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쓰기는 애쓰기다

나무생각 / 2020년 8월 / 280쪽 / 14,800원

책 쓰기는 애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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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기는 애쓰기다

유영만 지음

책소개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며 격전의 현장에서 체험적 지혜를 길러온 유명만 교수는 이 책 『책 쓰기는 애쓰기다』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내려는 끊임없는 사투와 안간힘이야말로 책 쓰기의 훌륭한 재료임을 강조한다. 책 쓰기가 기법이나 기술을 배우기보다 ‘살기’로 직결되어야 하는 이유다. 내 몸에 각인된 느낌과 감정, 생각과 사고를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바로 ‘책 쓰기’다. 다르게 살기 위한 애쓰기는 타성과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낯선 세상과 적극적으로 조우하게 한다.

요약본 본문

1장 살기 - 삶은 앎이 자라는 터전이다

사소한 일상을 상상력의 터전으로 바꾸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 ‘크로노스(Chronos)’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 ‘카이로스(Kairos)’로 구분된다. 시간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고, 시간을 내서 의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세상은 크로노스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꿔나간다. 모두가 짧다고 생각하는 10분도 누군가에게는 그냥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져진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사소한 일상이 비상하는 상상력의 터전이 될 수 있고, 하루 10분의 시간이 10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10분은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고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다.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전적으로 다른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루 10분으로 행복해지는 전략을 여기에 소개하겠다.

하루 10분, 내가 누구인지를 질문하라: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바쁠까? 나는 어떤 일을 하면 신나고 어떤 일을 하면 신나지 않은가? 나는 무엇을 달성하고 싶은가?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나는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어제는 친구와 왜 그렇게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까?

10분만이라도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자. 정말 순식간에 10분이 지나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 10분 동안 무심코 던진 질문 중에 일생일대를 거쳐 고민해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는 게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도약할 수 없다. 질문은 안주하려는 자세, 관성대로 살아가려는 습관적인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고 색다른 사유를 시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질문이야말로 삶의 질을 높이는 파수꾼인 셈이다.

오늘 나의 질문이 내일을 결정한다. 그러나 질문이 틀에 박히면 답도 틀에 박힐 수밖에 없다. 색다른 가능성이 잉태되지 않고 타성에 젖어 사는 이유는 틀을 깨는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남이 던진 질문에 속박되어 살아서는 안 된다. 내 삶을 주도할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남이 정해놓은 답에 휘둘리며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루 10분만이라도 10년 후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질문하고 사색한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루 10분이라도 책을 읽으며 차이를 만들어라: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면 하루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 많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 약속 시간에 미리 가서 기다리는 시간,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다음 일이 시작되기까지, 아침에 조금 일찍 출근해서 근무 시간이 되기 전까지, 잠들기 전 10분 등 모두 책을 읽을 수 있는 자투리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황금 같은 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다.

시간이 나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야 책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이 나면 다른 일을 하는 사람과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사람의 차이는 10년 후 천지차이로 드러날 것이다. 작은 실천의 성실한 반복만이 반전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단 10분이라도 내 몸이 책을 통과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책을 통과하고 나온 몸은 이전의 몸이 아니다. 책 속에 녹아있는 다양한 사유를 관통한 몸이며, 나를 어제와 다른 곳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몸이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책의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해보자. 읽다가 마음을 붙잡는 문장에 완전히 몸을 묻고 저자의 심연 속으로 빠져보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놀라운 생각이 담긴 한 문장의 뒤안길을 걷다 보면 10년 앞을 내다볼 사유의 샘물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 10분, 어제를 반성하면 놀라운 반전이 시작된다: “어제가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오늘도 불행하고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십중팔구 내일도 불행합니다.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게재한 칼럼 <주소 없는 당신에게>에서 한 말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서 허겁지겁 집을 나선 이유는 어제 아무 준비 없이 비몽사몽간에 잠을 잤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지각하는 이유는 어제 하루를 준비 없이 그냥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하루 10분을 통제하는 사람이 다가오는 10년 앞을 상상하는 사람이다. 어제를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오늘도 반성 없이 보내고 내일도 별다른 반성 없이 비슷한 일을 반복할 것이다. 반성하는 삶이 어제와 다르게 구상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차원에서 반성은 각성이기도 하다.

사람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몸에 밴 행동으로 엉뚱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나는 상대를 배려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거꾸로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또 나는 상대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오해가 있다고 여긴다. 사람의 마음이 다 내 마음 같지는 않아서다.

하루에 10분만이라도 내가 만난 사람과 내가 추진한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면서 나의 언행을 반성해보자. 혹시 상대의 입장을 무시하거나 관점을 존중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 의견을 강요한 적은 없는지,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살 여지는 없었는지 반성하는 것이다.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수록 오늘 하루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반전된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고 내일의 과거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0분 먼저 출근하면 10년 앞을 내다볼 수 있다: 남보다 10분 먼저 도착하면 여유가 생기고 그날의 미팅이나 해야 할 일을 점검할 수 있다. 수업 시간에 매번 늦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모든 수업 시간에 10분 먼저 도착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준비하는 학생이 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출근 시간 때마다 허겁지겁 간신히 지각을 면하거나 5분씩 매번 늦게 도착하는 사원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 10분 먼저 도착해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차분히 하루 일과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만날 때마다 지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분 먼저 도착해서 무슨 대화를 할까,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는 사람도 있다.

10분 먼저 준비하는 사람과 10분 늦게 도착하는 사람 사이에는 20분이라는 물리적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10분 먼저 도착한 사람의 생각은 10년을 내다보며 상상하지만 10분 늦게 도착해서 눈치를 보는 사람은 남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10분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이며, 상상력의 차이를 낳는다.

빠른(fast) 사람보다 이른(early)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 빨리 가려는 사람은 경쟁 상대가 언제나 밖에 있지만 이른 사람은 경쟁 상대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빠른 사람은 속도를 최우선의 미덕으로 삼지만 이른 사람은 남보다 앞선 사유, 밀도 높은 생각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남보다 빨리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보다 어제보다 한 발짝 앞서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하루를 만들자. 생각의 속도도 결국은 깊은 사유의 정수가 쌓여야 생기는 경쟁력이다. 생각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밀도 있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10분 먼저 출근해서 생각하는 여유가 생각의 밀도를 낳는 원동력임을 잊지 말자.

10분의 산책으로 놀라운 영감을 얻는다: 일상은 시상이 솟구치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영화 <패터슨>을 보고 깨달은 문장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뉴저지주 작은 소도시 패터슨에서 버스 기사를 하는 ‘패터슨’이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낸다. 매일 아침 6시쯤 기계적으로 일어나 시리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출근을 한다. 고정된 버스 노선을 따라 정해진 시간 동안 운행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 로라가 준비한 저녁을 먹는다. 그러고는 마빈이라는 개와 산책을 하고, 단골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저마다의 꿈을 지닌 동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피로를 푼다.

여느 버스 기사와 비슷한 일과를 보내지만 다른 점은 버스를 운행하기 전 운전석에서, 잠들기 전 자신의 집 지하 서재에서 그는 하루 동안 얻은 시상을 비밀 노트에 적는다. 직장인에게는 지루한 일과지만 시적 영감을 찾는 그에게는 하루 일과가 경이로운 기적이다. 경이로운 기적은 거창한 계획이나 성취에서 나오지 않고 다른 눈과 생각으로 바라보는 일상에서 발견된다.

산책을 권유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과 엮이면서 보낸 시끄러운 하루를 조용히 사색하면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책하는 시간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걷고 있는 자신을 주변의 자연 풍경 속에 집어넣는 작업이기도 하다. 책에서 본 한 구절을 떠올려 곱씹어보기도 한다. 하루 10분간의 산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 가지 묘책도 얻을 수 있다.

2장 읽기 - 읽기는 다른 세상과 만나는 접속이다

어떻게든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 읽는다

흔히 책을 읽는 이유를 다섯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먼저 남다른 개념을 습득할 수 있다. 또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 위로를 받고, 깊은 사유의 흔적을 발견하고, 생각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며, 타인의 체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어떻게든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서다. 아침이면 여느 날과 같이 눈이 떠진다. 그래도 출근할 곳이 있어서 다행일까. 전쟁 같은 출근길을 통과해 회사에 간신히 도착하면 또다시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동분서주하다 퇴근 전에 잠시 생각해본다. 내일도 여기로 출근해야 하나?

전과 다르게 살아보려는 사람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책은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는 친구다. 안간힘을 쓰며 살지만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할 수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을 때 책은 나를 위로해주고 벽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빠져서 읽되 다시 빠져나와야 한다: 복잡하게 얽힌 생각의 실타래를 푸는 결정적인 단서를 책에서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세상을 해석했던 틀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단순히 나의 문제 상황에 적용해서 해석했을 뿐인데 관점이 바뀌고 의미가 바뀌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와 다른 분야에서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뇌했던 흔적을 만날 때도 있다. 평범한 것을 보고 비범한 역발상을 잉태하는 시인의 상상력을 배우기 위해서는 시를 읽는다. 사소한 것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관찰과 통찰을 배우기 위해 에세이를 읽고, 인생 다반사의 희노애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또 자기만의 사유 체계로 사람과 삶의 근본을 캐묻는 문제의식을 배우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고, 지나간 과거에 담긴 지혜를 얻기 위해 역사책을 뒤적인다. 전공에 대한 깊이 있는 지적 사유를 얻기 위해서는 각종 전문 서적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책 속으로 빠져들되 완전히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 작가가 던진 화두에 공감하고 감동하며 한동안 빠져 살아도 좋다. 하지만 반드시 빠져나와 나의 삶에 비추어 내 것으로 만들려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수많은 책을 읽어도 나만의 사유의 씨앗을 발아시킬 수 없다.

가령 철학자에게는 생각하는 방법과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걸러내는 사유 체계의 증축 과정을 배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이론 체계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편파적 세계관을 생성하지 않도록 또 다른 철학자의 사상적 편력에 비추어보면서 통찰하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책은 위험한 생각을 품은 매개체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위기 상황에 몰아넣고 가열한 사고 실험을 감행해야 한다. 나를 만들어준 사고 기반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당위적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의 터전에도 물음표를 던져 자주 시비를 걸어야 한다. 한마디로 밑바탕을 뿌리채 뒤흔들어 무너뜨리고 다시 집을 짓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그의 시는 치열한 번역 과정, 즉 외국어와의 침통한 투쟁 속에서 체득한 것이다(염무웅). 그(김남주)에게 번역은 혁명의 번역이었다. 그것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원문에 숨어 있는 새로운 타자를 발견하는 욕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강민혁의 『자기배려의 책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책은 번역을 통해 나의 것으로 전환된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만이 번역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전환시키는 변혁의 과정 또한 번역이다. 작가의 문제의식 속으로 파고들어가 어떤 맥락과 배경에서 이런 생각을 잉태시켰는지를 반추해보지 않으면 책 속의 텍스트는 부유하는 사유의 거품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책을 읽는 모든 행위는 작가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전환시켜 또 하나의 생각의 집을 짓는 건축 행위다. 단어와 개념으로 건축된 문장을 빌어다 용처에 맞게 재조립하고 아예 다른 개념으로 재개념화하는 변혁 작업이다.

읽기의 완성은 쓰기다: 나만의 사유의 씨앗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낯선 생각과 접속할 수 있는 다양한 책을 읽고 다시 나의 관점에서 이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책을 읽고 그냥 덮으면 그 순간 거기서 사유도 끝난다. 사유가 나의 관점에서 다시 잉태되기 위해서는 읽으면서 느낀 점을 기록해놓고, 그것이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쳐야 한다.

대학 수업 마지막 시간은 한 학기 동안 배운 모든 개념을 엮어서 짧은 글을 써야 한다. 글로 써서 정리하지 않으면 수많은 개념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버린다. 결국 읽기는 쓰기로, 쓰기는 다시 읽기로 선순환되는 과정에서 내 몸이 노동을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통스러운 노동, 몸이 관여하는 정리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읽은 책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읽는 순간 깊은 감동을 받았어도 그 흔적을 기록해놓지 않으면 다 날아가버린다. 기록하는 수고스러운 노동의 시간만큼 글짓기의 기적은 가능성의 상태로 내 몸에 축적된다. 축적된 기록이 어느 순간 몸 밖의 부름을 받고 폭발적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으로 읽기는 쓰기이자 실천이며 내 삶을 바꾸는 혁명이다.

“독서 이후에 독서한 바를 자기 자신에게 다시 읽어 타자의 입으로부터 들은 바나 타자의 이름 하에 읽은 진실한 담론을 자기화하기 위해 글로 씁니다.”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 나오는 말이다. 독서로 얻은 깨달음을 나의 생각으로 재구성해내지 않으면 읽은 것으로 만족하고 끝나고 만다. 보통의 삶을 자기만의 사유체계로 해석하고 구축해가는 다양한 작가의 시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책이라는 세계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졌지만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인생사가 펼쳐진다. 바로 이 점이 내 삶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3장 짓기 ─ 글은 삶이 남긴 얼룩과 무늬다

살갗을 파고드는 글이라야 감동을 준다

글을 쓰라고 하면 쓸 게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쓸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글로 쓸 생각이 없는 것이다. 글에는 그 사람의 고유한 삶의 족적이 담긴다. 어떻게 하면 쓸모 있는 삶이고 어떻게 살면 쓸모없는 삶이 되는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는 오로지 나다.

남들이 자기 기준에 따라 내 삶을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평가를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나의 주관과 신념에 달려 있다. 상대가 판단하기에 그다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나에게는 색다른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쓰는 것이 곧 내 자신이다: 글쓰기는 내가 쓰는 것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쓰는 것’은 사용하는 물건과 글을 쓰는 행위를 의미한다. 내가 평소에 무엇을 사용하는지가 나의 삶을 결정하고 그것이 내가 쓰는 글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한다.

내가 주로 쓰는 도구가 축구공이라면 나는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축구를 잘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당장 무엇을 할지 결정한다. 내가 쓰는 도구와 재료가 용접기와 철판, 용접봉이라면 나는 하루 종일 용접을 잘하는 방법으로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내가 만약 피아니스트라면 하루종일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악보와 씨름하고 피아노를 연습할 것이다. 나에게 피아노는 악기가 아니라 활기를 북돋는 동반자다.

“내가 쓰는 것이 곧 내 자신이다.”

미셸 드 몽테뉴의 명언이다. 쓰는 걸 바꾸지 않으면 쓰는 글도 바뀌지 않는다. 글짓기는 짓는 방법을 배워서 글이 나오는 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온다. 그런 차원에서 글짓기는 쓰기가 아니라 보기다. 삶에 의미를 부여해서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글을 쓴다는 건 사는 문제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처절한 삶이 없는 건조한 글은 지루하다. 치열한 고민 끝에 몸으로 뽑아낸 문장에는 관념의 거품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삶의 엑기스가 농축되어 탄생한 문장이기에 함부로 읽기도 겁난다. 진정성으로 무장한 문장에는 꾸밈으로 포장하거나 거짓으로 위장할 여력이 없다.

내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글은 쓸 수 없다: 우리는 오늘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전쟁과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함께 느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렇게 살아내는 순간순간의 누적이 한평생을 만들어간다. 그런 삶을 굳이 글로 기록하려는 이유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기 위해서다.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한 구상이 설 수도 있다.

“대체로 내 삶을 이해하고 버텨내기 위해 쓰인 글들이어서 내 글의 시야는 넓지 않고, 살아낸 깊이만큼만 쓸 수 있는 것이 글이므로 나의 책이란 결국 나의 한계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내 경험의 뒤안길을 따라가보는 이유도 나의 한계가 어디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나의 책과 마찬가지로 나의 글도 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일갈은 의미심장하다.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나오는 말이다. 글짓기의 재료는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에서 얻는다. 삶이 없다면 글도 없다. 따라서 글짓기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자기 삶을 능가하는 글을 쓸 수 없다. 삶을 바꾸지 않고 글을 바꾸기는 어렵다. 내가 쓴 글을 나를 잘 아는 가까운 친구가 본다고 생각할 때 나는 거짓말을 쓸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글로 전환하지 않고 위장하거나 꾸미기 시작할 때 진정성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경험이 의미를 가지려면 경험을 해석하는 나만의 관점이나 신념이 필요하다. 관점이나 신념은 경험이 많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경험을 해석하는 이론적 틀이나 세계관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이성적 탐구의 결과다. 똑같은 경험을 했지만 교훈이 다른 이유는 경험을 해석하는 이론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똑같이 어떤 일에 도전하다가 실패했지만 경험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얻는 교훈도 다르다. 누군가에게 실패 경험은 인생에서 드러내지 말아야 할 숨기고 싶은 얼룩이다. 반면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실력을 쌓는 기회다.

이런 경험은 글감이 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글로 거듭난다. 경험에서 배우려면 개인적 체험의 틀에 걸러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특정한 이론적 관점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나아가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체험적 깨달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내가 좋아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 사람이 말하는 메시지는 삶이 농축된 결정체다. 삶을 담은 메시지를 써내면 글이 되고, 이미지로 그리면 그림이 되며, 목소리로 담아내면 노래가 된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삶을 재료로 창작을 한다. 그들에게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다. 창작의 기본은 기법이 아니라 창작자의 삶이다.

그래서 똑같은 말도 누가 전달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로 다가온다. 간디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다르면 살아온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르면 삶이 품고 있는 의미도 다르기 때문이다. 삶을 녹여서 쓰는 글이 길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만이 걸어오고 걸어갈 길이기 때문이다. 삶이 곧 메시지인 이유는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녹여내기 때문이다. 간디가 사용하는 ‘비폭력’과 체 게바라가 사용하는 ‘혁명’이라는 단어에도 그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들의 열정과 혼, 인격과 철학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4장 쓰기 ─ 책 쓰기는 삶을 담아내는 애쓰기다

책 쓰기는 애쓰기이자 필살기다

책 쓰기는 애쓰기다: ‘애’는 초조한 마음속이나 몹시 수고로움을 의미한다. 그래서 ‘애쓰다’의 의미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는 것을 뜻한다. 애쓰는 과정은 의도한 대로 일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어제와 다르게 조금씩 애를 쓰다 보면 어느 사이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내가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누누이 말했지만 책 쓰기 교본을 많이 읽는다고 책에 나오는 대로 글이 잘 써지지는 않는다. 내가 직접 써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처방전을 많이 알고 있어도 써먹지 못한다. 누군가 써놓은 책 쓰기 매뉴얼은 그 사람이 쓰면서 깨달은 체험적 노하우다. 남의 노하우를 흉내는 낼 수 있으나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책 쓰기 능력은 오로지 애쓰는 가운데 향상된다. 한 줄을 토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책 쓰기 능력도 생긴다.

책 쓰기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기의 문제다. 서점에 가보면 책 쓰기 기교를 가르치는 책이 이미 포화 상태다. 그러나 대부분 책을 쓰고 싶은 욕망에 부응하는 임기응변식 처방전일 뿐이다. 책을 잘 쓰는 유일한 비결은 책 쓰기의 기본기를 연마하는 것이다. 이 말은 책을 잘 쓰는 왕도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책을 잘 쓰는 데 필요한 기본기는 책 쓰는 데 필요한 원료나 재료를 축적하면서 매일 꾸준히 쓰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선한 음식 재료가 준비되어야 하듯이, 독자에게 공감이 가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의 깊이와 넓이가 있어야 하고, 이를 적합한 개념으로 녹여 한 권의 결과물로 엮어내야 한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세계가 내가 창작할 수 있는 세계를 결정한다. 잘 쓰기 위해서는 그래서 잘 쓴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읽지 않고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독자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또 많이 읽어야 남다른 개념을 습득하여 책 쓰기에도 활용할 수 있다.

책 쓰기가 애쓰기인 또 다른 이유는 정신노동을 넘어서 육체노동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몸은 복잡한 생각을 문장으로 건축하기 위하여 초집중 모드로 전환해야 한다.

“글쓰기는 단어를 하나씩 하나씩 배열하여 벽돌처럼 쌓아올리는 수공업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고생스럽게 땀을 흘려야 하는 노동이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게 쓰인 글을 일정한 구조와 논리 체계로 엮어내는 책 쓰기 역시 안간힘을 쓰며 완성해가는 육체노동이다. 책은 사유 과정으로 정제된 생각의 정수가 육체를 통과하면서 남기는 흔적을 일정한 논리적 흐름에 따라 기록하고 구축한 한 채의 집에 가깝다.

“글은 정자세로 앉아 시간을 바치지 않으면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목뒤부터 어깨를 타고 손끝으로 흐르는 저림을 겪으며 문장의 길을 터나가야 한다.”

은유의 『다가오는 말들』에 나오는 말로, 글쓰기가 온몸의 저림을 겪는 육체노동임을 보여준다.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지만 글의 재료는 일상에서 온몸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내 몸에 축적한 체험의 흔적들이다. 모든 책 쓰기는 그래서 체험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것이 내가 습득한 개념을 만나면서 문장으로 완성되고, 한 편의 글로 탄생되고, 엮어서 책으로 완성된다. 마치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벽돌을 한 장씩 차근차근 쌓듯이 작가는 체험적 상상력으로 얻은 글감을 적절한 개념을 동원하여 한 줄 한 줄 쌓아 책을 짓는다.

대부분의 논리적 책 쓰기는 감정을 제거한 메마른 단어를 수집해 논리적으로 짜맞추고 배열하는 데 치중한다. 주관은 없고 객관만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책이든지 단어를 눈물에 적시고 뜨거운 정감으로 데운 다음 뼈저린 체험으로 녹여내야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고 믿는다.

모든 몸부림치는 생각은 추락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증표다.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으려는 처절함이자 지금을 넘어 다른 세계를 꿈꾸는 간절함이다. 몸부림치는 생각의 치열함과 집요함이 내 생각뿐만 아니라 내 몸까지 건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생각은 머리로만 하지 않고 온몸으로 한다. 몸부림치지 않는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꿔놓기가 어렵다. 몸부림치는 생각이 글로 옮겨질 때 진한 감동의 씨앗이 남는다. 내가 아무리 다양한 체험을 했어도 그것을 표현할 개념이 없다면 체험은 내 몸 안에 거주할 뿐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책 쓰기는 이야기다: 조지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책을 쓰는 동기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싶은 욕망으로 책을 쓴다. 둘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을 자각하기 위해서다. 셋째는 역사적 충동 때문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후대에게 전하려는 욕망에서 책을 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정치적 야망이 개입한다.

개인적인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네 가지 이유가 일정한 비율로 겹쳐 있다. 글의 종류에 따라 특정 목적에 더 부합되는 경우도 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책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누가 어떤 목적의식으로 쓰는지에 따라 책의 종류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니체가 말했듯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 깨달음을 자기 방식으로 정리해보기 위해서다.

내가 극복해낸 곤경을 이야기로 들려줄 때 독자는 공감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유도하기는 불가능하다. 책을 쓰기로 결심한 사람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지금 이대로 살지 않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책 쓰기의 출발이다. 순리와 본능적 욕구대로 살지 않고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각오와 함께 위험한 탐험이 시작된 것이다.

내 배를 채우는 욕구를 따라가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는 행위가 사랑이다. 책 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답게 살기로 결심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모험이다. 나를 세상에 정직하게 드러내놓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겠다고 공표하는 위험하고 힘든 혁명이다. 그럼에도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나를 알고 사랑하려는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책 쓰기는 독자의 감동이라는 이타심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만이 시작할 수 있는 이기심의 산물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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