 4월 아인슈타인은 우라늄 연구가 빨리 진척되려면 좀 더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이에 루즈벨트는 1940년 6월, 국방과학 기술에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엔지니어, 과학자, 경제학자, 실무자로 이루어진 과학연구개발국(OSRD)을 만들었다.

핵연쇄 반응을 제어하기 위한 감속재로서 중수와 흑연이 사용되는데 중수를 농축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전기가 필요하다. 페르모르크에 있는 노르스크 수력발전소는 144미터 높이의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이용하여 비료를 만들고 있었다. 중수는 비료 생산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로 페르모르크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중수 공급처였다. 한편 1940년 미국에는 중수가 없었기 때문에 질라드와 페르미는 감속재로 중수 대신 흑연을 쓰기로 한다.

1940년 4월 독일은 노르웨이를 침공하고 노르스크 수력발전소에 한 달에 중수를 10kg에서 30kg으로 늘려 생산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이 노르웨이와 수력발전소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합군측은 페르모르크의 발전소를 파괴하기 위해 거의 2년에 걸쳐 5차례의 공습을 감행했고 92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결국 독일은 발전소를  포기하고 남은 중수와 중요한 부분들을 해체하여 1944년에 독일로 가져갔다.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6월 15일 파리를 점령한다. 1940년 여름, 독일이 벨기에의 식민지인 콩고의 카당가에서 3,500톤의 우라늄 광석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서방에 전해진다. 1940년 4월 이후 독일은 가장 많은 양의 우라늄과 중수를 비축하고 있었고 더구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우라늄광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1939~1940년 8월 사이 카당가에 있는 우라늄 광산의 책임자인 에드거 상지에는 우라늄의 군사적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듣고 아무도 모르게 높은 순도의 우라늄광 1,200톤을 2,000개의 강철 드럼통에 넣어 뉴욕으로 보냈다.

플루토늄의 발견과 임계질량: 제1940년 10월 맥밀란(Edwin McMillan)과 시보그(Glenn Seabo)는 버클리연구소에서 우라늄-238을 중성자로 때리자 U-239가 되고, U-239는 두 개의 베타입자를 잃고 새로운 초우라늄원소(Pu-239)가 되는 것을 발견하여, 플루토늄(Plutonium)이라고 명명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235 동위원소처럼 핵분열이 가능하고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중성자를 방출한다. 그런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은 플루토늄이 원자탄을 만드는데 우라늄-235 대신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새로운 원소는 천연 우라늄에서 U-235를 분리하는 것보다도 더 쉽게 분리해낼 수 있었다. 플루토늄의 발견은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굉장히 큰 영향을 준다.

독일 태생 유태계 물리학자 파이얼스(Rudolf Peierls)와 프리쉬(Otto Frish)는 1940년 3월 핵분열이 가능한 U-235의 임계질량으로 어떻게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는가를 짧은 논문으로 출판한다. 핵분열 시 핵 연쇄반응은 핵분열성 물질의 크기, 모양, 순도 및 주변의 물질에 의해 좌우되는데 만약 핵분열성 물질의 질량이 연쇄 반응을 지속할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을 임계질량이라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자탄을 만드는 데 몇 톤의 우라늄이 필요하고 그래서 원자탄을 만든다는 게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 짧은 논문에서 그들은 핵분열이 가능한 U-235의 양은 약 1kg 정도라고 계산한 것이다. 이 연구 결과에 관한 보고서가 1941년에 미국에 알려지게 된다.

이 보고서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원자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OSRD 산하  연구 프로젝트들 중 맨해튼 프로젝트가 최우선적인 프로젝트가 되고 훗날 원자탄을 개발하게 된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처음에는 6,000달러에 불과했던 맨해튼 프로젝트 연구비는 20억 달러로 늘어나게 되었다. 고용 인원 역시 최대 13만 명이 되어 세계 역사상 이렇게 많은 돈과 두뇌가 집중된 과학 프로젝트는 일찍이 없었다.

한편 1941년 9월 독일 과학자들도 핵폭탄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독일군 수뇌부는 핵폭탄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더욱이 2차대전을 핵폭탄 없이도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독일 원자로의 폭발: 1942년 5월, 하이젠베르크와 되펠(Robert Doepel)은 라이프치히 실험실에서 네 번째 시도 만에 원자로 파일을 건설해낸다.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비되는 독일의 핵무기개발위원회의 책임자였다. 1942년 6월 독일의 최고 군지도자들과 과학자들이 전쟁물자 생산의 우선권을 결정하기 위해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에 모였고 그때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핵 분열로 인한 엄청난 양의 에너지에 대해 설명했다. 몇 주 후 군수산업 책임자인 앨버트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원자핵 분열을 설명하고 지속적으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도록 연구비를 지원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독일의 핵프로그램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하고 만다. 1942년 6월 23일 라이프치히 실험실의 원자로 파일이 거의 임계상태에 도달하려는 순간 폭발하면서 불붙은 우라늄 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불은 이틀 후에야 겨우 진화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과의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있어서 중대한 고비가 되었다. 독일 과학자들이 손실된 중수와 농축 우라늄을 보충하고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만 2~3년이 더 걸렸다. 

제4장 전쟁의 새로운 양상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과 북한 미사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유럽인들은 전통적인 기병대와 총검을 소지한 보병을 생각하며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유럽 대륙은 전쟁 중 일련의 첨단 무기들(소총, 기관총, 탱크, 박격포, 75밀리포, 3엽기, 비행선, 화학무기, 화염방사기, 잠수함, 폭뢰 등)의 지속적인 등장과 맞닥뜨리게 되며, 결과적으로 약 1,000만 명이 죽고 2,000만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참상을 가져왔다.

어리석은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주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1945년 일본의 항복까지 연합국과 추축국들 사이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 전쟁으로 30개가 넘는 국가에서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참여하여 6천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수는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약 3%에 달하는데, 대량살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새로 개발된 첨단 무기의 사용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은 서로 전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혁신, 기술, 통신 및 의학에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레이더, 전자레인지, 컴퓨터, 워키토키, 페니실린, DDT, 합성고무 등의 기술이 개발되어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인명을 효율적으로 살상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들도 개발, 제조되었는데, 바주카포, 곡사포, 기관단총, 소총, 기관총, 수류탄, 세열수류탄, 지뢰, 탱크, B-17 폭격기, 고사포, 로켓, 로켓발사기, 신경가스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가장 잘 기억하는 대량살상 무기는  핵폭탄이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 수 있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뛰어든 국가들 중 최소한 8개 국가(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가 지금까지 2,056건의 핵폭발 실험을 했다.

냉전시대와 핵무기 경쟁: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의 앨라모고도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직후, 이 소식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영국과 소련의 수뇌부와 함께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있던 투르먼에게 전해졌다. 트루먼은 처칠에게 성공적인 원자폭탄 실험에 대해 스탈린에게 알릴 것인지를 의논한 후, 7월 24일 비교적 담담하게 “굉장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성공적으로 개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매우 기쁜 소식이며 일본에 대항하여 그 무기를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스탈린의 그러한 태도는 소련의 비밀경찰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초기부터 감시했을 뿐 아니라 첫 핵실험 날짜 역시 스파이로 암약한 물리학자 푹스(Klaus Fuchs)를 통해 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핵폭탄의 위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불과 1주일 만에 본토 방어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했다. 일본의 신속한 항복으로 미국이 결정적인 무기를 보유했음이 분명해졌다. 이후 소련은 미국에서 활약하던 스파이로부터 원자폭탄 제조 설계도를 넘겨받아 미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1949년에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이에 충격 받은 미국은 1952년 11월 더 강력한 핵무기인 수소폭탄을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그러자 이에 뒤질세라 소련도 3년 뒤인 1955년 11월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  소 초강대국 간의 핵무기 경쟁은 점점 치열해진다. 냉전 초기에는 전략 폭격기가 핵무기의 1차 전달 수단이었지만, 이제 미국은 최초의 장거리 미사일 부대를 창설한다.

1950년대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의 도발을 맞아 미국이 막대한 희생을 치른 재래식 전쟁을 막 끝낸 상태여서, 냉전시대의 초점이 핵무기 경쟁으로 모아졌다. 당시 미국은 소련에 대해 핵전력이 상당한 우위에 있었으므로 1954년 1월, 아이젠하워 정부의 덜레스 국무장관이 이런 점을 고려하여 “대량 보복; 소련의 어떠한 공격에 대해서도 핵무기를 적재한 전략폭력기를 출격시켜 거대한 보복력으로 반격한다.”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냉전의 분위기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대량 보복’이라는 개념의 결과로 냉전의 가장 중요한 부산물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나오게 된다.

1957년 10월,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경악했고, 미국 대중들 사이에 소련이 미국의 기술적 성과를 능가했다는 극심한 공포와 불안이 감돌았다. 소련의 놀라운 성과가 미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우주에서의 군비 경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소련이 인공위성을 우주로 발사할 때 사용한 기술은 미국 내 목표물에 핵탄두를 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구축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려했던 대로 1958년 소련이 최초의 ICBM을 배치했으며 미국도 이듬해에 ICBM을 배치함으로써 냉전도 우주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소련이 구사했던 핵전략은 상호필멸전략(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이라고 한다. 즉, 적이 핵 공격을 가할 경우 적의 공격 미사일이 도달하기 전 또는 도달한 후 남아 있는 보복력을 이용해 상대편도 전멸시키는 보복 핵전략으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결국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행하는 핵억제 전략이다. 즉 핵무기는 사용하기 위해 생산·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 생산·보유한다는 전략이며, 1950년대 말 대량 보복 전략에 이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냉전 이후 핵무기 경쟁으로 인하여 막을 수 없는 탄도미사일에 의한 완전한 파괴의 불안이 가중되자, 무엇보다 효과적인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 Anti Ballistic Missile) 체계 구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과 소련은 모두 고고도 탄도탄 요격 미사일과 최종단계 요격미사일이 결합된 핵무장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시스템을 개발했다.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과 스타워즈: 1977년, 조지 루카스 감독이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을 처음 선보인 후 ‘스타워즈’ 시리즈는 신화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스타워즈라는 이름의 전략적 방위구상(SDI)은 원래 소련이 먼저 구상했던 것이지만, 1983년 3월 23일 전국 TV 연설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핵 아마겟돈을 피하기 위해 우주에서 핵미사일을 격추하기 위한 탄도탄 요격미사일 전략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것은 일련의 우주기반 X-선 레이저로 무장한 시스템이 미국을 향한 어떤 핵무기라도 미리 탐지해 요격할 것이라는 마치 공상과학소설 같은 계획이었다.

그러나 SDI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장애물이 너무나 많고 극복하기도 어려워서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는 이를 영화 스타워즈에 빗대러 ‘무모한 스타워즈’ 계획이라고 언급했다. 10년 동안 정부는 이 개념을 개발하는데 300억 달러를 썼지만, 이 미래지향적인 프로그램은 그냥 미래지향적으로 남아 있어, 1993년 클린턴 정부는 구소련의 붕괴로 더 이상 SDI의 존재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우주선 창설과 제다이의 귀환: 2018년 3월 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을 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탄도미사일과 극초음속 순항미사일을 발표했다. 그는 공개 연설에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들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으며, 미래의 어떤 미사일방어시스템도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했다. 푸틴의 주장이 심각한 경종을 울리면서 미국은 우주 기반 미사일 추적 센서, 핵탄두를 잽싸게 치는 고에너지 입자빔,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우주군’ 신설 등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2월 19일 우주정책지침-4(SPD-4)에 서명해 육해공군, 해병대, 해경과 함께 미국군의 6번째 부문으로 우주군을 창설하라고 명령했다.

트럼프의 이 명령은 40년 전 레이건 대통령의 전략방위구상(SDI)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 번 데자뷰처럼 들린다. 레이건의 비전은 미사일이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하기 전에 공중에서 미사일을 추적해 파괴할 수 있는, 궤도를 도는 레이저빔 스테이션을 갖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미사일을 요격하는 우주기지 레이저와 지상 발사를 탐지하는 궤도광학 시스템은 점증하는 러시아와 중국 ICBM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만 이 시스템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핵탄두들이 로켓과 분리되기 전인 부스트 단계에서 탐지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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