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평전

도서출판 이새 / 2020년 12월 / 352쪽 / 20,000원

파스칼 평전

파스칼 평전

권수경 지음

저자 소개

저자 권수경은 서울대학교에서 철학(BA, 1984)을 전공한 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M. Div., 1990)을 공부하였다. 1991년 도미하여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철학신학 전공으로 신학석사(STM, 1993) 학위를, 예일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종교철학 전공으로 박사(Ph.D., 2007)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셀링이 다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를 사상사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학위 과정 중 전임목회도 병행하여 코네티컷 한인교회에서 4년, 그리니치 한인교회에서 17년을 담임목사로 일했다. 2018년부터 모교인 고려신학대학원에 초빙교수로 와 변증학, 기독교 윤리학, 포스트모더니즘, 자연과학과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와 인문학 등의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일반상식과 성경의 차이점을 해설한『질그릇에 담은 보배(복 있는 사람, 2017)』, 한국교회의 재물 숭배를 비판한『번영복음의 속임수(SFC, 2019)』, 현대 사상 및 세계관을 근거로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한『변하는 세상 영원한 복음(SFC, 2020)』등이 있다.

책소개

이 책은 파스칼의 천재성을 수학, 과학, 신학, 문학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 그의 삶과 업적 등을 조명하고 소개한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천재의 흔적을 우리 주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면서, 파스칼의 생애와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인문학(人文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파스칼의 생각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키우고 삶을 살찌울 수 있다고 역설한다.

요약본 본문

파스칼의 삶과 학문

수학자 파스칼

클레르몽에서 파리로: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불세출’의 신동이다. 파스칼은 소위 ‘박식가’다. 한 분야의 천재도 드문데 파스칼은 여러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뿐 아니라 파스칼은 이론과 실천을 함께 갖추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파스칼의 모든 학식과 재주가 또 원숙한 인격 안에 자리를 잡아 재덕겸비(才德兼備), 곧 재주와 덕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준다.

파스칼은 1남 2녀 중 둘째로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동생을 낳은 이듬해 세상을 떴다. 집안일을 위해 가사 도우미를 두긴 했지만, 자녀 양육은 아버지가 전적으로 맡았다. 부와 지위를 가진 귀족이 자녀를 직접 맡아 기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삼남매 모두 어려서부터 비범한 총명함을 보였기에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파스칼의 아버지 에티엔(1588-1651)은 법대를 졸업한 뒤 지방 판사 및 세무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학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리스어와 라틴에 통달한 인문학자였고 또 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연구도 많이 하고 업적도 남겼다.

맞붙은 두 개의 원 가운데 하나를 고정하고 다른 원을 그 원 주위로 한 바퀴 회전시킬 때 회전하는 원에 위치한 임의의 점이 그리는 도형을 ‘파스칼의 달팽이꼴’이라 부르는데, 이는 이 도형을 가장 먼저 연구한 에티엔 파스칼을 기리는 이름이다. 이 달팽이꼴 하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파스칼, 그러니까 파스칼의 정리, 파스칼의 직선, 파스칼의 삼각형, 파스칼의 원리, 파스칼린, 컴퓨터 언어 파스칼, 대기압을 나타내는 헥토파스칼 등등은 전부 아들인 블레즈 파스칼의 업적이다.

파스칼이 8살이 되던 1631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로 이사했다. 온 식구를 데리고 수도 파리로 옮긴 첫째 이유는 아버지 자신의 학문적인 열정이었는데, 그는 파리 중심가에 집을 구입한 다음 주변의 여러 지식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35년 수학자 마랭 메르센 신부가 저명한 학자들을 모아 만든 파리 학술원에도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수학자 데자르그, 철학자 데카르트, 과학자요 신학자였던 가상디 등 쟁쟁한 인물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나누었다.

파리로 이주한 또 다른 이유는 자녀교육이었다. 어쩌면 이게 진짜 동기였는지도 모른다. 클레르몽에 있을 때도 세 자녀를 아버지가 직접 맡아 가르쳤지만, 파리로 이사한 뒤에는 직장에 매이지 않아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자녀들에게 쏟을 수 있었다. 게다가 수도로 이사를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더욱 좋은 교육환경이 제공되었다.

파스칼의 정리와 사영기하학: 파스칼은 수학과 과학이 좋았다. 11살 때 탁자 위의 접시가 내는 소리를 관찰하여 소리에 대해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해 보았다. 접시가 뭔가에 부딪히면 소리를 내다가 손으로 잡으면 왜 조용해지는지 이유를 추론해 본 것이다. 눈높이가 아버지 어깨를 넘을 즈음에는 기하학 쪽으로 눈길이 쏠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라틴과 그리스어를 먼저 가르쳤다. 특히 수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려고 기하학 관련 서적은 아예 서재에서 없애버렸다. 그렇지만 책을 없애도 터져 나오는 재능마저 억누를 수는 없었다.

파스칼이 열두 살일 때의 일이다. 기하학을 가르쳐 달라 조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고전을 먼저 익히면 그 다음 기하학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파스칼은 그럼 기하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만 가르쳐 달라 했고, 아버지는 여러 도형 사이의 관계와 비율을 연구하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후 어느 날 라틴 수업이 끝난 뒤 파스칼은 방에 혼자 남아 목탄으로 동그라미나 세모 등의 도형을 벽에 그려 놓고 도형의 면적, 비율 등을 따져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책을 치워버려 도형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런데 저 나름대로 둥근 것, 세모, 막대기 등으로 이름을 붙여 놓고는 정의를 하나씩 만들고 공리까지 만든 다음. 증명도 하나하나 해 나갔다.

이런 식으로 한참을 혼자 연구하더니 급기야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첫째 권 32번 정리에 도달하였다. ‘삼각형의 한 각의 외각은 그 각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각의 합과 같다. 삼각형의 세 내각을 합치면 두 직각과 같다.’ 이 정리를 만든 순간 아버지가 방에 들어섰다. 아들은 놀랐다. 아버지가 금지한 것을 하다가 들킨 것이다. 그런데 벽에 적어놓은 글과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던 아버지는 두 눈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버지는 그 길로 달려가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수학 교육을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모두의 뜻이었다. 아버지도 아들이 적어도 15세가 된 다음 수학을 가르치려 했던 생각을 바꾸어 즉각 체계적인 수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날부터 파스칼은 메르센 신부가 주관하는 학회에도 아버지와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나이도 어린 왕초보 파스칼이 전문 학회의 수준 높은 연구와 토론을 어떻게 따라잡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기하학 공리를 홀로 터득한 파스칼에게 선배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 정도는 그리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파스칼이 몇 년이 되지 않아 당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다.

파스칼은 학회 가입 이후 데자르그의 원뿔 곡선 이론에 관심이 끌렸다. 그런데 데자르그의 연구 과정을 줄곧 지켜본 파스칼은 막 16살이 되던 1639년에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하나 발표하였다. 원뿔 곡선에 내접하는 육각형의 성질에 관한 것이었다. ‘원뿔 도형에서 임의의 여섯 점을 골라 육각형을 만들 경우 세 쌍의 대변 (또는 대변의 연장선)이 만나는 세 점은 한 직선 위에 놓인다.’

오늘날 ‘파스칼의 정리’로 확립된 바로 그 논문이었다. 이 정리는 ‘신비로운 육각형 정리’라고도 불리는데, 이 정리에서 세 점이 놓이는 직선을 파스칼의 직선이라 부른다. 이 정리는 원이나 타원뿐 아니라 포물선 및 쌍곡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원뿔의 속성을 추론해 내는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발표를 직접 보고 또 발표문도 자세히 읽어 본 메르센 신부는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그런데 학회 회원이었던 데카르트는 처음 놀랍다는 반응을 잠시 보이더니 아버지가 아닌 아들 블레즈가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십대 소년이 그런 논문을 쓰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데자르그와 파스칼의 연구는 거의 200년이 지난 뒤 ‘사영기하학(projective geometry)’이라는 독특한 학문을 탄생시켰다. 사영기하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는 데자르그에게 갔지만, 파스칼의 이름도 언제나 데자르그와 나란히 언급된다. 사영기하학은 간단히 말해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세상을 집어넣는 학문이다. 이들의 연구로 태어난 사영기하학은 19, 20세기 들어서는 해석 기하학, 대수 기하학으로 분화되었고, 상대성 원리나 양자역학 등 첨단 학문의 태동 및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은 3D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컴퓨터 그래픽, 증강현실, 컴퓨터의 물체 인식 등에 이 원리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도 사영기하학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렇게 고대에 시작된 지성의 탐구가 2천 년 뒤 천재들의 발견을 통해 큰 흐름을 형성하고, 다시 4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삶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 파스칼

물이 못 넘는 높이: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피티 궁전이 우뚝 서 있다. 이 건물은 피렌체의 재력가 루카 피티가 건축했다가 피티 가문의 몰락 이후 메디치가의 소유가 된 건물이다. 1549년 이 건물을 구입한 메디치의 부인인 엘레노라 디 톨레도는 건물 주위에 보볼리 정원을 만들고 그중 몇 곳에는 분수대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엘레노라가 세상을 뜨자 남편 코시모 1세가 이어받았고, 그 이후에도 두 아들과 손자를 거쳐 증손자인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까지 이어졌다.

물을 아래서 위로 쏘아 올리는 요즘의 분수와 달리 당시의 분수는 펌프를 이용해 물을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 거기서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분수를 좀 높게 만들어 보려 했는데 당시 사용하던 펌프로는 아무리 해도 물이 10m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페르디난도 2세는 원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 왜 10m가 한계인지 좀 알아봐 달라 부탁하였다.

분수 문제가 불거질 무렵 갈릴레오는 사이펀 문제로 또 오랫동안 씨름해 오고 있었다. 일정 높이의 물을 관을 이용하여 그보다 더 높은 지점으로 밀어 올렸다가 다시 처음보다 더 낮은 위치로 내려 보내는 장치가 사이펀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북부 사보나 지역에서 활동하던 과학자 발리아니가 사이펀에 한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공사를 하던 중 사이펀을 이용해 21m 높이의 언덕 위로 물을 넘기려 하는데, 펌프에 아무리 힘을 가해도 안 되더라는 것이었다.

발리아니는 오랜 기간 서신으로 의견을 나누어 오던 갈릴레오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대기의 압력이 약해 그런 것 같다는 자신의 의견도 덧붙였다. 편지를 받은 갈릴레오는 직접 실험을 해 보았다. 낮게 시작하여 둑을 조금씩 높여 보았는데 사이펀이 작용할 수 있는 높이는 10m가 한계였다. 무엇 때문일까? 그런 고민을 10년째 해 오던 차에 공교롭게도 보볼리 정원의 분수 역시 똑같은 10m에서 막힌 것이다.

진공이냐 대기압이냐: 당시 사람들은 사이펀과 펌프가 같은 원리에 근거해 작동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원리는 이천 년 전부터 전해오던 ‘진공 혐오’ 원리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상태에서는 진공이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 이후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이 원리가 거의 이천 년 동안 서양 과학을 지배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하였던 갈릴레오는 자연의 진공 혐오 원리가 10m 높이까지만 힘을 쓰는 모양이라고 얼버무린 다음 쓸쓸한 말년을 마감하였다.

10m가 한계라면 그 이상에서는 어떤 다른 원리가 작용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실험을 시도한 사람은 로마 대학의 수학 교수요 물리학자였던 베르티였다. 베르티는 납으로 긴 관을 만들어 한 쪽 끝을 막았다. 물을 가득 부은 다음 뒤집어 물이 담긴 그릇에 세웠더니 물은 어느 정도 내려오다가 약 10m 높이에서 멈추었다. 관 위쪽은 밀폐되어 있고 아래는 물이 공기와의 접촉을 막고 있으니 물 위에 생긴 공간은 분명 진공일 것이다. 베르티는 그 진공이 물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물이 더 내려오지 않는다고 추정하였다. 베르티는 사이펀 실험도 하여 갈릴레오의 10m 한계론이 옳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피렌체에 있던 갈릴레오의 제자 토리첼리도 수은을 이용해 비슷한 실험을 했다. 토리첼리는 관 위의 공간이 진공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물이 더 내려오지 않는 건 진공이 아닌 다른 어떤 힘 때문이라고 보았고, 그 힘이 대기압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오늘도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수은 기압계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토리첼리는 이듬해 여러 가지 연구 및 실험 결과를 담은 두꺼운 논문집을 출판하면서 수은 실험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대기압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 무렵 진공이라는 주제가 철학적, 신학적으로 워낙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로마에 있던 친구 리치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실험으로 확인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오늘날 시험관 위에 생겨난 그 진공을 토리첼리의 진공이라 부르고, 진공의 압력을 계산하는 단위로 토리첼리의 이름을 쓴다 (Torr). 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토리첼리의 업적이 친구 리치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된 덕분이다. 1m짜리 관을 이용한 간단한 이 실험으로 토리첼리는 오랜 세월 서양 과학계에 군림해 오던 핵심 원리 하나에 과감한 도전장을 던진 다음 몇 해 뒤 세상을 떴다.

파스칼의 여러 실험: 이탈리아의 실험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졌고, 파리 학회의 회원이었던 프티가 공무로 루앙을 지나면서 파스칼 부자를 만나 진공 관련 실험 소식을 전했다. 파스칼의 관심은 즉각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파스칼은 물이나 수은을 일정 높이로 유지하는 게 대기의 힘이라 본 이탈리아 과학자의 추정이 옳다고 믿고 그걸 사실로 입증하기 위해 수은 위 빈 자리에 생긴 공간이 진공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파스칼은 한 달 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프티를 아예 동업자로 고용한 다음 함께 실험에 착수하였다. 1646년 가을의 일이었다. 파스칼의 다양한 실험은 이듬해 여름 파리로 옮긴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파스칼은 2가지 실험을 시도했다.

첫째는 물과 포도주를 비교하는 방법이었다. 예수회 학자들은 물 위의 공간이 진공일 리가 없고 물에서 나온 모종의 물질이 거길 채우고 있다 주장하였다. 그런데 포도주는 물보다 기포를 많이 만들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물질도 더 많이 만들 것이고, 따라서 포도주를 사용할 경우 물보다 더 큰 공간이 생길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파스칼은 물과 포도주로 동시에 실험해 보았다. 결과는 파스칼이 공언한 그대로 물과 포도주가 똑같은 높이에서 멈추었다.

둘째는 진공 속의 진공이라는 독특한 시험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파스칼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이 시험관은 아래 그림과 같은데, 실험은 우선 가운데 구멍을 단단히 막은 상태로 관을 거꾸로 하여 수은을 가득 채운다. 그런 다음 관을 다시 뒤집어 수은 그릇에 놓으면 수은이 쏟아져 내려오다가 반원 부분에 일정량이 걸려 고이고 나머지는 아래쪽 관에 일정 높이로 머무르게 된다. 시험관에서 수은 이외의 빈자리는 전부 진공이 된다. 아래 관 위쪽도 진공이지만 반원 부분의 수은 위쪽 역시 진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았던 중간 구멍을 여는 순간 아래에 머물렀던 수은이 중력 때문에 그릇으로 쏟아져 내려가는 반면 반원에 고였던 수은은 관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 일정한 높이에서 멈춘다. 공기가 들어가 밀어 올리는 것이니 명백한 대기의 압력이다. 그 수은 위쪽의 줄어든 빈자리는 여전히 진공으로 남아 있다. 진공 속에 있던 또 하나의 진공이다. 진공 속의 진공 시험관은 수은 위의 빈 자리가 진공이라는 것과 수은을 일정 높이로 유지하는 것이 대기압임을 동시에 입증하는 멋진 장치였다.

[그림1 72페이지]

파스칼은 사이펀 역시 진공 혐오 원리가 아닌 대기압의 작용임을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결론은 명확했다. 물 위에 생긴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이며, 물을 밀어 올리는 힘은 대기의 압력이다. 이로써 펌프나 사이펀이 진공을 안 만들기 위해 물을 끌어 올린다던 유서 깊은 이론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오류였음이 분명해졌다. 파스칼은 이 밖에도 몇 가지 실험을 더 한 다음 결과를〈진공에 관한 새로운 실험들(1647)〉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논문에서는 자연 상태에서 진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4년 전 이탈리아에서 행해진 실험의 구체적인 내용을 논문 서두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자신이 행한 실험은 그 실험의 연속임을 명시하였다.

높은 산에 올라: 파스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물이나 수은을 밀어 올리는 것이 대기의 압력임을 수치로 정확하게 증명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다. 과학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퓌드돔 실험’이었다. 높은 산에 오르면 기압이 낮아질 것이니 수은주의 높이도 낮아지지 않을까? 그런데 파리 주변은 인근에 높은 산이 없었다. 하여 고향 클레르몽에 살고 있던 자형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 실험해 달라 부탁하였다. 처남의 부탁을 받은 페리에는 1648년 9월 동료 학자 5명과 함께 실험에 착수하였다. 수은을 담은 기압계를 2개 준비하여 일단 산 아래에서 대기압을 측정했다.

그런 다음 하나는 수도사 한 사람에게 맡겨 수시로 관찰해 달라 부탁하고 나머지 하나를 갖고 1465m 높이의 휴화산 퓌드돔 꼭대기에 올랐다. 정상에 닿자마자 수은주의 높이를 측정했다. 예상대로 수은 기둥은 땅에 있을 때보다 낮아졌다. 차이는 8cm 정도. 실험을 되풀이해도 수은의 높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다가 중턱에서 다시 측정해 보았는데, 수은이 땅바닥과 산꼭대기의 중간쯤에 머물렀다. 땅에 내려와 보니 아침에 맡겨둔 시험관의 수은은 처음 높이 그대로였다. 하루 종일 아무 변화가 없었다고 했다. 산에 갖고 갔던 시험관으로 다시 해 보니 아침과 마찬가지로 둘의 높이가 같았다.

자형으로부터 실험 결과를 전해 받은 파스칼은 자신도 파리에 있는 50m 높이의 생자크 탑 꼭대기에 올라 실험해 보았다. 여러 번 오르내리며 측정하여 퓌드돔 실험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직접 만든 기압계를 사용하여 자료를 정리 분석한 파스칼은 수은주의 높이가 고도뿐 아니라 날씨에 따라서도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자형에게 편지로 알렸다. 자형 페이레는 그 부분을 밝혀내기 위해 파리나 스톡홀름 등 여러 지역 사람들과 서신으로 연락하면서 몇 해 동안 실험을 계속하였다. 실험 결과를 모아 보니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날씨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오늘날의 일기예보는 온통 파스칼이다. 파스칼이 퓌드돔과 생자크 탑에서 행한 연구를 기리는 뜻에서 파스칼(Pa)을 대기압의 단위로 쓴다. 백을 뜻하는 헥토를 붙이면 헥토파스칼(hPa)이 되어 이전에 쓰던 밀리비(mb)와 같은 세기가 된다. 그러니까 평균해수면의 기압인 1기압은 약 1013헥토파스칼이다. 또 눈이나 비가 올 가능성은 파스칼이 개척한 확률론을 이용해 예보한다.

신학자 파스칼

신앙의 사람 파스칼: 파스칼의 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산 삶이었다. 처음 아버지의 신앙에 따라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면, 20대 중반에 발견한 얀센파 신앙을 통해 새로운 영적 회심을 경험하고, 잠시 느슨해졌던 신앙의 이력은 30대 초반의 불의 밤 경험으로 새로운 동력을 얻어 이후 생애를 주도하였다. 이 두 번의 특별한 경험은 파스칼의 삶을 풀어내는 가장 소중한 두 열쇠다.

참고로 얀센은 관습에 젖어 있던 교회의 타성을 비판하면서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죄와 부패를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와 선행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불의 밤 경험은 파스칼이 31살이던 1654년 11월 23일에 일생일대의 신앙적 경험을 한 것을 말하는데, 이 사실은 파스칼이 죽은 후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고백서에 적혀 있었다.

파스칼은 집에서 받은 인문학 교육에 홀로 성경과 고전을 탐독하여 인간과 우주와 하나님에 대해 포괄적 틀을 잡았고, 역시 홀로 읽어 파악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 틀로 정확하게 분석하였다.『프로뱅시알 편지』에도 그런 원리가 풍성하지만, 특히 말년의 작품인『팡세』에서는 그런 세계관으로 인간과 우주를 마음껏 분석한다. 사실 나 혼자 해서는 성경 하나도 제대로 깨닫기 어렵다. 철학이나 기타 사상까지 알아 성경으로 그것을 분석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교회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 같은 사람 외에는 하지 못했던 그 엄청난 일을 파스칼이 해낸 것이다.

파스칼이 보여준 일관성 있는 기독교 세계관은 1655년 1월 포르루아얄 데샹에서 은둔자 생활을 할 때 신앙 지도를 맡았던 드 사시와 나눈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에픽테토스와 몽테뉴의 사상을 비교 설명한 이 대화를 곁에서 함께 들었던 사람이 잘 정리해 두었는데, 이 자료를 읽어보면 파스칼이 두 사람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사상의 장단점을 성경의 기본 구도인 창조, 타락, 구원의 원리를 기초로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스칼이 완벽한 기독교 세계관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다른 증언도 있다. 놀랍게도 무신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니체의 비판이다. 니체는 파스칼의 사색에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이 깊이 배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일단 파스칼을 “기독교의 탁월한 논리학자”라 칭송한다. 그렇지만 니체가 칭송하는 그 일관성은 파스칼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니체가 본 기독교 신앙은 “영이 가진 모든 자유, 모든 긍지, 모든 자신감을 희생하는 것”이었고 결국 “자기 조롱, 자기 파괴”로 귀결되기 때문이었다.

니체는 평생 파스칼을 흠모했고, 파스칼의 성찰은 니체의 철학 전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니체 본인도 “내 핏줄에는 파스칼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솔직하게 썼다. 그렇지만 한 가지가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스칼이 가진 기독교 신앙 곧 “(사람은) 어리석게 되어야 한다”는 원리였다. 이는 니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긴 인간다움을 포기하라는 권고인데, 확고한 지성의 소유자 파스칼이 그렇게 돼 버린 것은 원죄 교리 때문이라고 니체는 분석했다. 기독교가 파스칼로 하여금 원죄가 인간의 지성을 파괴했다고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비인간적인 잔인함 가운데 가장 소름 끼치는 형태”라 불렀다. 정확한 판단이다. 이 원죄 교리가 사실 파스칼의 인간 이해의 핵심이었다.

파스칼이 그런 입장을 취한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 신앙 없이는 자연도 역사도 모두 “괴물 및 혼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스칼은 진리를 위해 자연과 역사와 인간을 부인해야만 했고, 니체는 그런 식으로 “파스칼을 망가뜨린 기독교를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했던 것이다.

파스칼의 일관성은 논리로 그치지 않는다. 파스칼은 자신이 믿은 바를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다. 이론적인 일관성뿐 아니라 믿음과 행함 사이의 일치까지 실현한 것이다. 얀센주의의 가르침 그대로 언제나 성결한 삶을 추구하였고 철저한 회개를 생활화하였다. 인간의 원죄에 대한 이해도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적용되었으며, 그랬기에 뛰어난 천재요 온 프랑스가 알아주는 유명인사였으면서도 평생을 겸손하게 또 소박하게 살 수 있었다. 이론을 앞뒤가 맞게 완성한 천재도 드물고, 그것을 현실의 삶과 조화시킨 천재는 더더욱 희귀한데,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인격과 융합한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위인이 바로 파스칼이다. 이 점이 특히 놀라운 것은 인격 내지 경건이라는 요소는 뛰어난 머리나 손재주처럼 타고나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뛰어난 머리나 재주와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파스칼의 생애 특히 불의 밤 같은 경험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은혜 아닌 게 어디 있으랴! 그렇지만 파스칼 자신도 몸부림을 쳤다. 얀센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접한 이후, 그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쉬지 않고 경건의 훈련을 쌓았다. 말년의 저서『팡세』에서 파스칼은 훈련과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파스칼이 수준 높은 경건을 평생 실현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팡세』에 보면 파스칼 자신의 간증으로 보아 좋을 다음과 같은 대목이 하나 나온다. ‘내가 혼자든 사람들이 보든 나는 내 모든 행동들을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한다. 그것들을 심판하실 하나님께 나는 내 행동 전부를 바쳤다…… 또 나는 내 삶의 모든 날 동안 내 구주를 찬송한다. 주님은…… 연약함, 비참함, 정욕, 오만, 야망 등으로 가득한 사람을 이 모든 악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만드셨다. 은혜의 능력으로.’

비결은 코람데오(coram Deo)의 삶 곧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태도였다.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한 결과가 바로 파스칼이라는 위대한 신앙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삶의 원동력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은혜가 있어 다른 모든 것도 은혜로 다가온다. 시작이 은혜이면 모든 것이 은혜다. 오늘 우리가 파스칼의 손길을 통해 얻는 유익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문학자 파스칼

수미쌍관의 생애: 파스칼은 인생을 문학으로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 파스칼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을 먼저 가르쳤다. 그러다가 수학적 재능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수학 공부도 병행하게 되었고, 파스칼의 관심이 기하학에 집중되는가 싶더니 이내 과학 여러 분야로 뻗어갔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도 문학적 재능은 사라지지 않고 파스칼의 생애 가운데 마지막 몇 년을 장식한 것이 바로 이 글재주다. 삶의 여정 내내 숙성시켜 온 그 재능은 먼저『프로뱅시알 편지』라는 아름다운 꽃을 한 다발 피워냈고, 죽은 뒤 유고로 출판된『팡세』는 파스칼의 생애를 보볼리의 정원처럼 아름답게 완결하였다. 온갖 위트로 가득한『프로뱅시알 편지』와 인간과 우주와 신을 깊이 묵상한『팡세』, 이 두 권의 책으로 파스칼은 프랑스 문학을 평정했을 뿐 아니라, 오늘까지 세계 최고의 문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파스칼의 생애는 수미쌍관(首尾雙關) 인생이다. 파스칼의 생애는 앞뒤가 꼭 맞는 아름다운 한 편의 시다. 생애 전체가 문학으로, 특히 사람을 깊이 연구한 인간학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철학적, 신학적 성찰이다. 칠, 팔십을 살고서도 완결은커녕 단편적인 의미조차 제대로 찾기 어려운 게 우리네 필부들의 인생일 터, 마흔도 못 되는 짧은 생애를 어쩜 이리도 풍성하게 살고, 또 이토록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는지 그저 놀랍고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파스칼이라는 시의 첫 구절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었다. 마지막 구절은『팡세』라는 문학 작품이다. 그럼 이 마지막 구절을 아름답게 수놓은 요소들은 무엇인가? 어느 것 하나 뺄 수 없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자연과학에서 이룩한 눈부신 성취였다. 10대에 연구한 사영기하학, 20대 때 탐구한 물리학, 30대에 발전시킨 확률론이 생애 마지막 작품『팡세』에서 인간 이해를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한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영기하학의 심오함은 인간에 대한 입체적인 깨달음, 특히 신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순에 대한 성찰로 나타난다. 물리학에서 밝힌 진공의 존재는 사람의 영혼에 숨어 있는 빈 자리에 적용되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파스칼 인간학의 핵심을 이룬다. 수학에서 발전시킨 확률론은 내세에 대한 신앙과 결합되어 파스칼의 내기라는 유명한 논리를 탄생시켰다. 그 논리로 파스칼은 기독교 신앙에 담겨 있는 무한에 가까운 기댓값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같이 한 번 내기해 보자며 초청한다.

파스칼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모두가 한 주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도되기 때문”이다. 이는 포괄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다. 파스칼이 연구한 자연은 “모든 것 심지어 신학까지도 말할 수 있는” 어떤 존재였다. 그렇기에 수학도 물리학도 인간 연구와 무관할 수 없었다. 원뿔 곡선 및 기댓값 연구도 진공이나 대기압 실험도 결국은 인간에 대한 탐구로 귀착되었다. 언제나 인간을 지향하는 이런 강력한 특성은 파스칼의 사색과 연구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파스칼에게 모든 학문은 인문학 곧 인간에 대한 연구였다.

미국의 사상가 윌 듀런트는 명저『문명 이야기』에서『팡세』를 “프랑스 산문 가운데 가장 멋진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다른 전문가들도『팡세』를 “프랑스 산문의 이정표” 또는 “서양 사상사의 경전”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팡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이나 도스토옙스키의『카라마조프 형제들』같은 대작이라면 이해할 만도 하다만, 사실『팡세』는 그런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책 한 권을 쓰려고 틈틈이 모아 놓은 자료집에 지나지 않는다. 정리도 채 끝내지 못한 생각의 조각들을 파스칼이 죽은 뒤 유고로 펴낸 게 팡세다. 그래서 책 제목도 그냥『생각들』이다. 원고를 누가 정리했느냐에 따라 순서도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세계문학전집 내지 사상전집에서 빠지는 법이 없고 지구 전역에서 “세계인의 고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파스칼의 내기

파스칼의 내기

천재가 권하는 도박: 파스칼은 오늘 우리 곁에 있다. 파스칼이라는 이름은 혹 몰라도 그가 남긴 명언 한두 개는 읊조리고 파스칼의 다양한 업적도 알게 모르게 누리며 산다. 마흔 살도 못 살고 간 천재의 실로 넓고 깊은 발자국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모든 것을 알고 즐긴다 해도 한 가지를 모른다면, 그건 파스칼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파스칼이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기독교 신앙인데, 그 신앙을 깊숙이 그려낸 것이『팡세』요, 그 대작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한 고갱이는 바로 ‘파스칼의 내기’라는 이름을 가진 논리다. 전에는 ‘파스칼의 도박’이라 부르기도 했다.

파스칼의 내기는 천 개가 넘는『팡세』의 단 한 조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 가장 소중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파스칼의 생애 전체를 집약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내기에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무한과 연결해 생각하는 입체적 사고가 등장한다. 물리적 무한과 영적 무한이 엎치락뒤치락 오고가는 과정은 2차원에 3차원을 구현하는 사영기하학의 철학적, 신학적 적용이다. 판돈 연구가 낳은 확률론 및 기댓값 개념도 담겨 있다. 잘 모르겠다는 이들을 향해 모두가 이미 걸고 사는 인생임을 일깨우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곳에 걸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올바른 결정을 위한 지침을 주겠다는 것이다. 영혼의 바로미터에서 가장 중요한 눈금이 바로 여기다. 그렇게 거는 것이 곧 우리 마음의 빈 자리에 무한의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다. 끝없이 이어지던 갈망이 만족을 얻는 순간이다.

내기 논리에는 논리뿐 아니라 열정도 담겼다. 믿음은 마음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다. 파스칼 자신의 평생 동력이었던 기독교 신앙의 열정으로 그 신앙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내기 논리는 파스칼이 쓰고자 한『기독교 변증』핵심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팡세』가 그림의 용어라면 내기 논리는 마지막에 점을 찍은 눈동자다. 그 생명의 점이 있어『팡세』전 지면이 살아 꿈틀거린다.

내기 또는 도박이라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파스칼은 도박을 반대한 사람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거는 어리석은 짓이라 경고하였다. 그런 파스칼이 우리에게 도박을 하라 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내기는 적어도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평생 도박을 멀리한 파스칼이지만 인생 자체는 어차피 한 방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이미 화끈하게 모든 것을 걸고 39년 인생을 살았다.

‘내기’ 논리지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내기는 아니다. 파스칼은 지금 무슨 논증 같은 것을 내세워 독자를 설득하려 하는 게 아니다. 중세의 안셈이나 아퀴나스, 근대의 데카르트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여러 가지 논증을 내세웠지만, 파스칼의 내기는 그런 증명과는 거리가 멀다. 파스칼 자신 그런 증명의 무익함을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말 갖고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파스칼의 논리를 사용하는 이유는 신앙의 열정 때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의 적용인 셈이다. 논증은 신앙을 주지 못하지만 적어도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느 정도 제거해줄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이성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거기까지일 것이다.

일반 학문에도 뛰어났던 신앙의 사람이 이 논리를 통해 자기가 가진 신앙이 이성의 눈으로 볼 때도 충분히 합리적이라는 점을 논증하면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나 우물쭈물하는 회의주의자들에게 얼른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고 있다. 이 글에서 파스칼은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설득술을 활용한다. 상대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대신 보지 못한 면이 있음을 일깨우는 방식이다. 틀렸다 하면 화를 내지만 못 본 게 있다 하면 대개는 수긍한다는 게 파스칼의 판단이다. 파스칼 나름의 열정과 특유의 방법이 뒤엉킨 가운데 파스칼의 내기 논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든다.

파스칼의 목표는 하나, 독자들의 결단이다. 이 내기는 독자가 하는 내기다. 혼자 한다. 나를 걸어야 하니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내기다. 이 선택은 나 자신만의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 못지않게 고유한 것이다. 파스칼은 자기가 말하는 쪽에 거는 게 조금도 어리석은 게 아니라고, 손해 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아니, 안 걸면 그게 정말 바보짓이라고 거듭 부르짖는다. 내기 자체가 개별적인 만큼 이 논리에 대한 평가나 반응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논리라 부르지만 사실 논리는 아니다. 파스칼은 완벽한 논리를 전개하고자 애썼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앞서 천재답지 않은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뜨거운 열정과 차분한 논리의 어색한 조합이다. 자기가 경험한 은혜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글이니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신앙 간증이다. 논리의 옷을 입은 낚시다. 그러니 잘 알고 읽자. 그래야 안 낚인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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