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향기

돌배나무 / 2020년 6월 / 268쪽 / 16,000원

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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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향기

알랭 코르뱅 지음

책소개

이 책은 ‘풀’이라는 미시적인 소재를 분석하여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풀과 관련된 풍부한 감정들을 폭넓게 다룬다. 저자는 역사가다운 통찰력과 방대한 지식으로 많은 작가들의 문학 작품과 그림을 깊이 있게 분석하여, 풀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독자들을 감성적인 푸른 산책으로 초대한다.

요약본 본문

풀, 태초의 무대

풀은 본질적으로 태초의 정취를 간직한 듯하다. 유년 시절 어떤 방식으로든 풀과 마주해 본 이들은 그 풀이 우리 기억 속 유년기의 원형적 장면을 이룬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브 본느프와는 풀을 다시 만난 순간 이러한 특별한 느낌과 마주하며 소리쳤다.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자리이니, 결코 이론(理論)의 여지조차 없는 이곳.” 인간은 풀을 탐하고 자신의 기억 속에 새긴다.

인간에게 풀은 자연 속에서 가장 조숙하고 변함없는 둥지로서의 모습을 구현하고,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내려놓는다. 우리는 예로부터 인간과 풀잎 사이의 유사성을 이야기해 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랄프 에머슨이 표현한 인간과 풀 사이의 불가사의한 관계이다. 인간은 풀과 마주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여기가 바로 나의 고향이구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브 본느프와의 언급과도 일맥상통한다.

풀은 인간을 바라본다. 풀은 인간에게 말을 건다. 풀이 건네는 말이 곧 자연의 말이다. 풀을 바라보고 글을 쓰면 풀처럼 담백한 말들을 찾아 쓰게 된다. 풀은 시의 근원이 된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풀의 존재는 비관념적 언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풀은 대지의 수많은 비밀을 담고 있으며 땅 그 자체를 담아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풀은 안과 밖 사이의 연속성에 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월트 휘트먼의 눈에는 풀이 지상 최고의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작가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풀에게 다양한 교훈적 가치를 부여해왔다. 그중 가장 높이 사는 가치가 풀의 끈기, 에너지, 솟아나는 능력이다. “풀은 포기할 줄 모른다.” “풀은 자신의 존재를 붙들고 인내한다.” 그야말로 귀감이 되는 풀의 모습이다. 장 지오노는 한번 생명을 틔우면 아무리 낫에 베여도 다시금 돋아나는 풀의 성질에 감탄했다. 풀은 끊임없이 소생한다. 따라서 풀은 곧 영원한 젊음이자 무덤 속에서 되살아나는 자이며,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살아 있는 존재다.

풀은 초록색인데, 초록색은 여러 가지 감정을 이끌어낸다. 때문에 우리는 그 앞에 멈춰 서게 된다. 프랑시스 퐁주는 “우리의 자연은 이제 진실이 푸르길 바란다”라고 썼고, 필립 자코테는 “인간은 푸른 진실을 쫓는다”고 단언했다. 한번 들어보자. “모든 색깔들 중에 초록색이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가장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색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초록색이 밤낮없이 자신의 가장 깊은 빛깔을 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초록색은 초목이라는 이름으로 식물에 깃들어 있다.”

이제부터 그 형태에 대해 살펴보자. 가장 간단한 형태는 풀잎이다. 휘트먼은 풀잎을 “형언할 수 없는 완벽함”의 기적이라 형용한다. 풀잎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개성을 지닌다. 괴테의 작품 속에서는 풀잎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괴테는 이런 감정을 베르테르에게도 부여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루이즈 콜레에게 이렇게 썼다. “한 장의 풀잎에 대한 이야기에 무한한 사랑을 담아낼 수 있겠지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풀잎은 희망의 증거였다. 소로는 이렇게 썼다. “마치 녹색의 긴 리본이 땅속에서 흘러나와 여름을 재촉하는 듯하다. (…) 샘이 마르는 6월이면 풀잎이 수로가 되어 (…). 이렇게 인간이 그 생명을 뿌리째 앗아도 풀은 어김없이 푸른 잎사귀를 내민다.”

한편 잡초는 지금처럼 하찮은 대접을 받기 전까지 꽤 오래도록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연민을 이끌어내는 존재를 넘어 심지어 감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7세기 말부터 약으로서의 가치와는 별개로 잡초 그 자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조지 왕이 통치하는 동안 잡초에 대한 찬가들이 울려 퍼졌다. 존 클레어는 농부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잡초들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알프레드 테니슨은 잡초들을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나는 차라리 산에 꽃을 피운 소박한 잡초를 더 사랑한다. 자신이 태어난 샘물 근처에 싹을 틔운 한없이 미천한 풀 말이다. (…)”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이렇게 외쳤다. “잡초여, 영원하라!” 이 시인들에겐 푸르른 모든 것들 안에 신이 깃들어 있었다.

의외의 곳에서 잡초를 만나면 특별한 감정들이 생긴다. 산비탈이나 도랑, 도로 갓길에 난 풀 말고도 철길 사이 공터에 조용히 자라나 있는 풀들을 봐도 그렇다.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잡초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장소의 잡초들은 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조르주 상드는 『콩쉬엘로』에서 도랑가를 따라 난 풀을 보고 느낀 놀라움을 표현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장 상퇴유』에서 산비탈에 난 어두운 빛깔의 풀들 사이에 숨은 개양귀비를 보고 든 강렬한 감정을 한 페이지에 걸쳐 길게 묘사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시인의 시선을 지닌 것은 아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 이런 풀들은 그저 “잡초”에 지나지 않았다.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풀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1860년 출간된 프랑스어 사전 『베슈렐』에는 “잡초가 유해한 풀”이라고 나와 있다. 잡초는 반드시 뽑아버려야 하는 풀에 불과했다. 가능하다면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하는 존재였다.

영국에서는 17세기에 이어 18세기까지 잡초의 유해성을 널리 알리는 내용이 농학서의 단골 주제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반대 의견을 펴는 사람이 있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일부 예술가들과 박물학자들은 사람들에게 무시 받아온 식물들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잡초는 무성하게 자란 키 큰 풀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평가받을 수 있었다. 17세기부터 수채화가들은 작품 속에 온갖 종류의 야생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중산층은 시골에서 식물들을 채취할 때 이러한 야생초들을 더 이상 “잡초”로 보지 않게 되었다. 18세기 낭만주의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존재였던 풀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풀과 신을 연결 짓는 일 말이다. 풀은 구약성서에 등장한다. 창세기에는 풀의 탄생이 동물의 탄생보다 앞서고, 인간은 맨 마지막 순서에 나온다. 풀은 삼일 째부터 등장한다. 성서에서 풀은 여러 차례 인생을 비유하는 요소로 나온다. 번뇌의 상태, 미래에 닥칠 힘겨운 상황들 말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임이로다.”(시편 37편)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시편 102편)

한편 하느님은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시편 147편 및 104편) 하느님이 배를 불리게 하신다. 훗날 18세기에 이르러 루소는 이렇게 썼다. “풀잎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적인 증거와도 같다.” 라마르틴의 작품에 등장하는 조슬랭은 나이가 들자 식물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깨우쳤다. “그에게 있어 풀 하나하나는 자명한 이치를 밝히는 빛이었고, 여명이 비치는 곳으로 인도하는 신의 계시와 다름없었다. (…) 무색무취한 존재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영혼의 반짝임으로 풀 하나하나를 비추며, 풀이 느끼고 생각하며 몸짓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노라.” 자연의 창조물에 관한 이 같은 신성화는 빅토르 위고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그는 풀이 일으키는 다양한 감정 속에서 신의 현존에 대한 영감을 여러 차례 받았다. 마지막으로 다룰 내용은 풀이 지닌 사회적 상징체계이다. 이 내용은 여러 문학작품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계층의 개념이 풀의 형상에까지 반영되기도 한다. 귀족이 사는 저택 앞에 놓인 잔디밭의 모습은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 필립 들레름은 이 부분을 직접 느끼고 확신했다. “(노르망디 지방의) 풀이 빽빽하게 자란 초지에 서면 마치 성주가 된 기분이 든다.” 그 밖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부분은 풀이 지닌 비천한 신분이다. 풀은 평민과 동일시된다. 풀은 권력자가 짓밟아도 되는 서민들과 닮아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더욱 심각한 상징도 있다. 풀을 외설을 연상시키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동시대에 영국에서만 사용한 속어를 보면 풀 중에서 악마처럼 인식된 종들이 많았다. 그래서 소로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이처럼 천대받는 풀에 대해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풀 중에서 빅토르 위고가 가장 아낀 풀이 바로 쐐기풀이다. 『레미제라블』에서 마들렌 시장이 농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쓸모없는 풀도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한 쥘 미슐레는 초원을 꿀벌 덕분에 “모두가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초원, 그 무성한 풀의 풍요로움

프랑스에서 초원이라 하면 면적이 넓고, 잔디와 꽃의 종이 풍부하며, 벌초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키 큰 풀들이 자라 있는 모습이 흔한데, 이러한 특징들이 주는 시각, 후각, 촉각적 메시지가 초원과 목장의 풀밭을 구분해준다. 폴 가덴은 초원의 풍성함을 뚜렷하게 표현했다. 한번 들어보자. 『실로에』의 주인공 시몬이 발코니 앞에 펼쳐진 초원을 바라본다. “해질녘 빛을 받고 드러누웠을 때처럼 따스함이 느껴졌다. 초원은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 그 무엇처럼 느리고 평온하게 호흡하고 있다. 햇빛이 그 위를 감싸 안으며 꽃과 짐승뿐만 아니라 땅조차 기쁨으로 충만하게 한다. 이제는 (…) 온 세상에 서로를 만나러 온 단 두 개의 존재만 남았다. 사랑의 향기로부터 흘러나와 뒤섞인 천체와 초원이 장엄한 회합을 이루며 세상 어디에도 없을 행복을 불러낸다.” 전날 밤 시몬은 초원을 바라보며 문득 이곳이 오래 전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알던 곳이라 확신했다. 예전에도 이곳을 지금처럼 바라봤던 것이다.

현대에는 도미니크 루이즈 펠레그랭이 초원의 본래적 의미가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느낌과 감정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초원은 “영혼이 잠시 쉴 수 있는 곳이요, 풀을 베다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곳이며, 걸음을 잠시 쉬며, 파리를 쫓다가 구름을 바라보며”, 또 다른 상상의 초원을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한편 19세기 초엽, 윌리엄 길핀은 픽처레스크론(論)을 내세우며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초원을 평가했다. 그는 초원이 그림 속에 쉽게 녹아들어 다양한 그림을 완성하는 데 일조한다고 했다. 초원은 모든 푸른 언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풍경이 펼쳐진다. 초원은 다채로운 빛깔과 물결치는 일렁임으로 시선을 즐겁게 한다.

중세 시대부터 사람들은 초원이라 하면 우선 그곳에 핀 꽃들로부터 떠올렸다. 초원은 알록달록하다. 특별히 의미 있는 작품들을 몇 개 골라 살펴보며 이러한 특성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자세히 알아보자. 마르셀 프루스트는 『장 상퇴유』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초원에 핀 꽃들을 향한 찬가들을 지어 불렀다. 특히 노란앵초, 앵초, 개양귀비, 제비꽃, 미나리아제비를 향한 찬가들이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꽃들이 유독 만발한 어느 초원을 언급하며 이 작은 꽃들이 일으키는 감정들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달걀 노른자처럼 샛노랗게 반짝이는 꽃들이 풀밭 위에서 혼자, 짝지어 혹은 무리지어 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 다른 어떤 곳도 쳐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꽃들을 바라볼 때 드는 즐거움을 그들이 금빛으로 물들인 지면에 차곡차곡 쌓다 보면 너무 과한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느낌이 강렬해진다. 어쩌면 이 기쁨은 내가 어렸을 때, 동화 속 왕자님들의 멋진 이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그 시절, 오래 전 아시아에서 건너와 이곳 마을에서 조촐한 지평선에 만족하며 영원히 살아가게 된 이 꽃들에 손을 뻗었던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환희의 원천인 초원 코스를 직접 둘러보며 스스로 느껴보아야 한다. 이러한 느낌을 추억 속에 간직한 사람들이 말하는 야생적 기쁨을 겪어 봐야 한다. 초원에서는 목장과는 달리 오랫동안 맴돌거나 혹은 가로질러 걸을 수 있다. 19세기에 드니즈 르 당텍이 “풍만한 풀”에서 산책에 관해 형언한 내용과 일치한다. 풍만한 풀은 바람의 강약, 초록빛 물결과 넓은 풀밭 위로 내리는 빗물이 연출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밑바탕에 풀밭을 오랫동안 걷고 밟고 가로질러 달리며 무엇이 있는지 깊숙한 곳까지 찾아보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가 시작되면서 매년 5월 1일에 초원을 산책하는 일이 관례가 되었다. 이런 산책의 목적은 세상의 부패와 맞서는 데 있었다. 19세기 초에 나온 소설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처럼 산책하는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한다.

한편 19세기 전반에는 미국 서부의 초원이 작가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초원은 당시 미국에서 문학 및 역사 속 등장인물로서 역할을 했고, 그 뒤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친숙해진 그레이트플레인스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조나단 카버의 작품에, 맨 처음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최초일, 개척자들의 침략 이전의 초원에 대한 정교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1763년 10월에 나왔다. 한편 페니모어 쿠퍼의 『대평원』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는 아예 초원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1827년에 나온 이 작품은 단기간에 유럽에 번역서로 출간되었고, 특히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언뜻 보기에 한결같아 뵈는 이러한 “푸르른 초원들”은 사실 다양한 종류의 풀들이 모여 이루어낸 곳이다. 이곳의 목초들은 움푹 팬 지형에 높게 자라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두터운 장막을 이루고 있는 목초들 덕분에 이런저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위험이 닥치면 고개를 처박고 몸을 숨길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발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울리지 않는 두텁고도 고요한 목초 아래를 기어갈 수 있다. 한편 이 목초밭에는 깃털 침대만큼이나 푹신한 층도 있다.

주기적으로 큰불이 일어 초원이 불바다가 되기도 한다.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 속 주인공인 모피 사냥꾼은 이렇게 단언한다. “불길이 퍼지는데 여기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양봉장에서 연기에 쫓겨 흩어지는 벌 떼 꼴이 되겠군요. (…) 벌써 불꽃 소리가 들릴 텐데요. 제가 겪어본 바로는 초원에선 다 자란 풀에 일단 불이 붙으면 웬만큼 튼튼한 다리로도 불이 퍼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리기 힘듭니다.”

대초원의 푸른 일렁임은 숲의 모든 공세를 제쳐낸다. 큰 열매를 단 참나무가 보초를 서듯 늠름하게 서 있는 곳에 이르러서야 그 일렁임을 멈춘다. 갖가지 새들과 들소 떼가 초원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대초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세기 중엽부터 대초원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대초원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에서 패배한 뒤로, 환경 보전 운동의 선구자인 존 뮤어와 그 뒤를 이은 알도 레오폴드와 같은 사람들이 대초원에 대한 향수를 앓았다. 20세기 전반기에 위스콘신에 정착해 생활한 알도 레오폴드는 대초원의 흔적을 오랜 시간 동안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그는 대초원이 사라진 과정을 깊이 연구하고 분석했다. 인디언 추방 전쟁 동안 들소는 마구잡이로 죽임을 당했고, 대초원은 농장과 울타리로 뒤덮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대초원의 땅을 유럽에서부터 뉴저지와 뉴욕을 거쳐 건너온 “잡초”들이 장악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잡초는 참새귀리였다. 알도 레오폴드는 이 풀에 얄미운 감정을 실어 그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참새귀리는 “빽빽하게 자라며 줄기마다 노랗고 불이 쉽게 붙는 뻣뻣한 수염 같은 이삭”이 달려 있다. 들소를 비롯한 소과 동물들이 뜯어먹을 수 없는 풀이다.

더불어 대초원에 더 이상 불을 놓을 수 없었다. 불은 오래 전부터 대초원이 숲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준 우군이었다. 그런데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불을 내는 일이 금지되었다. 당시 어렸던 존 뮤어는 숲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자신이 살던 마을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초원을 뒤덮는 모습을 보았다. 불과 몇 년 만에 초원의 잔디와 큰 열매가 달린 참나무를 비롯해 작고 희귀한 여러 식물 종까지도 모조리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표적인 종으로 알도 레오폴드가 묘사한 양구슬냉이가 있다. 색깔은 “순백색”에, “너무 작아서” 아무도 먹지 않는 풀이다. “이 풀을 노래한 (…) 시인이 아무도 없을 만큼 작고 작은 존재이다 - 그저 자신이 해야 하는 소소한 일을 묵묵히 하는 미약한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대초원의 흔적을 보존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알도 레오폴드는 우선 자기 자신이 뉴멕시코 최초의 “야생식물 보호구역” 담당자가 되었으며, 이후 위스콘신에서 지내는 수년 동안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매해 7월마다 특정한 날을 정해 잃어버린 대초원을 기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스콘신의 작은 묘지 가운데 야생식물의 흔적이 아주 작게 남아 있는 곳에서, 예전에 이 지역의 수백 헥타르를 뒤덮었던 풀인 실피움 한 포기가 밑둥만 겨우 남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알도 레오폴드는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초원 시대의 종말”이 상세하게 기록된 역사책이 절판된 듯 슬퍼하고, 또한 이 소멸을 “자생 야생식물이 치르는 장례식”의 마지막 장면을 본 것처럼 서글퍼 했다.

풀 내음 가득한 삶의 터전

풀 베는 작업을 하는 광경을 보면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광경은 문학이나 회화 작품에 자주 등장해 왔다. 낫, 낫질, 풀 베어 말리기, 건초를 저장하는 일은 소설 작품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건초를 만들어 내는 일은 풀의 운명을 이루는 한 과정이다. 이 작업은 대체로 집단 행위인 만큼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바와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에 관한 이야기를 건너뛸 수는 없다. 적어도 이 작업을 실제로 하지 않더라도 그저 바라보기만 한 사람의 마음속 감정만은 간략히 짚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점차 사라져가는 이 같은 광경이 불러일으키는 향수 역시 풀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작업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이 중세 시대의 글과 그림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아름다운 목장”의 이미지와 화려하게 알록달록한 초원의 이미지, 목초지에 자란 다양한 종류의 풀들, 목장을 단순한 목초지와 구분 짓는 방법, 그리고 풀 베는 방법뿐만 아니라 정권과 기사, 초원 사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이 중세 시대의 여러 작품에 나온다.

인공적인 초지가 대거 나타나기 전까지는 풀이 자란 공간들을 유지하는 작업 방식이 거의 동일했다. 먼저 무성한 잡초들을 제거하고 두더지가 흙을 파며 만든 흙덩이를 허물어 “낫이 잘 들어가는” 초지를 유지하고, 낙엽들을 긁어모아 비료로 사용해 풀이 병드는 일이 없게 하며, 필요하다면 관개하여 주변에 지나는 시냇물을 초지에 쉽게 끌어 쓸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올리비에 드 세르는 1600년에 목초지 관리 방법을 상세히 기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최상의 건초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목초지들은 무엇보다 흐르는 물이 잘 들어오는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관리자”가 무엇보다 목초지의 토질을 잘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토질이 좋지 않은 땅에서는 짐승들이 좋아하는 맛 좋고 신선한 풀들이 충분히 자라지 않는다.” 다음으로 풀밭과 목초지에 물을 주며 “돌을 제거하고” 잡초를 뽑는다. “가시나무나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하고 돌이 보이면 즉시 치워버려야 한다.” 끝으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바로 “두더지들을 내쫓는 일”이다. 더불어 “이끼와 흙덩이를 타고 자라는 덩굴식물들도” 신경 써서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초제”를 뿌리는 것이 좋다.

문학 작품에서 풀을 베어 말리는 작업 과정을 묘사해 놓은 부분은 많지만 그 과정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드물다. 이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예만 살펴보고 넘어가려 한다. 나는 지난 저서에서 나치 독일 점령 때 노르망디 지방의 보카주에서 이 작업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졌는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매일 저녁마다 알랑송과 동프롱을 잇는 시외버스 기사 아저씨가 잠시 차를 세워 어느 시골 아주머니가 길 끝에 내다놓은 토끼 먹이용 풀 자루를 실었다. 어린 내 눈에는 그 풀이 감정의 보고(寶庫) 같았다. 매일같이 풀이 무성히 자란 강가 목초지에 풀을 따러 가야만 했을 테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가난한 자들은 길가에 자라는 풀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리 카를 위스망스의 소설 『피항지에서』에 등장하는 노린 아주머니는 르노디에르 언덕에 난 풀밭으로 향한다. 매일같이 토끼에게 먹일 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풀을 베어 말리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낫질이다. 그런데 낫질은 스스로 깨우쳐야 하며,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과 속도를 잘 맞추어야 효과가 좋은데, 제대로 손에 익히기가 결코 쉽지 않다. 협동심과 서로 잘 아는 사람들끼리 만들어내는 화목함은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해 생산성을 높인다. 에베 블랑은 낫질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먼저 “돌 위에서 나던 쇠의 노랫소리가 멈췄다가” 낫이 날카롭게 갈렸다. 그 뒤 “서걱거리는 소리에 이어 줄기들은 바르르 떨며 긴 한숨과 함께 쓰러졌다.”

귀스타브 루는 이 모습을 보다 시적으로 표현했다. “밤새 풀을 베고 널어 말리느라 어느새 해도 져버렸네.” 해가 밝은 뒤 다시금 낫질을 시작한 이들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꽃핀 토끼풀이 뿜어내는 달콤한 숨결이 당신의 벗은 어깨를 비단처럼 어루만지네.” 좀 더 뒤로 가면 이런 구절도 나온다. “오, 야수같이 예리하게 낫질하는 사람이여, 풀밭을 온통 수놓은 만개한 꽃들이 당신의 무릎 아래에서 일렁이네. 당신이 꽃들을 베어내니, 짙은 샐비어와 데이지, 그 옛날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이름 모를 꽃부리들, 당신의 눈빛과 같은 샘물과 폭풍우의 푸른빛이 어지러이 떨어지네.”

올리비에 드 세르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농업경영론』에서 풀베기 과정을 정확히 기술했다. “풀 베는 시기는 늦추기보다 차라리 서두르는 편이 낫다. 초록빛이 약간 도는 건초가 더 풍부하며 가축들이 먹기에도 더 먹음직스럽고 맛이 좋기 때문이다. 또한 젖소들이 젖을 만들어내기에도 과도하게 여문 것보다는 초록빛이 도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처음 난 풀을 베는 일을 오랫동안 미루었을 때보다 서둘렀을 때, 다시 나는 풀이 지체 없이 자라나” 초지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날이 건조한 시기에는 “낫질하기” 하루 전날 풀에 물을 주어야 한다. 풀이 축축한 상태일 때 “베어 내고 모으기가 한결 쉽기” 때문이다. 만약 비가 내린다면, “베어 낸 건초를 세계 흔들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야 날이 다시 개었을 때 건초의 위쪽 부분이 먼저 말라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올리비에 드 세르는 다음과 같은 설명도 덧붙였다. “말린 건초는 지체 없이 여러 개의 더미로 쌓아올린 뒤 각 지역의 방식에 따라 단을 만들도록 한다.” 그런 뒤에 신속히 수레에 실어 “건초 창고”로 가져가, 건초가 장시간 풀밭에 머무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새 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 토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느껴지는 것들 이외의 감정들을 살펴보자. 베어 낸 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그 냄새가 짙어진다. 네르발은 오래 전 실비와 함께 테브를 따라 산책했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들판은 베어서 고랑에 널어놓은 곡식 짚단과 건초 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그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마치 예전에 숲의 싱그러운 향기를 맡고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건초 더미와 그 냄새는 풀을 베어 말리는 작업을 할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듯하다. 콜레트가 이렇게 썼다. “당신이 어느 6월, 달빛이 내 고향 모래언덕과도 같은 둥근 모양의 건초 더미 위를 환하게 비추는 그 시간에 풀을 베어 낸 목초지 사이를 지난다면, 건초의 향기를 맡고 당신의 마음이 열릴 텐데.”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건초가 지닌 청각 및 촉각, 후각적 감각뿐만 아니라 곳간에 건초가 쌓여 있는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평온함을 찬양했다. 그는 1852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베이커 농장의 곳간에 들어서 쥐들이 사는 마른 건초 더미에 앉았다. 밖에서는 폭풍우가 요란하게 불어쳐도 이곳 건초 더미에 앉으면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함만이 가득해진다. 어느 비가 많이 내리는 날 건초 더미가 주는 고요함, 귀뚜라미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는 건초 더미에는 평온하고 잔잔한 생각들로 가득하다. 밖은 온통 젖은 채 어지러운데, 안은 이토록 바짝 말라 있고 고요하다니! 오, 이곳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풍부한 생각들을 할 수 있겠는가! 건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정적을 더 뚜렷이 느끼게 한다. 이 얼마나 완벽한 침대인가! 건초 더미에 앉아 건초를 생각하다니,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죽은 자들의 풀(라마르틴)

풀은 인간의 초월성을 상징한다. 보쉬에는 이러한 상징을 되풀이해서 사용했다. 1670년 8월, 그는 앙리에트 당글르테르의 추도사를 읊으며 시편 102편에서 영감을 얻어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껏 부인은 들판의 풀처럼 살아왔습니다. 아침에 그녀가 활짝 핀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모습이었는지는 익히 잘 알고 있지요. 저녁이 되어 이제는 그녀가 쇠약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의 여신이 알리는 죽음은 풀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주제를 지겹도록 반복했다. “낫의 칼날에 풀은 고개를 숙여야만 하네(『동방시집』).” 『관조시집』에 수록된 〈딸에게〉에서는 죽음의 여신이 또 다시 나타나고, 그녀는 죽은 자다. 빅토르 위고는 무덤 위에 자라는 풀은 죽음을 비유하는 “해로운 풀”로 보았다. 한편 수많은 작가들이 생명의 부활을 빗대어 표현했는데, 그중 풀의 소생 또한 인간이 죽음에 맞서는 필연적인 행동을 상징했다. 마로에 이어 롱사르도 클로드 드 로브스핀의 묘비명에 의문을 제기했다. “풀밭에 자라는 풀이 / 계속 다시 지고 핀다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 인간이 무덤에 들어가면 / 지하로 가서 되돌아오지 않는 것 아니던가?”

한편 풀은 오래된 죽음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플로베르는 풀이 폐허에 관한 시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1846년 8월 26일, 루이즈 콜레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폐허에 자라는 풀이 유난히 좋소. (…) 삶이 죽음의 자리를 찾아와, 화석이 된 두개골 안에 풀이 자라게 하고,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아로새긴 돌에는 노란 무아재비 꽃이 필 때마다 불멸의 원칙이 다시 나타나는 듯하오.”

풀은 죽은 자를 되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거나 파산시키기도 한다. 풀은 그 자체가 덫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이 풀의 죽음에 관한 주제를 풍부하게 만든다. 나는 어린 시절 보카주의 초지를 흐르는 강가에서 이러한 경험을 자주 했다. 풀과 깊은 물을 마주하는 순간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지나치게 치명적인 매력에서 비롯된 강렬한 감정이었다. 시골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여자들이 늪이나 풀들로 에워싸인 연못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으면, 남자들이 그 모습을 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곤 했다. 바르베 도르비아는 빨래하러 온 여자들이 옆 초원에 있는 풀밭에 빨래를 널어놓는 그 장소에서 반했던 여인이 자살하는 장면을 통해 이처럼 강렬한 감정을 이끌어냈다. 이 여인이 자살한 곳은 바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널어놓는 풀밭 근처였다. 여기에서는 푸르름이 치명적인 연못을 오염시키고, 이 연못은 죽음을 유혹하는 푸르스름한 덫이 된다.

완벽한 단조로움을 지닌 초원은 죽음의 장소이다. 프랑시스 퐁주는 자연이 이를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풀을 짧게 깎아 초원을 마련했다고 했다. 짧은 결투 끝에, 적을 쓰러뜨리거나 반대로 자신이 적에 의해 쓰러지는 곳이 바로 초원이라고 했다. 필립 자코테는 결투를 할 때, 초원은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죽음을 용기 있게 생각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자살, 즉사의 장소인 초원은 살인 사건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장 지오노 작 『소생』의 등장인물인 피에몬테 지방의 한 여자가 바구니를 짜러 들판으로 나간다. 그녀는 일하는 동안 세 살짜리 아들을 광주리에 넣어 풀밭에 내려놓고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꽃을 따다 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이가 풀밭에 “이미 핏기를 완전히 잃고, 몸이 차갑게 식은 채” 누운 모습을 발견한다. “아이의 고사리 손에 쥐어져 있던 잎줄기를 보고서 아이가 독미나리를 먹었다는 걸 알아챘다. 시퍼런 줄기를 발견한 아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게 뭔지도 모르고 먹었던 것이다.” 그 뒤로 말라 죽은 것 같은 풀이, 아이를 죽인 장본인인 풀이 계속해서 이 비극적인 장소를 지키며 아이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묘지 위로 빽빽이 자란 잔디는 성스럽다. 특히 영국 사람들은 그곳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애초에 뿌리를 뽑으려 애쓴다. 그런데 플로베르는 그것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생각했다. 1851년 9월 28일, 그는 루이즈 콜레에게 쓴 편지에서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를 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실은 나는 묘지들 중에서도 훼손되어 황폐해지고, 가시덤불이 우거지고 풀들이 무성히 자라 폐허가 된 것들이 좋소. 가까운 밭에서 소가 넘어와 얌전히 풀을 뜯어먹고 있는 묘지를 보는 것도 좋구려.”

졸라가 『무레 사제의 과오』에서 묘사한 알빈의 장례식 장면은 또 다른 감정의 타래를 풀어낸다. 묘지에서는 “장례 행렬의 발걸음에 짓밟힐 때 나는 작은 소리들이 숨죽여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무성하게 자란 수풀 사이로 큼지막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그 주변을 따라 키 큰 식물들은 뿌리가 반쯤 뽑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더 놀라운 부분도 있다. 때론 침대 혹은 침대보처럼 보이는 풀과 무덤 사이의 밀접한 관계이다. 미국에서는 휘트먼이 1855년에 “풀은 무덤들의 아름다운 머리칼”이라고 표현하며 풀에게 말을 건다. 그는 풀에게 시체들과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

“아마도 그대는 젊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그들을 알았다면 나는 그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대는 나이 든 사람들과 여인들, 엄마 품에서 너무 일찍 떨어져 나온 자식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이곳에서 엄마의 품속인 것이다. 이 풀잎은 나이 든 어미들의 백발이 된 머리에서 나왔다 하기엔 너무 어둡고 늙은 남자들의 희끄무레한 수염보다는 어둡고 색이 옅어진 목구멍에서 솟아났다 하기엔 너무 어둡다.”

자신이 훗날 죽어 묻힐 곳을 떠올리는 일은 풀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이 주제는 수 세기에 걸쳐 반복되었다. 롱사르는 〈자신의 묘 선택에 관하여〉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다. “모든 것이 그곳 주변을 에워싸고 가둬놓는 곳, 풀과 물결이 속삭이는 곳, 풀은 늘 푸르고, 물결은 늘 굽이치는 곳.” 롱사르는 자신을 위해 푸르른 앞날을 바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바라기도 했다. “푸른 무덤이 매년 잔디로 뒤덮여 있기를” 또한 그는 “감미로운 풀과 샘물, 꽃을” 사랑한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를 떠올리며 양들에게 경고했다. “이곳 초원의 풀은 뜯어먹지 말거라. 발루아의 님프에게 이 모든 풀은 성스러운 존재이니.” 2세기 뒤 나온 소설에서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제 자신은 죽기로 결심했다고, 그녀더러 나중에 산에 오를 일이 있으면 “석양 속에 높이 자란 풀들이 쓸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 자신의 무덤을 바라봐 달라고 이야기했다.

죽어서 초목에 잠들고 싶은 바람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무덤에 자란 풀이 어떤 말을 건네는 모습을 묘사해놓은 부분이다. 관을 뒤덮은 잔디에서 들려오는 기도는 라마르틴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다. 라마르틴은 『새로운 명상시집』에서 자신의 무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는 어느 죽음을 앞둔 사람을 이야기했다. “관을 뒤덮은 잔디와 그림자와 침묵 속에서 기도를 외는 소리가 터져 나오네.” 이에 반해 모파상은 그의 작품을 해석한 루이 포레스티에가 지적했듯이, 풀의 존재가 불멸을 보장해주지도 내세의 삶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고 바라보았다. 무덤 위에 무성히 자란 풀의 광경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저 그 풀들이 시체 위에 자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작품 전반에 걸쳐 풀어낸 풀과 관련된 감정들은 강렬하고 다양하다. 예컨대, 『빛과 그림자』에서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 잠들게 될 죽은 자들의 정원에서”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살아갈 곳일지니 (…) 풀밭에서 내가 떠들어대니 죽은 자들이 즐거워하는구나.” 사실 꼭 무덤에 자란 풀이 아니더라도, 죽음에 맞선 안식처인 풀은 그 자체로 망자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기에 충분하다. 모리스 드 게랭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친구 마리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를 강렬히 표현했다. “풀잎에 숨어들어 은은히 풍기는 당신에 대한 추억의 향기를 다시 맡을 수는 없을까. 여전히 울리는 가벼운 떨림으로 이름 모를 꽃의 꽃밥을 살며시 흔들어 놓는 당신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을까.”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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