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 기행

지리산 암자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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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암자 기행

김종길 지음
미래의창

책소개

저자가 10년 넘게 지리산 암자 50여 곳을 모두 탐방하여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있는 23곳의 암자를 배경으로 ‘참나’를 구하는 자유의 길을 모색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지리산의 역사가 우리네 삶의 역사임을 자주 상기시킨다.

요약본 본문

지리산 암자 기행

김종길 지음
미래의창 / 2016년 7월 / 304쪽 / 15,000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 백장암

동안거 첫날, 산중 암자는 부산스럽다. 대숲에서 스님들이 한 명씩 나온다. 그 모습이 마치 무대로 등장하는 배우 같다. 대숲 뒤에 있는 선방에서 나온 스님들이 종무소를 에워쌌다. 선방의 반장 격인 입승으로 보이는 스님이 진두지휘하고 나머지 스님들은 말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깊은 산중의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막는 일, 숭숭 뚫려 있는 건물 틈새로 드나드는 삭풍을 막기 위해 비닐로 건물 외벽을 두르는 작업이 시작됐다. 동안거에 참여한 스님은 모두 아홉이었다.

“스님, 어디서 오셨습니까?”
“법주사에서 왔습니다.”
소탈한 모습의 스님은 대답도 시원시원하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기요.”
포대화상같이 넉살 좋게 생긴 스님이 느닷없이 검지로 허공을 찔렀다. 법주사에서 왔다는 스님이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거들었다.

“스님,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은데요.”
“여기요.”
포대화상스님이 이번에는 땅을 가리켰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불유시의 정체: 지리산에 눈이 날린다. 암자 뜨락을 거닐고 있는데, 멀리 벼랑 끝으로 작은 건물 같은 것이 숲 사이로 언뜻 보였다. 무엇인데 저리 위태로운 곳에 있을까?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엔 해우소인가 했는데 바로 옆에 해우소는 따로 있었다.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이곳의 정체는 대체 뭘까?

슬레이트 지붕에 두 짝의 문이 달린 지극히 간소한 건물. 색색 연꽃을 그리고, 기름한 널빤지에 세로로 내려쓴 ‘다불유시(多弗留是)’라는 네 자가 눈에 띈다. 문을 열어볼까 하다가 무언가 영적인 곳이지 않을까 싶어 머뭇거리기를 한참, 종무소로 다시 나왔다. 마침 공양주 보살이 떡이라도 좀 들지 않겠냐고 해서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궁금하시죠? 그거요. 이곳 백장암의 명물이랍니다.”
“아무래도 알 수가 없네요.”
공양주 보살이 잠시 뜸을 들인다.
“해우소입니다.”
“예? 아…… 그렇군요.”
허를 찔렸다. 바로 옆에 해우소가 있어 설마 해우소일까 했는데.

“스님들의 재치가 놀랍지요?”
“근데 해우소에 왜 ‘다불유시’라고 적었을까요?”
“아이 참, 아직 감을 못 잡으셨나? 영어로 해우소를 ‘더블유시(WC)’라 하잖아요. 그 ‘더블유시’를 한자로 표현하니 ‘다불유시’가 된 게지요. 자연스럽게 의미도 연결시킨 거구요. 스님이니 당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이름을 지었겠죠.”

나도 모르게 이마를 쳤다. 다시 가서 확인해보니 역시 해우소였다. 나무로 공들여 짠 덮개로 변기를 막아두었다. 덮개를 여니 아래로 바로 낭떠러지다. 이곳에서 볼일을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구나. 더군다나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경치가 기가 막히다. 지리산 설경이 나뭇가지 사이로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백장청규: 지리산이라지만 실상사는 평지에 있고 산내암자인 백장암은 산 높이 아스라이 걸려 있다. 진리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실상(實相)’이라면, ‘백장(百丈)’은 그 진리를 깨친 사람, 참모습을 본 이를 이르는 것이리라.

당나라의 유명한 선승 마조 도일의 선맥을 잇는 수제자로는 서당 지장, 백장 회해, 남전 보원을 들 수 있다. 그중 큰형 격인 서당의 제자들 중에는 신라 승려인 도의, 홍척, 혜철이 있다. 이 세 사람이 신라로 돌아와 각기 구산선문(신라 말 전국에 들어선 선종의 큰 사찰 아홉)을 열었는데, 그중 홍척이 지리산에 연 것이 실상사다.

결국 지리산 실상사는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의 선풍을, 백장암은 그 이름대로 백장의 선풍을 이었으니, 둘은 마조에게서 비롯된 한 몸이나 다름없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

유명한 ‘백장청규’의 노동정신이다. 백장스님은 기존의 율원과는 다른 선원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새로이 선종의 규율을 엄격히 세웠다. 그 결과물이 최초의 선원 규칙인 ‘백장청규’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청규는 예부터 사찰 어디서든 받들어 행하지 않는 곳이 없다.

연로한 나이에도 계속 일하는 백장을 본 제자들이 하루는 일을 못하도록 연장을 감췄다. 그러자 백장은 그날 끼니를 걸렀다. 또 다른 날에는 백장에게 스님들이 선의 강설을 청하자 백장은 “밭에서 일하고 오너라. 그 뒤에 선을 가르쳐주마.”라고 했다. 일을 끝낸 뒤 스님들이 약속을 재촉하자 백장은 양손을 펴 보일 뿐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백장의 대설법이었던 것이다.

선 생활의 기본은 ‘행위에 의해 배운다’는 것이다. 즉, 밥 짓고 나무하고 밭 갈고 씨 뿌리고 탁발하는 것 등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행위가 모두 천하지 않고 신성하다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선승이라고 하면 세상을 잊어버린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승은 어깨에 힘주고, 엄숙하고, 얼굴빛이 창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쾌활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비천한 일도 자진해서 하는 생활인이다. 선은 심원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생활인 것이다.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일정 기간 은둔 생활을 보내고 나면 세상으로 나오는 위대한 선승들이 있다. 부처 있는 곳에 머물지 않고, 부처 없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붓다는 어땠을까.

나도 밭을 간다: 마가다국의 에카사라라는 마을에서 붓다가 하루하루 탁발에 의지하여 법을 설하고 있었다. 어느 날 탁발을 나간 곳이 바라문의 집이었다. 바라문은 자신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직접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으니 당신도 스스로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자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붓다에게 날을 세워 말했다.

이에 붓다는 나도 밭을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 말에 바라문은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그때 붓다는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이요, 내 보습은 지혜요, 나날이 악업을 제어하는 것은 김매기요, 소를 모는 것은 정진이요, 그 수확이 감로의 열매이니 이런 것이 자신의 농사”라고 말했다. 농사꾼이 땅을 갈아 농사를 짓듯이 붓다 또한 인간 정신을 계발하는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을 “나도 밭을 간다”라고 했던 것이다.

해 저무는 하늘가로 아스라이 구름이 깔렸다. 《화엄경》에 “삶이란 한 조각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던가. 설국의 정적을 새 한 마리가 깨뜨린다. 파적. 무상이다.

* 옛 지리산 유람록에 기록된 백장암 – 실상사의 산내 암자인 백장암은 수청산(772미터) 중턱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장사로 기록되어 있고, “수청산에 있다”고 단 한 줄로만 언급되어 있다. 1468년 실상사가 화재로 폐허가 되자 1679년까지 백장암이 중심 사찰로 승격되면서 백장사가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지리산을 유람한 이들의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대개 백장암(당시 백장사)에서 투숙을 하고 지리산을 유람했다.

양대박은 1565년 가을에 백장사에서 투숙하고 천왕봉에 올랐다. 1586년 9월 3일 다시 백장사를 찾아 하룻밤을 묵었다(). 유몽인은 1611년 3월 29일 백장사에서 일박을 했다(). 이들이 대개 운봉현에서 인월역을 거쳐 백장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지리산을 유람했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석등,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가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기존 석탑과는 다른 ‘이형 석탑’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탑 전체를 두른 조각들이 장엄하고 섬세하여 바로 뒤에 있는 정교하고 단아한 석등과 조화를 이룬다.

백장 회해는 당나라의 선승이다. 백장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나 이름은 회해다. 초조 달마대사에서 육조 혜능, 남악 회양, 마조 도일에 이어 제9대 도사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조망하는 고승들의 수행처, 사성암

섬진강을 건너자 평지에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산이다. 포장길과 비포장 길을 번갈아 내어주는 직각에 가까운 산길은 여전히 험했지만 발 아래로 흐르는 섬진강은 언제 봐도 푸근했다.

2014년 8월 28일, 사성암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1호로 지정됐다. 그래서일까. 진입로를 새로 닦는 중인지 여기저기 벌건 생채기를 드러낸 채 공사가 한창이다. 차라리 진창길일망정 두려움을 떨쳐내고 구도의 마음으로 오르던 아슬아슬했던 옛길이 그립다. 누군가는 그랬겠지. 제아무리 경치가 빼어나도 오를 수 없는 것도 문제라고. 그러나 너도나도 쉬 올라 경외감을 잃어버리고 그 경치마저 오염되고 파괴된다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오산: 오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성암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드나 대신 암자가 자리한 오산에 대한 기록은 더러 볼 수 있다.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의 문집에는 “오산 정상에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ㆍ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했던 곳”이라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산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산 정상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중 도선이 예전에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를 그렸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1800년 구례 향교에서 발간한 《봉성지》에는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예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로 보아 예부터 오산은 고승들이 참선했던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산 꼭대기에 아스라이 걸려 있는 암자는 네 명의 성인이 났다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효, 의상, 도선, 진각이 바로 그 고승들이다. 의상스님이 창건하거나 주석한 절은 하나같이 탁 트인 곳이라 이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원효스님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 데선 의문이 생긴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인의 반열에 원효스님이 빠진다면 그 또한 구색이 맞지 않을 터. 절의 창건 시기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결국 의상스님과 원효스님은 사성암과 관련이 없는 인물로,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암자에 창조의 여백과 상상의 공간은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아 시답잖은 시비야 잠시 접어둬야겠다.

네 분의 고승 중 진각국사 혜심은 이곳에서의 족적이 뚜렷하다. 진각국사는 어머니가 돌아간 후 조계산에 들어가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이곳 오산에 머물면서 한 바위 위에 앉아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매일 오경(새벽 3~5시)만 되면 스님의 게송 읊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려 마을 사람들이 아침이 된 줄 알았다고 한다.

허공의 꽃: 벼랑을 오른다. 수어 번 다녀갔지만 높은 벼랑에 아득히 걸려 있는 약사전의 풍광은 여전히 황홀하다. 약사전 전각이 세워지기 전 벼랑에 그대로 새겨진 마애불을 본 적이 있었다. 원효스님이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면 선이 사라져 본래의 바위가 되고, 빛이 사라지면 선 윤곽이 또렷이 살아나 부처의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애불에 보호각(약사전)이 지어진다는 말에 걱정이 앞서 몇 번을 일부러 찾았다. 다행히 새로 지은 전각은 주위 산세와 잘 어울렸다.

벼랑 곳곳에는 한 뼘 정도의 공간들이 있다. 이 좁은 공간들에 겨우 건물 서너 채가 각기 들어앉았는데, 그 자리매김한 모습이 참으로 오묘하다. 벼랑 곳곳에 걸쳐 있는 높다란 바위는 수도하기에 맞춤인 좌선대가 되고, 벼랑 사이에 삿갓배미(삿갓처럼 생긴 논 하나하나의 구역)처럼 들어앉은 좁은 공간들은 암자의 건물들이 들어설 수 있는 맞춤한 공간이 된다.

법당을 오르려면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반대편 약사전에서 보면 돌 속으로 사람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침 스님 한 분이 내려오는데 꼭 돌 속에서 나온 선인 같다. 스님이 공중에 떠 있는 누각 위를 걷는다. 벼랑 끝에서 길이 끊겼는데 스님은 무심코 내딛는다. 길이 끊긴 것인가. 허공이 잘린 것인가. 벼랑 끝으로 한 발 내디딜 용기가 없다면 아예 허공 밖으로 내디딜 일이다.

층계를 올랐다. 바위 벼랑에 한 떨기 꽃이 피었다. 허공의 꽃. 어디서 날아와서 하필 벼랑에 피었단 말인가. 천 길 벼랑 끝 허공에 핀 꽃. 오고감도 없이 피어난 것이니 꽃도 그 무엇도 아닌 것.

“중생이 생멸이 없는 데서 헛되이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성품에는 본래 생멸이 없으니 생사와 열반이 없는 것이요,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꽃의 피고 짐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생사를 본다는 것은 허공에 핀 꽃을 보는 것이고 열반을 본다는 것은 허공에 지는 꽃을 봤다는 것인데, 본래 피어날 것도 질 것도 없는 꽃인데 무엇을 따진단 말인가.

결국 ‘허공의 꽃’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있지도 않은 허공의 꽃을 볼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시비를 따진들 무엇할까. 모든 법은 공하니 색즉시공이요, 공 자체에서 인연으로 온갖 모습이 드러나니 공즉시색이다. 오로지 법의 진실을 알아 색에도 걸리지 않고 공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삶을 살 뿐.

벼랑 틈에 자리한 산신각 좌우엔 도선굴과 관음바위가 있다. 겨우 한 사람 앉을 만한 작은 굴에 도선국사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럽지만 오른편 관음바위는 사람 얼굴, 그것도 부처의 얼굴을 쏙 빼닮아 보는 이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다. 산신각 앞으로는 돌담을 쌓아 경계를 이루었다. 돌담 너머로는 천 길 낭떠러지다. 승과 속을 이처럼 극적으로 구분한 곳도 없으리라. 옛 고승들은 발 아래로 펼쳐지는 사바세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암자 뒤편으로 우뚝 솟은 절벽을 돌아 오산 정상에 올랐다.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좌선대, 우선대, 낙조대 등 기묘한 바위들의 12비경이 펼쳐진다. 오산은 해발 530.8미터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구례 들판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굳건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노고단, 노고단에서 옥가락지가 흘러내린 삼남의 명당 오미리 운조루까지 사방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벼랑: 그런데 왜 이런 높은 벼랑에 암자를 지었을까. 불가에서 도를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깨치고 난 후 수행을 계속하는 것을 ‘점수’라고 한다. 단박에 깨쳐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 ‘돈오돈수’라면, 깨치고 난 뒤에도 중생의 습기를 없애는 등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관점이 ‘돈오점수’다.

오산은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지만 넉넉하다. 너른 구례 들판과 넉넉한 지리산, 어머니 젖줄 같은 섬진강이 있어 포용력이 드넓다. 비록 절벽에 들어선 암자지만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충분히 심중을 너그럽게 한다. 사방이 탁 트여 있으니 어느 한 곳 막힘이 없고 저 멀리 풍경까지 속속들이 들어온다.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한다는 말이겠다.

도를 이룬 선승들이 이처럼 툭 터진 곳을 수행처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 도를 깨치기 전까지는 한 지점만을 응시한 채 자신을 들여다보지만, 깨치고 난 뒤에는 자신을 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과정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를 불가에선 ‘오도(불도의 진리를 깨달음)’와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닦는 수행법)’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이기도 하다.

이 높은 곳에서 진리를 깨치고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되려고 정진하는 동시에 저 아래 사바세계의 고해에서 헤매는 일체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보살의 일념을 되새겼을 것이다. 이렇게 확 트인 곳으로 여수 향일암, 낙산사 홍련암, 지리산 금대암, 남해 보리암 등을 들 수 있다.

벼랑 사이로 숨은 해를 쫓아 밖으로 나왔다. 강 건너 산 능선에 반쯤 걸려 있던 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빛 어스름 속에서 스님 한 분이 붉은 기사(승려가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를 입고 높다란 벼랑을 오른다. 잠시 후 벼랑을 빠져나온 염불 소리가 사방 허공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사성암 미스터리 – 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사성암은 오산 정상 부근의 깎아지른 암벽에 지은 암자로, 원래 오산암이라 불렸다. 오산은 바위가 거북이(자라) 등껍질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사성암은 연기조사가 544년(신라 진흥왕 5)에 화엄사를 창건한 후 지었다고 하나, 이를 그대로 믿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화엄사사적》과 《구례속지》를 보면 화엄사는 54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흥왕 당시 구례는 백제의 땅이었고 화엄사의 석조물들이 대부분 8~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이런 기록을 믿기는 어렵다.

게다가 1979년에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 발문에는 연기조사가 754년(신라 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사에서 《신라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해 이듬해 2월에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화엄사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성암도 연기조사가 지었다면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물론 이렇게 볼 때 그 이전에 살았던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사성암에서 주석했다는 것은 후대에 오산암이 사성암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덧붙여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연기조사의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인도의 승려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건 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에 소속된 승려였다는 사실이다. 연기조사의 흔적은 지리산 일대에서만 화엄사를 비롯해 대원사, 연곡사, 법계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약사전 암벽에는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음각으로 생긴 이 마애여래입상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밝혀지면서 이 암자가 언제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개령암지

달을 잡아당긴 곳 인월에서 달의 궁전 달궁으로 간다. 달궁 마을은 도로가 뚫리기 전만 해도 첩첩산중의 긴 협곡에 있었다. 진한과 변한에 쫓긴 마한의 한 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서북능선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아득하다. 황 장군과 정 장군이 쌓은 수비성은 산속에 여전히 굳건한데 아득한 옛날 왕궁 터는 시멘트로 발라져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철이면 엄청난 피서 인파와 가을 단풍객들이 들이닥치는 곳, 이곳에서 옛 왕궁의 전설을 기억하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리산 서북능선 정령치: 지리산에서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은 서산대사는 1546년 가을 지리산을 떠나 오대산과 금강산을 한동안 떠돌아다니다, 1558년 처음 발심했던 지리산을 다시 찾는다. 내은적암에서 3년을 지내다, 이내 황령을 지나 능인암, 칠불암 등 여러 암자에서 다시 3년을 지냈다고 에 적고 있다.

산은 혼돈의 뼈요, 바다는 혼돈의 피다.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지리산이다.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이 반야봉이다. 그 봉우리 좌우에는 황령과 정령이라는 두 고개가 있다. 옛날 한나라 소제(기원전 87~74) 즉위 3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리를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 황, 정의 두 장수를 시켜 공사를 감독했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고개 이름을 짓고, 72년 동안 도성을 보호했다. 그 뒤 신라 진지왕 원년에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서 황령암이라 했다.

서산대사의 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에서 서산대사는 ‘마한도성설’에 따라 지리산 개산의 역사를 적으며 ‘정령’에 대해 이야기한다. 72년 동안 존재했던 옛 마한도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깊숙한 곳을 어이하여 도성으로 삼았던 걸까. 기록은 거기에서 끊겼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자 남원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한다.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밤에 황류천(달궁 계곡)을 건너고, (……)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에 도달하여 잠깐 쉬었다”고 적고 있어, 당시에도 정령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령치(해발 1,172미터) 고갯마루에 섰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급경사지만 이내 푸근하게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반야봉에 모든 것이 평온해진다. 반야봉 옆으론 삼도봉이 지척이고 토끼봉을 지나 천왕봉까지 지리산의 등뼈, 주능선이 저 멀리 100리 밖까지 펼쳐진다. 정령치에서 바라보는 지리 능선 조망은 장엄하기 그지없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풍경이다.

그뿐만 아니다. 노고단 아래 종석대에서 성삼재를 지나 작은 고리봉, 묘봉치, 만복대, 정령치, 큰고리봉, 세동치, 부운치, 팔랑치, 바래봉, 덕두산까지 이어지는 해발고도 1,000~1,400미터에 이르는 봉우리와 고개들이 출렁이는 긴 서북능선이 이곳을 관통한다. 서북능선은 주능선 다음으로 긴 능선이지만 성삼재와 정령치 종단도로로 두 동강 났다. 예전에는 100리에 달하는 주능선과는 달리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으나 정령치 종단도로가 생긴 이후부터 풍경이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종단도로로 산은 끊겼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된 것이다.

정령치 일대의 능선은 초원지대다. 1960년대에 임수명, 임인택 부자가 이곳 지리산 서북능선에 사탕무를 재배하려고 정령치의 수비성 터와 그 일대 10여만 평을 개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업은 꿈에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능선길이라고 해서 칼바람이 불고 뾰족한 바위가 있을 거라는 예단일랑 적어도 이곳에선 접어두는 게 좋다. 좁은 숲길이 이끄는 곳으로 그저 발길만 옮기더라도 이미 평안의 땅이다.

하늘을 향하던 길이 숲 속으로 이어진다. 붉은 듯 하얗게 핀 산철쭉이 길 안내를 자청하고 솔숲에 가만히 들어앉은 오랜 무덤에 비치는 햇빛이 따사롭다. 그 아래로 늪이 있다. 평평한 고원의 산정 늪은 이곳이 모든 생물의 낙원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늪을 돌아 옛 암자 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길이 끝났다. 하늘로 솟은 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은산철벽, 이곳은 부처의 세계. 암벽에는 모두 열두 분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 아니,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에 깃든 부처를 드러낸 것이리라. 왜 이 깊숙한 곳에 부처를 새겼을까. 가만히 암벽에 다가섰다. 서 있는 불상이 둘인데, 그중 하나는 하반신이 없다. 앉아 있는 불상은 열쯤 되어 보이나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몇 안 된다.

4미터에 달하는 가장 큰 불상은 듬직하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을 마한의 옛 장수라 했다. 불상군이 있는 암벽을 돌아 오르기 시작했다. 위태위태한 길도 잠시, 고개를 돌리자 장엄한 지리 능선 100리가 펼쳐졌다. 가만 숨을 고르고 난 후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이 가닿은 곳은 놀랍게도 천왕봉이었다.

왜 그렇게 적막할 수밖에 없는지, 천 년의 긴 시간이 왜 이곳에선 순간으로 다가왔는지,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영원으로 이어지는지를 알 듯도 하다. 적막한 터가 주는 고요함은 외로움도 적적함도 허허로움도 아닌, 텅 빈 공간에서의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희열, 충만 같은 것이었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공기가 따뜻해지고 햇살이 넘치는 곳, 긴 침묵이 흐르는 여기가 바로 극락일 성싶다.

* 달궁과 서북능선 고개들 – 달궁이란 이름은 마한의 ‘달의 궁전’ 전설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전 이곳에 있던 달궁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왕궁 터로 추측되는 곳에서 발견된 주춧돌 또한 궁궐의 것이 아니라 폐사지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왕궁 터에 나중에 절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섣불리 밝히려 드는 것보다 마한의 미스터리를 영원히 남겨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리산에서 주능선 다음으로 긴 능선인 서북능선에는 여러 고개가 있다. 정령치가 그 옛날 마한의 장수 정 장군이 지키던 곳이라면, 황 장군이 지키던 곳은 황령재, 각기 세 명의 성이 다른 사람이 지키던 곳은 성삼재, 그리고 여덟 명의 병사가 지키던 곳이 팔랑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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