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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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의 기술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책소개

저자는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처지에서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고 자유를 느끼는 삶, 그것이 나다운 삶을 사는 거라면서 남들과 비교하는 삶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살 수 있도록 이끈다.

요약본 본문

평온의 기술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5월 / 308쪽 / 14,000원

제1장 평온한 삶을 위하여

욜로, 휘게, 소확행, 카르페 디엠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누구나 주변에서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말이다. 사는 게 팍팍해서 그런지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말이 영어 약자로 둔갑해 한국에 수입된 이후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열풍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다. 캐나다의 래퍼인 드레이크가 2011년부터 유행시킨 말이다. 박문각에서 나온 『시사상식사전』은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라고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욜로족은 내 집 마련, 노후 준비보다 지금 당장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취미 생활, 자기계발 등에 아낌없이 돈을 쓴다. 이들의 소비는 단순히 물욕을 채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충동구매와 구별된다.”

그런데 어느 네티즌의 댓글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현재를 즐기는데 이상 실현이라는 거창한 말은 또 뭐냐. 박문각 선비 코스프레 역겹다. 사전 정의에 니들 가치관 집어넣지 말아라. 어디서 감히 개수작이야.” 욜로를 실천하더라도 그건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서 사실상 강요당한 것인데, 거기에 ‘이상 실현’이 웬 말이냐는 강한 반감이 읽힌다. 욜로의 정의에 대한 댓글들 중에는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몇 개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괜히 중2병 걸려서 나중에 폐지 주음.”
“시집 장가 못 가는 만년 솔로들 좋게 포장한 단어.”
“뱁새가 황새 따라가단 뒈져요~ 욜로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 욜로지.”
“말은 인도 말 같아서 멋있는데, 포장만 돼 있지 실제는 경기 침체 속에 청년들이 돈이 안 벌리니까 욜로족이 돼서 더욱더 망가지는 건 아닌가요.”

이런 부정적인 댓글들은 우리 사회에 욜로에 대한 반감과 오해가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는 걸 말해준다. 특히, ‘헬조선’을 외치는 2030세대가 스트레스로 홧김에 돈 쓰는 걸 가리켜 욜로족 운운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욜로보다 덜 알려지긴 했지만, 욜로 이전에 덴마크산 ‘휘게(안락함)’가 있었다. 휘게의 핵심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마음’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기쁨’이어서 일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한국에선 영 쉽지 않다. 북유럽 이민을 알아보고 있다는 한 젊은이는 “휘게 라이프를 헬조선에서 억지로 찾아내는 데 지쳤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다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는데, 사실 평등하지 않은 사회와 휘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불평등과 서열에 익숙한 한국인들 중에 휘게의 하부 원칙이라 할 이른바 ‘얀테의 법칙(보통사람의 법칙)’을 실천할 뜻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말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믿거나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근엔 일본이 원산지인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것도 유행인데, 꽤 그럴듯하거니와 바람직해 보인다. “이 작은 마카롱 하나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확행이지만, 커피나 디저트 시장 등 외식업계 트렌드로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소확행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마광수가 역설한 이런 행복론처럼 말이다. “행복은 지극히 가벼운 것에서부터 온다.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져 내릴 때 우리는 행복하고, 향기로운 커피 냄새를 음미할 때 우리는 행복하고,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을 샤워의 물줄기로 시원하게 씻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욜로ㆍ휘게ㆍ소확행의 원조는 ‘카르페 디엠’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라틴어로 “Catch the day!”의 의미다. 지금, 여기의 순간을 잡아라. 즉, 현재를 소중히 하라는 뜻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오 찰나여, 멈추어다오, 너는 그토록 아름다우나니.”라고 노래했는데, 이게 바로 카르페 디엠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카르페 디엠을 외치는 사람들은 나름 성공한 유명 인사들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다른 하고 싶은 일들을 뒤로 미루는 ‘만족의 지연’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유명 인사가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바빠 일에 치여 살아왔던 그들은 이젠 돈 좀 쓰면서 살아야 되는 게 아니냐는 자기 설득을 위해 카르페 디엠을 외쳐댄다.

비극은 그런 사정과 배경은 무시한 채 덩달아 카르페 디엠을 실천하고자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카르페 디엠을 오ㆍ남용하면서 만족의 지연을 불온시하는 것이다. 아니, 몰라서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세상 사는 맛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많고 ‘일중독’이 보편화된 나라에선 만족의 지연보다는 카르페 디엠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우리가 카르페 디엠의 원리를 좋은 방향으로 따르고 그것이 문화로 정착된다면, 내가 보기엔 세 가지가 좋아진다. 세계적으로 하위권에 속해 있는 우리 국민의 행복감이 높아질 것이고, 입시 전쟁이 완화될 것이고,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감소할 것이다. 특히, 세 번째 부정부패가 중요하다. 우리는 부정부패가 더러운 것처럼 말하지만,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들이다. 내 새끼 잘되게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만족의 지연을 넘어 자신 한 몸 버리는 것도 마다 않는 지극한 부성애나 모성애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카르페 디엠의 실천이 광범위하게 일어나진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우리 모두가 같이 그렇게 한다면 해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만 그렇게 했다간 큰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카르페 디엠을 긍정하는 척하면서도 사실상 외면하는 이중적 감정을 갖고 살아간다. 욜로도 마찬가지다. “욜로? 좋지! 팔자 좋은 너나 해라.”는 식으로 말이다.

욜로, 휘게, 소확행, 카르페 디엠, 또는 그 어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지속가능성을 가지려면 그 기본 바탕엔 평온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들이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되는 장면을 지켜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저들이 평온을 눈곱만큼이라도 사랑했더라면!”

제2장 상처받지 않을 자유

남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심리학에 ‘조명 효과’라는 게 있다. 조명 효과는 연극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배우처럼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외모와 행동을 주시하고 있어 사소한 변화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명 효과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자신은 물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 순간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면 남들이 나에게 별관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음에도 그러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하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에티켓이다.

미국 유학 시절, 내가 존경했던 어느 노 교수는 반바지 차림으로 백팩을 메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학교에 오가며 공부에만 미쳐 있었다. 그런 실용주의적 차림새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나는 내심 나중에 나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결심했다. 나는 1989년 전북대학교에 오자마자 감히 반바지는 시도하지 못했지만 늘 백팩을 메고 걸어 다니는 학생 차림새를 유지했고 지금도 그런다. 그런 스타일이 공부 외에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는 데엔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교수는 반드시 정장 차림을 해야 하며 그게 학생들에 대한 에티켓이다.”라고 주장하는 원로 교수들이 있었다. 적어도 초기엔 내 나름으론 상당히 강심장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에티켓은 쓸모없고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화의 절묘한 예”라는 웨인 다이어의 주장에 내심 박수를 보낸 것은 그런 종류의 에티켓과는 거리가 먼 내 라이프스타일 때문일 게다. 다이어는 좋은 에티켓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들어 있음이 틀림없지만, 그중 90퍼센트는 의미 없는 규칙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올바르다고 정해져 있는 방식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내 결정이 나에게 온당하다. 그 결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어려울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을 어떻게 소개하든 그건 내 마음대로다. 팁을 어떻게 주든, 무얼 입든, 어떤 식으로 말하든, 어떻게 먹든 철저하게 내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뭘 입어야 하지?’ 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의 덫에 빠질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에 대해 반항심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루하루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주도하는 삶으로 꾸려나가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속 시원한 말이긴 한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래도 그 방향으로 가도록 애는 좀 써보자. 조지프 캠벨은 “우리가 더없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 『미움 받을 용기』에 한국 사회가 뜨겁게 반응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 책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아는 젊은 친구는 소년 시절에 거울 앞에서 오랫동안 머리를 빗는 습관이 있었다는군. 그러자 할머니께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그날 이후로 그는 삶이 조금 편해졌다고 하더군.”

물론 그런 말 한마디로 조명 효과를 포기할 10대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10대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남보다 자기만족을 위해 별 관계도 없는 남을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용모에 신경을 쓰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세상은 참 묘하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을 신경 쓸 만큼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는 걸 모른 채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니 말이다. 남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으면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은가 보다.

제3장 확신은 잔인하다

거절을 평온하게 하는 법

“나는 거절의 에티켓에 능숙하지 못하다. 멋지고 세련되게 거절 의사를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부득이하게 거절의 뜻을 표할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가장 큰 걱정은 상대방이 나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질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섭섭해 하거나 나를 싫어할까봐 어떤 일을 덜컥 떠맡으면 그때부터 더 크나큰 마음고생이 시작된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말이다. 내심 “맞아, 맞아, 바로 내 이야기야!”라고 생각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내게도 거절은 영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른바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거절을 하면서 마음 편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절은 늘 주요 화두가 되어왔고, 거절을 주제로 다룬 국내외 책이 적잖이 나와 있다. 수많은 해법이 나와 있지만, 정여울의 생각이 모범답안인 것 같다.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이가 들수록 진짜 중요한 것은 거절의 ‘태도’지 거절 자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잊지 말자. 우리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거절하는 이에게는 ‘거절의 윤리와 에티켓’이, 거절당하는 이에게는 ‘거절을 지혜롭게 해석하는 능력과 거절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그럼에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거나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 거절은 여전히 힘겨운 일일 게다. 그런 사람들은 일단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부터 넘어설 필요가 있다. 즉, 100퍼센트 착하지 않으면 나쁜 것이라는 과격한 믿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같은 이치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거나 호감을 얻겠다는 과욕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과욕의 근거인 낮은 자존감은 자신에게 ‘착한 사람’이 되는 걸로 극복해야지 그렇게 퍼주기 방식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여전히 거절하는 게 어렵거나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에겐 김호의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할까』라는 책을 추천한다. 이 책에서 김호는 “거절을 잘한다는 의미는 마음속에서 불편하게 느끼거나, 무리하다고 생각되는 요청에 대해서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내 마음속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거나 무리하다고 생각될 때, 이를 상대방에게 표현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걸 조금이라도 쉽게 하기 위해서 ‘역지사지’를 시도해보 필요가 있다. 역지사지는 상대방과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겪은 경험담을 통해 설명해보련다. 나는 영 내키지 않는 부탁을 마지못해 승낙했다가 그 일에 소극적으로 임해 부탁한 사람에게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봉변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고마워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집요하게 부탁해서 사실상 반강제로 맡은 일인데, 이 정도면 됐지 뭘 어쩌란 거야?” 이게 내 심정이었지만, 부탁한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일단 승낙을 했으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게 그 사람의 생각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을 간단했다. 그 사람이 옳았다. 나는 애초에 그 일을 거절했어야 옳았다. 최선을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은 내 사정일 뿐, 그 사람의 사정은 아니다. 그 사람에겐 어떤 과정을 거쳤건 내가 승낙을 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다.

그래도 이건 내가 스스로 이해했으므로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건도 많았다. 강연, 원고, 인터뷰 요청은 늘 거절의 예술을 요구하는 일이다. 마지못해 요청에 응했다가 몹시 불쾌했던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상대가 다 내 맘 같겠거니 하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내키지 않는 요청을 받아들일 때 이유는 대개 세 가지다. 상대의 요청이 집요하고, 그 요청에 공적 의미가 있고, 그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내 나름으론 이런 배려에 의해 어떤 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했는데, 요청한 사람은 이후 자신이 내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듯 무례하게 행동한다. 약속을 펑크 내고 사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내키지 않는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을 때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키지 않는 요청엔 응하지 않는 나름의 확고한 원칙을 만들어 지금까지 실천해오고 있다.

미국에서 ‘100일간 거절당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거절당하기 연습: 100번을 거절당하니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는 책을 출간한 지아 장은 “거절은 의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거절하는 입장에서도 “거절은 의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거절이 한결 쉬워진다. 나는 의견을 제시하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물론 거절하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거절로 인해서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멀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런 종류의 걱정과 관련, 김호의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할까』에는 ‘과제의 분리’라는 말이 나온다.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에 나오는 개념을 김호가 재해석한 것인데,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되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타인의 과제라는 뜻이다. 김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절과 부탁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모든 이들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싫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과제이지 내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며, 이렇게 과제를 분리하는 순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비교 평가를 해보면 된다. 감당하기 어렵거나 내키지 않는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내가 느낄 수 있는 평온과 고통을 비교해보고, 또 거절함으로써 내가 느낄 수 있는 평온과 고통을 비교해보고, 끝으로 이 두 가지를 종합 비교 평가해보는 것이다. 쾌락과 고통을 비교하는 공리주의의 냄새가 난다고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실 이런 판단은 직관이 도와주니까 말이다. 이렇게 해서 하는 거절이 쉽진 않더라도 평온을 유지하는 데엔 도움을 준다.

누군가로부터 내키지 않은 부탁을 받았을 때는 우선 남이 아닌 자신에게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아 장의 “거절은 의견에 불과하다.”는 말을 명심하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인 인권이 아닌가. 그 기본적인 인권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결코 착한 사람일 수 없다.

제4장 나로 살기 위한 연습

모든 조직의 기본 모델은 조폭이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회사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상식이다. 회사 내에서 그 어떤 부당한 갑질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면 ‘지옥’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조직의 혜택과 보상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느 대기업 부정 입사자는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었다.”고 했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던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는 “우리도 정규직 드나드는 정문 앞에서 데모 한 번 하고 싶다.”고 절규했다.

조직의 보호막은 안전하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는 맛까지 느끼게 해준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온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전에는 다니던 직장 이름을 먼저 대고 이름을 말하면, 이름을 채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눈빛과 자세가 달라졌는데, 이젠 아무도 모르는 내 이름만으로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게 너무 힘들다.”

조직의 최상층이 모든 구성원을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수시로 회식을 하고, 단합대회를 열고, 퇴직자들에게까지 특전을 베푸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조직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숭배까지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절대적 충성과 단결을 조직 문화로 정착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윌리엄 화이트가 60여 년 전 ‘조직의, 조직에 의한, 조직을 위한 삶’을 사는 인간형을 ‘조직인간’이라고 부른 건 폄하의 뜻이었지만, 오늘날 조직인간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건 물론이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이 우러러보는 조직일수록 조직에 대한 충성과 단결의 요구 수준이 높고, 그 구성원들이 그런 요구를 잘 따르는 건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성으로까지 삼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조직의 추한 면을 폭로하는 내부고발이 나오면 평소엔 선량하고 정의롭던 사람들마저 갑자기 바보 또는 악한으로 돌변해 내부고발자를 탄압하는 일에 가담하는 경향이 있다. 내부고발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조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이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자신의 조직과는 무관한 내부고발임에도 조직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라고 하는 조직인간의 보편 윤리를 내세워 내부고발자의 흠을 잡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조직인간이 조직의 안전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충성이 내부 견제나 감시를 무력화시킬 정도로 절대화되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조직이 망한 사례가 무수히 많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반대로 망하지 않고 더욱 발전하면 그런 조직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좀 먹기 마련이다.

조직인간은 부족형 인간이다. 이나미는 『한국사회와 그 적들』에서 “부족형 인간은 같은 집단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헌신하지만, 집단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일도 저지른다.”며 “조직폭력배가 자기들끼리는 가슴 찡한 의리를 나누면서 남들에겐 거리낌 없이 잔인한 행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숭고한 목표를 내세운 조직일지라도 모든 조직의 기본 모델은 조폭 조직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집단의 조폭 문화가 사회적 스캔들로 비화되면 분노하지만, 우리 자신도 가담하고 있는 조직에 대한 충성 문화의 본질을 비켜나가면서 이른바 ‘내로남불’의 심리적 위장 평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가혹한 진단이지만 인정하자. 조직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구성원의 자격에 엄격한 제한을 두면서, 엄격한 위계질서를 추구하고, 조직의 무한 성장을 추구하고, 조직의 이익을 구성원만 독점하고, 조직 내외의 비판에 조직의 이름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격렬하게 대항한다는 점에서 ‘구조적 폭력’ 그 자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런 구조적 폭력의 문제가 있으니, 아예 모든 조직을 없애야 한다는 무정부주의적 유토피아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 조직의 폭력적 속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대처를 제도화하고 문화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조직은 조직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거나 유도하는 의례와 행사부터 자제하고, 우리가 충성을 해야 할 대상은 나 아니면 사회 전체라는 걸 끊임없이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희대의 국정 농단 사태는 조직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체화한 사람들의 합작품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조직의 폭력성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평온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조직의 폭력성에 치인 사람들은 그걸 어느 정도 이해는 하면서도 자신의 불행을 자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폭력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은 피해자들에게 상처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환멸을 넘어서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제5장 ‘자기 합리화’가 나쁜가?

‘성공’의 다른 이름은 ‘고통’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다 수긍할 게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선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는 말에도 동의하겠지만, 그 대가를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열심히 노력하거나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수준에만 머무를 뿐, 노력과 돈 이외에 요구되는 대가에 대해선 잘 생각하지 않는다.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 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 마크 맨슨의 말이다. 바로 그게 현실이다. 이 말이 너무 과격하다면 다음 주장은 어떤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 부자들, 그리고 유명인을 지켜보라. 그들의 성공과 부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들이 무엇을 대가로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들이 치른 대가는 자유다. 그들의 지위는 늘 정해진 옷차림을 강요한다. 그들은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악수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미국 대통령들이 남긴 명언들이 그걸 말해준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이 된다는 건 사형대에 오르는 것”,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화려한 불행”,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고급 노예 생활”, 제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백악관은 세계 최상의 감옥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들이 그걸 몰라서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건 아니며,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대가가 크고 많더라도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성공의 축복이 있기에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의외로 그런 평가 과정을 건너뛰고 성공을 무작정 탐하는 사람이 많다.

알프레드 아들러가 지적했듯이, 성공에 대한 야망은 우리 내면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야망이 크고 경쟁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면에 더 강한 불안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과시해 보임으로써 내면의 콤플렉스를 상쇄하려고 든다. 하지만 성공을 위한 행위와 성공으로 얻은 평판은 편안한 상태의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엄청난 에너지의 소모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성공을 위해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니, 어찌 보면 딱하지 않은가. 물론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진리처럼 통용되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를 좀 달리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낙이 왔다고 해서 고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각오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꼭 성공을 하고 싶다면 성공의 정의를 다시 내리는 법도 있다. 성공의 정의는 시대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흔한 분류법에 따르자면, 성공엔 ‘외적 성공’과 ‘내적 성공’이 있는데, 우리는 외적 성공만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왜 그래야 하나? 자기 나름의 내적 성공을 이룬 후에 “나는 성공했다.”거나 “나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면 될 게 아닌가.

심리학에 밝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이솝 우화』의 ‘여우와 포도’ 이야기에 나오는 이른바 ‘신포도 심리’로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포도가 높이 달려 있어 먹을 수 없게 된 여우는 돌아서면서 “어차피 시어서 먹을 수 없는 데 뭘.”이라고 말한다. 어떤 걸 원하지만 그걸 얻을 수 없다면 비난을 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려는 합리화를 한다는 것이다. 이걸 가리켜 ‘신포도 심리’라고 한다. 사실 합리화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는 본질적 속성이다. 우리가 비판하거나 비난해야 할 것은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면책을 위해 하는 합리화이다.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자신의 평온을 위해 합리화를 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권장해도 좋은 일 아닐까. 그런데 왜 우리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 평온을 누리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가?

제6장 포기하지 않는 게 의지박약이다

포기하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체념은 좋고 포기는 나쁜가? 그렇지 않다. 체념은 포기를 하는 심적 상태에 초점을 맞춘 것일 뿐 포기 역시 얼마든지 바람직한 것일 수 있다. 사실 누구나 다 포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대통령도 포기하고, 재벌 총수도 포기한다.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이 성공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많은가. 누구나 다 수긍할 것이다. 즉, 무엇을 포기하느냐의 차이일 뿐인데, 우리는 그런 구분조차 없이 “성공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건 나쁘다.”고 부정으로 표현한다. 포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은 포기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대규모 선전 공세에 우리가 굴복했거나 주눅이든 탓은 아닌가?

『포기하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포기하지 말자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등등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하는 책들이 수없이 많다. 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는 물론 언론도 한결같이 성공의 주인공들이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포기를 비판하는 메시지엔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는 방어적 메시지와 꿈과 야망을 위해 싸우라는 공세적 메시지 두 종류가 있다. 예컨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방어적 메시지지만, 야망의 실현을 위해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공세적 메시지다. 꿈과 야망의 실현을 위해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포기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포기해선 안 될 것이 있는가 하면 포기가 바람직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은 채로 “포기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포기 부정론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하면 된다.”는 슬로건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왔으며, 고성장이 그런 슬로건의 타당성을 꽤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고성장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시절에 형성된 포기 부정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고성장 시대의 종언은 우리에게 꿈의 높이를 낮추거나 욕망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삶의 지혜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런 포기 긍정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이 포기 긍정론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공론장에선 포기 긍정론이 잘 유통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포기를 긍정하면 ‘루저’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그런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이 포기 긍정론을 역설하면 욕먹기 십상이어서 감히 입을 열기 어렵기 때문이다. ‘포기하라’고 해도 욕먹고 ‘노력하라’고 해도 욕먹으니 입 닫고 있는 게 상책이다.

우리처럼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는 타인지향적 사회에선 성공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함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전투적 삶으로 스스로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지속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삶의 자세가 모든 걸 획일적 잣대로 서열화하는 비극을 지속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체제하에서 포기란 가능하지 않으며,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서열 사회가 지속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서열화된 피라미드 구조에서 경쟁의 수혜는 상층부의 극소수에게만 돌아가지만, 이 시스템이 공정하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선 결과적으로 들러리를 서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한 법이다. 이들은 기존 시스템의 원초적 불공정성을 문제 삼기보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사실상 그 시스템을 떠받쳐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시스템의 개혁은 영영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포기를 하면 ‘의지박약’이라는 비판을 들을까봐 무서워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의지박약이라고 하지만, ‘해야 할 것’이라는 애초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하는 것이 의지박약일 수 있다. 사실 나는 포기하고 싶은데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끌려 다니는 것, 이게 바로 의지박약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언제 포기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의지박약”이라는 줄리언 바지니의 주장엔 일리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앤 랜더스의 다음과 같은 조언도 포기를 의지박약으로 보는 건 어리석은 생각일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꼭 붙잡고 버티는 것이 위대한 힘의 상징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언제 손을 놓아야 할지 알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에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할 때가 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포기를 긍정하는 삶을 살자는 것은 아니다. 매우 현실적인 해법으로 이른바 ‘전략적 포기’는 어떤가? 잭 웰치는 “우리가 1등이나 2등이 될 수 없다면 그 사업은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집중력이 흩어지고, 자원ㆍ자본ㆍ에너지를 집어삼키고, 구성원들에게 세계 최고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불어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략적 포기는 꼭 1, 2등이 되는 것을 겨냥하지 않더라도 냉정하게 이해득실을 따져서 하는 포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공과 평온은 결코 좋은 사이는 아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 이건 성공 여부와 정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이치다. 포기했기 때문에 행복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은 곧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은 아니다. 포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다수를 들러리로 세워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기존 시스템은 무너지게 되어 있지만, 우선 나 자신의 평온을 위해 포기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포기하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는 얼마든지 “포기하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로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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