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탐나는책 / 2020년 10월 / 248쪽 / 16,000원

후배 하나 잘 키웠을 뿐인데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저자 소개

1942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도립미타고등학교 등에서 세계사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쓰쿠바대학 강사와 홋카이도교육대학 교육학부 교수를 거치며 20여 년 넘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편집과 집필을 담당했다. 2007년 퇴임 후, 중앙교육심의회 전문부회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시에 NHK 방송 문화센터, 아사히 컬처센터, 도큐 세미나 BE 등에서 활발한 강의 활동을 펼치며 역사서의 저술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부의 지도를 바꾼 돈의 세계사』,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지도로 읽는다』, 『물건으로 읽는 세계사』, 『세상에서 가장 쉬운 패권 쟁탈의 세계사』, 『흐름이 보이는 세계사 경제 공부』 등 다수가 있다.

책소개

코냑, 럼주, 와인 등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이 담긴 술이 어떻게 탄생되었고 또 어떻게 세계로 확산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인류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보드카, 데킬라, 소주 등 전 세계의 모든 증류주는 9세기에 이슬람에서 연금술을 위해 발명된 증류기 알렘빅에서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액체 빵’ 맥주, 흑사병의 공포가 낳은 위스키와 브랜디, 음료수 대신이었던 대항해 시대의 와인, 겨울의 추위가 낳은 기적의 술 샴페인 등 다양한 술을 둘러싼 재미있고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

요약본 본문

1장 술과의 행복한 만남

가장 오래된 술 봉밀주

다양한 풍토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 지금으로부터 약 500만 년 전에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에서 탄생한 인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기후, 지형, 식생이 복잡하게 조합된 다양한 풍토를 기반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온대의 평야, 삼림 지대, 대초원, 사막, 열대의 평야 등에서 쉽게 알코올 발효가 되는 포도, 사과, 살구 등의 과실, 야자나 버섯 등의 수액과 꿀, 말이나 염소, 소 등 가축의 젖을 이용한 다양한 양조주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각 문화와 문명에는 그들만의 술이 있는데, 직접 발견한 것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전파된 것도 있다. 술이 문화, 문명과 연결되는 과정은 다양하고, 양조법이 확립된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재생과 성화의 술: 인류는 자연계의 발효 현상에 익숙해지고 난 뒤, 드디어 인공적 발효에 성공하여 원하는 품질의 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효모는 특정한 조건만 맞는다면 발효를 시작하기 때문에 양조가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인류는 포도, 사과, 꿀, 말 젖 등 당분이 많은 소재를 술의 원료로 찾아내어 생활 속으로 발효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양조 방법을 익혔고, 이윽고 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온대를 대표하는 술인 미드는 물에 녹인 꿀을 발효시켜 만든 봉밀주이다. 색깔이나 향기의 종류가 다양한 꿀은 예부터 포도당 외에 각종 비타민, 미네랄을 함유한 영양원으로 알려졌다. 단, 봉밀주를 만들기에는 꿀의 당분 농도가 너무 진하기 때문에 물을 세 배 정도 넣어 희석시킨 뒤 일정 기간 방치해두기만 해도 봉밀주가 완성되므로 제조법은 정말 간단하다. 신대륙에서도 멕시코 인디오 등이 옛날부터 종교 의식에 봉밀주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쨌든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봉밀주야말로 인류가 마신 가장 오래된 술이라고 할 수 있다.

허니문의 본래 의미: 신혼을 뜻하는 허니문은 원래 봉밀주에서 온 말이지만, 지금은 봉밀주보다 널리 알려진 일반 명사가 되었다. 고대에서 중세 초기까지 게르만 사회에서는 봉밀주를 맥주처럼 흔하게 마셨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1개월 동안 외부 출입을 금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꿀을 마시게 하여 아이를 갖는 풍습이 있었는데, 여기서 허니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허니문은 꿀과 같은 한 달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젊은 꿀벌이 여왕벌이나 여왕벌의 유충에게 먹이려고 분비하는 로열젤리는, 여왕벌이 매일 2,000여 개의 알을 낳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허니문은 아무래도 신혼 생활이 꿀처럼 감미롭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과실주의 챔피언이 된 와인

복잡한 향기와 맛, 그리고 색: 과실을 원료로 하는 술의 대표는 아마도 와인일 것이다. 와인은 현재 60개국 이상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연간 생산량은 3,000만 kL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와인 생산량은 맥주와 비교하면 약 1/5정도이지만, 그래도 엄청난 양이며 술 문화의 주역 중 하나가 되었다. 와인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이고, 이 두 나라에서만 실제로 세계 포도의 약 40%가 소비된다고 한다. 포도로 만드는 과실주인 와인은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풍기는 부케와 포도 자체로 인한 아로마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향기가 난다. 한 모금 넘기면 신맛과 단맛 그리고 타닌 성분으로 인한 떫은맛까지 어우러진 복잡한 맛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입 안에 퍼지는 풍부한 보디감에 아름다운 색이 조합된 와인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과거의 와인은 매우 지엽적인 술이었다. 이유는 원료인 포도 때문이었다. 포도는 부패가 빠르기 때문에 와인 산지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와인을 양조하려면 포도 열매를 파쇄한 뒤 신속하게 발효시켜야 한다. 포도의 장거리 운송은 어려운 일이었고, 와인은 산지에 밀착된 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와인은 풍토를 마시는 것이다”라는 속담은 이러한 와인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피와 부활의 이미지: 포도를 만드는 와인이 큰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는 선혈과도 같은 와인의 붉은색에 있다. 본래라면 썩어서 바짝 말라버릴 운명의 포도가 부글부글한 거품을 내며 빨간 액체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고대 사람들은 피와 생명, 불사 등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와인 양조법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코카서스 지방에서 시작되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후 와인은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로 전해졌다. 이집트의 나크트 분묘 벽화에는 포도 따기부터 와인 만들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4,000여 년 전에 이미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금 마스크로 유명한 투탕카멘 왕의 부장품 항아리에서도 와인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와인 제조 기술은 이집트를 거쳐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송진을 바른 큰 나무통에서 포도를 발효시키고 허브, 향신료, 진한 바닷물을 넣어 와인으로 만든 뒤 동물 가죽이나 암포라라는 항아리에 넣고 판매했다.

와인에 밀려난 빵: 지중해 중앙부에 위치한 이탈리아반도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변방의 땅으로 취급되었다. 지중해 세계는 먼저 동쪽의 에게해부터 시작하여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서지중해가 개척되었고, 중앙부에 위치한 이탈리아반도는 마지막까지 남겨졌다. 이 때문에 와인이 동방으로부터 로마로 전해지는 시기가 늦어졌고, 로마인은 와인을 외부 세계의 이국적인 음료로 인식하였다. 이로 인해 초기 로마에서 와인은 귀중품이었고, 서른 살 이하의 남성과 부인은 와인을 마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 시대에도 와인은 고가여서, 당시 상인들은 한 암포라에 담긴 와인값으로 노예 한 명을 칠 정도였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자, 향락에 빠진 로마인은 와인을 연회석에 없어서는 안 될 음료로 여겼다. 식도락가인 로마인에게 와서 와인은 풍미가 한층 증가한다. 와인이 보급됨에 따라, 이탈리아반도에서는 급격하게 곡물 밭에 포도원이 구축되어 곡물 부족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결국 로마인이 먹을 곡물을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자를 위한 와인이 가난한 자의 밀보다 우선시된 것이다. 마침내 서기 91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에 있는 포도나무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알프스 이남의 포도나무를 남김없이 뿌리째 뽑아버렸다. 부유층이 마시는 와인이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 모습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 기독교에서 와인은 ‘예수의 성스러운 피’, ‘신의 나라를 상징하는 음료’로 여긴다. 포도를 따서 압착한 후 발효시켜 와인으로 바꾸는 과정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7세기부터 8세기까지 이어진 이슬람교도의 ‘대정복 운동’으로 지중해가 ‘이슬람의 바다’로 바뀐 후에도 유럽 내륙의 수도원에서는 와인을 계속 만들었다. 와인은 추위가 극심해 곡물을 충분히 수확할 수 없던 알프스 이북의 유럽에서 곡물 부족을 메우는 식품이기도 했다. 서기 800년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부여받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토지를 교회와 수도원에 기증하여 와인 생산을 장려하며, 서유럽에서 와인 문화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8세기 이후가 되자 수도원에서 사적인 미사를 드리는 것도 가능해졌다. 미사에는 ‘성체’를 상징하는 빵과 ‘예수의 성스러운 피’를 상징하는 최고급 와인이 필수였다. 수도원들이 앞다투어 고품질 와인 제조를 위해 노력한 배경에는 이러한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 또한 한랭한 기후인 서유럽에서 척박한 풍토와의 싸움이 오히려 양질의 와인을 만들어냈다. 유명한 부르고뉴 와인을 만드는 시트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포도밭을 재배하는 데 일상을 바친다. 그로 인한 격렬한 노동은 수도사들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당시 수도사의 평균 수명이 28세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12세기 들어 상업이 부활하자, 와인 생산에 특화된 지역도 나타나 와인의 대량 수송이 시작되었다. 현재 무거운 화물을 측정하는 중량 단위인 ‘톤(ton)’은 와인 한 통의 무게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보르도 지방에서부터 영국으로 대량의 와인이 운반되면서, 배에 몇 개의 와인 통을 실을 수 있는지를 적어 선적 능력을 표시했다. 속이 빈 와인통을 두드릴 때 탕 하는 소리가 났는데, 이 소리에서 ‘톤’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와인 산지인 보르도는 가론강과 도르도뉴강의 수운을 활용한 와인 산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2장 열심히 술을 빚은 문명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맥주

액체 빵이었던 최초의 맥주: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양조주로 연간 생산량이 1억 kL를 가뿐히 넘는다. 세계 인구를 60억 명이라고 했을 때, 전 세계 사람이 연간 17L 이상의 맥주를 마신다는 계산이 나오니, 실로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맥주는 문명이 탄생한 5,000년 전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당시의 맥주는 상당히 걸쭉해서 ‘마시는 빵’, ‘액체 빵’으로 불리며 대중적으로 흔하게 접할 수 있었는데, 원료인 보리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맥주는 특유의 쓴맛이 나지 않고 알코올 농도도 낮았기 때문에 술이라고 부르기에는 싱거운 음료였다. 그래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은 술을 매우 좋아하는 민족이어서 수확한 보리의 40%를 맥주 양조에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수메르인 사회에서는 여성이 양조를 담당했는데, 여덟 종류의 보리(대맥)와 여덟 종류의 밀(소맥)을 혼합한 곡물로 세 종류의 맥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전 건조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 하루 1L, 고위 신관에게는 그 다섯 배에 달하는 양의 맥주를 보수로 지급하였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5,000년 전부터 ‘헥토’라는 맥주를 만들었다. 맥아를 구운 빵을 짓이겨 물에 녹인 후, 길고 가느다란 항아리에 넣어 발효시켰다. 항아리 입구는 마개로 단단히 막아 깊은 맛이 나도록 하고 항아리를 어둡고 서늘한 곳에 두고 숙성시켰다. 맥주에 점토를 넣어 투명도를 높이는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대추야자 등의 재료를 추가해 알코올 농도를 높이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허브로 풍미를 더한 다양한 맥주도 만들어, ‘즐거움을 주는 음료’, ‘천국과 같은 음료’ 같은 멋진 이름도 붙였다. 화폐가 보급되지 않았던 이집트에서는 신관이나 관사의 봉급 일부를 맥주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관습 때문에 음주 습관이 지배층 사이에 퍼져 풍기문란도 만연했다고 한다.

맥주는 이윽고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전해졌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슨 의미에서인지 “와인을 먹고 취한 사람은 앞으로 넘어지고, 맥주를 먹고 취한 사람은 뒤로 넘어진다”고 기록했다. ‘뒤로 넘어진다’라는 말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곡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귀중한 보리로 술을 만드는 행위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로마 제국에서 미식가인 로마인은 맥주보다 식사와 잘 어울리는 와인을 선호했다. 게르만인이 좋아하던 맥주는 야만인이 마시는 술이라며 천시를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맥주 문화는 지중해를 넘어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맥주 양조는 결국 유럽의 보리 재배 지역에서 진화를 거듭했다. 봉밀주를 마셨던 게르만인, 켈트인은 대량으로 양조할 수 있는 맥주의 존재를 알게 되자 즉시 매료되었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맥주를 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녹색 황금’ 홉의 등장: 중세 유럽에서 맥주 제조가 발전한 이유는 와인과 마찬가지로 수도원 때문이었다. 벨기에에서는 현재도 수도원에서 양조되는 맥주나 수도원의 제조법을 계승한 진한 맥주를 선호한다. 7~8세기가 되자 독일에서 ‘홉’이 등장했다. 홉 암꽃의 밑동에서 노란색 분말을 채취해 이를 맥주에 첨가하여 ‘쓴맛’을 내고, 가스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연구하여 맥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쓴맛뿐 아니라, 맥주에 독특한 향미를 더하고 거품을 잘 일어나게 하는 홉은 ‘맥주의 영혼’, ‘녹색의 황금’이라고 일컬어진다.

오늘날 맥주의 원형은 1516년 남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제정한 ‘맥주순수령’에서 찾을 수 있는데, 맥주는 보리와 홉, 물로만 제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착색하는 데 숯을 사용하거나 맥아의 사용 비율이 낮아 품질이 조악한 맥주가 많았는데, 맥주순수령으로 균질화되었다. 빌헬름 4세는 이 법령을 통해 양질의 맥주를 보급하여 시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맥주 양조에서 밀의 사용을 배제하여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법령은 맥주의 기본형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홉은 목 넘김을 상쾌하게 하고 깊은 맛을 낼 뿐 아니라, 잡균의 번식을 막는 힘도 가지고 있다. 살균 및 항균 작용이 있는 것이다. 또한 홉에 함유된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은 맥주의 과잉 단백질을 제거할 뿐 아니라, 맛을 깔끔하게 하고 투명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3장 이슬람 세계에서 동서로 전해진 증류주

페스트의 공포가 키운 브랜디와 위스키

절망과 공포가 낳은 ‘스피릿’: 증류란 알코올 성분을 함유한 액체를 가열하여 알코올 등의 휘발성 성분을 증발, 기화시킨 후 이것을 냉각기로 식혀 액체로 바꾸어 회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순서로 만들어지는 알코올음료가 증류주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탄생한 증류기 알렘빅은 이집트로 전해졌고,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슬람교가 지배한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유럽에서 증류기를 이용한 새로운 종류의 술, 증류주가 탄생한 계기는 14세기 중반에 전 유럽인을 중음의 공포로 떨게 한 페스트(흑사병)의 유행이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 페스트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이 생명수를 찾아 헤매게 된 것이다. 페스트는 쥐에 기생하는 벼룩을 매개로 중국 운남 지방의 풍토병이었는데, 몽골 제국의 확장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갔다. 1347년부터 70년 동안 페스트가 크게 창궐하여 당시 유럽 총인구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2,500만 ~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페스트의 대유행은 인류의 멸망을 생각하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그런 와중에 ‘불사의 영이 깃든 술’인 생명수를 마시면 절대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유포되었고,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명수가 확산되었다.

14세기 중반, 백년전쟁(1339~1453)이 발발한 와중에 페스트까지 유행한 프랑스에서 알렘빅으로 증류한 새로운 종류의 술이 출현했다. 당시 사람들은 증류주의 알코올 도수가 높아 불을 붙이면 불꽃이 이는 모습을 보고, 술 속에 있는 불의 정기가 신체에 활기와 정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한 증류주는 ‘스피릿(영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생명을 지키는 마법의 물을 제조하는 방법은 비정상적인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가령 ‘위스키’의 어원은 켈트어로 생명수를 의미하는 ‘어스퀴보’이고, 이 말이 나중에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맹위를 떨치던 페스트가 증류수라는 새로운 음주 문화를 널리 보급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원에서는 생명수에 약초를 넣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비약을 활발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많은 리큐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아일랜드에서 탄생한 위스키: 아일랜드에 알렘빅이 전해져 아콰 비타이(생명수)의 양조가 시작된 때는 14세기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이전이었다. 1172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통솔하는 대군이 아일랜드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이미 보리로 만든 맥주를 증류한 술을 마시고 있더라는 기록이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5세기에 기독교 포교에 열심이었던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세인트 패트릭이 증류 방법을 전파하고 위스키의 전신인 어스퀴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스퀴보는 토탄(피트)으로 맥아를 건조시키는 스코틀랜드의 위스키와 달리 석탄을 사용한다는 특색이 있다. 아일랜드에는 석탄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이리시위스키는 스카치위스키와 같은 연기 냄새가 나지 않고 깔끔한 맛이 난다. 또한 아이리시위스키는 알렘빅을 개량한 단식 증류기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증류하기 때문에 가볍고 부드럽다는 특색도 있다. 반면 스카치위스키의 증류 횟수는 두 번이다. 예전부터 네덜란드나 영국의 문화를 동경해 러시아의 서유럽화를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표르트 대제는 “최고의 위스키는 아이리시이다”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아일랜드의 ‘어스퀴보’는 스코틀랜드로 전해져 ‘우식베하’라고 불렸고, 여기서 다시 ‘어스기’, ‘위스키’로 짧아졌다. 현재 위스키의 영어 철자는 어미가 ‘-ky’로 끝나는 단어와 ‘-key’로 끝나는 단어가 있는데, 미국 법률에서는 스카치위스키를 ‘Whisky’, 아이리시 위스키를 ‘Whiskey’로 써서 구분하고 있다. 미국은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많기 때문에 아이리시위스키의 최대 소비국이기도 하다.

밀조주가 키운 스카치위스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스카치위스키) 제조법은 이웃 섬인 아일랜드로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깨끗한 물과 맥아를 건조시킬 때 사용하는 토탄은 위스키를 제조하는 데 적당하여, 깊은 맛과 좋은 향기를 풍기는 위스키를 만들 수 있었다.

1707년에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병합되자, 당시 잉글랜드에서 부과되었던 고액의 맥아세가 스코틀랜드에도 부과되었다.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 술에 매겨진 세금이 15배나 뛰어올랐다. 그러자 스코틀랜드의 양조업자는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비밀스럽게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조된 위스키는 징세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셰리주 등을 담던 낡은 나무 술통에 숨겼다. 그런데 한 모금 마셔 보자 호박색의 숙성된 위스키에 셰리주의 향과 나무 향이 배어 매우 맛이 좋았다. 징세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빈 술통에 넣어 산속에 숨긴 위스키에서 오히려 독특한 풍미를 발견할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기술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현재도 밀조주를 ‘문 샤인(달빛)’ 또는 ‘마운틴 듀(산이슬)’라고 부르는데 스카치 탄생의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위스키의 합법화와 대량 생산: 스코틀랜드 북부 하이랜드 지방에서 증류되는 몰트위스키는 보리의 맥아만을 원료로 사용하여 발효한 후, 단식 증류기로 두 번 증류하여 화이트 오크통에 오랫동안 숙성시킨 것이다. 각각의 증류소는 피트를 태우는 방법, 증류기의 형태, 상태, 숙성 방법 등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모두 다른 풍미를 지닌 위스키를 만들어냈다. 스코틀랜드의 피트는 지역에 군생하는 히스라는 관목이 퇴적되어 탄화된 이탄이다. 개성이 다른 위스키를 다른 양조소의 위스키와 혼합하지 않고 증류소 내부에서 혼합하여 상품화한 술이 ‘싱글 몰트 위스키’이다.

의외로 잉글랜드에서는 오랫동안 맥주, 와인, 코냑을 마셨으며 스카치위스키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스코틀랜드에서 소규모로 제조되는 지역적인 밀조 위스키를 잉글랜드 사람들이 몰랐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유럽 경제가 활성화되는 17세기가 되자 위스키 거래가 활발해졌다. 이와 함께 스카치위스키의 상품화가 이루어졌으며, 산업혁명 후에는 위스키 수요가 더욱 증가했다. 그러던 중 1824년에 글렌리벳에 살던 조지 스미스라는 농민이 그때까지 있던 비밀 양조소를 대규모 시설로 다시 건설하고, 정부로부터 면허를 얻어 합법적으로 위스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밀조 위스키 시대로부터 대량 제조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4장 바다와 항해가 넓힌 음주 문화

설탕 혁명과 싸구려 럼

당밀로 만든 싸구려 술 럼: 당밀(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만드는 럼주는 신대륙에서 사탕수수의 폐기물을 이용하여 생산한 싸구려 술이었다. 럼주는 대서양을 오고 가는 뱃사람들의 술이자, 카리브해를 누비며 은을 가득 실은 스페인 함선을 노리던 해적들의 술이기도 했다. 럼은 영국 데번셔 지방의 방언으로 흥분을 뜻하는 ‘럼블리온’이란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럼주는 당밀을 12~20%로 희석하여 만든 원료에 효모를 넣어 양조한 것으로, 누구나 간단히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저렴했다. 발효 후에는 두 번에 걸쳐 증류하고 술통에 담아 숙성시켰다.

럼주에 도사린 노예무역과 해적의 이미지: 처음에 어떻게 럼주를 만들게 되었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18세기, 유럽에 서인도제도산 설탕이 대량으로 공급되며 ‘설탕 혁명’이 일어나자, 설탕을 정제한 뒤에 남은 당밀을 이용하여 영국령 자메이카섬을 중심으로 럼주를 만든 것이다. 카리브 해역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여 사탕수수밭을 만들고, 많은 노예와 식료품, 일용품, 정제 공장 시설 등을 한 데 모은 뒤 유럽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인 설탕을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이는 유럽 자본주의 경제의 원형이 되었다. 설탕의 대중화와 맞물린 대량 생산이 자본주의 경제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예선과 관련한 어두운 역사가 있다. 아프리카 서안에서 출발한 노예선이 설탕 농장에서 일할 흑인 노예를 싣고 서인도제도로 운반했다. 노예를 내리고 난 뒤에는 빈 선창에 당밀을 실어 미국 뉴잉글랜드 식민지로 이동하였다. 당밀을 내린 뒤에는 다시 럼주를 싣고 아프리카로 돌아와 흑인 노예에 대한 값을 치렀다. 이른바 삼각무역이다. 노예선은 삼각무역의 주역이었고, 럼주는 노예무역과 관련되었기에 더욱 어두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럼과 그로기 상태: 영국 해군은 그때까지 수병들에게 맥주를 지급했으나, 점차 저렴한 술인 럼으로 눈을 돌렸다. 럼주에 괴혈병 예방 효과가 있다는 점도 애용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꼽혔다. 그때부터 1670년까지 영국 해군은 수군에게 점심 식사 전에 하루 284mL(1/2파인트)에 달하는 럼주를 지급하였다. 영국 경제를 떠받드는 중요한 기둥 중 하나가 설탕이었기 때문에, 그 교역 루트를 지키는 해군 수병들에게 럼주를 지급한 것은 당연한 보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739년에 불과 6척의 군함으로 파나마의 포르토벨로 요새를 점령하여 유명해진 영국 해군의 버논 제독은 수병의 건강을 생각해서 “럼을 4배의 물로 희석하여 두 번에 나누어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소위 물 타기를 하라는 것인데, 이내 독한 술을 마시는 데 익숙해진 수병들 사이에서 비난이 들끓었다. “물 같은 술을 마실 수 없다”, “왜 인생 최대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것인가?”라며 분노한 것이다. 분개한 수병들은 버논이 그로그램이라고 불리는 거친 평직 외투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희화화하여, ‘올드 그로그’라는 별명을 붙여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습관은 무서운 법, 버논이 제안한 물 탄 럼은 이윽고 ‘그로그’라는 술로 정착되었다. 권투를 하다 상대에게 강타당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그로기’ 상태라고 하는데, 럼주를 과음한 상태에서 나온 말이다. 저렴한 술을 판매하는 싸구려 술집을 ‘그로그 숍’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어원에서 왔다.

5장 근대 사회가 키운 술

고급술의 대명사 코냑

와인의 장거리 수송을 위해 태어난 브랜디: 와인을 부패 없이 장거리 수송해야 했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 끝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열을 가해 와인 속 세균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브랜디가 오늘날 고급술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처음에는 이처럼 와인을 장기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저렴한 술에 지나지 않았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유럽 여러 하천을 지나는 교역망을 지배했고, 네덜란드 상인은 각지에서 와인 매매로 큰돈을 벌고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은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을 구입해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로쉘항을 통해 맥주를 주로 마시던 영국과 북유럽 일대로 내다 팔아 큰 재미를 봤다. 그들은 효율적으로 와인을 운송하여 더 큰 이익을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와인을 증류, 농축시킨 후에 물로 희석하여 팔면 양도 많아지고 부패도 방지할 수 있어 일석이조가 될 거란 생각에 이르렀다. 와인 증류에 적합한 증류기도 연구하여 시험 삼아 증류한 와인을 마셔보자 전혀 다른 음료가 된 듯 맛이 매우 좋았다. 이것이 그대로 브랜디가 되었다. 브랜디의 어원은 네덜란드어 ‘브란데베인’인데, ‘불태운 와인’이라는 의미이다. 증류할 때 불을 가하던 것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코냑과 아르마냑: 코냑은 샴페인처럼 생산지의 이름이 그대로 보통명사가 된 술이다. 프랑스 남서부 샤랑트 지역의 작은 도시 코냑에서는 오래전부터 와인을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었는데, 양질의 보르도 와인에 밀려 인기를 잃었다. 코냑 지역은 석회질 토양으로, 신맛이 강한 포도만 자라나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없었는데, 브랜디를 만들자 신맛이 강한 와인이 오히려 강점이 되어 훌륭한 맛으로 변했다. 브랜디가 영국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인기를 끌자, 코냑의 브랜디도 명성이 높아졌다. 당분이 적은 코냑의 와인은 두 번 이상 증류해도 캐러멜이 되지 않았고, 숙성 과정에서 신맛이 박테리아에 분해되었기 때문에 좋은 향기만 남게 되었다. 증류를 하자 이 지역 포도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다.

코냑은 프랑스 중남부의 리무쟁과 토론세에서 생산한 품질 좋은 오크통 속에서 2년 이상 숙성시켜 만든다. 이때 에스테르라는 방향 성분이 생성되고, 통 재료로부터 색소와 타닌 등이 용출되어 갈색을 띠도록 연구되었다. 코냑 지역민들은 숙성 과정 중에 증발되어버리는 술을 ‘천사의 할당’이라고 불렀는데, 술의 양은 줄어들지만 대신에 좋은 향과 고유의 색채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르도에서 남서쪽에 위치하는 가론강 상류의 아르마냑 지역에서도 코냑과 마찬가지로 17세기에 네덜란드 상인이 브랜디 양조를 주도했다. 그들은 아르마냑의 와인을 싣고 가론강을 따라 내려가 하구에 있는 보르도를 통해 영국 등의 맥주 권역으로 수출했다. 그러자 보르도의 와인 업자들이 법률을 만들어, 가론강을 이용하는 상인은 보르도 와인 이외에는 술을 수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네덜란드 상인은 아르마냑 지방의 와인을 브랜디로 만들어 운반하는 묘수를 찾아냈다. 그러면 다른 술을 취급하게 되는 것이므로 와인 업자들이 불평을 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에 색채를 가미한 와인

혁명을 주도한 보르도 상인: 일반적으로는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명한 와인 평론가 휴 존슨은 바스티유 습격 3일 전에 와인 밀수업자 등이 이끌던 민중이 파리 주변에 있는 관세문 중 하나를 불태운 사건을 중시하고 있다. 여기에 자극을 받아 관세문 습격이 잇따랐고, 그 연장선상에서 바스티유 습격이 있었다고 한다.

파리시는 400년 전부터 입구에 다수의 관세문을 설치하여, 특정물품이 파리로 들어올 때마다 입시세라는 세금을 부과했다. 특히, 와인의 세율이 높아, 파리 시내의 와인 가격은 주변 농촌보다 3배나 비쌌다. 그러나 비과세 특권을 지닌 귀족들은 저렴한 와인을 거리낌 없이 시내로 가지고 들어왔다. 때마침 흉작으로 먹을 것도, 와인을 마시는 것도 녹록치 않았던 파리 시민들이 부당한 세금을 부과하는 관세문에 분노의 눈길을 돌린 것은 당연했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부유한 시민 중에서도, 보르도의 와인 상인들(네고시안)은 대단한 세력이었다. 보르도 와인은 백포도 와인은 백포도주를 2년에서 4년, 적포도주를 5년에서 10년 동안 숙성시켜 완성되는데, 자금에 여유가 있는 와인 상인이어야 포도와 와인을 사들여 제품화하고 영국으로 수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참고로 세계를 대표하는 적포도주의 약 절반이 이 지역에서 나는 포도로 만들어진다.  와인 상인들은 샤토(영주의 저택을 뜻하는 말로, 보르도 지방의 와이너리에 붙은 명칭)의 소유주인 귀족과 투합해야 했기 때문에 ‘자코뱅 클럽’이라는 공화당 우파의 중심이 되었다. 와인 상인들은 귀족을 배제하지 않았고, 온건한 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자코뱅 클럽 내의 온건 개혁파를 ‘지롱드’라고 부른 것은 보르도가 속한 지롱드주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것만 봐도 와인 상인의 정치 세력을 이해할 수 있다.

지역 와인을 선적하는 보르도항은 가론강에 면해 있다. 가론강은 도르도뉴강과 합류하여 지롱드강이 되는데, 보르도에서 지롱드강 하구까지 이어지는 지역의 왼쪽 연안을 메독 지구라고 한다. 이곳의  포도밭은 지역 와인 생산의 중심이다. 지롱드주에 부유한 와인 상인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6장 거대한 인공 공간을 채운 술

챔피언이 된 라거 맥주

잡균을 없애는 방법: 술 대중화의 선두에 선 술은 전통의 맥주였다. 맥주가 어떻게 상품성을 높이고 대량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산업혁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설탕과 같은 환대서양 경제권 상품과, 후추와 같은 아시아의 특산품은 모두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항구 도시 안트베르펜에 모인 뒤, 이곳으로부터 유럽 각지로 팔려나갔다.

플랑드르 상인에게 있어 맥아를 달인 물을 발효한 맥주 ‘에일’은 대량으로 팔리는 효자 상품이었다. 그러나 에일은 알코올 도수가 낮아 저장할 수 없다는 큰 약점이 있었다. 부패를 억제하지 않으면 상품으로 만들기 어려웠다. 이에 플랑드르 상인은 살균 효과가 있는 홉을 사용한 독일 맥주로 눈을 돌렸다. 홉이 들어간 맥주라면 상품이 손상될 비율이 낮아 수익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 대륙의 내부에 위치한 뮌헨은 겨울과 여름의 온도 차가 커서, 겨울에 양조한 맥주가 여름이 되면 미생물이 번식하여 썩는 일이 종종 있었다. 뮌헨의 맥주업자는 이를 막기 위해 맥주 술통을 지하에 내려 겨울에 강물이 언 얼음을 넣어 차게 보관했다. 이렇게 일정 기간 저온으로 숙성한 맥주는 ‘저장한 맥주’라는 뜻의 ‘라거 맥주’라고 불렀다. 플랑드르 상인은 영리하게도 홉을 넣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맥주를 대대적으로 광고하였고, 큰 이익을 낼 수 있었다. .

저온 맥주와 상온 맥주의 경쟁: 맥주가 부패하는 원인은 잡균의 번식 때문인데, 이를 억제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발효가 시작되는 단계에서 대량의 효모를 투입하여 잡균이 증식할 여지를 주지 않는 방법, 다른 하나는 잡균이 번식하지 못하는 저온에서 맥주를 발효시키는 방법이었다. 낮은 온도에서도 발효가 되는 효모만 찾아낸다면 후자의 기술법이 실용화하는 데 훨씬 용이했다.

저온 발효하는 맥주 효모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쓴 결과, 드디어 저온에 강한 맥주 효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양조사들은 가을이 끝나갈 무렵 동굴 속에서 얼음과 함께 맥주를 저장하고, 이듬해 봄에 완성된 맥주를 꺼냈다. 이 라거 맥주를 만드는 효모는 발효 마지막 단계에서 침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면 발효 효모’라고 하며, 이러한 발효를 ‘하면 발효’라고 부른다. 그 이전에 이루어지던 ‘상면 발효’는 효모가 바닥에 가라앉지 않고 액체 속에 떠다니며 발효했으며, 이 효모를 사용한 맥주를 ‘스타우트’ 또는 ‘에일’이라고 불렀다.

1842년이 되자, 지금까지도 라거 효모 맥주로 유명한 체코 서부의 필스너 지방에서 양조한 ‘필스너 우르켈’ 맥주가 등장하였다. 양질의 보헤미안산 홉을 활용한 필스너는 부드러운 향이 가득하고, 태양과도 같은 옅은 노란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맥주였다. 영국의 에일이 하나같이 검은색인 것에 비해 필스너는 보기에도 산뜻한 황금색이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이 무르익은 1874년에는 암모니아식 냉동기가 등장하여 저온을 인공적으로 장기간 유지시켜 맥주를 숙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덴마크의 한센이 라거 효모의 순수 배양 기술을 개발하였는데, 지역마다 라거 효모를 양산하며 눈 깜짝할 새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로써 라거 맥주는 세계 맥주계를 제패하고, 에일은 지역맥주로 전락했다.

맥주의 양산을 가능하게 한 아이디어: 컨베이어 작업으로 맥주를 대량 생산하는 경우에 가장 곤란한 점은, 맥주를 병에 넣은 후 밀봉하여 저온 살균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병 포장 기술은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시대에 개발되었는데, 기계를 이용해 솜씨 있게 많은 양의 맥주를 밀봉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대량 생산 기술이 보다 진일보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서부라는 거대 시장을 가진 대륙 국가 미국에서는 철도망을 통한 맥주의 장거리 운송이 가능했기 때문에, 장기저장이 잘되는 맥주를 양산할 수만 있다면 그로부터 나올 이익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민의 국가 미국에서는 무엇보다 쉽게 마실 수 있는 맥주를 좋아하는 분위기도 고무적이었다.

대량 생산을 하려면, 1870년대에 정착된 병을 섭씨 68~72도의 증기로 끓여 살균하는 기술을 효율화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1892년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 윌리엄 페인터가 발명한 ‘왕관 병뚜껑’은 결정적인 한 수가 되었다. 맥주를 병에 담은 후 왕관 병뚜껑으로 밀폐하는 것은 컨베이어 작업으로 가능하였고, 이는 맥주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페인터가 특허를 취득한 21개의 주름이 잡힌 병뚜껑은 현재도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1920년대 미국에 세계에서 가장 빨리 냉장고가 보급된 점도 1930년대 이후 라거 맥주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의 밑바탕이 되었다.

현재 세계 맥주 생산량은 족히 1억 kL가 넘는다. 세계 최대의 맥주 소비국은 미국이며, 2위인 중국보다 1.5배 이상 많다. 그러나 국민 한 사람당 연간 소비량을 보면 전통적으로 맥주 제조가 발달한 유럽이 우세하다. 157L의 체코가 1위이고 아일랜드와 독일, 오스트리아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0 댓글
본문 피드백
모든 댓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