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

힘찬북스 / 2020년 9월 / 236쪽 / 14,800원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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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

손문숙 지음 / 윤혜옥 사진

책소개

육아와 직장을 병행해야 하는 한국 사회의 여자들에게는 독서를 통한 자아 성찰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과의 긍정적인 소통이 더욱 중요하다. 여자들에게 독서 모임을 통한 ‘함께 책 읽기’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어른의 책 읽기는 인생의 경험만큼 배경 지식이 생겨서 청소년기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을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독서 모임에서 제2의 인생을 만난 저자의 독서 기록이다.

요약본 본문

인간_ 태어나서 사는 동안의 예의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데미안』(헤르만 헤세/민음사/1997)

내 첫사랑은 데미안이었다.

중학교 때 문학반에서 『데미안』을 처음 읽었다. 중학생 때는 단순히 스토리 위주로 내용을 이해했다면 중년이 되어 독서 모임에서 다시 읽었을 때는 인생의 나이테만큼 이해력도 깊어져 문장마다 곱씹게 되었다. 같이 토론한 오십대 여교사가 ‘중학교 때 데미안이 첫사랑이었다’라고 했을 때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어렴풋이 ‘내게도 데미안처럼 생각이 깊고 어른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청소년, 청년뿐만 아니라 중년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에 이르는 인생의 시기마다 데미안을 비롯해 여러 인생의 스승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자아를 찾게 되는 과정이 아름답고 통찰력 있는 헤세의 문장에 담겼다. 싱클레어가 인생의 고비마다 얻은 통찰이 우리들의 인생과도 맞닿아있어 이 소설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권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는 주제는 성인들에게도 계속되는 인생의 질문이 아닐까.

고전은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변기다. 하지만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에 현대인들도 공감할 수 있다. 헤세는 데미안의 말을 통해 ‘어디서나 연합과 패거리 짓기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고, 그러나 그 어디서도 자유와 사랑은 없다’라고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을 비판했다.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개인들이 공동체로 도피하면서 패거리 짓기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것이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놓을 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 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신사들은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p.182)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이나 21세기인 지금이나 불안한 개인들이 패거리 짓는 혼돈의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헤세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상은 무엇일까? 헤세는 데미안의 입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혼돈기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면서도 자신을 알고자 노력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개인들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p.9)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라고 헤세는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게 허물을 벗고 알의 껍데기를 부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양인이 되는 법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페터 비에리/은행나무/2018)

교양이 있는 사람이란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앎을 얻기가 어째서 어려운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 p.31

“이 책을 읽으면 나도 교양인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읽어봤어요.”

독서 토론 모임에 나온 어느 회원의 말에 우리 모두 까르르 웃었다. 책이 얇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표지도 예뻐서 선택했는데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소감을 먼저 나누고 한 시간 동안 돌아가며 회원들이 책을 낭독했다. 눈으로만 읽다가 낭독을 하니 시각, 청각을 동시에 활용하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회원들의 아름답고 개성 있는 목소리에 다시금 놀랐다. 그녀들은 새로운 독서 토론 방식으로 낭독을 한 경험이 신세계라며 좋아했다.

어느 회원은 “평소 교양인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라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다른 회원은 “철학책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얇고 이해하기 쉬워서 좋아요. 독서 토론도 좋지만 낭독을 하니 색다른 경험이라 더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독서 모임 회원들의 말처럼 교양인이 되고 싶은 것은 지식을 갈구하는 인간들의 보편적 의지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교양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어느 회원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페터 비에리는 “교육은 타인이 나에게 해줄 수 있지만, 교양은 오직 혼자 힘으로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p.9)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남이 정해주는 교육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평생 남의 기준에 맞춰 공부를 좇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 교양을 쌓는 방법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서 하는 공부는 청소년기의 공부와는 달라야 한다.

“교육은 항상 어떤 쓰임새를 목적으로 합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하우를 습득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사회적 인정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그런데 교양은 다릅니다. 물론 교양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어떤 능력이 따라오기도 하고 유용함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는 교양의 결정적 특성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교양은 유용성을 포함하지 않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p.38)

페터 비에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희생 당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진짜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중에 그리 확실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p.15)와 같은 질문의 과정을 통해서 얻은 이차적 지식의 중요성도 이야기한다. 이런 질문들을 쉬지 않고 던질 때 우리는 교양인이 될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교묘한 강압이나 세뇌, 또는 사이비 종교로부터 자신을 굳건히 보호할 수 있다.”(p.17)라고 말한다.

“지식은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으로 무작정 홀릴 위험이 적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중에 그리 확실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꼼꼼히 장부를 검사하듯이 우리의 앎과 이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어낸 지식을 이차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p.14~15)

교양인이 되는 길은 혼자 힘으로 깨우쳐야 하는 힘든 여정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 자신부터 아는 것이다. 나 자신을 먼저 알아야 세계를 대면하는 방식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페터 비에리의 안내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교양인의 고갱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_ B와 D 사이, 그 어디쯤

그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민음사/1999)

1911년 독일 출신 작가 루이제 린저의 대표 장편소설 『삶의 한가운데』는 여주인공 니나를 평생 짝사랑하는 의사 슈타인의 일기 및 편지 그리고 니나와 언니와의 짧은 며칠 간의 만남과 대화들로 구성된 소설로, 나치 체제하의 암울한 시대를 관통하며 생을 치열하게 살아간 니나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되자 전후 독일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니나 신드롬’이 생겨났다. 루이제 린저가 니나를 통해서 전후 독일의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참된 삶을 추구한 여성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니나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작 중에서 니나는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던 나치당의 득세와 유대인 탄압, 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을 겪었다. 따라서 전후 세대의 사람들은 반나치즘 투쟁과 휴머니즘적 태도로 생을 살아간 니나의 매력에 빠진 것이리라!

반나치즘 활동과 의대 입학, 안락사 논쟁, 자살 기도, 사랑하는 남자와의 만남, 슈타인과의 정신적 교류 등을 통해 생에 순응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함에 있어 위험에 처할지라도 피하지 않은 니나의 삶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심리학 시간에 벌어진 안락사 논쟁에서 불치의 (정신)병자들에 대한 안락사 허용에 강하게 반대했다. 국가의 이념에 반대하는 자들 역시 국가 및 사회에 해가 되므로 제거할 수 있다는 나치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이라는 미명 하에 한번 죽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옳든 그르든 상관 않고 계속 죽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살인자들만 남겠지요. 나는 이에 반대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살인을 허가하고 그 살인에 불가피함과 선이라는 딱지까지 부여하는 국가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p.199)

자신과는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니나를 사랑했던 슈타인은 나치당에 끌려다닌 나약한 독일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니나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구십 퍼센트 주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십 퍼센트 말입니다. 거의 다 주어진 셈이지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십 퍼센트가 빠져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p.76)

슈타인이 가지지 못한 십 퍼센트는 니나가 말한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것은 몇백 번의 작은 충격이 아닌 단 한 번의 큰 충격’, 즉 부당함에 싸우는 지식인의 행동이다. 니나가 나치들에 의해 내란 방조조죄로 감옥에 갇혔듯이 작가 루이제 린저도 반나치즘 투쟁으로 국가 반역죄 및 국가력 파괴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니나와 린저는 “제멋대로 살고 있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렸어요. 저는 남들을 따라서 사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살고 있던”(p.351)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몇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일탈이란 편한 점도 있으니까.”(p.131~132)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p.78) 라는 말로 니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아들 중의 하나에 우리를 고정시키지 말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전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생을 살아감에 있어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거침없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도 주고 있다. 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적으로 살아간 그녀의 삶의 방식은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도 동경하는 모습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뿌리가 자리잡히기까지 많은 국민의 희생이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소중한 경험이 있었기에 현재의 국민도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행동, 즉 ‘커다란 충격’으로서의 촛불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내지 못한 현직 대통령을 헌정 역사상 최초로 탄핵할 수 있었다. 촛불 혁명은 우리의 마음속에 민주주의를 국민의 힘으로 지켜냈다는 자부심으로 남았다. 촛불혁명을 통해 일어난 국민의 모습은 진실을 추구함에 있어서 거침없이 행동하는 니나의 모습과 닮았다.

감염병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성실성

페스트(알베르 카뮈/민음사/2011)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갑자기 들이닥친 ‘페스트’라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무서운 전염병이 휩쓴 폐쇄된 도시에서 재앙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모습이 묘사된다. 인물들은 재앙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태도를 드러내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잔혹한 현실과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정한 반항임을 이야기한다.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버린 오랑시에서 의사 리유가 목격한 환자들은 “멍울과 반점과 헛소리가 나올 정도의 고열과 마흔여덟 시간 이내의 임종”(p.73)으로 죽어갔다. 전면 폐쇄된 오랑시에서 시민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어버렸다. 의사로부터 유행성 열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지면 바로 구급차에 실려가 격리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시에서는 죽은 환자를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바로 매장해버렸다.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모든 것은 효율성을 위해 희생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뚜렷하게 느꼈던 감정은 “생이별과 귀양살이의 감정”, “공포와 반항”(p.221)이었다.

오랑시의 관리들은 상상력이 부족하여 페스트에 대항할 확신도 없었고 효과적으로 싸울만한 능력도 없었다. 결국 뜻 있는 일부 시민들이 당국에만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자원보건대를 조직해서 다른 시민들이 페스트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왔다. 의사 리유는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성실성이야말로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역시 이것만은 말해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p.216)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와 코로나19가 지속되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은 어떻게 다를까? 지금의 우리나라는 질병관리본부의 지휘 아래 선진적인 보건의료시스템과 시민들의 개인위생 수칙의 철저한 준수로 감염병을 잘 통제하고 있다. 선진국들조차 부러워하는 코로나19와 관련한 소중한 방역 성과는 자기가 맡은 직분을 성실하게 완수하고 있는 전문가 관료와 방역체계를 수행하는 공무원들, 지자체, 의료진, 시민들 덕분이다.

카뮈가 1947년 『페스트』를 출간하게 된 계기는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까뮈는 전쟁 당시 자신이 겪은 공포와 귀양살이의 분위기를 페스트라는 질병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다. 한가하고 습관에 젖은 삶 속으로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전쟁은 질병이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것으로 생각했다. 『페스트』를 통해 까뮈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언제든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이나 질병 같은 재앙을 겪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이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p.35)

인간이 페스트나 삶과의 경기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는 경험과 기억이었다. - 알베르 카뮈

여성_ 깨어나고 있는 힘

여성들이여,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라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솔/2019)

『며느리 사표』(영주, 사이행성, 2018)라는 재미있는 책이 있다. 9남매 장남인 시아버지와 3남매 장남인 남편이 일군 시월드에서 23년간 살다가 시부모님에게 며느리 사표를 내고 남편에게는 이혼을 선언한 50대 여성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며느리, 아내, 엄마가 아닌 자신만의 꿈을 찾기 위해 독립하기로 결심한다.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글을 쓰고 낮잠 자고 책 읽고 영화를 봤다고 한다. 명절을 앞두고 며느리 사표라고 쓴 봉투를 내밀었을 때 화를 낼 줄 알았던 시부모님은 오히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아무런 부담 없이 편한 마음이 들 때 온다면 좋고, 안 와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때 저자는 깨달았다고 한다. ‘그동안 나를 가둔 건 가부장제나 시어머니, 남편이 아니라 나 스스로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만의 꿈을 찾기 위해 며느리 사표를 내고 자기만의 공간을 얻어 책을 썼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연상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페미니스트 평론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지적 자유를 갖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실제(reality)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일 년에 오백 파운드’가 필요하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의존하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단지 이백 년 동안만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가난하였지요. 여성들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더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은 시를 쓸 쥐뿔만한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돈과 자신만의 방을 그렇게도 강조한 이유이지요.” (p.149)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하려면 직장일과 집안일로 꽉 들어찬 시간 중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은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집안일은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글을 쓰는 시간은 오롯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만들어낸다는 게 힘들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이 행복해야 가정이나 직장에서 내가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더욱 소중하다.

공간과 시간만큼이나 꼭 필요한 것은 ‘고정 수입’이다. ‘일 년에 오백 파운드’가 요즘의 경제 가치로 환산했을 때 얼마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입이면 되지 않을까. 나는 28년간 교육청 소속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풍족한 연봉은 아니지만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벌고 있다. 내가 가족들 눈치를 덜 보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내게 안정적인 수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쓰라림을 기억해보면 고정된 수입이 가져오는 엄청난 기질의 변화는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강제력으로도 나에게서 내 오백 파운드를 빼앗아갈 수는 없지요. 음식과 집과 옷은 이제 영원히 내 것이지요.” (p.56)

버지니아 울프는 ‘몇 세기 동안의 철저한 훈련에 의해 얻어진 것이며 아무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는 여성의 창조력’과 같은 여성 고유의 가치를 인식하고 여성처럼 글을 쓰고, 여성처럼 살고, 여성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 동안 재산을 소유할 수 없어 늘 가난했고 드러내어 글조차 쓸 수 없었지만,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여성 선배들의 전통 위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당부했던 것처럼 여성들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써 내려갈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자신의 글을 쓰면서 인간들과의 관계로 인해 상처받지 말자. 글 쓰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이 때로는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 각자가 연 오백 파운드와 자신의 방을 가진다면, 우리가 자유의 습관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써 내려가는 용기를 가진다면, 우리가 공동의 응접실에서 조금은 빠져나와 인간을 늘 서로서로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실재와의 관계에서 보게 되고 또한 하늘과 나무를 혹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그 자체로서 보게 된다면 (…) 다만 우리가 홀로 나아가고 남자와 여자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실재의 세계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직면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 기회는 올 것이며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그렇게 자주 내던졌던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p.157)

책을 읽으며 몽상에 잠기고 길모퉁이를 어슬렁거리고 사색의 낚싯줄이 강물 깊이 드리워지게 하길 바랍니다. - 버지니아 울프

사회_ 타인에게 공감하는 우리

살아남아야 할 이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청아출판사/2017)

유태인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자신이 겪었던 참혹한 경험을 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가는 1984년 판 서문에서 이 책의 성공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목 그 자체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으로 기대되는 이 책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에게 이것이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곳에 오기 전 누렸던 평범한 삶을 철저히 부정당한 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굶주림과 끝없는 노동,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모욕감,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심 등  텍스트로 묘사된 수용소의 상황을 우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까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수용소에서 자살을 시도한 수감자들이 한 말이다. 작가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p.138)라고 말한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삶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삶을 버텨내기도 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를 폭넓게 감싸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140)

우리는 이 책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실존주의의 주제를 찾을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인간 이하의 모욕을 견디며 살아남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은 그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작가 개인의 경험이지만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무감각해지는지, 고통 속에서도 어떤 이들은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켜나가는지 보여준 값진 기록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이 망치처럼 내 가슴을 두드린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다. 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면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인간이기도 하다. 실존적 삶에서는 어느 누구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없고 자기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내 인생이라는 배의 키는 내가 가지고 있다. 암흑 같은 밤바다 저 너머에 빛나는 북극성을 찾아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일 뿐이다.

즉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알았다. - 빅터 프랭클

가장 무서운 폭력, 모멸감

『모멸감』(김찬호/문학과지성사/2014)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은 사회학자 김찬호가 ‘모멸감’을 키워드 삼아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조명하면서 한국인의 삶과 마음을 추적한 책이다. 모멸감은 ‘모멸스러운 느낌’을 의미하는데, 이때 ‘모멸’은 ‘업신여기고 얕잡아봄’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모멸감은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으로, 이 단어는 비단 뉴스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등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을 기준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귀천을 따지는 점을 지적한다. 학력, 빈부, 외모, 지위 등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 중에는 먹고 자는 돈은 줄여도 겉으로 드러나는 옷이나 가방에 지나치게 돈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아파트 경비원 10명 중 3명(35.1%)은 주민들로부터 폭언을 들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속물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나이 들고 힘없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또 다른 기사를 통해 갑질하는 입주민들이 자기들이 경비원들의 봉급을 주고 있고, 용역업체 변경으로 계약 해지도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경비원들에게 부당한 업무 지시와 폭언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나라하고 직접적인 형태의 모욕보다도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우리 일상 속의 은근한 모욕이다. 대개 무시나 경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p.66~67)

갑질하는 아파트 입주자들은 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파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놓고 무시한다. 하지만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그들은 평생 자식들 키우느라 정작 자신들의 노후 대책은 하지 못해 아파트 경비원과 환경미화원이 된 우리 아버지들, 어머니들이다.

“우리의 감정은 복잡한 응어리로 꼬여가기 쉽다. ‘루저’ ‘찌질이’ ‘잉여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인다. 상승 이동에 대한 욕망과 비교의식이 강한데 자신의 처지는 점점 뒤처지는 듯하기에, 그 간극이 자괴감과 열패감으로 드러난다. (…) 불합리한 갑을관계가 생존을 옥죄고 자존심을 위협하는 가운데 피해의식과 원한 감정이 깊어진다. 그래서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받고,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사람들을 억누른다. 최근에 문제가 되는 감정노동이나 ‘디스’(disrespect의 줄임말로서, 상대방을 적나라하게 깎아내리는 언사를 가리킨다)는 그러한 병리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p.40~41)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그동안의 무딘 감수성으로 불거진 사회 문제들이 하나둘씩 터져 나오고 있다. 성인지, 인권, 정신적·언어적 폭력과 같은 무형의 폭력 등에 대한 감수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감수성은 민주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자질들이다.

일상에서의 폭력인 모멸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시하는 표정이나 비웃는 눈빛, 퉁명스런 말투로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크고 작은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일상에서의 은근한 모멸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주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경비원 최 씨의 자살이나 학교 폭력으로 인한 학생들의 자살 등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정신적·언어적 폭력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심적 고통을 주는지 안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해나 살인 등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민감하지만, 정신적·언어적 폭력과 같은 무형의 폭력에 대해서는 무딘 것이 현실이다. 타인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모멸감을 쉽게 느끼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와 시민들의 성숙함이 필요하다.

감정은 이성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 김찬호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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