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북코스모스 회원이 되시면 오디오 듣기 이용이 가능합니다.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창해

책소개

삶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솔하면서도 간명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일러주는 비범한 책이다. 행복은 우리의 내면에서 느끼는 마음 어딘가에 담겨 있다. “그대가 나를 찾는 것은 이미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이미 질문 속에서 해답의 행방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요약본 본문

제1장 마음 비우기

카르페디엠
사람들은 과거 공간에 들어가 지난 기억을 뒤지기도 하고 미래 세계에서 자신이 꿈꾸는 상상에 잠기기도 한다. 과거는 현재를 기점으로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현재를 기점으로 다가올 시간이며, 현재만이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다면 현재는 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겪은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록되어 삶의 역사를 구성해 놓는다. 노화 현상이나 알츠하이머처럼 치매를 일으키는 병이 아니라면 과거는 기억에 남아 현재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억압된 감정’은 자기실현과 심리적 균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따라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혼란스러운 과거를 완화하기 위해 현재와 새로운 관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야 한다.

과거 때문에 현재의 삶이 지배당한다면 그것은 기억이 주는 추상적 이미지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사건은 피할 수 없지만 기억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피할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지나치게 얽매이면 의식이 과거에 종속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능동적일 수 없다. 또한 지나친 후회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중요하든 사소하든 많은 잘못과 오류를 범했고, 또 범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잘못을 돌이킨다는 명목으로 과거에 얽매이거나 끌려가기보다 사실로 인정함으로써 반복하지 않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의 시점, 즉 현재에서 실현된다. 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혼하고 다시 재결합한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의 잘못 때문에 서로 이혼했을 것이다. 따라서 재결합의 경우 과거의 사건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무너지면 결코 건강하고 조화로운 부부로 거듭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면의 트라우마나 부당한 희생양이 되었던 억울함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형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런 경험들이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그 경험들이 쉽게 치유되지 않는 심각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시간과 더불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미련 없이 과거를 떨쳐내고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

현재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때때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야 하고 후회와 불안, 몽상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금언을 남겼다. “네 인생의 모든 사건을 부여잡고 너 자신을 요동시키게 그대로 내버려두지 마라.(『명상록』)” ‘프로소케Prosoche’는 그리스어로 ‘현 순간에 대한 집중’이다. 이 말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헛된 집착에서 벗어나 현재를 중요시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현재를 살아 있는 가치로 강조했으며,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유일한 영역으로 프로소케의 개념을 중시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은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의 『송시Odes』에서 발췌한 것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질투하며 사라질지니 오늘을 즐겨라, 내일을 믿지 말고….”

오직 현재의 순간이 창조적인 시간이다. 우리가 인생을 즐기고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다. 행복은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아름다운 감동의 근원이 될 수는 있지만 현재의 생생한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여기서 현재란 지극히 짧은 단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연속된 선線을 표현하는 것으로 영원을 뜻한다. 이로써 마침내 우리는 위대한 현인들이 말하는 영원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평정과 조화, 평화가 바로 불교 선사 틱낫한이 ‘순간의 충만’이라고 부르는 행복 개념이다. 이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리도 모르게 온몸으로 누리는 은총이다. 틱낫한은 말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실 때도, 현재의 순간을 음미하며 과거나 미래를 잊으십시오. 찻잔에 미소를 지으며, ‘나는 지금 차를 마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조용히 잔을 기울이며 육신과 생각을 모두 내려놓은 최상의 순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움
미덕의 심층적 가치로 ‘아름다움’을 빼놓을 수 없다. 동서고금의 사상가들과 현인들은 아름다움이 내면의 삶에 부여하는 효과에 주목했다. 철학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나는 플라톤의 말을 자주 인용해왔다. 플라톤에게 ‘절대’ 가치는 진리, 선의, 아름다움, 즉 진선미의 세 유형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 세계’로 자신의 영혼을 이끌기 위해 이 세 가치를 깊이 성찰하고 열망한다. 진선미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원형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관조하고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면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연에는 추함이 없다. 추함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속할 뿐이다. 더욱이 자연의 아름다움은 무상으로 주어진다. 반면,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탐욕과 만나면서 때때로 추한 모습으로 변화된다.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보려면 무엇보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종교에서는 ‘아름다움’을 거룩한 신성에 이르는 영적인 길로 생각했다. 고고 인류학자 에마뉘엘 아나티Emmanuel Anati는 『종교사 소론』을 저술하며 대략 45,000년 전 구석기 시대에 종교가 미적 대상에서 어떻게 발현했고 어떻게 일치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의 동굴에 남겨진 벽화를 가리켜 ‘진정한 대성당’이라고 경외감을 담아 칭송했다. 종교는 미적 감각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사원들은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형형색색의 꽃과 조각과 그림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서양의 예술은 종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성장할 수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에게 아름다운 성당 건축을 주문했다. 불교,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처럼 지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종교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철학자인 베르그송은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가는 보통 사람보다 ‘잘 보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일로 가려진 진실을 원형대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의 편리나 실용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보다 현실을 굴절 없이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저주 받은’ 시인 보들레르는 종교적인 아름다움을 증오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을 경배하듯 자연을 찬양했다. 그는 자연을 ‘영원을 담아 노래하는 아름다운 사원’에 비유했다. 랭보는 이런 보들레르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는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들레르를 손꼽았으며 ‘최초의 견자見者’라고 불렀다. 도스토예스키는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며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제2장 마음 채우기

믿음
이 장에서 다루게 될 주제는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일신교 신앙이 아님을 우선 밝혀둔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표현 기준이 없다면 믿음에 대한 설명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종종 등장하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종교를 통한 개인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전제해 둔다. 동양은 그리스도교와 전혀 다른 관점을 취한다. 이를테면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믿음보다는 선험적 확인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붓다’라는 스승과 ‘다르마法’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교를 통한 모든 영적 성장은 불가능하며 붓다의 가르침 또한 무의미하다.

믿음은 모든 영역에서 확실한 효과를 보장한다. 과학자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리라는 굳은 믿음 아래 연구실로 향한다. 갈릴레이나 뉴턴 같은 학자의 경우,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며 인간은 분명 그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창조주가 만든 세상의 질서와 자연법칙을 발견하고자 했다. 만약 세상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그처럼 깊이 있는 연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가 없다고 해서 우주의 선험적 질서와 법칙에 대한 믿음마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은 진실을 열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종교적 영역에서 파생된다. 나는 신앙심이 깊지 않은 사람을 진정한 과학자로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지와 섭리에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은 유대교와 이슬람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신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서야 비로소 내면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표현하는 내적 평화는 마음의 동요가 없는 고요한 영혼 상태를 이른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인 16세기 신학자 에크하르트는 그의 철학 사상 키워드 중 하나인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 즉, ‘자아의 포기’를 설명했다. 내면의 평안을 얻으려면 ‘희망과 지적욕구 그리고 소유에 대해 초월해야 한다’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다가설 수 있는 신비의 단계에 이르지 않고는 평온한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통제할 수 없다. 부부나 자식이라도 완전한 소유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 『예언자』에 썼던 것처럼, ‘자식은 소유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일 뿐’이다. 직업 역시 언제 어디서 어떤 돌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지뢰밭이지만 사람들은 늘 안전할 것이라는 섣부른 착각으로 살아간다. 인도의 현인들은 현실과 다투지 않고 완전하게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한다’라고 설명한다. 마음을 비우고 믿음으로 채우면 갈등이 완화되고 참된 기쁨이 찾아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려놓음’은 믿음을 향한 힘찬 날갯짓이다.

제3장 마음 내려놓기

명상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내면의 고요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맑은 의식과 온전한 자아로 존재하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침묵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두렵고, 외부의 침묵을 통해 다가오는 내면의 정적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육신이 피곤할 때 편안한 휴식을 취하듯, 정신도 일상을 지배하는 많은 생각을 내려놓고, 칼날 같은 긴장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명상’이다. 이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충전이며, 일상에 빼앗긴 자신을 재발견하는 정신적 행위이다. 명상은 깊은 침묵을 통해 이를 수 있다.

불교의 선사들은 명상을 하는 사람을 산에, 생각을 구름에 비유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산을 뒤덮었던 구름을 몰아내면 이내 다른 구름이 몰려온다.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대면 푸른 하늘에 군데군데 뭉게구름만 남는다. 그리고 한순간 구름에 가려 형태를 알 수 없었던 산이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잡념이 사라지면서 내면의 맑은 의식이 살아나는 것이 바로 명상의 핵심이다. 의식을 혼란스럽게 뒤흔들고, 마음 내려놓기를 방해하며, 자아의 발견을 가로막던 생각들이 구름처럼 자취를 감춘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육체 훈련과 마찬가지로 명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기적인 훈련이 중요하다.

종교적 명상은 심오한 영적 훈련을 요구하므로 전문적인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티베트의 불교에서는 내면의 침묵을 명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행을 위한 초보적 사전 준비로 간주한다. 엎드려 절하기, 만트라(주문) 암송, 시각화 훈련 같은 수행은 무지와 속박으로부터 의식을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영성 훈련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일신교에도 명상 형식이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묵상 기도로 예배를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인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면의 기도 즉, 침묵의 기도를 ‘하나님과 신자가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매우 간단한 설명이지만 나는 신자와 절대자 사이의 사랑을 이보다 아름답게 수식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무지
“무지無知는 모든 악의 근본이다.” 붓다와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앎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진리로 남는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긍정과 부정을 분별하는 앎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제대로 살아간다 할 수 있겠는가. 구별 능력은 가장 기본에 속하는 본능이며, 이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더 발달했다. 동물은 생존에 위협적인 존재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인간도 이와 같은 본능이 있지만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순화되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 정당성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둔다. 남들보다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인간을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가치는, 사실을 판단하고 지식을 활용하며 분석하는 ‘이성’이다. 나는 이것을 동물과 구별해서 ‘이성적 판별력’이라 부른다.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인 동시에 가장 큰 역설은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가정이나 종교 그리고 사회의 일방적인 교육을 통해 얻은 확신에 대한 재고가 바로 그것이다. 무방비로 습득된 지식은 오류와 선입견으로 뒤섞이기 쉽다. 시대와 국가, 문화와 가정은 사실에 대한 제한된 관점으로 왜곡된 지식을 전한다. 따라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참된 앎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다.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변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혜의 등불은 분별력과 올바른 선택을 돕는다. 동물적 본능과 타성에 젖은 선입견에서 벗어나 진리를 향한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사회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 근거한 서양의 전통 가치는 줄곧 신이 제시한 율법에 근거했다. 따라서 기존 가치는 근본적인 규범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고 넘볼 수 없는 원칙이 되었다. 서양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 역시 규범적인 율법을 제시하고 근본적인 가치를 제정했다. 내 말은 이와 같은 율법을 무조건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도덕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수단이며, 인간성을 보장하는 보루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동시대 사회는 율법의 권위적 규범에 만족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변별력은 행위와 결과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정당한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 얽힌 물질적, 정서적, 감정적인 요인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태도는 아무 반론 없이 종교적인 믿음을 따르기보다 훨씬 어렵다. 무엇이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잣대이고, 무엇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소중한 가치일까? 무지를 벗어나는 출발점이 바로 이런 인간애에 있음을 기억하자.

제4장 마음 길들이기

자율
인간의 가치를 가름하는 요소 중 하나가 자율성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사람들은 자유를 열망하지만 원하는 행동 범위를 제대로 판단해서 선택하기란 매우 어렵다. 근대 이전은 자유의 침해를 상당히 많이 받던 시대였다. 규범에 매인 사회와 가족, 중압적인 전통, 그리고 강제적인 정치 제도가 개인의 자유를 마구 훼손했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서양에서는 선택의 기회가 폭넓게 주어지면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국적까지 바꿀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한 가치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고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오히려 무의미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자유와 더불어 선택의 과잉이라는 문제도 제기된다.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의 눈앞에는 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선택의 과잉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에 빠뜨리거나 타락으로 이끌어 오히려 자유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를 굳이 비교하자면 옛날에는 제한된 범위로 불편하기는 했지만 안정된 지표가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매 순간 제시되는 다양한 가능성이 오히려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주어진 모든 것을 다 품에 안으려 발버둥치다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완전히 탈진 상태로 고통의 수렁에 빠져 살게 된다. 과잉된 가능성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한다. 젊은이들은 선택이 어렵다는 변명으로 책임 회피를 함으로써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절망의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알랭 에렌베르그는 욕망과 도덕적으로 금지된 강박증에 대한 갈등은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프로이트 시대와 선명하게 구분 지어졌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1968년 5월 혁명에서 관습의 해방이 선포된 후로 상황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은 더 이상 금지된 규범으로 고통 받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가능성과 지나친 자율성 때문에 방황하며 화려한 성공 이데올로기의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지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잠깐 숨을 돌리고 자신을 돌아보자.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나 자유 의지를 침해하고 원만한 인간관계마저 방해하는 그릇된 습관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혜의 스승들은 집단의 굴레와 전통의 사슬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성향이 있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자유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사랑
지식과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성이 필요한 것처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행복을 위한 핵심 조건이다. 자유롭지 않을 때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처럼 사람들과 관계가 부적절할 때 삶은 삭막해진다. 따라서 자유와 사랑은 자기실현과 개인의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라는 대상이 늘 따라다닌다. 자식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며 친구들과 배우자를 사랑한다. 이것은 수 세기에 걸친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고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철학에서 강조해온 헌신과 연민, 인간애이기도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사회적 차원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정작 자기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가치가 밀려나 버렸다는 점이다.

현대 심리학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명백하게 정의했다. 타인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선 자기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타인은 자신과의 관계에 종속되기 때문에 사람을 사귀기 전에 반드시 자기 자신부터 잘 다스려야 한다. 마음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품은 채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질투심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내면에 억눌린 열등감과 욕구 불만이 가득 쌓여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와 멸시는 종종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소중한 관계를 맺으려면 반드시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선 어린 시절에 받았던 ‘부드러운’ 사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심리학자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바로는 어린 시절 받았던 ‘따스한 사랑’에 대한 기억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정서적 정당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며 존경심마저 부여한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었다는 확신이 자신의 가치에 대단히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유욕에 따른 지나친 집착이나 무관심 등으로 왜곡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비틀어진 가치관이 자리 잡게 되고 그 여파로 다른 사람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어린 시절 왜곡된 사랑 때문에 정서적 결핍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해도 성장해나가면서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은 트라우마도 배우자나 친구들의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극도로 변형된 이미지를 품는 ‘나르시스Narcissus’는 심각한 정서 장애 중 하나로 의학적 도움 없이는 완치가 어렵다. 이 증세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이나 그와 유사한 사람들에 대한 맹목적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절대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에 숨어 있는 상처를 덧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끈질긴 악순환의 반복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힘들겠지만 기억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 원인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상처란 녀석의 존재를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악순환의 굴레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제5장 마음 다스리기

용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문장은 기원전 28세기에 이미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함무라비 왕은 부당한 폭력에 단호하게 맞서기 위한 조처로 자신들이 받은 손해만큼의 비율로 되갚은 것을 허용했다. 이 같은 보응법은 ‘토라Torah 율법서’에도 반복해서 나온다. 토라의 구절들은 폭력을 금하고 용서하라는 성경의 내용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붓다는 폭력에 맞대응하지 말고 연민과 존경을 보이라고 가르쳤다. 붓다의 가르침은 토라의 보응법과는 전적으로 다르지만, 예수가 전하는 용서의 메시지와는 의미상 맥락을 함께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사랑의 본질적 의미가 담겨 있다.

용서와 비폭력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대단히 미묘한 차이가 있다. 부당한 공격을 당했으면서도 상대보다 불리한 입장이라 몸을 사리는 것이 비폭력은 아니다. 단지 힘이 모자라서 외적 대응을 하지 못했을 뿐이며 마음 한구석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는 증오가 가득하다. 어느 날 힘의 관계가 반전된다면, 다시 말해 상대보다 힘이 강해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당했던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보복하게 된다. 따라서 무조건 참고 기다리는 행위를 비폭력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음속 상처를 끌어안은 채 복수를 기다리는 하나의 전략으로 폭력의 또 다른 연장이라 봐야 한다. 비폭력의 윤리적 가치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용서’이다.

용서란 잊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갈등과 고통을 다스리는 심리 치유 과정으로 상처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마음의 다짐이다.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적 특성 때문에 종교계에서는 ‘신비로운 영성의 절정’이라 정의했다. 용서는 이성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야말로 폭력을 잠재우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독립을 이루게 해준 간디의 정치 구호 가운데 ‘아힘사Ahimsha’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순수한 사랑’과 ‘진정한 힘’에 토대를 둔 비폭력의 가치이자 승리의 근원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무고한 자신을 죽이는 사형 집행인들의 무지를 상기시키며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탄원했다. 예수가 택한 극단의 방법처럼,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의 행위가 사실은 충동과 두려움, 또는 누군가의 선동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타인에게 습관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자신의 내면에 그 사람을 기꺼이 초대해 함께 호흡하는 과정에서 그가 무지하고, 불행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해 사랑과 용서로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자. 이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며, 물론 어렵지만 자신을 살리는 가치 있는 행동이다.

실패
현대 사회에 들어서 능력, 성공, 승리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가 생겼다. 치열한 성공 이데올로기는 가정과 학교, 사회를 통한 모든 분야에서 우리를 다그친다. 대중 매체는 쉴 새 없이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영상을 내보내어 주목받는 인생의 모델로 제시하고 패배자는 인생을 잘못 살았거나, 심지어 악의 전형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자아실현을 앞세우는 현대 사상의 그럴듯해 보이는 정신 유산으로서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유럽 계몽주의자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종교의 전횡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주고자 노력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강요된 사회이념의 틀에 갇힌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자유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새로운 사조였다.

능력 숭배는 빈틈없는 획일성을 요구한다. 이혼이나 실직도 심각한 개인적인 결함이자 실패로 간주한다. 따라서 여자의 경우 현모양처, 훌륭한 동반자, 멋진 섹스 파트너, 살림 잘하는 주부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일을 잘하는 슈퍼 우먼이 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무능력자로 낙인 찍혀 그에 걸맞은 홀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논조에서 패배자가 겪는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회가 부여한 규범에 따라 우리가 선택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자기실현을 이루지 못한 무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패는 치유 불능의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때가 되었다.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으뜸 패는 인생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각성이다. 계획한 모든 일을 단박에 성공할 만큼 완벽한 능력의 소유자는 아무도 없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실패할 수 있는 위대한 도전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획일적인 성공이 보장된 소극적 범주에 갇혀 살았다는 말과 다름없다. 패배가 두려워 성공에 안주하는 사람은 그만큼 실패할 확률은 낮지만 진정한 승리를 맛볼 가능성도 그만큼 작다.

그리스어로 ‘크리시스Crisis’에서 유래한 ‘위기’라는 단어에는 ‘분별이나 선택의 필요성’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패와 절망과 질병은 ‘더 이상 지속되면 안 된다’는 위기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선택과 더불어 변화를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과 위기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좀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고 명령하는 훌륭한 스승이다. 이것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기는 절대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썩고 악취 나게 방치하는 것과 같다.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실패나 질병이나 고통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라는 나의 논지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바란다. 누구에게도 일부러 위기를 겪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직업을 잃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심각한 병에 걸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자신을 훈련시키고 더 자라게 하며, 색안경을 벗고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일부 종파에서 주장하는 ‘고행’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부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며 성경을 잘못 해석한 명백한 오류이다. 예수가 겪었던 고통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닥쳐온 시련과 고통이 사랑과 진리의 계시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0 댓글
본문 피드백
모든 댓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