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탐나는 책 / 2021년 3월 / 236쪽 / 16,000원

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저자 소개

1942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쓰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 등에서 세계사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쓰쿠바대학 강사와 홋카이도교육대학 교육학부 교수를 거치며 20여 년 넘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편집과 집필을 담당했다. NHK 고교 강좌 〈세계사〉의 전임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7년 퇴임 후, 중앙교육심의회 전문부회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시에 NHK 방송 문화센터 등에서 활발한 강의 활동을 펼치며 역사서의 저술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지도로 읽는다』, 『물건으로 읽는 세계사』, 『세상에서 가장 쉬운 패권 쟁탈의 세계사』, 『흐름이 보이는 세계사 경제 공부』 등 다수가 있다.

책소개

모든 음식과 재료 속에는 인류의 역사가 담겨 있다. 케첩과 레몬을 곁들인 굴로 만든 오르되브르를 입에 넣는 순간에도 역사 속 여러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온수지에서 굴을 양식하던 장면이나 굴 요리용 오이스터 포크가 만들어진 이유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신대륙에서 온 토마토가 중국이 기원인 발효 소스 케첩과 만나게 되는 과정을 생각할 수도 있다. 오늘날 식탁 위는 전 세계의 식자재가 활약하는 대극장이 되었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식재료와 요리는 제각각 맡은 연기를 하며 매일 세계사를 재연하고 있다. 각각의 식자재가 언제, 어떻게 모습을 드러냈는지를 알면 식탁이라는 무대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본 본문

인류를 창조한 자연이라는 식량 창고

썩어가는 식자재와의 싸움

부패는 요리의 어머니: 수렵 채집 시대에는 자연이 선사해 주는 식자재가 식문화 그 자체였다. 식자재의 획득이 계절적으로 한정된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식자재의 부패를 막고, 시간이 흐르면 나빠지는 식자재의 맛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요리법이 탄생했다. 역설적이게도 부패는 요리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처럼 요리는 식량의 소비 양식을 넘어서 문화의 토대가 된다.

부패를 막은 소금과 식초: 수렵 채집 사회의 가장 큰 숙제는 음식을 썩지 않게 오래 보관하는 것이었다. 농업 사회가 되어서도 소금과 식초 등을 이용한 식자재의 보존법이 세계 각지에서 연구되었고, 수렵 채집 사회부터 생식을 연장하기 위해 행해져 온 건조와 발효법도 유효했다. 지금부터 내륙에 위치하여 생식을 멀리한 중국과 생식을 버리지 못한 일본의 식품 보존법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자.

고대 중국에서는 날생선이나 날고기를 젓갈로 만들어 보존하였다. 해산물이나 육류에 소금을 넣고 절여 자연스럽게 발효시킨 것이다. 전국 시대부터 한으로 이어지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지(鮨)’라는 생선 절임과 ‘해(臨)’라는 고기 절임을 많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대(기원전 202~서기 220)에는 양쯔강 이남의 강남 지역을 개발하여 경작지를 넓혔고, 이때 쌀을 발효시키는 보존법이 등장했다고 한다. 고기나 생선에 소금과 쌀밥을 섞어 3개월에서 1년간 발효시키는 방법이다. 잘게 저민 생고기나 생선, 또는 그것을 식초에 절인 회도 만들어졌다. 아세트산균이 발효하면서 만들어진 식초는 식품 보존에 유용하였다.

살균과 방부 작용을 하는 소금이나 식초를 식품 보존에 이용한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식초는 와인으로 만들었는데, 영어로 식초를 의미하는 비니거(vinegar)는 프랑스어의 방(vin, 와인)과 시큼하다는 의미의 에그르(aigre)의 합성어이다. 식초는 발효되어 시큼해진 와인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벼농사의 전래와 함께 전통적인 보존 식품인 스시와 독자적인 생식 문화가 발전하였다.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시대(1338~1573) 중기에 날생선을 먹는 사시미와 발효시켜 산미가 있는 쌀에 날것에 가까운 생선을 더한 스시가 등장했다. 에도 시대(1603~1868)에는 간장이 보급되었고, 오늘날과 비슷한 사시미와 스시가 만들어졌다. 자투리로 남은 날생선을 초밥 위에 얹어 간장에 와사비를 넣은 소스에 찍어 먹는 스시는 일종의 패스트푸드로 하나야 요헤이(1799~1858)란 사람이 만들었다.

농경과 목축에 따른 음식의 정형화

쌀, 밀, 옥수수로 만든 음식의 세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쌀의 여정: 벼는 같은 작물을 연이어 같은 땅에 재배하여 땅을 못 쓰게 만드는 연작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고 생산량이 많아 인구 부양력이 높은 작물이다. 중국과 인도처럼 인구가 많은 나라는 모두 쌀에 의해 유지된다. 오늘날 벼는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며,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의 주식이다.

벼는 윈난과 아삼의 산악 지방을 기원으로 하는데, 동아시아의 양쯔강, 동남아시아의 메콩강, 그리고 인도의 갠지스강을 따라서 전파되었다. 특히 메콩강 유역은 자포니카종(japonica, 일본형)과 인디카종(indica, 인도형)이라는 두 종의 벼가 모두 발견되어 쌀의 원형지로 보고 있다. 그곳을 기준으로 동쪽의 중국, 한국, 일본으로 자포니카종이, 그리고 서쪽의 인도로 인디카종이 퍼졌다.

자포니카종 쌀은 부드러우면서 점성과 탄력이 있으며, 은은한 향과 맛이 있다. 일본에서는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처음에는 자포니카종이 재배되다 11세기 무렵에 베트남 남부로부터 인디카종에 속하는 참파(城, 점성) 벼가 들어왔다. 가뭄에 강하고 두 달 안에 수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컸기 때문에 자포니카종을 몰아내고 강남 지방 논의 80~90%가 참파 벼로 바뀌게 되었다.

인도에는 아삼 지방을 경유해서 가느다랗고 퍼석퍼석한 인디카종 쌀이 전해졌다. 2,700년 전부터 1,700년 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는 쌀의 특성을 반영하여 기름에 볶는 독특한 조리법이 개발된다. 쌀을 끓이다가 중간에 물을 버린 후 찐 다음 기름에 볶는 방법이다. 인도 요리 플라오(pulao)는 물소의 젖을 발효하여 응고시킨 기(ghee)라고 하는 기름에 소금을 추가하여 볶은 것이다.

인디카종은 인도를 제2의 원산지로 하여 이슬람 제국에 전해졌으며, 나아가 지중해와 유럽 일대에 전파되었다. 쌀을 뜻하는 영어 단어 라이스(rice)는 고대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에서 기원한다. 아울러 인도식 쌀 요리법도 서역에 전해졌고 여러 지역에서 기름에 쌀을 볶는 요리를 하게 되었다. 참고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쌀을 채소의 일종으로 여겨서 육류 요리에 곁들일 때 버터로 볶는 경우가 많다.

변형된 쌀 요리의 하나로 터키가 원조인 필라프(pilaff)가 있다. 터키어로 밥 한 공기를 뜻하는 필라프는 먼저 쌀알과 잘게 썬 양파를 버터에 볶은 다음 부이용(bouillon, 고기나 채소를 끓인 액체로, 소스나 포타주 등을 만들 때 쓰는 국물)으로 만든 수프를 넣어 마저 볶는다. 여기에 추가로 양고기나 해산물, 버섯 등의 건더기를 넣은 일종의 영양밥이다. 한편 중국의 차오판 (炒飯)은 딱딱하게 볶은 밥을 라드(lard, 돼지의 비계 기름), 건더기와 함께 볶아 소금, 후추, 간장으로 간을 한 것으로 필라프와는 발상이 완전히 다르다.

필라프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이탈리아의 리조토(risotto)는 쌀을 올리브유, 버터와 함께 볶아 만든다. 스페인 동부의 발렌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요리 파에야(paella)는 일찍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요리로 쌀과 건더기를 올리브유로 볶은 후 수프를 추가해 볶는다. 지역마다 쌀 요리법도 조금씩 다른 것이 흥미롭다. 쌀이라는 같은 재료가 들어가도 소비하는 양식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반영되는 법이다.

건조 지대를 지탱해 준 밀: 밀은 껍질이 딱딱하기 때문에 가루로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매우 손이 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좋은 점이 있었는데 가루로 만들자 발효가 쉬워진 것이다. 밀은 효모균이 방출한 가스를 반죽에 담아주는 역할을 하는 글루텐의 함유량이 다른 곡물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인도, 파키스탄, 이란의 '난',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의 '탄나와', 서양의 '빵' 등은 모두 밀반죽을 발효해 만든 것이다.

일찍이 고대 이집트에서도 밀을 발효시켜 부풀린 빵을 먹었다. 이집트의 빵은 제빵사가 대량으로 빵을 굽는 작업을 하다가 깜박하고 화덕에 넣지 않아 발효가 일어난 반죽을 구워봤다가 알게 된 우연의 산물이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말처럼 이집트는 나일강의 은혜를 입어 밀을 경작했고, 밀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풍작의 여신 이시스가 머리에 밀을 이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고대인에게 있어 울퉁불퉁한 돌 사이에 낟알을 넣고 갈아 으깨는 작업은 매우 고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공장을 영어로 밀(mill)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본래 뜻은 맷돌이며, 제분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제일 오래된 작업이라는 점을 반영한다. 사람의 힘으로 낟알을 가는 원시적인 제분법이 맷돌을 이용하는 제분법으로 바뀐 것은 로마 제국시대부터였다. 맷돌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한 시대(기원전 124~기원전 42)에 중국으로 전해진 뒤 동아시아에 알려졌다.

기원전 2000년경에 빵을 굽는 가마가 등장했고, 고온의 가마 내벽에 반죽을 붙여서 빵을 굽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에게도 많은 양의 빵과 맥주를 제공했다고 하는데, 중왕국(기원전 22세기~기원전 18세기) 시대에는 전문적인 제빵사가 등장하고 빵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기원전 5세기에 이집트를 여행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인은 빵을 먹는 사람들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집트 빵의 품질이 좋다는 사실은 주변 세계에 널리 알려질 정도였고, 그 가짓수도 40종에 달했다고 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빌헬름 치르(Wilhelm Ziehr)의 『빵의 역사』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관리의 급료로 연간 360잔 정도의 맥주, 900개의 하얀 빵, 3만 6,000개의 일반 빵(빵의 색에 따라 신분의 차이를 나타냈는데 상류층은 하얀 빵을 먹었다)이 현물 지급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파라오가 여행을 떠날 때면 수만 개의 빵을 구워 왕과 시종들이 여행용으로 지참했다고 한다. 좋은 빵을 굽는 기술은 대도시에만 있었다고도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보물 옥수수: 콜럼버스가 1492년에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가져온 또 다른 벗과의 곡물 옥수수는 안데스 산악 지대가 원산지이다. 멕시코의 테와칸 골짜기에서 발견된 7,000년 전의 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옥수수 알갱이가 발견된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 일대에서 옥수수를 재배해 온 것 같다. 마야 문명부터 아즈텍 제국, 잉카 제국에 이르는 신대륙의 문명은 옥수수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수수는 낟알 1개로 800배에 달하는 수확이 가능한 생산성을 자랑하는데, 약 100배 정도 수확할 수 있는 쌀보다도 월등한 수치이다. 현재 옥수수는 식량과 가축 사료 용도로 세계적으로 수천 종이 재배되고 있으며, 곡물의 왕으로 꼽히고 있다.

옥수수를 사용한 요리로는 스위트 콘(sweet corn)에 베샤멜 소스(bechamel sauce)와 우유를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콘 수프와 멕시코 요리인 토르티야(tortilla) 등이 있다. 토르티야는 옥수수 가루를 개어서 만든 반죽을 원형으로 얇게 늘린 뒤 도자기로 된 판 위에서 평평하게 구운 빵이다. 여기에 고기, 해산물, 소시지, 치즈, 토마토, 아보카도 같은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 멕시코 농민이 간식으로 먹는 타코스(tacos)가 된다. 토르티야는 아즈텍 제국에서 틀락스칼리(tlaxcalli)라고 불리던 전통 요리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는 말린 옥수수 가루를 연한 석회수로 처리한 후 갈아서 점성이 있는 반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계 4대 요리권의 탄생

제국에서 체계화된 요리

제국과 궁정 요리: 지역별로 식자재와 조미료, 조리 기술이 조합되어 요리 체계가 정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00년에서 4,000년 전 사이의 일로, 거대 제국들이 그 기초를 다졌다. 특히 제국의 수도에서 발달한 궁정 요리를 중심으로 요리의 체계화가 진행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에 걸쳐서 서아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경~기원전 330경), 남아시아의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17경~기원전 180경), 동아시아의 진한(秦  漢) 제국(기원전 221 ~기원후 220), 지중해 세계의 로마 제국(기원전 27~395년에 동서 분열) 같은 대제국이 유라시아에 잇달아 등장한 것이다. 도시의 형성과 문명의 성립은 기원전 5,000년 무렵의 일로, 제국이 세워진 시기는 문명의 성립과 현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새롭게 성립된 대제국의 수도에는 세금을 통해 막대한 부가 쌓였고 이를 기반으로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각 지방의 식자재, 조미료, 요리 기술이 수도로 유입되었고, 왕궁 조리사 등 전문가의 손에서 요리 체계가 정비되었다. 수도에서 체계화된 요리법은 지방의 도시를 경유해서 제국 주변 지역으로 전해졌고, 요리권이 형성되었다. 동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지중해 요리권이 탄생한 순간이다.

세계 3대 요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는?”이라고 질문하면 다양한 답이 가능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요리, 프랑스 요리, 터키 요리를 세계3대 요리로 꼽는다. 그러나 이 세 요리가 형성된 시기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

중국 요리는 진  한 제국 이후로 2,000년 넘게 중화 제국의 전통 안에서 자랐으며, 송나라(10세기 말~13세기) 때 기본 형태가 정비되었다. 중국 요리는 복잡다단하지만, 크게 청나라(1616~1912)의 궁정 요리를 이어받은 베이징(北京) 요리, 양쯔강 하류의 풍부한 쌀과 어패류를 식자재로 하는 상하이(上海) 요리, 양쯔강 상류의 내륙 분지에 형성된 쓰촨(四川) 요리, 그리고 남쪽의 풍부한 해산물을 잘 살린 광둥(廣東) 요리로 구분할 수 있다. 각각의 요리에는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명물 요리가 있으며 폭넓고 깊은 내연을 지니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의술과 요리를 하나로 보곤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자연에서 온 다양한 산물의 효능을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터키 요리는 세 대륙에 걸친 넓은 영토를 자랑한 오스만 제국(1299~1922) 하에서 체계화된 것으로, 그다지 오래된 편은 아니다. 흔히 터키 요리라고 하면 양 꼬치구이인 시시 케밥(shish kebob)이나 빵과 함께 먹는 되네르 케밥(d  ner kebob) 등을 떠올리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다. 돌마(dolma) 또는 사르마(sarma)라고 부르는 각종 재료로 속을 채운 요리도 있고, 불가리아산이 유명한 요구르트도 알고 보면 테키어의 요우르트(yogurt, 휘젓는다)에서 온 말이다. 터키 요리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지중해 요리가 합쳐진 형태로 그야말로 제국다운 요리이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있는 토프카프 궁전의 주방은 매일 6만 명분의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규모와 체제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루에 사용되는 식자재가 양 200마리, 새끼 양과 염소가 100마리, 닭이 600마리 남짓에 이르렀다고 한다. 터키 요리는 오스만 제국의 궁정 요리를 중심으로 각 지방의 요리가 조합되어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프랑스 요리는 고대 로마 제국의 궁정 요리를 토대로 세련된 조리 기술과 지역의 명물 요리를 조합한 것이다. 19세기에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근대 이후의 요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유럽은 세계 각지의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부가 흘러들어 오는 제국들의 각축장이었는데, 프랑스 요리는 이 시대가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맛의 토대를 구축한 세계 4대 요리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세계의 요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분도 가능하다.

1. 주로 돼지고기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과 기름을 사용한 요리와 특유의 보존 식품이 인상적인 중국 요리권

2. 커리와 기(ghee, 기름)를 이용한다는 특징이 있고, 양과 닭을 주 재료로 쓰는 인도 요리권

3. 이란, 아랍, 터키 등 다수의 요리 문화가 섞여 있으며 양을 주재료로 강렬한 양념을 많이 사용하는 아라비아 요리권

4. 빵을 주식으로 하며 햄과 소시지 같은 육류 요리가 특징인 유럽 요리권

이러한 구분은 거대한 제국을 기반으로 형성된 세계사의 틀과 겹친다. 그러므로 이 4대 요리권을 통해 대항해 시대 이전의 음식 세계를 상상해 보는 것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식문화 교류

식자재의 쉼 없는 이동

이주와 교역을 통해 움직인 식자재: 유라시아는 많은 문명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대륙으로, 늘 인류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식문화가 주도권을 놓고 경쟁해왔고, 그러면서도 각 문화권은 초원길, 실크로드, 바닷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각종 식자재와 향신료, 요리법이 길 위에서 장대한 교류를 이어갔다. 이 같은 교류는 교역과 이주, 포교, 전쟁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주와 무역의 역할이 컸다.

세계사는 7세기에 이슬람의 대정복 운동에 의해 크게 바뀌었다. 이로 인해 고대 지중해 세계와 페르시아가 붕괴하였고, 새롭게 성립된 거대한 이슬람 세계가 유라시아를 지배했다. 이슬람 제국은 아바스 왕조(750~1258) 시기에 유라시아 대부분을 연결한 상권을 만들었고, 동서를 가로지르는 식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만에서 시작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 해역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고,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항로와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는 교역로, 러시아의 하천을 이용하여 발트해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바이킹 교역로, 전통적인 실크로드 등이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었다.

이 광활한 네트워크 위에서 수많은 식자재와 요리법이 움직였다. 특히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인도의 식자재가 서아시아를 넘어 이베리아반도로 이어지는 광활한 이슬람 세계로 전해진 것이 눈에 띤다. 쌀, 사탕수수, 야자나무, 바나나, 타로 고구마, 망고, 가지, 시금치 그리고 감귤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13~14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정치  경제적으로 통일 하면서 육지와 바다 교역로를 지배했다. 음식의 교류 역시 더욱 큰 규모로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유목민의 식문화가 농경 문화권에 알려졌다.

알리바바가 외운 참깨의 수수께끼: 유라시아에서 식자재의 교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수많은 식자재 중에서도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참깨는 특히나 오래된 것이다. 참깨는 서아프리카 니제르강 유역의 사바나 지대가 원산지로,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넓은 지역으로 퍼졌다. 참깨는 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에 귀중한 식자재로 대접받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참깨로 만든 과자를 먹었다고 전해지고, 인더스 문명에서도 참깨를 식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나왔다. 한편 참기름에는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성질이 있어 일찍이 향료를 녹여 미용 목적의 기름으로 사용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전신에 참기름을 발라 부드러운 피부를 유지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흰깨를 정제하여 짠 기름을 머리를 정돈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는 올리브유의 사용이 늘었기 때문에 참깨는 환영도 주목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24?~79)가 “참깨는 위에 좋지 않다”라는 말도 남겼을 정도였다.

참깨 하면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페르시아의 어느 마을에 카심과 알리바바 두 형제가 있었다. 형인 카심은 돈이 많은 여자와 결혼해 부유한 상인이 되어 윤택한 생을 산다. 형과 달리 동생인 알리바바는 가난한 여자와 결혼했고 장작을 팔아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가 된다. 그런데 알리바바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알리바바가 숲에서 장작을 줍다가 40인의 도적이 동굴에서 금은보화를 옮기는 모습을 우연히 본 것이다. 도둑 무리의 대장이 “열려라 참깨”라고 외치자 신기하게도 동굴의 문이 열렸다. 도둑이 떠난 뒤 알리바바는 “열려라 참깨”를 외쳤고, 동굴의 문을 열어 막대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 나중에 동생의 비밀을 알게 된 형 카심은 “열려라 참깨”를 외쳐 동굴 안으로 들어갔으나 막상 나올 때는 주문을 잊어버려 “열려라 보리”, “열려라 귀리”, “열려라 완두콩”, “열려라 쌀” 등 곡물의 이름을 넣어 주문을 외쳐보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대체 왜 참깨가 주문이 된 건지 궁금해진다. 참깨는 익으면 껍질이 길쭉하게 네 갈래로 찢어져 땅으로 씨앗이 떨어진다. 그 모습은 마치 동굴의 문이 열리면서 숨겨져 있던 보물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열려라 참깨'는 동굴 속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주문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이슬람 세계에서는 영양이 풍부한 참깨를 신비로운 이미지로 봤다.

대항해 시대 때문에 변한 지구 생태계

세계의 식탁을 장식한 신대륙

사랑의 미약 토마토: 토마토도 신대륙에서 온 작물로 세계 각지의 요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유럽인의 토마토 사랑이 특별한데, 영국에서는 사랑의 사과(love apple), 이탈리아에서는 황금 사과 (pomodoro)라는 별칭으로도 부른다. 이탈리아에서 황금이라고 부른 이유는 처음에 들어온 토마토가 노란빛을 띠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처음에는 토마토를 사과의 친척쯤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토마토는 사과가 아니라 가짓과의 식물로, 고향은 감자와 마찬가지로 안데스의 고지대이다. 야생의 토마토는 기껏해야 지름이 1cm에 불과한 작은 것이었는데, 토마토가 안데스를 넘어 멕시코에 전해진 후 아즈텍 사람들이 품종 개량을 거듭하여 원래보다 수십 배 커진 것이라고 한다. 남미의 원주민들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토마토를 태양의 선물이라고 부르며 즐겨 먹었는데,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토마토라는 단어의 어원은 아즈텍에서 토마토를 부르는 말의 끝에 토마틀(tomatl, 불룩한 열매라는 뜻)이란 수식어를 붙인 데서 유래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유럽에 전달했고, 그렇게 토마토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토마토가 유럽에 전해진 유래에 관해서는 콜럼버스가 두 번째 항해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는 설과 이름 없는 스페인 선원이 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유럽 문헌에 토마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44년에 베네치아 사람이 쓴 책으로, 잘 익으면 황금색이 되는 작물로 소개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1596년에 제럴드라는 식물학자가 자택 정원에서 토마토를 재배하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토마토는 유럽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식자재가 아니라 관상용 작물로 여겨졌다. 의사 중에는 신비한 효능을 지닌 약용 식물로 보는 이도 있었고, 생산성이 높은 황금빛 토마토를 정력이나 최음에 좋은 식물이라고도 생각했다. 유럽에서는 처음에 토마토를 사과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과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것으로 사랑의 상징이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1640~1660) 기간 중에 법률로 토마토의 재배를 금지했는데, 이유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야 토마토를 최음제로 먹는 일은 없겠지만, 여전히 영국에서 토마토를 사랑의 사과로 부른다든가 미국에서 정력에 좋다는 뜻인 늑대 사과(wolf apple)로 부르는 것은 예전의 이미지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의 토마토 재배는 17세기 이후에 기후가 온난하여 노지 재배가 가능했던 이탈리아에서 본격화되었다. 18세기가 되면 시칠리아섬이 세계 최대의 토마토 산지가 되었고, 씨앗에서 짠 기름으로 비누도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토마토를 파스타와 조합하여 먹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엽의 일로, 남부의 나폴리에서부터다. 토마토는 생선이나 고기의 잡내를 잡고 적당한 산미로 채소의 맛을 끌어내 요리를 빛내는 식자재로 재평가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파스타에 토마토소스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피자에도 토마토소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일인당 연간 토마토 소비량은 약 55kg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생산면에서도 유럽의 약 40%를 차지한다.

칠면조는 인도 새? 터키 새?: 칠면조는 신대륙을 대표하는 꿩과의 조류로 생김새가 매우 볼품 없다. 머리부터 목까지 피부가 노출되어 살덩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울퉁불퉁한 돌기는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등으로 변하는데 칠면조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달리 육질은 매우 훌륭하다.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때 으레 칠면조 속에 버섯이나 밤을 넣은 요리를 먹곤 한다. 미국에서는 칠면조를 새고기의 왕으로 꼽는 데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마침 새끼 고기를 먹기 좋은 시기가 되고, 버섯이나 나무 열매도 익는 시점이어서 적당했다. 본래 칠면조의 새끼 고기를 즐기는 것은 원주민의 식문화였는데, 유럽의 이민자에게 흡수되어 기독교 세계와 융합되었다.

이러한 문화 융합의 배경에는 미국을 개척한 필그림 파더스의 힘들었던 정착기와 그들을 도운 원주민 간의 교류가 있다. 1620년, 102명의 영국인 청교도가 국왕 제임스 1세의 종교 탄압을 피해서 범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보스턴 동남부의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험난한 기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식민지를 개척해 나갔는데, 이때 그들의 생명을 구해준 것은 농사법을 알려준 원주민이었다. 살아남은 청교도는 이듬해 11월에 신과 원주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감사제를 열었고, 당시 식민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식재료였던 칠면조를 구웠다. 이것이 관습이 되어 이어진 크리스마스에도 칠면조 요리를 먹게 되었다. 미국에서 11월 넷째 주 목요일인 추수감사절은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이 국가 행사로 지정했다.

야생 칠면조는 중미에서 북미에 걸친 넓은 지역에 서식하고 있으며, 아즈텍과 마야에서 파보(pavo, 아름다운 새)라고 불리며 신성시되었다. 코르테스 (1485~1547)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당시, 아즈텍의 궁정에서는 매일 100마리의 칠면조를 먹었다고 한다. 칠면조는 1518년에 스페인인이 유럽으로 들여온 이후 지중해 연안에서 주로 사육되었다. 크고 맛 좋은 칠면조를 통구이로 먹는 식문화가 이내 유럽에 전파되었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칠면조는 가금류 중에서 가장 크며, 우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제일 맛있는 고기이다”라고 적었다. 19세기 초반, 11월부터 2월까지 4개월간 파리에서만 약 3만 6,000마리의 칠면조가 요리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칠면조를 먹는 식문화는 프랑스에서도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칠면조는 영어로 터키(turkey)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터키에서 온 새를 뜻한다. 유래는 아프리카가 원산지로 터키로부터 영국으로 들어온 호로호로새를 터키 닭(turkey cock)이라고 부르다가, 이 새와 유사하게 생긴 칠면조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도시를 지탱하는 가공식품

식품 가공업의 등장

도시의 활기찬 발소리: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시민혁명은 정치 경제적으로 인류 사회의 면모를 크게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혁명으로 인한 혼란을 딛고 더욱 강해진 유럽은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회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산업혁명이 초래한 변화는 대단했다. 식품을 포함해서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들로 일상생활이 채워졌다. 생산의 터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였고, 도시에 사는 부유층의 힘은 전례 없이 강해졌다. 국민 국가를 지향하는 사회 체제가 갖추어졌고, 이는 전 세계가 따르는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한편 철도와 증기선으로 연결된 망이 전 세계를 아우르게 되었고, 유럽은 압도적인 무기를 앞세워 아시아와 아프리카로의 진출을 본격화했다. 세계 각지로 이주한 유럽인은 그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을 이끌게 되었다. 전 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재정비되었고, 유럽의 생활양식이 그대로 세계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식문화에 있어서도 유럽은 세계 각지의 식자재를 들여와 산업화된 도시 생활에 맞는 양식으로의 변화를 주도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철도와 증기선을 이용한 대량 운송이 가능해졌고, 냉장선이 개발되는 한편, 저온 살균 방식으로 식품을 가공하거나 통조림을 제조하는 산업이 성장하였다. 북미와 남미의 초원 지대에서 생산된 값싼 곡물과 고기가 증기선과 냉장선을 타고 대량으로 유럽에 들어왔다. 유럽의 식탁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식량 창고에서 들여온 식자재로 넘쳐나게 되었다. 생활필수품뿐만 아니라 고급 식자재도 연이어 개발되어 부유층 사이에서는 미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도시가 무서운 기세로 확장되어 1900년에는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가 9개나 되었다. 주로 공장이 들어선 도시에서는 식량을 자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방대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식품 보존 기술이 개발되고 음식의 가공화를 추구하는 것이 새로운 추세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온 식자재를 가공해서 만든 상품이 식탁에 놓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가공식품의 증가는 사람의 입맛까지 바꿔놓았고, 식품첨가물은 식품의 일부가 되었다. '음식의 제3차 혁명'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윤만 추구하는 식품업자가 조악하게 만든 불량 식품이 등장 하는 등 새로운 사회 문제가 대두되었다.

레스토랑이 된 수프: 유럽에서는 미식이 유행하였고, 도시의 번화가에 자리한 레스토랑에는 연일 손님이 끊이지 않는 등 활기가 넘쳤다. 레스토랑이 등장한 것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18세기 말 이후의 현상이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도시의 거주민이 돈을 내고 음식점에 가서 요리를 주문해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레스토랑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약 30년 전쯤 생긴 것인데, 그때까지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이 없었고 그저 외식이 가능한 여관이나 술집 등이 있었을 뿐이다. 1765년, 파리에 사는 블랑자라는 요리사가 소고기, 양고기, 거세된 닭, 비둘기 새끼, 메추라기, 양파, 무, 당근 등이 들어간 수프를 만들어, 원기를 회복시켜준다는 뜻의 레스토랑(restaurant)이란 이름을 붙여 팔았다. 그의 수프는 금세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여기서 레스토랑이라는 음식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식당의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1786년에는 요리와 음료를 제공하는 가게를 레스토랑이라고 부를 것을 정한 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브리야 사바랭은 요리에 하나하나 가격을 매기고 손님의 주문에 따라 요리가 나오는 가게를 레스토랑이라고 정의했다. 레스토랑은 기존의 여관이나 술집과는 다르게 안락하고 호화스러운 실내에서 차분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부유층 고객을 사로잡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귀족들이 특권을 빼앗기자 국왕과 귀족이 고용했던 수많은 요리사가 직업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레스토랑을 열었고, 혁명 후에 급부상한 도시의 부유층을 고객으로 삼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혁명 전 50개 이하였던 파리의 레스토랑은 40년 후인 1827년이면 약 3,000개로 늘었고 매일 6만 명이나 되는 파리 시민의 식사를 책임지게 되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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