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러시아2

줌 인 러시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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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인 러시아 2
이대식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책소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여행하는 이 책은 시베리아횡단열차 노선상에 있는 도시와 지선상에 있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크고 작은 도시 20여 곳을 방문하는 러시아 도시 여행기다.

요약본 본문

영광, 몰락, 부활의 오디세이 – 블라디보스토크


오디세이의 서막: ‘블라디보스토크’의 탄생

1855년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영국에 패하면서 1856년 3월, 지중해뿐 아니라 흑해와 다뉴브강까지 내주는 굴욕적 조약인 파리 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러시아가 절치부심 패자부활전을 벌인 곳이 동북아시아였다.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해 지금의 연해주를 러시아로 복속시킨 주인공인 동시베리아 주지사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에게 새로운 극동기지를 찾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도 1859년 그가 연해주 주변 해역을 항해하던 중 러시아가 크림전쟁으로 영국에 빼앗긴 터키 이스탄불의 금각만(Golden Horn)과 똑같이 생긴 천혜의 군항 터를 발견한다. 무라비요프는 이 땅을, 동쪽을 점령한다는 의미의 ‘블라디보스토크’라고 이름 지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제국에 군사기지보다 값진 보물단지였다. 러시아가 그토록 간절히 찾던 부동항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 조선, 일본 3개국 모두를 지척에 두고 있어 동북아 공략에 최적의 입지였다. 게다가 동해의 넘치는 어족 자원, 중국과 조선 접경지대의 풍부한 삼림 및 광물 자원을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치였다.

남은 문제는 여기에 해군기지와 함께 무역항, 그리고 배후도시를 만들어 이 엄청난 잠재자원을 현실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업은 187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주지사 관저와 시베리아 함대가 옮겨와 명실상부한 극동해군의 전진기지로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화된다. 그리고 이때 블라디보스토크를 세계적인 자유무역항으로 바꾸어놓을 거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한 사람이 율리우스 요제프 브리너인데, 흥미롭게도 그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스위스인이었다(그의 러시아 이름은 율리 이바노비치 브리네르다).


율리우스 브리너의 오디세이

이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러시아는 동진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결국 1917년 사회주의혁명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사회주의혁명과 함께 율리우스 브리너의 사업도, 자유무역항 블라디보스토크도 모두 문을 닫게 된다. 율리우스는 1920년 3월 10일에 사망한다. 4개월 후인 7월 11일 그의 둘째 아들 보리스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데, 할아버지의 러시아 이름을 따라 율리라고 불렀다. 그가 바로 전설의 명배우 율 브리너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면 율 브리너의 생가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다.


자유무역항 블라디보스토크의 몰락

19세기 말 율 브리너 가문과 같은 대내외 거상들의 활약에 힘입어 동북아시아의 최대 자유무역항으로 부상하던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일전쟁과 사회주의혁명 그리고 러시아내전(적백내전)을 거치며 발전의 가속 기어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특히 사회주의혁명 직후의 내전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를 잠시 점령했던 일본군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져가고 산업 시설은 대부분 파괴해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소련 정부는 내전 직후인 1923~1925년에〈재건 3개년 계획〉등을 통해 이 항구도시의 부활을 꾀했고, 그 덕분에 1925년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이 소련의 항구 가운데 최고의 수익을 냈다. 그러나 소련 시절 블라디보스토크의 발전은 원천적 한계가 있었다. 냉전으로 인해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 전 세계 최대 무역국들과의 교역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58년 1월 태평양함대 본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블라디보스토크 도시 전체가 외국인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자유무역항의 역사마저 끊기고 말았다. 이후 도시가 다시 외국인에게 개방된 것은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 초대 대통령 옐친의 대통령령이 발효되면서부터다. 그러나 소련 붕괴로 이 도시의 산업을 이끌어왔던 군수산업이 와해되면서 1990년대에는 도시의 몰골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극동개발의 핵심으로 부활한 블라디보스토크

변화가 시작된 것은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다. 푸틴은 100달러 이상의 고유가에 힘입은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국가의 균형발전 전략을 추진한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극동지역은 러시아 영토의 36%에 이르는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며 러시아 전체 원유의 17%, 가스의 27% 등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지만, 인구는 러시아 전체의 4.7%, GDP는 5.4%(2000년 기준)에 불과했는데, 이러한 지역 불균형은 러시아 정부에 심각한 경제안보적 위기감을 조성했다. 특히 19세기에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한 중국이 이 지역에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면서 중국화 현상마저 우려되었다.

중국화 현상을 막고 그 지역에서 자원을 개발해 동북아시아로 수출하려면 낙후 자원 및 교통 인프라를 확충하고 배후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푸틴 정부는 2000년대 중반부터 극동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09년 ‘극동개발 마스터플랜’ 및 2025년 ‘극동 바이칼 지역 경제사회 발전 전략’을 수립했고 2011년에는 극동 및 바이칼 지역 개발 펀드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푸틴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는 극동개발의 핵심 지역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이다.

푸틴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러시아와 한국ㆍ중국ㆍ일본을 잇는 육ㆍ해상 통합 물류 네트워크를 건설하여 러시아의 ‘태평양 시대’를 열어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계획을 만방에 공표하고 그 실현을 가속화하고자 201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펙정상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아펙정상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프라가 거의 백지 상태인 루스키라는 외딴 섬을 회의 장소로 골라 60억 달러를 훨씬 넘어서는 투자를 감행했다. 참고로 루스키 섬 연육교는 길이 3,100m, 교각 간 거리 1,104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사장교이며, 도시 최고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푸틴 정부의 투자로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 20세기 초 러시아 건축물이 복원되는 한편, 21세기형 현대 건축물까지 들어서면서 멋진 도시로 새 단장을 한 블라디보스토크는, 2015년 4월 30일에는 숙원이었던 자유무역항 지위까지 되찾았다. 푸틴 대통령이 극동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외국인 투자자에게 면세 및 행정 간소화 혜택을 제공하는 자유무역항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주변 4개 지자체도 이 도시에 귀속시켜 그 경제권은 더욱 확대되었다. 2009년 57만 명대까지 내려갔던 인구도 2010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하여 현재는 60만 명을 돌파하며 옛 수준을 회복했다.


러시아의 미래를 책임질 극동개발의 전진기지 – 하바롭스크


물류허브를 꿈꾸는 러시아 극동 플랫폼

2000년 5월 푸틴은 효율적인 국가 관리를 위해 러시아를 8개 연방관구로 나누고 그중 극동연방관구의 행정수도를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하바롭스크로 정했다.

덕분에 하바롭스크는 최근 발전을 거듭하며 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 2015년에는 60만 7,000명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인구를 앞질렀다. 러시아 정부가 하바롭스크를 극동개발의 중심지로 육성하자 이 지역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투자도 활발해졌다. 한국 정부도 2016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에서 약 1억 7,500만 달러 규모의 하바롭스크 폐기물 처리시설을 건설하기로 합의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투자와 진출을 약속한 바 있고, 실제로 2017년 8월 폐기물 처리장이 준공되어 가동을 시작했다. 2020년에는 한국 기업의 투자로 하바롭스크 시내 한복판에 약 20억 루블 규모의 현대식 의료센터(건강 아카데미)가 건설될 예정이다.

하바롭스크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극동은 한ㆍ중ㆍ러, 한ㆍ일ㆍ러 등의 합작 프로젝트를 통해 북한 문제를 우회적으로 해결하여 한반도의 미래에 중요한 전환 모멘텀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은 남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조적 플랫폼이라는 관점에서 보다 전향적으로 러시아 극동에 접근해야 한다. 한편 무라비요프의 동상이 서 있는 아무르 강변에 가면 그와 함께 소개되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한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이자 하바롭스크시 당 외무위원직까지 지낸 김알렉산드라의 이야기를 꼭 듣게 된다. 1918년 그녀는 일본군에 잡혀 이 바위 절벽에서 사형 당했다.

처형 직전 마지막 소원으로 “내 스스로 죽을 장소를 고르겠다”라고 말하고 그녀는 천천히 열세 걸음을 걸었다. 무라비요프의 동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벽에 멈추어 서서 그녀는 말했다. “지금 내가 걸은 걸음은 바로 조선의 열세 개의 도입니다. (…) 조선 13도의 젊은이들이여, 그 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여라. 그것은 그대들의 자랑이 되리라. (…) 조선독립 만세!” 이윽고 총성이 울렸고 그녀의 시신은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아무르강에 잠겼다.


아름다운 자연, 숭고함, 첨단기술이 생동하는 도시 – 이르쿠츠크


이르쿠츠크를 물들인 사랑 이야기

바이칼호로 가는 관광객이 거의 반드시 거치는 곳이 있다. 바이칼 서편, 인구 60만 명의 도시 이르쿠츠크이다. 데카브리스트 반란(1825년 12월 러시아 귀족들이 전제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 러시아어로 12월이 ‘데카브르’인 데서 ‘데카브리스트’라는 말이 유래함)의 지도자 트루베츠코이와, 톨스토이의 7촌 외숙으로 『전쟁과 평화』의 모델이 된 볼콘스키가 살았던 지역으로, 치타와 함께 대표적인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소가 데카브리스트들이 살았던 집이 아닌 한 여인의 소박한 무덤이라는 점이다.

잠시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있기 7년 전인 1818년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크리스마스 무도회로 가보자. 네바 강변에 위치한 대저택에서 한 아가씨가 미래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와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예카테리나 라발, 당시 18세 소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귀화한 궁정 귀족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러시아 대부호의 상속녀였다.

이런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예카테리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밝고 쾌활한 데다 성품까지 착해 러시아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크리스마스 전야 무도회에서 그녀가 미래의 왕과 춤을 추는 장면을 누구도 어색하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820년 봄,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 그녀는 파리에서 운명적 사랑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젊은 러시아인 공작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였다. 결국 두 사람은 1821년 5월 결혼했고, 모든 러시아인의 축복을 받으며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4년 뒤인 1825년 12월 14일 예카테리나를 극찬했던 니콜라이 왕자의 황제 즉위식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날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은 무참히 진압되었다. 반란 현장에는 없었지만 예카테리나의 남편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또한 반란 주모자로 체포된다. 황제는 이후 정식재판을 통해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곧바로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한다. 그의 감형이 아내 예카테리나 덕분이라는 사실은 취조 현장에서 황제의 명령으로 트루베츠코이가 아내에게 쓴 편지에 잘 나타난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자들에 대한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에서는 반란자들의 아내들을 공식적으로 과부로 인정했으며, 재혼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많은 부인이 남편을 포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황제의 허락을 얻기 위해 면담을 요청한다. 그렇게 하여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된다. 그녀를 한사코 만류하던 황제는 그녀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허가서를 내준다. 그렇게 하여 예카테리나는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중 가장 먼저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떠났는데, 그 첫 번째 기착지가 이르쿠츠크였다.


얼음의 땅을 녹인 예카테리나의 헌신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이르쿠츠크 근교의 포도주 공장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이 되돌아가도록 만들라” 하는 황명을 받은 이르쿠츠크 주지사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들의 만남을 방해했고, 마지막에는 그녀의 남편을 새로운 유형지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힐 수 없었던 예카테리나는 1827년 1월 19일 주지사와의 면담에서 주지사가 제시한 조건, 즉 “귀족의 직위와 특권을 포기하며 시베리아에서 태어날 자식은 부역 농노가 될 것”이라는 조건을 주저 없이 수락한 뒤 그다음 날 700㎞ 떨어진 남편의 새로운 유형지로 떠날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길을 가야 했다. 수중의 돈과 귀중품은 모두 국고로 넘어갔고, 어떤 특별 보호막도 없었다. 이후 그녀는 온갖 말 못할 고초를 겪어내고 마침내 남편이 있는 광산 마을에 도착한다. 그날부터 그녀는 빈한한 시베리아 농노, 그것도 옥바라지를 하는 농노의 삶을 시작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직접 물을 긷고 빨래하고 페치카를 피우고 음식을 만들고 남편에게 입힐 옷을 기웠다. 돈이 없어 저녁을 굶어야 했고 감옥에서 남편을 접견하고 나면 빈대를 없애려고 옷을 털어야 했다. 그 와중에 그녀는 남편뿐 아니라 다른 죄수들을 돕는 일까지 시작했다. 자신이 입고 왔던 따뜻한 옷들을 나눠주었고, 신고 있던 가죽장화로 모자를 만들어 한 죄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후 1835년 오랜 감옥 생활 끝에 트루베츠코이는 석방된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가족이 동시베리아를 떠나는 것을 금해 그녀의 가족은 이르쿠츠크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예카테리나는 도시의 모든 가난한 이를 도우며 살았다. 돈 없고 병든 이들이 그녀의 집 앞에 줄을 섰고 이 소식이 페테르부르크에 알려지자 구호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예카테리나는 전(全) 시베리아의 어머니이자 후원자가 된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53세가 되던 1854년 폐병에 걸려 남편의 품에서 사망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는 과연 행복했을까? 황제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녀는 말한다. “전 매우 불행합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이 일을 겪을 운명이라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항공 산업의 메카, 이르쿠츠크

신비한 바이칼 호수와 러시아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즉 천혜의 자연환경에 문화적 유산까지 모두 갖춘 이르쿠츠크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여행의 백미가 될 만한 도시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경제제재와 유가 급락으로 러시아 경제가 무너졌던 2014년에도 이르쿠츠크주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전년 대비 85% 늘어났다는 사실도 그리 놀랍지 않다.

그럼에도 이르쿠츠크를 관광도시로만 기억하는 것은 코끼리를 그 코로만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르쿠츠크의 총생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도소매 유통(47.3%),이고, 그 다음이 공업 생산(25.5%)이기 때문이다. 생산 측면에서 보면 이르쿠츠크는 주로 공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의 소비지출로 유지되는 공업도시다. 사실 이르쿠츠크는 과거부터 명실상부한 러시아 항공 산업의 메카였다. 1936년부터 2016년까지 전투기 및 민항기 7,000대를 제조하여 중국ㆍ이집트ㆍ베트남ㆍ인도 등 세계 137개국으로 수출한 것이 그 예다.


‘새로운 시베리아’와 그 보물들 – 노보시비르스크


시베리아의 실리콘밸리, 아카뎀고로도크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어느덧 시베리아의 한복판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모스크바까지 총 9,288㎞의 여정 중 이제 남은 거리가 3,191㎞이니 거의 3분의 2를 지나온 셈이다. ‘새로운 시베리아’라는 뜻의 노보시비르스크는 인구가 161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 제3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인구만 많은 게 아니라, 산업ㆍ교육ㆍ문화 등 다방면에서 일찍부터 세계적 수준을 자랑해왔고, 도시가 큰 만큼 품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먼저 이 도시가 가장 자랑하는 보물 ‘아카뎀고로도크’로 가보자. 아마 ‘스푸트니크 쇼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그동안 “수소폭탄을 장착한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라는 소련 서기장의 말을 허풍이라 치부하던 미국과 서방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인공위성 기술을 군사적으로 쓰면 그것은 소련이 대륙을 넘어 미국 본토를 선제공격할 수 있는 기술이 되기 때문에 미국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것을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부르는데, 스푸트니크 쇼크는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간의 우주 방위산업뿐 아니라, 과학과 교육 체계 전반에서 펼쳐질 치열한 경쟁의 촉발점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스푸트니크 쇼크 덕분이라는 것이다. 노보시비르스크의 보물 ‘아카뎀고로도크’도 바로 같은 시기 미국과의 경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카뎀’은 아카데미아의 준말이고 ‘고로도크’는 러시아어로 ‘작은 도시’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과학도시’라는 뜻이다. 흔히 시베리아의 실리콘밸리라고도 불린다.

노보시비르스크 시내로부터 약 30㎞ 떨어진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한 아카뎀고로도크는 소련 각지에서 선발된 최고 과학자들이 최상의 대우를 받으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곳이다. 단지 내에 40여 개의 연구기관이 있고, 거주 인구 10만 명 중 러시아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는 아카데미 회원 약 130명, 국가 박사 약 1,500명, 일반 박사 5,000여 명 등 연구원이 약 2만7,000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아카뎀고로도크의 매력은 뛰어난 러시아인들의 창의력이 집적된 도시라는 데 있다. 인텔의 러시아 지사장은 한 언론에서 “복잡한 문제가 있으면 미국에 보내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인도에 보내지만,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으면 러시아(아카뎀고로도크)에 보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아카뎀고로도크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시베리아학파는 학제 간 통합연구 전통으로 유명하다. 이 학파에서는 예컨대 바이칼호를 연구한다면 지질학뿐 아니라 생물학ㆍ사학ㆍ고고학 분야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대표적 학자가 1975년〈자원의 효과적 분배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레오니드 칸토로비치 박사로, 그가 고안해낸 ‘TPC접근법(생산력 분배에 대한 일반 이론)’도 시베리아의 자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분할지에 관한 통섭적 연구의 산물이다.


“시베리아의 볼쇼이”, 노보시비르스크의 오페라발레단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차기 개최지 러시아 소치를 소개한 발레단은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단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도 아닌,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단이었다. 2006년에 발레 예술감독으로 영입된 이고르 젤렌스키는〈백조의 호수〉의 문법과 무대를 파격적으로 혁신했다. 우선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을 동시에 연기하는 여성 무용수 중심의 전개에서 지그프리드 왕자 역을 맡은 남성 무용수에게도 비중을 실어줌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더했다. 또 프리마돈나를 여러 명 등장시켜 각기 개성에 따라 다른 안무를 선보였다. 무대 의상도 꽃부터 헬멧까지 폭넓게 활용하여 기존과는 다른 스타일로 바꾸었고 다양한 첨단기술을 적용하여 생동감 넘치는 무대를 연출했다. 러시아 3대 발레단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발레단이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이라 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혁신의 끈

과학에서 문화로 이어진 노보시비르스크의 혁신 전통은 산업 분야에서도 발전한다. 1912년 제정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횡단철도에 남부 알타이로 연결되는 지선을 추가하기로 결정한다. 알타이 지구가 러시아ㆍ몽골ㆍ중국 3국의 접경 지역이었기에 지선 연결은 곧 국제적 복합 운송 회랑이 형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노보시비르스크(당시 명칭은 ‘노보니콜라옙스크’)는 횡단철도 상에 위치한 어느 도시보다도 발 빠르게 이런 변화에 대응했고, 그 결과 알타이 지선과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연결역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1만 명도 채 되지 않던 도시의 인구가 1915년에는 7만 명을 넘어섰고, 은행도 7곳이 새로 생겨나는 등 시베리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발달한 교통 인프라 덕분에 러시아혁명 이후에도 노보시비르스크는 공업을 중심으로 혁신의 전통을 이어갔다. 1936년에는 세계 최초로 초고속 신형 전투기 ‘I-16’의 생산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는 ‘I-16’을 비롯해 하루 17대의 전투기, 전쟁 기간 동안 총 550편대의 전투기를 생산하여 독일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미국과 핵무기 경쟁이 치열하던 1940년대에는 바로 이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 우라늄을 생산하는 비밀 공장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1958년에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의 핵심 연구소인 핵물리연구소가 만들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노보시비르스크가 이렇듯 혁신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던 것은 사실 시베리아에서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라는 콤플렉스 때문이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콤플렉스를 발전의 자양분으로 승화시킨 노보시비르스크는 요즘도 이 도시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언제나 놀라운 선물을 선사하고 있다.


지지 않는 도시, 현실이 된 전설 – 모스크바


몽골의 등을 타고 러시아의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 장장 9,288㎞의 시베리아횡단철도의 마지막 구간은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약 400㎞ 길이다. 역사상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러시아를 정복한 유일한 국가인 몽골군도 1238년에 바로 이 길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그 도시를 송두리째 불태웠다. 당시 모스크바는 사실 도시라기보다 작은 요새에 불과했고 러시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극히 미미했다.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의 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또한 몽골 덕분이었다.

키예프가 무너지고 3년 후인 1243년 러시아의 수도는 사실상 블라디미르로 옮겨지는데, 이때부터 큰 강과 숲으로 둘러싸여 몽골의 간섭, 남쪽 유목민의 침범, 그리고 공국 간 내전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모스크바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모스크바강은 러시아 남북을 이어주는 교역로로도 각광을 받았다. 이후 1263년에 모스크바는 독립적 공국의 지위를 얻었고, 1318~1322년 모스크바의 공후 다닐이 처음으로 블라디미르 공국의 대공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1328년 이반 칼리타부터는 모스크바의 공후가 대공 지위를 독차지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몽골에 가장 충직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인 대공의 지위는 몽골이 정해줬고, 대공은 러시아에서 조공을 거둬 몽골에 바치는 대리 수금자 역할을 했는데, 몽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지방 공후들의 경쟁에서 가장 돋보인 사람이 바로 모스크바 공후였다. 그 대표 인물이었던 이반 칼리타는 몽골에 바칠 조공을 워낙 잘 걷어서 ‘칼리타’라는 공식 별칭까지 얻었다. ‘칼리타’는 러시아어로 돈주머니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몽골의 등을 타고 러시아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이 모스크바다.


이반 종루의 저주

외국인들에게는 붉은광장의 성 바실리 성당이 모스크바의 랜드마크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제일 높은 건물로 오랫동안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것은 모스크바의 7개 언덕 중 가장 높은 보로비츠키 언덕, 즉 크렘린 안의 사원 광장에 자리 잡은 높이 81m의 이반 종루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모스크바 스카이라인의 최고 꼭짓점은 바로 이 종루가 차지했다(그 이전에는 55m 높이의 우스펜스키 대성당이었다). 탈몽골의 주역 이반 3세를 기리는 이 종루는 그가 죽은 후 3년간의 공사 끝에 이탈리아 건축가 본 프랴진에 의해 1508년 완성되었다. 그때만 해도 높이가 60m였는데, 지금의 높이가 된 것은 1600년, 바로 러시아 왕조가 교체되던 그 시기의 일이다.

시베리아 정벌을 시작한 이반 뇌제가 1584년에 죽자 그의 병약한 아들 표도르가 왕이 되었는데, 사실상 그의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가 섭정을 한다. 그 와중에 차기 왕위 계승자인 표도르의 동생 드미트리를 보리스 고두노프가 죽였다는 의혹이 파다하게 퍼지고, 이후 1598년 표도르가 병사하자 보리스가 직접 즉위한다. 보리스가 왕권을 잡자, 러시아 곳곳에서는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심지어 죽은 드미트리가 곳곳에서 부활한다. 드미트리가 사망한 1591년 이후 로마노프가가 새 왕조로 옹립될 때까지 6명의 가짜 드미트리가 등장한 것이다. 보리스는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이 이반 3세를 계승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이반 종루였다.

이반 3세의 뜻을 살려 모스크바가 전 세계 기독교의 종주국, 즉 ‘제3로마’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무덤 교회의 모양으로 이반 종루가 부속된 교회의 개축을 명령한 것이다. 그 결과 8각형의 본래 종루 위에 실린더형의 드럼과 황금 돔이 덧붙여져 지금의 모습이 되는데(81m), 보리스는 이 드럼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에 의해 이 종루 교회가 1600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새겨 넣었다.

그러나 5년 뒤 보리스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아들 표도르는 즉위한 지 겨우 2개월 만에 가짜 드미트리를 앞세운 반란군에 죽임을 당한다. 종루에 새겨졌던 글귀도 모두 지워진다. 현재 우리가 보는 글귀는 약 100년 뒤 표트르 대제가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 덕분에 이반 종루는 러시아에서 가장 높고 신성한 건물이 되었고 러시아어에는 ‘높은 것보다 더 높은 위대한 이반’이라는 표현이 관용어로 굳어졌다.

이 성스러운 종루가 무너지지 않는 한 러시아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이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지으려는 불경한 시도는 모두 실패할 것이라는 믿음이 민간에 퍼졌고, 실제로 그런 시도들은 계속 무산되었다. 아무튼 모스크바의 랜드마크 건설에 가려진 권력 교체의 역사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비록 모스크바 스카이라인의 최고 꼭짓점 자리는 이제 다른 건축물에 내주었지만, 이반 종루는 여전히 모스크바의 권력 교체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 랜드마크로 굳건히 서 있다.


유럽의 재현, 새로운 러시아 – 상트페테르부르크


위대하고 아름다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사실상 9,288㎞ 대장정이 끝난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여행을 끝내면 사실 러시아의 절반만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정러시아 시대의 위대한 유산이 가득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못 가봤기 때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 이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까지 제정러시아의 역사ㆍ정치ㆍ문화의 중심지였다. 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유럽 10대 관광도시와 세계 20대 관광도시 안에 들어가는 도시이다.

표트르 대제의 유럽식 개혁의 총아로서, 러시아 최초로 시도된 ‘돌로 만든 인공도시’이기도 하다. 유럽 최대의 담수호 라도가의 민물이 네바강을 통해 발트해로 흘러나오는 늪지대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비유컨대 ‘물 위에 뜬 돌배’이다. 늪지대를 채울 돌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선박과 사람들에게 석세를 거두었고 끝내 채우지 못한 물길은 20개의 운하로 남겨두어, 결국 이 도시는 40여개 섬으로 이뤄진 운하도시가 되었다. 이 섬들 위에 겨울궁전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짓고, 이를 중심으로 1~2층 건물을 완만한 피라미드 형태로 도열시키고 그 사이에 방사형의 직선 도로를 냈다.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공도시, ‘북방의 베네치아’가 탄생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행자의 시선을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은 러시아 황제와 귀족들이 살았던 궁전들이다. 이 도시에는 황제의 궁전 10개를 포함하여 246개의 궁전이 있다. 이렇게 많은 궁전 중에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 반드시 들러야 할 3개의 궁전이 있다. 도심에 있는 겨울궁전과 교외에 위치한 예카테리나 궁전, 표트르 궁전이다. 1년의 절반가량이 겨울인 러시아에서는 황제가 정사를 보며 거주하는 본궁을 ‘겨울궁전’이라 부르고, 짧은 여름에 휴가를 보내는 별궁들을 ‘여름궁전’이라 부르는데, 예카테리나 궁전과 표트르 궁전이 바로 여름궁전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건축인 성 이삭 대성당을 살펴보자.


성 이삭 대성당, 늪을 차고 일어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사는 자연과 인간 간의 장대한 투쟁의 역사였다. 이 투쟁을 주도한 것은 도시의 본래 주인 ‘물’이다. 매년 발트해와 네바강의 물이 함께 일으킨 홍수가 도시를 뒤덮곤 했는데, 이 도시에서 홍수의 피해가 가장 크고 지반도 약한 네바 강변에 1818년부터 1858년까지 40년의 공사 끝에 무게 30만 톤, 가로와 세로 각각 111.5m, 97.6m, 높이 101.5m의 교회가 들어섰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늪지대의 약한 지반을 감안한다면 튼튼한 반석 위에 지어진 순위의 세 건물과 그 규모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지반 공사에만 5년, 첫 기둥 올리기까지 9년

4,000㎡에 달하는 성당의 지반에 길이 6m 이상, 직경 26~28㎝의 나무말뚝이 1만 762개가 박혔다. 가을에는 하루에 기껏 5개의 말뚝을, 겨울에는 겨우 2개씩만 박을 수 있다. 그렇게 말뚝을 박는 작업에만 1년을 썼고 지반을 닦는 작업에 12만 5,000명이 매달려 5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것은 성 이삭 대성당 건축사의 서막에 불과했다. 성 이삭 대성당은 현재 112개의 거대한 화강암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기둥들이 모두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든 거대한 돌기둥, 즉 통돌(monolith)들이다.

이 거대한 화강암 통돌들은 지금은 핀란드 땅이 된 발트해 북쪽 연안의 화강암 지대 피탈라크스에서 수작업으로 채석되어 170㎞ 거리의 발트해를 건너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운반된 화강암 기둥은 별도의 장소에서 다시 마지막 마감 작업을 오랫동안 거쳐야 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첫 번째 화강암 기둥을 세우는 작업이 1828년 3월 20일에야 이루어졌다. 화강암 채석 작업이 1819년에 시작되었으니 무려 9년 만에 첫 기둥이 세워진 셈이다. 이렇게 바깥 기둥이 모두 세워진 다음에야 성당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하단 벽과 상단 돔을 받치는 드럼의 토대를 만드는 데 다시 7년이 걸려 1837년에야 64t의 화강암 기둥 회랑을 세우는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43m 높이로 기둥을 끌어올리기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기술이 도입되었다. 즉 레일 트랙과 볼베어링 원리에 의한 이중주철 디스크가 특수 제작된 것이다. 이렇게 112개의 화강암 통돌로 만들어진 열주회랑(列柱回廊)이 완성되었다.

한편 성 이삭 대성당이 세계 건축사에 미친 최고의 기여는 바로 혁신적인 돔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은 세인트 폴 대성당의 삼중구조를 그대로 적용했지만, 세계 최초로 석조가 아닌 금속을 재료로 사용했다. 내부 직경 21.8m의 돔을 받치는 삼중구조물에 강철 490t, 주철 990t, 구리 49t, 청동 30t이 사용되었다. 반면 직경 34m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 무게는 무려 6만 6,000톤에 달한다. 성 이삭 대성당의 돔에는 또 다른 혁신적인 기술이 적용되었는데 바로 진흙 반죽으로 만든 그릇으로 타원형 돔의 뼈대를 채운 것이다. 이는 로마 초기 건축 기술을 되살린 방식으로 10만 개의 이 진흙 그릇들을 통해 단열효과와 공명효과를 동시에 얻고 또 무게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성 이삭 대성당 안의 온기와 아름다운 성가의 울림은 바로 이 건축 기법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성 이삭 대성당 돔의 정점은 뭐니 뭐니 해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돔의 외피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돋보이고 기억에 오래 남는 풍경은 계절에 관계없이 늘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성 이삭 대성당의 황금돔이다. 여기에도 놀라운 기술적 혁신이 적용되었으니, 바로 수은 도금 기술이다. 동판 위에 수은과 금의 액체 합성물을 입히고 가열하면, 수은은 증발하고 금은 매우 안정적인 빛깔로 착색된다. 성 이삭 대성당 건설에서는 동판 하나를 만들 때마다 이 작업을 세 차례씩 반복했고 책임자가 합격 마크를 찍어야만 완료되었다. 여기에만 100㎏의 순금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수은 중독의 위험이 있었기에 작업자는 반드시 바람을 등지고 유리덮개를 쓴 채 일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작업으로 약 6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년 만에 완공된 위대한 혁신의 산물

늪지대 위에 탄생한 위대한 혁신의 산물인 성 이삭 대성당에는 이렇듯 개혁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본질이 다양한 장면으로 투영되어 있다. 유럽을 앞서가려는 러시아 황실의 의지, 그 속에서 탄생한 화려한 문화와 혁신, 그리고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희생들…. 우리가 위대한 문화유산을 일부러 찾아가서 보고 음미하는 것도 그 역사와 문화를 눈앞에서 생생히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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