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를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알파미디어 / 2021년 2월 / 450쪽 / 19,000원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를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를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사무엘 홀리 엮음

저자 소개

선교사 부모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온타리오주 킹스턴 퀸즈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7년 퇴직한 뒤 캐나다에 거주하며 책 출판 및 영상 자료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역사에 관심을 두고 조지 포크의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임진왜란』등의 역사서는 물론이고 『스피드 듀얼』, 『얼터밋 스피드』, 『더 트웰브 라이브스』 등 다수의 작품을 썼다.

책소개

이 여행기는 서양인의 눈에 비친 1880년대의 조선을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한 독특한 기록물인데, 포크는 여행 중에 보았던 새로운 발견과 놀라운 광경뿐만 아니라, 여행의 순간에서 느꼈던 감정까지도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 고충을 겪고, 좌절감을 느끼고, 모욕적인 순간을 당했을 때조차도 묘사력이 뛰어난 글 솜씨로 경험했던 내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요약본 본문


편자 서문

1884년 11월 1일 미국 해군소속 조지 포크 소위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조선의 남쪽 지역을 관통하는 900마일의 고된 여행을 시작했고, 길 위에서 보낸 44일 동안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2권의 노트 380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여행기는 버클리 대학의 반크로프트 도서관에 조지 클레이튼 포크 관련 수집품 중 일부로 소장되어 있는데, 이 여행기는 포크가 나타나기 이전까지의 그 어떤 서양인도 경험한 적이 없었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기록이다.

포크는 조선 왕조의 고위 관리나 정부 관리가 하는 방식대로 가마를 타고 기나긴 여정을 소화해 냈다. 여행 중에 포크는 새로운 발견과 놀라운 광경을 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여행의 순간에서 느꼈던 감정까지도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했다. 또한 이 여행기는 서양인의 눈에 비친 1880년대의 조선을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한 독특한 기록물이다. 당시 포크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었고, 조선의 문물에 가장 박식한 서양인으로서 조선인들과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 포크는 묘사력이 뛰어난 글 솜씨로 여행했던 지역의 모습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냈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는 1856년 10월 30일 펜실베이니아의 메리에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1876년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 위치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과 아시아에 주둔하는 미국의 해군 전력인 아시아 분함대에 복무하기 위해, 선체가 쇠로 만들어진 증기선인 앨러트호(Uss. Alert)의 선원으로 합류한다. 그는 총 6년의 기간을 함대에서 근무했다. 근무하던 배가 일본 항구에 자주 드나드는 동안 그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 학구적인 자세와 열성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883년 서구를 향한 첫 번째 조선 사절단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통역 역할을 할 수 있던 사람은 미국 정부 내에서 포크가 유일했다. 그는 뉴욕, 보스턴, 워싱턴 D.C.를 순회하는 사절단과 함께 동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여행이 끝날 무렵, 포크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정사 민영익은 포크가 조선의 사절단과 동행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미국 해군과 국무부는 해군 무관이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고 그 자리에 포크를 임명하여 아직 해군 편제가 없는 조선으로 파견했다.

11월 19일 그는 민영익과 사절단의 서열 3위인 서광범, 수행원 변수와 함께 트렌턴 호(Uss. Trenton)를 타고 뉴욕을 떠났다. 배는 유럽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 조선으로 향했다. 트렌턴 호는 1884년 5월 31일 제물포에 정박한다. 그리고 다음 날 포크는 해군 무관의 임무를 맡기 위해 서울로 출발했다. 그는 국무부와 해군으로부터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가능한 한 최고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포크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임무에 착수했다. 날마다 조선인과 대화하면서 언어 능력을 키웠고 중요 관리와 유대관계를 맺었다. 정부와 문화, 주민에 대해, 또 중국, 일본, 영국, 러시아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공부했다. 실제 한국어 실력이 늘면서 포크는 곧 그의 상관이자 첫 번째 조선 주재 미국 공사인 루시우스 푸트보다 한국을 더 잘 이해했다.

조선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포크는 조선을 여행할 일련의 계획을 세운다. 처음에 그는 3번의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는 경기도 중심부, 두 번째는 조선의 남반부를 가로지르는 계획, 마지막 세 번째는 북부 지방을 가로지르는 계획이었다. 그는 처음 두 번의 여정은 마무리했다. 하지만 세 번째는 떠나지 못했다. 1885년 1월, 그는 푸트 대사의 이임으로 대리공사로 임명된다. 일시적인 조치였지만 2년 가까이 지속되는데, 이 2년이 포크에게는 고난의 시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서기 한 명도 두지 못한 채 미국을 대표해야 했을 만큼 본국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조선인들은 서울의 다른 어떤 국가의 외교관보다 그에게 더 많은 도움과 조언을 구했다. 나라를 어떻게 근대화시킬지, 그리고 중국, 일본, 서구와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 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어떻게 지켜낼지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포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도움을 모두 제공했다. 이렇게 돕는 과정에서 그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베이징(청나라)과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 문제는 결국 미 국무부가 그를 소환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미중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887년 6월 조선을 떠났고, 6년 뒤 일본에서 3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의 1884년 조선 여행 일기

여행 일행은 다음과 같다. 조지 C. 포크[복구(福久)], 미 해군 소위 / 전양묵, 양반 / 정수일, 포크의 수행원 / 가마꾼 12명 / 말몰이 소년 2명(12월 5일 공주에서 한 명이 합류하여 3명이 된다) / 하인 1명 / 총계: 사람 18명, 말2마리, 보교 3대, 트렁크 5개, 손가방 3개, 사진기, 총기 상자, 돈 바구니

1884년 11월 1일 한양을 떠나 삼남대로 남행길을 시작하다

오전 8시 58분에 집을 나섰다. 날씨는 맑고 깨끗했다. 9시 58분에 밥전거리에 도착했다. 단천 부사, 두 문의 파운드 포, 기타 행렬의 바로 뒤편에서 우리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10시 5분에 출발했다. 동작진 나루의 북쪽 강둑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1/6마일 위치다. 모래사장이 2마일 넓이로 펼쳐졌다.

10시 33분 동작진 강둑에 도착해서 10시 40분에 나루를 건넜다. 우리는 계곡의 서쪽을 따라 관악으로 향했다. 11시 9분에 승방돌이라는 50여 채의 집이 모여 있는 바위투성이 지역의 맨 끝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부사의 행렬을 보았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푸른 구슬이 달린 줄과 온갖 종류의 끈으로 장식된 붉은 색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방울을 그리고 등 뒤로 푸른색 곤봉을 차고 있었다. 그 뒤로 부사와 두 명의 장수, 그리고 몇몇 하인들이 따라왔다. 그 다음에는 청동으로 장식된 외투를 입고 커다란 공작 깃털을 꽂은 작은 모자를 쓴 두 명의 동행이 말에 탄 채 뒤를 따랐고, 나머지 부하들은 발로 뛰며 주변에서 이들을 따라갔다. 승방돌은 서울에서 20리, 과천에서 10리 떨어진 곳이다.

11시 17분에 출발했다. 동쪽으로 향했다가 다음은 남쪽으로 그리고 남동남 방향으로 틀었다. 11시 48분 평지의 가장자리에 도달했고, 12시 29분에 우리는 과천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300여 채에 가까운 집이 있었다. 과천은 사람들로 가득한 분주한 곳이다. 고을 북쪽 끝에 아주 예쁜 단풍나무 숲이 있고 커다란 주막과 쇠고기, 면직물이 많았다. 내가 본 가장 크고 바쁜 도시 중 하나였다.

12시 58분, 15분쯤 되돌아가 낮은 산등성이를 넘어 관악 계곡으로 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른 계곡으로 돌아 내려갔다. 읍내 위쪽의 과천 계곡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통나무 위로 타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1시 25분 갈뫼(갈산)에서 쉬었다. 이 근처, 뒤편과 서쪽으로 많은 마을이 있다. 그리고 평지 전체는 사람들로 잘 채워져 있다. 2시 10분에 우리는 수원에서 20리 거리인 사근 내에 도착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근접해 있는 길은 안양장을 거쳐 큰 도로 쪽으로 나 있다. 안양장은 내가 지닌 지도(대동여지도) 상에 거의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 같다.

3시 48분에 출발, 반 마일을 더 가면 낮은 지대를 따라 수원의 배수구역을 지나가게 된다. 4시 20분 들판에는 벼가 쌓여 있고, 타작을 하고, 돗자리를 짜고, 묶어서 나르느라 사람들이 바쁘다. 5시 25분 수원의 영문(營門)을 마주보며 나는 그 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길가의 숙박업소들은 더럽고 추울지라도 편안하고 조용할 것 같은 느낌이다. 오후 5시 29분, 수원남문(장안문) 밖에서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넓고 깨끗하다. 우리는 달빛을 받으며 다소 울퉁불퉁한 길을 속도를 높여 갔다. 그리고 6시 20분에 태황교에 도착했다.

낮 동안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농사짓는 모습이었다. 비탈진 논둑에서 벼 베기를 하고, 소들이 이것을 집으로 날랐다. 시내에는 집 안까지 벼가 쌓였고 수확 후의 뒷정리가 진행되고 있다. 도로 곳곳은 나뭇가지와 잎으로 막혀 치워야 할 공간들이 즐비했으며, 타작도 원시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곡물에는 얼마나 많은 먼지가 쌓여 있던지, 말과 소는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덮고 있었다.

어디에나 많은 음식이 있다. 무명천, 채소, 장독 등 많은 물건들을 짊어지고 북쪽으로 가는 행렬이 이어진다. 조선에는 말이 많은데도, 소나 말보다 더 많은 남자들(보부상)이 이것을 나르고 있다. 서울 근교의 뚝섬을 건널 때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의 화장실이 얼마나 깊던지, 용변을 본 후 이것들이 바닥까지 도달하려면 1년이 걸린다고 말할 정도이다. 첫날 나는 무척 피곤했고 잠을 매우 잘 잤다.

11월 4일 공주 사람들, 화륜선으로 온 사람을 횃불 들고 맞이하다

아침 8시 17분에 출발했다. 주막은 크고 비교적 깨끗했다. 주변에 거위들이 있다. 9시 8분에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이 지점까지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런 다음 구릉 지역으로 들어왔다. 바위가 몹시 드물었고 노랗고 거친 모래 언덕의 아래쪽으로 화강암 바위가 가끔 눈에 띄는 정도였다. 이곳은 남쪽으로 작은 계곡이 흘렀다. 구릉이 많고 주변은 거의 산악 지역이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있었는데, 대개 남쪽으로 향했다. 짐꾼들이 동물과 쌀, 담뱃대 그리고 무언가가 든 상자(아마도 담배?)를 운반했다. 9시 50분에 김제역마을에 이르렀고 9시 56분에 남쪽 끝에서 휴식을 취했다.

5시 39분 금강에 도착했다. 우리는 커다랗고 편평한 배를 타고 물을 건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산성(공주 공산성)의 북문을 향해 모래사장을 서서히 헤쳐 갔다. 북문 바깥에는 오두막이 몇 채 있었다. 이 무렵은 날이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북문 안쪽에 멈춰 서서 횃불을 구하려는 소동이 있었지만 곧 출발했다. 우리는 왼편으로 가파른 돌길을 올라 정상에 도착했다. 성의 남문을 지나자 경사가 심하고 험한 내리막길을 내려가 좋은 길을 지나 왼편으로 가서 시내로 들어섰다.

거리에는 커다란 새 집이 많았다. 거리에서 우리는 수많은 횃불을 든 시끄러운 한 떼의 무리와 갑자기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양인(洋人)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충청) 감영의 오른편에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확실히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관아였다. 방에는 깔끔한 돗자리가 바닥에 깔렸고 병풍을 드리웠다. 그 외에는 소나무 촛대가 가구의 전부였다. 영문에 오후 6시 35분이 되어 도착했다.

나는 오늘 어느 집 앞에서 원뿔 모양으로 짚을 얽은 모자를 쓴 사람이 밥그릇을 뒤적이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재미있었다. “여기 화륜선으로 온 사람이 있다!” 나는 광정역에서 하인을 시켜 민 참판의 편지를 감사에게 보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돌아왔는데 길을 5마일이나 벗어났다. 나는 무척 피곤하고 외롭다. 이 괴상하고 가련한 이교도들 사이에서 느끼는 완전한 무력감으로 내게 때때로 찾아오는 이 이상한 감정을 그들에게 잘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아마도 안성을 제외하고).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단 한 명의 외국인도 이렇게 이교도들 사이에 스스로를 내던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모든 세계를 통틀어 사람은 사람이고 이곳에서 느끼는 나의 무력감이 곧 내 안전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장이 전양묵을 불러 내가 무엇을 먹는지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내가 앞서 보냈던 편지에 대한 감사의 답장을 가져왔다. 그는 아직 내게 음식을 가져오지 않은 아전이 몹시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는 감사에게 보낸 민영익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면 돈을 주라고 감사에게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비장은 이곳에 돈이 없다고 말했다. 돈을 요구하거나 관련된 말을 하는 것은 전양묵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일은 내가 직접 해결할 것이다. 아주 늦게, 9시 20분이 되어서야 식사가 왔다.

11월 10일 사수강(만경강)을 건너 전주에 들어서서 전라감영을 방문하다

9시 23분에 길을 나섰고, 사수강에 9시 44분에 도착했다. 물살이 거셌고 가장 깊은 곳이 4피트였다. 우리는 남쪽 둑에서 출발했다. 길은 대체로 남쪽이었다. 평야에는 방앗간과 많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동쪽과 북쪽으로 개간되지 않은 거대한 평지가 펼쳐졌다. 10시 45분. 우리 앞으로 전주로 들어가는 입구가 펼쳐졌다. 11시 8분에 우리는 전주 방향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급류에 이르렀다. 아마도 사수강의 본류일 것이다. 가리내 마을 주막을 지났다. 남쪽, 동쪽, 서쪽 근처는 산이었고 눈이 덮여 황량하고 헐벗어 보였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대략 3,000~3,500피트 정도였다. 지난 15분 동안 나는 치장이 잘 된 돌들(선정비)을 꽤 많이 봤고, 철제 명판(철제 선정비)은 더 많이 봤다. 산비탈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자랐다. 나무로 지어진 집 또한 더 많이 보였다.

11시 50분에 우리는 멋진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숲(전주 숲정이)에 도착한 다음 추슬한 마을을 지나갔다. 이곳 너머에는 자갈이 많고 거의 경작이 되지 않은 평지가 있었다. 몇 개의 누각이 있었고 오래된 비석이 많았다. 전주의 성곽은 왼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진흙투성이의 길고 좁은 거리에 들어섰다. 길은 대부분 초라한 헛간이 늘어선 거리를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으로 휘어지더니 12시 10분에 전주의 남문으로 이어졌다. 이 도시는 성벽 안에 2,000여 채의 집이 있었다. 고을 전체는 7,000~8,000여 채에 달했다. 거리는 비좁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집들은 끔찍해 보였고 상점은 드물고 초라했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가 동쪽 끝의 커다랗고 추레한 방이 있는 허름한 관아로 꺾어져 들어갔다. 시끌벅적하고 저질스런 무리가 자신들이 감영에서 왔다면서 내 방으로 들어오겠다고 우겼다. 많은 혼란이 있었고 나는 몹시 짜증이 났다. 전라감사를 방문할 준비를 마쳤을 때 집사가 전갈을 가져왔다. 감사가 안방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감영으로 나설 때 내게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판관 대리 같은 이가 불렀다. 네, 아니오를 말하는 데 전혀 주저할 것 같지 않은 냉정한 표정의 조사관 같아 보였다. 그의 임무는 나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왕과 참판 따위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그에게 겁을 줬다.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이후 나는 묵과 함께 가마를 타고 감사를 만나러 갔다. 관아의 두 군데 입구 주변에 본래의 의장을 갖춘 수백 명의 군졸들이 있었다. 첫 번째 문 안쪽에 내 가마가 내려졌다. 묵과 나는 위압적인 안쪽 문을 향해 돌이 깔린 진입 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길나장이들이 양쪽으로 줄을 섰다. 대문이 한가운데 열어 젖혀졌다. 내 앞에 거대한 관아가 있었다. 매끈한 기와를 올린 높은 지붕과 기둥은 높고 당당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본관에는 화려하게 옷을 입은 하급 관리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놀라운 풍광을 만들었다. 동양의 오만스러움과 전제 권력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깊은 산속 종족의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맨 위 계단에서 모자를 벗고 화려한 예복을 치렁치렁 걸친 회색 수염의 나이 든 관리에게서 정중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그는 손을 흔들어 나를 오른쪽으로 안내했다. 두 개의 방 안쪽에 감사가 서 있었다. 크고 검은 수염의 남자는 찬란하게 흘러내리는 비단옷을 입었다. 모자에는 뒤쪽으로 길고 빨간 술을 매달았고 앞쪽에는 공작 깃털을 한 다발 꽂아 장식했다. 나는 바깥문에서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전라 감사의 태도는 절제된 표정으로 비판적이고 신중했다. 나는 의례적인 면담을 예상했지만 그의 태도가 좀 더 따뜻해지기를 바랐다. 대화는 동양적 안부 인사와 예절을 갖춘 답변으로 시작됐다. 나는 왜, 어떻게 조선에 왔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런 다음 지금은 버려져 있지만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내가 봤던 땅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화는 서양 문명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감사는 조선은 수백 년 동안 쌀을 자족해 왔다고 이야기했다(쌀이 풍부하다는 점은 나도 인정했다). 그런 생각을 바꿔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렇게 했다. 내가 무역의 장점에 관해 설명하자 감사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지금까지 조선은 그런 일들이 가능한지 몰랐고 서서히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이번에 내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는다. 모든 대화는 언제나처럼 관아의 다른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앞에서 이뤄졌고, 그들은 감사 앞에서 내 말에 동의하며 미소를 짓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대화에 앞서 나는 내 서류를 보여주고 통행증 등을 설명했다. 이때 감사는 내가 나주에 가는 것을 극구 말렸다. 나는 이미 그곳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조선 증기선 회사의 이익을 위해 강(江)이나 만(灣)을 살펴보고 싶다는 이유도 설명했다. 대화의 후반부는 미국과 다른 외국에 관한 이야기였다. 감사는 이미 미국에 관해 무언가 좋은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크기, 상품, 유럽과의 무역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감사에게 전주를 둘러보겠다고 요청했고 마지못한 답변을 받았다. 그는 내가 고을에 나가볼 수 있게 집사를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면 사람들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카메라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그는 몇 장의 사진을 꺼내어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군함 앨러트호와 앨러트호에 승선했던 하웰이 찍은 다른 사진들이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독일인을 통해 그 사진들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날의 방문은 행복한 모습으로 끝났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 같았다.

전라감영을 나선 후 나는 비교적 넓고 편안한 집으로 안내됐다. 서울에서 본 중에서도 최고였다. 그리고 수일과 내 소지품들도 그곳에 있었다. 내 방문 동안 감사의 명령으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저녁밥은 대단했다. 나는 감사가 자신을 위해 민영익에게 좋은 말을 전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만난 다른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첨꾼들! 감영 방문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잘 묘사를 할 수만 있다면 매우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 것 같다. 아! 하지만 이곳은 어둠의 땅이다! 서울을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심지어 문명화된 곳으로 보일 지경이다!

11월 22일 팔만대장경을 보기 위해 해인사를 찾아가다 - 해인사 솥에서 배를 탄다는 말이 허풍이라 실망했지만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다 7시에 일어났다. 잠을 잘 잤다. 8시 3분에 출발했다. 10시 10분에 8 내지 9개의 마을(작은 규모)이 모여 있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전체 합쳐서 200여 채의 집이 흩어져 있었다. 어사 한 명과 합천의 군수, 그리고 다른 관리가 해인사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5시에 절에 도착했다. 나는 절의 외관에 상당히 실망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절 치고는 꽤 컸다. 맞다. 그렇지만 오래되고 추레해서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왼쪽의 어느 건물로 안내되었고 사찰의 중앙 마당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내 기대와는 달리(다른 곳에서 내가 본 승려들은 나를 보고 그렇게 흥분하지는 않았다), 이곳의 승려들은 나를 보기 위해 무리지어 몰려나왔다.

어떤 외국인도, 심지어 일본인이나 중국인조차도, 이전에 한 번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 승려들은 질서가 있고 조용했다. 그동안 주막에서 타인들과 가졌던 불편한 경험을 돌이켜보면, 이들 전체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회색 가사를 입고 말총 모자를 쓴 주지스님이 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내 방으로 와서 매우 친절하게 좋아하는 음식 따위를 물었다. 예의범절을 잘 지켰다. 예를 들어, 각자는 “저는 어디, 어디의 누구, 누구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고 고향은 어디입니까?”라고 말하면서 조선 스타일로 “서로 안면을 트길” 원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겪었던 불교 관련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그들이 내게 보여 준 친근함에 화답이 되었다.

나중에 두 번째 무리가 들어왔다. 다른 절에서 온 방문객들이었다. 그 역시 조선 스타일의 격식을 고집했다. 예를 들어, “긴 여정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답은 “네, 감사합니다. 무사했습니다.”, “인사를 합시다. 제 이름은 모모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만국의 남자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라는 식이었다. 그들은 내게 세상에 불교가 없는 나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승려들은 상 두 개를 들여왔다. 첫 번째는 세 가지 다른 떡과 홍시, 그리고 튀밥을 입힌 커다란 쌀떡이었다. 이런 모든 “떡”은 단순히 씨앗을 익혀서 집에서 만드는 팝콘 케이크처럼 서로 뭉친 것이었다. - 매우 좋았다. 다른 밥은 고기와 달걀이 없는 늘 보던 절밥이었다.

어사는 이곳에 홀로 있었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모든 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비밀스런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승려들, 사람들, 심지어 묵까지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를 어색하게 낮췄다. 이곳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아랫사람들, 하인 등이 있었다.

내가 차지한 방을 지키는 이는 무척 잘생기고 밝은 눈을 가진 18세 정도의 소년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승려가 되지 않으면 이른 나이에 죽을 운명이라는 예언을 해서 승려가 됐다고 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여전히 눈과 비가 오락가락했다. 이 조용한 수행 장소는 기분을 좋게 해 준다. 승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다른 곳에서 생활했던 경험으로 인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승려들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12월 8일 상주길에서 조선을 뒤집은 ‘갑신정변’ 소식을 듣다!

8시에 출발했다. 우리는 바로 상주로 가는 길을 택했다. 평야가 넓어지더니 계곡의 입구를 지나 상주를 향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8시 55분에 나원 주막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 마을이 하나 있고(80여 채의 집) 계곡 건너에 하나가 더 있었다. 1마일 전쯤에서 우리는 40피트 너비의 얕은 개울을 건넜다. 땅은 척박해 보였고 고르지 않았다.

오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11시에 낮은 개울가의 주막이 모여 있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40~50피트 너비로 동쪽을 향해 흐르는 개울이었다. 기압은 30.28, 온도는 화씨 38도(3℃)였다. 마지막 휴식을 취했던 곳에서부터 우리는 매우 낮은 고갯마루를 넘어 다른 골짜기로 들어갔다. 나는 계곡 바닥의 깊이에 충격을 받았다. 팔조령 이후로 전체 길을 따라 주목할 만한 높은 산을 보지 못했다. 오늘도 시야에 보이는 산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없었다. 노랗게 보이는 낮은 언덕은 무척 많았다. 골짜기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11시 50분에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서 서울에서 발생한 민태호와 조영하의 암살 소식(12월4일 일어난 갑신정변)을 들었다. 구릉지대를 넘어 11시 50분 이후에 평야에 들어섰다. 두 개의 커다란 마을 사이를 통과해서 12시 50분에 점심을 위해 덕통 주막에 도착했다. 나는 서울에서 들려온 소식에 몹시 흥분했다. 이는 서울에서 대구로 향하는 전령에게서 보교꾼이 전해들은 소식이었다. 그는 암살당한 사람 중 한 명인 조영하의 형제인 감사에게 가는 중이었다. 전해들은 소식은 모두 여섯 내지 일곱 명의 고위 관리 중에서 민태호, 조영하가 일본인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 참판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당연히 이 소식은 내게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이곳 내지에 들어와 지역 관리들의 호의에 의존한 상태에서 세부 사항을 알지 못하는 외로운 처지였다.

서울에서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두려움과 긴장감이 나를 무척 힘들게 한다. 물론 이런 시골에서 서울의 외국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해들을 방법은 없다. 조선인들은 오직 조선 사람들에 대해서만 궁금해 한다. 지금의 내 상황이 무척이나 옹색하다. 나는 서울에서 380리 떨어진 조선의 어느 외딴 지역에 던져져 있다. 이곳에는 눈이 내리고 있으며, 근방의 산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야 한다. 내게는 충주를 넘어서 갈 만한 충분한 돈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관아의 무뢰배들 사이로 들어가야만 한다. 외국인을 싫어하는 악마 같은 인간-선비-들이 나의 갈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조선인들이 싫어하는 일본인들보다도 더 낯선 존재이다. 나는 혼자이며 이 땅은 무정부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이곳은 문경 조령에서 30리, 충주에서 110리, 서울에서 380리 거리이다.

12월 11일 충주에서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다 - 아이고 죽겠다! 충주는 분주한 곳 같았지만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각형 성벽이 둘러싼 곳이었다. 내 생각에 동래 크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구릉지대의 동쪽 면에 있는 언덕에 기댄 형태였다. 묵이 말하기를 영문에서 곤장형이 진행되는 중이라고 했다. 이는 목사가 전혀 아프지 않다는 의미였다. 보교꾼들이 어제 4,000푼을 받았고 오늘 더 많이 요구했다. 지독한 인간들. 주막을 9시 32분에 출발했다.

3시 15분에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계곡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곳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지난 마지막 휴식 장소에서 묵은 지나가는 조선인 학생들 중 한 명을 알아봤다. 그는 일본 군사학교에 다녔던 사람이었다. 묵은 그를 멈춰 세우고 서울 일을 물어봤다. 그는 무척 서둘러 길을 가는 중이었고 대화를 그만두고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싶어 했다. 그는 홍 참판은 살해되었으며 김옥균과 박영효는 실종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싸움을 벌였고 일본인들은 서울을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묵에게 자신을 이곳에서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학생들이 관리들을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런 다음 일본인들이 그 일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학생은 분명 자신의 당파와 관련된 불상사를 이야기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일행이 몇 명의 관리를 죽였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중국 장군 원(위안 스카이)이 수도와 정부를 장악하고 일본인들과 친했던 조선인들을 찾고 있다고도 했다. 이는 묵에게(아마 수일에게도) 극심한 두려움을 심어 주었다.

4시 5분에 장해원에 도착했다. 300여 채 정도 아니면 그보다는 더 많은 집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곳 주막에 묵었다. 주인은 아무 멋진 나이 든 노인이었다. 그가 말하는 서울의 변란은 위에 서술한 나의 판단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 공사관은 불타서 무너졌고 민 참판은 돌에 맞았다. 왕은 중국인 진지로 갔고 생일잔치가 열리던 민 참판의 집에는 화재가 발생했다. 민 참판과 다른 조선인들이 먼저 집 밖으로 빠져나왔고 집 안에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남겨져 있었다 - 무척 엇갈리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이곳 주막에서 유쾌하고 행복했다. 노인은 친절하고 주막은 깨끗했다. 그의 공손함과 미소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음식은 무척 좋았다. 쇠고깃국을 무척 맛있게 먹었다. 그런 다음 묵이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나는 담배를 피웠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그 중간쯤에 나이 든 주인이 심각한 얼굴로 들어왔다. 즉시 묵과 수일이 무척 흥분한 얼굴을 했다. 나는 곧바로 무언가 문제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이 말하기를 마을 사람들이 와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당신은 집에 ‘왜놈’을 들였다! 우리는 이 밤중에 당신을 때려 주러 왔다. 그리고…!” 물론 친절한 노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서류를 보여 줬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통행증을 우두머리 관리인 동장에게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주인은 내가 민 참판에게서 받은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소를 얼굴 가득히 띠었다. 이곳 주변의 모든 지역이 민 판서 집 소유라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동장인 뚱뚱하고 선량해 보이는 농부를 데려왔는데, 그는 곧바로 만족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그와 주인 모두 내 불안을 덮어 주려고 애를 썼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요청했는데, 동장이 말하기를 자신이 직접 어디든 가겠다고 했다. 이를 나는 받아들였다. 그는 길을 따라 있는 모든 주막과 사람들을 알았다. 그리고 그곳 주민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행이 나를 도와주는 데 열성이었다. 민 씨네 일족에게 매우 충성스러웠다.

하지만 다음으로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쳤다. 수일의 말을 믿고 나는 충주에서 오직 5,000푼만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4,500푼이 있었다. 이걸로 서울까지 가기 위해서는 보교꾼들 절반을 굶겨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곳에서 10리 떨어진 음죽이나 60리 떨어진 이천 같은 고을에 가는 것이 내게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이곳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제물포의 일본 거주지가 화재로 모두 불탔다고 했다. 나는 지금 서울 성문으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좋은 소식이다. 강도들이 서울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못되게 군다고 했다. 사람들을 멈춰 세우고 두들겨 팬다고 했다. 오늘 밤 나는 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기도를 올리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12월 13일 고종이 파견한 호위부대를 만나 남한산성으로 피하다

8시 59분에 출발했다. 4리 정도를 가서 언덕을 넘은 후 내리막을 약간 내려갔다. 이천은 집들이 훌륭하고 사람들이 재물을 가진 번창한 곳이었다. 춥고 청명하고 쾌적했다. 12시 38분에 길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곳까지는 내내 좋았다. 우리는 북서쪽으로 뻗은 골짜기 안에 있었다. 수일이 길가에서 금릉위 박영효가 그저께 인천의 일본 거주지에서 수도로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시 16분 어느 마을에서 30분간 휴식을 취했다. 일부는 무기를 든 일꾼을 거느리고 두 대의 가마가 행렬을 이뤄 지나갔다. 수일이 말하기를 남쪽(충주)으로 향하는 대원군댁의 하급관리라고 했다.

1시 36분에 출발했다. 한 대의 가마를 지나쳤다. 약간 나아간 다음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내 가마가 내려지고 보교꾼이 겁에 질려 조용히 서 있었다. 수일이 다가오더니 말하기를 아마도 이제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가마를 탄 관리 한 명이 묵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곧이어 묵이 달려오더니 내 가마 앞에 주저앉아 말했다. “왕에게서 관리 한 명이 오고 있소.” 관리가 곧 나타나더니 가방에서 명판을 꺼내 보여 줬다. 왕에게서 위임을 받았다는 징표였다.

그가 말하길 주사 역시 앞서갔다고 했다. 푸트 장군 역시 무사하다고 했다. 제물포로 가서 이 상황에 대한 회의를 하고 서울로 막 돌아왔다고 했다. 박영효, 서(광범), 그리고 김(옥균)은 일본 공사와 함께 제물포로 가서 실종됐다고 했다. 그 관리는 서울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니 내게 광주의 산성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부상(부상은 가난한 사람, 행상, 일꾼 따위들이 모인 거대한 집단)과 병사를 부르겠다고 했다.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오후 10시 나는 광주에서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밥과 술은 실제로 정말 흡족했다. 서울의 변란에 관한 나머지 이야기를 관리에게서 마저 들었다.

12월 14일 청 군대가 지키는 시구문을 통과해 미 공사관으로 복귀하다 - 다양하고 멋진 경험으로 가득한, 또 걱정과 불안으로 보낸 900마일(1,448㎞)의 여정을 끝내다 9시에 일어났다. 어젯밤 새벽 2시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오늘 아침 검으로 무장한 2명의 무감과 2 명의 다른 하급 장교가 왕에게서 왔다. 그들은 6명의 병사와 함께 나를 서울로 데려오라는 명령서를 가지고 왔다. 산성병사들, (보)부상 남자들 그리고 서울 무감과 부올(Puol) - 모두 4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거대한 호위를 받으며 11시 55분에 출발했다. 그들은 (판독불가), 검, 화승청 따위로 무장했다. 송파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왕의 호위병과 선전관을 만났다.

4시 35분 서울에 가까워져서 노란 태양과 함께 눈이 내렸다. 우리는 밤이 될 무렵 시구문에 이르렀고, 문이 닫히려고 했다. 관리들이 끼어들었지만 맞닥뜨리고 나니 중국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검을 꺼내어 들고 나와 병사들을 막아섰다. 약간의 혼란이 뒤따랐다. 내가 나서서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묵은 일본어를 하기 두려워했다). 그리고 한자로 우리가 출입이 허락된다고 쓰여 있는 내 통행증을 보여 줬다. 우리는 어두운 거리로 서서히 들어갔다. 길고 긴 걸음이었다. 6시 20분 무렵에 공사관에 도착했다. 무척 조용해서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스쿠더가 따듯하게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푸트 부인과 장군이 친절하고 따스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선전관과 묵, 수일과 통장을 공사에게 소개했다. 궁중 내시 한 명이 왕에 의해 이곳에 나와 있었다. 10,000푼을 받았다. 나는 밤을 지내기에 충분한 돈을 보교꾼들에게 주고 나머지를 수일과 묵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 일행을 해산했다. 가벼운 식사를 하고 푸트 장군, 부인과 함께 밤을 보냈다. 나는 기분이 몹시 불안정하고 이상했다. 서울에는 음식이 풍부했고 모든 것이 조용했다. 공사는 조선의 변란에 관해 아무런 보고를 보내지 않았다.

11시에 내 방으로 갔다.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리며 나는 43일(44일) 만에 처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지금 나는 안전하다. 하지만 조선에 많은 상처를 준 사건들과 관련해 이렇게 해서 나의 두 번째 조선 내륙 여행은 끝이 났다. 다양하고 멋진 경험으로 가득한, 또 걱정과 불안으로 보낸 900마일의 여정이었다.

그동안 나는 세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부를 조선인으로서 살았다(기독교인의 마음으로). 그토록 많이, 그토록 구석구석, 내가 보았던 조선은 과거에도 이렇게 조명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이 장면들이 되풀이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주님, 저를 더 지켜 주시고 진실하고 쓸모 있는 종이 되게 하소서. 세속적인 명예나 이름 같은 헛된 거품에 유혹당하지 않게 하소서. 저는 진정한 행복이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신앙을 지킬 수 있다면, 주 예수는 저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주시리라 믿습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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