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빈티지하우스 / 2020년 8월 / 343쪽 / 16,000원

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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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박윤진 지음

책소개

20여 년간 직장인으로 살아오며 밤에는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50대의 고민은 ‘돈’이 아닌 ‘불안’이 문제라고 말한다. 수많은 직장인 선후배들의 고민을 듣고 동서양 철학자들의 지혜에서 답을 찾아 헤맨 저자는 하이데거의 ‘불안’ 개념에서 답을 찾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은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고 묻는 양심의 목소리이며, 50대들이 불안한 이유는 양심의 목소리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함께 철학을 공부하기를 권한다.

요약본 본문

3장 나는 회사원이었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어찌 됐건 우리는 그동안 회사에서 편히 살았단다. 자영업 하는 친구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꼬박꼬박 월급 타 먹어 세상 물정 모른단다. 초대형 태풍 소식에 내일 가게 문 여냐고 물었다가, “너는 태풍 오면 밥 안 먹나 보지?” 핀잔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세상 물정 모른다는 증거 같기도 해 씁쓸하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자 내가 그동안 얼마나 편히 살았고 세상 물정 잘 모르는지 느낀다. 이런 나를 그동안 먹여 살려준 회사가 고맙기도 하다. 인정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안정적 생활패턴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정적 생활에 기초해 이웃과 세상을 읽게 된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다. 지금껏 잘 살아온 방식을 왜 문제 삼겠는가?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런 생활을 더 오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골몰해 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런저런 속 편한 해석에 수십 년간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영원한 임금노동자로 남아있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과 임금이 같은 값어치를 갖는다고 근로계약서에 서명한 사람들이다. 인간의 노동을 인격의 실현이나 가치로 본다면, 임금은 노동한 사람의 존재가치인 셈이다. 따라서 임금노동자의 존재가치는 돈 버는 데 얼마나 쓸모 있느냐로 판가름 난다.

문제는 노동의 가치, 즉 일한 만큼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부러지게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성과를 평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나는 얼마짜리 사람’이라고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회사에서 받아 온 돈이 바로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물화(物化)되었다고 한다. 물화는 나를 어떤 물건으로 설명하고 거기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하는 습관이다.

은퇴는 안정적 수입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줄어든 수입만큼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쉽다. 이렇게 떨어진 자존감이 안정감을 줄 리 없다. 쓸모없다는 자기 평가는 불안의 원인 중 하나다.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한 철학 노트: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회사와 닮아 있습니다. 회사에서 사람과 일을 만났던 방식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아 이제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습관은 밖으로 드러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회사의 습관을 벗고, 나만의 올곧은 습관이 생기도록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새 마음과 비교할 헌 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회사에서 내가 겪었던 인지 부조화 상황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이 중에서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가치 충돌 상황이 있나요?

2. 회사생활을 하면서 평소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신념과 달라진 것이 있나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3. 퇴직 후 바꿨으면 하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까? 그 습관이 회사생활과 관계 있나요? 왜 바꾸길 바라나요?

4장 삼식이가 될까봐 불안해

문제는 바닥난 자존감이다

고백한다. ‘삼식이’란 말을 몰랐다. 식사하다 우연히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야, 삼식이 안 되려면 친구들한테 잘해야 돼. 제수씨가 언제까지 끼니를 챙겨줄 것 같냐? 친구가 있어야 가끔 외식도 하고 밥도 얻어먹지. 안 그래?” 삼식이를 검색한 결과는 이렇다. ‘은퇴하고 집에서 세끼를 다 먹는 남편.’ 충격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삼식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우선, 은퇴한 사람의 자존감이 매우 낮다는 걸 보여준다. 아내가 삼시 세끼를 차려줘야 한다는 건 밖에 나갈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은퇴 후 환경은 변했는데 몸과 마음의 적응은 고사하고, 아직 기초적인 생활능력도 익히지 못한 것이다.

요즘 전기 제품들은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하지만, 어디를 눌러야 할지 잘 모르게 생겨먹었다. 일단 용기를 내서 터치를 해 보긴 하지만, 따뜻한 밥까지 가기엔 멀고 험난하다. 어쩌면 삼식이는 혼자 밥을 해보려고 몰래 전기밥솥을 건드렸다가 이상하게 작동하자, 혼날까봐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삼식이란 말에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함께 배어있다. 은퇴자도 안다. 아내도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 아이들을 번쩍번쩍 들어올려 달래고, 방을 쓸고 닦고 빨래까지 척척 해낸 아내다. 그뿐인가. 명절이면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그 많은 음식과 설거지를 해냈다. 무릎과 허리가 온전하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로 집안을 챙긴 유일한 사람이 아내다. 반면, 나는 제대로 된 선물 한 번 못해줬다. 호강은 고사하고 고생만 시킨 것 같다. 그런데 남들보다 일찍 퇴사해 이렇게 식탁 앞에 앉아있게 될 줄이야. 밥까지 차려줘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무능력하게 될 줄이야. 무너진 자존감에 비참하면서도 밥을 차리는 아내를 몰래 훔쳐보며 속으로 얼마나 답답하고 미안하겠는가.

심각한 것은 삼식이란 말이 드러내고 있는 매우 낮은 자존감이다. 자존감에는 크게 세 가지 기본 축이 있다. 자기 효능감, 자기 조절감, 자기 안전감이 그것이다. 자기 효능감은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만족감이다. 삼식이는 이게 꽝이다. 밥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쓸모 있게 여길 리 없다. 자기 조절감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알아서 결정하고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다. 삼식이는 이것도 꽝이다. 밥을 하고 싶어도 밥통이 도와주질 않는다. 내가 밥통이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자기 안전감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만족감이다. 이게 없으면 자기 효능감과 자기 조절감이 높을 수 없다.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매일 눈칫밥을 먹는 삼식이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리 없다. 결론적으로 삼식이는 자존감이 완전 바닥인 셈이다.

자존감은 인간관계에서 기본 체력과도 같다. 모든 인간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디자인된다. 사람은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내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따라서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고, 안전하게 쉴 수도 없다고 느낀다면 인간관계가 원만할 수 없다. 체력이 약한 사람은 높은 산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해 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한다. 모든 일에 무기력하면서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면 자존심이 상한다. 열등감 때문이다. 결국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사람을 피하게 된다.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한 철학 노트: 신병훈련소 퇴소하는 날, 하루 외박이 주어집니다. 어머니께서는 압력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따뜻한 밥 한 끼 손수 해주시고 싶다며 그 무거운 걸 서울에서 강원도 양구까지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 엄마 참 극성이다 못마땅했는데, 그날 여관에는 똑같이 생긴 압력솥 일곱 개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갓한 밥만 보면 그날 먹었던 밥과 부모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1.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음식이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음식이 있나요?

2. 요리에 비유하자면, 나는 어떤 음식이 될까요? 누구를 위한 음식이 되고 싶은가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면 왜 그런가요?

3. 직접 만든 막걸리가 익었으니 놀러오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덕분에 친구들이 모여 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런 모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음식과 사람을 잇는 모임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데 최고입니다. 모임계획서를 한번 만들어 보세요.

5장 원망해도 괜찮아

원망이라도 해라, 화를 내면 더 좋다

회사원들은 오랜 기간 인지부조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인지부조화는 자신의 신념과 모순되는 현실에서 겪는 심적 혼란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갈등하다가 결국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그 갈등 에너지는 계속 몸에 남는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몸에 남아 있는 갈등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죽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잠시 정지했던 뇌를 다시 깨워야 한다. 뇌가 살아나서 몸에 고여있던 에너지를 쓰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에드문트 후설에 따르면, 인간 의식에는 지향성이 있다. 지향성이란 우리의 의식이 반드시 어떤 대상을 향한다는 뜻이다. 눈앞에 사과가 보이는 것은 의식만 있거나 사과만 있다면 불가능하다. 사과가 있고, 사과를 향해 나아간 의식이 결합할 때 비로소 ‘여기 사과 있음’이라는 현상이 생긴다. 의식이 없다면 사과도 없다. 마찬가지로 사과가 없다면 의식도 없다.

의식의 지향성을 은퇴 트라우마나 화병 해결에 적용하는 건 어떨까?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의식이 향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하기 싫다며 두루뭉술하게 둬서는 안 된다. 은퇴 트라우마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내 앞에 놓아야만 한다. 어떤 표현이라도 좋다. 일단 표현만 되면, 의식이 지향할 것이 분명해진다. 이때부터 뇌는 자동으로 움직인다. 떠오른 대상에 대해 판단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긍정 또는 부정의 감정들이 꼬리를 물듯 따라나온다.

그렇다면 뇌를 작동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표현 수단은 무엇일까? 바로 ‘말’과 ‘글’이다. 뇌는 언어를 가장 좋아한다. 뇌의 작용원리가 다름 아닌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판단을 언어로 한다.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감정이나 느낌은 규정되지 않은 어떤 무엇에 불과하다. 지향할 것이 없는 셈이다. 이래선 뇌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조건 써야 한다

나는 무조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식의 흐름에 의존해서 현재 자신의 기분을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원망스럽다면 원망이라고 써라. 원망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그 이름을 써라.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날 수 있다. 그 말을 써라. 그 이름은 손이 되어 나를 때릴 수도 있다. 그 행동을 써라. 그 말과 행동 때문에 일어난 감정을 써라. 욕을 해도 좋다. 죽이고 싶다고 쓸 수도 있다. 가식 없이 다 쏟아내라.

트라우마를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로 하지 않고 쓰라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글은 시간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다시 내가 쓴 원망, 분노의 대상을 글로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뇌는 다시 재가동된다. 의식은 그 단어를 통해 우리를 회사로 데리고 간다. 그 사람 앞에 나를 다시 세운다.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만든다. 하고 싶었던 행동을 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지금, 남아있던 갈등에너지의 찌꺼기까지 배출되는 장면을 경험하고 있다.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한 철학 노트: 글은 삶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것은 글이라는 흔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힙니다. 글이 읽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의미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삶에 새로운 의미와 차이를 만들고 싶다면, 자기 삶을 솔직하게 글로 남기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미래의 독자인 당신이 그 글과 함께 어떤 의미를 만들게 될지 기대해도 좋습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채우고,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면서, 그 나쁜 경험을 새롭게 해석하는 사고 패턴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해석 패턴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입니다.

1. 해결하고 싶은 악몽 같은 경험이 잇나요? 지금 의식의 흐름대로 한번 적어 보시겠습니까? 막 쓰세요. 괜찮습니다.

2. 마음이 허락한다면, 막 쓴 글을 다시 읽어보세요. 단어나 문장을 고쳐 써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 단어에 먼저 눈길이 가나요? 그 단어를 왜 고치고 싶을까요?

6장 왕년에 말이야

과거형 인간

꼰대를 다른 말로 하면 과거형 인간쯤 되지 않을까.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그때 그곳을 사는 사람이니 말이다. 지금 여기엔 못난 내가 살지만, 그때 그곳엔 멋진 내가 산다. 잘난 과거의 내가, 못난 지금의 나를 못살게 군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나를 모른다. 그때 그 사람들이 나의 진가를 알아준다. 왕년 타령은 은퇴자에게 소박하지만 확실히 행복한 시간여행인 셈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물어봤다. “선배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대부분 주저한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간다 해도 도착하자마자, 바쁘고 불안한 현재를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처럼, 우리의 현재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제물로 바쳐왔다. 눈부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공양물로 계속 바쳐야 한다면 타임머신이 무슨 소용인가. 결국 선배들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쉰다.

지금 뭔가를 이해했다면 과거에 배운 것들 덕분이다. 배우지 않은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이해한 미래는 과거의 유사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쉬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고 그 예측대로 계획을 세우는 건, 그만큼 현재가 불안하다는 증거다. 불안한 사람들끼리 모여 미래를 예측하고, 그 예측을 듣고 아무리 고개를 끄덕여도 예상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 이해된 미래는 이미 과거다. 과거형 인간이 예상한 미래는 과거와 닮는다.

술 취한 사람이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뭘 찾느냐고 묻자, 취객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행인까지 나서서 찾아보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는다. 답답해진 행인이 열쇠를 여기서 잃어버린 게 맞느냐고 묻자, 취객은 어이없게도 사실 저기 어두운 골목에서 잃어버렸다고 답한다. 그럼 왜 여기서 열쇠를 찾느냐, 잃어버린 골목에서 찾아야지 행인이 화를 내니 취객이 이렇게 말했단다. “저긴 너무 어두워서 열쇠를 찾을 자신이 없어요.”

우리가 삶의 열쇠를 떨어트린 곳은 현재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만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에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아무리 어둡고 불안해도 현재를 떠나면 안 된다. 왕년이 아무리 밝고 화려해도 거기엔 삶의 열쇠가 없다.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한 철학 노트: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존재는 곧 시간이요, 시간이 인간 존재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시간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달력과 시계가 2020년 현재 시각을 가리켜도, 내 삶의 의미가 1990년에 머물고 있다면, 난 그날 거기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거기에서 살지 아니면 지금 여기에서 살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1. 내가 자주 하는 왕년 이야기가 있나요? 어떤 내용인가요? 나는 왜 그 시절이 좋을까요?

2.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과거 사건이 있는지요? 그 사건을 바꾸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요?

3. 내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친밀한 모임이 있나요? 그 모임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나요?

12장 친구 장례식을 다녀와서

죽음을 향한 존재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다. 현-존재란 ‘Da-sein’의 번역이다. Da-sein의 ‘Da’는 ‘지금 여기’라는 뜻으로 인간 존재가 놓인 ‘이미 규정된 상황’을 뜻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항상, 이미, 어떤 상황에 던져진 존재다.

우리는 나른한 봄날인 4월 28일 오후 1시부터 창문이 없는 3층 회의실에서 영업실적 제고방안 회의를 하거나, 35도가 넘는 불볕더위에 놀이터에서 아파트 분양 전단지 500장을 들고 행인들을 만난다. 인간은 항상 딱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면서, 여러 가지 일로 삶에 찌든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물건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던져진 상황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다. 한편,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늘 ‘지금 여기’의 상황에 놓인 채 살아간다. 지금 여기의 상황에 놓인 현-존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물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러면서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하이데거는 ‘마음씀’이라고 불렀다.

정리하자면, 하이데거가 이해한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리고 반드시 죽는 존재다. 반드시 죽는 존재인 인간은 어떤 기분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될까?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 기분을 ‘불안’으로 보았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불안 속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인간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유도 없이 태어나 언제 죽을지 몰라 사는 동안 불안한 존재이니 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죽음이 오히려 인간을 실존적 존재로 만든다고 말한다. 실존적 존재란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인간은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항상 물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나는 왜 사는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면,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나의 본래적 삶인가?” 하이데거는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직 나의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인생 전체를 허무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봤듯이, 다른 사람의 죽음은 오히려 나에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또 다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오직 나의 죽음을 통해서만 내 삶의 범위를 확정받는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빈말을 떠들어대지만, 나의 진짜 모습은 죽음을 향한 존재였던 것이다. 영원하지 않은 삶, 반드시 끝이 있는 삶, 그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죽음은 불안을 통해서 나에게 그 대답을 요청한다. 이 요청을 하이데거는 ‘양심의 부름’이라고 불렀다. 죽을 준비를 하라는 딸의 농담을 통해 내가 느꼈던 낯설고 싸늘한 기분은 바로 이러한 부름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죽음이 주는 근원적인 불안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자기로서 살아라!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하이데거는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는다. 죽음이 오직 나의 죽음이라면, 자기 죽음이 부르는 소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아무런 제한과 조건 없이, 그 누구의 조언이나 간섭 없이, 내 삶의 주인으로서 대답할 수 있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는 이것이라고 스스로 선언할 수 있다. 그 어떤 이념과 명분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나는 내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죽음은 인간에게 실존적 자유를 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카뮈는 인간에게 남은 단 하나의 철학적 질문이 있다면 그건 ‘자살’이라고 말했다. 당황스럽게 무서운 이 말은 앞서 말한 하이데거의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한 응답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했다. 내 삶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그러한 실존적 질문도 던지지 않고,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왜 사는가? 카뮈는 바로 이 점을 살벌한 단어로 강조한다.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한 철학 노트: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가는 존재인 인간이 계속해야 하는 질문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그토록 찾아 헤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나는 ‘없어져 가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을 지탱해 줄 의미가 없다면 죽음이 끌어당기는 힘을 이길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1. 일상에서 죽음을 자주 생각하나요? 죽음이란 말은 나에게 어떤 기분을 주나요? 왜 그런 기분이 들까요?

2. 아내, 자녀, 친구, 직장 동료 등 다른 사람이 나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나요? 혹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 취급해 왔나요?

3.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주장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13장 딱 살기 싫더라구

불안은 양심이 부르는 소리

지금 내가 불안한 건 예전만큼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일까? 혹시 내가 불안한 건, 나답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 때문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후자로 봤다. 그는 불안을 다르게 불렀다. 양심이 부르는 소리! 이것이 하이데거가 불안에게 붙인 새로운 이름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세상 따라 살기에 급급한 나에 대한 정지 신호다. 그 신호가 어느 날 갑자기 불안하게 깜빡거린다. 내 자신이 경주용 사냥개와 다를 바 없다는 비참한 자존감도 정지 신호 중 하나. 세상 사람 흉내로는 더 이상 내 인생을 속일 수 없다는 목소리, 그게 바로 양심이다.

하이데거의 양심의 소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성찰과 일맥상통한다.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동료와 발을 맞춰 행진하지 않는 것은 다른 북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박자건, 얼마나 멀리서 들려오건, 자신이 들은 음악에 발을 맞춰라.”

삶의 속도는 모두 다르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에게 다른 속도로 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천천히 걸으면 뒤떨어지고 있다고 눈치를 줬다. 남들 할 때 같이 하는 게 제일 좋다고 배웠다. 회사는 더 심했다. 1년치 업무 속도가 정해져 있다. 1월부터 그 속도에 맞춰 걸어야 한다. 6월쯤 되면 예상보다 늦다며 뛰라고 한다. 10월쯤 되면 날아도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12월 결산, 어김없이 회사의 속도에 맞추지 못한 걸 반성한다. 그 누구도 나만의 속도로 살지 못했다고 반성하진 않는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신호로 이해한다. 불안하지 않다면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 자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 내가 아닌 그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자기로서 사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로서 사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 가능성으로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이라면 자기로서 살도록 생겨 먹은 것이다. 생긴 대로 살지 않으니까 불안한 거다. 맞지 않은 신발을 신었으니까 발에서 피가 나는 거다. 다른 사람 속도에 맞춰 뛰려니 항상 피곤할 수밖에 없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딱 살기 싫다니?

가자, 진짜 나만의 가능성으로

하이데거는 본래적 자기로 살려는 의지를 찾았다. 그동안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고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살았다. 우리에게 가능성이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좀더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수준이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사는 걸 비본래적 삶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불안 속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지금처럼 비본래적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본래적인 삶을 살 것인지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잘잘못을 따질 수 없다. 인간은 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동시에 인간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본래적인 나로서 사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해 하이데거는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당신의 본래적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 자신 아닐까요? 모르겠다고요?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다운 삶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진짜 나만의 가능성은 따로 있지 않다. 그 어떤 똑똑한 철학자도 당신에게 그걸 알려줄 순 없다.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신 한 사람뿐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자유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본래적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래서 그 모습까지 스스로 책임지는 것! 불안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출발 신호다.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한 철학 노트: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다음 두 가지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인 것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양심’이란, 이러한 선택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라는 ‘목소리’입니다.

1. 나는 어떤 경우에 딱 살기 싫어지나요?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되도록 솔직하게 적을 수 있나요?

2. 그동안 살면서 나는 어떤 선택과 활동을 해왔나요? 그 선택과 활동은 은퇴 후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또는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3. 나는 누구에게 어떤 사람이길 바라나요? 그런 사람이 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15장 도대체 갈 데가 없어

나는 그 사람을 대신 살았다

회사원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옆에 늘 누군가 있다. 요즘에야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지만, 우리가 한창일 때는 혼자 뭔가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시절이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을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잠시도 허락하지 않는 빡빡한 시간표가 일상이었다. 내가 마당발이라는 사실을 은근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호모 사피엔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산다. 무리는 혼자보다 강하다. 무리는 적을 공격하기에도 방어하기에도 혼자보다 훨씬 유리하다. 무리로부터 쫓겨나 혼자 산다는 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과 다름없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무리에 섞여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많은 원시 사회에서 추방은 사형 다음으로 무서운 형벌이었다.

하이데거는 나와 함께 밥 먹고 술 마시는 세상 사람들을 ‘세인(das Man)’이라고 불렀다. 나와 세인은 다를 것이 없다. 세인은 나에게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는다. 세인도 나와 비슷한 처지다. 최근 인기 있는 막장 드라마, 실검 1위에 오른 연예인 스캔들, 어제 9회 말 대역 전극으로 끝난 프로야구 등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가 세인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식을 문제삼지 않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내 발로 출근하고, 내 입으로 밥을 먹고, 내 눈으로 영화를 보더라도, 그건 내 삶이 아니라 세인의 삶일 수 있다. 내가 나로서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지 않고, 그저 국민으로, 시민으로, 회사원으로, 아들로, 남편으로, 아빠로 산 건 세인의 삶일 뿐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삶은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산 것이다.

어떤 선배는 파고다 공원에 가서야 자기 알몸을 인정했다. 넥타이를 풀고, 신발과 양말 그리고 속옷까지 모두 벗고서야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인으로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사는 방식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아파트와 자동차와 옷은 나를 나답게 해줄 수 없었다. 또 뭘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은 나를 나답게 해줄 수 없었다. 어디 갈 데 없나 이곳저곳 기웃거려 봐야 마찬가지다. 나를 나답게 해 주는 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 내 삶에 대해 묻고 생각할 수 있는 곳으로 규칙적으로 떠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늘 그곳으로 가야 한다.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한 철학 노트: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아래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 위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내 삶을 뒤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1. 나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이 있나요?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거기서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2. 은퇴 후 나를 나로 만드는 규칙적인 시간표를 가지고 있나요? 여기에 한번 적어주시겠습니까?

3. 나만의 개성 넘치는 글과 사진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나요? 어떤 방법을 사용하나요?

4. 그곳에서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알게 되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무엇을 희망하게 될까요?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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